먼저 제가 가지고 있는 한국의『국사』교과서들에 나오는 내물이사금에 대한 설명을 인용하겠습니다.
“신라는 4세기 후반 내물왕 때에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고대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이때 신라는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고, 왕의 칭호도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와 가야, 왜의 잦은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내물왕은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도움으로 백제군과 왜군을 물리쳤으나, 이로 인해 신라는 한동안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성장하였다.”
- 한철호 외,『중학교 역사 ①』, 48쪽
( → 『중학교 역사 ①』[한철호 외 지음, ‘좋은책 신사고’ 펴냄, 서기 2014년]에서 인용)
“4세기 후반 내물왕은 밖으로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여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장악하였고, 안으로 왕권을 크게 강화하여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왕의 칭호를 바꾸었으며, 김씨에 의한 왕위 세습권을 확립하였다. 400년 전후에 가야, 왜의 연합 세력이 공격해 오자,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도움을 받아 이를 물리쳤다. 이로 인해 신라는 한동안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다.”
- 한철호 외,『고등학교 한국사』, 24쪽
( → 『고등학교 한국사』[한철호 외 지음, ‘(주)미래엔[(구) 대한교과서]’ 펴냄, 서기 2013년]에서 인용)
이 교과서들의 설명대로라면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한 때는 서기 “4세기 후반”인 “내물왕” 때이며, 내물왕은 “밖으로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여” “진한 지역”을 정복했습니다. 과연 그런지 역사 기록들을 바탕으로 짚어봅시다.
먼저『삼국사기』「신라본기」<내물이사금> 조를 읽어봅시다. 만약 내물왕, 아니 내물이사금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여 삼한백제의 일부분인 진한(경상북도)을 정복했다면 그 일이『삼국사기』에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은『삼국사기』에 나오는 내물이사금의 말과 행동입니다(정치나 군사나 외교와 관계없는 기사는 뺐습니다).
- 내물이사금 2년 :
봄에 사자를 보내어 늙은 홀아비와 홀어미 그리고 어버이를 여읜 아이와 자식 없는 노인을 위문하고, 각각 곡식 3곡(斛. 10말. 곡식의 양을 헤아리는 단위/곡식을 되는 그릇 - 옮긴이)을 내려주고, 효성과 우애로 특이한 행실이 있는 사람에게는 관직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 내물이사금 3년 : 봄 2월에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 내물이사금 9년 : 여름 4월에 왜병(임나가야의 군사 - 옮긴이)이 크게 쳐들어오니, 왕은 이 말을 듣고 대적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풀로 만든 허수아비 수천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병기를 들려서 토함산 밑에 벌여 세우고, 용사 1천명을 부현(斧峴) 동쪽 언덕에 숨겨두었다. 왜인은 자기들의 수가 많음을 믿고 바로 나오므로 복병이 일어나서 불의에 치니, 왜인이 크게 패해 달아나는지라 추격해서 이를 쳐 거의 다 죽였다.
- 내물이사금 11년 : 봄 3월에 백제 사람이 예물을 가져왔다.
- 내물이사금 13년 : 봄에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좋은 말 두 필을 바쳤다.
- 내물이사금 17년 :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유랑민이 많이 발생하므로, 사자를 보내어 창고를 열고 그들을 구제했다.
- 내물이사금 18년 : 백제의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백 명의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므로,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6부에 흩어져 살게 했다.
백제왕이 글을 보내어 말했다. “우리 두 나라가 사이좋게 친해서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사온데, 이제 대왕께서 우리나라 도망자를 받아들이시니, 이것은 화친하는 뜻에 심히 어긋나옵기로 (한성백제가 - 옮긴이) 대왕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독산성 성주와 그 수하들을 - 옮긴이) 돌려주기를 청합니다.”
왕은 답해서 말했다. “백성들이란 일정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이 본디 그 하는 일입니다. 대왕께서는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한 것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과인을 책망하심이 어찌 그토록 심하십니까?”
백제왕은 이 말을 듣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 내물이사금 26년 : (내물이사금은 - 옮긴이) 위두(衛頭)를 보내어 부진(苻秦. 5호 16국 시대의 유목민 왕조인 전진[前秦]을 일컫는 말. 전진을 세운 사람이 ‘저’족인 부견이었기 때문에, ‘부씨 집안이 세운 진나라’라고 해서 이렇게도 불렀다 - 옮긴이)에 들어가 토산물을 바치니, 부견(苻堅)이 위두에게 물었다.
“그대의 말에 해동(海東)의 사정이 옛날과 다르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위두는 대답했다.
“중국에서 시대가 바뀌고 명호(名號. 원래는 ‘이름과 호’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나라의 이름과 연호’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가 바뀐 것과 같은 것이오니, 지금이 어찌 옛날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 내물이사금 37년 :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니,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기 때문에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 내물이사금 38년 : 여름 5월에 왜인이 와서 금성(서라벌/월성. 오늘날의 경주시 - 옮긴이)을 포위하고 닷새 동안이나 풀어주지 않으니,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했다. 왕은 말했다. “이제 적(왜인. 실제로는 임나가야인과 변한인 - 옮긴이)은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서 사지(死地. 죽을[死] 땅[地] →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는 위험한 곳 - 옮긴이)에 놓여 있으니, 그 날랜 기세를 감당할 수 없다.”
이에 성문을 닫으니, 적은 공도 이루지 못하고 물러갔다. 왕은 먼저 용맹스러운 기병 2백 명을 보내어 그들이 돌아갈 길을 막고, 또 보병 1천 명을 보내어 독산(獨山. 오늘날의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에 있는 산 - 옮긴이)까지 추격하여 좌우에서 들이쳐서 이를 크게 쳐부쉈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 내물이사금 40년 : 가을 8월에 말갈(고구려군? 아니면 고구려의 유랑민? - 옮긴이)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군사를 내어 그들을 실직(悉直)의 언덕에서 크게 깨뜨렸다.
- 내물이사금 42년 : 가을 7월에 북쪽 변경 하슬라(何瑟羅)는 가물고 누리(메뚜기 떼 - 옮긴이)의 해가 있어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죄수를 특사하고, 1년간의 지세(땅에 매기는 세금 - 옮긴이)와 호세(戶稅. 살림살이를 하는 집[戶]을 기준삼아 집집마다 거두던 세금 - 옮긴이)를 면제해 주었다.
- 내물이사금 46년 : 가을 7월에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이 돌아왔다.
- 내물이사금 47년 : 봄 2월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
읽어보았다면 아시겠지만, “진한”이나 작은 나라의 이름은 하나도 나오지 않고, 왕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거나 점령했다는 기사도 나오지 않습니다.『삼국사기』에는 빠진 사실이『삼국유사』에는 나올 수 있지 않냐고요? 그렇다면 이번에는『삼국유사』를 살펴봅시다.
“제 17대 나밀왕(내물왕 - 옮긴이)이 왕위에 오른 지 36년인 경인(서기 390년)에 왜왕(倭王)이 사신을 보내왔다. ‘우리 임금님이 대왕의 신성함을 듣고 신(臣)들을 시켜 백제의 죄를 대왕에게 아뢰오니, 바라건대 대왕은 왕자 한 분을 보내시어 우리 임금님에게 성심(誠心. 정성스러운[誠] 마음[心] - 옮긴이)을 표하소서.’ 이에 왕은 셋째아들 미해(美海) - 또는 미토희(未吐喜)라고도 한다 -를 왜국(倭國)에 보내니 미해의 나이 열 살 때였다. (왕은 미해가 - 옮긴이) 언사와 행동거지가 아직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내신(內臣. 대궐 안[內]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臣] - 옮긴이) 박사람(朴/沙 + 女/覽)을 부사(副使)로 삼아 함께 보내었다. 왜왕은 이들을 억류해두고 30년 동안이나 돌려보내지 않았다.”
-『삼국유사』「기이」<내물왕 김제상> 조
『삼국유사』「기이」에서도 내물이사금이 “진한”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점령했다는 기사는 찾을 수 없습니다.
혹시나 해서 이번에는 중국 역사서의「동이전」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서기 4세기 중반에 어떤 일이 있었나를 알아봐야 하기 때문에, 그 시기를 다룬 책의「동이전」을 읽어보기로 합니다.
-『진서(晉書)』「진한전」(서기 3세기 중반부터 서기 5세기 초까지의 상황을 다룸) :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 처음에는 6국이었는데 후에 12국으로 나뉘었고 변진도 또한 12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합 4내지 5만 호고, 각각 거수라고 하는 통솔자가 있으며 모두 진한에 소속된다.”
-『양서(梁書)』「신라전」(서기 6세기의 상황을 다룸) :
“진한은 처음에는 6개의 나라였으나, 후에 12개의 나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신라도 그 중의 하나다.”
여기서도 내물이사금이 진한을 정복하거나 통합하였다는 말은 안 나옵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6개이던 작은 나라들이 12개로 나뉘었다는 말이 나와 진한 여러 나라가 서로를 합치면서 커진 게 아니라 오히려 작아지고 힘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중국 기록인『통전』을 살펴보죠. 그 책에는 서기 381년 신라왕이 북중국의 유목민 왕조인 전진의 황제인 부견에게 사신을 보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신라(계림국) 사신의 이름은 ‘위두(衛頭)’입니다. 이 때 부견은 “해동(海東)의 사정이 옛날과 같지 않다니 어찌된 일인가?”하고 묻고, 위두는 “시대가 바뀌면 명호(名號)도 바뀌는데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죠.
여기서 위두가 강조한 것은 ‘시대가 바뀐 것’과 ‘나라의 이름과 연호가 바뀐 것’, 그러니까 옛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열린 것이지, ‘신라가 여러 나라를 정복/점령한 것’이 아닙니다. 즉 신라의 진한시대가 끝나고 나라 이름이 계림국으로 바뀌고 새 지배자(흉노계 선비족인 모씨족)가 나타났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해동의 사정이 옛날과 같지 않다.’는 말의 참뜻이죠.
만약 계림국이 서기 381년 이전에 진한 여러 나라를 정복/점령해서 땅을 넓혔다면 계림국의 신하이자 사신인 위두는 자기나라 왕의 훌륭함을 자랑하고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부견에게 그 사실을 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은 안 나옵니다. 그 사실도 내물이사금이 진한을 정복하거나 계림국의 땅을 넓혔다거나 신라를 ‘참된 고대국가’로 만들었다는 통설에 의문을 품을 근거가 됩니다.
그러니까『통전』의 기사를 보아도 내물이사금(모루한)은 정복군주가 아니라 ‘새 시대를 연 사람’이나 ‘나라를 바꾼 사람’임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끝으로『일본서기』의 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일본서기』에는 내물이사금이 나옵니다. 단, ‘내물이사금’이라는 시호가 아니라 서기 4~5세기에 삼한백제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이 나옵니다. 한번 기사 원문을 읽어봅시다.
“겨울 10월 기해삭(己亥朔) … 화이진(和珥津)에서 출발하였다. 때에 풍신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이 파도를 일으켜, 바닷속의 큰 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도왔다.
바람은 순풍이 불고, 돛단배는 파도에 따라갔다. 노를 쓸 필요 없이 곧 신라(新羅)에 이르렀다. 그때 배에 따른 파도가 멀리 나라(신라. 실제로는 계림국 - 옮긴이)안에까지 미쳤다. … 신라왕은 벌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모아서, ‘신라가 세워진 이래, 아직 바닷물이 나라 안에까지 올라온 일을 듣지 못하였다.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말하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해에 빛나고 북과 피리 소리가 산천에 울렸다. 신라왕은 멀리 바라보고, 생각 밖의 군사들이 자기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드나 라고 생각하였다. 두려워 싸울 마음을 잃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다. 일본(日本)이라 한다. 또한 성왕(聖王)이 있다. 천황(天皇)이라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 신[神]이 보낸 군사[兵]/신의 가호를 받는 군사. 적과 맞서 절대지지 않는 강한 군사를 일컫는 말 - 옮긴이)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들어 방비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하고 백기를 들어 항복하였다.
(신라 왕은 - 옮긴이) 흰 줄을 목에 감고 자신을 포박(捕縛 잡아서[捕] 묶음[縛] - 옮긴이)하였다. 지도와 호적을 바치고, 왕선(王船. 임금[王]이 탄 배[船] - 옮긴이) 앞에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지금부터 길이 건곤과 같이, 엎디어 말을 키우는 일을 하겠습니다. … 선사(船使)를 끊이지 않고, 춘추로 말의 빗 및 말의 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 바다가 멀지만 해마다 남녀의 손으로 만든 것을 바치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쪽에 나오는 해가 서쪽에서 나오지 않는 한, 또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가 거꾸로 흐르고, 내의 돌이 하늘에 올라가 별로 되는 때를 빼고는 춘추의 조공을 빼거나, 태만하여 빗과 채찍을 바치지 아니하면, 천신지기(天神地祇. 하늘의 신[天神]과 땅의 신령[地祇] - 옮긴이)와 같이 죄를 주옵소서.’하고 말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신라왕을 죽입시다.’하고 말하였다. 이에 황후가, ‘처음에 신의 가르침에 따라 장차 금은의 나라를 얻으려고 하였다. 또 삼군(三軍. 군대의 좌익/중군/우익을 통틀어 일컫는 말. 모든 군사 - 옮긴이)에 호령하여 스스로 복종하는 이를 죽이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이미 재보의 나라를 얻었다. 또 사람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하고 말하고, 그 결박을 풀어 말 키우는 일을 맡겼다.
(황후는 - 옮긴이) 드디어 그 나라 안에 들어가, 중보(重寶. 귀중[重]한 보배[寶] - 옮긴이)가 든 곳간을 봉하고, 지도와 호적 문서를 거두었다. 황후가 짚고 있던 창을 신라왕 (궁전의 - 옮긴이) 문에 세우고, 후세의 표로 하였다. 그 창이 지금도 신라왕 (궁전의 - 옮긴이) 문에 서 있다.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 서기 5세기 사람으로, 내물이사금의 아들인 미사흔 - 옮긴이)를 인질로 삼아 금, 은, 채색(彩色. 여러 가지 고운 빛깔. 여기서는 그런 빛깔을 지닌 물건들 - 옮긴이) 및 능(綾. 무늬가 있는 비단 - 옮긴이), 라(羅. 명주실로 바탕을 조금 거칠게 짠 비단 - 옮긴이), 견(명주실로 무늬 없이 짠 피륙 - 옮긴이)을 가지고, 배 80척에 실어, 관군에 따라가게 하였다. 때문에 신라왕은 항상 배 80척에 실을 만큼의 조공을 일본국에 바친다. 이것이 그 연유다.
이에 고구려, 백제 두 나라의 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가만히 그 군세를 엿보게 하였다. 도저히 (일본을 - 옮긴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營外. 병영[營]의 밖[外]. - 옮긴이)에 와서, 머리를 땅에 대고 “이제부터 길이 서번(西蕃. 서쪽의 오랑캐. 고구려와 백제가 일본열도의 서북쪽에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썼다 - 옮긴이)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을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다. 황후는 신라에서 돌아왔다.”
-『일본서기』권 제 9「신공황후」기(중애천황 9년. 서기 173년)
“말도 안 된다. 모욕이야!”하고 분노하기 전에, 선학의 분석과 설명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김 상(일도안사) 님은 이 기록을 이렇게 풀이하십니다.
(인용 시작)
일본 사람으로 이 내용을 모른다면 한마디로 “간첩”이다. 오랫동안 일본 국사교과서에 그림과 함께 실려 있었던 내용이다. 우리(한국 - 옮긴이) 학자들은, 이 기록들은 모두 말도 안 되는 허위 기록으로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모순점들을 든다.
(1)‘일본’이나 ‘천황’이라는 명칭은 7세기 말 ~ 8세기 초에 일본서기가 만들어질 때 처음 쓰인 것이다. 고고학적이건 문헌사학이건 그 전에 “일본”이나 “천황”이란 단어(낱말 - 옮긴이)가 나온 적이 없다. 그 전에는 왜국이고 왜왕이었다.
(2) 1~2세기의 신라왕과 5세기의 신라왕자가 함께 등장한다. 이런 시공을 넘나드는 만화 같은 일은 이제 무협소설에서도 안 나온다.
(3) 호적을 바쳤다고 하는데, 그 당시 신라가 호적 정리가 되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없는 것을 어떻게 바치는가? 참고로 통일신라시대에는 확실히 되어 있었다.
(4) 고구려나 백제가 왜국에 조공했다는 기록은 동양사의 어느 문헌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도의 설명으로 1억이 넘는 일본인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우선 위의 기록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서기 초기기록에 등장하는 人名은 믿을 것이 못되며, 일본서기를 쓸 때 상당 수 후대의 인물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록들은 전혀 근거 없는 조작이라고 부르기에는 우리의 삼국사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기사가 하나 있다.
아달라이사금 二十年 (A.D 173) 夏 五月, 倭 女王 卑彌乎 遣使來聘
즉, 서기 173년에 왜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왜여왕 비미호는 삼국지 왜인전에 나오는 인물로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함을 보여준다. 삼국지 왜인전은 왜국에 본래 남왕(男王. 남성인 임금 - 옮긴이)이 있어 70~80년 간 다스리다가 2세기 후반 여자세력에 의한 정변이 일어나 여왕이 집권하였는데, 그 정권교체기에 7~8년간 내란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여왕의 이름을 卑彌乎로 기록하고(적고 - 옮긴이) 있다.
삼국사기가 173년에 비미호를 “여왕”이라고 호칭한(부른 - 옮긴이) 것은, 그 해 적어도 비미호가 어떤 형태든 왕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서기는 중애 9년에 내란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인 신공 1년에 신공이 내란을 진압하고 왕이 된 것처럼 쓰여져, 내란은 단 2년밖에 없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칠지도라는 1차 사료가 이 이유를 설명해준다. 신공기는 52년에 백제에서 칠지도를 받았다고 하는데, 칠지도의 태화 4년을 魏의 태화 4년인 서기 230년으로 보면, 신공 1년은 174년이 아니라 179년이 된다. 즉, 5~6년의 내란기가 생략되어 실제 내란(내전 - 옮긴이)은 삼국지의 기록대로 7~8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삼국지 왜인전이 기본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중애의 마지막 해인 중애 9년은 서기 173년으로써 신공(서기 8세기의 일본인이 비미호에게 붙인 시호. 신공[神功]은 ‘신령의 공덕’이라는 뜻이지 사람의 이름이나 성이 아니다 - 옮긴이)이 정변을 일으켜 중애를 죽이고 왕이 된 해다.
일본서기는 당시에 신공황후가 내란을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을 보여준다. 내란이 금방 끝나지 않고 장기간 계속되었을 정도로 초창기 신공세력은 대단히 미미하였다. 중애를 죽이고 정권을 잡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오히려 상황이 불리해져 정변을 일으킨 쪽이 다 죽게 생겼던 것이다. 사실 내란이 끝난 것도 진압해서라기보다는 타협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란이 끝나고 신공은 자신이 죽인 중애를 장사지내 준다. 야마도의 명목상의 왕권은 신공 측이 맡고, 실제 행정은 기존의 임나가야 세력이 계속하여 담당했을 것이다. 막 정변을 일으킨 173년에 이런 판국인데 어떻게 신라를 정벌하겠는가? 방어할 군사도 없는데 무슨 원정인가? 신공에게 급한 것은 자신들을 도와줄 세력이다. 여러분이 신공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택하겠는가?
원래 야마도는 1세기말에 백제의 영향하에 들어갔던 임나가야 세력이 세운 나라이다. 임나가야의 세력권은 한반도 동남부에서 대마도를 거쳐 구주일대에 이르렀다. 야마도의 배후는 임나가야인데 언제 임나가야에서 자신들을 진압할 군대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그리고 백제(삼한백제 - 옮긴이)마저 자신들을 싫어할 가능성이 더 컸을 것이다. 신공은 막판의 위기에 몰렸을 것이다. 당시 임나가야와 원수로 지내는 나라는 신라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倭가 바로 임나가야다. 여러분이 신공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유일하게 이해가 일치할 수 있는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러 급히 사신을 파견했을 것이다. 신공 측은 배(80척)와 군사(호적)와 자금(금, 은)을 원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국의 내전에 이해가 통하는 외국군대를 불러들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라 측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임나가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거절했을 것이다. 신공의 “신라정벌설”이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정변을 일으켰다가 위기에 몰렸던 신공이 살아남고자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러 갔다가 거절당한 사건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인용 끝)
- 김 상,『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170 ~ 172쪽
하지만 이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알고 싶어하시는 내물이사금과의 관계도 이 설명으로는 알 수 없죠. 그래서 또 다른 설명을 소개하겠습니다. ↓
“5. 파사이사금과 파사매금의 차이
초기신라의 박씨왕통이 확립되는 것은 파사이사금부터이다. 그런데 그 이전의 ‘혁거세 - 남해 - 유리 - 탈해’ 4왕은 동양식 이름을 갖는 것에 비해 이후의 박씨 왕들인 ‘파사 - 지마 - 일성 - 아달라’ 4왕은 서역식 이름을 갖는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파사’는 페르시아(오늘날의 이란 - 옮긴이)를 뜻하고, 2만 8천명의 대군으로 한성백제를 위협하던 신라의 아달라이사금은 5세기에 훈족을 이끌고 로마를 위협하던 훈족 왕 아틸라와 이름이 비슷하다. 문제는 이 신라 초기 왕들의 시호를 언제 결정하였느냐이다.
삼국사기는 본격적인 박씨왕통을 여는 파사이사금의 출신에 대하여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설과 유리왕의 동생의 아들이라는 설을 함께 적고 있고,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석씨왕통을 여는 벌휴이사금을 탈해의 아들인 구추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으나 모두 새로운 왕의 출현에 대한 정통성확립 차원에서 연결한 것으로 본다.
김병모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5세기의 신라인(계림국의 지배층 - 옮긴이)은 각배에 술을 담아 마시며, 페르시아 노래를 부르고, 페르시아 춤을 추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굴된 유리잔은 오로지 신라고분에서만 나왔는데(김인숙), 5세기 당시 페르시아의 사산왕조에서 유행하던 컷(cut) 무늬가 있는 유리잔이 황남대총 북문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서역식 4왕의 이름이 언제 결정되었는지는 모르나, 마립간시대의 고고학적 출토물을 보면 4세기 후반 이후의 신라인은 페르시아(사산 왕조 - 옮긴이)나 로마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4왕의 시호가 내물왕 이후에 정해졌다면 충분히 ‘페르시아’를 상징하는 의미로 ‘파사’라는 시호를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신라에 북방유목민족이 들어와 왕권을 장악하고 역사를 썼으며, 그들의 대외지식이 페르시아를 알았다면 내물이사금 이후의 신라왕들 중에서 파사매금을 찾아야 한다.
파사는 제5대 신라왕이 죽은 다음에 받은 시호이지 당대 이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 중애 9년조에 나오는 파사매금은 제5대 파사이사금은 될 수 없다. 더구나 매금은 내물왕 이후의 시호이므로 더욱 파사매금이 파사이사금은 될 수 없다. 따라서 일본서기가 파사매금이라고 부른 사람은 생존시의 이름(더 정확히는 별명 - 옮긴이)이 파사였던 왕 중에서 찾아야 한다.
신라는 북과 남에서 각각 국가를 이끌고 온 혁거세와 탈해가 제 1 건국자이고, 경주에 최초로 진입하여 주변을 정복하고 정착한 파사이사금이 제 2 건국자이다. 이후 신라사에서 ‘파사’라는 이름은 건국 이후 국가의 기틀을 다진 제 2 건국자, 즉 중시조를 의미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중기신라에서 중시조는 내물이사금과 실성이사금이다. 그렇다면 둘 중의 한 명은 당시에 파사이사금의 재현으로 불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서기는 중애 9년 가을에 신라왕인 파사매금을 위협하여 미사흔 왕자를 데려왔다고 하고, (『삼국사기』의 일부분인 - 옮긴이) 신라본기는 402년 2월에 내물이사금이 죽고, 3월에 실성이 왕이 되어 내물의 왕자인 미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냈다고 하여 위협 당한 왕이 실성이사금인 듯하나, 실제로는 401년 말에 내물이사금이 당한 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실성을 위협했으면 이미 前王인 내물의 아들이 아니고 現王인 실성의 아들을 데려오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본서기를 보아도 이는 401년 말에 벌어진 사건이다. 단지 미사흔이 신라를 떠난 것이 402년 3월이었을 뿐이다.
또 당시 신라사회의 분위기가 파사이사금의 계승분위기였을 것이라는 것은 박제상의 기록으로부터도 추정이 가능하다. 미사흔과 결부시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인 박제상이 하필 파사이사금으로부터 자신의 뿌리를 찾는데 그는 실성계의 인물이 아니라 내물계의 인물이다. 따라서 이 기록으로부터도 내물이사금의 당시 이름은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파사매금’이었을 것이고, 삼국사기 열전의 박제상전에 나오는 파사이사금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한다고 본다. 일본서기가 파사매금이라고 부른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백제인이 내물이사금을 “서역에서 온 신라왕”으로 인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김 상,『삼한사의 재조명 1』, 366 ~ 368쪽
“ * 응신 16년(401) : 8월, 평군목토숙녜와 적호전숙녜를 加羅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詔를 내려, “습진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반드시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라고 하였다. 이에 목토숙녜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내물이사금 - 김상)은 두려워하여 그 죄를 自服하였다. 그래서 弓月의 人夫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일본서기를 보아도 궁월군의 120현민이 도해를 시작한 것이 401년 8월이므로, 이들이 고구려군에게 공격받은 것이 400년 말경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김 상, 삼한사의 재조명 1, 478쪽
“영락 10년(400년) 신라 - 가야 지역에 가득 찼던 백제 120현민의 무사도해를 보장하기 위한 신라정부의 증표로 내물이사금의 아들인 미사흔 왕자가 왜국에 가게 된다.”
- 김 상, 같은 책, 480쪽
“일본서기 편자들이 받았던 왜국기록에는 중애 말년인 173년에 왜여왕 비미호가 정변을 일으켜 중애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세력이 약해 신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원조를 청한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서기 집필목적에 반한다고 판단한 그들은 이 내용을 지우고, 대신 401년에 있었던 (일본열도로 달아난 삼한백제의 - 옮긴이) 신라정벌(계림국 공격 - 옮긴이) 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 중애 9년 조에 실린 신공의 신라정벌이다.”
- 김 상, 같은 책, 482쪽
“401년은 아직 응신이 멀쩡하게 살아있을 때이므로 응신의 황후가 군대를 지휘하고 바다를 건넜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 일본서기 편자들은 비미호의 기년을 기준으로 신공조를 만들고, 그녀를 영웅시하기 위하여 신라정벌의 주역으로 설정한 것이다. 하지만 신라에 가서 미사흔을 데려온 실제 주역은 신공이 아니라, 응신 16년(401년)조에 나오는, 정예병을 이끌고 신라에 파견된 두 장군인 평군목토숙녜와 적호전숙녜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 김 상, 같은 책, 482쪽
『일본서기』의 기사들은 내물이사금이 “왜왕”의 요구대로 “왕자”인 미해(미사흔)를 인질로 보냈다는『삼국유사』의 기사와 일치합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죠.『삼국유사』는 (실제로는 삼한백제의 사신이 말했을 가능성이 없는) 계림국 “대왕의 신성함”을 강조하고,『일본서기』는 계림(신라)왕의 “항복”을 강조하니까요.
“항복”이라는 건 왜국으로 달아난 삼한백제 왕실이 계림국이 저자세를 취한 것을 부풀린 것이고,『삼국유사』는 삼한백제 수군에게 위협을 받고 삼한백제의 망명정부에게 굽힌 것을 부끄럽게 여긴 신라 사람들이 ‘적군의 위협을 받고 그들에게 굽힌 뒤, 그들에게 인질을 내어준 것’은 빼고 ‘왕자를 인질로 보낸 사실’만 말하느라 기사가 간략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일본서기』기사에 나온 일들이 서기 2세기나 3세기가 아니라 서기 5세기 초에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 있는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만약『일본서기』의 주장대로 신공이 계림국에서 “금, 은, 채색, 비단, 명주”를 “배 80척”에 실을 만큼 많이 얻었다면 - 그 물건들을 고향인 일본열도로 가져가서 귀족이나 관리나 족장들에게 나눠주거나, 궁궐 안에 보관했을 것이므로 - 일본열도의 야요이 시대에 만들어진 유적[특히 지배자의 무덤]에서 그런 것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야요이 시대에 만들어진 지배자의 무덤에는 청동기나 나무접시나 토기는 나와도, “금, 은, 채색”은 안 나오며, 신라 유물 하면 떠오르는 것들 가운데 하나인 유리잔도 안 나옵니다.
일본열도에서 “유리잔 등 신라유물들”은 “인덕능 등 5세기 왕릉급 고분에서(김상 교수. 이하 존칭 생략)”만 나옵니다. “이 유물들은 고구려나 백제에는 본래 없었던 것(김상)”이며, “훈족들이 로마와 접촉할 때 얻은 것들로서, 344년에 신라 땅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왔다가, 일본열도로 천도한 백제에게 공물로 보낸 것으로 추정(김상)”됩니다.
『삼국유사』와 일본열도의 고고학 유물을 견주면,『일본서기』에 나오는 신라[계림국] 공격은 고분시대인 서기 5세기 초에 일어났다고 봐야 합니다)
이제 선입견을 버리고『일본서기』의 기사를 봅시다. 기사에 나오는 “신라왕”이 “파사매금”이고 이는 백제 사람들이 내물이사금을 부른 별명이었다면(내물이사금의 본명은 모루한/강세니까요), 이 기사는 서기 5세기 초에 일어난 일을 적은 것입니다.
선학(김상)이 재구성한 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기 401년, 왜국(일본열도)으로 달아나 다시 나라를 세운 지 몇 해밖에 안 되는 삼한백제의 진왕(응신)은 평군목토숙녜와 적호전숙녜(숙녜는 벼슬 이름이고, ‘평군’이나 ‘적호’는 땅 이름입니다)를 경상남도(옛 가야 땅이자 삼한백제의 변한)로 보냅니다.
그들은 삼한백제 담로국들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계림국으로 쳐들어가는데, “신라왕(내물이사금)은 두려워하여” 목토와 전의 요구사항(계림국 안에 있는 삼한백제의 난민들이 왜국으로 갈 수 있게 길을 터 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계림국이 언제 태도를 바꿀지 알 수 없으므로, 두 숙녜는 인질을 요구하는데, 이 때 내물이사금의 아들인 미사흔 왕자가 인질로 뽑히죠. 자기 땅에 삼한백제의 난민들(광개토왕 비문의 “왜인”)이 몰려와서 나라 안이 꽉 찬 것도 처리하기 힘든 문젠데, 그걸 구실로 삼한백제의 군사가 쳐들어와서 계림국을 위협하고 인질을 요구하니 내물이사금은 이래저래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삼국사기』「신라본기」<내물이사금> 45년 조(서기 400년)에 나오는, “왕이 타던 대궐 안 외양간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 울었다.”는 기사는 이런 상황을 은유한 것입니다.
결국『일본서기』의 기사를 보면 내물이사금은 나라 밖으로 군사를 보내 여러 나라를 정복/점령한 군주가 아니라, 이웃나라의 난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자기나라 군사보다 더 크고 힘이 센 나라의 군사에 협박당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왕자까지 인질로 내 주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군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끝으로 금석문인 광개토왕 비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비문에는 서기 399년 “신라(新羅)”가 사신을 보내 광개토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삼한백제 난민 - 옮긴이)이 그 국경에 가득 차서 성과 연못을 부숩니다.”라고 하며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서기 399년이라면 내물이사금이 계림국을 다스릴 때이므로, 이 기사도 내물이사금이 삼한백제의 난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정복군주나 창업자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죠.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1. 내물이사금은 진한을 정복/점령하지 않았다.『삼국사기』/『삼국유사』/『통전』/『진서(晉書)』「진한전」/『양서(梁書)』「신라전」에 그런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
- 2. 오히려 내물이사금은 적군인 삼한백제의 군사에게 왕자를 인질로 내 주어야 할 만큼 궁지에 몰렸다. 이는『삼국유사』와『일본서기』가 입증한다.
- 3.『삼국사기』「신라본기」를 보면 내물이사금이 싸운 상대는 변한인 임나가야(「신라본기」의 왜)지, 진한이나 한성백제(『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오는 백제)가 아니다. 내물이사금은 한성백제와는 사이좋게 지내려고 애썼다.
- 4.『통전』을 보면 내물이사금(모루한)은 나라 이름을 바꾸고 나라의 연호를 바꾸며 새 시대를 연 임금이지, 나라를 새로 세우거나 다른 나라를 정복한 임금이 아니다.
- 5.「광개토왕 비문」과『삼국사기』를 보면 내물이사금은 삼한백제의 난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데 전자를 보면 그는 자기 힘으로 난민들을 내쫓거나 난민들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사신을 보내 도와달라고 요청함으로써 문제를 풀려고 했다.
따라서 신라, 아니 계림국이 “4세기 후반 내물왕 때에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고대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는 교과서의 설명은 사실과 다르며, “내물왕”이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도움으로 백제군과 왜군을 물리쳤다.”는 설명도 사실이 아니고(사실은 삼한백제의 난민들을 몰아낸 것이며 당시 일본열도에 ‘왜국’이라는 독립 국가는 없었습니다), 내물이사금이 “밖으로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여” 계림국의 땅을 넓혔다는 교과서의 다른 설명도 사실이 아닙니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내물이사금에 대한 잘못된 설명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만약 모루한[강세]이 나라를 세웠다면 이두로 ‘나라를 세운 이사금’이라는 뜻을 지닌 시호를 받았을 것이고, 만약 그가 정복군주였다면 역시 이두로 - 또는 한문으로 - ‘나라를 넓힌/다른 나라를 정복한 이사금’이라는 시호를 받았을 것입니다. 군주나 귀족의 시호는 그가 살아있을 때 한 말과 행동으로 - 또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의 이름을 따서 -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시호는 ‘땅 되돌린 이사금’이라는 뜻을 지닌 ‘내물이사금’입니다.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알고 싶은 분은 제 글인「▷◁내물이사금의 시호가 지닌 뜻」을 읽어 보세요.
저는 모루한(강세)은 ‘내물이사금’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 하나만으로도 ‘정복군주’나 ‘창업자’가 아닌, 신라를 임나가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 준 임금, 다시 말해 ‘독립영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