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주님,
주님 없이는 교회가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사오니
언제나 주님의 은총으로 교회를 이끄시고
무한하신 자비로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를 보호하소서.
제1독서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참조).>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5,1-15ㄷ
그 무렵 1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2 한번은 아람군이 약탈하러 나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곁에 있게 되었다.
3 소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
4 그래서 나아만은 자기 주군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아뢰었다.
5 그러자 아람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써 보낼 터이니, 가 보시오.”
이리하여 나아만은 은 열 탈렌트와 금 육천 세켈과 예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편지가 임금님에게 닿는 대로, 내가 나의 신하 나아만을
임금님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십시오.”
7 이스라엘 임금은 이 편지를 읽고 옷을 찢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8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임금이 옷을 찢었다는 소리를 듣고,
임금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9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10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11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12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성을 내며 발길을 옮겼다.
13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24ㄴ-30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화가 나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거부한 상태인 이유
채종기 씨는 자신의 토지를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분노로 숭례문에 불을 질러 우리나라의 오랜 상징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범행 당시 68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는 2년 전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현장 검증에서 이런 망언을 늘어놓습니다.
“내 말 한마디만 들어줬어도 이런 일 없었어요. 그렇지만 사람 인명피해가 없고 이런 문화재는 재 복원하면 되잖아요.”
토지 보상은 자신의 생존에 달린 문제입니다. 건설사는 약 1억 원의 감정 평가를 내렸고 채종기 씨는 5억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분노를 나라에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분노는 자신이 하는 행위를 정당화 시킵니다. 따라서 분노가 일어났을 때 행위를 바로잡으려고 하면 늦습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채종기 씨의 경우처럼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십니다. 마치 일부러 화가 나게 하시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분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시며 사렙타 마을의 과부와 나아만의 예를 드십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에 와서 자신들이 메시아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예수님을 참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를 유유히 빠져나가십니다. 그들의 분노가 예수님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임을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밀어 떨어뜨리려 하는 행동보다는 예수님의 말에 분노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어야 합니다.
감정을 추스르는 법을 배우려면 어떻게 감정이 생기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나 문제는 반복됩니다. 감정이 생기는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김주환 교수는 우리가 여러 감정을 말하지만 모든 감정의 근저에는 ‘두려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은 신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세 가지인데 투쟁-도피-경직의 세 반응입니다. 이러한 반응이 일어나면 이성은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위협에 다시 직면하지 않기 위해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식입니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났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고 달아나게 됩니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생각합니다. ‘담부턴 이 산에 오면 안 되겠다. 근데 나라는 뭐 하는 거야? 저런 멧돼지를 잡지도 않고. 아 짜증 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이젠 운동도 하지 말라는 건가?’ 이렇게 감정은 생각 다음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몸을 인식한 다음에 생겨납니다. 몸의 반응은 생존을 위해 저절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뇌 가장 깊숙한 곳에는 편도체의 아미그달라라는 생존 본능을 담당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진화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입니다. 이 부분과 연결된 것이 자율 신경계입니다. 자율 신경계는 몸의 근육이나 장의 운동, 심박수나 체온 등을 담당하는데 생존을 담당하는 편도체에 붙어있습니다. 대뇌는 생각을 포함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는데, 변연계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생존을 위해 신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대뇌는 신체의 변화를 해석하여 다시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감정을 일으킵니다. 사람은 그때의 기억보다도 감정을 기억하며 그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삶을 유지합니다. 이 역할을 전두엽이 합니다. 전두엽은 인간만이 가진 가장 발달한 뇌의 부분입니다.
자, 이제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생존을 포기하면 됩니다. 생존을 생각하는 마음이 ‘불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존을 포기할까요? ‘평안’하면 됩니다. 아이들은 이 해답을 압니다. 자신의 생존을,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줄 대상에게 마치 보험 들 듯이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네 살 아이가 호흡 곤란으로 목숨을 담보로 한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결국 아이는 부모에게 자신을 안아 달라고 합니다. 부모가 자신을 안으면 자신은 부모를 더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존재 안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임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에서 죽은 존재들입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부모의 포옹에 맡기는 것처럼 하느님 품에 안긴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겼기 때문에 더는 잃을 것이 도무지 없습니다. 잃을 생명이 있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부모의 품 안에서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이때 분노나 화, 두려움 등이 올라올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생존권을 내어 맡길 대상을 만나지 못한 이들의 것입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나의 생존권을 보장 받아야 한다면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겠다고 오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 품에 맡깁시다. 그러면 모든 나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험이고 보험입니다. 왜 돈에 대한 보험은 들면서 감정에 대한 보험은 들지 않는 것일까요?
https://youtu.be/FugE3ftyqvg
유튜브 묵상 동영상
A와 B 두 사람이 있습니다. 차례로 동전을 던져서 두 사람 모두 앞면 또는 뒷면처럼 같은 면이 나오면 둘은 100만 원씩을 받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면이 나오면 두 사람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이제 A가 먼저 동전을 던졌습니다. 앞면이 나왔습니다. 이제 B가 동전을 던질 차례입니다. 지금의 경우 앞면이면 100만 원을 받고, 뒷면이면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드디어 B가 동전을 던졌습니다. A, B 모두 “제발 앞면”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뒷면이 나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누가 죄책감을 더 느끼게 될까요? 거의 모두가 B가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죄책감도 더 느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수치가 자그마치 92%입니다. 심지어 A로부터도 “앞면을 던졌어야지.”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A가 비난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자신이 처음에 뒷면을 던졌더라면 100만 원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도 50%의 잘못이 있음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는 남 탓을 먼저 하곤 합니다. 그러나 남 탓하기 전에 자기 탓은 어떤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남을 판단하지 마라.’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신 것이 아닐까요? 남 탓하면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들은 탓을 외칩니다. 분명히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지만, 예수님 탓을 하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보여주셔도 의심하면서 또 다른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향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지 못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탓을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면서 산 벼랑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남 탓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고 하지요. 남 탓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된 습관입니다. 습관적으로 남을 먼저 탓하는 모습을 취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좋은 말을 남에게 베푸는 것은 비단옷을 입히는 것보다 따뜻하다(순자).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