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파병 등 최근 상황과 맞물려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는 베트남전 배경 공포영화 <알포인트>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2001년 제작 결정부터 감독 교체, 사스로 인한 로케이션 연기를 거쳐 촬영지 캄보디아 땅을 밟기까지, 이 영화는 어떤 영화보다 험난했던 곡절의 제작 과정을 거쳐 완성됐다. 그 처절했던 102일간의 기록을 담았다.
신이시여, 우리가 정말로 캄보디아를 다녀왔단 말입니까? 아마도 <알포인트>에 참여한 스탭들은 누구나 한번쯤 나지막이 내뱉었을 것이다. 베트남 호치민시와 캄보디아 프놈펜, 캄폿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에 40도를 넘나드는 더위와 90%에 이르는 습도는 연일 스탭들을 극심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영화 속에서 비밀 수색 명령을 받고 밀림으로 들어간 병사들은 작전 수행 도중 나뭇잎에 가려진 한 낡은 비문을 발견한다. 거기엔 '불귀(不歸), 손에 피 묻힌 자, 돌아갈 수 없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알포인트>에 참여한 150여 명의 제작진 모두 매일 '불귀'의 공포를 경험했다.
캄보디아로 떠나는 먼 길
<알포인트>의 탄생은 2001년으로 거슬러 간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한국군 비사(秘史)에 매료됐던 공수창 작가의 원안에 씨앤필름 장윤현 대표의 아이디어가 더해져 그 해 10월 제작이 결정됐다. 영국의 유명 종군 기자 앨버트 에반스의 유품 속에서 발견된 취재 수첩에는, 지난 1972년 베트남전에서 한 한국군 부대가 수행했던 극비 작전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당시 남서부 전선에 주둔했던 한국군 사단에는 괴소문이 떠돌았다. 6개월 전 일명 '로미오 포인트(Romio Point)'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색대로부터 계속 무전이 걸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에반스는 한국군 부대장과의 친분을 이용, 보도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행방불명된 병사들을 찾아 나선 소대와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반스는 사망 1년 전에도 다시 그 현장을 취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취재 수첩의 첫 페이지에는 한자로 '不歸(불귀)'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이듬해인 2002년 3월, <박봉곤 가출 사건>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최강혁 프로듀서의 총지휘 하에 2명의 제작실장과 4개의 제작팀이 동남아시아로 헌팅을 떠났다. 1년여에 걸쳐 타이, 베트남,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동남아시아 전 지역을 샅샅이 헌팅했다. 시나리오 속의 폐저택과 똑같은 이미지의 프랑스 식민시대 폐저택을 캄보디아의 복코산에서 발견한 것도 이때였다. 마치 영화 속에서 병사들이 어슴푸레하게 그 저택을 발견할 때의 느낌처럼 최강혁 프로듀서 역시 안개 속에 가려진 저택을 발견할 때의 희열이 엄청났다고 회고한다. 김완식 제작부장은 제작 초기부터 최강혁 프로듀서와 별개로 캄보디아 현지에서 실무적인 진행을 분담하게 됐다. 2002년 9월부터 합류한 김완식 부장은 중간에 잠깐잠깐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제외하곤 크랭크업할 때까지 20개월 정도 캄보디아에 체류했다. 이렇게 2002년은 꼬박 사전 조사와 헌팅, 시나리오 작업만으로 흘러갔다.
2003년 1월, <알포인트>에서 소대원들을 지휘하는 소대장 최태인 역으로 <결혼은, 미친짓이다>의 감우성이 캐스팅됐지만 프로덕션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당초 감독으로 내정돼 있던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와 <링>의 김동빈 감독이 프로젝트를 떠나게 된 것이다. 이미 주연 배우 감우성을 비롯한 연기자 및 스탭 20여 명이 인천 영종도 해병아카데미에서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을 받은 뒤였다. 결국 <알포인트>의 시나리오를 쓴 공수창 작가가 감독 직함을 달고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됐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당황했지만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준비 기간이 너무 짧은 데다 영화판에 들어온 지 15년이 지났지만 '내 것'이라는 부담감이 컸다. 또 내가 튼튼한 체질이 아니어서 캄보디아 올 로케이션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작품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굉장히 조심스럽게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사스(SARS)로 도둑맞은 1년
이후 프로덕션이 진행되면서 메인 촬영지는 캄보디아로 결정됐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베트남엔 베트남이 없었다. 우리가 원하는 60~70년대 베트남의 풍경을 베트남에선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게 공수창 감독의 말이다. 그러나 2003년 3월, 모든 제작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캄보디아와 동남아시아 일대를 뒤덮은 사스(SARS)의 위협으로 촬영 일정은 부득이하게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2년을 달려온 <알포인트> 스탭들에겐 정말 뜻하지 않은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감우성을 비롯 출연진 전원이 출연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그렇게 1년여의 세월이 흘러갔다.
2004년 1월부터 다시 제작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촬영, 조명, 미술, 소품, 의상, 특수 효과, 총기류 등 30년 전의 베트남전을 재현하기 위해 총 3톤에 육박하는 촬영 물품이 캄보디아로 공수됐다. 그러나 난관은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류 독감이 문제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더 이상 연기할 수 없었다. 드디어 2004년 2월 9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인공 선탠을 한 배우들과 제작진이 인천국제공항에 모였다. 무려 1년을 기다린 캄보디아행 비행기였다. 조류 독감은 여전히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 캄보디아에 도착하고서 한두 달 동안 닭 요리를 일체 안 먹은 것은 물론이고, 영화 속에서 닭을 죽이는 장면도 수정하자는 얘기까지 있었다. 캄보디아의 가장 대중적인 요리 중 하나가 닭 요리였으니 그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베트남의 경우 호치민 시내에선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에 닭의 진열조차 금지되던 시기였다. "촬영지가 베트남 접경 지역이어서 식탁에 닭은 물론 메추리알 등 새 종류는 아예 올리지도 못했다. 베트남 고산지대에서 한국 분이 재배하는 배추나무를 가져오고 한국에서 공수해온 고추장, 된장, 고춧가루로 요리를 해먹었다. 한국 음식은 비싸지만 반대로 자연산 새우나 장어는 싸니까 부족하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고 김완식 부장은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닭 또한 '없어서 못 먹는' 처지가 됐다. 북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한국인 식당도 즐겨 찾던 곳 중 하나다.
2004년 2월 12일, 프놈펜에서의 크랭크인을 시작으로 <알포인트>의 본격적인 대장정은 시작됐다. 감독과 배우 등 한국 스탭과 캄보디아 현지 스탭 모두 합쳐 15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참여했다. 촬영지를 이동할 때마다 말 그대로 군대가 이동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2월 22일에는 5대의 버스와 10대의 촬영차, 촬영에 동원될 군 고속정과 지프, 트럭 등을 앞세우고 150km를 남진해 촬영의 주무대 중 하나인 남부 해안 도시 캄폿에 입성했다. 이때부터 서서히 날씨, 바람, 의식주 문제와 전면적으로 부딪히게 됐다. 물은 많지만 먹을 물은 별로 없는 땅 캄보디아에서 무더위는 최고의 적이었다. 하루에 티셔츠 두세 장씩 갈아입는 건 예사고 물 소비가 많다 보니 서로 '물 비린내 난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인터뷰 도중에도 바람이 자기에게 오지 않게 선풍기 방향을 다른 쪽으로 틀어놓던 공수창 감독은 "내가 소음인이라 요즘 같은 한국의 열대야에 샤워 안 하고도 전혀 불쾌감 없이 잘 수 있다. 그런데 캄보디아에서 촬영하면서는 하루에 무려 다섯 번이나 샤워를 한 적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욱 무시무시한 건 일교차였다. 낮에는 40도가 넘는 더위가 계속돼도 밤에는 가공할 추위가 이어졌다. 김완식 부장의 얘기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만큼 충격적이다. "너무 일교차가 크니까 밤에는 두툼한 파카를 입었다. 그러다 보니 캄보디아에는 영상 18도에 동사(凍死)하는 사람이 있더라. 하루는 신문을 보는데 '어젯밤 북쪽 어느 지방이 18도를 기록해 6명이 얼어 죽은 채 발견됐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다."
귀신 들린 집, 복코산 저택
<알포인트>의 80%는 영화 속 주무대인 캄보디아 복코산의 대저택에서 이루어진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지를 샅샅이 뒤지던 최강혁 프로듀서와 홍덕기 현지 코디네이터에게는 그 저택을 발견하던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최강혁 프로듀서는 "여러 후보지를 물색한 다음 복코산에 올라가게 됐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저택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그 순간 마치 영화 속 장면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원하는 규모와도 딱 맞았고, 달리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건물의 색이 멋있었다. 그 저택을 발견하면서 영화의 대부분이 결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은 이후 복코산을 방문한 공수창 감독도 마찬가지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는 베트남에 그런 프랑스 식민시대의 호텔이나 저택이 있겠거니 상상으로만 썼는데, 실제 내가 떠올렸던 이미지와 너무 똑같은 모습의 저택이 있는 걸 보고 너무 놀랐다. 그 희열이 엄청났다."
캄보디아 내전 이후 특별한 관리 없이 버려져 있던 그 복코산 저택은 이상한 문화재로 남아 있다. 해발 1,200m 정도로 캄보디아에서도 가장 높은 산인 복코산 자체가 유네스코 보호 관리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인도차이나 일대가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식민지시대의 휴양지이자 카지노였다고 보면 된다. 해안가에서 베트남과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그 저택은 거센 바람과 풍광만으로도 사람들을 압도한다. 이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누군가 저택 벽에 쓴 'Do not sleep here'라는 글씨 또한 두고두고 회자됐다. 외관은 좌우 대칭을 이루지만 내부는 전혀 다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바람이 제대로 불면 100kg이 넘는 일부 스탭들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고, 내부 지하에서부터 바람이 벽을 치고 웅웅거리며 올라오는 소리도 공포스러웠다. 김완식 부장은 "스크립터가 건축과 출신인데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한 친구한테 그 건물 설계도를 보여 줬더니 사이코가 설계한 것 같다고 얘기했다더라. 내부에 방이 수십 개인데 똑같이 설계된 게 하나도 없다. 주변에 당시의 폐허 건물이 몇 채 더 있는데 유독 그 건물만 그런 느낌을 준다"고 기억한다.
배우 감우성은 복코산 저택 주변을 산책하다가 호랑이를 만나서 기겁한 적도 있다. 현재 영국 야생 동물 보호 단체가 1년에 30만 달러씩 복코산 관리소에 지원해 주고 있는 상태다. NGO 단체에서 야생 동물을 못 잡게 하고 덫이나 밀렵꾼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관리소 직원들을 교육시키고 있는데, 감독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AK 소총을 장전한 채로 순찰을 다닌다. 그만큼 <알포인트> 제작진들은 기후뿐 아니라 야생 동물의 습격 위험으로부터도 노출돼 있었다. "'프로텍'이라고 우리의 '세콤' 같은 경비 용역 업체가 저택을 봐줬다. 저택에서 촬영하고 난 조명기나 장비들은 그냥 두고 오니까. 그런데 절대 저택에 남아 있지는 못하겠다고 하더라. 귀신도 귀신이지만 호랑이가 더 무섭다고 했다. 그 저택과 숙소인 게스트하우스가 10분 정도 거리였는데 우리 역시 밤에 걸어 내려오는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공수창 감독의 말에는 여타의 영화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담겨 있다. 덧붙여 그는 복코산 저택을 두고 "귀신 들린 집"이었다고 딱 잘라 말한다. "영화라는 게 1분을 위해 서너 시간 고생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좀 전까지만 해도 뚜렷하게 보이던 저택이 안개가 깔리며 단 몇 분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거다. 그 옆으로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고. 정말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저택이었다."
중단될지 모른다는 공포
공수창 감독은 늘 영화가 엎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음을 토로한다. 3월에도 40도에 육박하는 온도와 가공할 습도, 수시로 촬영장에 나타나는 독사와 야생 동물 등 온전히 영화에만 집중할 수 없는 시간들이 계속됐던 것이다. 충무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는 베테랑이지만 감독으로선 '초짜'인 그에게 연속되는 선택의 기로는 피를 말리는 수준이었다. 해안 지역에 상륙하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그 해안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인 다리가 무너지는 일도 있었다. "당장 수많은 인원들이 준비를 해서 그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졸지에 다리가 없어진 거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영화 찍는 우리가 그 다리 토목 공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리를 지으면 비용이 얼마나 들까, 그래도 여기서 찍어야 하나, 아니면 다른 곳을 재빨리 물색해야 하나 등 최강혁 프로듀서와 내가 빨리 결정해야 하는 문제였다. 늦으면 늦을수록 시간과 돈이 지체되고 변수는 늘어나니까."
<알포인트>의 제작진 150여 명은 한국에서 온 스탭 80여 명에 현지에서 지원된 캄보디아인 스탭 70명 정도로 구성됐다. 캄보디아는 영화 산업 인프라가 없는 지역이라 촬영 장비 자체를 처음 보는 사람이 태반이었지만 공수창 감독은 "몇몇 캄보디아 스탭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진행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김완식 부장은 "캄보디아는 지방 자치가 잘돼 있는 지역이라 우리가 신청한 내용대로 중앙에서 공문이 내려가도, 지방에서 자체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촬영 허가가 나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럴 때 캄보디아 스탭들이 직접 나서서 친구나 조카 등 인맥을 동원해 마치 자기 일처럼 해결해 줬다"고 덧붙인다. 캄보디아 현지 교민의 도움도 컸다. 오랜 시간 캄보디아에 머물며 전문가가 된 김완식 부장이 얘기를 잇는다. "프놈펜에 700명,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에 150명 정도 교민들이 거주한다. 프놈펜의 200명 정도는 선교사들이고 시엠립의 70명 정도는 관광 가이드로 가 있는 분들이다. 대개 식당을 운영하거나 상황버섯 재배 등의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최근에는 캄보디아의 전산망 사업을 한국에서 지원하다 보니 그렇게 들어가는 분들도 속속 늘어나고 있다. 엑스트라로 참여해 주신 분들도 많고 음식도 많이 제공해 주셨고 숙소도 싸게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됐다."
그래도 물 다르고 바람 다른 땅에 머무르던 한국 스탭들의 고생은 따라갈 수 없을 게다. 예정된 촬영 기간을 초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와 향수병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올 로케이션이다 보니 한국인을 섭외하기가 까다로웠고 거의 모든 스탭들이 한두 번씩은 영화에 출연했다. 1인 2역에서부터 1인 9역까지 군인 역할, 시체 역할 등 가릴 것이 없었다. 맡은 역할에 관계없이 스탭들 모두 <알포인트>를 위해 풀가동, 24시간 대기조였던 것이다. 한번은 수면 시간 없이 73시간 연속 촬영 기록을 세운 적도 있다. 말년 병장 마병장을 연기한 배우 박원상 씨가 촬영 도중 득남을 하면서 일정 때문에 귀국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그의 자투리 촬영분들을 쉬지 않고 촬영했다. "촬영이 끝나고 나니 완전히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었다"고 김완식 부장은 말한다.
집에 가고 싶다
2004년 4월경, 촬영이 2개월째를 넘어서면서 스탭들의 향수병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제 더 이상 캄보디아의 이국적인 풍광과 해외 올 로케이션의 설렘도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병사들이 "집에 돌아갈 수 있어!"라고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을 촬영하는 순간이 되자, 모두의 눈이 반짝거렸다. 밤마다 촘촘한 별들을 벗 삼아 밋밋한 캄보디아 맥주와 제작부를 통해 공수해온 새우를 안주로 향수병을 달래던 나날이었다. 그 사이 단 2명을 제외하곤 병원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어지간한 일을 겪지 않고서는 남에게 '사건'이라고 말하기에도 어줍잖은 나날들이었다. 그들 역시 영화 속 병사들처럼 '용병'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공수창 감독은 "<알포인트>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집에 가고 싶다'는 기분, 바로 용병들이 느끼는 그 기분이었다. 공포영화의 핵심은 '억압'이라고 생각한다. <전설의 고향>에 여자 귀신이 더 많은 건 아무래도 남자보다 더 많은 억압을 받고 살았기 때문 아니겠나. 바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사람들의 가장 커다란 억압은 죽느냐 사느냐, 바꿔 말해 집에 무사히 돌아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을 거다. 영화 속에서 최태인 중위 이하 병사들은 원래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거였는데, 사소한 문제로 귀국하지 못하다 다시 작전에 투입되게 된다. 무사히 살아 돌아가고 싶다는 게 가장 큰 억압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촬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인물들이 하나 둘 죽어 나가는 <알포인트>의 스토리에 맞춰 배우들은 "나부터 죽여줘!"라는 말을 달고 다녔다. 극중 막내인 장 병장 역의 오태경이 극중 어머니를 찾으며 눈물을 흘리는 신을 촬영할 때는 스탭들 대부분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드디어 5월 21일, 공포의 실체를 맞닥뜨린 최태인 중위의 라스트 장면 촬영을 끝으로 102일간의 대장정이 마무리됐다. 공수창 감독은 "캄보디아 일을 마무리 짓고 5명 정도 한국으로 떠나려고 하는데 공항에서 짐이 30kg 정도 오버가 됐다. 600달러를 더 내라고 하더라. 거기 돈으로 600만 원 수준이다. 너무 화가 나서 단 1달러도 못 내겠다며 가지고 있는 짐을 다 버리라고 했다. 정말 그 정도로 민감하게 화가 나 있었다. 다른 한국 관광객 분들이 짐을 좀 덜어준다고 해서 들어오긴 했는데, 당시엔 정말 캄보디아 쪽으로 소변도 보기 싫었다"고 말한다.
귀국 후 6월 10일, 마지막 촬영분 필름 11캔이 세관 통관 절차를 마쳤다. 3개월에 걸친 한국, 캄보디아, 홍콩 3개국 간 통관과 세관 신고를 전담한 제작부 2인이 작성한 서류만도 수만 장이었다. 이때부터 후반작업이라는 또 다른 대장정이 시작됐다. 지독스레 힘든 캄보디아 로케이션이었지만 이제는 그들에게 애틋한 추억이 됐다. 최강혁 프로듀서는 교민들의 도움을 칭찬하기 바쁘고, 김완식 부장은 자기로 인해 무사히 크랭크인할 수 있었던 프놈펜에서의 2월 22일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학을 뗐다"던 공수창 감독 역시 언제든 다시 캄보디아를 찾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더욱 멋지게 남기기 위해 오늘도 후반작업 일정을 체크하느라 분주하다. 8월 20일이면 그들의 고된 땀의 흔적, 그리고 <알포인트>의 용병들과 마주할 수 있다. |
첫댓글 이때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간적 있는데,,,제가 이거 보자구 우겨서 봤는데,,,,,나중에,,,술자리에서 청문회 수준의 고문을 당함,,,;;
엥??? 어떤 면으로 봐도 중박 이상은 치는 영환데..^^;;;
그니까요,,,,이 영화 저는 나름 재밌게 보고 나왔는데,,,
다들 떨더름한 표정,,,,
결국은 술자리에서 불만이 터져나옴,,,,
내 이럴줄 알았네,,,,쟤 영화 보는 스타일 개념이 있냐,,,
그냥 아무거나 봐도 이거보단 낫지,,,,
뭐 이리 황당한 영화가 다 있냐,,,
ㅎㅎㅎ 그래서 오래도록 더 기억에 남는영화입니다,,
저도 이영화 상당히 재밌게 봤는데요... 공포영화 별로 안좋아하는데 알포인트는 재밌어서 여러번 봤네요.
알포인트 나름 재밌게 봤었던 영화였습니다.
저도 이거 3번 정도 본거 같네요~ 명작 임
제가 좋아하는 공포영화중 하나인데.........^^
새벽.... 천둥, 번개,벼락 치는....... 비오는 밤..... 혼자 봐서인지.........아직까지 알포인트가 가장 무서운 공포영화인것 같아요..........
알포인트 재미있었어요. 공포스럽고 꽁기꽁기한 결말도 좋았어요
결말이 관객의 몫이었죠.ㅎㅎ 생각하면 무서운 영화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