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속에서 뭔가가 시작되고 있었어
네이버블로그/ 시가 내게로 왔다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지… 시가
나를 찾아온 게, 모르겠어. 그게 어디서 왔는지.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난 모르겠어.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니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어.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로부터,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아니면 혼자 돌아오고 있었나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게 건드렸어.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내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열(熱) 혹은 잊고 있었던 날개가
그래 내 나름대로 해보았지
그 불을
해독하며,
그리고는 어렴풋한 첫 행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를,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하늘이
풀리고
열리는 것을
행성들과
고동치는 농장들
화살과 불과 꽃들로
어지러운
구멍난 그림자를
휘감아 도는 밤과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少)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
그 비슷한
그 신비의 이미지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어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파블로 네루다, 「시가 내게로 왔다」 전문
지금도 그렇지만 참 많은 날들을 시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니 그대로 살았다면 나는 내가 먼저 시에게 다가갔다고 믿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네루다의 이 시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때가 몇 살이었을까? 열아홉? 스물? 그러나 그 날이 언제였노라고 적어보는 일은 너무 우습다. 정작 나는 그때 내 앞에 선 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으며 왜 하필 나에게 찾아왔는지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으니까. 아마도 우리들의 몸속에서 네가 싹 터 오르기에 제일 좋은 때였겠지. 네가 찾아와주지 않았다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그런 순간이었겠지. 세상은 내 앞에 넓은 들판을 드러내며 막막하게 펼쳐져 있었고 나는 어둠 속에서 외로움 같은 것으로 숨 쉬며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었을 거야.
그때 네가 나를 불렀어. 길거리에서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한 채 홀로 돌아오는 나를 슬쩍 건드려보더군. 침묵도 아닌, 목소리도 아닌, 처음이지만 어떤 동질의 느낌으로 내 몸속에 들어와 나를 흔들었어.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래서 어느 때는 내 얼굴조차 스스로 구분할 수 없는 존재인 나를 자꾸 네 쪽으로 잡아 흔들었어. 건들었어. 나는 너에게 말하고 싶었지. 모든 것을 간절하게. 하지만 끝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내가 누구라고 이름조차 댈 수 없었는걸. 너는 불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가 나에게 찾아온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어. 너로 인해 내 눈은 멀었지만 조금도 아픔을 느낄 수 없었고 어제와는 다르게 내 영혼 속에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몸 안으로 펴져가는 내 영혼의 열기와 그동안 잃어버렸던 날개를 내 마음대로 움직여 보기로 했어. 모두 너의 뜨거운 몸을 생각하는 동안에 이루어진 일들이야.
내 영혼의 열기 안에서 나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몇 구절을 적어 나갔어. 어렴풋한, 무엇인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를. 결국에는 그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지혜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어. 그리고 그때에서야 나는 문득 발견할 수 있었지. 내 앞에 닫혀 있던 하늘이 열리는 것을. 막막했던 세상에서 별이 생생하게 빛나고 논과 밭들이 곡식을 키우며 살아 숨 쉬는 것을. 그 초롱초롱한 큰 별들이 빛나는 허공에 취해, 신비로운 그 모습에 취해 이 먼지보다 작은 ‘나’라는 존재조차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낄 수 있었어. 드디어 나는 저 청천하늘의 별들과 더불어 허공을 굴렀으며, 내 가슴속의 심장은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휘날렸다네. 그 한계를 벗어났다네. 시가 네게로 다가왔던 맨 처음 그때에.
나는 네루다의 이 시를 1990년대에 들어서야 만날 수 있었으니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는 퍽 안타까운 일이다. 1983년에 졸업을 했고 1988년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네루다의 시를 더 빨리 만날 수 있었다면 조금 더 일찍 시에 다가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종종 갖는다. 이 또한 욕망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만큼 이 시는 나에게 충격과 기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무한천공의 우주 안에서 인간이 쓰는 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신비롭고 뜨겁게, 그리고 거침없이 자유롭게 표현한 시를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오늘처럼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쓸 기회가 생겨서 「시가 내게로 왔다」를 서너 번 읽고 있노라면 갑자기 세상만사가 까마득히 멀어져간다. 참 대단한 시라고 말하며 한숨짓지 않을 수 없다.
파블로 네루다, 그는 칠레 민중혁명의 한복판을 달려갔던 전사이기도 했지만 그의 시는 늘 잔잔한 슬픔에 휘감겨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시를 서정시이도록 한다. 그러나 네루다의 슬픔은 민중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나약한 한계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의 시가 나아가는 지평은 자유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모든 위대한 시가 그랬던 것처럼 자유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나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인가로 빛나면서 자유롭기까지를 노래한다. 아마도 네루다의 시가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이유일 것이다. < ‘그 시를 읽고 나는 시인이 되었네, 내 영혼을 뒤흔든 41편의 시(이종민 편저, 모악, 2021.)’에서 옮겨 적음. (2023.11.21. 화룡이) >
첫댓글 시가 내게로 왔어...
김용택 시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는 길은 알지만
그길을 가는 분은 많지 않지요...
'잘 써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면 멀리 보게 되고
멀리 보고 걷다 보면 내 곁을 스쳐가는 것들을 놓치고 맙니다.
항상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하찮은 생각 한 줄기라도 마주하게 되면
바로 잡아들여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시는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시는 시의 싹이 내게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가 오는 순간을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회의 신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말거던요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 필기 도구를 갖춰두라'던
작가의 준비성이 되짚어집니다.
메모하는 습관,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詩가 온다는 걸 온 몸으로
느끼겠네요~~^^
감사합니다.
'날마다 읽고 쓰며 생각하고 메모하는 것',
그 자체가 준비가 아니겠는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