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만남의 길목
"아니, 숙자 니 전축 샀구나!"
안경자는 앉으려다 말고 눈이 반짝 커지며 몸을 되일으켰다.
"내가 이뻐서 사주냐. 자기 첩하고 싸우지 말라고 비우 맞추는 것이제."
그들의 말에는 사투리와 표준말이 섞여 있었다. 안경자는 강숙자의 거친 말투에서 자기 아
버지에 대한 미움이 전보다 더 커진 것을 느꼈다.
"아주 좋아 보인다."
강숙자에게 빈 주먹질을 하며 안경자는 책상 옆의 전축으로 다가갔다.
"에라 골탕이나 먹어라 하고 명동 하이파이에 나가 젤 비싼 걸로 샀다."
예쁘장하면서도 어딘가 맹랑한 느낌이 드는 인상에 어울리는 강숙자의 대꾸였다. "그 유
명한 전축점 하이파이에서 젤 비싼 것?"
전축 앞에 허리를 굽힌 채 강숙자를 올려다보고 있는 안경자의 놀란 눈은 여러 가지 물음
을 담고 있었다.
"응, 10만 환에 미이제!"
'미이제' 할 때 희고 가지런한 강숙자의 치아가 얼굴보다 곱게 드러났다.
"화아아......."
순간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운 안경자의 입이 헤벌어져 있었다. 10만 환이면 줄잡아 쌀이
열 가마였던 것이다.
"뭘 그리 놀래, 광주 무등병원 따님이."
강숙자가 안경자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도 그렇지야, 겁난다." 안경자는 혀를 조금 내밀며 고개를 내두르고는, "미제가 어
찌 들어오나. 이런 것도 밀수하나?" 하며 윤기 번쩍이는 전축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응, 내가 물어보니까 미군 부대서 흘러나온다드라. 가만 있어, 그것도 밀수는 밀수 아니
냐?"
"그래, 그런 셈이지. 판은?"
"응,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명곡으로 50장 샀다."
"가시내, 통도 크다."
"어디, 틀어보자. 뭘 들을래?"
강숙자가 전축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내가 뭘 아나. 그야 니가 박사지."
"음악의 황제 베토벤이 좋지만 글쎄, 봄에 어울리는 슈베르트의 감미로운 곡으로 하자."
어떠냐고 강숙자가 눈으로 동의를 구했다.
"좋을 대로 해. 난 말야, 이럴 땐 정말 너한테 열등감을 느껴."
"뭐라고, 열등감? 누구 놀리냐?"
강숙자가 까르르 웃었다.
"정말이라니까. 난 뭐 열등감이 없는 줄 아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니가 자유롭게 맘
껏 행동하는 게 부러울 때가 많았어. 대학 들어와서 보니까 공부가 뭘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안경자는 부끄러움이 깃든 듯한 진지함으로 말하고 있었다. 보통의 생김인 그녀는 온순한
인상이었는데, 유난히 맑아 보이는 눈에 총기가 서려 있었다.
"참 별소릴 다 듣겠네. 이 후라빠한테 열등감을 느끼다니, 그럼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으음......, 열등생에 대한 우등생의 열등감?"
스스로를 '후라빠'라고 할 수 있는 저 꾸밈없고 당당한 것이 강숙자의 남다른 매력인 것
을 안경자는 또 느끼고 있었다. 후라빠는 품행이 불량하거나 말썽 피우는 여학생들을 통칭하
는 은어였다.
"그건 너무 고상해. 공부벌레의 열등감."
둘이는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공부벌레는 안경자의 별명이었다.
"숙자 학생, 친구 왔구만이라우."
느직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강숙자가 방문을 열면서 손님이 들어서면서 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경자 씨."
서울말씨의 손님이 먼저 인사했고,
"어서 오세요, 영자 씨."
안경자가 얼른 일어서며 반겼다.
"잘들 한다, 뭐 잘난 이름들이라고 경자 씨, 영자 씨 해가면서 지난번에 말들 놓기로 했잖
아."
강숙자가 둘에게 눈을 맵게 흘겼다.
"그래, 말이 났으니 말인데 우리들 이름 참 마땅찮아.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 들면서
점점 싫어지고 창피해."
박영자가 강숙자의 힐책을 살짝 피해서며 재치있게 화젯거리를 끌어
"그래, 맞었어. 숙자, 경자, 영자가 뭐냐 그래. 어디 그뿐이냐, 미자, 애자, 말자, 복자,
정말 창피해 못살 일이야. 가만있어 봐, 이따 우리 나간 길에 작명소에 가서 이름 새로 지을
까?"
강숙자가 불쑥 말했다.
"또 저 엉뚱한 생각 발동한다. 고쳐봐야 뭘 해, 돈만 없애지. 정작 호적을 못 고치는걸."
안경자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끼리라도 부르면 되지."
"아니, 가만있어 봐......." 안경자가 무슨 생각인가를 붙들려는 듯이 표정이 골똘해지더
니, "그래, 이름자를 바꿔 부르면 어떨까?" 하며 둘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자숙이, 자경이, 자영이, 이렇게 말이냐?"
박영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야아, 그거 좋다. 그거 좋아. 역시 우등생 안경자 머리가 최고야, 최고!"
강숙자는 마치 선머슴처럼 모두뜀으로 돌며 손뼉을 쳐댔다.
"또 저 소리."
그제서야 자릴 잡고 앉으며 안경자가 강숙자에게 눈을 흘겼다.
"참, 그렇게 바꿔 부르니 너무 좋네. 자숙이, 자경이, 자영이 얼마나 고상하고 세련되어
보여."
박영자는 무척이나 흡족한 얼굴로 다시 이름들을 또박또박 뇌며 안경자에게 고맙다는 눈인
사를 보내고 있었다.
여자들 이름에 숱하게 붙어 있는 '자'자는 일본식 이름 그대로였다. 강압적인 창씨개명 바
람에 쫓겨 단시일에 효과를 내느라고 일본 여자의 흔한 이름들을 갖다가 읍사무소며 면사무
소 직원들이 제멋대로 붙이는 실정이었으니 똑같은 이름들이 무더기로 쏟아질 수밖에 없었
던 것이다.
"숙자 학생, 요것 받으씨요."
"아주머니, 오늘부터 숙자가 아니라 자숙이라고 불러요, 자숙이!"
강숙자가 방문을 발칵 열며 큰소리로 힘주어 말했고, 안경자와 박영자는 입을 가리며 소
리 죽여 웃고 있었다.
"야아?"
"아, 이름 바꿨다니까요."
강숙자가 바락 소리질렀고,
"니기럴, 엎어치나 뫼치나 꼽새등이 피지간디. 숙자나 자숙이나."
어눌한 듯 들리는 이 말에 안경자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배를 잡았고, 박영자는 그저 멍
한 얼굴이었다.
"하 참, 저 아주머니 입심은 못 당해."
다과용 소반을 들고 돌아서며 강숙자도 웃어대고 있었다.
사투리를 제때 알아듣지 못한 박영자는 강숙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뒤늦게 웃기 시작했다.
"이거 태극당 생과자네."
서울 토박이답게 박영자는 소반 위에 놓인 생과자를 첫눈에 알아보았다.
"응, 누가 또 빽 쓰려고 사왔겠지. 그 생과자 상자에 따로 든 봉투는 저 애첩께서 쓱싹 했
으니까 니네들은 하나도 고마워할 것 없이 많이 먹어."
강숙자의 어조가 비틀려 돌아갔다.
"니가 그걸 봤어?"
안경자가 살짝 웃으며 꼬집었고,
"쟈가 대한민국 국회의윈을 뭘로 보고 저래? 달랑 이까짓 생과자 갖고 빽이 써져? 이건 남
들 눈 피해 돈봉투를 전하기 위한 눈 가리고 아웅이야, 이 멍청아."
첩 이야기와 함께 그 뇌물 이야기는 자기 아버지의 치부이고 집안의 흉거리인데도 강숙자
는 아무 거리낌 없이 말을 해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친구도 별다른 반응 없이 예사롭게 듣
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돈이나 권력깨나 있는 남자들은 그 위력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으
레 축첩을 했고, 빽을 쓰고 사바사바를 하지 않고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어도 출세할 수 없
다는 풍조가 사회 전체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거 아주 비쌀 텐데. 말만 들었지 난 첨이야."
안경자의 손은 과일을 지나 서울 장안에서 제일이라는 태극당 생과자를 집어들었다.
"오늘 무슨 좋은 플랜 있니?"
박영자가 과일을 베물며 물었다.
"있지. 우리의 위대하신 국부 이승만 대통령 각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아주 멋들어
진 플랜을 짰지."
강숙자가 과장된 몸짓을 지었다.
"흥, 대통령 생일이라고 공휴일로 쉬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이 나라뿐일 거야. 우습지도
않아."
코웃음만큼 박영자의 얼굴에는 냉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 힐난함에 안경자는 놀란 눈길이
되었고, 강숙자가 넉살좋게 말을 받았다.
"그 고마우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우린 뜨겁게 청춘을 즐겨야지."
"나 잠깐 실례......."
박영자가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간 박영자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안경자가 강숙자를 쳐다보며 고개를 살래살
래 흔들었다.
"재 순하고 얌전해 보여도 보통내기가 아니야. 며칠 전에는 글쎄, 어떤 교수가 역사학도
의 태도와 양심에 대해 강의를 했는데, 교수님은 일제시대에 뭘 하셨습니까, 그때도 역사를
가르쳤을 텐데 그건 친일 중에 가장 심한 친일이 아닌가요, 하는 질문을 했다니까. 난 뒷문
보결생이지만 잰 제대로 맘먹고 사학과에 온 애야."
"너, 그 보결, 재도 알아?"
안경자가 당황스럽게 물었다.
"아아니, 내가 바보 천치냐?"
강숙자는 더없이 느긋하게 웃었다.
"제발 그 소리 좀 하지 말어. 괜히......."
안경자는 말끝을 흐리며 동생이라도 꾸짖듯 눈총을 쏘았다.
"혹 누가 알면 어때? 보결생이야 대학마다 쌔고 쌨는데."
강숙자는 키득 웃기까지 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전쟁을 치르고 사회가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고학력을 필요
로 했고, 그런 사회 분위기는 대학을 나와야 출세한다는 인식을 유발시켰고, 그에 발맞추어
대학들이 생겨나는 동시에 전국적으로 교육 열풍이 불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로 생긴 대
학일수록 재정이 취약해 그것을 보충하느라고 정원 외에 뒤로 보결생들을 받아들이고 있었
다. 어떤 대학은 정원보다도 보결생들이 더 많기도 해 그런 대학들의 비리는 해마다 신문을
장식하는 사회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 엄연한 불법이 매년 되풀이되고 있는 데는
국가적 지원을 할 수 없는 문교부의 은근한 묵인도 작용하는 낌새가 보이기도 했다. 사회에
서도 그 문제에 대해 관대한 일면이 없지 않았다. 배움의 길을 막을 것 없고, 많이 배운 사
람들 늘어나 나쁠 것 없고, 보결생 등록금 받아 결국 학교 시설하는데 다른 부정보다는 낫
지 않느냐는 여론이었다.
"아이고, 저 배짱." 안경자는 어이없어하는 웃음을 흘리고는, "근데, 집안은 어떤 집안인
데?" 하며 박영자에게 관심을 보였다.
"응 무슨 건축회살 한다는데, 작은오빠가 사학과에 다닌데."
"그래, 그 오빠한테 보배우는 게 많은 모양이구나."
눈길을 떨군 안경자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보배운다'는 말은 보고 배운다
는 남도지방 말이었다.
"날씨가 너무 화창하고 좋다. 정원 나무에 꽃망울들이 방울방울 맺혔어."
경쾌한 콧노래를 하며 들어선 박영자가 환하게 웃음지으며 말했다.
"처녀 가슴이 싱숭생숭하지?"
강숙자가 탁구 치듯 냉큼 받았고,
"어머나, 징그럽게. 어서 재미나는 플랜이나 말해 봐."
박영자가 강숙자의 등을 치며 앉았다.
"자아, 들어봐. 오전에는 멋진 영화 한 편을 보고, 점심은 불고기로 맛있게 먹고, 그 다음
엔 시발택시를 타고 저 뚝섬으로 나가 봄바람 쐬며 뽀트놀이를 하는 거야." 강숙자는 점점
신바람이 오르더니, "근데 이걸 우리끼리 하느냐? 그 무슨 재미로? 괜찮은 총각 셋과 함께
즐긴다 그 말씀이야." 그녀는 떠돌이 약장수 흉내까지 내며 반짝이는 눈으로 두 친구를 빠르
게 훑었다.
"남자들......?"
안경자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고,
"어떻게 괜찮은데?"
박영자는 생긋 웃으며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얼굴 미남에, 두뇌 명석하고, 학벌 일류에, 일이 잘 풀리면 넌 판검사 영감님 부인이 될
수가 있지."
어떠냐는 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는 강숙자의 얼굴에 장난기가 넘쳐 났다.
"법대생들이구나? 근데 어떻게 그리도 다 겸비한 사람들을 셋씩이나 구했니?"
"그건 차차 알면 되고, 빨리 좋으냐 싫으냐만 딱 잘라서 말해."
"그야 말해 뭐해. 싫다면 내숭이잖니?"
"경자, 아니 자경이 넌?"
"아이, 몰라......."
안경자의 얼굴이 더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기세 좋게 남천장학사에 전화를 건 강숙자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었다.
김선오가 느물느물 놀리다가 공부를 핑계로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다.
"나럴 무시혀. 니 어디 성허나 봐라."
강숙자는 입술을 깨물며 바르르 떨었다.
"아유, 기가 막혀서 참. 경자야, 그 나 영어 가르쳤던 김선오 있지? 그게 글쎄 뭐라는지
아냐? 우리 아부지 허락을 받아야 가겠다면서 거절을 한다, 글쎄. 그게 공부 좀 한다고 시건
방지게 날 무시한다니까. 가만 안 둘 거야."
강숙자는 김선오에게 자존심이 상한데다 친구들에게 체면이 안 서 화가 머리꼭지를 뚫고
있었다.
"그야 그렇지. 아부지가 아시면 생야단 안 맞겠어? 널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 입장
이 있지. 이런 계획을 세웠으면 니가 미리 아부지한테 말씀드렸어야지. 이건 니 실수니까 잊
어버리고, 차라리 잘됐어, 괜히 어색하고 한 것보다는 우리끼리가 더 재미있지 뭐.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언제나처럼 안경자는 강숙자를 다독거리며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마음썼다.
"무슨 얘기들이니? 나만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박영자가 두 사람을 향해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희고 작은 듯한 얼굴에 선이 가늘어 순
해 보였지만 동그란 눈이 영리하고 눈치 빠른 느낌을 주었다.
"으응, 그거. 그게 다른 게 아니고......."
안경자는 남천장학사에 대해서 아는 대로 대충 설명했다.
"호오, 얘기 듣고 보니 더 구미 당기는데? 그건 그물에 든 고기떼나 마찬가지니까 서두를
것 없고, 오늘은 우리끼리 즐기면 되잖니? 자아, 어떤 영화 보러 가지? 빨리 정하자."
박영자는 간단하게 정리해 버렸다. 안경자는 남자들에 대해서 그렇게 거침없이 말하는 것
에 놀라며 역시 서울애들은 다르다는 것을 또 느끼고 있었다.
"영화 프로 고르는 건 나한테 맡겨. 요새 볼 만한 게 세 편이야. <차와 동정>, <유혹의 파
리>, <상처뿐인 영광>. 그런데 <차와 동정>과 <유혹의 파리>는 개봉관이 아닌 게 흠이야. 우
리가 입시공부하는 사이에 개봉관 상영 이 끝났거든."
마침내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강숙자를 보며 안경자는 웃고 있었다. 강숙자는 고등학교 시
절에 벌써 영화 팸플릿을 300가지 이상 모아 가지고 있었다. 시험 때도 막무가내로 영화관
에 갔다가 잡히곤 했는데, 그 분야에 대해서는 박사가 따로 없었다. 훈육주임은 마냥 두통거
리 취급이었지만 아이들한테는 인기 만점이었고, 그러면서도 연애사건은 한 번도 일으키지
않아 졸업은 무사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도 많이 읽어 생각 깊은 데가 있었고, 특히
마음씨가 곱고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성격이었다. 아이들은 자신과 강숙자가 친한 것을 이해
하지 못했지만 강숙자는 공부 좀 하는 애들이 갖지 못한 좋은 점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
고, 어쩌면 자신이 하고 싶으면서도 억제하고 감추고 하는 또다른 자신을 강숙자한테서 발견
하는 그 야릇한 감정이 우정의 샘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럼 그게 말야......, 영화의 질이냐 상영관의 질이냐 하는 문제 아니겠니? <상처뿐인
영광>은 남성 취향이고, <유혹의 파리>는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라 유치하고, 역시 영화의 질
로 따져 <차와 동정>이 젤 낫지 않을까?"
박영자의 차분차분한 의견이었다.
"역시 넌 안목이 있구나. 다음, 넌?"
강숙자가 안경자에게 눈을 돌렸다.
"나야 전문가 의견에 무조건 동의."
"됐어 그럼, <차와 동정>이야. 나 옷 갈아입을게." 강숙자는 윗목으로 가 옷장문을 열면
서, "좀 미안한 말이지만 국산 영환 왜 그리 유치하고 비린내 나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봐주
려고 해도 눈만 아프고 본전 아까워. 내가 남자였으면 한바탕 멋진 영활 만들었을 텐데. 아
유 분해, 이놈의 여자." 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며 연상 지껄였다.
"그래도 쓸 만한 배우들은 몇 있잖아."
박영자가 생과자를 먹으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김승호, 황정순 같은 사람이야 특급 배우지. 김승호야 쟝 카방이 무색하
고, 황정순이야 잉그리트 버그만이 어찌 당하겠어. 그 사람들이야 한국에 태어난 게 불행이
지."
"아까 무슨 소린가 했더니 너 정말 전문가로구나?"
박영자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나란히 집을 나섰다.
"의대 공부는 할 만해?"
박영자가 안경자에게 물었다.
"공부는 무슨......, 앞으로 해봐야지."
안경자가 쑥스럽게 웃었다.
"너 산부인과 해라. 우리 덕 좀 보게."
강숙자가 불쑥 한 말이었다.
학교의 담을 따라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포근하고 눈부신 봄햇살 속에서
그 샛노란 꽃의 홍수는 싱그러운 생명감을 맘껏 발산하고 있었다. 흰옷을 입고 스치기만 해
도 금세 샛노랗게 물들 것 같은 그 개나리꽃의 낭자함은 믿기 어려운 계절의 기적이고 경이
로움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겨울 추위 속에서 얼어죽어 버린 것 같았던 가늘고 긴 가지
들에서 그리도 화사하고 찬란한 꽃들이 피어난 것이었다.
유일표는 창밖으로 그 꽃무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리 지은 꽃들의 아름다
움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꽃물결 위에 어른거리는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속으로
어머니, 어머니를 간절하게 부르고 있는 그의 가슴은 눈물로 젖고 있었다. 어머니의 모습은
문득문득 떠올랐고, 그럴 때면 무작정 어머니 있는 곳으로 가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리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눈물로 목이 메었다. 꿈에서도 울다가 잠이 깨어 더 자
지 못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밤이면 어머니 앞으로 긴 편지를 썼다. 형도 그러는
지 어쩐지 알 수가 없었지만, 자신의 그런 마음을 형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떴다. 상이용사!"
누군가의 억누른 외침으로 소란스럽던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상이용사는 담임선생의 별명
이었다. 6.25 때 하필이면 오른팔, 그것도 팔꿈치에 총을 맞아 담임선생의 팔은 반으로 꺾
인 것처럼 표가 났다. 그런 팔로도 칠판글씨를 너무 잘 쓰는 담임선생은 자신이 타고난 병신
이 아님을 알리기라도 하듯 첫 시간에 팔을 다친 연유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10분 간의 휴
식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담임선생의 별명은 상이용사로 결정났다.
"오늘은 오전수업이다. 오후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열리는 재일교포 북송반대 궐기대회에 참
석한다. 시간 절약을 위해서 청소는 전체가 하고, 1시 30분까지 운동장에 집합하도록!"
인사를 받고 담임선생이 돌아서는데 한 학생이 외쳤다.
"우리 반은 지난번 대통령 생일 행사 때 동원됐잖아요."
"맞아요, 윤번제로 돌아간댔잖아요."
다른 목소리가 더 크게 응원을 했다.
"이 녀석들아, 잔소리 말어. 오늘은 1학년 전체 동원이야. 이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
한 걸 알아 몰라?"
교실 안을 휘둘러보는 담임선생의 곤두선 눈길 앞에서 학생들은 그만 잠잠해졌다.
"에이, 오늘 또 죽어났다."
"다 김일성 그 새끼 때문이야."
"우리가 여기서 죽어라고 핏대 올린다고 되는 게 뭐냐. 좆도."
"걸핏하면 행사다 궐기대회다, 아유, 지긋지긋해."
학생들은 끼리끼리 모여앉아 감정을 터뜨려댔다.
그들은 재일교포 북송문제에 대해서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전교생
이 운동장에서 하는 애국조회 때 교장은 벌써 서너 차례나 북송 결사반대와 함께 반공교육
을 실시했다. 그리고 또 담임선생들과 사회과목 선생들이 비슷비슷한 말들을 반복해 왔었
다. 일본정부는 지난 2월 13일 재일교포 북송을 정식으로 결정했고, 한국 정부는 즉각적인
반대의사 표명과 함께 전면적 저지운동을 선언했다. 그에 따라 반대 궐기대회가 전국에서 일
어나기 시작했다. 모든 신문들은 거의 날마다 궐기대회 상황을 보도하면서 두 달째를 보내
고 있었다.
유일표네 학교 학생들은 묵직하게 늘어지는 책가방을 든 채 세 줄로 대열을 맞추며 종로
를 걸어가고 있었다. 온통 새까만 그들의 교모와 교복은 4월의 쾌청한 오후 날씨 속에서 꽤
나 무더워 보였다. 더구나 신입생인 그들의 모자와 옷은 모두 새것이라서 까만색은 더욱 선
명했던 것이다. 그 까마귀떼 같은 검은 대열 속에서 금방 눈에 띄는 한 학생이 있었다. 그
건 키가 유난히 커서도 아니었고 몸이 턱없이 뚱뚱해서도 아니었다. 그 학생의 모자와 교복
은 검정물이 바래 붉은 기가 돌 정도로 낡아 있었다. 그가 바로 유일표였다.
"챙피하면 교복 사."
형이 말했었다.
"아니, 떨어진 데 없어."
유일표는 속마음과는 달리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어머니를 생각한 것이다.
유일표는 새 교복을 입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새 기분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가난을 표내고 싶지가 않았다. 또, 교복으로 아이들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불쌍하게 보여지는 것은 더구나 싫었다. 그런 기분을 다 합치면 결국 창피스러움이었다. 그
러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기분대로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모자와 교복을 새로 사면 그만큼
어머니의 고생이 커지고, 서울로 이사 올 날도 늦어지는 셈이었다. 유일표는 너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창피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다만 일시적인 불편일 뿐이다, 하는 어느 유명한 사람의 말을 곱씹으며.
서울운동장은 학생들로 새까맸다. 교복에 하얀 목깃을 단 절반 정도의 여학생들 때문에 그
나마 좀 숨통이 트이고 있었다 북괴 김일성 도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이 길게 이어지고,
다음 사람이 나와 또 비슷한 내용으로 외쳐대고, 남녀 학생대표가 나와서 북송 결사반대 웅
변을 하고, 학생들은 너무 많이 들어온 똑같은 말에 몸들을 비비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부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술렁거림은 물결치듯 빠르게 뒤로 퍼
져나갔다.
"혈서를 썼다, 혈서!"
이 말은 서늘한 정적을 뿌리며 뒤로뒤로 굽이쳐 갔다.
"청년학도 여러분, 세 명의 애국학생들이 북괴도당의 만행을 규탄하고 재일교포 북송을 결
사반대하는 뜨거운 결의로 혈서를 썼습니다. 이 장한 용기와 투철한 애국심에 우리 다같이
열렬한 박수를 보냅시다아!"
확성기에서 이런 외침이 울러퍼지면서 단상에서는 세 개의 혈서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학
생들은 그때야 몸가짐을 바로잡고 박수를 쳐댔다.
"북괴도당은 북송 만행을 중단하라!"
"재일교포 강제북송 결사반대한다!"
"삼천만이 하나되어 북진통일 완수하자!"
확성기의 선창에 따라 학생들은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늘 똑같이 만세삼창으로 궐기대회
는 끝이 났다.
학교마다 그 자리에서 해산을 하는 바람에 넓은 운동장은 금세 소란으로 바글바글 끓었
다. 학생들은 서로 친한 아이들을 부르고 찾고 하느라고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보래 깡다구야, 퍼뜩 나가자 마."
모자를 밀어올린 이상재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는 서너
줄 뒤에서 유일표 쪽으로 온 것이었다. 유일표는 60명 중 출석번호가 31번이었고 그는 39번
이었다.
"그래, 나가자 마."
유일표는 손부채를 부치며 이상재의 말을 흉내냈다.
"이, 일표 니 안직 있었구나."
단추를 서너 개 따놓은 최주한이가 급한 걸음을 멈추며 유일표의 어깨를 쳤다.
"이 헹님 기둘리고 있었드나?"
장경식이가 헤벌쭉 웃으며 뛰어왔다.
"하! 또 촌놈 넷이가? 좋다 마, 퍼뜩 나가서 찬 것부텀 묵자."
이상재의 말에 그들은 가방을 추슬러 들며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운동장 앞은 더 수라장이었다. 운동장에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뒤섞인데다
가 눈치 빠른 냉차장수들까지 몰려들었고, 덥고 목마른 학생들은 냉차리어카를 둘러싸고 바
글댔던 것이다.
"저거 머꼬? 벌떼 아이가?"
이상재가 냉차장수들을 보며 실망스럽게 어깨를 늘어뜨렸고,
"가자, 종로 쪽으로. 제과점에 점잖허니 앉아서 아이스케키도 묵고 빵도 묵자."
최주한이 말을 받았다.
"그거 좋다. 저기 머꼬, 상시럽구로."
장경식의 찬동으로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에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유일표
뿐이었다. 그는 그날 쓸 전차표말고는 돈이 한푼도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그동안에도 이런
자리를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려고 했다. 돈을 한 번도 내지 못하고 얻어먹기만 해야 하는 그
것은 낡아빠진 교복을 입고 남들 눈앞에 도드라지는 것에 못지않은 가난의 쓰라린 아픔이
고, 마음에 그늘이 지게 하는 일이었다.
"아 깡다구, 인자 니보고 하와이라꼬 놀리는 놈들은 진짜 없는기가?"
장경식이 유일표 옆으로 오며 물었다.
"그래, 이 보리 문딩아."
유일표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하, 일마가 이거 쫑코 믹이네. 우예 됐든 간에 니야 해방돼서 졸낀데, 내사 마 그 보리
문디 소리 듣기 싫어 똑 죽겄구마는, 우야은 좋노."
"그야 눠서 떡 묵기여. 니도 일표맨치로 깡다구 부리면 될 것 아니여."
최주한은 맘놓고 고향말을 써 댔다.
"치아라, 깡다구는 아무나 부리나. 일마 이거 쌈에는 영 맹탕인기라."
이상재가 자기보다 한 뼘 작은 장경식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거 당수를 배울 수도 없고 말다....... 우예 서울놈아들은 지방사람들을 그리 고약시
리 차별하노. 서울 인심 더럽다 카는 기 틀린 말이 아이라."
장경식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치아라, 인자 당수 배와갖고 어느 세월에 써묵노. 그라고 말다, 쌈은 우리 일표맨쿠로 깡
다구로 하는 기제 당수 유도로 하는 기 아닌기라. 일표 일마 이거 지보담도 10센치는 더 큰
42번한테 뎀빈 것부텀 깡다구고, 코피는 지가 먼저 터지갖고 항복은 안 하고 되레 박치기 믹
이고 귀 물어뜯고 늘어져 결국 쌈에 이기는 그 깡다구가 어데 보통 깡다구가. 고향도 아이
고 서울놈아들 판에서 말다. 짱구 니넌 택도 없다."
이상재는 벌써 몇 번째 한 이야기를 또 하면서도 처음의 감정이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나고 있었다. 그건 기가 센 자에 대한 남자로서의 본능적인 경이감과 부러움의 반응이었
고, 또 하나는 유일표와는 달리 자신은 서울아이들에게 여전히 보리 문둥이라고 놀림을 당하
고 있기 때문이었다.
입학을 하자마자 그들은 엉뚱한 놀림감이 되기 시작했다. 서울아이들은 경상도 출신을 보
리 문둥이, 전라도 출신을 하와이, 충청도 출신을 핫바지라고 놀려댔다. 그건 각 지방사람들
이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말이 그대로 학생들한테까지 옮겨진 거였다. 그런데
그 별칭에 지방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적대시하는 서울사람들의 감정이 들어 있다는 것이 문제
였다.
유일표는 학교에서까지 그 놀림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입학하기 전에 동
네의 여기저기에서 당하며 분이 쌓여 있었다. "그으래에에, 하와이였어어?" 미리 알았으면
방을 세놓지 않았을 거라는 듯 주인여자는 고개를 틀어돌렸고, "학생이 하와이야?" 콩나물
을 팔기 싫다는 듯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봉지에 콩나물 담던 손을 멈추었고, 우물에 물을 길
러 가면 여자들이 흰눈을 뜨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런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서 언뜻 떠오
른 것이 형의 담임선생이었다. 그분이 머뭇거리다가 하지 않았던 말이 바로 이런 차별에 대
한 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일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런 차별을 하는
것인지, 왜 하와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김선오 형을 찾아갔다.
형은 알 것 같지도 않았고, 안다고 해도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고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
는 것에 관심 쓴다고 퉁이나 맞을 것이 뻔했다. "어린 너도 당했다 그거지. 그게 서울이야.
차차 알게 될 거야." 김선오 형은 떫게 웃고 말았다. "형은 왜 뭘 물으면 다 알면서도 대답
을 안 해요? 그건 아는 사람 도리가 아니잖아요." "요게 볼수록 맹랑하다니까. 수학, 영어
를 물으면 안 그러지." "그따위 건 학교에서 배우는 것으로 충분해요." "하 요거 보게. 배고
픈데 풀빵이나 사먹고 올라가라. 세상엔 미리 알아서 좋을 게 없는 것이 많아." 김선오 형에
게 돈만 20환을 받아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유일표는 언제까지고 아이들의 놀림감이 될 수는 없었다. 한 달을 참다가 마침내 한 놈을
골랐다. 단 한 번으로 끝내기 위해 일부러 자신보다 큰 42번을 찍었다.
"이 씨팔놈아, 아가리 조심해."
"이 하와이새끼가, 죽고 싶어!"
"그래, 한판 뛰자 그거야?"
"너 이새끼, 당장 나와!"
그래서 방과후에 아이들이 에워싼 변소 뒤에서 한판 싸움이 벌어졌다. 그 싸움에서 이긴
다음날로 유일표의 별명은 깡다구가 되었고, 그 누구도 다시는 하와이라고 놀리지 못했다.
당연한 것처럼 이상재가 밀착해 왔고, 그의 동창인 장경식이 연결되었고, 같은 식으로 유일
표의 동창인 최주한이 엮어지면서 그들 넷은 타향살이의 병을 앓는 마음을 서로서로 붙들었
다.
그들은 동대문 전차종점 건너편에 있는 제과점을 찾아냈다. 동대문은 종점만이 아니라 전
차의 차고까지 있어서 여간 번잡하지 않았다.
"보이소 예, 여게 앙꼬 아이스켁 시무 개허고, 빵 시무 개 퍼뜩 주이소."
자리에 앉자마자 교복을 헤풀며 장경식이 소리쳤다.
"서울사람한테 말할 때는 사투리 너무 쓰지 말어. 잘 못 알아들어."
유일표가 모자챙으로 부채질하며 말했고,
"니 우짤라꼬 그라나?"
이상재가 놀란 기색으로 장경식을 쳐다보며 물었다.
"와? 니 우리 꼰대가 부산바닥 울리는 부잔 것 몰라서 그라나."
장경식이 짓궂게 웃었다.
"밥통아, 그기 아이고, 니 수중에 그만한 돈 지닛나 그기라."
"땁땁타 이 밥통아. 모지래믄 니 붕알 띠놓고 가은 될 거 아이가."
장경식이 키득키득 웃었다.
"내 돈 보태먼 된께 걱정덜 말어."
최주한이 공책을 부채질하며 말했다.
아가씨가 가져온 팥 아이스케이크와 빵은 작은 탁자를 가득 채우듯 했다.
"자아 묵자, 묵자."
장경식이 서둘러 아이스케이크를 집어들었다. 그들은 허겁지겁 아이스케이크를 먹어대기
시작했다. 마치 먹기 시합이라도 하듯 나무꼬챙이만 쌓일 뿐 아무도 말이 없었다.
"우야 어메야, 인자 살겄다."
제일 먼저 다섯 개를 먹어치운 이상재가 시원하게 숨을 토해냈다.
"보래, 아새끼들은 놀리고, 국어선생도 사투리를 뻐떡 고치라 케서 고치기는 고치얄 긴
데, 그기 수학문제 풀기보다 더 에로븐 기라. 내 가만 보니께네 주한이 일마에 비해 깡다구
니가 사투리를 마이 덜 씨는데, 그기 우짠 비결이고? 말 쫌 해보그라."
장경식이 입을 훔치며 진지하게 말했다.
"비결은 무슨 비결이야. 날마다 노력하는 거지."
유일표가 비식 웃었고,
"그 노력이 바로 비결 아이가."
이상재가 말을 거들었다.
"응, 그거 간단해. 예습하는 셈치고 국어책을 매일 한 과씩 소리내서 읽어. 그리고 사람들
하고 말할 때 국어책 그대로 말하려고 애쓰고."
"고것 참말로 존 방법인디?"
최주한이가 반색을 했고,
"일마가 이거, 깡다구는 진짜 깡다구네."
이상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디 말이여, 김일성이는 워째 재일교포럴 데래갈라고 허고 교포덜언 또 워째 북으로 가
는지, 그 설명을 허는 사람은 워째 하나또 없제?"
최주한이 빵을 먹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글타, 말 듣고 보이 글쿠마는."
장경식이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사회선생한테 질문해 봐."
유일표가 넌지시 말했다.
"그야 진작에 혀봤제."
"머시라 카드노? 그런 거 시험에 안 나오니 몰라도 된다 카드나?"
이상재의 말에 장경식이 쿡 웃음을 터뜨려 그만 입에 가득 담겼던 빵이 터져나왔고, 그
바람에 그들은 마구 웃어대기 시작했다. 말똥 굴러가는 것만 보아도 웃음이 터지는 나이였
던 것이다.
그들은 종로5가에 이르러 헤어졌다. 집의 방향이 서로 달랐다. 유일표는 전차를 탈까 어쩔
까 잠시 망설였다. 몸은 피곤했지만 그냥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전차를 타자면 종로4가까지
더 걸어가야 하는데, 그 거리는 곧바로 혜화동 로터리까지 걸어가는 것의 절반 정도였다. 어
차피 바로 전차를 못 탈 바에는 배도 불렀겠다 다리 아픈 것은 좀더 참고 전차표 한 장을 아
끼자는 계산이었다.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걸으며 유일표는 또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빵 다섯 개를 혼자 다
먹은 것이 형에게 너무 미안했다. 두 개는 형에게 갖다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러
나 안타깝게도 그건 속마음일 뿐이었다.
그리고, 유일표는 또 아버지를 생각했다. 세 친구와 자신의 차이는 바로 아버지가 있고 없
음의 차이였다. 태양이 없으면 지구는 종말이라고 했다. 자신은 영락없이 태양 잃은 지구였
다. 살아갈수록 그 느낌은 커져가기만 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아
버지......, 아버지.......
"학생, 일표 학생!"
유일표는 떨구고 걷던 고개를 돌렸다.
한 여자가 서둘러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유일표는 그때서야 자신이 혜화동 길에 접어들
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여자는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누, 누구세요?"
유일표는 어깨에 걸쳤던 가방을 내렸다.
"응, 일표 학생은 날 잘 몰라도 난 일표 학생을 잘 알아. 형하고 지나다니는 걸 몇 번 봤
거든. 난 강자숙이야."
강숙자의 눈인사에 유일표는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하며 어물거렸다. 그러면서 같은 고향사
람인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그 말씨에서 고향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배고플 텐데 우리 어디 가서 빵이나 좀 먹을까? 얘기도 하구."
유일표는 자신도 모르게 해를 흘끗 쳐다보며, 오늘은 웬 빵 풍년이냐 하는 생각을 했다.
"후후, 밥할 걱정 땜에? 시간 아직 멀었으니까 괜찮아. 자, 가자."
강숙자는 유일표의 팔을 살짝 잡았다.
어, 어 초면에 남자 팔을 막 잡네. 책 든 걸 보니까 대학생이 틀림없는데, 형하고 무슨 사
이지? 그래, 이 기회에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까짓 빵이야 서른 개도 먹을 수 있으니까.
유일표는 이런 생각을 하고 따라가면서 강자숙이라는 이름을 다시 뇌었다.
"아까 기운 없어 보이던데 딱 배고플 시간이야. 빵 맘껏 먹어, 우유도 마시고."
이렇게 말한 강숙자는 빵 열 개에다 우유까지 두 병을 시켰다.
"겁나네. 형제가 다 일류대학에 일류고등학교. 앞길이 환히 열렸잖아."
강숙자는 장난스레 말하면서도 유일표를 찬찬히 뜯어보는 눈길이었다.
"자, 자, 어서 먹어, 어서."
빵이 오자 강숙자는 포크로 빵을 찍어 유일표에게 건넸다. 유일표는 당황스럽게 빵을 받으
면서 얼핏 누나가 떠올랐다. 그 다정하고 정겨움이 흡사 살아 있을 때의 누나 같았다.
"저어......, 우리 형하고 잘 아세요?"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 예의도 차릴 겸해서 유일표는 입을 열었다.
"왜, 궁금해?"
유일표는 빵을 베물며 그저 웃었다.
"우리 결혼할 사이."
"예에.....?"
"아니, 왜 그리 놀래? 내가 그렇게 자격 없어 보여?"
유일표는 너무 놀라 빵을 떨어뜨릴 뻔했고, 이젠 또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
러웠다.
"염려 마, 다 장난이야." 강숙자는 가지런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는,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많이 먹어. 먹고 돌아앉으면 배고플 나이잖아. 형은 한 번 만난 것뿐이야"
하며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유일표는 그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보는 순간 피아노의 건반이 떠올랐다. 몇 년 전 교회
에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여는 순간 드러났던 그 새하얗고 쪽 고르던 건반 그 깨끗하고 산뜻
한 모습은 자신의 손으로 만지면 때가 묻을 것 같아 주저했을 만큼 아름답고 귀해 보였던 것
이다.
환한 웃음과 함께 드러난 그 치아의 아름다움은 피아노를 여는 순간 나타났던 건반의 바
로 그 아름다움이었다. 여자의 웃는 입이 그리도 아름답게 보인 것은 첫 느낌이었다. 연애소
설에서 말하는 키스의 단맛이란 저런 입에 카스했을 때 느껴지는 것일까. 아니야, 아니야.
저 정도면 형수가 돼도 괜찮잖아. 정도 많고 쾌활하고 얼굴도 예쁘장한데. 형이 늘 침울하
고 말이 없는 편이니까 저런 여자면 아주 잘 어울릴 텐데. 아니야, 내가 왜 이래. 유일표는
한순간에 일어난 이런 생각들을 지우듯 빵을 마구 넘겼다.
"같은 형제간인데도 일표는 인상이 형하고는 많이 다르네?"
강숙자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손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어떻게요?"
딴생각을 하다가 자기가 물을 기회를 놓친 것을 느끼며 유일표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글쎄, 그러니까 뭐랄까......, 사람 인상이라는 게 느낌으로는 분명한데 말로 하자면 잘
안 되는 것 알지? 으음......, 그러니까 형은 뭐라고 해야 하나......, 아이, 속상해. 간단
하게 배우하고 비교해서 말하자. 형은 그레고리 펙 같고, 일표 학생은 커크 다그라스 같애.
내 말 무슨 말인 지 알아듣겠어?"
눈을 크게 뜨고 유일표를 들여다보듯 목을 빼고 있는 강숙자의 얼굴에는 기대와 의문이 섞
여 있었다.
"그러니까 형은 사색적이고 전 저항적이다 그런 뜻인가요?"
"맞어, 맞어. 바로 그거야, 그거." 강숙자는 사람 많은 빵집인 것을 개의치 않고 환성에
맞추어 손바닥까지 치더니, "야아, 역시 일류학교 학생이라 어려운 문자까지 척척이구나."
혀끝을 살짝 내밀며 놀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유일표야말로 그런 상대방이 세상을 떠난 누나와는 정반대의 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
다. 누나가 분꽃이나 수선화 같다면 저 강자숙이라는 여자는 칸나거나 장미 같았던 것이다.
사람 많은 데서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교양 없는 짓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유
일표는 오히려 그 거침없고 활달한 행동이 좋아 보였다. 자신은 이런 데 들어오면 괜히 쭈뼛
거려지고 주눅 들고는 했다. 유일표는 상대방의 그 꾸밈없고 자유스런 행동에서 오래된 것
같은 친근감과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근데 말야, 일표 학생이 말을 풀어놓으니까 생각났는데 말야, 형은 철학적 분위기고 동생
은 행동적 분위기야."
"형은 지성적이고 저는 야성적이고요."
"어머머, 어쩜 그리 척척이야? 나하고 호흡이 아주 잘 맞네. 문학에 소질이 있나 보지?"
강숙자는 눈을 빛냈다.
"소질이 있긴요. 그런 식의 대구(對句)는 교과서에 흔히 나오는 걸요."
"역시 일류학교 학생다운 말씀이네. 그런데, 아까 배우 인상을 재깍 알아맞히는 걸 보니
영화 좋아하는 모양이지?"
"영화 좋아하지 않는 애들이 어디 있나요. 돈......."
유일표는 다음 말을 꿀꺽 삼켰다.
"응, 알았어. 그럼 앞으로 나하고 영화 구경 다닐래?"
"그게......."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거리던 유일표는, 저 여자가 왜 이렇게 나한테 친절하지? 혹시 형을
짝사랑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동안 자신이 물어볼 것을 놓치고 있었음을 깨달
았다.
"저어, 우리 형은 무슨 일로 만나셨어요?"
"으응, 시시한 일이었어. 우리 남동생 가정교사 땜에. 결국 형이 싫다고 거절했지만 말
야."
그 순간 이상한 느낌이 유일표의 머리를 스쳤다.
"형은 어떻게 만났는데요?"
"혹시 김선오 씨라고 알아? 형 선밴데, 그분이 소개했던 거야."
그렇구나! 자신의 예감의 적중에 유일표는 가슴이 섬뜩해지는 걸 느꼈다. 강자숙 저 여자
가 바로 강기수의 딸이로구나. 유일표는 자신의 감정 변화가 표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만 가봐야겠어요. 오늘 고맙습니다."
"빵 더 먹어."
"아니, 배 너무 불러요."
유일표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생각해 보았지만 그 여자는 자기 아버지와 우리 집안 간의 관계
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허물없고 친절하게 대할 수가 없는 일이
었다. 일류대학생들이 비싼 돈 들여가며 신문에 광고를 내고도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기 어려
운 형편에 형이 그 자리를 거절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덥석 빵을 얻어먹은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형에게는 영원히 비밀로 해야 할 문제였다.
유일표는 저녁밥을 먹지 못했다. 배가 부르기도 해서였지만,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해서였
다. 형한테는 친구들과 먹은 빵 이야기를 조금 부풀려서 했다.
밤9시쯤에 유일표는 변소로 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급행열차를 탄 설사였다. 뒤틀리는 배
를 붙안고, 아이고 그 아까운 빵이......, 그 아까운 빵이......, 그놈의 우유 때문이야,
안 먹던 속에 들어간 그놈이......, 유일표는 이런 생각을 뒤죽박죽 하고 있었다.
10시쯤 또 변소로 뛰었고, 12시쯤 또 뛰었다. 빵만이 아니라 그전의 살까지 훑어내리는
것 같은 심한 설사였다. 완전히 망했구나, 본전이 밑졌으니. 이런 생각을 하며 판자들 틈새
로 초롱초롱한 별들을 바라보다가 유일표는 언뜻 어머니를 떠올렸다. 아아, 이건 우유 때문
이 아니다. 어머니 몰래 원수 집안 것을 얻어먹어 벌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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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님의 한강
한 강 = 제1부 격랑시대 (1권)ㅡㅡㅡ 5. 만남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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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10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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