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현(許玄)
[고려]
문과] 경종(景宗) 99년미상(未詳) 시년미상(未詳)
[인물요약]
본인본관 | 양천(陽川) |
거주지 | 미상(未詳)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허선문(許宣文)
[조부(祖父)]
성명 : 허○○(許○○)
[증조부(曾祖父)]
성명 : 허○○(許○○)
[출전]
『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朴龍雲, 一志社, 1990.[330_16])
시조(始祖) 공암촌주(孔巖村主) 허선문(許宣文) 일작(一作 )대광공(大匡公) 가락국
(駕洛國)수로왕자(首露王子)사성지후(賜姓之後)예세거 공암현무(裔世居公巖縣務
농후저려조(農厚儲麗祖)남정식진(南征食盡)병피공내륜호궤군위복진수극 견훤 려조
가기공봉위 공암촌주수위 관적구기왕 소요정 하(兵疲公乃輪犒餽軍威復振遂克甄萱麗
祖嘉其功封爲孔巖村主遂爲貫籍舊基枉逍遙亭下)남향 구설 공묘 재금 양천 남산면 능
곡 운이실전(公墓在今陽川南山面陵谷云而失傳). *龜城 병자보 기록내용.
2세 현(玄) 상위국봉어추봉소부소감(尙衣局奉御追封少府少監 配位 失傳
과거 및 취재
본인본관 | 양천(陽川) |
거주지 | 미상(未詳) |
태자사의랑) 송 함평 무술 려 목종 원년 을과 급제 역임 목종덕삼조(宋 咸平 戊戌 麗 穆宗
元年 乙科 及第 歷任 穆 顯德三朝)
4세 정(正) 태자태보 행상서 예부시랑{太子太保行尙書禮府侍郞) 夫人 江陵金氏
5세 허재(載)
卒開府儀同三司檢校大保戶部尙書致仕許公 墓誌銘幷序」
文林郎試尙書禮部侍郎知 制誥賜紫金魚袋金 精 撰」
維甲子歲四月十六日吾友試禮部員外郎」
許純移書于僕曰吾父歿矣請爲之銘予知公」
甚詳不敢辞焉公諱載字壽康孔嵒人也曾」
祖玄於 景宗朝擧進士中甲科尋拜▨▨郎」
攻文博士別有功進爲功臣贈少府少監祖元中」
乙科拜內史舍人知制誥考正官至大倉丞不」
幸早夭妣金氏贈江陵郡大夫人年八十五而終」
公早孤事母善孝然家貧母老不能繼祖業遂」
飮恨乃托外高祖三韓功臣金公兢廉門蔭爲」
吏自兒童凛然若成人常以守節奉公立志」
肅廟在宥時出任鐵州防禦判官理行第一及」
還京輦入内䆠遂爲 睿廟所深知凡事之」
大小關乎國體者皆預焉洎 睿廟用事東」
鄙公以兵馬錄事從之往往有雋功偉績越一」
日拓定九城以兵馬判官入守吉州其時九城中」
唯吉最近虜境以故虜攻之日甚元師與僚屬」
皆奮然欲救之至于再至于三遂不尅於是虜」
乘勝日以勁兵來攻其城幾爲虜所敗公獨出」
奇令人一夜督置重城訖虜皆膽落乃退公嬰」
城固守凡一百三十餘日矣虜遂納款請和甚切」
國家開許然後反 命噫三軍得完首領皆公」
力也 睿王以謂祖宗時雖有元興慈州之」
固守莫之先矣於是備禮 陛見勞慰甚」
厚常次擢用今 主上卽位甞論功詔曰惟」
守吉之尤外援未來賊攻甚急城壞將陥」
勢迫甚危力窮難支計無從出卿乃躬督」
疲卒密築重墻横身登陴冐矢捍敵以二」
千之餘衆却六萬之銳鋒俾師有庸唯」
爾之力故 我聖考將大用而未果逮于」
寡人念慮公而不忘乃累加奬拔位至守」
司徒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
兵部事越丙午歲大内有變公以至誠衛」
社但孤直無術而不遜遽爲當時用事者所」
沮然上深知公無他姑欲寖群議乃貶豊」
州防禦使公恬然不以爲憂一切蒞事有」
踰少壯時且豊城在西海濱與皇宋大遼」
等兩國通路甚邇國初築城以備不而」
太平日久無復爲慮由是墻壁皆爲風雨所」
漂迫鞠爲茂草民不聊生公慨然申報朝廷」
得旨修復之凡一千三百四十餘間遂作新」
器械以待暴客又報朝廷以近道州郡輪輪」
轉米留納上件城永充軍資其餘獄頌若」
決江河民到于今思之如父母及調滿拜兵」
部尙書致仕公天賦疾悪如仇讎不避權貴」
故多有忌憚者遂乘隙逗遏 王命公謂」
死生禍福天也曾不芥滯但數年間俸祿」
頓絶止賣財資以備日給若將終身焉賴」
諫官無事改授開府儀同三司戶部尙書」
依前致仕至乙卯歲西京叛 上命將討」
▨西人閉城逆 命經年不降」
上問群臣曰奈何群臣皆以出軍攻城爲」
上策公獨上書云露師於外爲賊所擒」
古或有無况西京臣甞再從事留守其」
城險固眞古所謂金城不可攻破宜築」
城於傍藏兵休卒以待其降 上深」
然之以其書付中軍兵馬使於是設五城」
加以矩堙攻之然後乃降故 上深重」
之然年旣老矣竟不牽復豈其命歟公」
先夫人李氏生一男一女而後封廣評郡」
大君次娶崔氏生一男鈞母與子並早世」
今夫人上黨郡夫人金氏事公順出」
自至誠然無子亦可惜也公男純娶平」
章事趙公仲璋女女適定州使閤門祗」
侯愼永鄰公享年八十三以是年」
春二月日乙未薨于家三月十日辛」
酉火葬于汀州界內東麓 上聞之」
軫悼特加賻贈焉有詔拜太傅至秋八」
月十八日丁酉藏骨于此乃銘曰」
白首一節 惟公其人 于彼東鄙」
功業嶙峋 位登廊廟 自任經綸」
遽然遭變 數歲固窮 時有一士」
諫之以忠 群疑頓釋 俸祿乃豐」
懸車故里 和易怡怡 蕭然化去」
侍側莫如」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第1石>
개부의동삼사 검교대보 호부상서(開府儀同三司 檢校大保 戶部尙書)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은퇴한 뒤 돌아가신 허공(許公)의 묘지명과 서문
문림랑 시상서예부시랑 지제고(文林郞 試尙書禮部侍郞 知制誥)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정(金精)이 지음.
갑자년(인종22, 1144) 4월 16일에 친구인 시예부원외랑(試禮部員外郞) 허순(許純)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명(銘)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공을 매우 잘 알고 있으므로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공의 이름은 재(載)이고, 자는 수강(壽康)이며, 공암(孔嵒) 사람이다. 증조 현(玄)은 경종(景宗) 대에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갑과(甲科)에 합격하고 이어 유림랑 공문박사(儒林郞 攻文博士)의 벼슬을 받았는데, 특별한 공적으로 공신이 되고 소부감(少府監)에 추증되었다. 조부 원(元 ▨)는 을과(乙科)에 합격하여 내사사인 지제고(內史舍人 知制誥)에 임명되었고, 아버지 정(正)은 벼슬이 대창승(大倉丞)에 이르렀으나 불행하게도 요절하였다. 어머니 김씨는 강릉군대부인(江陵郡大夫人)에 추증되었으며, 85세로 사망하였다.
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효도로 잘 섬겼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는 나이 들어 조업(祖業)을 능히 이을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안타까움을 머금고 외고조(外高祖)인 삼한공신(三韓功臣) 김긍렴(金兢廉)공의 문음(門蔭)에 의탁하여 이(吏)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늠름하기가 어른과 같았으며, 항상 절도를 지키고 공(公)을 받드는 것으로 뜻을 세웠다.
숙종(肅宗)이 재위할 때 철주 방어판관(鐵州防禦判官)이 되어 나갔는데 다스림이 제일이었다.
<第2石>
서울로 돌아오자 내환(內宦, 內侍)에 들어갔다. 마침내 예종(睿宗)에게 깊이 알려져서 국체(國體)에 관계된 크고 작은 사무에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예종이 동쪽 변경의 일을 처리하려 할 때에 공은 병마녹사(兵馬錄事)로 종사하면서 때때로 훌륭한 공을 세웠고, 하루가 멀게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9성을 개척하여 정할 때에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서 길주(吉州)에 들어가 지켰다. 당시 9성 중에서 오직 길주가 오랑캐 땅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오랑캐가 쳐들어오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하여졌다. 원수(元帥, 尹瓘)와 요속(僚屬)들이 모두 분발하여 구하고자 하였으나 두 번 세 번에 이르러서도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오랑캐들이 승기를 타서 하루는 날랜 군사로 공격하여 오니 그 성이 거의 오랑캐에게 패하게 되었다. 공이 홀로 기묘한 꾀를 내어 사람들에 명령하여 하룻밤 만에 서둘러서 겹성[重城]을 쌓게 하였는데, 성이 완성되니 오랑캐들이 모두 낙담하고 이에 물러갔다. 공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킨 지 무릇 130여 일이나 되자, 오랑캐가 마침내 진심으로 복종하고 간절하게 강화를 요청하였으므로 나라에서 허락하였다. 그 뒤 그 일을 보고하여 아뢰었으니, 아, 삼군(三軍)이 수령(首領)을 완전히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힘 때문이었다. 예종이 “선대의 임금이 국경을 평정할 때에 비록 원흥(元興)과 자주(慈州)를 굳게 지켰다고 하지만, 이보다 앞서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예를 갖추고 임금을 알현하자, 노고를 매우 후하게 위로하고 절차에 따라 탁용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임금[仁宗]이 즉위하여 공훈을 논하면서 조서에서 말하였다.
“생각하건대 길주를 지키는 일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밖에서 원병은 오지 않고 적의 공격은 점점 급해져서 성은 무너지고 바야흐로 함락되려고 하니 형세가 급박하고 매우 위태로웠습니다. 힘이 다하여 지탱하기가 어렵고 계책이 나올 것도 없었는데, 경이 이에 몸소 피곤한 병졸들을 독려하여 몰래 성벽을 겹으로 쌓았습니다. 몸을 비껴 성벽에 오르고 화살을 무릅쓰고 적을 막아, 2천 남짓한 무리로 6만의 굳센 적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군사들에게 공을 세우게 한 것은 오직 그대의 노력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우리 선왕께서 장차 크게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데, 과인에 이르러 큰 공적을 생각하여 잊지 않고자 합니다”
이에 거듭 표창하고 발탁하여 지위가 수사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守司徒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兵部事)에 이르렀다.
병오년(인종 4, 1126)에 궁궐 안에 변고가 일어나자 공은 정성을 다해 사직을 지켰다. 다만 홀로 곧고 방도가 없어도 타협하려 하지 않으니 곧 당시 권세를 잡은 자가 싫어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공이 다른 마음이 없음을 잘 알아서 짐짓 뭇 논의를 가라앉히고자 이에 풍주 방어사(豊州防禦使)로 좌천시켰다. 공은 평안한 채로 근심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젊었을 때보다 뛰어났다. 또 풍성(豊城)은 서해(西海)의 바닷가에 있어서 송(宋)과 요(遼) 등
<第3石>
양국의 통로와 매우 가까웠다. 개국 초에 성을 쌓아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으나 태평한 날이 계속되자 걱정할 일이 없어져서, 성벽이 모두 비바람에 무너져 내리고 잡초가 무성하였으며 백성들은 민생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공이 개탄하여 조정에 아뢰고 명령을 받아 수리하고 복구한 곳이 무릇 1,340여 칸이었다. 새로이 무기를 만들어 적에 대비하고, 또 조정에 보고하여 가까운 도(道)와 주군(州郡)의 수전미(輸轉米)를 이 성에 두게 하여 길이 군자(軍資)에 충당하게 하였다. 나머지 옥사(獄事)와 송사(訟事)도 마치 강물의 물꼬를 트는 것 같이 처리하니, 백성들이 지금까지 부모처럼 생각하고 있다.
임기가 끝나자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되어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공은 천성이 악을 원수와 같이 미워하여 권귀(權貴)를 피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꺼려하는 자가 많았으니, 마침 틈을 타서 왕명이 막히게 된 것이다. 공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과 화(禍)와 복(福)은 하늘에 달려있는 것이니 조금도 마음에 맺힐 것이 없습니다. 다만 여러 해 동안의 봉록(俸祿)이 갑자기 끊어졌으니 살림을 팔아 날마다의 비용에 대비하는 것을 일평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간관(諫官)의 말에 힘입어 개부의동삼사 호부상서(開府儀同三司 戶部尙書)로 고쳐 임명되고, 먼저와 같이 벼슬에서 물러났다.
을묘년(인종 13, 1135)에 서경(西京)이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이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나
<第4石>
▨ 서경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명을 거역하면서 해가 지나도록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으니 여러 신하들은 모두 군사를 내어 성을 공격하는 것을 으뜸가는 계책으로 삼았다. 공이 홀로 글을 올려 “군사를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적에게 사로잡히게 하는 일은 예전에는 간혹 있었습니다. 하물며 서경은 신이 일찍이 두 번이나 유수(留守)로 근무한 곳인데, 그 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진실로 옛말에 ‘금성(金城)은 가히 공격하여도 파괴할 수 없다’고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성을 쌓아 병졸을 곁에 감추어 두고 쉬게 하면서 끝까지 그들이 항복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과연 그러하다고 여겨 그 글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에게 내려주었다. 이에 오성(五城)을 쌓고 더하여 흙을 돋우어 공격하니 그 뒤에야 항복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임금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들어 끝내 다시 벼슬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의 첫 부인 이씨(李氏)는 1남 1녀를 낳고 죽었는데 광평군대군(廣評郡大君)에 봉해졌다. 다음 최씨(崔氏)와 결혼하여 1남 균(鈞)을 낳았으나, 모자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지금 부인 상당군부인 김씨(上黨郡夫人 金氏)는 공을 섬기는데 공손하고 순종함이 지성으로부터 나왔으나, 자녀가 없으니 또한 애석하다. 공의 아들 순(純)은 평장사(平章事) 조중장(趙仲璋)공의 딸과 결혼하였고, 딸은 정주사 합문지후(定州使 閤門祗候) 신영린(愼永隣)에게 시집갔다.
공은 향년 83세로, 올해 봄 2월 을미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며, 3월 10일 신유일에 정주(汀州) 땅 안의 동쪽 기슭에 화장하였다. 임금이 듣고 몹시 슬퍼하며 특별히 부의를 더하게 하고 조서를 내려 대부(大傅)를 제수하였다. 가을 8월 18일 정유일에 이 곳에 유골을 묻고, 이에 명(銘)을 짓는다.
늙어서도 절개가 한결같은 이는 오직 공 그 분뿐이니
저 동쪽 변방에서 공업(功業)을 우뚝 쌓았다.
재상[廊廟]의 지위에 올라 국가의 정치를 맡았으나
뜻밖에 변고를 만나 여러 해 동안 매우 곤궁하였다.
때에 한 선비가 있어 충성으로 간언하니
뭇 의심이 일시에 풀려지고 봉록(俸祿)이 이에 풍성하여졌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가 온화하고 편안하며 즐겁게 지내다가
조용하게 가시니 곁에서 모시는 사람도 알지 못하였도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고려시대사인물
고려후기 좌부대언, 좌대언, 밀직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출생일 미상
좌부대언, 좌대언, 밀직부사
6세 허순(許純)
고려시대사인물
고려전기 풍주방어사, 동북면 병마부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고려시대의 정안임씨·철원최씨·공암허씨 가문분석」 ( 박용운 ,『한국사논총』3,1978)
7세 이섭(利涉)
과거 및 취재
본인본관 | 양천(陽川) |
거주지 | 미상(未詳) |
선발인원 | 27명 |
관직 | 직사관(直史館) |
8세 경(京)
과거 및 취재
초명(初名) | 허장(許章) |
본인본관 | 양천(陽川) |
거주지 | 미상(未詳) |
선발인원 | 34명 |
관직 | 좌복야(左僕射) |
과거 및 취재
본인본관 | 양천(陽川) |
거주지 | 미상(未詳) |
선발인원 | 36명 |
관직 | 학사(學士) |
선발인원 | 36명 |
관직 | 학사(學士) |
UCI | G002+AKS-KHF_12D5C8ACF5FFFFB1233X0 |
초명(初名) | 허의(許儀) |
자(字) | 온독(韞櫝) |
시호(諡號) | 문경(文敬) |
생년 | 계사(癸巳) 1233년 (고종 20) |
졸년 | 신묘(辛卯) 1291년 (충렬왕 17) |
향년 | 59세 |
합격연령 | 26세 |
본인본관 | 양천(陽川) |
거주지 | 미상(未詳) |
선발인원 | 33명 |
관직 | 중찬(中贊) |
고려시대사인물
고려후기 판밀직사사, 참문학세자보, 첨의중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고려묘지명집성 (김용선 편저, 1993)
「고려 묘지명에서 보이는 국학 관련 기사 검토」 ( 이중효 ,『호남문화연구』27,1999)
三子 허관(冠) 판도좌랑공(版圖佐郞公)
四子 허총(寵)
철원최씨 소생
一子 허부(富) 대제학공(大提學公)
보책기록
동주사 일작 상서(東州事 一作 尙書 夫人 幸州奇氏 父 判版圖 洪碩 祖 侍中 강정공(康靖公)
기윤숙(奇允肅) 曾祖 平章事 기수전(奇守全) 外祖 起居郞 박익정(朴益旌) 竹山人.
12세 밀직부사(密直副使),선(瑄), 제(弟), 판사공 기(琪), 제(弟) 소(玿).
12세 판사공(判事公) 허기(許琪)
판사공은 11세조 諱 고려말 이부상서(吏部尙僉議府 찬성사(贊成事)칙수동주사(勅授東州事)
諱 허정(許程)의 二子이시다.
참고문헌:고려사,고려사절요
13세 종부령(宗簿令) 허위(許暐), .
판사공의 一子이시다.휘 허위(許暐)의 一子, 직장(直長,왕조실록에는 지평으로 기록됨)
휘 허모(許謨).사위 최유징(崔有澄).허모(許謀)의 子 휘 허절(許節) 二子 호군(護軍)(건공장군).
휘 허아(許雅) 女,경녕군 이비1395-1459년(母,태종의 두번째비?-1454 효빈김씨-효순궁주)
墓 아차산)의子 종실 단산도정(宗室丹山都正) 이수(李穗)에게로 시집을 갔다.1444-?후에
창선대부까지 올랐다.(李穗) 墓 경기도화성군신남리 자좌 표석이 있다. 전주이씨종회에서.
13세 중랑장(中郞將) 허승(許昇).
판사공 휘 허기(許琪)의 두번째 아드님이시다.여말(麗末) 중랑장공(中郞將公)이 직간(直諫)을
하다가 정주(定州)로 유배되었다.병자보 기록내용에는 중랑장 낙향 정주 송정촌(定州 松亭村)
으로 나온다.墓 왕강촌후이실전(枉康村後而失傳)되었다.一子 大護軍 휘 허균(許筠) 女 대사성
문화사람 임덕성.
13세 종부령(宗簿令),허휘(許暉).허승(許昇)의 아우시며.子 허상(許商),사위는 강석명
(姜錫命)..
14세 대호군 허균(許筠) 호(號)는 범매당(泛梅堂)이시요,중랑장 승(昇)의 아드님이시고,관
(官)은 대호군(大護軍)이니 공(公)의 자모(姿貌)가 순수(純粹)하시고 천문(天文)과 인사(人事)
를 구명(究明)하여 앙관(仰觀,{천문}),부찰(俯察,{지리})에있어 조예(造詣)에 깊어왕사(往事)
와 미래(未來)를 촟불과 같이 아시니 백세(百世)에 뛰어났으나. 그 문헌무징(文獻無徵)하여
위행이적(偉行異跡)이 다 세상(世上)에 전(傳)하지 않았으며.다만 세인(世人)들의 입을 통하
여 전하여왔다.지금(至今)에는 그 비문(碑文)에서 대략(槪略)만을 상기(想起)할뿐이다.신안
(新安.평남)으로부터 구성(龜城,평북)으로 반이(搬移)하셨으므로.자손(子孫)들이 세거(世居)
하다.묘(墓)는 구성군(龜城郡) 서산면(西山面) 렴잠동(濂岑洞) 석산봉(石山峯)경태팔수건해
좌정득갑구(庚兌八首乾亥坐丁得甲口)이시고 정부인(貞夫人)도 합폄하니 비(碑)가있다.
(출처 양천허씨 중앙종친회 이사(理事) 허영(許榮)근식(謹識)1971년 약보(略譜)에서.
[號 泛梅堂 官 大護軍 公 姿자貌모純순粹수學학究구天천人인仲중觀관俯부察찰靡미不불用용
其기極극故고往왕事사來래緖서若약燭촉照조龜구卜복也야嗚오乎호百백世세之지下하文문徵징
不부足其기偉위行행異이跡적不盡진傳전於어世세也야至지於어世세人인之지口구碑비干간今금司사
想상其기槩개耳이自자新신安안搬반移이龜구城성而이子자孫손因인家가焉언墓묘枉왕龜城 西山面
濂岑洞 石山峰(석산봉) 庚경兌태八팔首수乾건亥해坐좌丁정得득甲갑口貞夫人정부인又우祔부之竪
수碑비.
15세 1. 허권(許權) 계공랑(啓功郞) 선산(先山) 상동(上同) 함폄. 父 泛梅堂公 허균(許筠).
침교파(砧橋派).
2. 허형(許衡) 墓 방현면(方峴面) 창동(滄洞) 둔전(屯田) 양지좌자 (陽地子坐)
내동파(內東派).
3. 허중권(許仲權) 墓 석산봉(石山峯) 선산운이실전(先山云而傳).
一 子 허호(許琥) 配 노씨(盧氏) 父 예(禮).
의주파(義州派).
二 子 허필(許珌).이거의주(移居義州).의 子 순(旬)의 子 귀방(貴芳)
귀방(貴芳)의 子 허인보(許仁輔 ).墓 의주고성(義州古城) 여노동
(如老洞)부봉갑묘(斧峰甲卯)낙간좌(落艮坐).配 이씨 墓 합폄.기룡
(起龍),기문(起文)
용천파(龍川派).
허인보(許仁輔)의 이자(二子) 제(弟) 기문(起文).
정주파(定州派).
4. 허계권(許季權) 墓 석산봉(石山峯).
一子 허후(許厚) 호(號) 양지당(養志堂)
전모파(筌帽派). .
16세 허정(許禎) 장사랑(將仕郞) 墓 석산봉(石山峯)선산상대(先山上臺)합폄.
父 권(權)
1. 허인경(許仁慶) 墓 상동(上同)합폄. 父 정(禎).
子 이방(而邦).의子 득선(得善),국선(國善).
사기파(沙器派).
2. 허의경(許義慶)명융경(明隆慶)정유(丁酉1567-1568).중생원 이문학교수(中生員以文
學校授)세칭산정 진사(世稱山亭進士) 配 수원백씨(水原白氏) 墓 선산(先山)합폄.
父원림(元琳).의경 子 훈도(訓道) 장사랑(將仕郞) 유국(維國)의 子 通政,동악(東岳).
길상파(吉祥派).
3.허성경(許成慶) 자(字)성길(成吉)통덕랑(通德郞) 墓 이현면(梨峴面)길상동(吉祥洞),
천일산 (天金+刃山)남락해팔수건좌(南落亥八首乾坐).말석비제궁(末石碑齊宮).配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墓 합폄 父 원기(元琦).
子 장사랑(將仕郞) 귀방(貴邦)의 子 영(潁),현(顯),석(碩).
와룡파(臥龍派)
4.허은경(許殷慶) 부장(部將) 配 의인(宜人) 남양(南陽)홍씨(洪氏) 父 수응(守雄)墓
오봉(五峰) 서양선부동자좌(西陽仙府洞子坐).
子 첨지(僉正)국남(國南)의 子 내성(乃聖),내민(乃敏).
이현파(梨峴派).
5.허여경(許餘慶) 장사랑(將仕랑) 墓 창동(滄洞)서당(書堂)후산건좌(後山乾坐).
配 경주(慶州)이씨(李氏)둔전동(屯田洞))지봉형좌편임좌(地蜂形左便壬坐)
子 영방(榮邦)의 子 숭화(崇華),태화(泰華).
창주파(滄州派).
16세 허상(許祥) 관지(官至) 무장현감(茂長縣監) 황주판관(黃州判官). 휘 정(禎)의
제(弟).
17세 허응경(許應慶) 숭인전(崇仁殿) 참봉(參奉). 父 상(祥).
1. 허홍(許泓) 숭인봉(崇仁奉)참봉(參奉) 配 밀양박씨(密陽朴氏) 墓 모산상동(母山上同).
父 종국(宗國).
동산파(東山派).
2. 허연(許淵) 장사랑(將仕郞) 숭인봉(崇仁奉) 참봉(參奉). 配 서독명씨(西獨明氏) 墓
동산면(東山面)선흥동(仙興洞)백로산(白鷺山)임해용해입수해좌(壬亥龍亥入首亥坐)
합폄.미득묘 파혹운건좌(未得卯破或云乾坐). 父 세희(世熙).
2012년12월 15일 토요일 범매당공파(泛梅堂公派) 구봉(龜峰) 許 庾權 옮김.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추운 날씹니다.건강하세유^^
종국씨 오랜만입니다!! 엄동설한에 어찌 지내시는지 건강하시지요?이번에 구성선조록을 책으로 만들어 볼까 생각중입니다.우리가 아니면 누가 선조님들의 업적을 뒤돌아보겠습니까?종국 종인도 그곳 제천에서 많은 종인들에게 알려주시고 협조많이 부탁드립니다.추운날씨 몸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