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김씨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문하시중을 지낸 김선궁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신라 46대 문성왕의 8세 손인 김선궁의 선대(先代)가 서라벌을 떠나 ‘일선’으로 적(籍)을 옮긴 후 그 일족이 대대로 번창하여 큰 세력기반인 호족을 이루어 ‘일선군’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이존록』을 보면「고려 태조 19년(936년), 후백제 신검(神劍)의 대군과 일이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숭선성’에 진을 치고 있던 고려 태조가 종군자(從軍者)를 모집하자, 이 곳 선주부 주리(州吏)로 있는 ‘김’이라는 성을 가진 약관의 사람이 이에 응모했다. 태조께서 매우 기뻐하며 자기의 활과 화살을 내어주고 이름을 ‘선궁(宣弓)’이라 지어주었다. 이 때 마침 고려군이 후백제의 신검군을 크게 무찌르는 일이천 전투에서 김선궁은 큰 공을 세웠다. 드디어 삼한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태조는 그의 공을 높이 치하하고 개경으로 불러 올려 개국공신에 봉하고 요직을 맡겼다. 그 후 김선궁은 승승장구하여 문하시중까지 오르는 한편 ‘선주백(伯)’에 봉해지고 그 일대를 식읍으로 받았다. 그가 사거하자 순충(順忠)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신라 왕통의 후예였던 김선궁이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고 문하시중에 오르자 그 후손들이 그를 비조(鼻祖)로 삼아 ‘일선김씨’의 관향(또는 본관)을 이루었다. ‘일선군’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선산부’로 바뀌면서 관향의 이름도 ‘선산김씨’로 바뀌었다. 김선궁에게는 봉술 · 봉문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쪽의 후손은 중앙의 관직으로 나가고 작은 아들 쪽의 후손은 본주(本州 · 일선을 말함)의 호장직(戶長職) 등 향직(鄕職)을 세습하고 일부는 리직(吏職)을 맡아 대를 이어왔다. 작은 아들 김봉문은 삼사우윤으로 있다가 아버지의 명에 따라 고향으로 내려가 일선의 안일호장을 지냈다. 9). 그로부터 11대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호장직을 계승해 향직을 맡게 되고 일부는 조선 초기까지 리족(吏族)으로 지내다 세종 대에 김숙자가 문과에 등과하면서 사족(士族)으로서 중앙에 진출했다. 그 아들 김종직이 정몽주(鄭夢周)→길재와 아버지 김숙자까지 이어져 온 도학도통(道學道統)을 계승하는 대학자로서 영남사림(嶺南士林)의 거두가 되고 사림정치의 대종(大宗)이 되었다. 봉술의 큰 아들 쪽인 9세 손 득충(得忠)은 문하시랑평장사 · 수문전태학사 · 판리부사(判吏部事) · 감수국사 · 상주국(上柱國) · 태자태사를 지냈고, 아들 량인(良印)은 신호위보승랑장을 지냈다. 봉술의 둘째 아들 쪽인 창서(昌緖)는 검교흥위대장군을 지냈고, 그 아들 경응(慶應)은 검교군기감을 지냈다. 10세 손 양인의 아들인 신함(愼緘)은 전농소윤 · 한림학사 · 편수관을 지냈고 김해(金諧)는 검교군기감 · 합문저후(閤門袛候)를 지냈는데 이 후손들이 10개 파를 이룬다. 우선 큰 아들이자 12세 손인 우의(右誼)는 민부의랑을 지내고, 그 아들인 원로(元老)는 신호위보승랑장 · 예의판서를 지냈다. 김원로(金元老)에게는 고려말 절신으로 이름이 높은 백암 김제와 농암 김주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제는 공양왕 때 조봉랑(朝奉郞)을 거쳐 통훈대부의 품계에 올라 지평해군사(知平海郡事)로 있었다. 조선의 역성혁명 소식을 듣고 이름을 제해(齊海)라 고치는 한편「도해시(蹈海詩)」를 9). 安逸戶長(안일호장)은 고려 때 70세 이상의 戶長(호장)에게 주는 칭호. 郡(군)․縣의 말단 庶政(서정)을 맡은 호장은 70이 되면 安逸戶長(안일호장)이라 불러 격상시켜 우대하고 退役田(퇴역전)으로 그 職田(직전)의 절반을 주었다. 穆宗(목종) 때부터 실시된 제도인데 朝鮮(조선)시대에도 계속 존속되었다. 남긴 후 혼자 배를 타고 동해로 들어가 스스로 세상을 하직했다. 동생인 주는 우왕 때에 출사하여 공양왕 4년 정순대부 예의판서로 있을 때 하절사의 임무를 띠고 중국에 갔다. 봉명(奉命)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고려에서 일어난 이성계의 역성혁명 소식을 듣고 3일을 통곡한 후 서장관 편에 조복(朝服)과 신발을 신물(信物)로 가족에게 보내고 중국으로 되돌아가 불사이조(不事二朝)의 절개를 지켰다. 명의 홍무제(洪武帝)가 이를 높이 평가해 예부상서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형초(荊楚) 땅에서 평생 숨어살았다 한다. 후손이 쌍절사를 세우고 형제의 절의를 기렸는데, 조선 후기 정조(正祖)가 각각 충개(忠介) ·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인 김자연(金自淵)은 지낙안군사(知樂安郡事) · 사인(舍人) · 장령 · 좌부빈객 ·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주의 아들인 김양보(金揚普)는 문과를 거쳐 사인검상을 지냈다. 김득충(金得忠)의 증손자이며 신함의 둘째 아들인 우류는 과거를 거쳐 충선왕 때에 청요직인 문하부(門下府)의 간의대부(일명 右諫議大夫 또는 右司議大夫) · 보문각(寶文閣) 직제학 · 성균과 제주(祭酒)를 거쳐 충숙왕 때에 중정대부 · 봉익대부에 올랐다. 문장이 뛰어나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한다. 네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승경(承慶)은 요절했고 둘째 아들 원미(元美)는 만호를 지냈다. 셋째 아들 달상은 문과에 급제하여 충목왕 때에 정치도감 정치관(整治都監 整治官), 공민왕 때에 밀직사좌대언 · 밀직부사 · 한양윤(漢陽尹) ·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 동지밀직사사 · 금위제조관 · 지밀직사사를 역임하고 홍건적이 침입해 왔을 때 공민왕을 호종한 공로로 호종 1등공신이 되었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넷째 아들 달경은 중랑장을 지냈다. 14세 손 계수(季壽)는 달상의 아들이며 판부사를 지냈다. 김군정(金君鼎)은 화의군 달상의 차남이며 국진선덕랑의영고부사(國進宣德郞義盈庫副使)로서 공민왕조에 과거급제하여 원외랑(員外郞) · 전의부령(典醫副令) · 좌대언을 역임하고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호종 1등공신이 되었다. 군정의 아우인 문현(文鉉)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시승(典校寺丞)으로 있으면서 호종 2등공신이 되었다. 문구(文久)는 국자감찰 겸 진현관제학을 지냈다. 계수(季壽)의 아들인 준덕(俊德)은 판사, 길덕(吉德)은 호조참판을 지냈다. 군정의 둘째 아들인 가행(可行)은 이숭인(李崇仁)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동래현령으로 있으면서 고려왕조 복위충절(復位忠節)로 순절하였다. 뒤에 동래부사 · 공충도관찰사 ·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사청(士淸)은 충주목사를 거쳐 판부사에 이르렀다. 사지(四知)는 사재소감을 지냈고, 영륜(永倫)은 고려말 통의랑을 거쳐 조선조에서 형조도관좌랑을 지냈다. 취수공파의 파조인 17세 손 수양은 대사간을 지낸 상기(尙琦)의 넷째 아들이고 화의군 달상의 현손이다. 성종 23년(1492년) 문과에 급제한 후 통훈대부로서 보령현감에 재직하고 있을 때 사숙종족(私淑宗族)인 김종직을 비롯한 제자들이 무오사화(戊午史禍)에 대거 연루되자 이를 개탄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거창군 가조현(加祚縣-지금의 대초리)으로 숨어들어 스스로 ‘술에 취해 잠잔다’는 의미의 취수(醉睡)라 호를 짓고 은둔하였다. 13세 손 남보(南寶)는 지탁(之卓)의 아들로 판도판서 · 시호위대장군을 지냈다. 아들인 승만(升萬)은 신호위보승중랑장, 손자인 완식(完湜)은 조선조에 들어와 개원종공신이 되어 도감판관 · 의창현령을 지냈다. 12세 손 득자(得資)와 아들 천부(天富)는 과거 급제 후 삼사우윤에 올랐고, 손자인 성미(成美)는 예문관직제학 겸 군기판사를 역임했다. 청백리와 문장으로도 유명하다. 김선궁의 둘째 아들 봉문이 개경에서 삼사우윤을 지내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고향 일선지방의 호장직을 맡아 내려가게 되는데 큰 아들 흥림(興林) 계의 후손 중 일부는 개경에 다시 올라와 벼슬을 하게 된다. 봉문의 큰 아들이자 3세 손인 흥림은 대호군을 지냈고, 아들인 혁동(赫東)은 판밀직사사, 손자인 임남(任南)은 상장군․판도판서를 지냈다. 그 아들인 6세 손 제용(濟用)은 상호군을 지냈고, 8세 손 유선(惟善)은 랑장을 지냈으며 그 아들 우(祐)는 신호위대장군을 지냈다. 11세 손 김균(金鈞)은 양온령, 김완(金琓)은 밀직사사 · 상호군, 세영(世英)은 군자감정, 김겸(金兼)은 연안부사 · 지백주사 겸 권농병마단간사를 역임했다. 봉문의 작은 아들 흥술(興術) 계의 후손은 계속 ‘일선’에 남아 호장 등 향리직과 리직을 번갈아 맡게 되는데 본인 흥술을 비롯하여 성언(成彦), 유정(儒正), 제영(濟永)과 그 아들 정용(廷用) · 연(衍) · 미(美) 3형제 그리고 미의 아들 지적(之迪) · 지영(之瑩) 형제, 지영의 아들 용려(用呂 · 또는 用品), 충의(忠義), 정수(貞守), 연(延)까지 ‘일선’의 호장직을 세습하게 된다. 이 때 그들의 통혼권도 여말(麗末)의 다른 추심호구단자(推尋戶 · 單子)와 같이 신분내혼(身分內婚)과 지역내혼제(地域內婚制)인 동읍토성이족(同邑土姓吏族)에 한정되어 있었다. 11).그러나 김연(金延)은 정조호장으로 있을 때인 고려 말 왜구가 일선에 침입해 오자 읍민을 금오산성에 입보시키고 전화(戰禍)로부터 보존시킨 공로로 주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워진 후 지역의 명문가문으로 더욱 굳히게 되었다. 이러한 가문적인 배경에서 성장한 연(延)의 아들 광위(光偉)가 명법과로 급제하여 양온령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자손들의 족세(族勢)가 더욱 번창하여 여러 방면으로 진출했다. 혹은 생원과 진사를 거쳐 외관을 역임하고 혹은 무과를 거쳐 무관과 잡직으로 나아갔고 혹은 별시위․충순위와 같은 특수 군직을 맡기도 했다. 12).광위의 큰 아들 혼(琿)은 홍복도감록사, 셋째 아들 은유(恩宥)는 중정대부 · 사재령을 지냈는데 은유의 아들이 관(琯)이고 손자가 김숙자다. 강호산인(江湖山人) 김숙자는 태종 14년 사마시를 거쳐 세종 원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에 추천되었다. 그 후 선산교수 · 개령현감 · 사재부정 · 성균관사예 등을 역임했다. 단종 3년(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로 즉위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밀양 본가로 돌아가 후진교육에 전심하면서 경사(經史)는 물론 활쏘기 · 말 타기 · 산수에 이르기까지 가르쳤으며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특히 그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거유(巨儒) 정몽주 · 길재의 도학을 이어받아 정주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5형제의 아들 중 막내가 아버지의 도학도통을 다시 계승하는 대학자가 김종직이다. 점필재 김종직은 단종 원년 진사가 되고 세조 5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정자
· 11).정월 초 하루날 궁궐에 들어가 국왕에게 세배를 드릴 수 있는 호장에게 내리던 직첩.
2) 李樹健(이수건),『嶺南學派의 形成(형성)과 展開(전개)』, 一潮閣(일조각), 1998, 109쪽; 李樹健(이수건),『韓國의 姓氏(성씨)와 族譜(족보)』,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44쪽. 그는 또한 청백리와 애민사상으로도 유명하다. 청백리로 선고(選考)돼 가문의 영예이기도 한 그의 청빈은 선정의 표본으로 표출되었고「가흥참(可興站)」이나「낙동요(洛東謠)」등 수많은 시는 애민사상의 절규이기도 했다. 정몽주와 길재 및 아버지 숙자의 학통을 이어받은 도학자로서 학문경향은 효제충신을 주안으로 하는 실제적 방면에 치중했다. 총재관으로『동국여지승람』증수에 직접 참여했던 김종직은『점필재집』『청구풍아(靑丘風雅)』『동문수(東文粹)』『이존록』등 많은 문집을 남겼다. 그는 밀양 예림서원 · 함양 백연서원 · 개령 덕림서원 ·선산 금오서원 · 고창 운곡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16세 손 효정(孝貞)은 제(濟)의 손자이며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좌사간 겸 춘추지제교 · 집현전부제학을 거치고 귀향했다가 다시 강원 · 경상 · 함경도관찰사, 이조 · 호조 · 예조판서 · 5위도총부도총제 · 홍문관대제학을 역임했다. 세종의 명으로 성리군서(性理群書)의 발문을 짓고 팔로명승누기(八路名勝樓記)를 서(序)하였다. 아들인 김안생(金安生)은 세조 때에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정랑 · 검상사인 · 수찬장령을 역임했다. 지눌(地訥)은 한성판윤 겸 의금부사를 역임했다. 단종이 왕위를 찬탈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진주에서 은거했다. 제(濟)의 15세 손 군자감직장 예복(禮復)의 장남인 김희(金喜)는 선조 25년(1592년) 10월 18일 비안 의병장으로 상주 단밀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왜적 수천명과 창검으로 맞서 싸우다 전사하니 적은 공의 머리를 베어갔다. 그 해 12월 28일 호조정랑으로 증직되었고 평해 충절사에 배향되었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김희의 양자인 김옥(金鈺)은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을 맞아 비안 의병장으로 출정하니 부자(父子) 의병장의 가문이 되었다. 의병장 김옥(金鈺)의 생부인 용담 김계(龍潭 金啓)의 일기「용담록(龍潭錄)」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시조 한 수가 수록 되어 있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시조는 병자호란 때 심양(瀋陽-중국)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부모의 온정과 조국의 체온을 못견디게 그리는 심혼(心魂)을 읊은 것이다.
( 평해 해단) 김지경(金之慶)은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 대사헌 · 호조참판, 평안도관찰사 ·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개성부 류수에 이르렀다. 그 아들인 응기(應箕)는 성종 8년 식년문과에 급제, 검열이 되고, 교리 · 전교 · 직제학을 거쳐 좌부승지에 올랐다.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 때 문외출송(門外黜送) 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신원돼 강원도 · 경상도 ·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호조 · 공조참판 · 한성부판윤 · 리조 ·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다시 우의정 ·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를 지냈다. 천문- · 지리 · 산수에도 능했다. 김치(金峙)는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사간을 지내고 김해부사에 이르러 사직, 후진 교육에 전심했다. 김숙자와 함께 학문을 연마, 문명을 떨쳤으며, 김종직도 그 문하에서 공부했다. 효행으로 이름이 나 정문이 세워졌다. 진종(振宗)은 중종 23년 식년 을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 주서, 공조 · 예조 · 병조좌랑, 시강원 문학, 사간원 정언, 헌납, 사헌부 지평, 경성판관, 의정부 검상, 오위부 첨정, 홍문관 교리, 응교를 역임하고 선위사(宣慰使)로 대마도주(對馬島主)와 곡물 운반협상을 벌인 바 있다. 명종 즉위년(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 때 파직돼 낙향했다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순창에 유배된 후 유배지에서 62세로 타계했다. 우윤공의 4세 손 수정(壽貞)은 음사로 통훈대부․부령부사를 지냈다. 시로(時露)는 양양공의 아버지인데 동래부사를 거쳐 나주목사에 이르렀다. 양양공 김교(金嶠)는 세종 32(1450년)년 무과에 급제하고 세조 3년 무과중시에 합격한 후 훈련원판관을 거쳐 부호군이 되었다. 13) 경상북도 의성군에서는 군 역사상 3부자(金喜(김희) 金啓(김계) 金鈺(김옥))가 의병장이 된 것을 기리고 郡民(군민)과 그 후손들에게 애국심과 정의감을 고취시키기 위해 2002년 3월 1일 의성군 시발공원에 金喜(금희) 의병장이 탔던 말 모양과 함께 追慕碑(추모비)를 건립했다. 세조 6년(1460년)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모련위(毛憐衛)를 토벌하였고, 세조 13년(1467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발발하자 경원부사가 되어 난 평정에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 1등으로 오림군(烏林君)에 봉해졌고 회녕도호부사 ·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지중추부사 때 선산군(善山君)으로 개봉되었다. 성종 2년 좌리공신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고, 다시 지중추부사에서 공조판서로 자리를 옮겼다. 성종 10년(1479년) 명나라의 요청을 받고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했다. 아들 김수영(金秀嶸)은 부호군, 손자인 김린(金磷)은 대호군, 김전(金碘)은 부호군, 증손자인 김세염(金世琰)은 부호군을 역임하였으니, 양양공 이후 집안이 무가(武家)로 이름을 날린 집안이다. 22세 손 효원은 홍우(弘遇)의 아들로 리원 · 의원 두 동생과 함께 선산 김씨 18개파 중 각각 파조가 된 인물들이다. 명종 20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병조좌랑 · 정언 · 지평을 지냈다. 선조가 즉위한 뒤 새로이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선조 6년 이조정랑에 기용되었다. 다음 해 심의겸(沈義謙)의 동생 충겸(忠謙)이 이조정랑에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되자 전랑직(銓郞職)이 외척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한 것이 두 사람의 반목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그를 지지하는 신진사림파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사림파 사이의 대립으로 확대, 동인(東人) · 서인(西人)의 양파로 갈라져 조선시대 당쟁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집이 동대문 밖에 있었다 하여 그 일파를 동인이라 불렀고 심의겸을 따르는 무리를 서인이라 했다. 이 같은 당쟁의 폐해를 우려한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부제학 이이(李珥) 등이 조정책으로 효원은 부령부사, 의겸은 개성부유수 등 외직으로 전출되었다. 그 후 효원은 10여 년 간 한직으로만 나돌면서 당쟁의 단초를 제공한 데 대해 자책감을 크게 느끼고 시사(時事)에 관해서는 일체 입을 열지 않는 등 자숙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뒤에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부사에 승차됐고 사후에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소암 이원은 선조 16년 알성문과에 급제, 호조좌랑 · 수찬 · 정언을 거쳐, 선조 26년(1593년) 의주목사로 나가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다. 선조 27년(1597년) 정유재란 때 형조참판에서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명나라 군사들에게 시달림을 받던 도내 행정을 바로잡았다. 광해군 4년(1612년), 선조(宣祖)의 딸 정근(貞謹)옹주를 며느리로 맞아 숭양부원군에 봉해지고,14) 병조판서 ·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양주의 숭양사(嵩陽祠)에 제향되어 있다. 막내 의원은 선조 24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3사의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정랑 · 대사간에 이르렀다. 군수를 지낸 극건(克鍵)의 아들 세렴(世濂)은 22세 때 생원 · 진사에 들었고 광해군 8년(1616년) 문과에 장원급제, 예조좌랑이 되고 시강원 사서를 겸하였고 옥당(玉堂)에 들어가 수찬(修撰) · 지제교(知製敎)를 역임, 정언이 되었다. 광해군 9년 폐모를 주장하는 자를 탄핵하다가 곽산(郭山)으로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신원되어 수찬으로 다시 들어와 헌납 · 교리 · 응교를 지내고 인조 14년(1636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왔다. 서해 · 평안 · 관서 관찰사를 거친 후 대사헌 겸 홍문관 제학(提學), 도승지가 되었고 다시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만년에는 경서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문장에 능하고 특히 시에 조예가 깊어 당대 제일의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현종 때 실학파의 거두인 유형원(柳馨遠)의 스승이기도 한 그는『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성리자의(性理字義)』『독서록(讀書錄)』등을 간행하여 도민의 교화에 힘썼고『동명집(東溟集)』을 남겼다. 김천일(金千鎰)은 중종 28년 문과 에 급제, 함평군수를 지냈으며 송천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14) 履元(이원)의 아들 克鑌(극빈)은 宣祖(선조)의 아홉째 딸인 貞謹翁主(정근옹주)와 혼인하여 一善尉(일선위)에 봉해졌다. 정근옹주는 宣祖(선조)의 靜嬪(정빈) 閔氏(민씨)의 所生(소생)이다. 석계(石溪) 재용(金在鎔)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성에서 공을 세웠다. 경직(敬直)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세상이 어지러움을 한탄, 출사하지 않고 춘천에 은거하였으며 김녕(金寧)은 광해군 때 폐모론에 반대하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 후 출사하여 사예 · 예안현감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의병으로도 활약했다. 진흥(振興)은 선산 김씨 후손 중에서 역과(譯科)로 출신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 주지번(朱之蕃)의 전결(篆訣)을 얻어 연마하여 38체(體)에 통달하여 전서가로도 이름을 떨쳤다.『대학장구(大學章句)』『전해심경(篆海心鏡)』등을 지었다. 김석준(金奭準)도 서예가로 이름이 있었는데 북조풍(北朝風)의 예서에 능했다. 학규(鶴奎)는 항일정신이 투철하여 곽경렬(郭京烈)을 통한 임시정부의 연금에 관련, 투옥된 바 있으며 또한 대원군 때 서원 철폐로 훼손된 운곡서원을 중건하고 강당을 개설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술선유후(述先裕後) 유림의 추중을 받았다. 운곡서원에는 주자(朱子) · 김제 · 김주 · 김숙자 · 김종직 5현이 향사되었다. 32세 손 병규(秉圭)는 고종 28년 경과증광회시(慶科增廣會試)에 급제, 진사가 되었다. 동학란에 참여했던 병규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 김태원 장군과 함께 전남 함평지방에서 의병활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는 것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후진교육에 힘썼다. 그는 1919년 2월 고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집 앞 산봉우리에 제단을 설하고 날마다 북향재배하면서 통곡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33세 손 교락(敎洛)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단체인 광복단에 가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9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1977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