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왜왕이 다시 말이 없이 잔치를 파하고 제신(諸臣)을 모아 의논 왈,
"조선 사신이 생불(生佛)이 분명하니 어찌하리오?"
하되, 제신이 주 왈,
"내일은 구리로 한 간 집을 짓고 생불을 청하여 구리 집에 들어가거든 문을 잠그고 사면으로 숯을 피우면 제 아모리 생불이라도 그 안에서 죽으리라."
하니, 왜왕이 옳이 여겨 구리 집을 짓고 사신을 청하여 방 안에 앉힌 후에 문을 잠그고 사면으로 숯을 쌓고 대풀무를 놓아 부니, 불꽃이 일어나며 겉으로 구리가 녹아 흐르니 아모리 술법 있는 생불인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사명당이 그 간계를 알고 사면 벽상에 서리 상(霜)자를 써 붙이고 방석 밑에는 얼음 빙(氷)자를 써넣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외니 방 안이 빙고(氷庫)같은지라. 왜왕이 왈,
"조선 생불의 혼백이라도 남지 못하였으리라."
하고 사관을 명하여 문을 열고 보니, 생불이 앉았으되 눈썹에는 서리가 끼고 수염에는 고두래미가 달렸는지라,
사명당이 사관을 보고 꾸짖어 왈,
"왜국이 남방이라 덥다 하더니 어찌 이러하게 차냐?"
하되, 사관이 혼이 나서 그 사연을 왕께 고하니, 왜왕이 대경하여 왈,
"분명한 생불을 죽이지 못하고 쓸데없이 재물만 허비하였노라."
하고,
"달래어 화친하느니만 같지 못하다."
하고 한 꾀를 생각하고 무쇠말을 달궈놓고 사신을 청하여 왈,
"그대가 부처라 하니, 저 쇠말(鐵馬)을 타고 다니라."
하니, 사명당이 그 간계를 알고 밖에 나와 조선을 바라보며 팔만대장경을 외니 사방에서 난데없는 구름이 모여들어 뇌성이 진동하며 소나기가 끊이지 아니하고 오니, 성중에 물이 고여 여강여해(如江如海)하여 인민이 무수히 빠져 죽는지라,
사명당이 호령 왈,
"간사한 왜왕은 종시 깨닫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나를 죽이려 하거니와 내 어찌 간계에 빠지리오. 이제 왜국을 함몰하려 하니, 만일 잔명(殘命)을 보존하려거든 급히 항서(降書)를 올리면 비를 그치게 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너의 일본은 동해를 만들리라."
하고 삼룡(三龍)을 불러,
"비를 주며 왜왕을 놀라게 하라."
하니 삼룡이 일시에 굽이치며 소리를 지르니 천지가 무너지는 듯하거늘, 왜왕이 대경망극(大驚罔極)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더라.
(후략) <임진록(壬辰錄)>
■ 전체 줄거리
평안도 삭주에 사는 최위공 부인이 관운장을 만나는 태몽을 꾼 뒤 낳은 최일경이 장성하여 우의정을 지낼 때 선조 대왕의 꿈을 해몽하게 된다. 한 계집이 기장 자루를 이고 대궐 뜨락에 내려놓자 화광(火光)이 충천하는 꿈 이야기를 듣고, 최일경은 글자로 풀어 왜란이 일어날 징조라 하므로 노여움을 사 귀양을 간다.
그 삼 년 후, 도원수 조섭, 부원수 청정이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고, 이순신이 거북선을 띄워 항전하나 적장 마홍의 살에 맞는다. 강홍립이 출전하여 마홍을 베는 성과를 올린다. 그러나 정충남은 청동의 목을 베지만 청정에게 피살되고 만다. 선조는 도성을 떠나 김도경의 호송을 받으며, 의주까지 피란하고, 최일경은 김응서를 천거하고, 김덕령이 나타나 신술로 전세를 승리로 이끈다. 한편 유성룡은 명나라에 청병하러 가서 꿈에 나타난 관운장의 도움으로 이여송을 얻어 귀국하지만, 이여송은 갖가지 트집으로 머뭇거리다가 선조의 통곡이 있고서야 비로소 원병에 나선다. 김응서는 기생 월선을 통해 왜장 조섭을 살해하는 데 성공하고, 이여송이 청정의 목을 베지만 김덕령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전쟁이 끝나자 이여송이 조선의 지맥을 끊으려 하지만, 초립동으로 변장한 태백산 신령이 그를 명나라로 쫓아낸다. 그 후 강홍립과 김응서가 군사를 거느리고 임란을 보복하기 위해 왜국의 정벌에 나서지만 결국 실패하여 김응서가 강홍립의 목을 베고 나서 자신도 자결한다. 그 후 사명당이 일본에 가서 시련을 물리치고 왜왕을 굴복시키고 조공 약속을 받은 뒤 돌아온다.
■ 등장 인물
1. 최일령 : 조선 대왕 선조가, 한 여자가 기장(보리)를 넣은 자루를 들고 왕에게 나타나는 꿈을 꾼 뒤 해몽을 부탁하니, 최일령이 왜군이 쳐들어 올 것이라 하자 왕이 노하여 동래로 원찬(遠竄)을 보낸다. 동래에 귀양 온 때 왜적이 쳐들어 와, 소섭이 동래 부사 이순경을 죽인다. 청정이 소섭, 동경청, 문경 등의 왜장들에게 진격을 명한다.
2. 이순신(李舜臣) : 이순신이 거북선을 준비하여 한산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죽는다. 충청도에서 신립이 배수진을 쳤다가 청정에게 패하고 자결한다.
3. 정출남 : 정출남이 자원하여 충주에서 청정에게 죽는다. 왕은 한양을 버리고 도망하는데, 왜군이 들어왔다가 관운장의 호통에 도망한다.
4. 김덕령(金德齡) : 평강의 김덕령이 부친상 중에도 도술과 힘으로 청정을 희롱한다. 신기한 재주를 펼치지 못한 채 죽는다.
5. 김응서 : 유성룡이 청병하러 중국에 가나 실패한다. 최일령의 명령으로 김응서가 소섭의 조선인 첩 월천과 함께 소섭을 죽인다.
6. 이여송(李如松) : 중국 천자의 꿈에 관운장이 나타나 조선에 원병 파견을 주장하자, 이여송을 대장으로 칠십 만 대군을 파견한다. 김응서, 강홍엽 등이 큰 공을 세운다. 이여송은 명산 대천의 혈맥을 자르고 철군한다.
7. 김응서, 강홍엽 : 부자지국의 항서를 받고자 김응서, 강홍엽이 일본에 쳐들어가나 매복에 의해 패한다. 김응서의 무술에 왜왕이 화친을 제의, 공주를 주어 두 사람을 묶어 두나 강홍엽의 고자질로 둘 다 죽는다. 김응서의 말이 그의 머리를 물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8. 사명당(泗溟堂) : 서산대사가 일본이 다시 쳐들어 올 것 같다며 사명당을 일본으로 보낸다. 왜왕은 사명당을 여러 가지로 시험하나 생불임을 알고 굴복하여, 사명당은 매년 소녀 인피 삼백 장과 소년 불알 삼 두씩을 바친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온다. 일본은 나중에 구리, 주석 등으로 바꾸어 바쳤다.
■ 핵심정리
1. 갈래 : 고전 소설, 국문 소설, 군담 소설, 전쟁 소설, 역사 소설
2. 작가 : 미상
3. 연대 : 조선 인조 때
4. 표현 : 문어체, 역어체, 도술적인 표현
5. 구성 : 일화적 구성
6. 제재 : 임진왜란 시기 영웅들의 활약상
7. 주제 : 민족적 자부심 고취, 민족적 응전 의지
■ 이해와 감상1
이 작품은 군담 소설(軍談小說)로서 민족적 자부심 고취와 민족적 응전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여 현실적으로는 왜적에게 패배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승리했다고 하는 민족적 적개심과 복수심을 대변하기 위해 쓰여졌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하여 쓰여진 이 작품은 당시의 국제 정세 및 사회를 배경으로 하면서 전쟁의 발생 과정과 전쟁 중에 활약한 장수들의 활약상을 작품의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전쟁 승리의 과정을 한두 명의 영웅에 의한 승리로 그리지 않고, 수많은 의병장. 명장들을 순차적으로 등장시키면서 그들이 나라의 도처에서 애국적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싸워 나가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사명당이 왜왕을 도술로 골탕먹이고 부자지국(父子之國)의 항복문을 받는 대목에서는 온 민족이 쾌재를 부르는 통쾌함을 보여 준다. 사명당이 일본에 건너간 시기가 임진년으로부터 13년 뒤이니, 이 때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다음이다. 그런데 일본에 가서 왜왕을 굴복시킨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므로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있지 않은 일을 소설 속에서 있도록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상상에 의한 허구적 창조물인 소설을 통해 현실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임란 후의 시대 정신이 형상을 통해 표현되어 있다는 데에서 이 작품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은 한문본과 국문본이 있는데 작자의 태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예를 들면 국문본에서는 우리 나라 명장들이 조정의 명에 의해 싸우고 있는데 반해 한문본에서는 명장 이여송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까지도 이여송의 명을 받고 있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한문본은 국문본에 비해 사대주의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 이해와 감상2
작자, 연대 미상의 역사소설로, 경판(京版) 완판(完版)의 방간본(坊刊本) 및 사본(寫本)이 전한다. 책의 표제대로 선조 때 임진왜란의 전기(戰記)로서, 인조 말기에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국문본과 한문본 두 가지의 이본(異本)이 있다.
정사적(正史的)인 입장에서 쓴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 신정(申晸)의 《임진록(壬辰錄)》, 안방준(安邦俊)의 《임진록》, 고려대학본 《임진록(표지 제목은 壬辰錄兼免事)》 등의 한문본과 1948년에 나온 이명선(李明善)의 역주본(譯註本)인 《흑룡록(黑龍錄:주석본 이름은 임진록)》, 국립중앙도서관본 《임진록》, 백순재본(白淳在本) 《흑룡일기(黑龍日記)》 등 여러 종류의 국문본이 모두 이 계열에 드는 작품들이다.
역사적인 사실에 약간의 영웅적 과장을 가미하여 이루어진 작품들로서, 당시에 들어온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영향을 받았다. 즉, 현실로는 아군이 패전한 것이 사실이나, 작품 속에서는 곳곳에서 승전하는 아군이 묘사되었고, 특히 이충무공(李忠武公) 조헌(趙憲)의 전략 및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대사(泗溟大師:惟政)의 도술 등은 과장 및 환상적으로 표현하여 끝을 승리로 결구하여 놓았다. 이중에서 한글본과 한문본의 차이점이 발견되는 것은 흥미롭다.
즉, 한글본은 왜적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투영되어 있는데 비하여, 한문본은 이여송(李如松)을 주인공으로 하여 외세에 의존하려는 사대주의 사상이 농후하다. 일제강점기에서는 이 책들이 모두 금서(禁書)가 되기도 하였다.
첫댓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