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서민들은 창작 주체로서, 또 문화를 누리는 사람들로서 그 어느 시기보다 활발하였다. 이는 서민들의 경제적인 성장과 사회 신분의 변화 등 조선 후기에 있었던 사회 경제적인 변화로 인한 예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신분 상승이 가능해진 서민들은 예술을 창작하고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결과적으로 서민층이 성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학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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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학이 일어난 까닭
(1) |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번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우리 나라의 많은 땅이 황폐화되어 못쓰게 되고, 식량 생산이 줄어들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나라 일을 맡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고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은 소홀히 하여 많은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
(2) |
당시의 유학자들은 이론과 학설만 따지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하였다. 이러한때에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학문을 연구하자고 주장한 학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
(3) |
성리학이 초기의 참신한 기운을 잃고 현실 생활과 동떨어진 이론에만 치우치자, 사실에 입각한 비판 정신이 일게 되어 청나라에서 들어온 고증학과 서양의 과학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여 새로운 학풍으로 일어났다. |
(4) |
실학자들은 학문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하고, 백성들의 실생활에서의 쓰임과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
실학자들의 개혁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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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학자들의 주장
실학자들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1) |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토지를 가지게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은 토지를 갖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
(2) |
우리 나라의 지형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하며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길이 좁으므로 화물을 말에 싣고 다니는 것보다 배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 |
(3) |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신분이 좋지 않으면 그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신분 차별을 없애고 노비를 없애야 한다. |
(4) |
백성들이 지방관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지방관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방의 관리들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 |
(5) |
학문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하고, 백성들의 실생활에서의 쓰임과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
2. 실학의 성격
(1) |
실학은 학문을 연구하는 데는 사실과 증거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굴림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론과 학설만 따지는 당시의 유학과는 달리 우리의 역사, 지리, 언어 등에 관한 국학의 연구가 중시되었다. 이러한 실학은 민족 의식과 민족에 대한 자각을 높여 현실 개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던 민족적, 근대 지향적 성격의 학문이었다. |
(2) |
실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연구하여 실 용적인 학문으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의 반대로 국가 정책 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
민간 신앙의 성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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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후기 민간 신앙이 성행한 이유
(1) |
조선 후기의 대다수의 농민들은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화전민이 되었으며 떠돌아 다니는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가 계속되고 콜레라 등의 전염병이 돌아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심해졌다. |
(2) |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나라였으나 이는 상민이나 천민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여전히 사람들은 마을 뒷산의 큰 나무나 바위에게 빌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세상이 살기 좋게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민간 신앙에 의지하였다. |
(3) |
사회 혼란과 불안으로 인해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여 정신적인 구원을 얻으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며 백성들 사이에서는 부패한 관료나 정부 기관 등이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아 가 살기가 어렵게 되자 예언 사상과 민간 신앙이 널리 퍼졌다.
① |
후천 개벽 사상 : 어지럽고 살기 힘든 현재의 세상이 멸망하고 살기 좋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이다. |
② |
정감록의 예언 사상 : 나라 안팎의 여러 가지 근심과 걱정으로 이씨 왕조가 망하고 정씨의 새 왕조가 들어선다는 것으로 홍경래의 난 이후 크게 유행하였다. |
③ |
미륵 신앙 : 미래불인 미륵이 지상 세계에 내려와서 중생을 구원한다는 신앙으로 이상적 사회의 실현을 약속하는 대승적 자비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유행하였다. |
④ |
무속 신앙 : 무당이 굿이나 풀이로 귀신을 달래어 화를 피하고 복을 비는 무속 신앙이 확산되었으며 19세기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번성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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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전래한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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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주교의 전파
(1) |
초기의 천주교는 중국을 통해 새로운 학문으로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을 통해 서양의 문물이 전래되었으며 일부 학자들이 서학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전래된 서양의 문물 중에 천주교 서적도 포함되었으므로 서학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결국 천주교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
(2) |
정조 때 이승훈이 청에서 서양인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 신앙 운동은 보다 활발해졌다.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 행해졌던 신앙 활동이 서민층과 여성 신도의 증가로 이어졌으며 교회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
(3) |
당시의 사회에서 상민과 부녀자가 양반과 함께 교회 안에서 평등하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로서 이러한 천주교의 인간 평등 사상은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후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늘어 철종 때에는 그 수가 2만 여 명에 이르렀다. |
2. 천주교의 박해
(1) |
천주교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기 때문에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유교 윤리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이자, 나라의 어버이인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이는 당시의 유교 사회 질서에는 위배되는 것이며 도전으로 보였다. |
(2) |
인간 평등 사상과 내세 사상은 집권층에게는 임금에 대한 충성과 신분을 중시하는 양반 사회의 통치 질서를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
(3) |
정조 때에는 박해가 심하지 않았으나 순조 때 황사영이 프랑스에 군대 동원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나라에서는 천주교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려 천주교를 믿고 있던 수백 명의 신도들을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 |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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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의 발생 배경
(1) |
외척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면서 정권 다툼으로 지배층의 분열이 극도에 달하였고, 양반과 관리들은 백성들에 대한 횡포와 착취를 계속하였다. 생활이 몹시 쪼들려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의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키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
(2) |
사회 혼란과 민심 불안 속에서 국민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유교·불교가 극도로 부패하여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
(3) |
천주교 유포와 서양 세력의 접근에 대한 위기 의식은 동학이 만들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
2. 동학의 발전
(1) |
동학은 1860년 몰락 양반 출신의 최제우에 의하여 창시된 우리 나라 고유의 신흥 종교이며,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의 위기와 서양 세력이 침투하는 혼란 속에서 새로운 이상 세계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등장하였다. |
(2) |
서양 세력의 접근에 대응하여 민족적, 민중적 종교인 동학은 조용히 지내고 있던 지식인 계급과, 오랫동안 포악한 정치와 가난함으로 고생하고 있던 수많은 백성들에게 순식간에 퍼져 나가 곧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
(3) |
동학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나라에서는 혹세무민(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것)의 죄를 들어 교주인 최제우와 제자들을 처형하였다. |
(4) |
이후 2대 교주인 최시형의 노력으로 교리와 교단이 정비되었으며 전라도와 충청도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양선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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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후기 국내 상황
(1) |
1860년대의 조선은 안으로 세도 정치와 부패한 양반 사회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커져가고, 밖으로 서양 세력이 침략적으로 접근해 오던 위기의 시대였다. |
(2) |
18세기 영조, 정조 시대에는 문화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중흥 정치를 펴서 백성들이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순조, 헌종, 철종 등 나이 어린 임금들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외척들이 등장하여 60여년 간이나 세도 정치를 펴게 되었다. 이러한 세도 정치는 왕권이 약화되어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고 여러 곳에서 농민들의 난이 일어나는 등 조선 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
2. 서양 세력의 진출
(1) |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자기 나라에서 생산된 물건을 팔고 원료를 구하기 위해 우리 나라에 접근하였다. 이들은 여러 척의 배를 이용하여 나타났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서양배들이 우리 나라 배와 색다르게 생겼다고 해서 이양선이라 불렀다. |
(2) |
중국은 영국이 전쟁을 일으켜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일본도 미국의 군사적 시위에 위협을 느끼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
(3) |
우리 나라에 대한 서양 세력의 진출
① |
영국 : 최초로 통상을 요구해 온 나라로 순조 때 해안에 나타나 무역을 희망하였으나 거절당했다. |
② |
프랑스 : 프랑스 신부 처형에 대한 책임을 따지며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
③ |
미국 : 무력으로 일본을 개방시킨 후 우리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④ |
러시아 : 여러 차례에 걸쳐서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 | |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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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선 대원군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조대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도록 하였는데 그가 바로 고종이었다. 그에 따라 흥선군은 왕의 아버지로서 대원군이 되었고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
2. 대원군의 개혁 정치
(1) |
대원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당시의 세력가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안동 김씨의 세력을 몰아 내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였으며,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썼다. |
(2) |
당시 지배층으로서 면세(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것) 특권을 누리던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내도록 하였으며 사치와 낭비를 금하여 국가의 수입을 늘리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꾀하였다. |
(3) |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후진 양성을 목적으로 한 지방 교육 기관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지방 양반들의 세력 확장의 기반이 되었으며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세금을 내지 않으며 지방 농민들에게 제사 비용을 부담시키고 지방 행정에 압력을 가하는 등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에 따라 대원군은 수백에 이르던 서원을 없애거나 통합하여 그 수를 정리하여 47개소만 남겨 농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
(4) |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
(5) |
과감한 개혁 정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국민 생활의 안정에 이바지하기는 했다.그러나 경복궁의 재건으로 재정을 무리하게 지출했고, 서원의 철폐로 유생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
(6)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어 천주교를 박해하고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는 쇄국 정치를 고집하여 결과적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게 되었다. |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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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인양요
(1) |
나라에서는 천주교를 금하면서 프랑스 신부들까지 포함하여 수천 명의 천주교도들을 처형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병인박해). |
(2) |
병인박해 때 페롱·리델·깔래 등 3명의 프랑스 신부는 지방에서 몸을 숨겨 살아날 수 있었다. 이들은 이 사실을 중국에 있는 프랑스 관리에게 알리기로 하였다. 이에 리델 신부는 중국의 톈진에 있는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서의 천주교도 박해 사실을 알리고, 살아 있는 두 신부를 구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
(3) |
전부터 조선과의 통상을 바라던 프랑스는 병인박해 때의 선교사 살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무력을 앞세워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려 하였다. 로즈 제독의 함대는 강화도를 침입하는 한편,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는 침략전을 벌였다(1866년). |
(4) |
프랑스 군대가 강화성을 점령하고 40여 일 간이나 한강 입구를 차단하여 쌀이 서울로 들어올 수 없었다. 서울의 백성들은 서양 오랑캐들의 난데없는 공격에 공포감에 휩싸였으며 생활에도 큰 고통을 당하였다. |
(5) |
흥선 대원군의 서양 오랑캐를 무찌르겠다는 굳은 의지와 양헌수가 이끄는 부대의 용감한 전투로 문수 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
(6) |
패배하여 물러가게 된 프랑스 군대는 강화읍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으며, 우리 나라 서적과 무기, 금괴·은괴 등 많은 문화재를 마구 가져갔기 때문에 우리 나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를 병인년에 일어난 서양 세력과의 싸움이라 하여 병인양요(1866년)라 한다. |
2. 신미양요
(1) |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군민과 충돌하여 선원과 배가 타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
(2) |
미국은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여 통상 조약을 맺으려고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병력으로 강화도를 공격하여 왔다. 당시 밖으로 강력한 쇄국 정책을 실시하던 흥선 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 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
(3) |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다시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여기는 어재연이 이끄는 중앙군과 강화 수비군이 지키고 있었으며, 미군의 공격에 대항하여 뒤떨어지는 무기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싸웠다. 광성진과 갑곶 등지에서는 처절하게 저항하여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이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일시 광성진을 점령하는데 성공한 미군도 조선군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고, 더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광성진에 불을 지른 후 퇴각하였다. |
(4) |
조선 조정에서는 ‘화의를 말하면 매국의 죄로 다스리겠다.’는 강한 자세로 백성들의 단합을 외치면서 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세를 더욱 굳게 하자, 미군도 할 수 없이 물러가고 말았다. 이를 신미년에 있었던 서양 오랑캐의 난리라고 하여 신미양요라 부른다(1871년). |
(5) |
미국은 조선 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 대원군의 단호한 쇄국 정책과 조선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 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
(6) |
아직 봉건적 체제에 머물러 있던 조선이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프랑스와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무력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서구 세력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선 백성들의 국가 수호 의지 때문이었다. | |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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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
(1) |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입을 물리친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데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병인양요 이후에는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 실패하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나, 서양인을 배척하는 기운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
(2) |
흥선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 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우고, 서양 세력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하였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duclinic.edupia.com%2Fcontents%2FproiContents%2Fproi%2Fproi%2Fprimary%2Fschoolbook%2Fsociety%2Fimages%2F1term%2Fspso6%2F%EC%82%AC-6-91-140.jpg) |
<척화비> |
(3) |
서양과의 통상·수교를 거부하는 정책은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서양의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근대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을 넓히고자 조선에 수교를 요청하여 왔다. |
(4) |
흥선 대원군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도 서양과 똑같은 오랑캐라 생각했으며, 그들의 수교 요구도 서양 세력의 침범과 같은 것이라 여기고 이를 거절하였다. |
(5) |
서양 및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하고 그들을 배척하려는 조선의 대외 정책은 외세 침략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자주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우리 나라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그만큼 늦어지게 하여, 결국은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
강화도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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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요호 사건
(1) |
조선을 무력 위협에 의해 개항시키겠다는 생각을 굳힌 일본은 조선의 동남·서해안에서 중국에 이르는 뱃길을 연구한다는 구실로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도 부근에 이르렀다. 운요호가 먹을 물을 구한다는 구실로 강화부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자, 조선군은 포격을 가하였고, 운요호에서도 초지진 포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영종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불을 지르는 등 못된 짓을 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
(2) |
운요호 사건이 있은 후 일본은 먹을 물을 구하기 위해 초지진에 접근했던 일본 배가 조선군의 포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항의하며 여러 척의 군함으로 부산 앞 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하였다. |
(3) |
이 사건은 일본이 저지른 불법적인 무력 행위였다. 엄연히 주권이 있는 남의 나라 영토에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고 집을 부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과의 교섭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같은 무력 행위를 일으켰던 것이다. |
2. 강화도 조약의 체결
(1) |
1876년에는 6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와서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는 한편, 우리 정부에 담판을 요구하였다. 이 무렵 조선에는 여전히 쇄국을 주장하는 세력이 컸으나, 한편으로는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세력이 싹트고 있었다. 결국 조선이 발전하려면 세계 여러 나라와 통상 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들과 회담을 벌였다. |
(2) |
여러 차례의 담판 끝에 조선 대표 신헌과 일본의 전권 대사 구로다 사이에 전문 12조의 조약문이 강화도에서 조인되었다(1876년 2월). 이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다. |
(3) |
강화도 조약은 일본과의 무역을 위해 세 항구를 연다는 것을 포함하여 일본인의 경제 침략을 가능하게 하는 조약들이 중심 내용으로써 우리 나라의 권익이 지켜지지 못한 불평등 조약 이었다. | |
근대화를 위한 정부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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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개화 정책
(1) |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조선에서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이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가진 개화파와 나라가 망하는 징조라며 개화파를 가리켜 외국에 나라를 파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외국과 교섭하기를 반대하는 주장이 대립하였다. 그러나 개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강해져 개화 정책을 펴게 되었다. |
(2) |
새로운 관제를 만들고 신식 무기를 갖춘 신식 군대도 창설하였다. 별기군이라 불리운 신식 군대는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 새로운 훈련을 받았으며 이들의 대우도 좋았다. |
(3) |
정부에서는 일본의 발달된 문물과 제도를 좀더 깊이 있게 살피기 위해 신사 유람단 등을 보내고 청나라에도 영선사를 보내어 근대 문물을 배워오게 하였다. |
(4) |
중국에 간 사람들은 근대식 무기 제조법을 배워 왔고, 일본에 간 사람들은 군사, 공업, 철도, 우편 등 여러 분야의 근대 문물을 살피고 돌아왔다. |
2. 임오군란
(1) |
개화의 과정에서 일본의 세력이 커지자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신식 군대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던 구식 군인들이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난이 일어나자 백성들도 군인들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쳐들어갔다. 일본 공사관은 불타고 일본 공사는 일본으로 도망갔다. |
(2) |
구식 군인들의 난으로 정치에서 물러나 있던 흥선 대원군이 다시 세력을 잡았으며, 개화 정책은 일시 중단되었다. 이 틈을 타고 우리 나라에 대한 간섭을 노리고 있던 청나라는 군대를 보내어 흥선 대원군을 납치해 갔다. | |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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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갑신정변의 원인
임오군란으로 청나라는 이 때부터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개화파들이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빨리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2. 갑신정변의 경과
급진 개화파는 빨리 근대화를 이룩하여 열강과 대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일본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1884년 10월에 새로 설치된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문벌 타파, 사민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 기구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을 선포하였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사흘만에 실패하고, 그 중심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
3. 갑신정변의 결과
김옥균 등은 일본에 망명하였으며, 우리 나라에 청나라의 세력만 강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 간에는 정변의 뒤처리를 위한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와 일본 간에는 톈진 조약이 체결되어 다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다툼장이 되었다. | |
동학 농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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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 농민 운동의 배경
(1) |
동학은 “사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앞세우면서 새로운 세계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동학 이념은 지식인들과, 오랫동안 포악한 정치와 궁핍으로 고생하고 있던 수많은 백성들에게 순식간에 퍼져 나가 곧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
(2) |
동학이 최제우를 중심으로 종교적인 세력으로 자리를 잡으려 하자, 조정에서는 민심을 나쁜 쪽으로 이끌고 있다는 죄로 최제우를 체포하도록 지시하였다. 교조인 최제우가 관원에게 체포되자 동학 교도들은 최제우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
(3) |
그러나 조정은 1864년 최제우와 그의 제자들을 처형하였다. 이에, 최제우를 따랐던 백성들은 통분을 참지 못하여 힘을 합하여 동학군을 만들었는데, 이들을 앞장 서서 지도한 사람이 바로 전봉준이었다. |
2.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과정
(1) |
교주 최제우의 석방을 요구하던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농민 전쟁으로 번진 것은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부정에 대항하여 농민들이 들고 있어 났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관청을 점령하고 창고를 열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
(2) |
동학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로 황토현 싸움과 장성 싸움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를 점령하였으나 의도와는 달리 청군과 일본군의 개입으로 정부와 타협하고 해산하였다. |
(3) |
동학군은 농민군의 자치적 개혁 기구인 집강소를 전라도 일대에 설치하고 신분제의 폐지와 토지의 균등한 분배 등을 목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
(4) |
동학 농민군이 해산한 후에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키는 침략 행위를 계속하자, 동학 농민군은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1894년 10월에 다시 일어났으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에 패배하고 지도자였던 전봉준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
근대적인 나라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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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갑오개혁의 배경
갑신정변의 실패로 세력이 꺾였던 개화 세력은 동학 운동을 계기로 다시금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 동학군의 진압을 위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성공하자 우리 나라 정부에 대해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다.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여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자는 속셈이었다. 정부는 그들의 개혁 요구에 대해 이미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거절하며 일본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군대를 출동시켜 경복궁을 포위하고, 개화파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개혁을 단행하였다. |
2. 갑오개혁의 내용
정치적 개혁 |
정부 조직을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고, 의정부 아래에 8아문을 둔다. 과거 제도를 없애고 관리를 능력 위주로 뽑도록 한다. 독자적인 개국 기원을 쓰도록 하여 청나라에 의지하지 않고 자주 독립한다. |
경제적 개혁 |
재정을 관리하는 곳을 한 곳으로 통일한다. 세금 납세 제도를 새롭게 한다. 근대식 화폐 제도를 채택한다. 도량형(길이, 부피, 무게를 재는 단위나 기구)을 통일한다. |
사회적 개혁 |
신분 제도를 없애 양반과 평민의 계급을 없앤다.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것을 금지한다. 과부의 재혼을 허용한다. |
교육의 개혁 |
한성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를 세운다. 각 지방에 지금의 초등 학교인 소학교를 세운다. | | | |
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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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성황후
조선 말기 어지러운 정권 다툼 속에서 불행하고 처참한 최후를 맞은 고종의 왕비로 9세 때 부모를 잃고 가난하게 살다가 1866년 부대부인(흥선 대원군의 부인)의 추천으로 16세에 왕비가 되었다. 1873년 국제 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는 등 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임명하고 대원군을 물러나도록 하였으며, 대원군의 쇄국 정책도 폐하고 일본과 외교를 맺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이렇듯 대원군과 정치적인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청나라·일본·러시아 등의 외국 세력을 끌어들였으며, 또한 자신의 집안 사람들을 앞세워 민씨 일파의 세도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게 살해되었다. |
2.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1) |
고종 황제가 갑오개혁을 무효화하는 발표를 하고 훈련대를 해산시키는 등 조선의 정세가 일본에 불리하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은 이를 막아보기 위하여 사건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
(2) |
경복궁에서 1895년 8월 20일 새벽 5시경 안경수 군부대신은 궁궐 피습의 급보를 받고 시위대를 소집하라 지시한 뒤 입궐을 서둘렀다. 그러나 경복궁 동남쪽 망루인 동십자각이 이미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장악돼 있었으며 괴한들이 광화문을 지나고 있었다. 이에 고함을 치며 저지했으나 일본 수비대와 일본 경찰들이 총을 쐈으며 그 자리에서 훈련대장 홍계훈이 사망했다. 군부대신은 급히 자리를 피하고 시위대 병사들도 모두 후퇴했다. |
(3) |
일본 공사 미우라의 주도 아래 일본 낭인 수십 명은 궁궐 뒤편의 왕비 침전인 건청궁 내 옥호루를 습격하였으며 왕비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4) |
명성황후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묘소는 금곡의 홍릉이다. 경복궁의 당시 시해 장소에는 전각이 헐려 없어졌고 다만 ‘명성황후 조난지’ 비석이 남아있다. |
(5) |
을미사변 이후 조선 조정은 일본의 압력으로 친일파 세력이 가득 채워지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이러한 사실에 분노하고 의병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 |
자주 독립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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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 협회
(1) |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 단체로서 1896년 7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 서구 근대 사상과 개혁 사상을 가진 인사들에 의해 조직되어 민중을 계몽하고 온겨레의 자주적 노력으로 자주 독립과 자유 민권의 성장을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
(2) |
활동 내용
① |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관을 지어 그곳에서 토론과 연설을 중심으로 하는 집회를 자주 열어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하고 한글로 된 독립 신문을 발행하여 우리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려 하였다. |
② |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얻어 자주, 민권, 자강 운동을 전개하고자 만민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개최하여 외국에 의존하는 정치를 비판하고 자주적 입장에서 근대적 정치를 펼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으며 나아가 입헌의회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 민주주의 정치 사상을 제창하였다. | |
(3) |
사상 : 자주 독립 사상과 자유 민권 사상, 자강 개혁 사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즉 전통 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 국민의 참정권을 강조하였으며 행정 제도와 재정 제도를 근대적으로 바꿀 것과 신교육과 산업 개발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근대적 자주적인 국민 의식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뒷날 일제 강점기에 민족 운동을 펼쳐 나갈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
(4) |
해체 : 정부는 처음에는 독립 협회를 지원하였으나 독립 협회의 급진적 요구 때문에 독립협회 간부를 옥에 가두고 해산령을 내렸다(1898년). |
2. 독립 신문
1896년 4월에 독립 협회에서 발행한 신문으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발행한 현대식 일간지로서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발행되었다. 서재필이 주동이 되어 독립 협회의 기관지로서 자유 민권의 성장과 국민 계몽을 목표로 하여 국민들에게 근대 사상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으나, 정부의 독립 협회 탄압으로 유명 무실화하였다. | |
자주 독립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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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제국의 성립
(1) |
아관 파천 : 명성 황후 시해 사건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러시아의 세력 만회 음모에 의해 고종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물리치려 하였고, 그 결과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각종 이권의 침탈이 이어졌다. |
(2) |
1897년 2월 20일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파천한 지 약 1년만에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897년 8월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로 즉위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 작업을 시작하여 원구단을 만들었다. |
(3) |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나라 이름을 대한 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대한 제국의 성립은 대한이 자주 독립 국가임을 국내와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
2. 대한 제국의 개혁 노력
대한 제국은 자주 국가로서 필요한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광무 개혁이라 한다. 광무 개혁으로 농민 생활 안정과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토지를 측량한다는 것과 상공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각종 회사와 실업 학교를 설립하여 산업의 육성과 교육의 진흥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외세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근대적 군대를 갖추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
3. 개화 정책의 추진
대한 제국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 여러 나라와도 차례로 근대적 조약을 맺었다. 그 후 세계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게 되었으며 근대적 문물과 제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크리스트교의 선교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 |
신체발부는 수지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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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화에 반대하는 사람들
(1) |
갑자기 소개된 근대적인 제도와 문물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에게 전해 내려오던 전통적인 생각이나 관습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
(2) |
‘신체와 모발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라. 내 몸은 완전히 내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것이고, 동시에 천지신명의 것이기도 하다.’라는 유교적 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단발령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 목을 자를 수는 있으나 내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3) |
서양과의 조약을 맺은 후 크리스트교가 세력을 확장해 가자, 천주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유학자들은 서양의 종교와 그것이 가져오는 새로운 생활 방식 때문에 결국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걱정하기도 하였다. |
(4) |
따뜻한 방바닥의 온돌 문화에 익숙해 있던 당시의 조선 사람들은 서양식 건축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지 않았다. 때문에 방바닥이 마루로 되어있는 서양식 건물들은 여자들의 건강에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하였다. | |
근대 문물의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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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교통 수단
(1) |
1890년대에 자동차와 인력거가 미국과 일본에서 들어오고 객마차가 등장하였으며, 황실(皇室)에서 자동차를 구입·운행하였다. |
(2) |
열차 : 1899년 노량진과 제물포 간에 개통된 경인선이 우리 나라 최초의 철도이다. 그 뒤 1904년에 경부선, 1905년에 경의선, 1914년에 경원선이 각각 완성되었는데 처음 열차를 타는 사람들은 쇠수레라 불렀고 열차에 오르면서 짚신을 벗어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비싼 차비를 아까워하며 옛날 습관대로 걸어 다니기도 하였다고 한다. |
2. 통신의 발달
(1) |
우표 : 1884년 새로운 우편 제도와 함께 최초 우표가 발행되었다. 그러나 우표를 쓰게 된 것은 통신국이 설치된 1895년부터이다. 이 때 벙거지꾼이라 불리던 집배원이 생겨 민간인들도 편지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1900년에는 스위스 베른에 있는 만국 우편 연합에 가입하여 외국과도 우편물을 교환하게 되었다. |
(2) |
우정 업무 : 개항 이후 서양의 근대 과학 문명과 발달된 기술이 전해지면서 먼저 갖추어 진 것이 통신 시설이었다. 홍영식은 일본, 미국 등의 우편 시설을 여러 번 돌아보고 정부에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1884년 10월 우리 나라 최초로 우정국을 설립하였다. |
(3) |
전화 : 전화는 1899년 경운궁(덕수궁) 안에 처음으로 가설되어 그후 서울-인천 간의 시외 전화와 시내 전화가 가설되었다. 특히 궁중에서 신하들이 황제와 통화를 하게 되면 관복을 갖춰 입고 전화를 향해 큰절을 세 번 한 후 무릎을 꿇고 통화를 했다고 한다. |
(4) |
전신 : 전신 시설은 청나라가 우리 나라와의 신속한 연락을 위해 1885년에 서울-인천 및 서울-의주 사이에 처음으로 가설되고, 그 뒤 서울-부산 간의 전신이 가설되었다. 전신은 문자로 쓴 말을 먼 곳까지 전달하는 방법으로 1837년 미국의 모오스에 의해 인자 전신기가 발명되었으며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고종 22년(1885년)으로 서울과 인천 사이 개통을 보았다. 일반인들의 본격적 이용은 한양과 의주 사이의 전신선이 건설된 후부터이다. | |
신식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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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식 학교의 발전
(1) |
서양 문물이 소개되자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우리 스스로 힘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식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많아졌다. 그래서 새롭게 여러 신식 학교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
(2) |
외국의 선교사가 세운 학교 : 배재 학당, 이화 학당, 경신 학교, 정신 여학교, 광성 학교, 숭실 학교 등 |
(3) |
나라에서 세운 학교 : 육영 학원, 한성 사범 학교와 소학교, 중학교 등 |
(4) |
애국 지사가 세운 민족 사립 학교 : 양정 의숙, 보성 학교, 휘문 학교, 오산 학교 등 |
2. 신식 학교의 학습 내용, 방법, 대상
(1) |
신식 학교에서는 독서와 습자 이외에도 외국어, 지리, 기술 등 새로운 내용을 가르쳤다. 학습 방법도 연설회, 토론회를 여는 등 서당식 교육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였다. 그리고 과거에는 남자들만 서당에 다니며 공부하였으나 신식 학교가 생기면서 여자들도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게 되었다. |
(2) |
서당과 신식 학교 교육의 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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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
신식 학교 |
학생들의 나이 |
서로 다름 |
비슷한 나이임 |
학생들의 성별 |
남자만 다님 |
남녀 함께 다님 |
공부하는 책 |
한문 책 |
한글 책 |
학습 내용 |
지식, 예절 |
지식, 예체능 |
학습 방법 |
외우고 쓰기 |
여러 가지 방법 |
선생님 |
한 분 |
여러분 |
학습 기간 |
일정하지 않음 |
일정함(초등학교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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