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숨, 날숨을 정념하되 인위적으로 하면 안됨 숨을 들이 쉬고 내쉴 때 힌두교의 지식법(止息法)에 의존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단전호흡에서도 호흡을 돌린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식법 호흡을 돌린다는 것은 관념적으로 돌린다는 것일뿐 미얀마에서는 숨을 거칠게 쉬는 것을 통한 수행법이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은 수행법 몸을 보는 것은 몸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기 위한 것 들숨, 날숨에 정념하고. 동작에 대해 정념하고 일어나는 현상 하나하나에 정념하고 음식을 먹는 것에도 정념해야 한다.
몸과 마음의 작용 하나하나에 정념하는 것이 바로 깨어 잇는 것이다 망념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면 된다 여기에 옳고 그른 것은 없다. 정념할 뿐이다
수식관을 설하는 곳은 따로 있다. 안반수의경이 바로 그것이다. 안은 들숨, 반은 날숨, 수의는 마음을 지킨다는 뜻으로 안반수의경은 남방에서는 안한다 수식관은 상수(몸에서 몸을 관찰)=>止(선정)=> 관( 빠사나)의 순으로 진행된다 자신의 몸에 대해 과도한 집착을 하는 사람에게는 부정관을 가르침
그러나 혜천스님은 수식관을 못하게 한다 이유: 수식관에서 뛰어 넘어야 하는데, 수를 세는 일, 수식관에 머무르게 된다
백골관: 색욕이 기 많은 사람에 대한 가르침. 즉 지나치게 욕정이 많은 사람에 대한 가르침
이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응병여약'이다. 사람의 바탕에 따라 가르침이 다르다
불교가 힌두교의 수행법과 차이나는 것은 바로 '정념하는 것'이다 부처는 인도의 수행법을 따라 사선법까지 터득했지만, 그것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걸 알고 결국은 보리수 아래 정념의 수행을 한다.
아함경에 따르면 사리불 존자는 제자중 한 사람에게 부정관을 시켰지만 진전이 없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연못가에 연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관찰하라 하였다. 사리불존자가 묻자 부처는 "그는 부정관이 맞지 않다"라고 하였다. 결국 그는 깨우침을 얻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연관에 의한 것이었다.
몸과 마음의 작용 하나하나에 집중할 뿐 특별한 것은 없다. 그 중 몸의 들숨, 날숨에 집중하는 것은 그것이 그 중 쉬운 수행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III 느낌의 관찰 여기서는 신수심법 중수(느낌)에 대해 설명 느낌에는 3가지가 있다. 1)즐거운 느낌, 2) 즐겁지 않은 느낌, 3)즐겁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이 그것이다.
몸의 감각을 통해 마음이 반응한다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난다. 마음을 따로 분리하는 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지헤만이 있고: 정념수행은 지혜로서 보는 것 불교에서 지헤라 하면, 일상적인 삶의 슬기와는 다르다 삶의 슬기는 간혜라고 하며, 성숙되지 않은 지를 뜻한다 불교의 지헤는 '정념의 지'를 말한다. 정념의 지란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즉 좋다, 나쁘다라는 관념을 일으키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 아름답지 않은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런 이유로 싫어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
갈애:끊임없이 헐떡이는 것 "사막에 걸어가는데, 음식과 물이 덜어지고, 태양은 작렬하고, 가슴과 목이 타 들어가는 것"
사견: 8정도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릇된 사고'
한국 불교는 깨달음을 말하지만, 사실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문제이다 내가 어떻게 사고하느냐에 다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
우리가 수행과정에서 보고 느낀 것은 우리의 머리 속에 입력된 정보를 검색하는 것에 불과하다 수행을 해보면, 아주 어렸을 대경험조차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수 있다. 마음의 충격, 몸의 충격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 불교는 '무심(=무의식)'이라는 말을 쓰지만,불교는 '무의식'이라는 말을 읹ㅇ하지 않ㄴ다. 대신 '잠재의식'이라는 말을 쓴다. 예를 들어 시속 500킬로의 기차에서 시속 200키로로 가는 옆 자동차의 번호판을 못보는 것 같지만, 본다. 확인해보면 상상으로 짚어내든지, 사실로 짚어내든지 50%의 확률이지만 찰라에 스치는 것도 본다
깨달음이란 기존의 사고의 틀이 깨어지는 것이다 부처가 이르기를 "기존의 가치에 사로잡힌 자들은 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햇다. 또한 깨달은 후에는 수타니파타에 보면, "나는 깨달음조차 집착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IV 마음의 관찰 마음은 하나일까? 하나가 아니라면 몇 개나 되는 걸까? 남방 불교에서는 89개의 마음에, 40개의 마음 작용이 있다고도 하며 89개의 마음에 50개의 마음작용이 있다고도 한다. 한국불교는 마음을 일심(一心)이라 하여 절대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마음이 마치 하나의 덩어리가 잇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탐욕: 맹목적인 소유를 말함- 그런 의미에서 갈애와 연결된다. 이를테면 먹어도 먹어도 풀리지 않는 것이 탐욕이다 탐욕스런 마음이 일어나면,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알면 된다. 왜 그런 마음이 일어났는가를 알 필요는 없다.
수향할 때, 처음에는 탐욕이 일어난 이후에 탐욕이 일어난 것을 알게되며, 그 다음은 탐욕이 일어나는 찰라에 알게 되고 그렇게 되알게되면, 탐욕이 일어나는 것이 끊어진다.
우리나라의 절에서 스님들은 "탐욕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같은 서민들은 부와 권력을 누려보지 않았기 때문에 버려야할 탐욕이 없다. 이건희나 이명박이라면 몰라도 서민들은 버려야 할 탐욕이 없다.
오히려 부처님은 '부가 아름답다'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오늘 화정, 석두와의 강연 이후 주연은 헤천스님의 흥천사 중흥에 대한 토의가 이어졌다. 다시 돌아와, 부처가 탐욕을 버리라는 것은 '맹목적인 소유'를 버리라는 것이다. 귤화위지라는 말이 있듯이, 부처의 가르침이 한국에 와서 고생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가난한 사람은 물질로부터 자유롭기 쉽지만, 부자인 사람은 물질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는 것이다.
성냄: 분노, 미움, 증오가 가슴 속에 일어나는 것 수행을 통해 탐욕(로가)와 분노(도다)를 봐야 한다.
미혹; 의심과는 다른 것으로 막연한 의심을 뜻한다
위가 남아 있는 ... 위가 없는= 욕망이 남아 있는 ... 욕망이 없는
욕망의 바탕에는 탐욕이 깔려 있다 욕망과 탐욕을 분리해서 말하지만, 마음의 작용에서 욕망과 탐욕은 동시에 일어난다 탐욕는 내뜻대로 하고 싶은 욕망을 말하는데, 이것이 안되면 분노가 일어난다
탐진치(貪瞋痴) 삼독 [三毒] : 독은 괴로워할 독 탐진치는 동시에 움직인다
삼매(사마디): 안정된 마음 해탈: 속박되지 않는 것 해탈이란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그 어는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열반과 같은 뜻
우리는 남에게, 스스로에게 속박된 삶을 살고 있다.
자이나교에서는 물질(몸)이 마음을 속박하는 것으로 보지만, 불교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남에게 속박되면(속으면) 벗어날 길이 있지만, 자신에게 속박되면(속으면) 벗어날 길이 없다
많은 수행자는 스스로에게 속는다 우리는 사기 당하는 것을 남에게 당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사기당하는 것이다. 즉 남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을 알고, 마음이 사라지면 사라지는 것을 안다. 탐욕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을 알고, 탐욕이 사라지면 사라지는 것을 안다 알면 끊어진다
우리는 마음을 신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즉 현실을 도외시하고 모든 것을 마음에 넣는다
예를 들어 도교의 태식법, 유체이탈 같은 것도 다 관념이다. 다 나의 생각이 지어낸 것일 분이다
마음은 몸을 통해 작용하고, 몸은 마음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다 달리 말한다면, 몸의 일종인 뇌를 떠나 마음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몸이 피아노라면 피아노 연주가 마음인 것이다
불교는 몸과 마음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것은 아니다. 몸과 마음은 상호 의지, 상호 교섭하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폐단은 관념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관념화되어 있으면, 현실과 유리되어 생명력을 잃는다 남방 불교는 테크닉을 중요시하다보니, 박제화되어 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마음 속에 처 넣는다. 그렇게 되면, 현실은 도외시되고, 깨달음은 관념 속에 숨어버린다 우리가 말하는 깨달음은 붓다의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다. 파자소암에서 처럼 깨달았다고 고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박종철 치사사건을 두고, 그것을 전생의 죄업이라고 말한 자가 있다. 부처의 가르침은 전생의 죄업을 끊으라는 것이지, 현실의 고통이 전생의 죄업 때문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따뜻한 인간애가 있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자비심이다.
파자소암의 에화에서 스님의 답은 "고목나무에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늘, 무슨 느낌이 있겠는가"였다 이 대답은 관념화, 박제화의 예이다 느끼되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파자소암에서는 노파가 그 대답을 듣고 절을 불태우고 중을 쫒았다. 비슷한 예로 도오겐 선사의 제자가 가마꾸라 막부에게서 법문을 듣고 오자, 땅문서를 들러보내 내쫓고 그 자리를 1미터나 파없앴다.
수행이란 현장에서,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것 현실과 현장을 떠나서는 안된다 느낌, 몸, 마음이 현장이자 현실이다
깨달은 사람이 세상에 가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의 아픔을 같이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좋은 마음이 일어나면 일어나는대로 나쁜 마음이 일어나면 일어나는대로 정념하면 된다.
내가 어떤 마음을 지니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 즉 사고의 문제이다 이는 마치 양날의 칼과 같다. 칼이란 요리사에게 요리도구이지만 살인자에게 흉기인 것이다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고와 자세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삶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수행은 현실에서 내 삶을 좀더 생명력 있게 하기 위한 것이지 수행을 위해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살아있는 것이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