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분 | 세대수 | 인 구 수 | 자연부락 | ||
계 | 남 | 여 | |||
계 | 2,859 | 7,113 | 3,533 | 3,580 | |
법성1 | 254 | 638 | 309 | 329 | 포내,밤모실,연동거리 |
법성2 | 193 | 526 | 268 | 258 | 포내 |
법성3 | 134 | 310 | 147 | 163 | 포내,진골 |
법성4 | 32 | 86 | 44 | 42 | 후장동,안안검메 |
법성5 | 299 | 817 | 413 | 404 | 포내,농장 |
법성6 | 284 | 821 | 416 | 405 | 매립지,독바우 |
법성7 | 42 | 102 | 39 | 63 | 검메 |
진내1 | 208 | 499 | 251 | 248 | 숲쟁이 |
진내2 | 190 | 495 | 258 | 237 | 다랑가지,옹성,월랑대,조아머리 |
진내3 | 32 | 91 | 47 | 44 | 자갈게미 |
화천1 | 67 | 161 | 82 | 79 | 천년동,쑥구지,석장리 |
화천2 | 59 | 145 | 72 | 73 | 신두암,만년동 |
대덕1 | 84 | 217 | 117 | 100 | 언목 |
대덕2 | 89 | 175 | 78 | 97 | 성재동 |
대덕3 | 43 | 103 | 51 | 52 | 복룡동 |
덕흥1 | 79 | 181 | 88 | 93 | 신덕동,신흥동,오봉촌 |
덕흥2 | 82 | 191 | 91 | 100 | 지장리.장전,지아닐,모가지 |
입암리 | 75 | 151 | 78 | 73 | 입전리,고법성,입암동,마천 |
신장1 | 56 | 138 | 67 | 71 | 부귀동,서당촌,송고지 |
신장2 | 46 | 105 | 59 | 46 | 장수촌,여술 |
신장3 | 48 | 105 | 47 | 58 | 신선동,장자동 |
월산1 | 88 | 223 | 111 | 112 | 월계,화장동 |
월산2 | 53 | 110 | 45 | 65 | 산하치,덕평리 |
용성1 | 59 | 134 | 65 | 69 | 성촌,배우게 |
용성2 | 36 | 83 | 38 | 45 | 장복동,신기,턱골 |
용덕1 | 98 | 218 | 115 | 103 | 용현,발막,구암 |
용덕2 | 34 | 80 | 40 | 40 | 신계동,덕산 |
삼당1 | 71 | 158 | 76 | 82 | 당산,수항,학산 |
삼당2 | 24 | 50 | 21 | 29 | 새미내 |
< 진내리(鎭內里) >
본래 진량면에 소속되어 있던 좌우두, 상리, 하리, 중리와 내리 일부지역을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진내리”라고 했다. 원래 진내(鎭內)는 성내에 있던 상중하의 3개리 뿐 이었지만 거기에다 조아머리와 자갈게미까지를 합하여 진내리로 한 것이다. 1914년 이후에는 鎭外에다 면사무소를 두었기에 모든 면에서 크게 그 세가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法聖鎭과 法聖倉이 공히 이곳 진내에 존재하였던 관계상 법성의 사적은 거의 모두가 이곳에 집합되어 있다.
1)옹성(법성진성/法聖鎭城)
흔히 옹성(甕城)이라불리며 성밑 동리까지를 포괄하여 불리고 있는 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법성진성"이다. 법성포 조창이 비대해지자 조선 중종 9년, 1514년에 우리고장에 종4품(영광군수와 같은 품계) 무관직인 "수군(水軍) 만호(萬戶)"가 관장하는 "법성진"이라는 수군기지를 건치하고 해로를 이용하여 경창(서울 마포)까지 운송되는 세곡을 호송토록 하였다. 이로부터 116년 뒤인 1630년, 인조8년에, 법성진은 영광군수보다 상위 품계인 종3품 무관직인 수군첨절제사(약칭"첨사")진으로 승격하여(영광군수는 종4품이었음.) 종전의 호송업무와 더불어 조창업무까지 수행하게된다. 이어 32년 뒤인 1789년, 정조 13년에는 독진(獨鎭)으로 승격하여 진량면의 행정업무까지 총괄하게 되는데, 독진이란 관할 군수의 지시나 감독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행정구역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영광군수보다 상위 직급인 법성진 첨사에 의해 영광군수가 파면되는 사례가 상당수 기록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법성진 첨사의 권한이 대단했었던것 같다.
이와 같이 중앙정부의 세곡을 운송했던 국가재정의 중추기관이라는 중요성때문에 조선 중종 9년 1514년에 법성진성을 쌓게되는데, 옹성이란 축성의 양식이 소쿠리 태와도 같고 반월과도 같으며 물장군 모양과도 같은 형국의 성이라는 의미다. 지금도 이곳 옹성 서문 초입에는 "해남 70척 감관 임회 도색 강영호"라 돌에 세긴 각자(刻字)를 비롯하여 "광양 50척" "창평 30척" "진원 30척" "보성 80척" 등의 글이 돌에 각자되어 남아있다. 참고로 법성진은 1514년에 건치되어 1907년까지 393년간 존속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궁구대
옛날 춘일여관나 대동상회로 불리던 주위에 우스꽝스러운 기와지붕으로 1980년대까지 남아있던 지역, 정확히 진내리 397번지 일대가 조선시대때 군기대가 있었던 곳인데, 속칭 궁구대라 불리고 있으며, 이곳이 조선시대에는 선소(군선의 부두/지금의 원창상회 일대)에서 남문을 경유 동헌에 이르는 대통로였었다.
3)선수마당
옛날 조선시대 군사용 배를 건조하기도, 또는 수리하기도 했던 선소(船所)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원창상회 일대를 이르는 곳이다. 선수마당이라 부르고 있는데 선소마당이 맞는 표기이다.
4)제월정(霽月亭)
1572년 병자호란 직후 훈련도정을 지낸 이척이라는 분이 청나라와 화친을 반대하고 고향인 대마로 낙향하여 월랑대 위에 정자를 짓고 의절있는 향우들과 연군지정을 달래기도 하고 청나라로 부터 받은 굴욕감을 달래기도 하였다는 이 정자는, 처음에는 그의 아호데로 영호정(映湖亭)이라 하였는데 후에 그의 아들 상원이 제월정으로 개명하였다. 1960년대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고 지금은 주춧돌 만 남아있다.
5) 숲쟁이
법성진성(옹성)과 더불어 도지정 지방문화재로 관리죄고 있는 곳이다. 숲쟁이란 <숲(森)+재(城)+ㅇ+이>의 복합어이다. 풀이하면 숲 성이라는 뜻이다.
이곳의 오래된 나무들을 언제 심었는지 현재까지 기록으로 밝혀진것은 없으나 옹성 즉 법성수군의 진성과 연결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군사상의 필요성과 이곳과 가까이 있었던 수군첨절제사=첨사의 집무처였던 동헌을 칠산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센바람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풍의 목적과 북쪽의 재앙을 막기 위한 종교적 행위의 일환으로 심어진 나무로 추정하고 있다.
나무의 나이를 법성향지에서는 옹성(법성진성)의 축조년대와 같은 시기인 500여년으로, 영광군지에서는 300여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매년 개최되고 있는 법성포 단오제의 본무대이자 오랜 세월 우리고장사람들의 휴게공간이자 민속놀이터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6) 복고창
궁구대 인근에 있었던 이곳은 조복미(漕復米)를 보관하였던 곳이다. 조복미란 충청, 전라 양도의 조군(漕軍)들에게 지급할 곡물로 이를 보관하던 창고를 조복고라는데 조(漕)자가 줄어 복고창이라 불렀다.
7) 동조루(董漕樓)
진내리 74번지에 있었던 이곳은 조선시대 매년 세미(稅米)를 경창(서울 마포)으로 실어가기 위해 전라도 28개군현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감시, 감독하던 곳이다. 1908년, 법성포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법성보통학교 최초 설립 터이기도 하다.
8) 조대마당
세곡을 검수하던 광장으로 동조루와 해창사이를 속칭 조대마당이라 불렀다.
9) 해창거리
동조루에서 선소마당에 이르는 길을 이르는 말이다.
10) 세곡고
제월정 위 일대를 이르는 곳으로, 이곳에 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의 12 수세지역의 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옛 어르신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며 옛날 정길성 님의 집터가 곡성창지이고, 서문거리 위 안씨 일족이 살았던 곳이 광주창지였었다고 한다.
11) 무묘
자길게미와 조아머리 중간지멈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 무묘는 일명 관왕묘(關王廟)라고도 하는데,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의 묘(廟:사당)로써, 공자의 묘를 문묘라하고 관우의 묘를 무묘라 한다.
12) 당산
1914년 일본사람들이 우리고장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진내리라 하였던 옹성(법성진성)안의 지명은 원래 상리, 중리, 하리로 구획되어 있었다.
따라서 마을의 수호신이었던 당산도 상리 당산, 중리 당산, 하리 당신이 있었다.
매년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옹성 서쪽 끝(해남 70척이라는 각자가 세겨진 돌 위)의 상리 당산은 숫당산이라 하였고 인의산 노인정 아래 당산을 암당산이라하였다. 상동문 위의 당산도 상리당산이라 하였고, 해창거리에 있었던 당산(지금은 없음.)을 하리 당산이라하였으며, 옛날 예배당 아래 중리당산(지금은 없음.)이 있었다.
13) 신당
지금 옹성 서쪽 숫당산나무 옆에 적벽돌 건물이 자리하고 있던 주위가 옛날 정초에 큰 무당굿을 했던 신당(神堂)이 자리했던 곳이다.
14) 청년마당 또는 청년텃껏
청년회관 마당의 준말이다. 구 예배당 옆 넓은 공지이다. 이곳에는 본래 법성진관아의 작청(육방관속)이 있던 자리이다. 거의 모든 공공기관이 의병란 때 전소되고 없어졌는데 오직 하나 형방청의 건물만이 남아있었다 한다. 그것이 개화기에 이르러 이 지역의 신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청년회를 조직하여 온갖 활동에 들어가자 회관으로 활용되게 된 것이다. 회관 앞 공지에서는 회원들이 각종 서양운동을 즐기던 마당이었다. 생각하면 이 청년회관과 청년마당이야 말로 역사적 시대적 교육적 문화적으로 뿌리요, 요람인 셈이다.
15) 비각거리
비석거리라고도 불리던 이곳은 조선시대에 동짓재에서 동헌으로 통하는 길목인데 그 길의 위편에다 수많은 비(碑)와 비석들이 옛날에는 도열되어 있었다.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극히 일부만 숲쟁이로, 다시 숲쟁이에서 단오보존회로 이설되어 보존되고 있다.
16) 동헌터
동안터라고도 하고 동안이라고도 불렀던 진내리 200번지 일대(34회 이건 선배 소유)의 이곳은 조선시대에 법성진의 종3품 수군첨절제사=첨사의 집무처와 관사가 있었던 동헌(東軒)이 자리했던곳이다.
17) 신명희, 명철 선생 생가터
옛날 노인당 인근의 진내리 366번지 초라한 양철지붕 건물은 법성향지 발간에 많은 고증을 하여 주셨고 지금 법성중학교 전신인 사립 수산중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하신 신명희 선생과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으로 많은 고초를 겪으시고 1945년 광복후 우리고장의 초대 면장을 역임하신 신명철 선생의 생가터이다.
18) 우리고장 최초의 우체국 터
옛날 노인당 인근의 진내리 368번지는 우리고장에 최초로 우체국이 자리하게 된곳이다. 지금부터 95년전인 1910년이며 일본인 菊池가 사설 우편국을 개설하면서 비롯되었다.
19) 조학서당터
진내리 324번지, 현 박춘일 님이 거주하는 곳은, 우리고장에 최초로 사서당(私書堂)으로 문을 연 곳이다.
20) 객사지
진내리에는 객사지로 알려진 곳이 2곳이 있다. 그 하나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법성진지도상의 동조루와 신당 중간 지점이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한새바우 가는길에 자리하고 있는 박동필 님의 선산자리이다. 고증 자료는 없지만 박동필 님이 이곳에 객사지라고 친절히 표시석을 해 놓았다.
21) 3.1 독립운동 모의 터
옛날 조선시대 엄의원댁으로 전해지는 진내리 437번지, 지금 나상주 님이 거주하는곳이 1919년 3월 27일, 나계형 선생과 박명서 님이 주도했던 우리고장의 3.1 만세운동 모의처이다. 박명서 님의 자택이기도 했던 이곳에서 1919년 3월 30일 3.1 독립 만세시위를 청년마당에 모여 거사하기 위하여 시위 군중들에게 나눠줄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준비를 하다가 발각되어 여러분이 옥고를 치뤘던 산실이기도 하다.
22) 고경진 지사 생가 터
옛날 노인당자리인 진내리 362번지는 일제에 처절하게 항거했던 고경진 지사의 생가 터이다.
23)다랑가지:
법성포의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었다." 法聖놈은 놀아도 다랑가지에서 놀아야한다" 그만큼 그 곳은 수지가 맞는 장소이다. 우선 다랑가지의 위치와 語源부터 알아보자. 다랑가지는 재월(齋月)정이 서있던 월랑대 밑을 중심으로 하여 그 일대의 해안을 말한다. 그러나 정작 어원상으로 보면 다랑가지는 월랑대 밑 선착장이 있는곳을 이르는 말이다. 다랑가지는 다랑곶(多浪串)의 변음이라고 본다. 글자 그대로 다랑은 물결이 많은 곳 혹은 물결이 거칠은 곳이고 곶이란 만(灣)의 반대적 지형을 이르는 말이다. 반도 모양으로 수중에 돌출한 육지부분을 곶(串)이라 한다.
24) 마방(馬房)터:
마방이란 말을 메어두는 마굿간. 마필(馬匹)이 교통수단이던 당시로는 이곳이 지금의 차고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법성진(法聖鎭)에는 두 곳에 마방이 있었는데 하나는 하동문(下東門)에서 약 십오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웃저자거리 삼거리목이 있었다.
25) 마당고개:
비각(碑閣)거리에서 북쪽으로 곧장 뚫린 길을 타고 숲쟁이 쪽으로 가는 언덕진 길을 마당고개라고 부르고 있는데, 숲쟁이 다 간 곳이 넓은 마당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곳에 웬 마당일까? 다름 아닌 일본인들이 자기네들의 자녀만을 교육시키기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던 곳이다. 당시의 문헌에 의하면 그곳에다 그들이 학교를 세운 것이 1910년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합방이전(合邦以前)에 이미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법성포(法聖浦)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26) 옻밭구미:
이 지명에 대해서는 설(說)이 구구하다. 오박금(吳朴金)으로 보는 이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곳에서는 큰 부자(富者)가 났는데, 성씨(姓氏)가 吳,朴,金 3성(三姓)이라는 것이다. 다각도로 연구를 한 결과 얻은 결론으로는 옻밭이 있는 구미라는 말이다. 식물 중 옻나무가 있다. 약재로도 쓰이지만 주로 한칠(韓漆)의 주재료로 쓰이는 나무이다. 지금이야 화학적 방법으로 제조되는 양칠(洋漆)들이 많지만 옛날에야 오직 이 옻칠밖에는 없는 때였고, 그것의 쓰임새가 퍽 많았다. 갓에도 썼고, 상(床)에도 썼지만, 각종 가구에도 그것으로 윤을 냈다. 그리고 법성은 옛날에는 장인(匠人)들의 집단처(集團處)이기도 했다. 향(鄕),소(所),부곡(部曲) 따위의 특별지구에서는 그러한 공예품을 만들도록 하였었다. 그리고 끝에 붙은 구미란 곶(串)의 반대 즉 만(灣)을 이르는 순수한 우리의 말이다.
27) 굼밤모탱이:
이곳에서 조아머리로 가는 길이 제방(堤防)이 생기기 전에는 서문(西門)거리에서 옻밭구미로 가는 길 아래쪽이 낭떨어지가 나있지 않았다. 1930년대말 옻밭구미 앞을 구수진(九水津) 나루터까지에 간척공사를 할 때 구수진의 석산(石山)을 발파하고 서문거리 밑 땅을 허물어서 간척에 사용하였다. 공사현장에는 토석을 나르기 위해 철로까지 부설하고, 한창 일을 하다가 해방(解放)을 맞았다. 그 일대가 굼밤모탱이 인데 어원을 살펴보면 구미와 밭과 모탱이가 합성하여 만들어진 지명임은 어렵지 않으나 구미란 만(灣)의 우리말이고 밭은 전(田)이며 모탱이는 모퉁이의 방언(方言)이니 소쿠리 속 모양의 밭 모퉁이가 아니었겠는가? 그곳이 음운변화(音韻變化)를 일으켜 굼밤(굼밭)모탱이가 되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밖에는 해석(解釋)할 길이 없다.
28) 대통재:
대통치(待通峙)나 대통재나 같은 말이다. 우리말 가운데는 순수한 우리말과 한자어(漢字語)가 선후(先後)없이 결합되어 하나의 단어나 지명으로 되는 예가 얼마든지 많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이곳을 대통치(待統峙)라 한데대해 규장각(奎章閣)에서 발행한 법성진지(法聖鎭誌)에는 대통치(大通峙)로 되어있다. 그리고 선인들이 만들어 놓은 법성포십이경(法聖浦十二景)에는 통치락조(通峙落照)가 있다. 고대로 법성은 불교도래설이 아니더라도 중국본토와의 소로가 열려 있었음을 증명할만한 문적(文籍)이 몇 군데 있다. 영광(靈光) 적수여지승람(績修餘地勝覽) 누정조(樓亭條)에 협경루(挾鏡樓)가 있는데 기중(其中)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황명사관래왕정숙박소(右皇明使官來往定宿泊所)」또 법성진지의 고적조중(古蹟條中)에 「신라통사어강남시등주 차 지진지서 대통치하 설치관사 운운(新羅通使於江南時登舟 此 地鎭之西 大通峙下 設置館舍 云云)」.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점(点)은 대자(字)이다. 기다린다는 待字로 되었고 크다는 大字로도 표기해 놓았는데 통사(通使)를 기다리던 재라는 말도 되고 대국의 통사가 드나들던 고개라는 말도 성립이 된다. 대자(大字)는 다분히 사대적(事大的)인 색채가 농후하다. 중국을 상국시하는 발상에서 붙여진 지명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는 대대로 중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기면서 살아온 것이 부인못할 사실이 아닌가?
29) 동문거리:
당대의 진지도(鎭地圖)에 보면 東門은 두 개가 있었다. 숲쟁이 쪽의 것을 상동문, 구문거리의 것을 하동문이라 하였다. 下東門을 구문(舊門)꺼리라 한 것은 그쪽 동문이 먼저난 동문이었던 모양이다. 폐정이 되었지만 구문꺼리 샘이 있던 바로 위쪽에 하동문이 있었다. 그래서 구문꺼리라 하였을 것으로 본다. 거리를 꺼리로 발음하는 것은 관형격 촉음(慣型格 觸音)으로 봐야 마땅하다.
30) 월랑대:
법성포십이경중(法聖浦十二景中)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법성팔경(法聖八景)에는 월랑어시(月浪漁市)가 있다. 월랑대가 마치 제월정(霽月亭)의 별명(別名)과도 같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다른 뜻이 있다. 본시 '대'란 지형적으로 좀 높으면서도 평평한 지세를 이르는 말이다. 때로는 그런 곳에 세워진 누정(樓亭)따위도 같이 쓰이기도 한다. 例를 든다면 금강산의 망고대, 평양 대동강변의 을밀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월랑(月浪)이라 한 것은 얽혀진 사록(事錄)도 없고 전해오는 전설도 없다. 다만 높다랗게 치켜세워진 지세에서 야간(夜間)에 바다를 조망(眺望)하면 물결위에 부서지는 달 그림까지 운치(韻致)가 있어 붙여졌을 것에 불가하지 않겠는가?
31) 서문거리:
법성진은 3천62척의 석성으로 쌓아 일주(一周)를 하였는데 출입하는 성문은 네 개가 있었다. 北쪽은 완전히 城으로 막혔을 뿐 門이 없었고, 南에는 南門, 東에는 상하(上下) 두 개의 東門이 있었고, 西쪽에 西門이 한 군데 있었다. 그곳은 석성(石城)의 시점(始点)이 되는 곳이었는데 지도상(地圖上)으로만 확인이 가능할 뿐 아무런 흔적(痕迹)도 찾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일대를 西門거리로 부르고는 있다.
32) 조아머리:
지명의 어원에 대하여는 이미 언급된바 있으니 생략한다. 지금은 완전히 폐촌이 되어 버렸지만 일제시대까지도 번성한 어촌(漁村)이었다. 물 건너 백수(白岫) 구시미와 마주보이는 이곳은 주로 활 배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주 좋은 조아머리"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유명하였다. 대통치 산자락에 자리한 이 마을은 산을 타고 북쪽으로 돌다 보면 모래찜 바탕이 나오고 거기서 수문통(水門通)쪽으로 더 가면 자갈게미가 나온다.
33) 당모탱이:
모래찜 바탕에서 대통치 정상을 목표로 상당(相當) 거리를 올라가면 그곳에 당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당(堂)은 보통 말하는 당산(堂山)나무가 아니다 신당(神堂)이 있었다. 신당은 오십년도 더 전에 없어지고 겉에 있던 고목(枯木)은 뿌리만 남은채 썩어가고 있었다. 그곳의 신당은 우리나라의 토속신(土俗神)도 아니고 중국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운장의 신당이었다. 거기에는 확실한 사적(史的) 고증(考證)이 있는데, 일찍 중국에서는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는데 대하여 관운장의 사당(祠堂)을 무묘(武廟)라 하였다. 이러한 풍습이 우리 나라에 전래(傳來)된 것은 임란(壬亂)때의 일이다.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수병(授兵)으로 압록강을 건너올 때 국내에서처럼 관운장의 영정(影幀)을 가지고 들어와 진중의 군막에 수호신(守護神)으로서 받들며, 관운장의 신당을 설(設)하게 되면 백전백승(百戰百勝)한다는 전설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우리 나라에서도 모방을 하게 되었고, 법성 당무탱이에 있던 무묘(武廟)도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水軍이 출진할때는 물론이요, 조운선(漕運船)이 출항할때에도 반드시 이 무묘에다 고사(告祀)를 드렸으리라....
34) 모래찜 바탕:
모래찜은 탕사(湯沙)라 하여 고래(古來)의 민간요법이지만 현대과학에서도 물리적 치료효과를 인정하고 있다. 조아머리에서 자갈게미를 가는 중간에 있지만 거리는 자갈게미와 가깝다. 삼복염천(三伏炎天)에 태양열로 달아오른 뜨거운 모래에다 몸을 묻으면 피부질환을 위시(爲是)한 대소질병(大小疾病)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950년대말까지도 도농간(都農間)에 많은 부녀자(婦女子)들이 이곳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이것도 지금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35) 자갈게미:
천기농장의 방축공사장이 생기면서 현장식당으로 가건물(假建物)을 하나둘씩 세우고 장사를 하던 곳인데 작답공사(作畓工事)까지 끝나고 간척지 이민(移民)이 모여들자 자연스럽게 취락(聚落)이 형성되어졌다. 자갈이 많은 곳이었으며, 구미는 만(灣)이라 하지 않았는가? 변음화하여 자갈게미로 불리고 있다.<古老 박두엽(朴斗燁)氏의 증언이다>
36) 수문통(水門通):
홍농의 매물고지와 법성의 자갈게미를 이어주는 제방(堤防)이 목맥언이고, 그 언(堰) 끝에 설치된 것이 수문이다. 일본인 천기가 갑자년에 준공(竣工)하여 익년(翌年)에 완공한 堰인데 그 끝부분에다 갑문(閘門)을 설치한 것이다. 수문의 수는 八口로써 자동개폐식으로 만조시(滿潮時)에는 해수를 차단하고 홍수시(洪水時)에는 상류의 육수(陸水)를 방출하는 이중기능(二重技能)을 하는 셈이다. 內面에는 예비수문(豫備水門)이 있어 만약의 경우 수문에 이상이 발생하면 비상문인 예비문이 내려 해수(海水)의 유입을 방지하게 장치가 되어 있다.
37) 흰다리:
간척농지의 농업용수를 가둬두는 방축(防築)인데 저수량(貯水量)이 많을 때에는 여수토(餘水吐)의 구실도 한다. 이곳은 도보(徒步)로 홍농으로 건너가는 가교(架橋) 역할(役割)도 하고 있다. 양회(洋灰)로 만들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그 색이 희다하여 부르게 된 것이 흰다리이다
법성리(法聖里)
진량면(陳良面)의 내리, 외리, 검산, 독암, 후암동, 화천동일부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改編)시 법성리가 되었다. 법성면 행정의 관청(官廳)이 여기에 소재(所在)하였기 때문에 법성리라고 하였다. 여기에 조창(漕倉)이 들어오기 전에는 법성리쪽에는 대단위의 취락이 형성되지 않았고, 진내리 언덕바지에 소단위의 취락이 있을 뿐이었다. 조선초기(朝鮮初期)에 이곳에 조창이 생기면서 마을이 커지기 시작하였고, 중종(中宗)때 수군의 기지가 들어서면서 진성을 축조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인가는 성안에 집단적으로 있었다. 점차 양대 기구가 비대해지면서 민가는 차차 성외로 나오게 되니 이렇게 형성된 것이 내리(內里)와 외리(外里)이다.
1) 옥터거리;
옥(獄),지금으로 치면 교도소에 해당하는 곳. 밧모실에서 작은 동짓재(동잿재)로 가는 중간에 샘이 있는데 바로 그 위쪽에 위치.
그 자리가 옥터이며 그곳 일대(一帶)를 “옥터거리”라고 불렀다.
2) 부챗등;
큰 동짓재(동잿재) 동남(東南)쪽 등성이에 석불(石佛)이 있었기 때문에 부르게 됨.
3) 솟대거리;
사장(射場)터 남쪽에 민가(民家)가 있었고 그 곳에 솟대가 세워져 있어 부르게 된 지명.
4) 사장(射場)터;활을 쏘는 곳.
인의산 밑에 지금의 충혼비(忠魂碑)가 서있는 옛 신사당(新社堂)밑 자리쯤 될 것 같다. 그런데 그 사장(射場)이 법성진(法聖鎭)의 수군(水軍)들이 군사용으로 쓰던 사격 연습장인지 활량들이 풍류(風流)로서 즐기던 사장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5) 동짓재;
어원상(語源上)으로는 동치(東峙)가 맞는 말.(법성포의 동쪽에 있는 고개라는 뜻.) 옛날 육로(陸路)로는 법성의 유일(唯一)한 간선도로(幹線道路)였던 이 고개에는 얽힌 일화(逸話)도 많고,정서(情緖)가 담긴 시문(詩文)에도 흔히 등장(登場)하는 곳이다. 초등학교로 넘어가는 큰 동짓재와 후암동으로 넘어가는 작은 동짓재가 있다.
6) 왕재;
왕치(王峙)가 맞는 말인데 망(望)재로 부르고 있다. 둘다 맞는 말이다.
망(望)재는 군사상(軍事上)의 명당이고 왕(王)재는 풍수지리학상(風水地理學上)의 명당이다.
7) 검메(금메);
검산(檢山)의 원어(原語)로서 옛날에는 갯마을이었다. 갑자년(甲子年)에 목맥진(木麥津)이 막히므로써 지금은 농촌(農村)마을이 되었지만, 후포(後浦)를 에워 싸준 만(灣)의 구실을 한 곳이다.
8) 안안검메;
검메에서 인의산(仁義山)의 뒷자락을 돌아가면 후암동이 못 미치는 곳이다.
9) 잿샘;
성(城)안에 있는 샘이라는 뜻. 법성리 숲쟁이의 초입 현 노인회관 쪽에 위치해 있는데, 법성에 상수도(上水道)가 설치(設置)되면서 폐정(廢井) 되어버렸지만 옛날에는 대단한 식수원(食水源)이었다.
10) 진골;
숲쟁이의 정중앙(正中央)을 가르마 타듯 가르고 내려오는 길은 검메뿐 아니라 홍농(弘農)과의 중앙로(中央路)였다. 지금은 대로(大路)가 뚫리고 깨끗이 포장되어 있지만, 전에는 통행량(通行量)에 비해 길이 너무 좁아 오가는 행인(行人)이 서로 스치지 않고는 다니지 못할 정도(程度)였다. 이 길이 좁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가 내리면 하수구(下水溝)가 없기 때문에 온통 물소동이 났다. 장마라도 지면 길이 아니라 도랑이 되었고, 설사(設使) 날이 맑으면 길이 마르는 날이 없어 "진골"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11) 연동거리;
옥터거리에서 동짓재로 오르는 언덕길 바른 쪽에 샘이 하나 있는데, 연동 샘 혹은 연동거리 샘이라고 부른다. 연동거리 샘 바로 밑으로 있는 큰길을 일컫는 말인데, 연동의 어원(語源)을 연동(蓮洞)으로 보는 견해(見解)가 있으나 연등(燃燈)거리가 맞는 말이 아닐까한다. 그 옛날 이 큰 길목에다 연등(燃燈)을 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12) 홍살거리;
속칭(俗稱) 홍사거리 - - - 홍살문이 서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3) 밧모실(밤모실);
면사무소(面事務所) 뒤편에 소로(小路)가 있는데, 그 길이 통(通)하는 일대(一帶)를 이르는 마을 이름. 어원상(語源上)으로는 바깥마을이라는 뜻이다. 성내(城內)에서 볼 때에는 이곳은 바깥이었고, 모실은 마실의 방언(方言)이고, 마실은 마을의 고어(古語)이니 外村이 된다. 법성포에 진성이 축조되고 관아(官衙)가 들어서면서 성내인구(城內人口)가 과다(過多)하게 되자, 자연히 신분이 낮은 계층(階層)은 성외(城外)로 주거(住居)를 옮겨야만 되었고, 그리하여 형성(形成)된 취락(聚落)들 중의 하나이다.
14) 저자거리;
이 말이 퇴화(退化)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도 칠,팔십 노인(老人)들이 쓰는 말이다. 저자는 시(市)이고 거리는 가(街)이니 시쳇말로는 상가(商街)이다. 이곳 법성(法聖)에는 윗저자거리와 아랫저자거리가 있는데, 윗저자는 군기창(軍器倉) 뒤 사거리에서 해창(海倉) 거리까지인데, 주로 관가(官家)나 반인(班人)들의 주거래 상가(主去來 商街)였으며, 아랫저자는 현재 농협(農協) 앞에서 서쪽으로 삼거리를 거쳐 군기통(軍器通) 입구(入口)까지인데 일반서민층(一般庶民層)의 상가(商街)였던 것이다.
15) 농장;
일제시대(日帝時代)의 천기농장(川崎農場)이 있던 곳을 약칭(略稱)해서 농장(農場)이라 한다. 본래(本來)는 뻘 밭이던 곳인데, 일본인들이 법성에 축항공사(築港工事)를 함으로서 대지(垈地)가 된 곳이며, 해방후(解放後)에는 중학교(中學校)로 쓰인 곳이기도 하다.
16) 뒷개;
한자(漢子)로 표기(表記)하면 후포(後浦)이다. 법성진(法聖鎭)의 바로 등뒤
즉, 숲쟁이 아래쪽에 있으니 그리 불렀을 것이다. 당시의 지도에서 보면 그곳에는 진두점막(鎭頭店幕)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아마도 커다란 주점(酒店)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판단(判斷)이 든다. 그리고 이곳이 목맥진(木麥津)의 도선(渡船)이 발착(發着)하던 곳이기도 하다. 갑자년(甲子年) 천기(川崎)가 목맥간(木麥間)에 언(堰)을 쌓고 그 안을 작답(作畓)하게 될 때에 지금의 저수지(貯水池)는 농업용수(農業用水)를 가두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후 이곳을 뒷개라고 불러오고 있다.
17) 독바우;
행정문서(行政文書) 등에는 흔히 독바우를 석암(石岩)으로 표기(表記)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고, 독암(獨岩)으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곳에는 폐광(廢鑛)된 광구(鑛口)가 서너 군데 남아 있다. 그때 발파(發破)를 하였던 흔적(痕迹) 때문에 돌이 많아 석암으로 알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고래(古來)의 지명지(地名誌)에 보니 그곳에 독암진(獨岩津)이 있었다. 아마도 홀로 서있는 큰 바위가 있어 연유(緣由)된 지명이었으리라.
18) 후암동;
작은 동짓재를 넘으면 인의산(仁義山) 뒤편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 역시 목(木)이 방축(防築)되기 이전에는 갯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밭농사에 주력하는 마을로 정착(定着)되었다.
19) 독암진(獨岩津);
독암에서 언목간(言木間)을 막아 연륙(連陸)을 하였기 때문에 일정(日政)이 시작되고 얼마가지 않아 이곳의 나루는 폐지(廢止)되었다. 그 이전에는 해수(海水)가 복룡동(伏龍洞) 촌전(村前)에까지 드나들었고, 또 학교(學校) 밑까지 그러했다.
법성포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대로변(大路邊)에 염막(鹽幕)이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 사실(事實)이다.
20) 유우머리;
검메 잠두산(▩頭山) 바로 밑에 양수장이 있었고, 그곳에는 농번기(農繁期)에는 과개수를 양수하는 기계실이 있었다. 이곳을 왜 유우머리라 부르게 되었을까?
대개의 경우 지명은 지형에 따라 붙여졌고, 지형은 또한 동물의 形局에 따라 命名이 되었다. 이곳 역시 예외(例外)는 아니다. 법성을 수중와우(水中臥牛)라 하였는데, 이곳이 소의 머리부분에 해당되고, 조아머리는 우두(牛頭)의 좌편(左便)이요, 여기 유우머리는 우편(右便)에 해당한다는 근거이다. 본래는 좌우(左牛)머리, 우우(右牛)머리로 부르던 것이 점차(漸次)적으로 와전(訛傳)되어 오늘에 이른 것. 그를 뒷받침해주는 증거(證據)가 있지 않는가?
백수의(白岫)의 구시미는 소의 밥구시오,
홍농(弘農)의 매물고지는 여물고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봐야한다.
21) 누에머리;
검메의 동북단(東北端)에 우뚝한 등성이가 있다. 산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어설프고 둔덕이라 하기에는 좀 큰 편이다. 유우머리 양수장(楊水場)과 길 하나를 사이에 끼고 마주 대하고 있는데, 그 형국(形局)이 흡사(恰似) 누에의 머리 형태(形態)를 하고 있다. 중년(中年)에 일본(日本)에 가서 치부(致富)했다는 박씨(朴氏)가 가족묘지(家族墓地)를 조성(造成)했다.
22) 방구등;
인의산(仁義山) 뒷자락 후암동 뒤편에 호랑이 바위가 있고, 그 북쪽에 등성이가 있는데, 방구모양이라 하여 방구등이라고 부르고 있다.
23) 소구등;
방구등에서 좀더 북쪽으로 돌아가면 안안금메와 중간지점(中間地點)에 있는 등성이가 소구모양이라 하여 부르게 된 지명이다.
24) 천고치(天鼓峙);
천북재라고도 하는 이 재는 후암동 북쪽에서 검메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인의산중(仁義山中)에 있다. 장군(將軍)이 북을 치며 넘었다는 고개라는 전설(傳說)이 있기도 한 고개이다
화천리(化千里)
본래 진량면에 소속되어 있던 천년동과 후암동 화선동의 각일부가 한데 묶어져 화천리가 되어진 것은 1914년 행정구역개편작업을 할때의 일이다. 里名은 화선동(化仙洞)의 化字와 천년동(千年洞)의 千字가 합하여 만들어졌다.
1) 천년동:
천년동 이웃에는 만년동이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나온 村名인지는 알수가 없다. 지금은 어느곳하나 농로(農路)가 없는 마을이 있겠는가마는 유독 천년동은 커다란 창고가 여러동이나 있는 품(品)이 꽤나 부유해 보인다. 그러나 목맥이 막히고 여기에 천기의 간척답이 생기기 이전에는 겨우 소금장사들이나 지나다니는, 그리고 밭 농사나 근근히 하며 살던 미미(微微)한 마을이었다. 그시절에는 이 일대가 갯마을로서 해안에 나가 먹이를 구하거나 수항이나 삼미(三尾)등지에서 구워 만든 소금을 이고 다니며 행상을 하며 살았다. 천년동에서는 좌측이고 후암동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 그러니까 지금의 법성포 초등학교 뒤편에 차독배기라고 부르던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자형국(獅子形局)의 거대한 암석이 놓여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자암의 독배기에 선착장이 있어 세속에서는 독배기 선창이라 하였다. 또하나 독배기 부근에는 유명한 약(藥)샘이 있어 독배기샘이라고 불렀다.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이 샘은 지대(地帶)가 낮은 관계로 조수의 간만에따라 수시로 물에 잠겨버리는 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지하의 자연생수(自然生水)가 약수(藥水)로 소문이 멀리 났기 때문에 그 약수를 길어가거나 먹기 위해서 모여드는 사람이 춘하추동(春夏秋冬) 끊이지 않았다.
2) 만년동(萬年洞):
금영김씨(金寧金氏)의 세거기(世居地)라고 하며, 이백년전에 여기에 만년사라는 절이 있었다고도 한다. 종손(宗孫) 김일남(金一男)은 선대의 유품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데, 교지(敎旨) 홍패(紅牌), 백패(白牌), 문집(文集), 고서화(古書畵) 등이다. 또 항일의병(抗日義兵)으로서 무훈(武勳)을 세운 김준근(金俊根)도 이곳 출신이라 한다.
3) 석장리(石場里): 이마을의 구명(舊名)은 석바장이다. 어찌하여 석바장이라 했는지에 관해서는 알수없으나. 그 옛날 이곳은 대단한 교통의 요지로서 상가(商賈)가 번성하던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수중와우(水中臥牛) 어디로 가나 물뿐이던 법성 조운(漕運)이나 水軍이야 본시 물에서 하는 직책(職責)이니까 문제삼지 않더라도 外地에서 법성창으로 세미(稅米)를 지고 모여들던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지 않고서는 거의 육로(陸路)로서는 다니던 곳이 없었다. 전라도의 행정의 중심지가 전주이던 때에는 왕래(往來)하는 관원(官員)들이 이 길이 아니고는 어디로 갔겠는가? 도서지방의 장사치들이 물물교환을 위해 장을 벌리는 것도 바로 이곳 석장리였다. 길이 넓혀지고 포장이 되었을뿐 옛길이 그대로 이다.
4) 숙구지(宿狗址): 이곳에는 잠자는 개와 같은 형국의 암석(岩石)이 있었으며, 잠자는 개라는 의미로 숙구지가 된 것이다. 이 마을의 특징을 굳이 들자면 食水이다. 논가운데에 있는 露天의 이 식수는 어찌나 질량(質量)이 좋던지 가뜩이나 물이 귀한 법성포에서는 세탁물을 여기까지 가지고 와서 빨곤 하였다. 어찌나 물이 많이 펑펑 솟아 오르던지 中間에 물구멍을 좀 막았다는 설도 있고, 이 수맥(水脈)이 七山바다에까지 뻗어있어 산란기의 조기떼가 그 물을 먹으려고 모여들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5) 신두암(新斗岩): 글자 그대로 새斗岩이라는 말이다. 1923년 일본인 천기가 목맥 진내 간에 방축(防築)을하고 그 안의 개펄에다 作畓을 하였다. 그리고 광활(廣闊)한 농지에다 사용할 농업용수를 확보(確保)하기 위해서 상류(上流)인 全北 공음에다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가옥과 전답(田畓)이 수몰(水沒)의 화(禍)를 입게 되었다. 천기는 그들 피해주민의 보상책으로 법성면 화천리에다 집단이주를 주도하였고, 우선적으로 그들에게 간척답을 경작토록 하였다. 그들은 精든 고향을 잊지못한 나머지 '신'자를 더하여 신두암이라하게 된 것이다. 최초에는 오,육호(五,六戶)만이 있던 것이 지금은 칠십여호(七十餘戶) 삼백인구(三百人口)를 헤아리는 大村으로 급성장하였고, 면내(面內)에서도 모범적인 마을이 되었다.
6) 기타
☞ 갓고랑-천년동 南쪽에 있는 골짜기
☞ 구뜸-신두암 西쪽에 있는 오래된 마을,
구암전-신두암 西北쪽으로 있는 河川.
☞ 동적굴-만년동 東쪽에 있는 들판
☞ 동적굴둠벙-동적굴에 있는 둠벙
☞ 따순기미-석장리 北쪽에 있는 들,옛날에는 구미(灣)였었다.
☞ 딴섬-석장리의 北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는 따로 떨어져 있는 섬이었다.
☞ 만년동잔등-만년동에서 천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 새뜸-신두암 東쪽에 새로된 마을
☞ 재숫재-석장리 東北쪽 용현(龍峴)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 텃골잔등-텃골 東쪽에서 산당(山堂)으로 넘어가는 등성이
☞ 학산잔등-텃골과 삼당리 학산 사이에 있는 작은 등성이
삼당리(三堂里)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종전 진량면의 도장리(道庄里), 삼미천리(三尾川里),당산리(堂山里)의 삼개리(三個里)를 합하여 삼당리로 하였다. 삼미천의 三과 당산의 堂을 합하여 된 里名이며, 이곳은 홍농읍(弘農邑)과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위치이다.
1) 수항(水項):
자의(字義)대로 물목이다. 지금은 다리로써 연륙(連陸)이 되고 윗편에는 언(堰)도 있지만, 옛날에야 용덕리 발산(發山)까지 바다였고, 성촌(城村)의 세미(稅米)를 싣기 위해 조운선(遭運船)이 드나들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교량(橋梁)이 가설(架設)되기 이전에는 홍농 을진간(乙津間)을 도선(渡船)이 다니던 도진(渡津)터이다. 흔히 홍농 을진포를 샛목이라 부르고 있으나,그이름은 법성의 수항까지를 합해서 부르던 지명이다. 을진의 乙字와 수항의 項字를 따서 불러보면 새목이 되지 않는가?
2) 새미내:
삼미천(三尾川)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고래(古來)로 이 마을에는 삼미(三尾)의 전설이 있다. 구미(狗尾), 우미(牛尾), 서미(鼠尾)의 삼미이다. 간척이 되어 지금은 농촌이지만 ,옛날에는 화염(火▩)을 제조해왔던 곳이다. 제조과정도 복잡하였을뿐 아니라, 소금 그자체를 대단히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신성시(神聖視)하기까지 하였다. 매 과정마다 종사하는 사람은 몸을 정결(▩潔)하게 해야하고 그 장소에는 禁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은 근접을 막았다. 고노(古老) 최경서옹(崔敬書翁)의 증언으로 알게 되었다.
3) 당산(堂山):
항용(恒用) 부르기는 당새이라 한다. 이 당새이는 새미내와 작은 잔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 마치 一村과 같다. 지금 교회앞 길가에 당산木이 있어서 마을 이름이 당새이가 되었다.
4) 학산(鶴山):
이 마을은 지형이 학과 같다하여 학산이라 하였고, 만년동과 용현(龍峴)의 중간지점(中間地点)에 위치한 마을로 점촌(粘村)이었다. 점촌(粘村)이란 옹기장(甕器匠)들이 옹기를 생산하는 곳을 말한다.
5) 기타
☞ 감도리-삼당리와 용덕리에 걸쳐있는 들.
☞ 굴바우-굴이 있는 바위, 삼당리에 있다.
☞ 똘고개-학산에서 새미내로 넘어가는 고개.
☞ 몰무덤-당새이 北쪽에 있는 큰 무덤, 옛 장수의 말무덤이라 하여 파보니
겉은 석실(石室)로 되어있고 검(劒)과 식기(食器)등이 나왔다.
☞ 샛목나루터-을진도선장.
☞ 성적굴-학산 南쪽에 있는 마을.
☞ 항새목-당산 西쪽에 있는 마을
용덕리(龍德里) 진량면에 소속되었던 구암리(龜岩里),발산리(發山里),덕산리(德山里),용현리(龍峴里),신계동(新鷄洞) 각일부를 통합하여 용현과 덕산의 머릿字를 따서 용덕리로 했는데,전라도 고창군 공음면과 접경(接境)을 하고 있다. 1) 용현: 삼덕초등학교가 있던 안쪽의 큰 마을이다. 마을 앞에서 법성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용현재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말의 언어 습성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저 용현하면 용재 혹은 용고재라는 말인데, 굳이 용현재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 앞 논두렁가에는 지금도 커다란 지석(支石)이 일기(一基)있고, 마을 입구에는 입석(立石)도 있다. 그곁에는 소나무 당산 한 그루가 서 있다. 2) 덕산: 뒷산 이름을 따라 마을 이름도 덕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제주양씨(濟州梁氏)의 자작일촌(自作一村)으로서 마천에서 이주하게 되었다. 양문(梁門) 종가(宗家)의 후원에는 사당이 있고, 촌전에는 쌍효일열(雙孝一烈)이라는 정각(旌閣)이 있어 세인의 이목을 끌고 있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교지(敎旨),홍패(紅牌),백패(白牌) 기타 문집(文集) 등이 가보로써 잘 보전되고 있다. 3) 구암: 이 마을은 법성-공음간의 국도변에 있는데 동구에 천연암석인지 지석인지 분명치 않으나 거대한 암석이 놓여 있다. 그 형태가 흡사 엎드려 있는 거북이와 같다하여 마을의 이름을 구암이라 하였다. 머지않은 곳에 전라북도와의 도계(道界)가 있고, 마을 뒷산에 제법 큰 고총일기(古塚一基)가 있다. 4) 신계동: 촌명에는 구구한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설(說)은,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옛날에는 신계동 앞산 기슭에 '외대'라고 하는 거대부촌이 있었다고 한다. 닭의 형상을한 이곳을 계촌이라 하였는데, 외대에 比하여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으로 新字를 붙여 신계동이 되었다고 한다. 구 한말의 유학자 소남(小南)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5) 발막리(發幕里): 古書에서는 지명이 발산(發山)으로 되어 있고, 구전으로는 벌막이었다고 한다. 벌막이란 염소(鹽所)에서 소금을 굽던 곳이다. 지금이야 농촌이지만, 그 옛날 이곳은 뻘 밭이었고 거기에 소금을 굽던 벌막이 있었던 곳이다. 아마도 漢字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발막이 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6) 기타 ☞ 감도리-용현 북쪽에 있는 감돌아 가는 골짜기. ☞ 감돌이고장-용현 북쪽에 있는 들. ☞ 감투봉-덕산 서쪽에 있는 산. ☞ 강낙골-용현 남쪽에 있는 골짜기. ☞ 고자보-용현 남쪽에 있는 저수지. ☞ 구랫들-신계앞에 있는 들. ☞ 구석굴-감도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대기잿고랑-덕산앞에 있는 들. ☞ 덕실재-신계 동남쪽에 있는 고개.
대덕리(大德里) 진량면에 소속되어 있던 성재동(聖齎洞) 차경리, 언목리, 복룡동, 화천동, 외리일부(外里一部)를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법성면의 대덕리로 단일화(單一化)한 것이다. 대덕리로 명칭을 하게 된 것은 대덕산(大德山)의 주변마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1) 언목: 대덕산의 西北쪽에 있는 마을인데 문헌에 따르면 조선조 후기에 언(堰)(제방)을 쌓고 마을이 생겼다라고 하였다. 그 이전에는 개펄이었다. 언(堰)은 독암진의 왕래간(往來間)을 방축(防築)한 것을 말한다. 지금 주유소가 있는 독바우에서 은선암(隱仙庵)으로 가는 삼거리 즉, 水門이 있는 곳까지를 독암진 나루가 다니던 곳이다. 여기에 뚝을 쌓아 연륙(連陸)이 되면서 마을이 이룩되였기 때문에 언(堰)의 목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언목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것을 漢字로 表記한다면 언항(堰項) 또는 제항(堤項)이라고 해야 옳다. 마을 뒤에는 적어도 삼백년(三百年)은 됨직한 노거수(老巨樹) 당산(堂山)이 있다. 2) 괸돌: 언목에서 영광행(靈光行) 대로(大路)를 따라 가다가 복룡동으로 접어드는 입구 삼거리 목에 장방형(長方形)의 지석(支石) 이기(二基)가 놓여 있다. 이 고인돌이 있다하여 괸돌이라 부르는데, 독암진에 나룻배가 다니던 옛날에는 이 지석에 걸터앉아 바다낚시를 즐겼다하니 금석지감(今昔之感)이 들지 않는가? 이 지석(支石)이란 신석기시대와 금석병용시대에 걸쳐 부족장(部族長)의 무덤을 덮는 개석(蓋石)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와 만주지방에서만 행하여진 것으로서 지석의 下部에는 해휴(骸休)를 이장하고, 지석 위에다 늘 제물(祭物)을 진설(陳設)하는 상석(床石)같은 용도(用途)로 썼다고 한다. 3) 복룡동(伏龍洞): 이 마을에는 용명당(龍明堂)이라 일컫는 모문중(某門中)의 명묘(名墓)와 지금은 매몰(埋沒)되었지만 독암의 해안에 있던 용알 등을 굳이 들지 않아도 용자(龍字)를 촌명에 써야 한다. 흔히들 用字를 쓰고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앞자가 복(伏)자인데 어찌 쓸 용자가 뒤에 붙을 수가 있겠는가? 엎드려서 쓰다니 무엇을 엎드려서 쓸 것인가? 복룡(伏龍) 즉 엎드린 용이 있는 마을이 맞는 말이다. 차창(車窓)으로 봐도 운치(韻致)있는 이 마을의 老松 堂山은 명물이 아닐 수가 없다. 4) 성재동(聖齋洞):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고, 대성학원이라는 간이학교가 있던 마을이다. 5) 대덕산(大德山): 대덕산은 법성포의 안산(案山)이요, 명산이다. 법성의 역사는 이 山안에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東南쪽에는 마천사지(馬川寺址)가 있고, 깎아 세운 듯 기암절벽(奇巖絶壁) 가운데 은선봉(隱仙峯) 아래는 은선암(隱仙庵)이 있다. 뒷자락에는 천년의 장구(長久)한 역사를 자랑하는 부용창지가 있고, 南쪽으로 돌아가면 매향(埋香)의 슬기가 남아 있다. 휘파람골이며, 새운골, 잔등 등 무형의 사적들은 이 큰 산의 품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대덕산의 北쪽 성재동의 맞은편 산록(山麓)에는 개성 있는 자연암(自然岩)들이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어름바위가 있고, 섬바위와 상투바위가 있으며, 부석바위와 갈모바위가 있다. 한편, 성루바위와 부엄사병이 큰바위와 벼락바위 등이 산재(散在)하고 있다. 6) 기타 ☞ 가작골-안골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 ☞ 갈구지고개-갈구쟁이 혹은 갈구지라고도 부르는데 가작골 서쪽에 있는 고개. ☞ 갈모배미-논의 모양이 갈모처럼 생겼다해서 갈모배미라 하였다. 그 위에는 쥐똥배미가 있다. ☞ 남당재-언목 남서쪽에서 입암리 마천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이다. ☞ 대삿고개-괸돌에서 신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 동지기샘-동지기 배미 논가운데에 있는 샘. ☞ 몰무덤재-복룡동에서 성재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그곳에 옛날 말의 무덤이 있다해서 생긴 이름. ☞ 산당들-복룡동 남쪽에 있는 들인데 젠에 그곳에 山堂이 있다하여 생긴 이름. ☞ 상사마웃등-대삿고개 서쪽에 있는 등서이인데, 男女간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있는 곳이다. ☞ 샛터-언목의 등넘어에 새로이 생긴 마을이다. ☞ 안골-복룡동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그리고 그곳의 들을 안골들이라고 부른다. ☞ 은골-언목 서쪽에 있는 골짜기. 그 이면도로(裏面道路)는 은골모탱이라고 부른다. ☞ 항진모탱이-언목 남쪽에서 입암리로 가는 모탱이이다
용성리(龍城里) 종래에 진량면에 소속되어 있던 백옥개(白玉介),성촌(城村),신기(新基), 향양동(向陽洞),용동(龍洞),선동(仙洞),용현리(龍峴里),장자동(庄子洞),화천동(化泉洞),신산리(新山里) 각일부를 통합하여 용성리로 1914년 개편되었다. 이 시절의 관아(官衙)가 여기 용성리에 있었다는 것은 고문헌(古文獻) 등이 증명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이곳이 옛날 법성의 원님이 살던 곳이라는 구전(口傳)이 남아 있다. 1) 성촌(城村): 어느때부터 성촌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마을은 본시 창촌(倉村)이었다. 조창(漕倉)이 있었기 때문에 노적(露積)한 세미(稅米)를 방비보존(防備保存)하기 위해서 城을 쌓았고,지금도 그 앞에 창밭(倉田)으로 불리우는 밭이 있다. 당시부터 올려졌을 천영제(薦靈祭)가 지금껏 답습(踏習)되고 있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는 토성의 언저리에 제염(祭鹽)이 상설(常設)되어 있는데, 동중(洞中)에서는 정성을 다해 지금도 정초(正初)에 祭를 지내고 있다. 2) 기동(基洞): 우리 말로는 텃골이다. 韓山 李氏의 세거지(世居地)인 이 마을에는 수백년 묵은 당산나무를 없애고 마을에 흉사가 겹쳤다고 전해진다. 3) 장복동: 노루가 엎드린 형국이라하여 村名이 장복동이라 하였다. 일제시대에 뒷산에 옥련암(玉蓮庵)이 있었고, 우편(右便)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용성저수지가 있는데 경관(景觀)이 좋다. 산중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낚시등 휴양(休養)하기로는 쾌적한 곳이다. 4) 신기(新基): 순수한 우리말로 샛터이다. 다시 말하면 새롭게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다. 5) 배우게: 어원을 고찰(考察)하고 있으나 불확실하고 전면장(前面長) 이두원(李斗遠)이 말하는 說이 근사하다. 을진과 수항간에 방축이 생기기 전에는 성촌앞까지 해수가 드나들던 바다였다. 그 시절 배를 타고 드나들면서 선상(船上)에서 바라다보는 배우게는 높다랗게 보였으리라. 그래서 배(舟) 우게(上)라고 命名된것이라는 주장이다. 조선시대에는 외지인(外地人)이 법성포로 착각할 만큼 대단한 부촌이었다. 마을 뒷등에 기와를 굽던 가마터도 있다. 6) 향양동(向陽洞): 한자음으로는 하양동이라 읽지만, 우리들이 통칭(統稱)하기는 시양동이다. 옛날 하양골의 원님이 살던 곳이라는 구전이 있는 만큼이나 이채로운 데가 많은 곳이다. 옛날에는 이 앞에 場도 섰고, 텃골에는 향교(鄕校)가 있었다고도 하지만, 지금은 신비에 싸인 東山만이 하나 남아있다. 7) 기타 ☞ 감투봉-성촌 西쪽에 있는 산으로 한자(漢字)로는 효포산(孝布山)이라 쓴다 ☞ 강낭골-성촌 東쪽에 있는 골짜기. ☞ 꽃밭등-새양동 西쪽 등성이 꽃이 많이 피여있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나래섬-장복동 東쪽에 있는 샘인데 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우물이다. ☞ 도독골-성촌 北쪽에 있는 골짜기. ☞ 돌팍재-성촌 北西쪽에서 화천리로 넘어가는 고개. ☞ 두복사(斗伏寺)터-신기 西쪽 골짜기에 있던 절이름. ☞ 등머리-신기동 南쪽에 있는 들. ☞ 땅재-성촌에서 새양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堂집이 있었다. ☞ 매산재-텃골에서 배우게로 넘어가는 고개. ☞ 방구등-성촌 西南쪽에 있는 등성이. ☞ 배약수-장복동 西쪽 골짝에서 땀띠에 효험이 있는 약수가 나왔다. ☞ 백택구-선동에서 장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 산당-성촌 北쪽에 있는 마을. ☞ 서낭등-장복동에서 성촌에 이르는 등성이, 서낭당이 있었다. ☞ 신둣재-배우게에서 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 안락골-선동 東쪽에 있는 골짜기. ☞ 중바우-장복동 南쪽에 있는데, 중의 머리처럼 둥글게 생겼다. ☞ 창촌-성촌의 一名. ☞ 전륭재등-성촌의 토성에 있는데 해마다 천영제(薦靈祭)를 지낸다. ☞ 통샘거리-성촌 南쪽에 있는 골짜기 통샘이 있음. ☞ 뛰엄바우-성촌에서 석장리통 도로를 따라 약 삼백메타쯤 걷다가 좌측 산속 반석(盤石)이 하나 놓여 있는데 사람이 맨몸으로 두발 굴러 뛰어 오르기에 알맞을 정도의 높이다.
본래 진량면에 속해 잇는 복흥동(福興洞) 입전리(立田里) 입암동(立岩洞) 마천리(馬川里) 등 사개리(四個里)를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법성면으로 면명(面名)을 바꾸면서 里名도 입암리(笠岩里)로 하였다. 이곳은 순전히 대덕산아래에 있는 취락만을 한데 묶은 셈이다. 입암(立岩)이란 선바우가 동구(洞口)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행정관청에서는 입암리(笠岩里)로 표기하고 있는데, 일본인들이 아무런 유래나 근원도 무시한 채 붙여 쓰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1) 고법성(古法聖): 고려시대에 조창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고법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만 할뿐, 본시 이곳의 村名은 복흥동(福興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5~6호(五,六戶) 있을 뿐 창지(倉址)였다는 산록(山麓)에는 어느 술객(術客)이 외롭게 살고 있을 뿐이다. 2) 입전리: 이곳의 村名은 와전(訛傳)되어 입정리라고 부르고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옛날 유림(儒林)들이 작성한 천장(薦狀)에도 입전리로 되어있고, 관(官)에서 발급한 단자(單子)에도 立田이라 하였다. 옛날 礎石에도 입전이라 각자(刻字)된 것이 있으니 분명히 이 마을으 이름은 입정리가 아니라 입전리인 것이다. 이 마을의 역사가 오래된 것을 증명해주는 것들이 주변에 많이 있는데, 그 첫째로는 지석(支石)이고, 둘째로는 영광군내에서도 최고로 평가되는 매향비(埋香碑)가 있다. 마을안에는 지금도 한산이씨(韓山李氏)의 효열각(孝烈閣)과 진주하씨(晋州河氏)의 효자각(孝子閣)이 서 있다. 3) 마천: 마촌(馬村)이라 하고 있는데 원 우리 이름으로는 말냇골이고 漢字로도 마천(馬川)이 맞다고 한다. 어느 때부터 마촌이라 썼는지 모르겠으나, 임란시절 이곳에 정착하게 된 三姓이 있었으니 김해허씨(金海許氏),제주양씨(濟州梁氏) 그리고 광산김씨(光山金氏)였다. 광산김씨는 이 고장을 일찍이 떠나 지금은 정읍 등지에서 살고 있으며, 양씨는 용덕리 덕산에서 지금도 종손이 살고 있다. 그리고 허씨만이 법성포내에서 세거중(世居中)인데, 그들 족보(族譜)에도 지명은 분명히 마천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대덕산의 큰 품에 안겨 있을 뿐 아니라 산천경개(山川景槪)가 어느 곳에 못지않게 빼어난 곳이기도 하다. 법성포 12경중에도 나오는 마천초가(馬川樵歌)가 바로 이 곳이요, 12경을 앉은 채 거의 다 볼 수 있는 위치이기도하다. 4) 입암동: 동구에 선 바우가 있어 입암동이라 하였다한다.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세거지(世居地)이던 이곳이 옛날에는 인적이 끊이지 않는 번창한 길목이었다. 코앞에 선진(仙津)나루터가 있어 조곡(租穀)을 등에 지고 이곳을 건너다녔을 많은 사람들이 상상이 간다.
5) 기타 ☞ 새언안-구언(舊堰) 밖으로 일본인 매전(梅田)이 새로운 언(堰)을 쌓았는데(立田앞) 이것을 새원안이라부르고 있다. 새로 쌓은 언의 안쪽이라는 말이니 새언안이 맞는 말이다. ☞ 건지봉-입전 서쪽에 있는 산. ☞ 노적봉-건지봉 북쪽에 있는 산으로서 노적가리처럼 생겼다. ☞ 농바우-입전 뒤쪽에 있는데 농처럼 생긴 바위이다. ☞ 몰머리-마천 북쪽에 있는 산. ☞ 몰머릿재-마천 북쪽에 있는 대덕리로 넘어가는 고개. ☞ 복굴-입전 동쪽에 있는 들. ☞ 비내바우-입전 서쪽에 있는 바위. ☞ 선바우-입암리 잇재 밑에 있는 바위. ☞ 와용등-입전에서 선진으로 넘어가는 등성이 누은 용이 강을 건너가는 형국이라 한다. ☞ 잇재-옛재 혹은 고치(古峙)라고도 부르는데 입전리에 있다. ☞ 평부등-고법성과 마천 사이에 있는 펀펀한 등성이. ☞ 황새바우-입전리 남서쪽에 있는 바위
덕흥리(德興里) 진량면의 신덕동(新德洞), 신흥동(新興洞), 장전리(長田里), 신봉리(新峯里),지장리(芝庄里)의 일부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덕흥리가 되었다. 1) 신덕동: 임(壬) 병양란(丙兩亂) 이후 창녕성씨(昌寧成氏)가 세거(世居)한 취락으로서 지금도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다. 많은 관리와 선비를 배출하였으며, 효자도 나온 명문이다. 망운재가 보전되고 있으며 종가(宗家)에서는 文集 등 많은 선대의 유품을 간직하고 있다.
2) 장전: 우리말로는 진밭등이라고 부른다. 장전(長田)을 그대로 풀이한 것인데 긴밭을 방언(方言)으로 하니까 진밭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나 억측(臆測)에 지나지 않는다. 장전(長田)이란 마위전(馬位田)의 별칭인데, 마위전이란 역마(驛馬)의 사료(飼料)를 재배(栽培)하던 관전(官田)이다. 다시 말하면 관원들이 타고 다니는 마필(馬匹)에게 먹일 곡물을 가꾸던 밭이라는 이름이다. 그러니까 장전이란 옛날 마위전을 경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3) 신흥동: 신덕동과 입전리의 중간에 있는데 거리로는 신덕동과 가깝고 지대는 좀 낮은 편이다. 이곳이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에 참가(參加)했다가 옥고(獄苦)를 치른바있는 애국자 박기순(朴基淳)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4) 지장리: 이마을은 대덕산(大德山)과 정면대좌(正面對坐)를 피한채 곁눈으로 바라다보고 있다. 우측에는 모가지요, 좌측에는 소반촌이라는 작은 마을들을 두고 있다. 입전앞 언(堰)이 막히기 이전에는 바로 촌전(村前)에까지 해수가 드나들던 갯마을이었다. 지금도 마을앞 언덕바지에는 당시에 배를 매었다는 계선주(繫船柱)가 비스듬히 누워있다. 영광통 대로 좌편 둔덕에는 이 마을에 세거(世居)하던 전주이문(全州李門)의 효자각(孝子閣)이 있다. 5) 오봉촌: 古書에 보면 이곳이 신봉리(神峰里)로 되어 있다. 지금은 오봉촌이라고 부르는데 뒷산이 오봉산(五峰山)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산봉(山峰)이 다섯 개라고 하여 오봉산이라 하는데, 그중 제일 높은 峰을 靈峰이라하여 가뭄이 들면 그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리곤 하였다. 지금도 올라보면 흔적이 영력하고, 나무도 팔고 숯도 구워서 팔아 생계(生計)을 유지하던 산촌이였다. 6) 모가지: 지장리에서 법성 방향으로 대로를 따라 내려오면 내리막의 종점, 우측에는 저수지가 있고 좌측에는 작은 취락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모가지이다. 유래는 정확지 않으나 구전(口傳)들은 이러하다. 상거래의 질서가 확정되기 이전, 물물교환의 방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내가 사고 싶은 물건과 상대방이 원하는 물건이 내것과 같으면 무리없이 교환은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고, 그 장소는 인위(人爲)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모여지는 곳이었다. 이곳이 바로 그 목이었다는 말이다. (지금도 많이들 쓰는 말"장사는 목이 좋아야 한다") 7) 지아닐: 옛날에는 큰 화물선(貨物船)과 상고선(商賈船)들이 출입하는 포구(浦口)였다. 때문에 지명도 와탄포(瓦灘浦)라 하였고, 지금은 와탄교(瓦灘橋)라는 교량(橋梁)이 놓였지만, 전에는 영광간(靈光間)에 와탄진(瓦灘津)이라하여 나룻배가 다녔다. 8) 기타 ☞ 간댓골-신덕동 東北쪽에 있는 골짜기 ☞ 갈구지-갈구쟁이라고도 부르는데, 오봉촌 서북쪽에서 대덕리의 복룡으로 넘어가는 고개. ☞ 궁답-궁(宮)에 딸린 논이었다한다. ☞ 나만골-중촌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는 절이 있었다고도 한다. ☞ 단동재-신덕동에서 복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 부엉바우-신덕동 서쪽에 있는 바우. ☞ 사기점골-지장리 동쪽에 골짜기 사기점이 있었다함. ☞ 신봉-오봉촌의 옛이름. ☞ 야달마지기샘-욧골 여덜마지기 논가운데에 있는샘. ☞ 탕건재-지장산에서 신장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모양이 탕건처럼 생겼다하여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
신장리(新庄里)
1914년 日政이 행정구의 개편을 하기 이전까지는 진량면에 소속된 취락들이었다. 두호리(斗湖里),부귀동(夫貴洞),장수촌(長水村),덕평리(德坪里),장자동(庄子洞),서당촌(書堂村),신선동(新仙洞),지장리(芝庄里)의 각일부가 병합되었는데 신선동의 첫 자와 장자동의 첫 자를 합하여 里名으로 하였다.
1) 장자동:거부(巨富)가 살았다하여 장자동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도 그 규모가 인접 타지에 비해 뒤지지 않고, 부자가 살았던 때문에 명절마다 洞祭를 올리고 오락도 즐기던 농악이 전래되어 왔다. 그런데 中年에 마을에 재난이 계속되는지라, 용하다는 복술가에게 가 연유를 물어본 즉 "이 마을의 성황신(城隍神)은 소음을 싫어하니 앞으로는 농악을 금하라."하였다. 그 이후로는 대고(大故)없이 태평하였다고 한다.
2) 송고지(松古地):지금의 느티나무 당산도 법성면에서는 제일연륜이 오래된 것 같은데 그 위 50m에는 원당산(元堂山)이 있었다고 한다. 만수(萬壽)를 누리고 고사(枯死)한 그 원당산은 육송(陸松)이었다고 하는데 그로 인하여 村名이 송고지가 되었다고 한다. 촌명이 예시하듯 인근 취락중에서는 제일 오래된 古地가 분명하다. 새마을 사업통에 몇 개 안남아 있던 계선주(繫船柱)도 다 땅속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기름바우로 불리우는 거대한 반석 하나는 마을 가운데에 남아 있다. 형태로 보아서는 지석 같기도 한데 기름바우로 불리우게 된데에는 이유가 있다. 옛날에는 참기름,들기름,피마주기름,목화씨기름 등의 기름을 채유할때 나무틀에다 넣어서 기름을 짜았다. 이때 모두 열로 볶아서 약간씩 절구로 빻아야하는데, 그때 이 반석이 절구통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3) 부귀동:부르기는 부구동이라 하는데,한자로 쓸때는 부귀동(夫貴洞) 혹은 부구동(浮龜洞)으로 한다. 어원은 불분명하나 古書에서는 부귀동으로 되어 있다. 이고장에는 일정시대에 장수촌의 출신으 선각자 장연동(張連同)이 지방 유지들과 뜻을 모아 학당을 설립하고 신교육을 한 일도 있었다.
4)두호리: 와탄포의 상류인 이 마을은 두거리라고도 부른다. 와탄포에 비해 상대도 되지 않으리 만큼 그 규모는 적었지만, 선착장이 있고 도서지방의 소형상매선들이 접안(接岸)하였다. 일본인 지주들이 삼인(三人)이나 살았는데, 소작료외 사들인 벼를 와탄호에 있는 정미소에서 도정(搗精)을 한 다음 일본으로 수송하는 장사를 했다한다. 해방후 그들의 창고가 진량초등학교의 임시교사(臨時校舍)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5) 서당촌: 이 마을에는 조선중기때부터 관서당(官書堂)이 있었기 때문에 촌명도 서당촌이 되었다.
6) 장수촌:구전에 따르면 장수현감(長水縣監)을 지낸분이 살게 되면서부터 村名이 장수촌이 되었다고 한다.
7) 신선동: 이 마을은 주변에 산재한 오기(五基)의 지석만 보아도 오래된 취락임을 직감하게 된다.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 一基, 200米쯤 떨어진 한길쪽에 三基, 그리고 거기서 약 100米 거리에 一基가 있다. 논밭에서 출토되는 석기유물들도 다양하다. 석부(石斧), 석시(石矢), 석추(石錐), 석검(石劒) 등이 있는가하면 청동제유물(靑銅製遺物)들도 도굴(盜掘) 당하였다고 한다. 일련(一連)의 흔적들로 보아 이곳은 석기시대 이전의 집단생활지였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마을 앞 건너편에는 청주한씨의 명묘(名墓)가 있기도 하다.
8) 기타
☞ 갓골-부귀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갱기모실-와전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구정물 둠벙-서당촌 북쪽에 있는 둠벙.
☞ 돌보-장래 서쪽에 있는 보, 봇물이 여러 산굽이를 돌아서 흐름.
☞ 두거리잔등-서당촌과 두거리 사이에 있는 작은 등성이.
☞ 뒷골-장재 뒤쪽에 있는 골짜기.
☞ 말뚝배미-부귀동 서쪽에 있는 논.
☞ 백택골-용성리와 신장리에 걸쳐있는 골짜기.
☞ 부귀동잔등-부귀동 서쪽 서당촌으로 넘어가는 등성이, 서당촌
잔등이라고도 부른다.
☞ 비안(飛雁)골-장수촌 서북쪽에 있는 긴 골짜기, 지리학상 나르는
기러기의 형국이라함.
☞ 새뜸-부귀동 동쪽에 있는 마을.
☞ 서당촌잔등-부귀동 잔등이라고도 함.
☞ 시개다랭이-부귀동 북쪽에 있는 논다랭이인데 이 다랭이의 작황을 보면
그 해의 풍흉(豊凶)을 가늠할 수 있었다.
☞ 안골-서당촌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진잔등-서당촌 북쪽에 있는 긴 잔등.
☞ 풍덕골-두거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둔덕이 있음.
☞ 한시랑묘-비안골에 있는 한시랑(韓侍郞)의 묘(墓).
☞ 한절골-갱기모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절이 있었다.
☞ 항바우-신선동 동쪽에 있는 바위.
월산리(月山里)
예나 지금이나 지리적으로 취약(取弱)곳이다. 때문에 교통도 불편하고, 행정력도 멀기만 하던 곳이다. 1914년 진량면의 산하치(山下峙),화장동(化莊洞),월계(月桂里),덕평리(德坪里)에다가 도내면(道內面)에 속해있던 주록리(走鹿里),와진리(臥津里)의 각일부(各一部)까지를 월산리로 만들었다. 지금은 농로의 개설과 정규운행하는 군내버스가 드나들어 교통편도 많이 호전 되었다. 법성면의 가장 동북변방(東北邊方)에 위치한 이곳은 전북 땅과 도계(道界)를 이루는 한편,영광읍과도 접경을 하고 있다.
1) 월계: 삼백년 전에 흥성장씨와 청주한씨가 같이 성촌했다고 전하는 이마을은 교통의 요지였다. 려조이래 교통기관(麗朝以來 交通機關)으로서는 역(驛)과 원(院)을 두었는데,영광에는 녹사(綠沙)라는 역 한군데와 다섯군데의 원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이 도편제원(道鞭悌院)이 월계에 있었다. 지금도 구전으로 원터라고 하는 이곳을 원님이 살던 집터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역원제(驛院制)란 고려이래(高麗以來)의 교통제도로서 8도(八道)에는 총41도(總四十一道) 541개역이 있었는데, 역과 역 사이에는 원이라고 하는 것을 두었다. 이 院이란 官員들이 공무(公務)를 띠고 여행(旅行)할때에 숙식(宿食)의 편의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2) 덕평리: 부르기는 되평리라 하는데 한자표기상은 덕평리(德坪里)이다. 이 地域은 특수한 사당(事幢)으로 일화도 많고, 전설도 많은 고장이다. 그 까닭은 교통상의 요지라는 점과 행정의 사각지대라는 점을 들수 있다.
3) 산하치: 우각산(牛角山) 봉암산(蜂岩山) 효포산(孝布山) 등이 취락을 싸고 있으니 山下峙라는 촌명은 오히려 당연하다하겠다. 우각산 산봉에는 사찰이 있었는데, 寺名은 불분명하나 백여년 전까지도 있었다고 하며,지금도 寺井의 석간수는 흐르고 있다. 개화기에 이 마을에는 불란서 신부들이 들어와 선교(宣敎)를 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구한말(舊韓末) 의병창의(義兵倡義)때에도 비밀기지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사에 의하면 "1907년 기삼연(奇參衍) 김용구(金容球)등이 이끄는 호남창의(湖南倡義) 의맹소(義盟所)의 의병주력부대 100명은 월동(越冬)을 대비하기 위한 군량확보의 목적으로 법성창을 기습하였는데, 야음(夜陰)을 기다리느라 이곳 산하치에 유진(留陣)을 하고 저녁식사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4) 화장동: 화장동은 덕평리와 작은 들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듯한 위치에 있는데, 지척에 장승배기가 있다. 덕평은 들 건너에 있기 때문에 한길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고 화장동은 바로 길가에 놓인 마을인 까닭에 수많은 외지 길손들의 빈번한 왕래를 바탕으로 색주가가 성업을 하였다. 村名도 그러한 맥락(脈絡)에서 풀이가 가능할 것 같다.
5) 기타
☞ 간대샘-동화실 남쪽에 있는 샘.
☞ 감적굴-덕평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개씹배미-동화실 남쪽에 있는 논인데, 전설에 의하면 어느 과부가 부자
영감에게 하룻밤을 동침하고 얻은 花代라는 것.
☞ 곤장배미-도투마리배미 밑에 있는 논.
☞ 공동(共同)멧재-동화실에서 영광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공동묘지가
있음.
☞ 꺼적샘-동화실 동쪽에 있는 우물.
☞ 남살매-동화실 남쪽에 있는 남산 밑에 있는 마을.
☞ 덕실재-동화실에서 신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 동선다리-범바우 동남쪽에 있는 들.
☞ 동촌-동화실.
☞ 둠벙배미-덕평 남쪽에 있는 논.
☞ 뒷메등-월계 뒤쪽에 있는 등성이.
☞ 뒷장골-화장동 뒤에 있는 마을.
☞ 들썬-월계 동남쪽에 있는 들.
☞ 막태-월계 서쪽에 있는 산.
☞ 맷골-월계 서쪽 천지산 밑에 있는 들.
☞ 무남골-동화실 남쪽에 있던 들.
☞ 무남당-동화실 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6.25동란시 소멸 되어 버렸다.
☞ 문암정사-동화실 북쪽에 있던 서당.
☞ 반애다리-판하교(板下橋)의 이칭(異稱)으로서 도편천(道鞭川)에 가로
놓인 다리였다. 이 다리를 건너면 영광 땅이다.
☞ 방죽샘-약샘 밑에 있는 우물.
☞ 방죽안-월계 서북쪽에 있는 들.
☞ 버든-동화실 동쪽에 있는 들.
☞ 범바우-동화실 남쪽에 있는 범 모양의 바위.
☞ 빡줏등-월계 남쪽에 있는 등성이.
☞ 산밭골-버든 북쪽에 있는 들.
☞ 산짓재-산하치 동북쪽에 있는 고개로서 옛날에 산제(山祭)를 지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새뜸-동화실 북쪽 새로된 마을.
☞ 생앳집샘-장구샘 남쪽에 있는 우물인데, 근처에 상여집이 있어서
부르던 이름.
☞ 소뿔산-동화실 서쪽에 있는 산인데 우각산이라고도 함.
☞ 솔대봉-범바우 남쪽의 봉우리인데 솟대가 있었음. 동화실 살던 崔氏가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세운 솟대라 한다.
☞ 안장바우-천지산에 있는 바위로서 말안장처럼 생겼음.
☞ 앞장골-화장동 앞에 있는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