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면 소개
가곡면은 1986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 11874호로 원덕읍에서 분리하여 법정리인 탕곡리(湯谷里), 오목리(梧木里), 오저리(梧底里), 동활리(東活里), 풍곡리(豊谷里)의 5개 부락을 흡수 승격한 면이다. 본래 가곡면의 전신은 1963년 12월 1일 원덕면 오저 출장소가 개설되어 이것이 가곡면이 탄생되는 모체가 되었다. 법정리는 5개리, 행정리는 7개리, 33개반, 23개 자연부락으로 면소재지는 오저리에 있다.
인구와 호구 수는 1969년에 개설되었던 제 2연화광업업소가 휴광하기 직전인 1986년의 875호 3,765명이었던 인구수가 1987년 휴광으로 527호 2,322명, 1988년에는 501호 2,256명 1989년 504호 2,230명, 1990년 489호 1,951명, 1995년 406호 1250명으로 광업소의 휴광과 이농현상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본 면의 동쪽은 원덕읍에 남쪽은 경상북도 울진군에, 서쪽은 봉화군 석포면과 태백시에, 북쪽은 도계읍과 노곡면에 이웃하고 있다. 지세는 태백시 우보산(유령)에서 시작한 태백산맥의 줄기가 서남으로 뻗어내리면서 태백시, 봉화군, 울진군과 본 면과 경계를 하면서 그 산줄기에 석포령(石浦嶺), 응봉산(鷹峯山)이 유명하다. 북쪽은 육백산의 줄기에서 뻗은 산줄기에 사금산이 높아 도계읍,노곡면과 경계를 하고 있다.
하천으로 오목천은 대치산에서 발원하여 오저리에 이르고, 도화천은 도계읍 신리로부터 유출하여 풍곡리에 이르고, 풍곡리 용소에서 흐르는 계류는 가곡천의 원류이고 성곡(聖谷)에서 흐르는 물들이 풍곡리와 오저리에서 합류하여 가곡천이 되어 원덕읍 월천리 앞바다로 흘러간다.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1990년 5월 10일 삼척의 비지정 관광지로 지정되어 관광객이 많이 붐비고 있다.
도로는 27.3㎞로서 제 416번 지방도는 동서 17.3㎞이며 동으로 원덕읍에, 서로는 도계읍 신리를 거쳐 태백시와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사용치 않는 풍곡에서 석포령(石浦嶺)간의 366호 군도 10㎞가 확포장되면 경북 봉화군과 연결될 전망이다.
총괄 면적은 152.32km2, 전 3.51km2, 답 75km2, 임야 144.95km2 기타 3.06km2로 고추, 보리, 콩, 감자, 옥수수, 마늘, 벼, 특수작물로는 당귀, 시호, 도라지, 원두충(原豆沖) 등이다.
축산은 한우, 젖소, 흑염소를 사육하고 있으며, 토봉(土蜂)은 주로 삼방, 덕풍에서 15개 농가가 100여통을 사육한다.
광업은 1969년 8월 영풍광업주식회사 제2연화광업소가 총자본금 9,992백만원으로 선곡에 설립되어 1986년 12월말 현재 아연정광 34.575M/T, 연정광 1,920M/T, 동정광 812M/T을 연간 생산하여 총5,385백만원의 매출액을 보였으나 국제시장의 아연 가격하락과 1987년 8월 15일 노사 분규로 불가피하게 폐광 상태가 되므로 광업은 없어지게 되었고, 1990년부터 산림복구작업에 있다. 임업은 풍곡리 삼방산(三芳山)이 유명하여 조선시대 봉산(封山)으로 정하여 궁궐 재목을 이곳에서 벌채해 간 일도 있으며, 더욱이 일제 때에는 이곳에서 원덕읍 호산 항구까지 궤도차(軌道車)를 놓아 목재를 반출했다.
1934년 4월1일 개교한 오저초등학교, 1948년 8월 10일에 개교한 풍곡초등학교, 1974년 1월 5일 개교한 가곡중학교, 1987년 3월 15일에 개교한 가곡고등학교가 있다.
가곡면 일반현황
1. 탕곡리(湯谷里)
본 리는 최초 절골(寺谷)에 있던 사찰의 중들이 가곡천에서 상·중·하의 목욕탕을 설치한 연고로 탕곡리가 되었다. 이 마을은 행주기씨(幸州奇氏)의 개설지로 그후 인조 때 진기만(秦己萬), 김원환(金源環) 등이 현종 때 동래 정석윤(鄭錫允)이 이주해 왔다.
본 면의 동부에 위치하고 동은 기곡리에, 남은 울진군에, 서는 오저리에, 북은 이천리에 접하고 있으며 사방각 3㎞, 호구수는 1759년에 10호 79명, 1916년에 79호 470명, 1962년에 106호 575명, 1990년 107호 488명, 1995년 96호 331명이다. 상탕곡(上湯谷), 대촌(大村), 모전(茅田:때치), 월전(月田:달밭), 사곡(寺谷), 전봉기(田鳳基), 화전(火田:쇄전)의 7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고암산(鼓岩山)은 남방에, 화전산(火田山)은 북방에 솟아 있고 가곡천과 오목천(梧木川)은 본 마을에서 합류하여 기곡리로 흘러간다. 도로는 삼척시에 60㎞, 원덕에 20㎞ 오저, 오목리에 각각 4㎞로 통한다. 76년 3월 전기점하, 77년 1월 전화개통, 83년 11월 시내버스가 개통되었다.
2. 오목리(梧木里)
본 리는 옻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옻나무골(漆木洞)이라 하더니 후에 잘못 전해져 오목리(梧木里)가 되었다. 선조 때 김계룡(金戒龍)은 경기도 용인군으로부터, 진현태(秦賢泰)는 탕곡리로부터 또 임상선(林尙先) 등이 이주해 왔다.
본 면의 북쪽에 위치하여 동은 탕곡리에, 남은 오저리에, 서는 도계읍 신리(新里)에, 북은 노곡면에 접하니 동서 6㎞, 남북 8㎞, 호구수는 1916년에 44호 253명, 1962년에 58호 410명, 1982년에 57호 327명, 1990년 45호 182명, 1995년 28호 74명이다. 삼거리, 가부기(加富基), 고기(古基:옛터골), 대치촌(大峙村:큰칫재), 장항(獐項), 흑석(黑石)의 6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대치산(大峙山)은 도계읍 경계, 학아산(鶴兒山)은 남방에, 사금산(四金山)은 북방 노곡면 경계에 각각 우뚝 서고 오목천은 대치 밑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다 가곡천에 들어간다. 도로는 삼척시까지 64㎞ 원덕읍에 24㎞ 이천리에 16㎞ 동활리 및 탕곡리에 4㎞ 신리에 8㎞로 통하는 보행도로가 있다. 본 리는 조선시대 봉산(封山:국유림)으로 임산물이 많이 생산되었다. 76년 3월 전기점화, 77년 7월 전화개통(3호).
3. 오저리(梧底里)
원래 큰터(大基)라 하였는데 옻나무골밑(漆木底:옻밋치)에 위치하므로 오저리(梧底里:옻밑)로 되었다. 선조 때 삼척 김천공(金天公), 천복(天福)은 가곡리로부터, 그 후 청송 심남생(沈南生), 여흥 민순호(閔舜鎬), 현종 때 홍면섭(洪勉燮)은 근덕면 맹방리로부터 죽기(竹基)에 이주해 왔다.
본 면의 소재지에 위치하여 동은 탕곡리에, 남은 울진군에, 서는 풍곡리에, 북은 오목리에 서로 이웃하고 남북 3㎞ 동서 4㎞이고 호수는 1759년에 15호 83명, 1916년에 101호 688명, 1962년에 128호 758명, 1982년에 130호 705명, 1990년 127호 527명, 1995년 107호 306명이다. 청평(靑坪), 죽기(竹基), 산기(山基), 갈전(葛田), 광대곡(廣大谷)의 5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산악은 여팔산(如八山)이 높아 울진군과 경계를 이루고, 가곡천은 풍곡리로부터 굽이굽이 휘돌아 동쪽으로 흘러 탕곡리로 들어간다. 그사이에 용연폭(龍淵瀑)이 유명하다. 도로는 삼척시내에 64㎞, 원덕읍에 24㎞ 풍곡 오목리에 각각 4㎞로 통한다. 1909년에 일본인들이 이곳에 순사 주재소를 설치하더니 1912년에는 헌병출장소를 설치한 적이 있고 지금은 가곡면사무소와 삼척경찰서 오저지서와, 가곡우체국이 있다. 1934년에 개교한 오저초등학교와 1975년 11월 14일에 개교한 가곡중학교, 1987년 3월 15일에 개교한 가곡고등학교가 있다.
죽기동(竹基洞) 남쪽에 선인당(仙人堂)이 있어 옛날 신선이 바둑을 두며 놀던 곳이라 하여 선인들이 타고 다니던 말발자국 및 말을 매어놓았던 돌말뚝이 남아있다.
은행나무 : 죽기에 있고 둘레 6.5m, 높이 25m, 수령 1,000년, 안병재가 관리하며 강원도에서 보호 지정된 은행나무로, 옛날 무당이 죽을 때, 자신이 사용하던 징(악기)을 두 은행나무 사이에 걸어 두었더니 그후 두 은행나무가 스스로 소리내며 운다고 한다.
죽계팔경(竹溪八景, 梧底八景이라고 함) : ① 청전운학(靑田雲鶴:古稱半月形), ② 죽림명월(竹林明月), ③ 연동취송(燕洞翠松), ④ 학애폭포(鶴崖瀑布), ⑤ 동강기암(桐江寄岩), ⑥ 기암락조(箕岩落照), ⑦ 장포연유(長浦烟柳), ⑧ 연지은린(硯池銀鱗).
76년 3월 전기점화 및 77년 1월 전화개통, 83년 11월 시내버스 개통. 1989년 4월11일 복지회관 준공, 1990년 11월 16일 청평간이 상수도 준공. 1990년 1월 1일 오저 1·2로 분리되었다.
4. 동활리(東活里)
본 리는 복두산(福頭山)에서 기인(起因)하여 복동아리(桃花里)라 하더니 이것이 와전되어 동활리로 되었다. 숙종 때 북평읍으로부터 삼척 김찬영(金贊永), 평창군으로부터 이형룡(李亨龍) 그 후 전·이·박·최의 각 성씨가 이주해 왔다.
본 면의 서쪽 끝에 있는 마을로서 동은 오목리에, 남은 풍곡리에, 서는 태백시에, 북은 도계읍 신리에, 이웃하고 동서 6㎞, 남북 10㎞나 된다. 호구수는 1916년에 64호 390명, 1962년에 62호 418명, 1982년에 56호 377명, 1990년 48호 238명, 1995년 45호 161명이다. 자치암(雌雉岩), 궁촌(弓村:궁말), 충전(忠田:충밭), 토산곡(?山谷), 복두산의 5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서방에 토산치(?山峙)와 동방에 치암산(雉岩山)이 있고, 도계읍 신리로부터 유출하는 도화천(桃花川)은 남으로 흘러 가곡천에 들어간다. 도로는 본 면과 태백시 통리까지 연결되는 대로가 마을 중앙으로 통과하고 있으며 원덕읍까지 30㎞, 태백시 철암동까지 12㎞, 풍곡리까지 8㎞로 통한다. 76년 3월 전기점화, 77년 1월 전화개통(1호), 83년 11월 시내버스 개통. 1990년 동활계곡을 삼척시 비지정 관광지로 지정하였다.
5. 풍곡리(豊谷里)
본 리는 빙골(氷洞)이라 칭하더니 이것이 와전되어 풍곡리(豊谷里)가 되었다. 황씨의 설립지로 순조 때 김해 김명두(金明斗), 밀양 박준형(朴準亨) 등 각 성이 이주해 왔다.
본 리는 본 면의 서남 끝에 위치하여 동은 오저에, 남은 봉화군과 울진군에, 서는 태백시에, 북은 동활리에 인접하니, 동서 14㎞ 남북 12㎞이다. 호구수는 1759년에 12호 78명, 1916년에 151호 980명, 1962년에 472호 2,467명, 1982년에 639호 2,739명(1리 242호 1,274명, 2리에 397호 1,465명), 1990년 162호 565명, 1995년 130호 378명이다.
매곡(梅谷:매상골), 송곡(松谷), 삼방(三芳), 덕품(德品), 용소(龍沼:용숫골)의 5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부락이다. 현재는 행정구역 2개리로 나누어 다스린다. 남방에 석포령(石浦嶺)은 봉화군 경계를 이루고, 서방에 토산치는 태백시 철암동과 경계를 이루며, 가곡천은 용소동 용소에서 낙하하여 마을 중앙의 성곡에서 흐르는 물과 도화천과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오저리에 들어간다. 도로는 봉화군까지 16㎞, 울진군까지 12㎞, 원덕읍까지 32㎞, 삼척시내까지 72㎞이다. 지난 시절에는 활석(滑石), 유석(硫石)이 많이 생산되었고 또 조선시대는 국유봉산(國有封山)으로 오저리와 함께 본 면의 유일한 임산지였다. 영풍광업주식회사 제2연화광업소가 1969년 5월 30일에 개설되어 금·은·연·아연을 생산하고, 삼방광산은 78년 5월 1일에 개설되어 비철금속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1987년에 폐광하였다. 풍곡초등학교는 1948년 8월 10일에 개교했다.
덕품(德品) 동쪽에 옛날 정판서(鄭判書)의 옛터(舊基)가 있고 그 남방에 대소라곡(大召羅谷), 소소라곡(少召羅谷)이 있는데 신라 의상조사(義相祖師)가 나무기러기(木雁)을 제작하여 하나는 울진 불영사(佛影寺)에, 하나는 안동 홍제암(洪濟庵)에, 또 하나는 소라곡에 날려 보냈다고 한다. 기러기가 떨어지자 뇌성벽력이 치며 하늘과 땅이 진동하더니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해지며 폭우가 쏟아지고 숨었던 용이 공중으로 날아 올라가고 폭풍우가 급습하여 홍수가 범람하고 산 사태가 나서 별안간 능곡이 변하며 순식간에 수천길이나 되는 절벽이 양쪽에 생기고,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삼방산(三芳山) : 핑골 남쪽에 있는 산, 순조3년 1803년에 인정전을 세울 때 재목을 이 산에서 베어갔다 한다. 76년 3월 전기점화 및 77년 1월 전화가 개통되었고, 83년 11월 시내버스가 개통되었다.
첫댓글 오저리 죽기동 수령 1000년 은행나무 관리자(안병재)가 치원이 할아버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