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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열우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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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19일 이열우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이열우:WBC 라이트플라이급과 WBA 플라이급의 두 체급을 석권. 스피드, 체력, 펀치력의 삼박자를 두루 갖춘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지만 왼쪽 눈의 초점이 흐려지는 사시 현상 때문에 두 개의 타이틀을 쉽게 내주며 비운의 단명 챔피언으로 끝났다.’
인터넷 검색엔진을 통해 어렵게 찾은 웹 문서에는 이 같은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다.
89년과 90년 WBC 라이트플라이급과 WBA 플라이급의 두 체급을 석권했지만, 이내 내주고 말았던 비운의 단명 복서, 이열우(40·대전복싱클럽)는 다른 ‘이열우’에 밀려 저만치 흐릿한 전설로 남아 있었다.
스물다섯 살이란 젊은 나이에 당당히 세계챔피언이 되어 당당히 옥천시내를 카퍼레이드로 누볐던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과거의 화려했던 추억이란, 더욱이 젊은 날 감당하기 힘든 유명세란 그것이 사그라짐과 동시에 본인에게는 깊은 상처와 독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은 채로 담담히 말할 수 있지만, 그같이 되기까지 세계챔피언이 끝난 이후의 몇 가지 안 좋은 기억들은 마음의 빚이 되어 그를 괴롭혀 왔을 것이다.
그는 얘기했다. 고향에 진 빚이 많다고. 다시 멋지게 일어서고 싶다고. 그는 너무 빠르게 진행돼 온 자신의 인생역정을 이제 조금씩 조율하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속도를 조금씩 늦추면서 말이다.
이열우, 그는 세계 챔피언이었다. 동이초등학교(38회) 다닐 때부터 비닐 글러브로 동네 권투를 했다는 그는 초등학교와 동이중학교(9회) 때는 단축마라톤 선수로 뛸 정도로 운동신경이 발달해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권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옥천고(6회) 1학년 때. 당시 권투부가 있었던 옥천고에서 그는 선배들과 같이 권투를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아마추어 권투대회에서 옥천고를 전국대회 우승에 올려놓으면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세계 챔피언’이 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전에 있는 프로모터에 들어가 박만순 트레이너를 만나고, 그와 함께 서울 극동체육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서 5년 뒤 바로 세계챔피언, 하지만 바로 내주고, 그 다음해에 또 세계챔피언. 하지만, 그는 고지에 올라서자마자 그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내려왔고, 잘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스물 여섯이란 이른 나이에 링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의 불꽃은 너무 일찌감치 타 올랐고, 그의 꽃은 너무 일찍 개화했다. 많은 옥천 사람들은 그를 너무도 자랑스러워했고, 자체 후원회도 결성하는 등 그에 대한 애정을 보였지만. 불꽃이 사그러든 후, 그 관심과 애정은 잔설처럼 녹아버렸다.
은퇴한 이후, 잇따른 방황. 옥천에서 체육관도 해보고, 술집도 해봤지만, 그는 여전히 길을 헤매고 있었다.
방황의 끝에 다시 맞잡은 스승의 손 오랜 방황 끝에 그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때 처음 끼워봤던 권투글러브를 다시 잡은 것이다. 그는 대전 유천동에 이열우 복싱교실을 열고서 운영하다가, 지난해 맨 처음 인연을 맺었던 박만순 트레이너와 결합, 대전복싱클럽(변동)에서 지금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권투 지도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박만순 트레이너와는 그 처음 인연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이다. 그가 세계챔피언이 됐을 때도, 그가 은퇴하고 방황할 때도 늘 그는 같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후원회장을 맡으며 열성적으로 도왔던 박효근씨도 늘 양아들처럼 생각하며 많이 챙겨줬다고 고마워했다.
“많이 방황했어요. 고향사람들한테도 챔피언 이후에 별로 좋은 기억을 심어주지 못한 것 같구요. 지금은 제 길을 찾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잘 먹던 술도 끊고 낮에는 건설회사에서 일을 배우러 다니고, 저녁에는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권투를 하러 다닙니다. 머지않아 고향 체육발전을 위해 한 번 뛰고 싶습니다.”
고향의 친구들아 보고 싶다. 그는 친구 이야기들도 했다.
“옥천에 가면 전용하를 자주 만나고요. 군청 앞에 지동근이가 친구들 연락처 다 갖고 있어서 모임을 잘 주도해요. 지금 이원에서 권투도장을 하고 있다는 영만이하고는 사촌간이고요. 영만이는 마라톤하다가 내가 권투하니까 따라했죠. 한의원하는 철종이도 친구고, 킥복싱했던 양곤이는 지금 생활체육협의회에서 일 한다고 들었는데."
2002년 8월에는 동이면 남곡리에 한국타이틀매치를 유치해서 프로모터로서 변신을 성공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박만순 트레이너와 함께 CMB 방송에서 권투중계 아나운서와 해설자로 활약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이제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로워지려 했다. 그에게 영광임과 동시에 굴레였던 ‘세계챔피언’이라는 단어에서 벗어나 그는 평범한 용죽리 고향사람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카퍼레이드는 아니지만, 머지않아 조용히 고향 안으로 스며들 그가 그려졌다. -2004년 12월 0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