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님의 침묵(沈黙)
한용운(韓龍雲)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黙)을 휩싸고 돕니다.
[핵심 정리]
지은이 :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호는 만해(卍海, 萬海).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옥고를 치르면서 항일 독립 운동의 투사로 활약했다. 시의 경향을 보면, 연 구분이 거의 없는 사설조로, 서정성 짙으며 철학적, 종교적이면서도 연가풍(戀歌風)의 특징을 지닌 시가 많다. 대표작으로 “나룻배와 행인”,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복종” 등이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낭만적. 상징적. 의지적
어조 : 연가풍의 여성적 어조, 영탄적 어조
심상 : 시각적. 후각적. 촉각적. 서술적 심상
구성 :
1-4행 임과의 이별(기)
5-6행 이별 후의 슬픔(승)
7-8행 새 희망에의 의지(전)
9-10행 불굴의 의지의 사랑(결)
제재 : 임과의 이별
주제 :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
출전 : <님의 침묵>(1926)
▶ 작품 해설
이 시의 뛰어난 점은 이별의 슬픔에 절망하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 만남의 희망으로 역전시킨 구조에 있다. 그렇다면 슬픔을 희망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위대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삶에 있어서의 만남과 헤어짐의 실상을 깊이 있게 깨닫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구절에 나타나 있듯이, 만남은 곧 헤어짐이요, 헤어짐은 곧 만남이라는 것, 다시 말해 헤어짐음 새로운 만남의 전제 조건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떠났다고 생각했던 ‘님’은 사실은 떠난 것이 아니라 다만 ‘침묵’하고 있을 뿐임을 알게 되고, 그 침묵하고 있는 임을 위해 ‘스스로 주체할 길 없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 시의 어법은 임이 떠나 버린 슬픔을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듯한, 아니면 혼자서 독백을 하는 듯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임에 대한 사랑과 기다림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경어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내용을 더욱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작품 전체에 사용된 비유의 기법도 정서를 고양시키고 심미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황금의 꽃’과 ‘한숨의 미풍’,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 ‘꽃다운 님의 얼굴’ 같은 감각적 표현도 이 시의 심오한 주제 의식을 독자에게 친근한 것으로 바꾸어 준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님의 침묵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화자는 님이 떠나가 버렸고 현재 침묵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속에는 님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에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불교적 사유에 바탕을 둔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조국 상실의 시대적 고통을 감내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참고> “님의 침묵” 작품 분석
전 10행의 산문율을 지닌 시로 종결 어미는 모두 경어체를 차용하여 여성 어조를 띰으로써, 애절한 사랑의 정감이 더욱 깊게 느껴지는 작품인데 각 행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기로 한다.
1행은 님이 떠나갔다는 현실 인식에서 시작된다. 님이 갔다는 사실은 화자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는 것이 반복을 통해 토로되며, 직설적 진술에서도 그 충격의 크기를 짐작하게 된다.
2행은 님이 떠날 때의 상황을 제시한다. ‘푸른 산 빛’과 ‘단풍나무 숲’의 대조에서 절망에 빠진 화자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푸른 산 빛’이 여름과 무성함을 표상한다면 ‘단풍나무 숲’은 가을과 쓸쓸함을 표상한다. 그러하다면 푸른 산 빛의 계절은 나와 님과의 사랑이 충만하던 시절이 되며, 단풍나무 숲의 계절은 헤어짐의 쓸쓸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한 쓸쓸한 공간으로 나 있는 작은 길을 걸어서 님이 떠났다는 사실이다. 극화된 헤어짐의 장면이다. 멀리 사라져 가는 길이 주는 소멸감은 님을 떠나보낸 화자의 상실감을 드러낸다.
또 그런 길을 ‘참아’ 떨치고 갔다는 사실에서 사랑의 파탄이 사랑 자체의 파탄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참아’는 중의적이다. 부사 ‘차마’와 인내의 뜻 ‘참아’가 결합되어 있다. 차마 어쩔 수 없이 님이 떠나갔을 수도 있고, 아픔을 꾹 참고 떠났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결국 우리의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깨어질 수밖에 없었음이 분명해진다.
3행은 계속되는 절망감의 표출이다. 님과 나의 맹서가 깨어지고 만 슬픔의 크기를 광물 이미지로 포착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황금의 꽃’이라는 은유는 광물과 식물의 결합에서,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견고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의 절대성을 표출한다. ‘차디찬 티끌’에서 ‘차디찬’이란 촉각 이미지는 사랑이 화자에게 준 절망의 정도를 보여 준다. 한숨의 미풍에 과거의 꿈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회한의 심정이 노출되고 있다. 한숨의 미풍은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허무의 표상이다. ‘황금의 꽃’에서 보이는 견고한 이미지와 이 미풍의 허망한 이미지의 대립이 드러난다.
4행. ‘날카로운 첫 키스’는 물론 님과 나의 만남을 뜻한다. 그러나 그 만남(키스)을 날카롭다고 한 데서 님과의 사랑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고, 나의 온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정도의 충격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뜩할 정도로 사랑은 강렬하게 찾아왔고, 그리하여 나의 님이 가고 없다는 상실의 재확인이다. 날카로운 키스라고 한 데서 님과 나의 만남이 단순한 애정에 의한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달콤한 키스가 정감을 불러오는 데 반하여 날카로운 키스는 정신적 충격의 의미가 더 강하다. 여기에서 일이 다층적(多層的) 실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화자는 님에게 절대적 사랑을 바친 것이다.
5행도 님이 나에게 절대적 존재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눈멀고 귀 멀 정도의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에 차라리 눈멀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차라리 귀 멀었다는 표현은 역설이다. 이 역설은 사랑의 절대성을 극도로 높이는 효과를 준다.
6행. 사랑하면 헤어질 날이 오는 것이 엄연한 법칙[會者定離(회자정리)]이라 염려하기는 했지만, 뜻밖에 찾아온 이별 앞에 슬퍼하는 화자의 심정이 표출되어 있다.
7행은 반전(反轉)이다. 이별을 슬픔으로만 인식하면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이 되고 말며, 그렇게 될 때, 우리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나 스스로 깨뜨리는 것이 되므로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것을 알기에 크나큰 슬픔의 힘을 옮겨서 희망으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변증법적 지양이다. 정신적 극복의 한 수단으로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하는 화자의 내적 극복 방식을 알게 한다. 이는 만해 특유의 사유 방법이다. <님의 침묵> 88편의 시상(詩想)은 모두 변증법적 극복의 논리에 의한다. 그것은 불교적 사유가 그렇기 때문이다.
7행의 사유 전환은 8행으로 이어진다. 6행의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절망은 거자필반(去者必反)의 희망으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교의 윤회설이 바탕에 깔려 있다. 윤회설은 존재는 일정한 정체성을 가지지 않으며, 여러 가지의 양태로 변전되는 것의 우주의 섭리라고 말한다.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고 신생은 유전한다.
9행. 님과 나의 사랑은 파탄에 이르지 않았다는 자기 선언이다. 현실적 상황으로는 사랑의 관계가 파탄되었지만, 정신적으로 이어진 사랑은 아직도 끊어지지 않았으며, 내가 그 정신적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 한 사랑은 지속된다는 승화된 인식의 표출이다.
10행. 그렇기 때문에 내 충만한 사랑의 기쁨에서 솟구쳐 나오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부재에도 넘쳐나기만 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만해는 님의 부재 공간을 정신적 사랑으로 메우려고 한다. 님의 부재 충격이 크면 클수록 더 큰 사랑의 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적 차원의 극기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엄청난 역설에 의한 정신적 극복만이 그것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해 시의 우수성은 이렇게 정신적 지양의 태도가 서정적 시어로 표출되고 있는 점에서 비롯된다 하겠다. 이 작품은 곧 ‘나의 사랑’임을 만해는 노래한다.
<참고> 한용운 시에서의 ‘님’의 상징적 의미
이 시는 상상력의 구심점이 되는 ‘님’이 누구이냐에 따라 시의 내용이 주제가 달라질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은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님’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조국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개별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통해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절대적 존재로서 ‘그리움’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는 '조국', '절대자', '사랑하는 연인' 등의 어떤 유일한 답을 가져다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 방법은 모두 적절하지 않다.
한용운이 시집 '님의 침묵' 서두에 말하였듯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사랑스러운) 것은 다 님'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님은 일단 그 표면적 의미에서는 사랑하는 연인이면서, 우주 만물의 근원에 있는 참다운 원리이기도 하고, 역사적 의미로는 조국이거나 민족일 수도 있다. 가장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그의 님이란 사람의 삶을 삶답게 하여 주는 모든 가치의 총체를 의인화한 것이라 할 만하다.
다만 그의 생애와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억압된 상황에서 괴로워하던 민족의 삶이었던 만큼 '님의 침묵' 내지 '님의 부재(不在)'라는 그의 시의 주제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떠나서는 온당하게 해석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한용운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김소월의 시를 비교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소월의 시에도 '님' 또는 이에 해당하는 존재가 많이 등장한다. 그 님이 현재 '나'와 함께 있지 않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성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시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아주 대조적이다.
김소월의 시에 나타나는 님은 죽었거나 아주 멀리 떠나가서 돌아올 가망이 없는 님이다. 그의 시가 대개 돌아올 가망이 없는 님이다. 그의 시가 대개 애절한 슬픔과 한의 빛깔을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에게는 기약 없는 기다림만이 있다고 할 때 절망적인 비탄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에 비해 한용운은 비록 지금 여기에 님이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는 믿음을 노래한다. 님의 돌아옴을 믿기 때문에 그의 시는 끝없는 절망에만 빠지지 않으며, 마침내는 슬픔을 극복하고 희망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슬픔과 절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돌아오고야 말 님을 향해 솟아오르는 사랑의 힘을 노래한다. 이와 같은 차이는 여러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그 가장 중요한 부분은 두 시인이 가졌던 현실 감각과 역사의식에서 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 한용운의 ‘님’과 김소월의 ‘님’
한용운의 ‘님’이 가진 속뜻을 생각하면서 같은 시대에 살았던 김소월의 ‘님’을 비교할 가치가 있다. 김소월의 시에도 ‘님’ 또는 이에 해당하는 존재가 많이 등장한다. 그 님이 현재의 ‘나’와 함께 있지 않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성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시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아주 대조적이다.
김소월의 시에 나타나는 ‘님’은 죽었거나 아주 멀리 가서 돌아올 가망이 없는 님이다. 그의 시가 대개 애절한 슬픔과 한의 빛깔을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랑하는 님이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나에게는 기약 없는 기다림만이 있다고 할 때 절망적인 비탄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에 비해 한용운은 비록 지금 여기에 ‘님’이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는 믿음을 노래한다. 님의 돌아옴을 믿기 때문에 그의 시는 끝없는 절망에만 빠지지 않으며 마침내는 슬픔을 극복하고 희망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슬픔과 절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돌아오고야 말 님을 향해 솟아오르는 사랑의 힘을 노래한다. 이와 같은 차이는 여러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그 가장 중요한 부분은 두 시인이 가졌던 현실 감각과 역사의식에서 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