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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선비들의 누정.... <죽은 시인의 사회>의 동굴을 만나다. -
어느덧, 더위의 참맛을 보여줄 7월이 되었습니다. 영화 촬영이 임박한 저는 6월의 마지막 날과 7월의 첫 번째 날을 ‘흑산도’에서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촬영 장소를 찾기 위해 잠시 짬을 내어 방문했던 것이지요. 흑산도에서 맞이한 7월의 첫 새벽 풍경은 치열한 촬영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던 저에게 잠시나마 깊은 편안함을 선물해줍니다. 휴대폰 카메라에 찍은 흑산도의 아침 풍경을 보여드리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흑산도에서 장소 물색을 하다 보니, 간혹 누각과 정자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옛날 흑산도로 유배를 온 <자산어보>의 정약전 선생도 녹음이 짙어지는 7월이 되면 흑산도의 깊은 숲속에 있는 누정에 앉아 계셨을지 모릅니다. 잠시나마 먼 곳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를 떠올리며 그리움 짙은 마음으로 바다를 바라보았을 선생을 떠올려보니 저 역시도 한참동안 누정에서 떠날 줄 모르게 됩니다.
누정은 대부분 조선시대 선비들이 만들어 놓은 일종의 ‘놀이방’ 또는 ‘아지트’라고 하는데요, 누정은 경치가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하여 벽이 없이 지은 집입니다. 누정의 경관기법 중 중요한 것은 허(虛: 비어있음)의 개념인데, 허란 입지 조건에 의해 절벽 위에 정자에서 멀리 푸른 산과 바다가 보이고, 아래로는 물이 보이는 탁 트인 공간적 환경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정자가 비어있기 위해서는 일반 주거 양식인 당(堂)과 헌(軒)과 다르게 방이 없거나 분합문과 같이 개방된 형태로 변형이 가능해야 한답니다.
누정에서 바라본 경관들이 감상자 시점에서 모아진다는 느낌을 가리켜 경관에 취한다는 취경(取景)의 개념과 여러 가지 경치를 이루고 있다고 하여 다경(多景)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의 누정은 멀리 있는 청산이 보통 10킬로미터 정도의 조망거리를 가지고 있고, 전설과 유명한 사찰, 산성 등 인문적 요소가 있는 청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풍수지리설의 보급으로 지기를 믿던 조선의 선비들은 누정에서 보이는 청산의 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하며, 누에서 바라보는 원경은 단순히 먼 경치가 아닌 긴장의 해소, 심미적인 태도 등 심리적인 만족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합일하는 친환경적인 태도를 지닌 누정이 최고의 누정이라고 하니, 조선의 선비들이 자연친화적 삶을 지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누정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누정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상과 학문을 닦는 공간이자, 좋은 벗들과 술과 시를 나누는 공간이며 깊은 사색과 사유의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인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누정에선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김령이 쓴 계암일록에는 김령이 그의 벗들과 함께 여러 누정에서 술과 시를 나누고, 놀이를 즐기며 진솔한 대화를 했던 기록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계암일록에 등장하는 누정의 이름만 살펴봐도 김령이 누정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고, 그들과 학문에 대해 이야기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탁청정, 제천정, 압구정, 송암정, 청암정, 석천정, 귀래정, 성암정. 이것들은 김령의 계암일록에 등장하는 누정들의 이름입니다. 김령이 많은 누정에서 겪었던 일들 중, 1615년 4월 5일, 침락정에서 있었던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4월 5일, 김령에게 아침에 이지가 침락정으로 놀러가자고 전갈을 보내왔다. 밥을 먹은 뒤에 평보 형·효중·자개 그리고 이지 삼형제와 나란히 말을 타고 침락정으로 갔다. 때는 어린 잎새들이 처음 푸른빛으로 물들어 맑은 경치가 참으로 고왔다. 이지와 이도와 김령이 모두 술을 가져갔는데, 저녁이 되어 약간 취한 채로 배를 띄워서 내려왔다.
이날 권수지(權守之-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태일의 자) 영공이 노천(蘆川)에 와서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으면서 서로 바라보일 만큼 가까운 곳이니 만나자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지 영공도 배를 타고 올라와 두 배를 서로 마주 대어 놓고 실어온 술로 술잔을 주고받는데 말을 타고 온 손님이 있었으니 바로 김자첨(金子瞻)이었다. 서로 만나 매우 기뻤지만, 날은 이미 저물고 강가의 길도 어슴푸레해져 마침내 여러 사람들과 말에게 길을 맡긴 채로 돌아왔다. 자첨이 다시 조용히 보자고 하고 효중도 그게 좋다고 하여 일휴당(日休堂)으로 들어가 장등 불을 켜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보 형과 자첨 등은 모두 곤하게 자고 있었으니 밤이 깊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누정은 단순히 시를 읊거나 술을 마시며 즐기는 장소가 아니라 선비들의 높은 이상과 투철한 학문 정신을 실현하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과 인간의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며 시와 노래를 짓던 장소였던 누정은 그 자체로 선비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스토리테마파크의 용어사전으로 침락정과 일휴당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도유형문화재인 침락정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 운암정사(雲巖精舍)라고도 한다. 원래 예안면 오천리에 있었던 것으로, 안동댐의 준공으로 인하여 현 위치로 옮겨졌다. 1672년(현종 13)에 의병대장이던 김해(金垓)의 아들 김광계(金光繼)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정자로는 규모가 큰 부류에 속한다. 잡석기단(雜石基壇) 위에 세워진 납도리집으로서 중앙 2칸은 분합문이 달린 마루이고, 양측에는 방이 꾸며져 있다. 주변에 수직사(守直舍)를 비롯한 초가 3, 4동이 있으며, 정사(精舍)라는 칭호도 있어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의병출신 유사(儒士)들의 문도수학소(聞道修學所, 학문의 길을 연구하는 곳)로 짐작된다.
일휴당은 퇴계 이황의 문인인 일휴당 금응협(琴應夾, 152?~1586)이 후진을 교육하기 위하여 지은 별당으로, 원래는 안동시 예안면 오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이 건설됨에 따라 1974년 11월에 현재의 위치인 영남대학교 민속원으로 이건 복원 하였다. 일휴당이란 당호(堂號)는 금응협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며, 지금의 건물은 1787년(정조11)에 개축한 것이다. 정면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으로, 건물면적은 9.2평이다. 어칸(御間)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며,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홑처마의 소로수장집이며,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의 구조로, 대량(臺樑)과 퇴량(退樑)을 합보시킨 후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량(宗樑)을 받게 하고 종량 위에는 동자주 대공(臺工)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하였다.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에 있다.
이렇게 조선의 선비들이 자연 그 자체인 누정과 합일하는 마음으로 학문을 닦고, 철학을 깨우치며 인성 교육을 실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성 교육의 중요함을 다룬 영화들 중 하나가 바로 피티 위어(Peter Weir) 감독의 연출작인 <죽은 시인의 사회>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주입식 교육으로 인간성이 점차 황폐화 되어가는 현대교육제도의 맹점을 고발한 작품으로, 새삼 인간성 위주의 교육이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지를 상기시켜준 작품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959년 뉴잉글랜드주에 있는 명문고 웰튼 아카데미에 신임 영어교사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이 전근을 옵니다. 이 학교의 교장은 매년 아이비리그 명문대학 진학율이 70% 이상이라고 강조하면서 입을 열 때마다 공부하라는 말만 할 뿐입니다. 이런 교육지침에 내심 반발하고 있었던 키팅 선생님은 "시가 흐르는 교실을 만들자"고 외치면서 자신이 시를 읽고 자유롭게 인생을 토론했던 죽은 시인의 사회의 창립멤버임을 밝힙니다. 키팅 선생님의 이런 수업방식에 신선한 매력을 느낀 닐, 토드, 핏츠, 낙스, 믹스, 찰리, 카메론은 한밤중에 기숙사를 빠져 나와 숲속의 동굴에 모여 위대한 작가들이 남긴 명시를 읽으면서 청춘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던 중 닐은 학생공연인 세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에 응모해 요정 역으로 발탁되고, 닐의 부모는 그를 이해하기 보다는 의사의 길을 가라고 강요할 뿐입니다. 닐은 키팅을 찾아가 평생 연극을 하고 싶다고 밝히면서 끝끝내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무대에 서서 갈채를 받고 있는 닐의 기쁨도 잠시, 그의 부모들은 키팅의 교육방법에 맹렬하게 항의하면서 닐에게 육군사관학교로 전학한 뒤 하버드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라고 최후통첩을 내립니다. 닐은 이런 부모의 교육 방식에 항의를 하면서 위대한 배우의 꿈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자살을 길을 선택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친구들은 슬픔에 빠지고, 닐을 특히 소중하여 여겼던 토드는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그리고, 닐의 죽음에 교장은 눈엣가시였던 키팅 선생님을 희생양으로 삼게 됩니다. 얄미운 캐머론의 고자질로 들통 난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에게 키팅 선생님이 교사라는 직업 남용으로 닐 페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했으며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강제 서명하도록 시키고, 결국 키팅 선생님은 쫓겨나게 됩니다. 학교에서 쫓겨난 키팅 선생님이 짐을 가지러 왔다 떠나려고 하자, 침묵하고 있던 많은 학생들이 책상 위로 올라서서 선생님에게 잘못이 없다고 외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장인 캡틴 선생과 뜨겁게 이별합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교육은 진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라는 신념을 지닌 키팅 선생님과 그의 제자들을 통해 성공만을 위한 보수적인 교육 방침에 반기를 드는 영화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가치 있는 진정한 이유는 이러한 반기가 거칠고, 일방적이지 않으며, 조용하고, 사색적이고, 깨지기 쉬운 어린 청년들의 정서를 이해하려는 시선을 담으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피티 위어 감독은 조용한 혁명의 위대함을 알려주려고 한 듯합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 중에 하나가 바로, 동굴입니다. 학생들은 키팅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미뤄두었던 스스로의 꿈과 낭만을 향해 질풍노도처럼 돌진합니다. 그리고 일부 학생들은 키팅 선생님이 어린 시절에 활동한 ‘죽은 시인의 사회’를 재조직하여 동굴에서 시 읽기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이것은 키팅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한 학생들이 자신을 위한 철학 접근과 모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는 곧 철학이니까요. 계암일록의 저자, 김령에게 누정이 있었다면, 키팅 선생에게는 동굴이 있었습니다. 누정과 동물, 성질은 하나입니다. 인간이 중심이라는 것이지요. 누정과 동굴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곳이며, 포기와 강요가 아닌 자발과 용기를 알려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우리 교육에서 누정은 존재할까요? 아니면, 동굴은 존재하고 있을까요? 안타가운 마음이 듭니다만, 희망을 꿈꿔보며, 마지막으로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등장하는 키팅 선생의 명대사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진정한 자유란 그들의 꿈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항상 그러했고, 항상 그럴 것입니다.
1582년 4월, 예천에 살던 권문해는 오랜 친구 강명원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1년 전.
2014년 봄, 432년 전 권문해가 정성을 다해 지은 초간정을 찾았습니다. 초간정으로 가는 길은 포근하고 맑았습니다.
“신탄강 위에 나의 정자를 세우니 소박한 가운데도 즐거움은 넉넉해라. 오졸한 이 몸이 세상 버림받았으니 나의 생활은 지금부터 나무하고 물고기 잡기에나 붙여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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