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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김명환아무리 북솜씨가 뛰어난 고수였더라도 조선 왕조의 고종 이전의 고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순조 때의 명창인 송광록은 형인 송홍록의 고수였으며, 주덕기는 송홍록과 모흥갑의 고수였다. 고종 때에 들어서야 북을 치는 법에 대한 이론이 제대로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박판석, 오수관, 오성삼, 이화중, 주봉현, 한성준과 같은, 후대에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많은 명고수들이 나타난다. 김명환은 1913년 전남 옥과에서 태어났는데, 보통학교를 나오고 중학교를 중퇴한 뒤에 박판석, 장판개를 포함한 여러 명고수들에게 북 치는 법을 배웠다 한다. 1978년에, 판소리 고법의 기능 보유자로서는 처음으로, 중요 무형 문화재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
고 김명환 선생님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 하나!
김명환 선생님은 북에 흠뻑 빠져 있던 나는
꿈에서라도 선생님을 뵙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미 작고하신 선생님께서 어찌 꿈에 등장하리오마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던가...
매일같이 세네시간씩 북을 치던 어느날
선생님께서 드디어 꿈에 나오셨다.
지금도 너무나 생생한 꿈!
꿈에서
수많은 제자들 사이에 제일 말석 참여한 나는
선생님께서 가르치는 것을 어깨넘어로 보고 있었다.
드디어 제자들을 다 가르치신 선생님은 한참만에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시고는
'아야~ 너도 북을 배울텨?'라고 하신다.
터질듯한 가슴과는 달리 선생님의 위엄에 모기만한 목소리로 '네'라고 답하니
선생께서 드디어 '이리와 앞에 앉거라'하신다.
떨리는 손으로 북을 잡고 선생을 바라보니
'자 따라치거라... 중모리다...'
라며 중모리 한장단을 치신다.
따라 치며 자세히 설명을 듣던 중 꿈을 깬 나는
어둠속에서 한참동안 멍하니 선생님의 말씀을 되뇌인다.
중모리란 말여... 하시던...
그날부터
나는 입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누군가 '자네 북 선생이 누군가'라고 물어올때면
어김없이 속으로 '김명환 선생님'입니다. 라고 말한다.
김명환 선생은
고법으로는 전무후무하신 분이시지만 명창 최승희 선생께 심청가를 직접 가르치실만큼
뛰어난 소리실력도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한다.
아래는 김명환 선생님에 대한 다른 글을 옮긴다.
(출처 : www.okgwa.net 조영섭님의 2004년 10월 3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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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둥둥…….
북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본 적이 있는가?
저홀로 울다가 마음을 두드리고
어느 순간 자지러지며 핏줄 속으로 흘러 들어와
온 몸을 전율하게 만드는
저 묵직한 연타음에 말이다.
그 북소리에 있어 이나라 첫째로 치는 국고 김명환.
그의 고향인 곡성의 옥과를 찾아가는 동안 고사 하나가 떠오른다.
조조앞에 명고수 미형이 불려나왔을 때 천하명고 미형은 북채를 쥐기 전
의관부터 훌훌 벗어 던져 버리더라는 이야기.
놀란 조조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지만 미형은 오히려 조조를 향해
"예의 자유도 모르는 무식한 자"라고 일갈하고는 그 자리를 떠버린다.
예의 자유.
조선 명고 김명환이야말로 일체의 권위와 인습과 타성을 벗어던져 버리고
유천희해하며 예의 자유경에서 노닐다 간 사람 아니던가.
칼칼하고 표표한 성품으로 칠십 평생 곁눈질 한번 안주고 북채 하나에만 오로지하여
장엄하고 기백 큰 조선북의 '소릿길'을 열었던 사람이었다.
그 조선의 미형 김명환의 소리를 키운 섬진강변은 지금 봄기운으로 난리가 났다.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매화와 강변 여기저기서 축포처럼 터지는 산수유꽃,
그리고 핏빛으로 흐드러진 자운영, 그 꽃무더기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지리산 얼음 녹아 차고시린 강물과 그 물속으로 미끄러지는 은어떼.
폴짝, 연두빛 풀밭 여기저기서 튀어오르는 개구리.
귓가로 날아오고 가는 꾀꼬리며 멧새소리들….
다섯 빛, 다섯 색으로 퍼진다는 김명환 북의 원음은 바로
이 섬진강변에서 생겨났을 터.
봄햇살은 길과 강에 질펀한데 이 '봄의 소란' 속을 걸어 옥과면 무창리에 이른다.
무창은 김명환이 『내 북소리를 산으로 막고 물길로 풀어냈다』고 했던 바로 그 곳.
마을 앞으로는 섬진강 상류가 되는 순자강 옥과천이 부드럽게 흐르고
뒤로는 입면쪽으로 설산이 성깔있게 뻗어간 2백여호 가까운 반촌이다.
손주를 데불고 동구에 나 앉아있던 노인 한분에게 청해 어렵사리 김명환 생가터를 찾았지만 그 자리에는 교회가 서있다.
유리창 너머로 아이들 몇이서 성가연습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시골 아이들의 맑고 청아한 노래를 뒤로 하며 마을 뒷산의 묘소로 오르는 동안
나를 안내하던 노인은 사람들이 심심치않게 서울이나 광주 혹은 일본에서까지 찾아와
김명환을 '조사해 가는데', 일산 영감이 정말 그렇게 유명했는가고 묻는다.
북을 차고 앉은 모습에서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팽팽한 살기가 느껴지고
소리꾼을 쏘아보는 눈에서는 퍼렇게 불이 뚝뚝 떨어졌던 김명환.
제자의 북소리가 시원치 않으면 『치라는 북은 안치고 쇳자국만 보듬고 앉아있는
저 썩을 놈을 어째야 쓰까』라고 내지르곤 했던 가파른 성깔.
소리가 영 성에 안차면 『니기미, 소리는 국민학생인데 대학원생보고 북을 치라허네』라며
팩하고 돌아서던 그도 선산 찾아 다니러올 때만은 보통 노인과 다름없었던 듯하다.
사실 소리마당에서는 소리하는 이가 주역이 되고 북은 으레 '소리'에 가리워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지만 김명환의 경우는 예외였다.
「일고수 이명창」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게 그의 '북'은 거의 늘 '소리'를 리드하고 압도했다.
흐물흐물 곰삭아 터지다가 가슴 미어지고 숨줄 끊어지도록 모질게 몰고가는
기-경-결-해가 늘 황홀했다.
그러면서도 김명환 북은 기백이 크고 서슬이 퍼랬다.
그는 '잘디잔 북' '뼈대없는 북'에는 단박 『저거 예술 아니여. 저러면 쓰간디』하고 손을 내젓곤 했다.
'예술인 것'과 '아닌 것'의 경계에 늘 단호했다.
김명환 북의 기운생동한 맛에 반해 나는 그가 박봉술, 정권진, 조상현, 한애순 같은 명창들과
호흡을 맞추던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감상회」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내 귀에 어렴풋이 그 북소리의 뼈대가 가늠되어올 때 쯤에 그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다.
소년 '명창'은 있어도 소년 '명고'는 없다고
'좋은 북'은 치는 이나 듣는 이 모두에게 언제나 그리도 더디고 애닯게 오는 것이었는지.
무덤곁 풀섶에 앉아 멀리 굽이돌아 흐르는 섬진강을 다시 바라본다.
매화꽃잎이 점점이 떠가는 저 강에는 지금 은어가 빠르게 물살을 타고 있을 터이다.
가늘고 긴 몸체에 청록과 회백색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너무 성마르고 깔끔해
잡히면 팔딱일 새도 없이 제가 먼저 숨길을 놓아버린다는 은어.
언제나 맑은 물에서만 놀며 깨끗한 돌자갈 이끼만 먹고 자라
몸에서 수박냄새 같은 향기가 풍긴대서 향어라 불리기도 한다던가.
문득 오뉴월 염간에도 늘 칼날같이 풀먹인 세모시에 옥색 물들여 날아갈듯 차려입고 나서곤 했다는
북의 가인 김명환이 어쩌면 그가 나서 자란
저 섬진강 은어의 생태를 그대로 닮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 글-그림 김병종·서울대미대 교수 ).
김명환은 누구인가 ?
1913년 전남 곡성의 옥과에서 태어나 1989년 봄 노량진의 한 초라한 연립주택에서 세상을 떠난
우리 음악사의 가장 위대한 '소리북쟁이'.
곡성의 대지주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까지 공부하러 갔지만 혼례치르던 밤 벌어진 소리판에서
『남도 청년이 소리장단 하나 못 짚느냐』는 핀잔에 그 길로 명창 장판개를 찾아가면서
그의 한평생은 길이 한자 두치 둘레 여덟치의 소리북 안에 갇히게 된다.
송만갑, 임방울, 박녹주 같은 나라 안의 한다하는 명창들이
김명환 북과 함께 무대서기를 소원했을 만치 최고의 고수(고수)였지만
정작 자신은 전란과 비운에 쫓기는 험한 세월을 살았다.
서울의대 다니던 큰아들의 납북으로 충격을 받아 한때 아편에도 손을 댔고
이를 끊기위해 자진해서 광주교도소에 들어가기도 했던 그는
만년에 KBS 국악대상을 받고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감상회」가 시선을 모으면서
비로소 세간에 그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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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까부다 갈까부다 임 따라서 갈까부다 -.
이 소리는 조상현씨와 한애순씨등 살아있는 판소리의 원로 두 분과
박봉술, 정권진, 김명환 등 지금은 고인이 된 당대 최고의 명창과 고수에 의해 완창된 것으로
브리태니커에서 제작된 총 23장의 CD와 6권의 사설집으로 구성된 CD 중에서 일부 소리를 발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