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골로 승격시킨 공예태후 임씨 (恭睿太后 任氏)
고려 17대왕 인종(仁宗)의 비(妃)이다. 1109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성은 임(任)씨이고 중서령 원후(元厚)의 딸이며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외손녀이다. 태후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이위의 꿈에 황색의 큰 깃발이 집의 중문에 세워져 깃발의 끝이 궁궐의 용머리에 걸쳐 나부끼므로 외조부가 태후를 몹시 사랑하였다. 태후가 15세에 이르자 평장사 김인규(金仁揆)의 아들에게 시집가게 되었으나 혼인하는 날 저녁 갑자기 중병에 들어 죽어가게 됨으로 혼인하지 못하였다.
이후 1126(인종4) 이자겸(李資謙)이 물러나고 그의 딸이 폐비가 되자 태후가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추천되었다. 태후가 추천된 것은 폐비이씨가 친정으로 가던 날 인종왕이 꿈을 꾸니 폐비가 참깨(壬子) 5되와 노란 해바라기씨(黃葵) 3되를 주고 가더라는 것이다. 이에 축준경(拓俊京)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후비(后妃)로 임시를 들일 징조요, 다섯이란 아들을 말하고 누런 해바라기씨는 그중 세아들이 왕이 될 것"이라는 상서로운 꿈이란 해몽이 있어 태후로 추천되었다.
1127년 태후가 의종(毅宗)을 낳으니 왕이 기뻐하며 태후 집에 은기(銀器)들을 하사하고 태후를 극히 총애하여 1129년 왕비로 책봉하였다. 이후 왕자 경(暻)과 명종(明宗)을 잇따라 낳으므로 인종은 왕비를 위해 수시로 은전을 베풀었으며 왕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왕이 소복을 입는 예를 갖추었다.
태후는 의종(毅宗)·경(暻)·명종(明宗)·충희(沖曦)·신종(神宗) 다섯형제와 승경(承慶)·덕령(德寧)·창락(昌樂)·영화(永和) 네공주를 낳았고 의종이 왕에 즉위하자 태후를 왕태후(王太后)로 삼았다.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며, 순능(純陵)에 장사하고 시호를 공예태후(恭睿太后)라 하였다.
이듬해 금(金)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제사를 지냈다. 인종왕은 왕자가 탄생될 때마다 태후에 대한 은전을 베풀어 우리 고을 명칭도 "길이 흥할 고장"이라하여 "長興"이라 이름지어 하사했다고 전한다. 12세기 고려시대 무인 집권기에는 나라가 어수선하던 시절이었다. 이자겸의 난을 필두로 묘청의 난, 무신정변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기도 했다.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꼿꼿한 기질로 왕실을 일으키기 위해 분철주야 노력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공예태후다. 고려시대 17대 왕인 인종의 세 번째 왕후인 그녀는 인종과의 사이에서 5남 4녀를 두었는데 이 중 세 아들 의종, 명종, 신종이 왕위에 올랐다.
정중부, 이의방 등이 의종을 폐위 시키고 둘째인 '대령후 왕경'과 다섯째인 '왕탁(신종)'을 추대하려 할 때 셋째인 '익양후 왕호'를 지명해 명종이 즉위할 수 있도록 핵심역할을 한 인물이다.
기질이 유약한 명종을 대신해 실질적인 왕실정치를 주도했는데 왕실을 차지하려는 이의방 등의 무신들과 끊임없이 대립해야만 했다. 김보당의 난이 일어나 이의방이 의종을 시해하려 할 때에는 왕실의 안위를 위해 아들의 죽음을 막지 않은 비정함을 보이기도 한 인물이다.
이미 왕실의 권위와 체통은 무신들에 의해 떨어질 대로 떨어졌지만 명분뿐인 왕실을 지켜나가기 위해 여자의 몸으로 권력에 눈을 부라리는 장군들 앞에서도 한치 물러설 줄 몰랐다.
특히 무신 집권자들의 찬탈을 막기 위해 때로는 타협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칼날 같은 질타로 그들을 다스렸는데 이러한 까닭에 왕실은 물론 무신 집권자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비록 둘째인 의종을 불운한 시대적 환경 때문에 잃었지만 아들들에 대한 모정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