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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합격투기의 시작에 관한 글을 조금 써보려고 합니다. 일단 현재 자료를 뒤지다 보니 이전 자료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메이저급 대한민국 격투기 대회인 스피릿MC가 탄생하던 시기에
내부에서 컨설턴트로 일을 했던지라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서 글을 작성해보려고 합니다.
밑으로 엄청난 스크롤의 압박이 있습니다만 이를 참으시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피릿 MC의 시작
스피릿이라는 이름의 격투기 대회가 발족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2002년에서 2003년으로 넘어가는 때였다.
당시 SKY KBS에서 <King of the Cage>, <K-1>, <PANCRASE>, <PRIDE>의 방송이 케이블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미 WWE 역시 I-TV와 SBS SPORTS를 통해서 방송이 되고 있던 때였다. 당시 이 컨텐츠 들을 한국내에
수입을 했던 SnE라는 회사는 전문적인 방송 중계권을 다루는 회사로 현재 너무나도 유명한 회사가 된 IB SPORTS의
전신이나 다름 없는 회사이기도 하다.
당시 SnE의 WWE 담당자였던 김원 대리가 어느날 연락을 해왔는데 그렇게 방문했던 마포의 번개표 형광등 건물의
가장 최상층에서 처음으로 스피릿을 기획하고 있던 사람 들과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스피릿MC는 당초 출범 성격이
현재의 PRIDE가 모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은 아직 격투기라는 근간의 뿌리가 없었고 자칫하면
단순한 싸움으로 치부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종합격투기라는 성격의 접근보다는 이종격투기의 성격이 강했고
무술을 펼치는 선수들의 경합으로 시작되었던 초창기의 UFC가 오히려 그 롤모델이었다.
이는 대회 출전자 역시 각 무술의 계파에서 추천 또는 예선을 거치자는 방식으로 발전을 하게 되었고 이 무렵에
이 팀에 합류한 것은 당시 KPW를 열어서 국내 최초로 독자적인 이종격투기의 형태 내지는 현대의 종합격투기에
가까운 대회를 운영했고 해외에서 경기를 해본 적이 있었던 한태윤 씨와 KPW 팀이었다. 당시의 스피릿 코리아의
사장은 현재의 네오파이트의 사장인 서성일 사장이었고 자금과 대회 전반적인 부분에는 현재 엔트리안 김명 이사가
이미 스피릿 코리아를 만든 상태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여기에 내가 참여하게 된 것은 2003년도
1월이었다. 당초 내부직원으로 들어갈 수 있던 상황이었지만 이미 회사를 다니면서 방송일을 한다는 것이 힘든
상황이었다라는 것을 경험한지라 다른 직원 들과 위화감 조성을 할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내부직이 아닌
외부 컨설턴트로 활동하겠다고 의지를 전달했고 이로 인해서 컨설턴트로 활동하게 되었다.
최초 스피릿 대회에 자금을 투자한 것은 지금의 위성방송인 Sky Life였다. 당시 SnE는 Sky Life의 컨설팅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 과정에서 이미 일본에서 인기를 끌며 성공적인 PPV 모델로 자리를 잡았던 PRIDE가
보여줬던 성공적인 수익모델인 PPV를 정착시키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스피릿MC에 투자를 결정했던 것이다.
이 당시 대회사에 투자된 초기 금액이 약 7억원이었고 이 금액이 바로 오늘 날의 스피릿의 시작이 된 종자돈이다.
대회가 출범되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필요한 것 들이 많았다. 일단 시작이 무술 계파의 강함을 가린다는 부분이
우선 브레이크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초창기의 UFC 대회도 겪었던 딜레머일 수도 있는데 각 계파 간의
대결은 항상 그렇듯이 최강자 논란을 일으키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서 대회에서 패배한 경우 개인의 패배가 아닌
그 무술 유파의 패배 또는, 우리 무술이 상대방의 무술보다 약하게 보일 것이라는 의식이 팽배한 터라 선수 모집이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경량급과 중량급의 이벤트로 이틀간의 예선을 거쳐서 경기를 치뤄
최종적으로 마지막 결승 토너먼트를 치룬다는 것이 골자였고 이를 위해서 양일간 64명의 선수를 동원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서성일 사장의 인맥이라고 할 수 있는 국술원이나 합기도 수련생 들의 참여가 많았지만 64명을
채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이미 KPW 대회를 개최한 바 있는 한태윤 씨의 대회 참가자 들과 인맥을
통해서 64명이 채워지게 되었고 대회사가 납득할만한 수준의 선수를 미리 와일드 카드로 올려놓고 예선을 통과한
선수 들과 결승 토너먼트를 치루는 방식이 채택 되었다. 출전을 독려하기 위한 우승상금 3천만원도 확정되었다.
예선전 2일간의 경기 진행은 경량급 경기가 먼저 열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경량급과 중량급을 나누는 체중을
나누려는 초창기의 한도 체중은 80kg가 기준이 되었다. 처음부터 체중의 세분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첫 출발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체중의 세분화는 오히려 흥미가 반감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정된 것이
-80kg의 미들급과 +80kg의 헤비급이었다. 그리고 결승은 무차별급 형식으로 치루기로 했다.
경기에 필요한 여러가지 들의 제작
일단 가장 초반에 경기를 기획하던 단계에서 로고가 나왔다. 맨처음 합류했던 시절에 이미 기획사를 통해서
로고가 나와있는 형태였지만 배색이 너무나도 이상한 배색이었던 관계로 차라리 흐르는 듯한 이미지를 주도록
채색을 변경해보자고 건의 했고 이것이 현재의 스피릿MC의 로고가 되었다.
<단순하게 채색되었던 버전의 로고를 변경하여 확정된 현재의 스피릿MC 로고>
두번째로 논의 되던 것이 링을 가져갈 경우 과연 어떤 형태의 링을 만들 것인가도 관건이었다.
내부적으로는 기존의 사각링은 이미 복싱이나 프로 레슬링 등으로 인지도가 높아서 안심할 수 있다는
장점 이외에 새롭게 시작하는 단체로서 어필하기는 힘든 면이 있다는 생각이 부딪히고 있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채용된 것은 팔각의 링이었다. 내부적으로는 수뇌진이 안정적인 것과 모험을 하되
이슈가 될 것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입장에서 결국 이슈가 되는 쪽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선전의 인원이 우연히도 64명이 되는 바람에 8각과 64라는 배수의 관계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팔궤의 이론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나름의 의미가 부여되는 결과도 생기게 되었다.
격투기이면서도 동양적인 면을 강조했던 당시의 흐름 상 내심 쾌재를 불렀던 부분이기도 했다.
다만 팔각 링의 채용이 관객 들이 볼 수 있는 시야가 좁아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선수 안전을 위해서
링 줄도 5 줄이 들어가면서 장기적으로 렌탈을 하기 보다는 자체적 링 보유를 위한 제작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처음으로 채용된 팔각 링 사진은 제 1회 인터내셔널 아마추어 리그의 모습>
당시 사각 링이 아닌 팔각 링을 채용한 곳은 프로 태권도의 이벤트에서 한번 사용한 것 말고는 없었던지라
결국 링의 얼개부터 구조까지 처음부터 다 만들어서 제작을 하게 되었고 이 제작에는 당시 한태윤 씨가
알고 지내던 링 제작 업체를 통해서 제작이 되었는데 팔각이라는 구조적인 부분 때문에 안정성과 링의 기능
두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지만 결국 대회 직전에 링이 완성되어
학생 체육관에서 열린 두번의 예선에서 사용을 하면서 구조적인 부분의 변경이나 수리가 이루어졌다.
당시 링의 제작 비용으로 소요된 금액은 약 3천만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글러브의 경우 조달이 더욱 힘들었다. 복싱글러브의 경우 신도 상사 등이 생산하던 것 들이 있었지만
오픈핑거 글러브는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던 시기이다. 아울러 이미 대회를 하고 있던 KPW에서도
글러브가 없어서 트윈스 사의 백 글러브를 가지고 경기를 할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글러브를 결국
이미 제작을 한다는 것은 시기상 맞지 않았기 때문에 생산판매를 하고 있는 일본에서 구입하기로 결정을 하고
당시 메이저 대회로서 모리시타 사장 사망 이후 침묵하던 PRIDE의 재 출발격이 된 PRIDE.25를 참관하러 가서
일본에서 구입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오픈핑거 글러브 20개를 구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일단 가격면에서 기존의 발리투도
글러브나 하빙거 같은 곳에서 헬스 용으로 만든 스트라이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 인솔이 있는 글러브는 가격만도
1만엔이 넘는 고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입코저 한 것은 형태적인 면이나 가격면에서 무난했던 마샬월드의
5900엔 짜리 글러브였다.(현재는 6090엔 정도에 판매중)
<스피릿 첫 대회에서 사용된 마샬월드의 글러브(청색) 와 현재 스피릿이 개발 사용중인 글러브(적색)>
이 글러브는 당시 일본에 도착한 첫 날 내가 직접 신주쿠의 월드 스포츠 플라자에서 15개를 구입했고
나머지를 구입하기 위해 여러곳을 헤메다가 시부야의 월드 스포츠 플라자에서 나머지 갯 수를 구입해서
한국으로 가져와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글러브는 향후 국내 업체 들이 참조하여 글러브를 만드는데
크게 일조를 했다. (이후 2회 대회부터 스피릿은 (주)동혁이 개발한 글러브를 현재까지 사용 중이다)
<스피릿 MC 챔피언 벨트 제작 과정 메인플레이트 제작 중>
<당시 멕시코에 의뢰했지만 멕시코 측은 견적을 내주지 않고 묵묵 부답이었다>
챔피언 벨트는 당초 GP라는 이유로 수여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보검을 선사하자는 의견이나
트로피만으로 끝내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사실상 가장 강한자 임을 어필하는 것에 챔피언 벨트 만큼이나
당연하게 어울릴 것은 없었기 때문에 챔피언 벨트를 만들기로 했지만 멕시코의 벨트 메이커는 발주서를
받고도 감감 무소식에 갈 수록 제작기간은 없어지자 결국 국내에서 직접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직접 돌아다니며
벨트를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짧은 제작기간이었지만 상당히 충실한 현재의 스피릿 벨트를 만들어 냈다.
아쉬웠던 심판 교육
첫번째 대회의 심판교육은 아쉽게도 한번 밖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단 생소한 룰로 진행이 된다는 점에서
기존의 레프리 들과 차별성이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달리 교육을 하기에는 초창기 대회의 문제로
예산이 부족했고 결국 정상적인 레프리 교육은 한번 밖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레프리 들은 64명이 출전한
양 일간의 토너먼트에서 실전 경험을 쌓아가면서 분발을 했지만 아쉽게도 결승전 당일에는 많은 문제점을
도출하였고 실제로 판정적인 부분이나 포지션의 이해부족으로 인해 몇몇 레프리 들은 한 선수에게 유리했던
경기를 망쳐놓기도 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이 역시 초창기의 아쉬움으로 남은 기억이 되고 말았다.
특히 대회를 앞두고는 제 2회 KPW 대회가 용인의 곰두리 프로레슬링 연습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를 보려고
산간벽지에 가까웠던 당시의 용인 경기장에 100여명의 참가자와 가족 들이 관객으로 몰려왔고 이런 열기를 보고
스텝 들이나 스피릿 코리아의 운영진 들은 나름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이때는 스피릿이 개최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대외비에 가까운 내용으로 외부로는 알려지고 있지 않을 때였다. 다만 관객 들에게 조만간 아마
커다란 모습으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당시 참가한 100여명만이 알 수 있는 자그마한 공지를 남긴 정도였다.
비록 규모는 곧 출발할 스피릿에 비해서 정말 동네 대회 수준이었지만 그를 운영하는 사람 들의 열정이나 숙련도는
이미 스피릿 코리아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을 미리 경험하고 있던 전문가 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레프리 이야기로 돌아와서 다시 한번 이야기 해보면 이 당시의 국내 정서적 구조상 스탠딩 상태에서의
공방을 중요시 해왔던 대한민국의 많은 팬 들에게 가장 문제가 된 것이 생소한 그라운드 상태에서의 공방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풀어줄 것인가 하는 숙제가 안겨졌다. 아닌게 아니라 예선전이 펼쳐지면서 처음 그라운드 경기를 접하는
관객 들은 태권도나 킥복싱과는 달리 땅 바닥에 누워서 그저 버티고 있는 것으로만 보이는 선수 들의 움직임을 보고
야유와 욕설을 퍼붓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라운드 상태에서의 소강 상태에서는 레프리 판단 하에 선수를 일으키는
형태의 내부적인 룰을 만들었지만 대부분의 레프리 들이 그라운드 상태를 경험해보지 못한 입식출신이고 아마레슬링
경험자가 3명 정도 있었을 뿐이니 그라운드 상태의 선수를 일으키는 타이밍이 너무 주관적으로 이루어져서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어렵게 포지션 탈출해서 마운트로 올라갔는데 스탠딩 시킨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레프리 들은
첫번째 대회를 종료한 시점에 상당 수가 물갈이가 되었고 새로운 레프리 들에게는 철저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1회 대회 이후 완전한 물갈이와 철저한 교육으로 탄생한 2기 레프리 들의 모습>
1회 대회의 운영진이었던 서성일 사장이 독립하여 본격적으로 네오파이트를 시작하면서 레프리 진 들의
이동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서 물갈이가 된 상태에서 다시 2기 레프리 들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심판위원장은
이수일 씨가 그리고 이동기 당시 FSN대표(현 MBC ESPN 해설위원)와 MOOZINE의 김기태 대표, 김영남 관장,
강민주 레프리, 김충구 정진MMA 대표, 현재까지고 활약 중인 이수용, 장지훈, 백종근 레프리와 최무배 레프리가
확정되면서 본격적으로 2기 레프리의 시대를 출범하였고 이 과정에서 한태윤 씨와 이수일 심판 위원장은
일본의 CMA로 레프리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후 한국에서 그들이 알아온 연수 과정을 그대로
새로운 레프리 들에게 교육했다.
<심판연수를 받기 위해 일본의 CMA 도장을 방문한 한태윤 이수일 씨와 국내 레프리 교육 장면>
그라운드의 이해도를 높여준 주짓수의 등장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 토너먼트를 통해서 국내에서는 생소하게 여겨지던 그라운드에 활력을 일으켜줬던 것은
초창기 UFC에서 활약했던 무술 주짓수가 등장한 점이다. 주짓수가 국내에 보급된 것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존 프랭클 교수가 한국에서 거주하면서 제자 들을 받아서 운용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아는 사람만 존재를 알고 있던 그라운드의 강점을 가진 이 무술은 첫번째 스피릿 MC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대한민국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결승전에 진출한 최정규와 백종권은 같은
이희성 주짓수 아카데미 소속으로 미들급과 헤비급에 안착했고 이로 인해 백종권에게는 주짓수 전도사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들 주짓수 수련 선수 들은 예선전에서 아직까지 그라운드 기술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국내 선수 들에게
이제껏 보지 못했던 여러가지 신기술로 상대를 유린하며 그라운드 기술의 묘미를 보여줬다. 특히 생소한 그라운드
상태에서도 상대방을 요리하는 모습은 어색했던 그라운드가 이런 묘미를 가졌구나라는 모습을 보여줬고 이는
빠른 속도로 주짓수의 한국내 전파와 더불어 국내 격투기 팬들의 그라운드에 대한 이해도를 같이 끌어서 높여가는
효과도 보여줬기 때문이다.
양일간에 펼쳐졌던 경기에서 백종권이 A조, 이면주가 B조 우승자로 그리고 최정규가 C조, 이은수가 D조 우승자로
확정되었다. 예선전이 양일간에 걸쳐서 체급을 나눠서 열렸지만 실제로 결승에서는 다 같이 경합을 하는 무차별급의
방식이 채용되었다. 이때 주최측은 그간 준비했던 와일드 카드를 내 놓았다.
와일드 카드 4인의 등장
주최측이 준비한 와일드 카드 선수는 4명이었다. 먼저 이미 KOTC와 PRIDE의 당시 등용문 격 경기인
THE BEST 등에서 활약했던 김종왕 선수가 입성했고 이어서 일본의 K-1 MAX의 경험자인 김진우 선수가, 그리고
아마추어 레슬링의 강자였던 김민수 선수, 전통무술인 택견의 권익선 선수의 4명이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빠른 대진작성을 위해 본선 기자회견 장에서 직접 추첨을 통해 선수를 가리는 방식으로 대진을 추첨하였다.
추첨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본선 경기 참가한 와일드 카드와 예선 통과자 들의 대진카드>
제 1경기는 엘리트 출신인 아마추어 레슬링의 김민수 VS 주짓수 전도사 백종권의 경기로 결정되었다.
제 2경기는 입식타격 선수 들 간의 대결로 예선전을 거치고 올라온 이면주 VS 와일드 카드 김진우로,
제 3경기는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졌고 그로 인해 당시 우승후보였던 김종왕 VS 최정규로 결정되었다.
제 4경기는 신예로서 돌풍을 일으키며 예선을 통과한 이은수 VS 택견의 신성으로 불리던 권익선 선수.
경기의 뚜껑을 열자 와일드 카드와 예선 통과자 들이라는 면에서 여러가지 희비가 엇갈리는 모습이었다.
이미 에선에서 살벌하게 경쟁을 하고 올라온 선수 들이다 보니 이미 알려진 선수 들과의 대진이라고 해도
그다지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제 1경기는 김민수 선수가 돌진해 오는 백종권 선수의 턱에 강한 펀치를 던져 넣으면서 깨끗한 TKO승을
거뒀다. 제 2경기는 입식 타격 선수끼리의 대결이었지만 의외로 입식 타격 적인 모습보다는 종합경기 같은
모습으로 치뤄졌고 이면주 선수가 와일드 카드인 김진우 선수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예선통과 선수의 무서움을
보여줬다. 제 3경기는 김종왕 선수가 최정규 선수에게 승리를 거뒀고 제 4경기는 출전예정이었던 권익선 선수가
레슬링 선수와의 연습 도중의 부상으로 경기를 기권함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체력소모 없이 이은수 선수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두번째 라운드에서부터 오심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5경기에서 김민수와 이면주의 대결에서는 이면주 선수가
김민수 선수의 얼굴을 밀어내는 과정에서 손가락으로 눈과 이마의 컷을 찌르는 형상이 계속되어
항의를 했지만 레프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반칙선언도 없었던 상황이라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고
이를 견디지 못한 김민수 선수가 어필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탭을 치고 말아서 경기가 중단되어 이면주 선수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경기 후 화장실에서 만난 두 선수는 경기중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화해를 했고
김민수 선수는 이면주 선수에게 다음 라운드에 올라가서 잘 하시라고 격려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6경기에서는 김종왕 선수가 이은수 선수와 경기를 하기 전에 THE BEST에서 당했던 부상이 최정규 전을 통해
다시 재발한 상태가 되었다. 앞서 있었던 김종왕의 THE BEST에서의 자이언트 오치아이와의 경기에서
다 잡아 놓은 승리를 손 부상으로 스스로 포기한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 대회 출전 때부터 부상의 완쾌여부가
관건이었는데 그것이 첫 경기를 통해서 다시 한번 부러졌던 손이 부러지고 만 것이다.
기존의 글러브가 손에 들어가지 않을 상황이었고 이에 김종왕 선수는 PRIDE에서 사용했던 본인이 지참했던
글러브가 더 큰 상황이니 글러브 교체를 양해해달라고 요구 본부석이 마샬월드의 글러브와 별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고 PRIDE의 글러브 착용을 허가했다. 그리고 시작된 경기에서 김종왕 선수가 포지션을 내주고 난 후
이은수의 팔꿈치 가격이 있던 가운데 몸을 돌리던 김종왕 선수의 척추 부분에 본의아니게 가격을 하게 된
이은수 선수는 반칙으로 지적을 받게되었다. 이후 김종왕이 경기속개가 불가능 해지자 경기는 그대로 마무리
되었고 규칙적으로는 반칙패를 한 이은수 이지만 반칙승인 김종왕이 출전이 불가해지자 결승에 대리진출하는
형태로 결승전에서 이면주 선수와 대결하게 되었다.
(현재의 룰에서 선수가 가격하는데 움직여서 피하다가 맞은 경우는 반칙 적용이 심하게 되지 않는 편이다)
장렬했던 40여분간의 결승전
사실 이날 경기는 생각보다 많은 관객 들이 장충체육관을 찾았다. 무대 장치 설치된 것을 빼고는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선 관객은 완전히 이 종합격투기 사업을 핑크빛으로 보이게끔 만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 날 관객의
숫자는 6,800여명 7천석이 들어가는 경기장이 입장용 구조물을 빼고는 완전히 꽉 들어찬 상태였다. 하지만 사실
이 날 경기장을 찾은 관객들은 대부분 종합격투기를 보러 왔다기 보다는 그저 강한자를 뽑는다는 싸움 같은
형태를 즐기려 찾은 관객 들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그라운드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욕설과
야유를 퍼붓는 경우도 많았고 제 1경기에서의 화끈한 KO승이후 권익선 선수의 경기 당일 기권 나머지 준결승
경기의 이해할 수 없는 결말로 결승을 맞이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날 이벤트는 사실상 이면주와 이은수가 살려냈다고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준결승 까지의 경기 시간은
라운드 별로 5분 2라운드 제를 택했지만 결승전은 1라운드 10분 2라운드 3라운드 5분과 같은 PRIDE의 경기시간을
동일하게 채택했었다.
그리고 이 시간은 결승전에 임한 두 선수에게는 운명과도 같이 경기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스텝의 실수가 있었다.
1라운드부터 두 선수는 화끈한 타격전을 펼쳤다 그라운드로 끌고 간 것은 이은수가 먼저였다. 이면주 선수에게
타격을 가하면서 서서히 압박을 가하며 드디어 마운트를 올라탔다. 그리고 파운딩을 날리는 순간 이면주 선수는 이를
방어하기 위햇 팔을 들어서 이은수의 펀치를 막아보려고 했다. 이 상황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암바를 걸 수 있는
최적의 상태였다. 이은수 진영과 링 사이드에서 이은수를 알고 있던 모든 인물 들은 암바를 잡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경기에 극 긴장인지 집중인지 이은수는 계속적으로 펀치 파운딩을 택했다. 그리고 이 순간 1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하지만 이렇게 울린 공은 결국 두 선수의 운명을 바꿔 놨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 공이 스텝의 실수였기 때문이었다. 예선전까지 5분 2라운드에 경기를 치뤘던 관계로
공을 울리던 스텝이 결승임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난타전 양상의 화끈한 경기를 보느라 그만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예선과 같은 5분이 경과한 상태에서 그만 공을 울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실수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의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도 아이러니였다. 화끈한 난타전 속에 흥분한채 10분이 훌쩍
지난 것으로 알았으니 말이다. 이 잘 못 울린 공이 아니었다면 마운트를 타고 나머지 5분간 힘이 있는 상태에서
파운딩을 가한 이은수를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초대 챔프의 이름을 바꿔 놓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은 적어도 그렇지 못했다. 1라운드 10분을 보내고 2라운드 5분 3라운드 5분이 종료되었지만
승부는 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판정을 내려야만 했다. 하지만 초대 챔피언을 가리고 진정한 승자를
가린다는 이유로 판정이 아닌 무제한 서든데스 라운드로 간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요즘 같으면 선수 잡을 일이라고
엄청나게 욕을 먹을 일이지만 당일의 경기장의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서든데스 발표가 나자 경기장이 완전히
떠나가란 듯이 외치던 관객 들의 환호는 그야말로 무서운 광기 그 자체였다. 하나가 죽어야만 끝날 수 있는
지하의 데스매치가 실제로 있었다면 그날의 관객 들이 그 경기장의 관객 들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챔피언 탄생
라운드는 이어졌다. 3라운드 이후로 경기를 마치는 공이 울릴 때마다 이은수는 자기 코너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누워서 휴식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공이 울리면 다시 일어서서 싸우고 다시 공이 울리면 다시 눕고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6라운드에 돌입할 무렵에 이은수 세컨 측에서 수건을 투입하면서 이면주의 끈기가 승리를
거두며 TKO로 초대 스피릿MC 챔피언의 자리에 등극했다.
<40여분의 대 사투 끝에 승리를 거둔 이면주 선수 의지와 집념의 승부였다>
부상을 당한 정도로는 이은수 쪽이 더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 둘의 승부는 국내에서
종합격투기의 붐을 만들어내는데 당당하게 일조를 했다. 이후 버블상태처럼 WKF와 네오파이트
KO KING 글라디에이터 G5등 그외의 수 많은 격투기 단체 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이는 결국
아직 피어오르지도 못한 시장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는 결과로까지 번지게 된다.
시작했다가 곧 없어진 대회사 들은 투자자 들에게 대체적으로 단기간에 승부를 볼 수 있는 투자임을
제안하고 돈을 끌어들이고 대한민국의 특성상 작은 이벤트는 아예 쳐다도 보지 않고 그저 커다란 이벤트로
개최하기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투자를 해도 이익을 보기 힘든 격투기라는 시장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아예 없는 상태에서 접근을 했고 결국 상당액의 투자는 실제로 경기외적인 부분에만 너무 사용되고 선수의
개런티 미지급 등의 문제로 문을 닫은 곳도 생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종합격투기인 이유는?
사실상 격투기 컨텐츠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은 자타가 공인하는 복싱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서
복싱과 종합격투기를 비교하는 모습 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파이트 머니와 공인된
랭킹을 매기는 기구의 모습 탑 스타 들 간의 대결구도 등 아직까지도 복싱이 파이팅 컨텐츠의 최고봉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미 종합격투기 이전부터 꾸준히 시장의 파이를 늘려왔고
중계권료의 협상이나 여러 면에서 충분한 수익적 부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다만 종합격투기는 앞으로 촉망 받는 분야의 하나라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그렇기 위해서는 격투기 단체가
조금 더 많은 노력을 해야할 것이고 팬들의 애정어린 시선과 더불어 투명한 운영 격투기 선수가 경기를 할 수
있는 토양적인 부분의 재 설계 등 여러가지 면이 따르겠지만 이를 시간을 가지고 해 낼 수 있다면 조금 더 나은
모습의 종합격투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복싱처럼 공인된 랭킹을 가지고 공인된 도전자가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매치업을 통해서 승자를 가늠하고
그로 인해 단체가 살고 선수가 사는 토양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여력은 현재의 종합격투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희망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희망을 희망으로만 끝내지 않고 싶다면 그에 맞는 노력을 해야할 것이고 이를 지켜봐주는 팬 들도
많은 애정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곧 종합격투기도 복싱처럼 인정받는 파이팅 컨텐츠로 거듭 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다고 믿어보고 싶다.
P.S 스크롤의 압박이 심했을 텐데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에는 여러분에게 알려지지 않고
해외무대를 두들겼던 선수 들에 대해서 알아보는 이름없는 도전자 편이 업데이트 됩니다..
다음주 수요일입니다
상업적 용도로의 재 사용을 금하며 퍼가실 때에는 출처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용도의 사용의
경우 AMALUNAR@hitel.net으로 문의 메일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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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재미있군요. 즐겨보았던 스피릿 MC의 색다른 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 봤습니다..^^
40여분의 사투....어이쿠.. 옛날에 방송으로 본 기억이 나는데....지금 보니 장난 아니군요.
잘보았습니다..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한국 종합격투기의 역사서와 같은 글이네요 ~
전혀 길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잘 봤습니다. 한국 mma가 성숙되기 전에 너무 일찍 파이를 먹을려 한게 아쉽네요.
하아~즐거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아쉽네요..ㅠㅠ
ㅋㅋ잘보고가요 ^^
스피릿은 이제 완전 막 내린건지...
잘 읽었습니다 ~~창욱이형 잘지내시는지 뵌지 오래 됐네요 ........스프릿 1회 정말 최고였죠 경기장 만석 이었고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 만석 이었을듯 은수의 투지에 감동 했었고 이면주라는 걸출한 선수를 배출 할수 있었던 ~~ 그이후 에도 쭉 가봤지만 역시 1회의 감동은 넘을수 없더군요 ~~
잘봤습니다.^^
이광희 .남희철 선수 경기못본건 정말 아쉬워여..
정말 잘봤습니다 긴 글이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던 글이었네요
잘읽었습니다 지난일이지만 스피릿이 망한게 좀 안타깝기도하네요
SMC 1회 챔피온이 이면주였던것만 알앗는데 자세하게 보니 좋네요...^^
그당시 이종회원들한테 출전제의 다 날라오지 않았나요?? 저한테 우편물이 날라 왔길래 주제도 모르고 갈등했었는데 ㅋㅋ 웃기지요~ 나이도 많은게 ㅋㅋ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ㅎㅎ
너무 잘 봤습니다^^
차근차근 읽으니깐 참 재밌네요..잘봤습니다..^^
kpw 대회를 Itv에서 처음 보고 나서 한태윤씨와 이은수 선수를 알게 됬고 그 때부터 종합 격투기에 빠졌었는데.. 스피릿 초대 대회 열렸을 때 정말 기뻤죠. 천창욱 님을 처음 방송에서 본 것도 Itv wcw 해설에서 였고. Itv 참 괜찮은 채널이었는데 말이죠. 지금은..;; -_-
스피릿엠씨 너무 그립네요 ㅠㅠ
경기장에 있었던 칠천명 중 한 사람이었지요. 이면주 응원 목이 터져라 했었는데 ㅎㅎ
잘봤습니다&&^^
저도 1회대회 직접 가서 본 한사람인데 정말 마지막 결승은 너무나도 무시무시했습니다. 2라운드 부터인가는 이은수선수 거의 끌려나가다싶이 자기 코너로 갔다가 오는 상황이 벌어지기도했고... 김민수선수의 일격도 기억에 남고요. 아~ 그때의 느낌은!!
오~ 너무나 좋은 자료!!!
아..이광희,,,,선수 보고싶어요...
아~ 좋은 글~
우앙 국
이면주 선수의 투혼이 대단했죠..체력적으로 불리한 상황인데도 깡으로 극복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