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東邑 沿革
新羅 建國時期 6部村의 하나인 陣地村으로 그 어원이 이어져 오다 新羅 및 高麗時代 때는 徐羅伐 東京으로 불려졌으며 조선조 말기 고종(高宗) 32년(1895) 전국 8도(八道)를 23부(府)로 개편시 경주부(慶州府)에 소속한 외남면(外南面)으로서 경주 남산과 마석산(磨石山:일명 뺏돌산)을 중앙으로 양분, 서쪽은 경주부 내남면(內南面) , 동쪽은 경주부 외남면(外南面)을 지역으로 되어 있었다.
이후 光武元年(1896) 13道制 시행으로 경상북도 경주군 외남면이 되었다가 1905년 동,서양면을 병합 외동면이라 칭하고 41개 리(里)를 관할하였으며, 1914년 내동면의 일부를 병합, 1975년에 신계리 일부가 경주시에 편입된 후 입실, 구어, 석계, 모화, 문산, 녹동, 냉천, 제내, 북토, 방어, 신계, 괘릉, 활성, 말방, 죽동, 개곡, 연안 등 17개 리 (理)로 구성되었다.
1955년 9월 1일에는 법률 제370호(1955년 8월 13일 공포)에 의거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됨에 따라 월성군(月城郡) 외동면으로 상급단체의 명칭이 변경되었다.
1980년 12월 1일 邑으로 승격, 1983년 1월 1일 이후 31개 洞里를 관할, 1955년 1월 1일에는 법률 제4774호(1994년 8월 3일 공포)로 경주시와 경주군을 통합함으로써 경주시 외동읍이 되었다.
2004년 12월 현재 17개 법정리, 31개 행정리, 200개 반으로 면적은 110.34㎢이고 읍사무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입실리 1042-3에 소재하고 있으며 2005년 10월 현재 인구 18,347명(남:9,314명, 여:9,033명), 가구수 6,743 세대, 공무원 34명, 농지 29.39㎢(畓 22.29㎢, 田 7.1㎢), 331개 가량 업체등이 입주 가동중에 있다.
동대산맥과 금오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각각 東과 西의 경계를 이루며 울산 태화강의 지류인 동천(東川)이 남북으로 흐르면서 평탄지를 전개하여 8.4%라는 경주시내 최대의 경지율을 보유 지역남부(모화, 구어, 문산, 석계)에서 공단이 설립되어 발전의 가능성이 있는 지역으로 인구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사적으로는 괘릉, 원원사지, 관문산성 등과 아사녀의 전설이 있는 영지 등 광 자원이 많으며 동쪽 하단의 산지는 경주 국립공원토함산 지구에 속한다.
고등학교 1개(태화종고), 중학교 1개, 6개의 초등학교 교육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방어리(防御里)의 유래
방어말,방어지,방지(防池),방어(防禦),방어리(防魚里)
영지(影池)에서 서쪽으로 약 1.5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신라때 방어사(防禦司)라는 군영(軍營)이 있었다는 설과 방어사(訪禦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양 설이 있으나 방지마을 옆에 둔전(屯田)이라는 군(軍)주둔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방어사(防禦司)가 있었던 곳으로 보아지며, 이것에 연유하여 방어사,방어지,방어로 불러오다가 방지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둔전 (屯田)
영지(影池)에서 남서쪽으로 약 5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신라 때 군량미를 쌓아 두었던 군창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마을 가까운 곳에
창앞이란 지명이 전해온다.
군대가 이곳에 주둔하여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군량미를 충당하였다고 하여
둔전(屯田)이라 부르게 되었다.
傳說의 影池
우리나라의 最大名刹 佛國寺 창건당시 阿斯達은 홀로 서라벌에 와서 不朽創作의 조형감각으로 동편 다보탑을 완성하고 서편 석가탑의 마무리 工程을 指示監督하고 있었다.
한편 아사녀는 소식 없는 그리운 지아비를 만나려고 불원천리 불국사를 찾아왔으나
住持는 아사달의 조형감각이 흔들릴 것을 염려하여, 서남향에 있는 못에 가보면 아사달의 모습이 비쳐질 것이라고
했다.
못 가에서 탑이 완성되는 기다림과 그리움에 지친 아사녀는 떠오른 보름달에 비쳐진 탑의 그림자를 아사달로
幻覺하고는 지아비를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석가탑을 완성한 후에야 이를 알게된 아사달은 "어찌 藝術이 사랑보다 崇高할 수 있으리요, 天上에서나마
이 無情한 男便을 그리며 凄然히 피리를 불고있을 그대를 만나야겠소"
그리하여 이 못에 그림자가 비쳐진 다보탑을 有影塔, 비치지 않은 석가탑을 無影塔이라 하였고, 못은 影池로
불리었으니 못 가에는 옛날 이 두사람을 위해 지은 影寺에 돌부처가 있으며, 늦가을 淸明한 午後에는 佛國寺가
있는 토함산 그림자가 影池에 비친다.
또한 석가탑에 올라가 보면 바로 앞에 影池가 位置한다는 事實이다.
이 事實的인 애절한 사랑의 전설이 아직도 탈고 안된 채로 용해되어서 지금 우리들 가슴에 殘像하는 메시지이며
無影塔은 흔적이다. 이 전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깊은 사랑, 지아비를 기다리다 지쳐 유명을 달리한 지어미의 법도, 義務를 完遂하려는 使命과, 理想을 向한 熱情과 自矜心이 影池에 녹아 있으나, 보이지 않는다.
다보,석가탑은 불국사 창건의 총책 金大成 재상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이 두탑의 조형구축 책임자 아사달이
理想美觀으로 그 자태가 구현된 石材조형물이다.
아사달 아사녀의 슬픈 사랑과 무영탑(無影塔)
영지석불좌상 (影池石佛坐像)은 아사달이 만들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영지 남쪽에 있는 이 불상은 2겹3겹 위로 향한 연꽃무늬 원형대좌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앉아 있으며 광배 일부와 머리 부분이 마모가 심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본래 미완성작품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영지는 아사달,아사녀와 석가탑에 얽힌 슬픈 사랑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백제 땅에서 온 석공 아사달이 다보탑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남편이 그리워 이국만리 백제에서 찾아온 아내 아사녀가 영지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영지에 비친 석가탑과 남편의 그림자를 보고 물에 뛰어들어 죽고,
나중에 아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사달이 아내의 명복을 빌며 바위에 부처를 새기고는
자신도 영지에 뛰어들었다는 가슴아픈 사랑의 전설이 서린곳이다.
이후 석탑의 그림자가 비친 이 못을 영지(影池 그림자가 비친 못)라 불렀고
그 후로는 석가탑의 그림자가 이곳에 비치지 않았다하여 석가탑을
일명 무영탑(無影塔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고도 부른다.
경북 경주시는 신라시대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연이 전해져 내려오는 외동읍 괘릉리 영지(影池) 못에 설화공원을 만든다고201년 12월 23일 밝혔다.
이를 위해 시는 이날 '영지 설화공원 기본계획 및 기본설계 용역' 최종 보고회를 열고 2016년까지 100억원을 들여 영지 일대 16만5천여㎡에 아사달과 아사녀의 설화를 스토리텔링 한 테마공원을 조성키로 했다.
주요 사업은 영지 주변 정비 및 조경사업, 탐방로 및 전망대 설치, 조각공원 조성, 설화 체험관 건립 등이다.
석가탑 축조에 얽힌 아사달과 아사녀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영지는 불국사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있는 저수지로 아사달이 아사녀의 모습을 조각했다는 영지석불좌상(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이 있다.
* 못밑,웃마,영호(影湖)
영지(影池)의 제방 밑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영지(影池) 밑에 위치한다 하여 못 밑이라 부르다가 못 밑마을의 큰길을 가운데 두고 위쪽을 웃마,아래쪽을 아랫마로 불렀다 한다.
지금은 영지(影池)를 영호(影湖)라 부르게 되었다.
청안이씨(淸安李氏)들이 주로 생활하고 있다. (42가구)
남계정(南溪亭)은 군자감(軍資監)을 지낸 청안이씨(淸安李氏)인 남계(南溪)이태립(李台立)을 추모하여 그 후손(청안이씨19世, 남계공10代孫 容字 壽字)들이 세운 정자다. 임진왜란 때 창의 의사(倡義義士)로서 청안이씨(淸安李氏)가 배출한 16의사(義士) 중에 한사람이다. 1950년대에 광산(光山) 아래 못밑마을에 세웠다.
청안이씨(淸安李氏)유래(由來)
충원공파(忠元公派)의 시조 이양길(李陽吉)의 시호는 충원(忠元)으로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검교시랑,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을 역임하였으며 이때 왕에게 직간한 것이 화가되어 제주판관으로 내려갔다가 공민왕 5년 10월 순절하여 1등공신에 녹훈되고 청안군에 봉해졌다
시조 이양길(李陽吉 : 시호 忠元)은 고려조에 검교시랑(檢校侍郎)·예빈시 동정(禮賓寺同正)으로 있으면서 직간하다가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좌천되어 1356년(공민왕 5) 가을적(加乙赤)·홀고탁(忽古托) 등 홍건적의 침입 때 도순문사(都巡問使) 윤시우(尹時遇)·목사(牧使) 장천년(張天年)과 함께 순절하고 청안군(淸安君)에 추봉되었다. 그래서 자손들이 본관을 청안으로 하고 그곳에서 세거하다가 시조 양길의 증손 이림(李臨)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화를 당하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3형제 중 큰아들 지(地)가 금성현령을 지내고 호서에서 경주부(慶州府) 안강현(安康縣) 서도리(西島里)로 이주하였고 , 둘째아들 진사 육(堉)은 흥해(興海)로, 셋째아들 기(基)는 장기현감(長기縣監) 겸 경주진관 병마첨절제도위(慶州鎭管兵馬僉節蹄尉)를 지내고 경주의 입곡(立谷)-현재 입실(入室)으로 각각 이주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청안이씨는 경상남·북도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종주(李從周)를 꼽을 수 있다. 시조 양길의 아들인 그는 지울주사(知蔚州事) 겸 권농병마단련사(勸農兵馬團鍊使)·울주 철장관(蔚州鐵場官)을 지냈다. 그가 1399년(정종 1) 절제사로 있을 때 행려자(行旅者)를 구호하기 위해 자신의 봉급에서 출연하여 혜리원(惠利院)을 설립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하륜(河崙)의 《혜리원기문(惠利院記文)》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선(旋)이 판윤(判尹), 손자 등(登)이 군수를 지내는 등 문관집으로 가통을 이어오던 중 연산군 때 무오사화 이후 관계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해 오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촌 내외의 지친(至親)간인 응춘(應春)·우춘(遇春)·봉춘(逢春)·응벽(應壁)·팽수(彰壽)·방린(芳隣)·태립(台立)·유린(有隣)·승금(承金)·대립(大立)·대인(大仁)·덕매(德梅)·계수(繼秀)·삼한(三韓)·눌(訥) 등 16인이 동시에 창의하여 <일문 16의사>를 배출, 충의가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 중 퇴사재(退思齋) 이응춘은 능해장(凌海將)으로 개운포에서 순절, 원종공신 3등으로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칠송당(七松堂) 이응벽은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두촌(仕村) 이팽수는 복병장(伏兵將)으로 울주(蔚州) 서생포(西生浦)에서 순절,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고 정려가 명해졌다. 남계(南溪) 이태립은 임진왜란 중 향교에 성현의 위패를 안전하게 봉안하고 난이 끝난 후 사비로 향교를 보수했다.
영풍정(詠風亭) 이계수(李繼秀)는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창의, 한강에서 순절했다.
* 원골,원곡(院谷),원동(院洞)
영지(影池)에서 남쪽으로 약 5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조선초기 경주와 울산간을 통하는 큰 길가에 원사(院舍)를 지어 이곳에 식량과 찬, 신발,
취사도구 등을 두고 행인에게 편리를 제공해 준 원(院)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원골,원곡(院谷)이라 불러왔다.
지금은 원동(院洞)이라 부르며, 약 220여년 전 남양홍씨(南陽洪氏)들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제내리(堤內里)유래(由來)
산(山) 정상의 바위도 제내리 등에서는 “맷돌방구”라고 하지만 ,
방어리(防於里)와 7번 국도 이동 마을에서는 “뺏돌방구”라고 부르고 있다.
* 사일(泗日,士逸)
영지(影池)에서 남서쪽으로 8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일설에 의하면 한 선비가 홀로 이곳에 들어와 외딴집을 짓고 주경야독의 생활을
하면서 황무지를 개척해 나갔는데, 그 후 이곳에 경주 최씨가 들어와 살면서
그 선비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사일(士逸)이라 하며
광복이 되면서부터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음은 같으나 뜻이 다른 사일(泗日)
을 많이 쓰고 있다.
* 한밭,대전(大田)
영지(影池)에서 남서쪽으로 약 7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넓은 들은 있으나 수원이 좋지 못하여 밭농사를 많이 지었다. 넓은 밭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밭(大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약 220여 년전 수안김씨(遂安金氏)가 먼저 들어와 정착하였다.
북토리(北吐里)유래(由來)
* 말무덤,아랫말, 마릉(馬陵)
영지(影池)에서 북서쪽으로 약 6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朴提上)이 왜국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를 데려오기 위하여
왜국으로 갈 때 집에 들리지 못하고 바로 전날 떠날 형편이 되었다.
배에 오르기전에 집으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비단 천에 쓴 편지를 말의 발목에
매어 말만 보냈다.
그 말이 길을 잘못 들어 이곳저곳을 헤메다 지친 나머지 이 곳에 쓰러져 죽게 되었다.
그 때 죽은 말을 이곳에 묻었는데 지금도 그 무덤이 남아 있다.
그 후 이 곳에 경주이씨(慶州李氏)가 먼저 들어와 살면서 무덤에 연유하여 말무덤이라
칭하다. 광복후부터 마릉(馬陵)이라 부르기도 함.
* 북토(北吐),북토상(北吐上)
영지(影池)에서 남서쪽으로 약 6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북토(北吐)라 부르게 된 것은, 마석산(磨石山:일명 뺏돌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제내동(堤內洞)앞의 토성계(土城谿)에서 남과 북으로 갈리어 흐르는 데
남으로는 울산 태화강(太和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마석산이 북쪽으로 토해내는
물의 냇가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북토(北吐)라 칭한다
* 순못,순지(筍池),율림(栗林)
영지(影池)에서 북으로 4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미개척 시대에는 이곳에 죽림(竹林)이 넓게 퍼져 죽순이 많이 났다고 하며,
그 뒤 순(筍)이란 거사가 이곳에 들어와 죽림(竹林)가에 밤나무를 많이 심어 밤숲(栗林)
이 우거졌다고 한다.
또 율림(栗林)근처에 못을 파 이 못 이름을 밤숲못이라고 했다.
제내리(堤內里)의 유래(由來)
* 돌매, 못안, 제내(提內)
영지(影池)에서 남서쪽으로 6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석산(磨石山)혹은 뺏돌산 밑에 자리한 분지로, 마석산(磨石山)에서 흘러내린
물의 분수령 역할을 하여 남과 북으로 토해내고 있다.
옛날에는 돌매(石洞)라 부르기도 했으며 마을 앞 토성계(土城谿)에 못을 막은 후
부터 못안에 위치한 마을이라 못안이라 부르기도 했다.
광복 후부터는 제방 안쪽 마을이라 하여 제내(堤奈)라 칭하고 있다.
조선 광해조에 경주최씨(慶州崔氏)가 들어가 육의당(六宜堂)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있는 마석산(磨石山)은 경주 남산(南山)의 동남쪽에 위치하는
높이 531미터의 산으로 그 남쪽으로는 치술령과 이어지고 있다.
산 모양이 마치 맷돌처럼 생겨 “맷돌산‘으로 불리는 데 산 정상부에는 거대한
“맷돌바위”가 있다고 한다.
마석(磨石)이라는 이름도 이 “맷돌바위”를 한자화(漢字化)한 것이라고 한다.
이 산은 경주시 내남면(內南面) 명계리와 외동읍(外東邑)의 제내리(堤內里),북토리(北土里)
그리고 시동(矢洞)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타원형의 산으로 질 좋은 화강암의 암석군이 곳곳
에 발달하였는제 특히 산 동쪽 면, 외동읍(外東邑) 쪽이 그렇다.
마석산은 “맷돌산”이라는 이름 외에도 “뺏돌산” 또는 “뺏골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맷돌산”이라는 명칭은 이 산이 소재하는 제내리와 북토리에 서 일컬어지는 이름이고
“뺏돌산”또는 “뺏골산”은 영지초등학교가 있는 방어리와 경주-울산을 연결하는 7번국도(國道)이동(印)에 있는 괘릉리(掛陵里), 신계리(新溪里), 활성리(活城里)주민들이 주로
일컫는 말이다.
입실리(入室里) 유래
*관거리(冠巨里), 관가리, 광거리
이곳은 신라의 서울 경주로 들어가는 관문(官門)의 업무를 장악하는 모든 관청이 있었으며, 이곳을 드나드는 주민들은 관을 쓰고 다녔다 하여 관거리(冠巨里)라 칭하였다. 현재는 입실3리에 속한다.
*신기(新基), 수남(水南)
옛날 마을이 없었던 곳에 마을이 생겼다하여 신기(新基)라 칭하였으며 입실(入室) 1,2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하여 수남(水南)이라고도 한다.
*수북(水北)
입실(入室)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수북(水北)이라 불리어지고 있으며, 수남(水南)의 북쪽에 자리. 입실(入室)2리에 속하며 입실(入室)2리 전체로 볼 때 북쪽에 위치한다.
*순금(舜琴)
신라 때 김 공(金公)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그 당시 경순왕이 이곳의 정자 아래서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타고 흥겨워했다 하여 순금(舜琴)이라 칭하였다. 지금은 입실(入室)3리 이다.
*입실(入室), 입곡(入谷, 立谷)
신라때 불국사에서 모화(毛火)까지 작은 절이 78개가 있었는데 절과 절 사이 통로를 복도같이 만들었고, 불국사에 갈 사람들은 미리 이곳 작은 절에 들어와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고 삭발을 하였으며, 불도를 닦으러 오는 사람들이 실내에 들어오는 입문이라 하여 입실(入室)이라 칭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입실(入室) 1,2,3리라 한다.
*토점(土店)
갓 밑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흙을 구어 토기를 만든곳이라 하여 토점(土店)이라하며 연료를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용광을 설치하여 울산(蔚山), 달청 부근의 강가에 있는 사철을 수집하여 우마(牛馬)를 이용하거나 사람이 지고와서 쇠를 뽑아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석계리(石溪里)의 유래
석계리(石溪里) 라는 지명은 이마을이 돌이 많은 거랑(개울)가에 위치하여 돌거랑, 돌계(乭溪), 석계(石溪), 도계(道溪), 석을지(石乙只)라 불리어 온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석계리의 자연부락별 지명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고칭이, 고천(古泉)
오래된 샘이 있는 곳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고천(古泉)이라고 한다. 혹은 하천이 있었던 곳에 마을이 있었다 하여 고천(古泉), 고칭이라 칭하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80년전 영월인 신종상(辛宗象)이 이곳에 처음 들어왔다 함.
*대밭각단, 건너마을, 양지말, 양리(陽里)
석계리(石溪里)중에서 낮은 산 밑에 위치하여 볕이 잘드는 가장 따뜻한 마을이라 하여 양지말이라 불린다. 과거에는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어서 대밭각단으로 불렀으며, 석계동의 본동이라 할수 있는 평리(平里)에서 건너다 보이는 마을이라하여 건너마을이라고도 불리었다 약 420년전부터 경주김씨와 풍천임씨, 경주최씨 등이 거주해 왔다.
*중지말, 중리(中里)
중리(中里)와 하리(下里)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중리(中里)라 불리며 과거에는 양리(陽里)와 함께 건너마을이라 불리었다 약 370년 전 풍천임씨와 경주최씨가 처음 입향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풍천임씨와 영월신씨가 주로 살고 있다.
*돌기(乭只), 평지말, 평리(平里)
평야에 집단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평지말이라 한다. 석계동(石溪洞)가운데 중심부에 위치하며 한때는 시장이 열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폐쇄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410년 전에 풍천인(豊川人) 임균(任勻)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대구에서 이 곳으로 피난을 와서 입향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아랫말, 하리(下里)
석계리(石溪里) 중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담악각단이었다가 아랫말로 불리어졌고, 후에 하리(下里)로 불리어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 전 김원경(金元鏡)이 이곳에 처음으로 입향하였다. 경주이씨, 경주최씨, 풍천임씨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큰마을, 대리(大里)
부근 여러마을 중 집단적으로 인구가 많이 모여 산다고해서 큰마을이라 칭한다. 이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약 420년 전이며 처음에는 경주김씨(慶州金氏)가 먼저 정착했다.
*수서(水西)
물이 흐르는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여 수서(水西)라 칭한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은 박(朴)씨가 마을을 형성했다 함.
*시래(時來)
옛날에 선비들이 과거나 벼슬할 때를 기다리며 살았다고 해서 시래(時來)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약 400년 전 임진왜란 당시 경주손씨(慶州孫氏)가 처음으로 정착하였다. 지금은 순흥안(安)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 마대(馬垈)
옛날에 말을 많이 먹였으며 그 말들의 무덤이 있다고 해서 마대(馬垈)라
칭하였다고 한다. 경주김씨(慶州金氏)가 처음으로 정착하였다.
녹동리(鹿洞里) 유래
*노리골, 녹동(鹿洞), 녹동리(鹿洞里)
예부터 노리곡(魯里谷)으로 노루가 많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일제때 행정동명이 세분화되면서 녹동(鹿洞)으로 개칭되었다. 약 300년전 정상원(鄭相元)이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함.
*남뱅이, 남방(南方)
노리골 남쪽 산 아래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남뱅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박제상의 충절과 그 부인의 정절로 유명한 망부석(望夫石)이 위치한 치술령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동서남북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조그만 산촌이다.
*물탕골(水湯谷)
옛날 이 마을 뒷산 계곡에 큰 바위가 두개 있었는데 이 바위사이에서 약수가 나와 부근 사람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각종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약탕골이라 부르다가 그뒤 물탕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한다.
*성저(城底)
이 동리에 있는 만리성(萬里城)은 신라시대에 경상남북도를 경계로하여 축성된 성으로서 그 아래에 마을이 자리 잡았다 하여 성저(城底)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약 400년전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함.
구어리(九魚里) 유래
약 350년 전 김봉휘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당시 이곳으로 뻗어 내려온 능선형태가 9마리의 물고기형이라 하여 구어(九魚,九於, 仇於)라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역촌(驛村)이 되어 구어역(仇於驛, 鉤魚驛)이 있었다 하여 구역(九易, 舊譯)이라고도 했다.
당시에는 경주부에 속했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는 경주군 외동면 구어(九於)라 개칭했고 1998년 일제식민지 잔재타파와 민족혼 찾기 추진사업에 따라 마을명의 한자표기를 구어(九魚)로 개칭하였다.
*덜밑,들밑
나무를 베어내고 제방을 막은후 들 아래에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덜밑 또는 들밑이라 불리어 졌으며, 구어(九魚)마을의 서쪽에 위치하는 마을로 주로 농업에 의존.
*송계(松溪)
구역(九易, 舊譯)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하천이 변천하여 마을이 이루어졌는데 하천변에 큰 소나무가 있어 송계(松溪)라고 칭하였다. 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어령, 어렁골, 어롱골, 어룡골, 어영(魚泳)
구역(九易, 舊譯) 남서쪽에 위치하며, 이 마을 지형이 물고기가 뛰어노는 연못처럼 생겼다 하여 어영(魚泳)이라 칭하였다.
개곡리(開谷里) 유래
오절(吳節)이라는 사람과 견천지(堅天之)라는 사람이 약 600년전 마을을 개척하여 개국(開局)이라 불렀고 마을 안쪽에 쇠가마가 있어서 부동(釜洞)이라 불리어오다가 조선조 후기에는 동해(東海)쪽으로 가는 통로라는 의미로 빈자(賓者)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왔다.
그후 마을 생김이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냇물을 중간에 두고 이루어진 모양 같다해서 개곡(開谷)이라 하였으며, 처음에는 개화동(開花洞)이라 불리다가 일제시대 때부터 개곡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성(大城)
약 400년전 임진왜란 당시 적을 막기 위한 큰 성을 만들려고 계획한 바 있다하여 대성(大城)이라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옛날 어떤 사람이 이 마을에서 재산을 큰게 이루었다고 하여 지명을 대성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냉천리(冷川里) 유래
*찬내, 냉천(冷川), 냉천리(冷川里)
조별방이라는 선비가 약 350년전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개척당시 숲과 모래사이에서 찬물이 많이 솟아나와 냉천(冷川)이라 칭하였다.
*거산(巨山)
냉천(冷川)에서 제일 큰 산 밑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거산(巨山)이라 칭하였으며, 남쪽으로 0.7㎞ 떨어진곳에 냉천(冷川)이 자리잡고 있다.
연안리(淵安里) 유래
옛날 김연(金淵)이라는 선비가 있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청안이씨(淸安李氏), 함안조씨(咸安趙氏) 양인이 함께 이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선비의 이름 연자(淵字)와 두 성씨(姓氏)의 관향의 명칭중에서 공통으로 쓰여진 안자(安字)를 따서 연안(淵安)이라 하였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연지(蓮池)안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연안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고랑각단
연안천(淵安川) 남쪽에 조그만 야산이 있고 이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곳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30여 가구정도가 되는 마을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곳을 이름하여 고랑각단이라 불렀다.
*대리(大里)
대리(大里)라 불러지게 된 것은 인접한 여러 자연부락중 가장 큰 마을이라하여 대리(大里)라고 불러지게 되었다.
*새바다
약 520여년전 이곳에 대홍수가 일어났는데 배수가 잘 되지 않고 물이 마치 바다처럼 고여 있었다하여 새바다라 하였다 한다.
*아랫마을
이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옛날 동서로 시내가 흘렀는데 이 시냇물을 경계로 하여 서쪽에 위치한 마을을 아랫마을이라 했는데, 지금은 이 시내가 도로로 변해있다.
*연지(蓮池)
이 마을에서 동서로 흐르는 시냇물 따라 약500m쯤 가면 이곳 들 한가운데 연못이 있는데, 이 못에 연(蓮) 이 자연적으로 무성하게 자라서 연지(蓮池)라 칭하였으며, 지금도 많은 연이 자생하여 농가 소득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고 한다.
*연지웃말
이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옛날부터 동서로 시냇물이 흘렀는데, 이 시내를 경계로 하여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 연지(蓮池)의 위쪽 동편에 위치하고 있어 연지웃말이라 일컬었는데, 지금은 그 시내가 도로로 변하여 옛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덕동(德洞)
약 250년 전 안동권씨(權氏)의 선조가 이 마을을 개명하여 덕동(德洞)이라 칭하였으며, 또한 덕이 있는 인재가 많이 나왔다 하여 덕동(德洞)이라 불리어졌다고도 한다.
*새터, 새태, 신기(新基)
덕동(德洞) 북서쪽에 위치하며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새터,새태,신기(新基)라 칭하였다고 하며, 새터 북쪽에는 외동중학교 교가에 등장하는 애기봉이 자리잡고 있다.
*지초(芝草), 지초리(芝草里)
토질이 약초재배에 알맞아 개척 당시부터 주치 종류의 약재를 많이 재배 생산해 내었다고 하여 지초(芝草)라는 이름이 붙어졌으며, 남쪽으로 1㎞ 떨어진 곳에 냉천(冷川)이 있다.
괘릉리(掛陵里) 유래
약 400년전 이만동(李晩童)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신락 제38대 원성왕릉(元聖王陵)이 위치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능말, 능지촌(陵旨村) 또는 괘동(掛洞)이라 불렀다 한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계리의 상신리(上薪里). 하신리(下薪里), 영지리(影池里)의 일부를 합하여 괘릉리(掛陵里)라 하게 되었다.
*독골, 독곡(獨谷)
사면이 산으로 가려있고 오목한 골짜기에 마을이 들어있어 독 같은 형태라 하여 독골이라 칭한다. 위치는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인 불국사역(佛國寺驛)에서 1.5㎞ 지점선로 바로 서편 산아래쪽에 접하여 있다.
*밤갓, 밤갓등(栗谷)
옛날에 밤나무가 울창하여 조그만 능선이 밤나무 산이 되어 있었는데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밤갓등이라 불렀다. 밤갓은 밤갓드으이 윗마을이다. 현지에서는 방깟디와 방깟이라고 부른다.
*볕곡, 양곡(暘谷)
큰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로 양지바른곳에 위치하여 볕이 잘든다 하여 볕골이라 한다. 원성왕릉(元聖王陵)에서 약 400m 지점에 위치, 마을의 집 둘레에는 대나무들이 무성하고 동네 앞에는 하이골 골짜기에서 극심한 가뭄외에는 늘 맑은물이 원성왕릉(元聖王陵) 앞 개울로 흘러간다. 이 개울이 울산만으로 흘러드는 동천강(東川江;일명 禹朴川)의 발원지(發源地)가 된다.
현지에서는 주로 뺏골이라고 하는데 마을 입구 괘릉리 598번지에는 1963년 3월2일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 괘릉분교(掛陵分校)로 출범한 괘릉초등학교(掛陵初等學校)가 위치하고 있다.
*싸리밭등, 축전
옛날 싸리나무가 울창하여 한밭(큰밭)을 이루었다 하여 싸리밭등이라 하며, 여기에서 자란 굵은 싸리나무를 불국사(佛國寺) 창건 시 기둥감으로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 문화유씨(文化柳氏) 5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현지에서는 사리밭디 라고 한다. 경상도 사람들은 ꡐ싸ꡑ라는 발음을 못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에는 박태선교(朴泰善敎)의 괘릉전도관(掛陵傳道館)이 이곳 ꡐ사리밭디ꡑ에 세워져 많은 사람들을 경기도 부천시에 소재하는 신앙촌(信仰村)에 이주케하였으며, 박태선의 사기극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었다.
*샛말, 중리(中里)
대리(大里)와 ꡐ밤갓등ꡑ, ꡐ대리ꡑ와 ꡐ왼고개ꡑ사이에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샛말이라 불리며, 현재 경주설씨(慶州薛氏) 38가구에 189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불국사(佛國寺) 남방 2.5㎞ 지점에 있으며, 농업외에 젖소, 양계, 양돈에 힘써 많은 소득을 올려 여유있는 농촌생활을 하고 있다.
*영못안, 영지리(影池里)
신라시대 불국사(佛國寺) 석가탑의 석공 아사달의 아내인 아사녀(阿斯女)가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그림자라도 보려하던 못 영지(影池) 안쪽에 있다하여 영못안 또리 영지리(影池里)라고 불리어졌다. ꡐ영못안ꡑ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전 서(徐)씨가 이마을을 처음 개척하였다 하며,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주이씨(慶州李氏), 김해허씨(金海許氏)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여 이 마을은 괘릉리의 한 부락으로 영지(影池)와 영지석불(影池石佛)이 소재하고 있다.
*왼고개, 왼곡, 어인고개, 영곡
신라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노승(老僧)이 불국사(佛國寺)를 향해이 곳을 지나가다가 마을사람들에게웬 고개냐고 물은 것이 지금도 왼고개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불국사역(佛國寺驛) 남방 1.2㎞ 국도변에 접하고 있다.
이 고개가 위치하고 있는 ꡐ자미산ꡑ은 울산만(蔚山灣)으로 흘러드는 동천강(東川江:일명 禹朴川)과 영일만(迎日灣)으로 흘러드는 형산강(兄山江)의 분수령이기도 하다. 남쪽 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동천강을 거쳐 울산 태화강(太和江)으로 흘러가고, 북쪽 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경주의 남천(南川)과 서천(西川)을 거쳐 영일만으로 흘러간다. ꡐ왼고개ꡑ를 지도에서는 ꡐ원고개ꡑ라고 기재하고 있고, 현지에서는 ꡐ웽고개ꡑ라고 표현하고 있다
*윗말, 상리(上里)
사리밭등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며, 뜸뜸이 모여 이루어진 마을로 가장 상단에 위치하였다 하여 ꡐ윗말ꡑ로 불리며, 불국사(佛國寺)에서 남서방 약2.4㎞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청안이씨(淸安李氏) 10여가구 54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큰마을, 대리(大里)
뜸뜸이 모여 이루어진 마을중 가장 많이 모인 집단마을이라 하여 큰마을 또는 ꡐ대리ꡑ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경주이씨(慶州李氏)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이 마을은 경주중고등학교(慶州中高等學校)를 설립한 고 이수봉 선생의 고향으로 지금도 후손들이 오래된 큰 기와집에 살며 보수,보존,관리에 힘쓰고 있다.
*하이골,대리곡(大利谷)
제일 큰 골짜기에 위치하여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대리곡(大利谷)이라 하명 경주이씨(慶州李氏)가 20여 가구가 거주하였다. 이들은 양봉을 주업으로 산채, 채소 등으로 생활을 해 가고 있었다. 위치는 불국사(佛國寺) 정남방 약 1.5㎞ 지점에 있으며 골짜기 입구에는 감산사라는 조금만 절이있다. ꡐ하이골ꡑ은 또 ꡐ괘릉(掛陵)재ꡑ와 ꡐ활성(活城)재ꡑ사이에 있는 토함산록의 모든 골짜기를 통털어 이르는 말로도 통용되었다.
말방리(末方里)
*언방(言方), 말방(末方)
신라 제28대 원성왕이 승하하자 현재의 괘릉에 있던 곡사(鵠寺)를 철거하여 지금의 말방리(末方里)로 이축(移築)하였으며, 885년(헌강왕 11)에 명칭을 복을 빈다는 의미의 숭복사(崇福寺)로 바꾸자 이때부터 이절에 참배객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말을 타고 왔기 때문에 절 어귀에 말을 한곳에 메어 놓는 말방, 즉 마방(魔房)이 있었다하여 이후부터 이 부락을 말방이라 했고, 한자 馬房이 末方으로 변천되었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 의하여 약 350년전 방씨(方氏)가 이 마을을 개척한 후 마을에 말이 많아 ꡐ말이 많은 방씨의 마을ꡑ, 즉 ꡐ말방ꡑ불렀다 하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 시부터는 가축으로서의 ꡐ말ꡑ이라는 한자가 ꡐ末ꡑ로 변하여 말방(末方)이라 불러오고 있다.
*양짓말(陽地)
장산(獐山)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그만 자연촌락으로서 산을 뒤에두고 양지바른곳에 마을을 이루고 있다고해서 양지말이라 불렀다. 과수원이 비교적 많은 마을이다.
*장산(長山, 獐山)
약 250년 전 최씨(崔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마을앞에 있는 산이 노루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장산(長山,獐山)이라 불렀다. 이 마을에는 일제때부터 세워져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장산장로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탑리(塔里)
신라시대에 숭복사(崇福寺)라는 절이 있었으나 그 절은 소실되고, 동서(東西) 탑(塔)만 남아있어 탑리(塔里)라고 불렀다 한다. 승복사는 원성왕(元聖王)의 어머니인 소문왕후(昭文王后)의 외사촌이자 왕비인 숙정왕후(淑貞王后)의 외조부 되는 파진찬 김원량(金元良)이 원성왕 때 세운 절이며,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사지(寺址)에는 동쪽과 서쪽의 탑만 남아 있다.
*하촌(下村)
마을의 위치가 산의 아랫부분에 있다고 하여 하촌(下村)이라 하였으며 이 지대는 구릉(丘陵)지대였으나 주민협동에 의한 경지정리사업으로 기계화 영농이 이루어지고 있던 인심 좋은 마을이다.
죽동리(竹東里) 유래
*죽동(竹東), 죽방(竹方), 죽전(竹田)
약 320년 전 김별강(金別監)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죽림(竹林) 동방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죽동(竹東)이라 불렀다 한다.
그당시 죽림(竹林)이 많은 곳이라 죽전(竹田)이라고도 불리었으나 지금은 죽림(竹林)을 볼수 없게 되었고 인동장씨 용궁전씨(龍宮全氏) 집단마을로 되었다. 경주와 울산 간을 잇는 간이역이 이곳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새원, 신원(新院)
죽동(竹東) 남서쪽에 있는 50여 가구 되는 자연부락이었다. 약 220여년전에 의원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여 신원(新院)이라 하였고, 주로 함안조씨(咸安趙氏), 평해황씨(平海黃氏)들이 많이 살며 부락민들의 협동심이 매우 강한 것이 특징이다.
활성리(活城里) 유래
*활성(活城)
활성리(活城里) 전체의 지명으로 약 320년전 장이영(張以英)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이곳에 장군수인 활수(活水)가 용출했다 하여 활성(活城)이라고 하였다 한다.
*아랫말, 하촌(下村)
활성리(活城里) 마을의 아래쪽에 위치하였다하여 아랫말(下村)이라고 불리어 오고 있으며 현재 경주김씨(慶州金氏),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주최씨(慶州崔氏)등이 거주하고 있다
*웃말, 상촌(上村)
활성리(活城里)의 마을 최상부에 위치하고 있어 웃말상촌(上村)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420년 전 경주김씨(慶州金氏)가 개척하여 장(張)씨, 김해김씨(金海金氏), 청안이씨(淸安李氏), 단양우씨(丹陽禹氏), 경주최씨(慶州崔氏)등이 차례로 돌아와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는 이들중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제일 많다.
*중울리, 승명(僧鳴)
수리방 북쪽에 중어리라는 들이 있었는데, 옛날 불국사(佛國寺)에 속해 있었다 한다. 이곳에 중이 추수하러 왔다가 심한 화재로 소출이 너무 적어서 울고갔다 하여 중울리라고 불리어 오던 것이 그후 중어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텃골, 기곡(基谷)
송골 남쪽에 텃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병풍처럼 산이가려 골(谷)을 이룬 마을이라하여 텃골로 전해 내려오며 사과와 복숭아 등의 과수원을 경영하여 농가 소득을 높이고 있다.
모화리(毛火里) 유래
*모벌(毛伐), 모화(毛火)
이곳에는 관문성지(關門城趾)와 모벌군성지(毛伐郡城趾)가 있다. 관문성은 삼국유사 및 동경잡기(東京雜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聖德王) 21년(722)에 이 지역을 신라도성(新羅都城)의 외성(外城)으로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모화(毛火)라는 지명은 그 당시부터 유래되었다.
당시 불교의 최성기(最盛期)에 불가에 귀의하는 사람이 이 곳 모벌군성문(毛伐郡城門)에 이르러 삭발(毛伐)하여 머리털을 태우고 불국사 경내에 들어갔다고 하여 모벌(毛伐) 또는 모화(毛火)로 불리었다는 전설이 있다.
*건너말
하모(下毛)에 속해 있는 소단위 마을을 지칭하고 있는것인데, 옛날 명절 등을 맞아 친목대상 편을 나누기 위해 건너말을 경기단위로 택한 것이 유래되어 지금도 좁은 계곡편 소집단 인가마을을 상호 건너말이라 부르고 있다.
*계동(溪東)
조선시대까지는 문산리(汶山里)와 한 마을이었는데 개울(태화강 상류)을 경계로 하여 불할되는 바람에 개울의 동쪽편에 위치한다 하여 계동(溪東)이라 불렀다 한다.
*땅지, 땅진, 당진(唐陣)
신라 통일기에 원군으로 왔던 당나라 군사가 이곳에 진을치고 있었다고 하여 당진(唐陣)이라 하던 것이 발음이 변하여 땅진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땅지라고 불리고 있다.
*밭가운데
신라시대에는 모화리(毛火里)에서 가장 큰 자연촌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사방에는 밭으로만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밭가운데라고 불리어졌다.
*상모(上毛)
모화리(毛火里) 전역으로 볼 때 경주와 부산을 잇는 동해남부선을 경계로 북동쪽 상부에 위치 하였다하여 상모(上毛)라 부르고 있으며, 자연촌락 중에서도 가장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새각단, 새뜸
하모(下毛)에 속해 있는 새로 생긴 작은마을을 일컬어 새각단 또는 뜸뜸이 인가가 산재하여 형성되었다 하여 새뜸이라고 불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들 촌락명이 거의 불리지 않고 있다.
*역전(驛前)
경주와 부산을 잇는 철도 동해남부선의 모화역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역전(驛前)이라 부르고 있으며, 울산 시내버스의 종점이어서 경주시내 버스와의 교차점을 이루어 경주와 울산방면의 주민 왕래가 빈번한 곳이기도 하다.
*원띠, 원지(院趾)
조선시대에 원님이 살고 있었던 곳이라하여 원지라고 불려오다가 그후 원띠라고도 불러왔다고 한다.
*웃말, 상촌(上村)
상모(上毛) 가운데서도 북동쪽 상부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웃말 또는 상촌(上村)이라 불리었고,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규모가 작은 기와집들이 많다.
*큰말
상모(上毛)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라 큰말이라 불리고 있으며 약 30여년 전에 태화방직주식회사 사택인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건립되어 주민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원주민의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하모(下毛)
모화리(毛火里) 전역으로 볼 때 상모(上毛)와 반대방향인 하부에 위치한 마을이기에 하모(下毛)라 부른다고 한다.
문산리(汶山里) 유래
*문산(汶山), 문산리(汶山里)
약 450년전에 박춘무(朴春茂)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개척 당시 돌이 많은 뒷산을 울산 사람들이 빼앗으려 하다가 욕을 많이 얻어 먹었다 하여 문산(汶山)이라 불렀다 한다.
*밖멍미, 밖문산(外汶山)
약 450년전 박춘무라는 선비가 경기도 여주에서 이주해와 처음 살았는데, 당시에는 묵산(墨山) 또는 멍미라고 불렀다 한다. 문산(汶山) 마을은 길게 줄지어 늘어선 마을로 그 중에서도 바깥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밖멍이 또는 밖문산이라 칭한다.
*성만리(城萬里)
신라 초기때 가락국과 경계지역인 이곳에 외침을 막기위해 성을 쌓았는데 그성 이름이 만리성(萬里城)이었다고 한다. 약 500년전에 황씨가 처음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만리성 옆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성만리(城萬里)라 불렀다 한다.
*울밑들
약 50년전에 강호용씨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유사가 많이 흘러 울섶을 만들어 유사를 방지하고, 그 아래에 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들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울밑들이라 칭하였다 한다.
*우박(禹朴)
1539년 경 이동네에 들어온 사람은 단양우씨(丹陽禹氏),인동장씨(仁同張氏),밀양박씨(密陽朴氏)의 삼성(三姓)으로 그성을 따서 이름을 장우박(張禹朴)이라 부르다가 뒤에 장씨(張氏)가 동네를 떠나는 바람에 우씨(禹氏)와 박씨(朴氏)만 남아 살게 되어 우박(禹朴)이라 불렀다. 현재 단양우씨(丹陽禹氏)거 98가구 중 71가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경주이씨(慶州李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인동장씨(仁同張氏)등이 거주.
문산리에는 순금산(蕣琴寺)가 있는데 순금산은 해발 122m의 높이로 울산시 북구 천곡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일명 순등산(蕣登山) 또는 북신선암(北神仙巖)이라고도 한다. 백척 층암이 하늘에 솟아있고, 그 허리에는 바위가 움푹 들어가서 작은 방과 같은 것을 이루고 있으며, 많은 바위에는 제 나름대로의 이름들이 붙어 있다.
떠덕떠덕하다하여 ꡐ떠덕바위ꡑ, 해가 넘어가는 바위이므로 ꡐ해지바위ꡑ,높은 층암을 이루고 있어 이를 ꡐ층디미바위ꡑ, 범이 살았다하여 ꡐ범굴ꡑ,ꡐ해산(解産)터ꡑ와 ꡐ가위터ꡑ가 있다는 ꡐ삼신바위ꡑ들이 모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또 이 산에는 고깔같이 생겼다해서 ꡐ꼬깔봉ꡑ이 있고 말안장 같다하여 ꡐ안장걸이ꡑ 옛날에 배(船)가 하늘에서 내렸다하여 ꡐ배내리ꡑ
가 있다. 이렇게 바위로 된 풍경이 뛰어난 점을 들어 그 산의 이름도 순(蕣)임금을 비유하여 순금산(蕣琴山)이라 하였으며 또한 신선들의 놀던 곳이라 하여 북신선암이라고도 한다.
순금산의 서편으로는 천마산(天馬山)이 있어 천전봉(天傳峯)이라고도 부르며 천마산이 남으로 발달하여 달내(達川)에서 망제산(望祭山)을 솟아나게 하였다.
천마산이 천곡(泉谷)으로 뻗은 곳에는 신선의 손바닥 같다하는 ꡐ선장골(仙掌谷)ꡑ이 있다.
이렇게 하여 이 일대에는 순금산, 북신선암, 선장골, 천마산, 천전봉 등의 신비로운 이름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지명에 대한 유래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순금산을 관문산(關門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관문성이 이산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순금산에 위치하고 있는 순금사(蕣琴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문산리 91-1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순금산(蕣琴山)과 순금사, 그리고 ꡐ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ꡑ에서 입실3리에 소재하고 있다는 자연부락 ꡐ순금(蕣琴)ꡑ과는 어떤 인연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문산리의 순금산은 중국의 순(蕣)임금을 비유하여 순금산(蕣琴山)이라 했고, 입실3리의 ꡐ순금(蕣琴)ꡑ은 신라의 경순왕(儆順王)이 이 마을에 와서 거문고를 타며 즐겼다해서 ꡐ순금(蕣琴)ꡑ이라고 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명칭은 똑같이 ꡐ순금(蕣琴)ꡑ이다. 물론 경순왕(敬順王)의 ꡐ순(順)ꡑ자와 ꡐ순금(蕣琴)ꡑ의 ꡐ순(蕣)ꡑ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첫댓글 와~~~~이많은 자료들은 어이알고 있노 지금까지 고향 유래도 모르고 살았는데 아사달 고맙다.앞으로도 많은 정보 주길 바란다~~~안녕
아사달님 이름답게 박식하군요 . 고향소식 다시한번 되세기며 아사녀의 애절한사연 공감하며 이글올린 아사달 가정에 행복이 가득 하길 .
쉰이 넘도록 몰랐던 고향유래 알려줘서 고마워요. 좋은글 가끔 한번씩 옛생각 날때마다 낡은 앨범 들추듯 까페에 들러 친구들 소식 보고 갑니다.
아사녀를그리는아사달군 잘읽었고 자주들러서 조금씩 입력시킬련다.~~감동!.감동!.
***정말예쁜 비비안리.오드리햅번보다 더예쁜 상자.커크다글러스같은 하억이.같이 동감이구나+**해운대의싸나이만복.......*******
영태야 잘봐다 이거 내가 좀 퍼가야 갯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