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對馬島) 対馬(つしま). 한국식 이름은 한자 對馬島(つしまじま)를 그대로 읽어서 대마도. 우리말 "두 섬"이 변하여 쓰시마가 되었다는 설이 나돌지만, 대마도가 둘로 나누어진 것은 근대의 일이다.구체적으로는 "두섬"이 Tusŏm > Tushima > Tsushima ; ㄷ/ㅌ -> ㅊ/ㅊ/ㅆ 로 변한 건 구개음화로 해석한 것이다.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근거가 부족하다. 게다가 해동제국기에 나온 지도에서 보듯이 조선에서는 대마도를 ⊃형태로 이루어진 하나의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의 여러 섬들 중에서 면적으로 따지면 10위에 들고 대한민국의 섬들 사이에 넣어 비교해도 제주도 바로 다음 2위가 되는 작지 않은 섬이지만, 대부분이 해발고도 400 미터 이상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가용할 수 있는 토지가 많은 건 아니다.
쓰시마는 면적에 비해서 일본 내에서의 존재감은 높지 않은데, 어느 정도냐면 본토인에게 '쓰시마 출신입니다'라고 말하면 위치는 커녕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규슈나 야마구치 등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름은 알아도 위치는 모르는 경우가 태반. 심지어 면적으로는 훨씬 작은 이키보다도 존재감이 없다.여러모로 안습한 동네.
마을은 해안 지대를 둘러가며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다. 원래 하나의 큰 섬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1672년 오후나코시 운하, 1900년 만제키 운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며 3개의 섬으로 나뉘어졌다.
쓰시마는 아소 만과 만제키 운하로 섬이 양분되는 지형을 보이기 때문에, 크게 북쪽을 가미지마(上島), 남쪽을 시모지마(下島)로 부른다. 이즈하라, 미쓰시마, 도요타마, 미네, 가미아가타, 가미쓰시마 등 여섯 개의 정(町)이 있었는데 2004년 모두 합병하여 통합 쓰시마 시로 개편되었다. 여섯 개 정이 통합되었고, 지형이 복잡하기 때문에 좁은 시가지가 분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한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가는 곳은 부산국제터미널에서 직항편이 있는 이즈하라와 가미쓰시마의 히타카쓰이다. 그 외에 6개의 유인도를 포함해 100여개의 부속도서가 있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섬은 쓰시마섬이며 그 다음은 우니섬이다.
면적은 총 695.9㎢로 제주도의 1/3 정도이며, 거제도의 2배 정도이다. 인구는 약 3만 2500명. 참고로 저출산+젊은 층의 유출 크리로 1970년대 이래로 계속 감소중이다. 감소 속도는 연 평균 500명 정도로, 계산상으로는 100년 이내에 인구가 0…이 된다.
거리상으로는 후쿠오카와 더 가깝고 교통 등을 감안하면 실제 생활권도 후쿠오카에 더 가까운 편이지만 행정구역상
나가사키현 쓰시마 시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도 나가사키의 방송이 나온다 한반도와의 거리는 약 50km,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이키섬과의 거리는 약 60km, 일본 본토라고 볼 수 있는 큐슈와의 거리는 적어도 100km 이상으로 지리상 거리는 한반도와 더 가깝고 부산이나 거제도 등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 육안으로 확인 가능하다. 물론 반대로 쓰시마 섬에서도 부산이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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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해협 전역 | 부산-쓰시마 사이 | 쓰시마-규슈 사이 |
국제적 명칭 | Korea Strait (대한해협) |
Korea Strait Western Channel (대한해협 서수로) |
Tsushima Strait (쓰시마 해협) |
한국 | 대한해협 | 부산 해협 | 쓰시마 해협 |
북한 | 조선해협 | 부산 해협 | 쯔시마 해협 |
일본 | 쓰시마 해협 | 조선 해협 | 쓰시마 해협(이중 대부분이 현해탄) |
치고는 굉장히 평온하게 지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최근 있었던 제2차세계대전과 6.25에서도 무사하게
벗어난 편이니.. 라고 쓰면 한국 중심의 서술로 보일 수도 있는 게 원나라가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친 곳이 여기다. 쓰시마의 어휘 가운데 간고(ガンゴー)란 말이 있는데 간은 원나라를 뜻하고 고는 고마,
즉 고려를 뜻한다. 이는 옛날에 어린 아이가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 식으로 쓰던 말이다.
내지 않았다.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전란에 휘말리지 않고 평온하게 지낸 땅은 드물었다.
전국시대에 영주가 된 쓰시마 소씨가 메이지 시대까지 별 문제 없이 집권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7000여 리이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 1000여 리에 대마국(對馬國)에 이른다. 그 대관(大官)을 비구(卑拘)라고 하고 부관(副官)을 비노모리(卑奴母離)라고 한다. 이 나라는 홀로 있는 섬으로 사방 400여 리쯤 된다. 땅과 산이 험하고 못과 숲이 많다. 도로는 짐승과 사슴이 다니는 길과 같다. 1000여 호 정도가 있으나 좋은 밭은 없다. 해산물을 먹고 스스로 생활(自活)하고 있으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쌀을 사온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왕은 왜인이 대마도(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삼국사기 실성 마립간 조)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삼은게 노략질.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왜구의 선봉 역할을 했다. 왜구가 가장 들끓었던 시기는
여몽연합군이 대마도를 침공했었던 때 이후로 여몽연합군의 대마도 침공은 대마도의 농토를 초토화 시켰다. 그리고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고려 정부는 일방적으로 대마도에 대한 곡물 수출을 끊어 버렸다.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왜구가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자꾸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와 비슷한 느낌으로 사용되는 말.
그것도 3차례나. 1차는 고려말 1389년(창왕 2년), 2차는 조선개국 직후 1396년(태조 5년), 3차는 1419년(세종원년)의 토벌작전. 3차의 경우 간지(干支)를 따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 한다. 대마도 원정은 조선의 군사력을 보여주어 왜구의 재발을 방지하려는 것이 제 1 목적이었다.
하게 될 수 밖에 없고 이는 원이 고려를 이용해 일본을 공격한것과 같은 꼴이 되어 조선은 내정간섭을 받을 위험이
컸다. 따라서 명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기에 앞서 대마도를 공격한 것이다. 이를 통해 대마도에 잡혀 있는 중국인
포로를 명에 귀환시켜 명의 환심을 사는 한편 왜구에 대한 경계는 조선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350여명 사상이라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 비전투병력 모두 합쳐 2만에 달하는 전체적인 병력 규모로 보면
참패라고 하기는 어려운 피해지만 그 전까지는 줄곧 압도적인 승리만 거뒀기에 상당한 피해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상륙 후 줄곧 왜구를 상대하면서 승승장구하면서 방심했던 것,
그리고 줄곧 패배하던 대마도의 왜구는 사실상 정규군이나 다름 없었지만, 대마도주와 무사들이 개입하면서
태세를 재정비하고 지리에 익숙한 장점을 살려 방어전을 전개한 것에 패인을 찾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장기전이 될 수 밖에 없는데, 그 때는 태풍이 올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상자가 제법 발생한
상태에서 자칫하면 지원군,보급,퇴로가 전부 끊길 수가 있으니 퇴각한 것이다.
기습, 각종 물자와 함선을 약탈하고 귀환하는 것을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왜구들이 대마도에 도달하기 전에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군은 임무를 완수하고 이미 거제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런데 군사들이
지쳐있었고, 마침 태풍이 오는 듯한 날씨여서 신하들은 일단 군사를 재정비 할 것을 요청했다.
태종의 새로운 명령을 받은 사자가 거제에 도착했을 때 마침 군사들이 대마도로 출발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풍랑이 몰아쳐 전함이 일부 파손되고 유실되었으며 군사 일부가 사망했다.
전체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대마도주에게 회유책을 쓴 것이다.
“본조가 계하여 선지(宣旨)를 받들어 이르노니, 거기에 이르기를, ‘하늘이 이 백성을 내실 때에 기운으로 형체를이룩하고, 이치도 또한 품부하여 주었으니, 착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상서를 내리고, 불선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재앙을 내리나니, 옛적 제왕이 천도(天道)를 받들어 백성에게 곡식을 심고 거두는 것을 가르쳐서, 오곡을 길러서
그 몸을 기르는 것이다. 그 고유한 의리를 좇아 깨쳐서 인도하여, 그 마음을 착하게 하는 것이니, 만일 굳세게
버티어 굽히지 않고 사람을 재물로써 죽이고 짓밟아서 민망하게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작으면
형벌하여 죽이고, 크면 정벌하여 없애는 것이 요(堯)·순(舜)과 삼왕의 사람의 임금 노릇하는 법이 이와 같을 뿐이다.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 할수가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이러므로 왜인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며, 때로는 도적질로 나서서
평민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전곡(錢穀)을 약탈하고, 마음대로 고아와 과부, 사람들의 처자를 학살하며,
사람이 사는 집을 불사르니, 흉악 무도함이 여러 해가 되었으나,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신무(神武)하시므로, 하늘 뜻에 응하여, 혁명을 일으켜 비로소 집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창조하매,
저자와 전포도 변함이 없이 큰 기업(基業)이 정하였졌으니, 이것이 비록 탕임금과 무왕의 성덕이라 할지라도,
어찌 여기에서 더하겠는가. 국세가 크게 확장되고 병력이 뛰어나게 충실하니, 산과 바다를 뚫어서 통하게 할 수도 있고, 천지를 뒤흔들게 할 수도 있으니, 높고도 높으며 성하고도 성함이여, 대저 혈기있는 자 두려워서 굴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한 편장(褊將)을 명하여, 대마도의 작은 추한 놈들을 섬멸하게 하니, 마치 태산이 까마귀
알을 누르는 것과도 같고, 맹분(孟賁)·하육(夏育)같은 용사가 어린아이를 움키는 것과도 같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도리어 문덕을 펴고, 무위(武威)를 거두시고, 은혜와 신의와 사랑과 편안케 하는 도리를 보이시니,내가 대통을 이어 나라에 임한 이래로 능히 전왕의 뜻을 이어서, 더욱 백성을 측은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비록
조그마한 공손하지 못한 일이 간혹 있어도, 오히려 도도웅와의 아비 종정무(宗貞茂)의 의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한
것을 생각해서, 범하여도 교계(較計)하지 않았으며, 통신하는 사신을 접할 때마다 사관(使館)을 정하여 머물게 하고, 예조에 명하여 후하게 위로하고, 또 그 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이(利)를 꾀하는 상선(商船)의 교통도 허락하였으며, 경상도의 미곡을 대마도로 운수한 것이 해마다 대개 수만 석이 넘었으니, 그것으로 거의 그 몸을 길러 주림을 면하고
그 양심을 확충하여, 도적질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천지 사이에 삶을 같이할까 하였노라.
나의 용심(用心)함도 또한 부지런히 하였더니, 뜻밖에도 요사이 와서 배은 망덕하고 스스로 화근을 지으며, 망함을스스로 취하고 있으나, 그 평일에 귀화한 자와 이(利)를 얻으려고 무역하거나 통신 관계로 온 자와, 또 이제 우리의
위풍(威風)에 따라 항복한 자는 아울러 다 죽이지 아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고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어서
그 생활을 하게 한 것이며, 또 변방 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영솔하고 나아가서 그 섬을 포위하고 모두 휩쓸어와
항복하기를 기다렸더니, 지금까지도 그 섬 사람들은 오히려 이럴까 저럴까 하며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긴다.
섬 가운데 사람들은 수천에 불과하나, 그 생활을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섬 가운데 땅이 거의 다 돌산이고비옥한 토지는 없다. 농사하여 곡식과 나무를 가꾸어서 거두는 것으로 공(功)을 시험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틈만 있으면, 남몰래 도적질하거나, 남의 재물과 곡식을 훔치려 하는 것이 대개 그 평시에 저지른 죄악이며,
그 죄악이 벌써부터 가득차 있는지라, 어두운 곳에서는 천지와 산천의 신이 묵묵히 앙화를 내리고, 밝은 곳에서는
날랜 말과 큰 배며, 날카로운 병기와 날쌘 군사로써 수륙의 방비가 심히 엄하니, 어디가서 주륙(誅戮)의 환을
만나지 아니할 것인가.
다만 고기 잡고, 미역 따고 하여 매매하는 일은 이에 생활의 자료가 되는 바인데, 이제 와서는 이미 배은하고 의를버려 스스로 끊는 것이며, 내가 먼저 끊을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를 잃은 자는 기아를 면치 못할
것이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니, 이에 대하여 계책하기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만약 능히 번연(飜然)히 깨닫고 다 휩쓸어 와서 항복하면, 도도웅와는 좋은 벼슬을 줄 것이며, 두터운 녹도 나누어줄 것이요, 나머지 대관들은 평도전(平道全)의 예와 같이 할 것이며, 그 나머지 여러 군소(群小)들도 또한 다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서, 비옥한 땅에 살게 하고, 다 같이 갈고 심는 일을 얻게 하여, 우리 백성과 꼭 같이 보고 같이
사랑하게 하여, 도적이 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임과 의리를 지키는 것이 기쁜 일임을 다 알게 하여, 이것이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이며, 생활하여 갈 도리가 있게 되는 것이라,
이 계책에서 나가지 아니한다면, 차라리 무리를 다 휩쓸어서 이끌고 본국에 돌아가는것도 그 또한 옳을 일이어늘만일 본국에 돌아가지도 아니하고 우리에게 항복도 아니하고, 아직도 도적질할 마음만 품고 섬에 머물러 있으면
마땅히 병선을 크게 갖추어 군량을 많이 싣고 섬을 에워싸고 쳐서 오랜시일이 지나게 되면, 반드시 장차 스스로
다 죽게 될것이며, 또 만일 용사 10여 만명을 뽑아서 방방곡곡으로 들어가 치면,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 같이
오도가도 못하여, 반드시 어린이와 부녀자까지도 하나도 남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는 까마귀와 소리개의
밥이 되고, 물에서는 물고기와 자라의 배를 채우게 될 것이 의심 없으니, 아, 어찌 깊이 불쌍히 여길 바 아니겠는가,
이것은 화복의 소재가 소소하게 밝은 일이어서, 망매(茫昧)하여 분명치 못하거나궁구하여도 끝까지 모를 일이 아니다.
옛 사람의 말에, 「화와 복은 자기 스스로가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열 집만이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 한 사람은 있다.」 하였으니, 이제 대마도 한 섬 사람에도 역시 다 하늘에서 내린
윤리와 도덕의 성품이 있을 것이니, 어찌 시세(時勢)를 알고 의리에 통하여 깨닫는 사람이 없겠는가.
병조는 글을 대마도에 보내어, 나의 지극한 생각을 알려서, 그 자신(自新)할 길을 열어 멸망의 화를 면하게 하고,나의 생민(生民)을 사랑하는 뜻에 맞도록 하라.’ 하였다. 이제 선지(宣旨)로써 일의 마땅함을 자세히 알게 하노니,
오직 족하(足下)는 잘 생각하라.”
이를 들어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대놓고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적고 있지만, 일본인들이 말하듯이 조선의 참패
운운할 수준은 절대 아니었고, 주력함선과 병사들을 거의 보존한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조선이 원했던 왜구
소탕이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물질적 양보 하에 왜와 조선간의 평화적 교류가 활발해졌다. 당장 조선왕조 실록을 뒤져봐도, 세종실록 이후로는
성종때까지 왜구관련 기사가 씨가 마른다. 모두가 대마도 정벌의 효과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크게
영향을 끼쳤을 건 분명하다.
몇 차례고 토벌을 했지만 오스만 제국에서 은근히 밀어주는 통에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심지어 본거지였던
튀니스나 알제리 같은 곳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긴 했지만 오히려 비용만 막대하게 들 뿐, 약탈 자체는 계속되었다.
덕분에 모로코의 술탄 같은 경우 수십만의 유럽인 노예들을 거느리고 베르샤유 궁전 못지 않은 호화로운 궁전을
건립하며 오스만 제국 못지 않은 하렘을 거느렸다고 한다. 이 해적들이 겨우 토벌된 게
산업혁명기였던 19세기 초였다.
상당히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일수. 이와 비교하면 조선은 나름대로 왜구 소탕에 성공한 셈이었다.
어쨌거나 이 원정 이후에도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조선에서는 강경책 대신 회유책을 써서 무역을 허가했다. 대마도가 일본과 대마도, 조선과 대마도를 무역하면서 조일무역의 중개지가 되었고 그때문에 많은 대마도
인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는데, 외국인이 조선땅에 들어와서 사는걸 조선 정부가 곱게 볼리가
없었고, 이에 경상도 해안 인근에 삼포를 신설하여 무역량을 줄였다. 그러나 16세기까지 대마도는 조선의
목면과 곡물 등을 수입하고 은, 동, 물소 뿔, 후추등을 제공하면서 중개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곡물생산량이 1만 석 정도에 불과하던 쓰시마는 조선과의 무역(밀무역이 다수였지만)으로 수입을 2배
이상 뻥튀기할 수 있었다.
부산포, 내이포, 염포의 삼포에 사는 왜인들이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다(삼포왜란). 삼포왜란은
15일 만에 진압되었고 외교는 단절되었다. 이에 일본에서 직접 중개를 하여서 2년만에 관계를 회복하는데,
이것이 임신약조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무역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었고 이에 대마도인들은 다시 반발하는
구조가 반복되어 30차례 정도의 왜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비변사가 설치되기도 했다.
노력을 하기도 했다. 1590년에는 일본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대마도 영주가 선조에게 조총
몇 점을 진상하였다.그러나 이미 화포 무기를 지닌 조선은 총통에 비해 위력이 약한 조총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야 조총의 장점을 인식하게 된다. 임란 이전에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 통신사가 바로
황윤길과 김성일의 통신사다.
'명을 정벌하려 하니 길을 안내하라(征明嚮導)'였다. 대마도주가 택도없는 무례한 요구를 조선이 받아들일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다소 완화된 표현으로 조작했는데, 역시 조선의 반응은 ㅗ였지. 현대라면 전쟁특수라도
누렸겠지만 그딴 건 없고 뱃길안내를 위해 끌려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일도 비일비재. 거기다 식량부족으로
기아에 시달리면서 대마도는 임란동안 상당한 고생을 한다. 그래서인지 당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일본이 조
선을 완전히 점령할 경우 농사가 가능한 거제도
를 받기로 했다고 한다.조선의 반응은 당연히 '노'. 그렇지만 북방의 여진족이 흥하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쇄환해야 했기 때문에
국고 재개에 의지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츤데레
처럼 불구대천의 원수들이라 욕하면서도 '대마도만은허락해줄지도...?'라고 떡밥을 날리면서 대마도를 설레게했다. 대마도가 포로 일부를 석방하면서 징징대니까 조선은
일단 조선은 유정을 '탐적사(探賊使)'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파견하였고, 도쿠가와와 접견한다. 조선에서는 명의
조공책봉체제에 편입시키려고 쇼군의 칭호를 '국왕'으로 해야한다고 했고, 당시에는 국서를 먼저 보내는 쪽이
항복이나 지고들어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니들이 먼저 국서 보내렴 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은 당연히 거부하고
국고 재개하려면 니네가 먼저 국서 보내라라고 요구. 서로 기싸움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속타는건 대마도. 그래서
국서를 위조하게 된다.
누렸다. 특히 인삼은 일본인들의 수요가 매우 높아 1695년 일본이 수출용 은화의 은 함량을 80%에서 64%로 깎았을
때도 유일하게 80% 은을 줘가면서 사갔던 물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18세기 초반 인삼의 일본 내 국산화가 진행되고, 북아메리카산 백삼이 유입되면서 인삼 교역은 쇠퇴하고 중개 무역은 18세기 후반 경에 거의 단절된다. 하지만
교역이 단절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해삼
등 해산물이나 쇠가죽 등의 판매가 대마도를 경유해서 활발히 이루어졌다.조선은 반면에 꾸준히 은, 동 등 귀금속과 유황 등을 수입하는 경로로 대마도 무역을 이용했다.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간접 지배 형태를 직접 지배 형태로 전환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근거가 미약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 열도는 이 말을 듣고 불안해했으며 언론에서는
대마도의 위기라는 식으로 대서특필했다.
2014년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쓰시마의 영유권을 더 이상 주장하고 있지 않을 뿐,
공식적으로 쓰시마가 일본령 이라고 적극적으로 인정한 사례는 없다.
이에 대응하여 경남마산
(현 창원시)는 2005년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선포한다. 마산시가 앞장선 건 그곳에서기해동정의 우리 원정군이 출항했기 때문이요, 6월 19일이 작전개시 D-데이였던데 기인한다. 대마도의 날 제정
자체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이 항목에서 길게 설명했듯이 명확한
증거에 기반한 행동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덕분에 대마도 주민들이 한국인들을 곱게 보지 않게 되었다.
대마도 영유권 주장은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1949년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는 원래 우리나라 땅이다. 1870년 일본이 점령했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무조건 돌려줘야 한다"고 일본에 반환 요구를 했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치,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
"
대마도를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며 "국제사회가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주장은 어렵다)"고 설명했다.
대마도는 대략 사천의 사량도나 흑산도 가는 거리와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한국인들이 먹여살린다해도 과언이 아닌것같다.
오페라 하우스 비쥬얼인 부산 국제여객선 터미널
국제여객선 터미널 내부
쓰시마까지 날라다줄 쾌속선 오션 플라워호
요즘 워낙 여행사의 팩케지 상품이나 소셜커머스를 이용한 저렴한배편이 난무하다보니 이렇게 면세점만
당일치기로 오가며 이용하는 사람도 다수네요
오션플라워 내부그림
부산서 출발 1시간10분 걸려서 도착한 히타카츠항 조그마하고 아담한 시골 어촌의 모습이다.
오가며 출입수속에 시간이 더걸리네요
내년에 캠핑및쟌차 라이딩 그리고 카누체험차 재방문하여 이용할 쟌챠랜탈
대마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본 중대형차 모닝도 여기갖다놓으면 중형차에 속하는것같은 상황
대마도의 대표적인 출입항구인 이즈하라나 히타카츠 항인데 갈때는 히타카츠로 가서
올때는 이즈하라로 귀국했는데 두항구모두 조그마한 어촌에 다름없으나 조용하고 깨끗한건
확실합니다
미우다해수욕장의명물 커피 스낵밴
미우다 해수욕장
'일본의 해안, 100선'에 선정된 이 곳은 쓰시마에서는 보기드문 고운 입자의 천연 모래해변이며, 얕은 바다는 한여름 가족들이 물놀이하기에 적격인 곳이다. 에메랄드 그린의 바다는 남국의 정취조차 느끼게 하며, 운이 좋으면 이 멋진 해변을 혼자서 누릴 수도 있다. 샤워시설은 완비되어 있으며, 근처에 캠프장과 온천시설도 있다.
어쨋든 일본에 왔으니 우동한그릇 때려아죠~~~
콘피라.에비스신사
히타카츠 88개소 지장보살 순례길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산능선을 타고 약40분에걸쳐 지장보살상88곳을 소원을 빌며 돈다고하네요
히타카츠항구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88개소 지장보살 순례길'은, 일본 시코쿠에 있는 유명한 수행길 ‘88개소 순례길’의 축소판 코스다. 천천히 산길을 걸으며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 효과도 느끼고, 히타카츠항의 전망도 감상해 보자. 더불어 이 곳을 순례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순례길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은 스템프! 입국절차를 밟은 후 쓰시마관광물산협회에 가서 스템프지도를 받아, 지장보살 옆에 있는 스템프를 찍으면서 둘러보자. 단! 지장보살과 스템프가 순서대로 배치되지 않은 곳도 있으니 찍기 전에 번호 확인은 필수이다.
신사가 위치한 지대가 높아서 히타카츠항이 한눈에 조망됩니다
조선국역관사순난비
1703년 음력 2월 5일 아침, 부산항을 출항한 배 3척이 있었다. 정사 한천석, 부사 박세양을 비롯한 108명의 역관사(통역관) 일행이
탄 사선과 쓰시마번의 책임자 야마가와 사쿠자에몬이 방문을 위해 보내준 자신의 배와 예인선이었다. 출항 당시에는 날씨가 좋아
순풍을 타고 순조롭게 항해를 하고 있었으나 정오가 지난 후 기상이 급변하여 3척 모두 좌초되고 말았다. 사고가 나자 당시 쓰시마번과
마을 사람이 구조와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도착지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와니우라 앞바다에서
전원이 사망하는 비참한 해난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로부터 380여 년 뒤인 1991년 3월 20일 한일건립위원회가 이국의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역관사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조난 현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한국전망대 바로 옆)에 추모비를 세웠다고...
한국 전망대
쓰시마 최북단 와니우라의 한국전망대는 한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는 132km로 한국에 훨씬 더 가깝다. 날씨가 좋은 날은 부산시의 거리가 보이는 그야말로「국경의 섬」임을 실감케 하는 곳이다. 전망대 주변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으며 해안 단구의 높은 지형에 위치해 있어 멀리 작은 무인도들이 징검다리처럼 보인다. 눈앞에 보이는 바다는 조류가 빠르며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파도가 거칠어진다.
전망대 건축물은 한국의 건축양식으로 1997년에 세워진 것이다. 기와지붕의 팔각정 형태로 서울 파고다 공원에 있는 정자를 모델로 하였으며, 전망대로 진입하는 도로 입구에 세워진 문은 부산국제여객터미널의 것을 모델로 하였다. 설계단계에서부터 한국 학자에게 자문을 구하였으며 한국산 재료 구입 및 전문가 초빙 등 철저히 한국풍을 고집하였다.
해상자위대의 레이더기지 한국의 일부에서 이곳이 독도침공의 전진기지라 했으나
사실 방어개념의 국경선으로 자위대소규모의 항공및 해상자위대가 주둔하고있다.
에보시다케 전망대
쓰시마 내에서 유일하게 360°동서남북 사면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여기에서 보는 아소만은 몇 겹의 산과 바다 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과 리아스식 해안 등, 그 웅대한 모습을 자랑한다. 대한해협 너머로 한국의 산들도 볼 수 있다.
육지의 침강에 의해 생성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대한해협 쪽으로 열려져 있는 모양이다.
굴곡미는 쓰시마 자연경관의 백미이며, 수많은 무인도와 잔잔한 만곡 수면에 비친 섬들의 모습은 일본 최고로 일컬어질 정도의 절경이다. 바닷물은 너무나 맑고 깨끗하여 바닥까지 보인다. 고대로부터 조선과 중국 대륙으로 출항하는 배들은 아소만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계절풍이 강해지면 며칠간 순풍을 기다리며 배에 머물러야 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고대 시가집 만요슈(万葉集,630~760년대)에도 쓰시마의 지명이 들어간 시가 42수가 있으며 그 중 아소만을 읊은 시는 18수에 달한다.
에보시타케전망대(烏帽子岳展望所)와 가미자카전망대(上見坂公園)에서 아소만의 무수한 만곡을 천천히 조망할 수 있으며, 유람선과씨카약을 이용하면 아소만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와타즈미 신사
일본 헤이안( 平 安)시대(794~1185)의 율령 세칙을 적은『엔기시키( 延喜式 )』의「진묘쵸( 神名帳 )」에「 対馬国上県郡和多都美神社 」로 표기된 신사가 바로 이곳으로 아주 오랜 역사와 유서를 간직한 곳이다.천신( 天神 )인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尊)와 해신( 海神 )인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豊玉姬命)를 모신 해궁으로 이들에 얽힌 용궁 전설이 남겨져 있다.
먼 신화 시대에 해신인 도요타마히코노미코토(豊玉姬命)가 궁을 지어 와타즈미노미야(海宮)라 이름하였는데 어느날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가 잃어버린 낚시바늘을 찾기위해 이 궁으로 내려왔다가 도요타마히코노미코토의 딸 도요타마히메를 만나 결혼하였다고 전해진다.
본전 앞 갯벌에는 이소라에비스라는 이와쿠라(磐座, 신이 거처하는 장소, 주로 바위를 가리킨다)가 있고 신사 뒤편에는 도요타마히메의 분묘가 마련된 성지가 있다. 이곳이 신사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와쿠라로 추정된다. 도요타마히메는 진주를 신격화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바다의 대모신(大母神)에 해당한다. 이와쿠라가 바다와 육지의 경계인 갯벌에 위치에 있는 이유는 도요타마히메가 출산 후 아들을 갯벌에 놓아두고 해저 용궁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전 정면의 다섯 개의 도리이(鳥井)중 바다 위에 서 있는 두 개의 도리이는 만조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뀌어 잔잔한 아소만과 어우러져 신화의 세계를 연상케한다. 역사적으로 각 시대별 번주나 국가의 원수들이 숭상한 곳이며 쓰시마 도민은 물론 일본 전국 각지에서도 많은 참배객들이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