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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이자겸의 난 |
이자겸(李資謙)은 인주 이씨로 인주 이씨는 문종 때 이자연이 세 딸들을 후비로 보낸 이래 인종(仁宗, 1122~1146) 때까지 7대 80여 년 동안 외척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당시의 왕자나 왕녀도 거의 그들의 외손이었다. 인주 이씨 세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자겸이었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으로 무신 척준경과 결탁하여 어린 인종을 압박하고 나라의 모든 일을 관리하게 되었다. 나라의 모든 것을 장악한 이자겸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절을 인종과 같이 받는 등 가히 왕과 같은 권세를 누렸으며 더 나아가서 민간에서 떠도는 십팔자득국설을 믿고 스스로 왕이 될 것을 획책하였다.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이란 십팔자(十八子) 성씨 즉, 이(李)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도참설이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인종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그는 인종을 독살하기 위해 독약을 넣은 떡을 올리기도 하고 독이 든 약사발을 바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년이 된 인종은 우직한 무신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을 제압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이자겸은 영광 법성포로 유배되었다.
영광으로 유배된 이자겸은 영광 법성포의 특산물인 건조한 참조기 맛에 반해 이를 인종에게 진상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건조 참조기에 굴비(掘非)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식탁에 오르는 바로 그 굴비이다. 이자겸이 이 건조 조기에 굴비(掘非)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비록 귀양살이를 하고 있지만 절대로 굴복하거나 비굴하게 꺾이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후 이자겸은 영광으로 유배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문벌귀족들의 전성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쇠락을 부추기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인종 대의 묘청의 난이나 의종 대의 무신의 난은 이 이자겸의 난에서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한 사회변화에 대한 요구에서부터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이자겸이 인종에게 바친 굴비. 이때부터 법성포산 건조참조기는 굴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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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예로부터 미추홀이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고구려계 유민인 온조와 비류가 남하하여 온조는 위례에 나라를 세우고 비류는 이곳 미추홀을 기반으로 하여 나라를 세웠다고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한것입니다.
인천은 조운제도(세곡이나 물자를 하천을 통하여 배로 실어나르는 제도)가 발달한 조선시대부터 서울의 외항으로의 역할을 했습니다. 각지에서 거두어진 세곡미가 이곳 인천에 집결하여 한양을 운반되었습니다.그런데 현재의 인천항은 일제에의해 개발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성창포)만석부두라는 곳이 항구의 역할을 하였지요. 쌀이 만석이 쌓여있던 곳이어서 만석부두이입니다.
인천은 일제에의해 우리나라의 식민화하는데 발판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구한말 인천은 자못 어우러진 국제도시였습니다. 일본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 미국인, 독일인등이 복작대며 이권을 차지하려 다투었지요.
그러다가 일본과 청의 대결구도가 조성되었고 그 결과 인천의 자유공원(만국공원)주위에는 일본의 조계(租界)지와 청의 조계지가 생겨나게 됩니다. 조계지는 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치외법권을 누리며 자유로이 거주하며 통상을 할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입니다.
이로 인해 인천에는 독특한 경관이 나타나게 되지요. 우리나라의 풍경에 서구식풍경과 일본식풍경 그리고 중국식 풍경이 혼재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경관의 이중구조는 현재에도 뚜렷이 남아있어 흥미로운 풍경이 연출됩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역사적 진행과 그에 따른 경관은 자존심 상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이 경관을 잘 활용한다면 오히려 지역의 문화나 경제에 긍정적 역할로 전환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천시 당국은 그러한 긍정적인 방향 즉 관광쪽으로 이러한 역사적 자원을 정 비하여 발전시키는 중이랍니다.
그러면 인천의 재미있는 경관을 조금 살펴보기로 하지요.
일일제시대 인천항 모형 - 항구에는 쌀수탈을위한 창고들이 줄지어있고 이 모습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항구를 배경으로 자유공원(홍여문)아래 중앙동, 신포동, 선린동 등는 일제의 조계지였고, 북성동일대는 청나라의 조계지 였습니다.
구한말의 국제도시 인천 중심부 모습 - 일본식건물과 유럽식 고딕양식이 어우러져 있고 멋쟁이들이 길을 걷고있습니다. 이중 상당수의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지요.
역시 일제 강점기 시대 은행으로 쓰이던 건물입니다. - 서울시청을 허물고 광화문을 복원한 것도 잘한 일이지만 이 건물을 헐지 않은 것도 잘한 일인 듯 싶습니다. - 이 건물을 통하여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 건물은 어떤 용도로 사용하면 좋을 까요?
북성동일대의 청의 조계지는 차이나타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차이나 타운(인천역) 부근은 6.25를 전후해 우리 민족의 상처가 스며있기도 한곳이지요. - 오정희의 중국인의 거리라는 책을 보시면 재미있지요.
북성동에는 그 옛날 중국인의 집이 그대로 보존되어있습니다. 독립군이 나오는 드라마의 촬영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지요. 사진작가들에게 인기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공화춘 - 온국민의 추억의 먹거리 짜장면의 원조이지요.
인천을 대표하는 음식들! - 짜장면, 우무, 물텀벙이, 회, 우리만두...... 강추입니다.
다음에는 신, 시도에 관해 간략하게 소개 올리겠습니다.
색감을 짙게하는 요술같은 햇살과 더불어 행복한 가을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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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안녕하세요? 안남일입니다.
교수님 수업시간에 광주, 부산 비엔날레에 다녀오느라 뵙지 못했네요.
많이 아쉽습니다.
좋은 자료에 감사드리고 기회되는데로 꼭 뵙기를 원합니다.
저도 제가 속한 걷기동호회에서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인천 한나절 걷기 찾아 올리겠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인천 걷기코스 흥미롭군요. 자료 부탁드립니다. 맛있는 먹거리와 함께 ^^
인천에 이리도 심오한 역사가...^^
역시 지리샘이시라 지도가 예술인걸요..더불어 역사적인 지식까지...
감사...또 감사...담에 인천 갈때 함께 해주시면 더 좋을 듯한데...어떠하신지요?^^*
교수님..
다양한 정보... 감사합니다.
인천.. 다시 한번 찾아 보고 싶네요..ㅎㅎ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천 살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역사를 모르고 있었다니 부끄럽습니다.
자료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