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의병활동은 악랄한 일제 침략을 완전히 격퇴시키지 못하고 망국(亡國)을 당하고 말았지만 일본제국주의의 군경과 그들의 앞잡이인 토왜(土倭)들에게 심한 타격을 가하였다. 그로 인해 일제의 침략정책에 상당한 차질을 초래하게 했으며 우리나라의 민족․민주 운동의 역량축적에 상승작용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말의병은 한국을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확보하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서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는 정의감과 충성심의 응집으로 생명과 재산을 바치면서 강인한 투쟁을 전개했다. 일제침략자들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을 독점하려했는데 러시아가 중심이 되어 삼국간섭을 해오자 발악적으로 민비(閔妃)를 시해하고 친일내각을 등장시켜 단발령을 실시하게 했다. 그후 국제적으로 따가운 눈총을 받자 일제침략자들은 침략의도를 은폐하는데 주력하다가 1904년 2월에는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노골적인 침략을 자행하여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을강요하여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려 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자 일제침략자들은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이어서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정미7조약을 맺어 통감의 통치권을 확보하고 일본인을 차관으로 임명하겨 한국의 내정을 지배했다. 그리고 군대를 해산하여 침략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여 한국은 명목상으로 존재할 뿐 실제적으로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의병활동은 나라를 구하려는 충성심과 노예적 삶을 거부하고 정정당당히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정의감에서 분연히 일어선 것이고 자신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생각하는 거룩한 헌신이었던 것이다. 한말의 의병활동은 3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그중 의병활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가장 적극적이고 일제 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준 것은 3차의병이었다. 3차의병은 군대해산이후에 해산 군인들의 의병대열 참여와 의병 지도층의 다양화로 의병의 양적 질적 변화를 가져와 의병전쟁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의병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은 호남지방이었다. 그러므로 일제침략자들은 3차의벼의 중핵인 호남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발악적이고 본격적인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한 후 한일합병을 서두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의병활동은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주창했던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호남지방에서 발발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임진왜란 중 호남인이 주역을 담당하여 이 나라를 소생시켜 이순신이 ‘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역설했던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신은 일제시대의 항일 독립투쟁이나 해방 이후의 분단극복활동 그리고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던 호남인의 역할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을사조약에 반항하여 1906년에 재기하기 시작한 후기의병은 1907년 7월 군대해산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양상을 보면 1908년에는 의병의 교전횟수로 전국의 25% , 참전의병수로 전국의 24.7%를 차지했던 호남의병이 1909년에는 교전횟수로 전국의 47.6%를, 참전의병수로 전국의 60.1%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연구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계를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의 연구가 주로 진행되었으며 그 지도층은 위정척사파의 유생들이 주도하였고 지역적으로는 중부지방이나 영남지방이 중심이 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때늦은 감은 있으나 근간에 호남의병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 한말의병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런데 한말의 의병항쟁은 야만적이고 노골적인 일제의 침략에 거의 맨몸으로 싸워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 했다는 점에서 오로지 충성심과 정의감이 뒷받침 되었던 것이다. 또한 한말의 의병은 일시적이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깊은 뿌리와 전통을 가지고 이어져 온 것이며 가깝게는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정신의 계승, 발전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한말의병의 중심이 호남의병이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말의 호남의병의 전개과정을 대체적으로 살피고 한국사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구명할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는 어떤 편견과 시각의 차에서 오는 독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이제까지의 연구성과를 참고로 하여 가능한 한 오류를 줄이도록 하겠다. 여기에 관심이 깊은 선학들과 동학들의 많은 질정을 바란다.
2. 호남의병의 활동
1) 전기의병(前期義兵)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항한 전기의병은 위정척사사상이 그 근본 이념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를 주도한 지배층은 화이관(華夷觀)이 투철한 유학자들이었고 그들의 문하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한말의 위정척사사상은 노사(蘆沙) 기정진(寄正鎭)과 화서 이항로가 먼저 주창하여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63년의 강화도 조약체결시 그리고 1881년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반항하여 유생들이 앞을 다투어 상소하고 저항하였다. 위정척사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전기의병에서 호남의병이 다른 지역보다 봉기가 늦어진 것은 동학농민혁명의 상처가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이 나라를 구했고 동학농민혁명에서도 구국항왜의 뜻을 앞장서서 표출하는 호남인들이 일본의 만행과 단발령을 당하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호남의병은 노사 기정진의 친손이요 문하인 송사 기우만을 주축으로 하여 그의 친족인 성제(省齊) 기삼연(奇參衍)과 창평출신인 녹천(鹿泉) 고광순(高光洵) 등이 중심이 되었다. 기우만은 장성인으로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자 그해 12월에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내 모후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지 않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것이며 계속하여 군주를 협박하는 데도 내신(內臣)들은 여기에 대항하여 죽는 자 없고 외신들은 거짓된 왕명을 빌어 머리를 자르도록 독촉하니 이러고도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느냐 이 이상 더 왜적의 횡포와 군주의 위협 강제하는 무리들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모두 모여 상소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상소하여 복수토적하고 체령(剃令 : 단발령)을 중지하여 옛날의 법장으로 돌아가자고 역설하였다. 그런데 建陽 元年(1896) 1월 20일부터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기세를 떨쳤고 2월에 들어서는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이곳에도 전달되어 의거의 기운이 무르익어갔다. 이때 기우만은 인근 각 고을에 격문을 돌리고 궐기를 호소하였는데 그 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仇賊의 島夷가 豺狼이 되었고 奸凶을 鷹犬으로 만들어 그들이 國母를 시해하고 임금을 협박하여 못하는 일이 없어 綱常이 끊어졌다. 옷을 바꾸고 머리를 깎아 거리낌이 없이 오랑캐가 되었으나 안으로는 이것을 막을 庭臣이 없고 밖으로는 矯制를 받들어 削髮을 독려하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느냐 至尊께서는 피난을 하였으니 逆黨이 망명했다 하지만 그 뿌리를 제거하지 못했다…….
기우만은 이 격문에서 아관파천해 있는 임금을 궁중으로 모셔오고 친일파와 왜적을 토벌하여 복수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병을 주군별(州郡別)로 모아 대오(隊伍)를 구성하여 유사(儒士)와 향리(鄕吏)가 주심이 되어 모으면 내외가 상응하여 모두 어긋남이 없이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행동강령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송사는 노사의 친손이며 가장 촉망받는 문인이었고 그 자신의 문하만도 998명이나 되어 당시의 유림들에게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이 격문을 받고 각지에서 호응의 기세가 보이자 기우만은 2월에 장성부의 향교에 들어가 의사들을 소모하고 규정을 정하며 방책을 세우니 얼마 후 모인 자가 매우 많아 의기충천하여 이곳에서 별읍리교(別邑吏校)와 경영(京營) 및 완영병(完營兵)에 유시(諭示)했다. 그런데 나주 관찰부의 참서관 안종수(安宗洙)가 불법횡포하고 단발령에 앞장서자 이교(吏校)들이 함께 일어나서 잡아죽여 대중의 감정을 풀었으나 불안해하는 것을 알고 기우만은 글로써 안종수의 10가지 죄를 열거하여 주살함의 정당성을 밝히고 사람들을 위무했다. 나주인들은 흉괴가 비록 제거되었으나 본주의 거의는 끝맺을 수 없다하여 주서(注書) 이학상(李鶴相)을 맞아 장수로 삼고 각군이 같이 거사하기를 통고하였다.
기우만은 기삼연, 고광순, 김익중, 이승학, 기주현, 고기주 등의 의사들과 함께 호남의병 200여명을 거느리고 나주로 갔다. 그곳에서 기우만은 여러 장졸들이 환영하니 단에 올라 대중에게 맹세하고 대중의 추대를 받아 호남대의소장(湖南大義所將)이 되었다. 송사 기우만과 의병들은 임진왜란때 나주출신의 의병장인 김천일사당 및 금성산에 제사드려 신의 도움을 빌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한 기우만은 상소하여 거의함을 임금에게 알렸고 또한 열읍(列邑)에 통유하여 2월 30일에 모두 광주에 모이기로 연락한 후에 광주로 향했다. 광주는 전남의 중심지여서 일을 시작하기 적합하고 지리적으로 좋은 곳이어서 향교에 본부를 정하여 의사들을 모아 일을 추진했다.
기우만을 중심으로 한 호남의병은 기삼연을 선봉장으로 하고 그가 거느린 장성의병 300여명이 주축이 되어 기세를 떨쳤으며 해남군수 정석진(鄭錫振)과 담양군수 민종렬(閔鐘烈)이 호응하여 전남지방 13고을을 휩쓸었다. 그런데 친위대 중대장 이겸제(李謙濟)는 진주(晋州)의병을 진압하고 전라도에 돌아와서 의병에 가담한 해남군수 정석진을 잡아죽이고 담양군수 민종렬을 체포하여 기세를 떨쳤다. 황현(黃玹)은 기우만이 광주에 주둔했으나 해남군수 정석진이 피살되자 두려워서 의병을 해산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친위대의 위세에 의병이 매우 위축되었던 것 같다.
친위대의 공격이 임박하여 사기가 저상한 데다가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지방을 순회하던 신기선(申箕善)이 전주에 도착하여 지방관원을 보내어 선유하고 기우만에게 은근히 해산하기를 권하여 의병의 인심은 풀어졌다. 이에 기우만 의병장은 여러사람을 모아놓고 의논하다가 목메인 소리로 지금 세력을 잡은 무리들의 마음이 음험하고 불측하니 정말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적을 토벌한다는 것이 도리어 우리 임금의 해를 재촉하는 일이 되기에 알맞은 일 인즉 자수하여 우리들의 의리나 밝혀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통곡하고 해산령을 내리고 말았다. 이때 선봉장 기삼연만은 이러한 해산 논의에 분노하여 선비들과는 일을 같이 할 수 없다. 장수(將帥)가 밖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령이라도 받지 않을 일이 있는 것인데 더구나 위협하여 강제하는 것이요 우리 임금의 본심에서가 아님에랴 이 군사를 한번 해산하면 우리들이 다 생포를 당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장성의병이 주축이 된 전기의 호남의병은 해산을 했고 대장 기우만은 입산하여 백립(白笠)을 쓰고 소복(素服)을 입어 상중(喪中)에 있는 것처럼 살았다.
국모시해의 원수와 부모가 주신 머리털을 자른다는 불효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전기 의병 중에서 호남의병이 차지하는 위치는 자못 큰 것이다. 그것은 장성에서 시작하여 광주를 거점으로 하였고 전남지역 13개 고을을 휩쓸었으며 이로 인해 나주 관찰사는 도망쳤고 참서관 안종수와 군수 총순 1명씩이 살해되었다. 또한 호남의병을 포함한 전기 의병이 전국적으로 미친 성과는 대단했다.
첫째 의병진압을 위해 서울의 친위대가 동원되어 그 틈을 이용해서 아관파천이 용이했고 둘째 아관파천으로 단발령이 강요되지 않았다. 끝으로 많은 관리들이 피해를 입었고 일인들이 많이 피살되어 국민의 울분을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었으며 친일분자들에 대한 응징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기 의병으로 인해 관찰사의 피살이 3건 관찰사의 피수봉욕(被囚逢辱)이 4건, 참서관의 피살이 2건, 지방군수의 피살이 11건, 일본인의 피살이 41건이나 되었다.
2) 2차의병(二次義兵)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였던 호남지방은 혁명으로 인해 수 많은 인명과 재산이 상실되어 폐허의 땅이 되어버렸고 생존자들 마져도 좌절과 허탈에 빠져 1차 의병인 전기의병은 다른 지방보다늦게 일어났다가 왕의 선유를 받아 해산했음을 이에 살폈다. 그런데 의병대열의 전국적인 현상으로 유생의병장들은 의병을 해산하고 귀향했지만 의병의 대부분을 이루었던 민중들의 향방은 일정치 못했다. 농지를 가진 농민은 본업으로 되돌아 갔지만 유랑농민이나 화적 그리고 동학여당들은 안주할 생업이 없었다. 여기서 동학농민군과 의병 그리고 화적이나 영학당(英學黨), 서학당(西學黨), 남학당(南學黨) 등의 이름으로 민족적 계급적 요구의 실현을 지향한 민중들의 상호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당시의 기록들에서 동학농민군과 의병 그리고 화적들의 칭호가 서로 혼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실제로 그들이 명칭을 바꾸면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京師金姓女 受嚴貴妃旨 祈醮于金海地 火賊馬中軍所掠 馬湖西人甲午投東匪 丙申投義兵 亡命嘯聚
위에서 화적인 마중군(馬中軍)은 갑오년에는 동학농민군이었다가 전기의병 때인 병신년에는 의병으로 활약했고, 1899년에는 화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황현은 의병의 반수는 동학농민군이었다고 지적했고 이어서 의병들이 토비(土匪)로 바뀌어 경보(警報)가 끊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학농민군으로 혁명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일부는 1896년의 전기의병에 참여했다가 의병이 해산된 후 동비(東匪) 화적 서학당 영학당, 남학당 등으로 활동했다. 그후 이들은 1900년부터 1905년까지는 남한일대에서 마중군 맹감역(孟監役) 등의 조직을 가진 활빈당(活貧黨)으로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상황변화의 추이를 주시하여 왔던 것이다.
한편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이등칙사(伊藤勅使)의 진두지휘하에 임(林) 공사와 장곡천(長谷川) 주한일본군사령관의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받아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일제의 악랄한 침략정책에 희생의 제물이 된 한국인은 망국이나 다름 없는 을사조약에 반항하여 민족정기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상소활동 순국항쟁, 언론에 의한 규탄, 밀사를 통한 구국활동, 매국노의 암살활동, 국채보상운동 등의 전개를 통해 을사조약의 폐기와 일제침략의 저지 그리고 친일파의 처단을 주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애국활동보다도 더욱 격렬하고 적극적이었으며 일제의 침략을 지연시켰던 것은 침략자와 그들의 앞잡이인 토왜(土倭)들을 무력으로 응징하려는 의병항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전기의병때와는 달리 호남지역은 후기의병의 중심지였고 다른 지역의 의병항쟁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발화점은 최익현(崔益鉉) 임병찬(林炳瓚) 등의 병오의병(丙午義兵)이었다. 면암 최익현은 위정척사파의 주도자였던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로 일찍이 대원군(大院君)을 탄핵하여 하야하게 했고 1876년에 강화조 조약이 강제로 체결될 때 오불가소(五不可疏)를 올리고 지부복합(持斧伏閤)하여 당시의 유림들로부터 명망과 기대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최익현은 그를 따르는 호남의 유생들을 위해 1905년에 익산군 임피면에서 강학과 논문을 한 일이 있었고 보성의 이백래(李白來), 백경인(白景寅) 등 뜻 있는 선비들은 그를 찾아 나라를 걱정하고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최익현은 을사조약의 늑결을 보고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창의의 당위성을 밝히고 팔도의 명유(名儒)들에게 글을 보내 창의구국을 역설했으며 전국의 동문 제자들을 동원하여 거의를 준비했다. 특히 최익현은 정의를 사랑하고 충성심이 강하여 국난을 당할때는 분연히 떨쳐 일어섰던 호남인의 기상을 높이 사서 호남지방을 거점으로 삼아 의병투쟁을 전개하려고 계획했다.
최익현은 1906년 음 1월 흥덕에 살면서 스승에게 임병찬과 제휴를 권했던 제자 고석진(高石鎭)을 시켜 군수를 역임했고 재력과 지도력을 겸비한 태인의 임병찬과 접촉하여 의사를 타진하게 했다. 그리고 이어서 2월 9일에는 진안(鎭安)에 사는 제자 최제학(崔濟學)이 면암의 서신을 가지고 임병찬을 찾아 구체적인 의병거사를 협의했다. 또한 최익현은 거의와 동시에 기일본정부서(寄日本政府書)를 발표하여 일본의 죄상 16가지를 열거공박하여 그의 명성을 드높였고 항일의식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분명히 했다. 면암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은 유생 및 포수들과 함께 드디어 윤 4월 13일에 태인의 무성서원9武城書院)에서 강회를 통해 의병을 일으키니 흥덕의 고용진(高龍鎭 : 고석진의 형)은 강종희등 포수 30여명을 거느리고 참여했다.
한편 최익현, 임병찬 의병대는 창의격문을 8도에 보내 사(士), 민(民)이 합력하여 일제침략자를 토벌하자고 강조했다. 그후 4월 15일 정읍(井邑)을 점령하여 무기와 세금을 접수하고 16일에는 순창(淳昌)을 점령했는데 양윤숙(梁允淑), 채영찬(蔡永贊) 등이 수십명의 포수를 인솔하고 참여하여 의병의 수는 500여명으로 증가했다. 또한 8일에는 곡성(谷城)으로 진군하여 무기와 지세(地稅)를 접수하고 호남 각 고을에 다시 글을 보내 함께 협력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당부했다. 그후 최익현, 임병찬의 호남의병은 순창에서 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12일에 최익현, 임병찬 등 13명이 체포되어 막을 내렸지만 2차의 호남의병은 호남지방은 물론 전국에 크게 그 여파를 남겼다.
한편 전주사(前主事)로 광양(光陽)에 은거중이던 백낙구의 거병과 전기의병의 총수인 기우만의 움직임 그리고 고광순의 거병이 있었으며 그 후 호남지방 전역으로 확산되어 노령(蘆嶺)을 끼고 있는 전남의 서북지역과 지리산이 걸쳐 있는 전남의 동남지역에서 활발한 의병활동을 보였다.
3) 3차의병(三次義兵)
1907년 군대해산 이후로 시작되는 3차 의병은 최익현 임병찬의 호남의병의 여파로 시작되었으니 우선 노령을 끼고 있는 장성을 중심으로 영광, 담양, 순창, 함평, 광주 등지를 무대로 한 전남 서북지역의 의병활동을 살펴 보겠다. 전기의병의 진원지였던 “장성은 낡은 사상을 가진 선비 등이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운 자를 규합하여 최(崔)의 주장에 따르기로 하여 무예연습을 한다거나” 지리적으로 노령을 끼고 있는 전남북의 요충이기 때문에 의병활동의 중심무대로 장성이 이용되었다. 이곳을 근거로 활동한 의병은 前 평해군수(平海郡守) 강재천(姜在天)과 그의 휘하에서 활동한 장성인 기우일(奇宇一)이 있고 1차 의병을 주도했던 기우만과 그 선봉장이었던 기삼연이 심상치 않은 활동을 하여 관헌의 감시를 받거나 체포되기도 했다.
기삼연은 1907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영광인 김용구(金容球)와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여 동지들을 규합했다. 여기에 동학농민군으로 활약했던 김준(金泰元)이 가세하여 드디어 1907년 9월 24일에 장성 삼계의 수연(秀緣)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통령에 김용구, 선봉장에 김준, 종군에 이철형, 참모에 김엽중, 김봉수, 기감(器監)에 이영화, 종사(從事)에 김익중, 전해산․이석용․김치곤․박영건․정원집․박도경, 호군장에 이기창, 좌포장에 고동진을 정했다. 이들은 무장을 점령하고 고창을 습격했으며 법성포를 점령했고 영광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대장 기삼연은 담양의 추월산 전투에서 격전을 치루다가 부상을 당해 통령 김용구가 지휘권을 받았고 이들은 소부대로 나누어 게릴라 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특히 선봉장 김준은 창평의 무동촌에서 큰 공을 세웠고 동생 김율과 같이 가장 뛰어난 전과들을 올렸다. 그런데 기삼연을 대신했던 김용구가 무장에서 기습을 당해 부상당하자 포대(砲大) 박도경(朴道景)이 한미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호남창의회맹소의 명목상의 지휘권을 인수받았다.
그런데 김준형제가 전사하자 그 뒤를 이은 전해산(全海山)은 실질적으로 호남창의회맹소를 지휘하여 장성을 중심으로 함평, 영광, 고창, 담양, 광주 등지를 휩쓸면서 500명까지의 의병을 거느리고 활동했는데 독립부대인 조경환(曺敬煥), 심남일 그리고 박도경 등과 가끔 연합전선을 펴기도 했다. 그리고 장성출신으로 1000여명에 총 200정을 가진 김영백(金永伯) 의병장과 광주출신의 양진녀(梁鎭汝), 양상기(梁相基) 부자의병대(父子義兵隊), 김동수(金東洙)의병장, 김원국(金元局), 강사문(姜士文), 이기손(李起巽) 의병장과 영광출신의 이대국(李大局), 박경욱(朴京旭) 등이 전남북의 경계지방과 전남의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광주와 그 인근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했다.
한편 전남의 동남부 즉 지리산과 그 지맥을 이용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한 의병활동에 있어서도 면암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의 영향이 컸던 것이다. 이 지역은 최익현, 임병찬의병이 스쳐갔고 의병봉기 전에 곡성에서 준비차 회합을 가졌으며 동참을 권유하는 글을 순천, 낙안, 흥양, 여수, 돌산, 광양, 장흥, 보성, 강진, 해남, 완도에 보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최익현, 임병찬 의병이 좌절된 직후 광양에 은거중인 전주사 백낙구가 이항선, 노원집 등과 같이 일어나 순천읍을 기습한 일이 있다. 그리고 창평출신의 고광순이 기병하여 남원의 양한규(梁漢圭)와 남원을 점령한일이 있는데 고광순은 화순, 구례, 광양, 순천을 무대로 활약하다가 파병했다. 그후 1907년 8월에 고광순이 다시 창평에서 재기하여 연곡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니 구례, 광양, 곡성등 인근에서 가세하여 그 수가 1000여명에 이르렀는데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수 의병대는 분산되었다.
또한 이 지역에서 의병활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호남창의소와 안규홍(安圭洪)의병대를 들 수 있는데 우선 양회일과 이백래가 이끌었던 호남 창의소의 의병활동을 살펴보겠다. 그런데 호남창의소는 1907년 3월 능주의 쌍봉사 부근에서 일으킨 양회일을 맹주로 하는 의병활동과 1908년 이후의 이백래가 도대장(都大將)으로 활약한 의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양회일은 능주 오류천(현 화순군 이양면) 출신으로 나라가 기울자 녹천 고광순, 성재 기삼연과 의병봉기를 논의하여 각각 근거지에서 일어나 원수를 갚자고 다짐했다. 양회일은 임창모, 이백래, 안찬재, 유태경, 신태환, 정세현 등과 같이 여러 차례 의논하여 1907년 음 3월 9일에 쌍봉(桂棠山)을 본거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조직을 갖추고 서고군중문(誓告軍中文)을 발표하여 의병봉기의 당위성과 의병의 행동방향을 분명히 했다. 양회일이 주도한 의병대는 3월 9일 능주를 공격하여 군아와 왜헌병분견소 및 세무서를 습격하고 양총 5정과 군도 3자루 총탄 700여발을 노획하고 건물과 왜인의 집을 소각했다. 이어서 3월 10일 화순군아와 분견소를 습격하여 무기와 총탄을 노획했으며 이튿날 동복군아와 왜분견소를 습격하다가 불리하여 광주쪽으로 행하다가 도마치에서 대장 정세현이 죽고 양회일, 임창모, 이백래, 안찬재, 유태경, 신태환 등 6명이 체포됨으로 3일만에 끝나고 말았다.
1908년 이후의 호남창의소를 주도한 이백래는 유배에서 풀려나 광주에 들려 군자금과 군수품을 마련하여 능주로 돌아와 흩어진 의병을 규합하고 새로 의병을 모집하여 대오를 정비하고 훈련에 열중하여1907년 12월 21일에 조직을 갖추고 의병을 일으켰다. 호남창의소는 이백래를 도대장으로 하고 양회일, 심남일, 전수용 등을 망라하여 의병진을 갖추었다고 임장록(任將錄)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이백래 휘하에서 같이 활동한 것 같지 않고 세의 웅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당시의 의병장들을 모두 포함시켜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임전일록의 임장록에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유생이나 관료출신 보다는 농민층이 대부분이고 특히 동학당이나 영학당 출신들이 부서의 책임을 맡아 중요임무를 수행했음을 볼 수 있으며 의료진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백래 의병대는 1908년 음력 1월 8일과 10일에 장흥경찰서를 습격하거나 장평에서 잠복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총과 탄약을 획득했다 한다. 그 후 이백래의 호남창의소는 1월 11일에 효과적인 의병항쟁을 전개하기 위해 호남전역을 6로(路)로 나누어 지역별로 분담 관할하게 하고 무기와 자금을 나누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직할부대인 제 5로가 호남창의소의 중심부대였고 주활동부대였던 것 같다. 이백래의 호남창의소는 1909년 1월에 왜적에게 글을 보내 “너희가 우리를 없애려 하지만 그것은 너희 나라가 폐허가 된 다음일 것이다”하여 왜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분명히 했다. 그리고 이백래의병대는 같은 고장 출신인 안규홍의병과 연합작전을 펴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 같다. 그런데 이백래 중심의 호남창의소 의병대는 오랜동안의 투쟁과 일제침략군의 토벌작전으로 점점 쇠약해져 군자를 보충하기위해 자택에 들렸다가 밀고되어 장흥 배산헌병대의 습격을 받아 1909년 5월 17일에 체포되었다가 20일에 순국했다.
그러므로 1907년 3월 9일 쌍봉(계당산)에서 일으킨 호남창의소 의병은 호군장(犒軍將)인 임노복(林魯福 : 참봉)의 집을 중심으로 한 증동(甑洞)을 본거지로 하여 주변에 무기제작소인 대장간 탄약의 재료인 유황을 저장한 유황굴, 그리고 의병들을 지켜주던 의병성과 의병의 거처인 막사가 있었을 정도로 규모를 갖추고 1909년 5월까지 전남의 동․남지역을 무대로 활동했다. 다음으로 보성출신이며 담살이(고용인)의병장으로 유명한 안규홍의병의 활동을 보겠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공부를 할 수 없어 머슴노릇을 했다. 그런데 나라가 점점 멸망으로 치닫는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했으나 무식하고 물망이 없어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강원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보성근처에서 활약하고 있던 강성인( 일명 姜士文)의 휘하로 들어갔다가 강이 횡포하여 백성을 괴롭히자 그를 죽이고 의병장이 되었다. 안규홍은 1908년 2월에 염재보, 손덕호, 임창모, 이관희 등과 같이 의병진영을 정하여 파청(坡靑) 전투와 대원사(大元寺) 전투, 동복 운월치(雲月峙) 중심의 전투 그리고 진산(眞山)전투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파청전투와 대원사전투는 일본헌병과 일본순사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혀 안규홍 의병대의 명성을 높이는데 큰 작용을 했다.
안규홍의병은 보성, 승주, 고흥, 화순, 창평을 중심으로 전남의 동남지방에서 많은 전과를 올려 당시의 왜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밖에도 안규홍의병은 보성, 화순, 곡성, 순천, 광양, 구례, 고흥, 장흥 등지에서 일본군경의 살해 및 일진회원, 세리(稅吏), 관원(官員) 그리고 악질부호의 살상을 통해 일제침략자와 그들의 앞잡이를 응징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이 전개되어 의병을 지탱할 수 없어 해산하고 은신하던 중 체포되었다. 또한 전남의 동남지역에서는 함평출신의 심남일의병대와 보성출신의 임창모의병대 그리고 구례출신의 유병기(柳秉淇)의병대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심남일은 안규홍, 전해산, 조경환의병대와 연합전선을 펴면서 활동했다. 그리고 임창모는 호남창의소의 마지막 의병장이었으며 안규홍의병대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는데 안규홍의병이 해산하자 독자적으로 항쟁을 전개하다가 아들 임학규와 같이 전사했다.
이와 같이 전남의병이 끝까지 극성을 보이자 일제침략자들은 그들의 침략을 마무리하는 한일합방을 서두르기 위해 전남지방의 의병을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개된 남한대토벌작전은 대구에 있는 한국임시파견대사령관 도변(渡邊)소장에 의해 주도되었다. 보병 2개연대와 해군 수뢰정대 그리고 현지의 헌병과 경찰력이 총동원되어 약 2개월간 전남일대와 인접 전북지역을 휩쓰는 작전으로 전지역을 포위 수색 토벌, 검거를 통해 103명의 의병장이 피살 또는 체포되고 2000여명의 의병이 체포된 전쟁으로 황현은 그의 매천야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이 길을 나누어 호남의병을 수색하니 위로는 진산, 금산, 김제, 만경으로부터 동으로 진주, 하동, 남은 목포로부터 사방을 포위한 것이 그물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순찰병을 파견하여 촌락을 수색하여 집집마다 모조리 조사하여 조금만 의심해도 문득 죽이니 이에 행인들은 자연적으로 끊어지고 이웃 마을과 왕래하지 못하니 의병들은 셋, 다섯 도망하여 사방에 흩어지며 가히 은신처가 없게 되었다. 강한 자는 적진에 돌진하여 싸우다 죽고 약한 자는 꾸물거리다 칼을 받았으며 점차 쫓겨 강진, 해남 땅에 이르러 갈 곳을 다하니 죽는 자가 무려 수천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남한대토벌작전을 전후해서 수 많은 전남출신의병들이 살해되고 포로가 되었으며 그 중의 일부는 재판에 회부되어 형을 받게 되었다.
3. 호남의병의 역사적 의미
먼저 한말의 구국항쟁을 주도한 호남의병은 호남인의 정의감과 충성심의 표출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의병이란 정의의 군 또는 의용군 혹은 국민군으로 “국가가 위급할 때 의로써 일어나 조정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적과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정의롭고 충성스러운 일을 주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호남인이었던 것이니 그것은 일조일석에 조성되거나 우연하게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기후가 따뜻하고 산천이 수려해서 그곳에 살아온 호남인들은 온화하고 섬세하며 다정한 인정을 지녀 왔다. 호남인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로 정권의 주류가 아닌 비판세력으로 건재하였다. 특히 고려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주장하여 고려왕실에 충절을 지켜온 사람들이 호남땅에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니 두문동(杜門洞)의 현인(賢人) 범세동(范世東)과 정지(鄭地)장군 등이 은둔한 땅이었다. 그리고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눌재(訥齋) 박상(朴祥)은 정지장군의 손서로 비록 기묘명현(己卯名賢)은 아니지만 그들과 정신적으로 가깝게 지냈고 그들을 후원하였으며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담양인 유옥(柳沃)과 함께 반정공신들에게 폐비되어 축출된 중종의 왕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다. 눌재 박상은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제봉 고경명의 선배로 소쇄원과 식영정을 중심으로 송강 정철로 연결되어 석천 임억령과 함께 절의를 중시하는 호남가단(湖南歌壇)을 이루기도 하였다.
또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복재(服齋) 기준(奇遵)이 화를 당하자 그 형제들인 기원(奇遠)과 기진(奇進)이 장성과 광산에 은거하였고 기묘사화의 장본인인 조광조(趙光祖)와 최산두(崔山斗)가 화순에 유배되어 죽게 되었다. 이들을 지켜보는 후손이나 주위의 사람들은 그들의 절의와 충절을 본받게 되었으니 호남인의 그것은 뿌리 깊은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조류 속에서 정의를 배우고 실천할 줄 알게 되어 나라가 위급함을 당해서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충성심으로 발휘되는 것이다. 이러한 호남인의 정신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빈사상태에 빠진 조국을 건지게 되었으니 호남의병의 빛나는 활동은 말할 필요도 없이 행주싸움이나 이순신의 해전 그리고 2차 진주혈전이 모두 호남인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한편 북에서 여진족이 청을 세우고 명을 위압하면서 두차례에 걸쳐 우리나라를 짓밟은 호란을 당하여 호남인의 정의감과 충성심은 또 다시 발휘되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평안도 안주에서 평안병사와 함께 나라를 사수한 귀성부사 전상의(全尙毅)장군은 적들도 그를 흠모하였다. 그리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계속하면서 의병을 소모(召募)하자 보성의 안방준(安邦俊)과 해남의 윤선도(尹善道) 등은 호남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다가 청주에서 왕의 항복소식을 듣고 파병 귀향했다. 이때 광주출신 범진후(范振厚)는 전라병사의 휘하에 들어가 전라좌선봉장으로 경기도 용인에서 남하하는 오랑캐와 싸워 청태종의 사위인 백양고라를 비롯하여 적장 3명을 살해한 사실이 있다.
또한 호남지방은 일찍부터 사화나 당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유배지가 되어 그들의 강인한 의리정신과 충성심은 많은 영향을 끼쳤고 지방민의 흠모를 받았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그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18년간의 학문적 완숙기를 강진에서 보내면서 실학을 집대성했고 사회개혁을 입안했으며 많은 제자들을 길렀고 자녀의 혼인을 통해 이곳과의 인연을 계속했다, 그리고 다산이 완성한 실학과 다산의 제자요 승려인 초의선사(草衣禪師)의 만남은 다산과 초의 그리고 제주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金正喜)와의 깊은 교류로 발전하여 실학과 불교의 접합을 통해 한국사회의 근대화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다산의 경세유표(經世遺表)나 목민심서(牧民心書) 그리고 흠흠신서(欽欽新書)는 동학농민혁명의 추진과정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이 항상 참고하였던 지침서가 되었다.
한편 전근대사회인 조선왕조가 구조적 모순이 심화되고 갈등이 표출된 데다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밀어닥쳐 우리나라는 안팎으로 위기가 심각하게 되었다. 이때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독립을 지향한 근대화운동이 민중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전근대사회의 질곡속에서 압박과 수탈의 대상이었고 외세의 정치적 경제적 침탈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민중들이 자신들과 나라의 운명을 건지기 위해 떨쳐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에는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탄압과 수탈을 당하면서도 깨어있는 호남인들의 정의감과 충성심이 솔선해서 발휘되었으니 그것이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위정자들과 외세가 결탁하여 동학농민혁명을 무산시킨 후 일제침략이 노골화하여 러․일전쟁을 끝으로 한국은 일본의 독점물이 되었다. 일제는 한국의 지배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의 양해아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호남인의 정의감과 충성심이 강렬하게 표출되었으니 그것이 을사조약의 저지활동과 을사5적암살활동이다.
을사조약을 저지하여 나라를 지켜보려던 일은 구례출신인 이기(李沂)와 낙안출신인 나철(羅喆) 그리고 강진출신인 오기호(吳基鎬)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미국 대통령에게 을사조약의 저지를 탄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려다가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자 일본에 머물면서 이등(伊藤)과 일황(日皇)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각하가 특파대사로 한국에 나가면 슬프다. 우리 한국은 이로써 망하게 되는가. 우리나라가 불행히 귀국에게 인접하였고 더구나 귀하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으니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아 이렇게 되었구나 … 금일 일본과 한국 두 나라가 脣齒輔車의 의지하는 처지이니 서로 도와야 할 터인데 한국이 망하면 일본이 다음으로 망할 것을 천하가 다 아는 바라 … 또한 日皇에게 상소하여 말하기를 한일양국은 같은 동양에 위치하여 거처로 말하자면 이웃이고 사람으로 말하자면 兄弟인데 근세에 일본의 세력이 東亞에 뻗치어 그칠줄 모르고 있다 … 폐하는 즉위한지 38년에 국가가 부강하고 성하여 동양의 패자가 된 것은 다른 술책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천하에 신의를 잃지 않은 때문이니 원컨데 폐하가 전쟁에 이기고 공을 이루게 되어 경계를 하여 같은 황인종이란 생각을 가져 우리를 독립하게 하여 정족의 삶을 갖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한국의 행운 뿐만 아니라 귀국의 행운이요 세계의 행복일 것입니다…
이기, 오기호, 나철 등은 미국행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을사조약을 강요당하자 이등박문에게 협조하여 나라를 판 오적(五賊)을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5적암살활동은 이들 암살단의 조직적인 활동 이전에 1906년 2월 17일에 장성인 기산도(奇山度)가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찔러 중상을 입혔으나 실패한 일이 있었다.
이기, 나철, 오기호 등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을사조약의 저지를 위한 미국행이 실패한 후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을사조약에 협조한 5적을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들을 규합했는데 창평출신의 이광수(李光秀), 광주출신의 최동식(崔東植), 강진출신의 윤주찬(尹柱瓚), 남원출신의 강원상(康元相), 태인출신의 김담(金潭), 임실출신의 황화서(黃華瑞) 등 18명의 동지를 얻었다. 이들이 벌인 활동을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같은 고향출신으로 일찍이 뜻이 맞아 동지가 되었는데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될 때 미국에 건너가 우리의 입장을 호소하려고 渡美를 계획했으나 하야시 공사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은 일본에 머무르면서 伊藤과 日皇에게 동양평화를 위해 보호조약체결을 취하하라고 권했고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조약에 동의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귀국했다. 이들은 먼저 참정대신 박제순과 내부대신 이지용을 죽이려고 1907년 2월 28일에 폭발장치를 한 상자를 만들어 두 집에 각각 보냈으나 발각되어 성공치 못했다. 그들은 5적배를 암살하고자 자금을 주선하여 自新會를 조직하고 회원을 모집했다. 1․2차 게획이 경계의 삼엄으로 실패하고 제3차로 3월 21일 황태자의 생일에 백관이 進賀하려는 틈을 이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들은 3월 25일 결사대를 6대로 나누어 5적과 박용화(일본의 走狗)를 분담했는데 나철과 오기호가 맡은 박제순 암살이 경계의 삼엄으로 실패하자 더 한층 경계망을 엄하게 하기 때문에 박용화 암살만 성공하고 5적의 암살은 실패했다. 그후 서장보가 체포되어 전말이 실토되자 검거선풍이 불어닥치니 이들은 자수하여 정정당당하게 그들의 계획을 진술하고 5적의 처단을 주장하다가 유형에 처해졌다.
호남인의 정의감과 충성심은 드디어 한말의병의 핵인 3차의병에서 뚜렸하게 표출되었으니 그 활동상황의 개략은 전술한 바 있다. 또한 호남인들의 충성심과 정의감은 위정자들과 침략자들의 유혹에도 냉담했으니 전남의병의 소탕작전과 병행하여 전개된 회유공작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일제침략자들은 그들의 괴뢰인 왕명을 빌어 1909년 8월에 전라선유사로 정만조(鄭萬朝)를 파견하였다. 그는 광주에 도착하여 일본수비대의 보호를 받으며 전체 시민들을 모아 놓고 우리 황태자(영친왕)가 영민하여 지금 외국(일본)에 유학중이어서 국가 중흥의 날이 멀지 않았으니 시민들은 의병 같은 데 가담하지 말고 정부를 신뢰하여 생업에 전념하라고 회유하자 이말을 들은 군중들은 이를 비웃고 욕설을 하면서 해산해 버리자 정만조는 무료함을 금치 못해 즉일로 귀경해 버린 일이 있다.
일제침략자들은 1905년 11월 외교권을 비롯하여 1907년 7월의 군대해산 1909년의 기유각서(己酉覺書)에 의한 사법권박탈 그리고 1910년 6월의 경찰권 박탈을 끝으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그리하여 일제침략자들은 한국을 1910년 8월에 합방해 버리자 이때 구례출신의 시인이요, 역사가인 매천 황현은 자결하여 절의와 충성을 함께 지켰다. 이후부터 일제의 식민통치가 자행되어 착취와 탄압을 당하던 우리민족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정의감과 충성심이 강한 호남인들은 1919년의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1929년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소작쟁의를 치열하게 벌였다. 특히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파급되어 3․1운동 이후의 가장 대규모적 민족운동이며 피해 또한 컸으니 그러한 독립운동이 호남지방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애국지사들의 피와 민족의 역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합국 승전의 부산물로 종지부를 찍자 이 나라는 다시 분단과 군정이란 비극적 상황을 맞게 되었다. 더구나 군정이 끝나고 남북의 친미․친소정권들은 그들의 정권을 영구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였고 드디어는 동족상잔의 전쟁까지도 도발하게 되었다. 또한 남북의 정권들은 독재를 자행하면서 민중들을 탄압했는데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에서 호남인들이 단연 앞장섰던 것은 계속되어 온 정의감과 충성심이 표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한말의 의병항쟁은 동학농민혁명의 계승․발전이란 맥락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호남인이 주도하여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만주화를 쟁취하려는 정의롭고 충성스러운 마음에서 표출되었음을 이미 논술한 바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말 안팎으로 밀려 온 위기의식 속에서 자신의 살길을 찾고 나라와 민족의 나아갈 길을 찾아 생명과 재산을 바치면서 호남인들이 앞장서서 궐기한 것이다. 그것은 못 죽어서 살던 농민대중이 동학의 평등사상, 외세배척사상 그리고 개벽사상으로 의식화되고 조직화되어 나라의 주인이요, 역사발전의 역군으로 자주독립과 민주화를 쟁취하려 했던 것이다.
3차의 시위를 통해서 역량을 가속적으로 축적했던 호남의 농민대중은 금구에서 별도의 집회를 갖고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여 혁명계획을 세우더니 고부의 농민봉기를 계기로 백산(白山0에 모여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천명했다. 호남의 동학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전라영군을 격파했고 장성의 황룡촌에서 중앙에서 파견된 대포를 가진 경군(京軍)을 격파한 후 전주를 점령하고 전라도를 휩쓸었다. 이에 기득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된 위정자들은 청군(淸軍)을 초치했고 이를 구실삼아 훨씬 많은 일군(日軍)이 서울에 진입하여 궁궐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세웠다 그리하여 위정자들은 경악했고 동학농민군도 외세앞에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어 전라도 일대와 동학농민군이 우세한 지역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해 폐정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이 국정을 요리하고 청일 전쟁을 도발하여 그들의 야욕을 채우자 동학농민군은 구국황왜를 외치고 재봉기해 남북접이 연합하여 서울을 향해 공주로 북상하다가 일본군이 주축이 된 관군에게 패배하여 동학농민혁명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주창했던 반봉건의 민주화는 갑오경장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실현되었고 외세를 축출하려는 자주정신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는 투쟁으로 꾸준히 계속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지향한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독립은 우리역사의 발전방향이요 우리민족이 나아갈 바른 길이기 때문에 그 정신은 계승, 발전되면서 상황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요 격전지였으며 그곳에서 살아온 호남인들은 그후 민족․민주운동에 앞장섰으니 이어서 전개된 한말의병도 그 연속선상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화적들이 갑오년에는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가 전기의병때에 의병으로 활약했고 1899년에는 화적들로 활약했다. 그리고 의병의 반수가 동학농민군이었고 의병들이 토비로 바뀌어 경보가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들에서 호남의병이 동학농민과 화적들로 연결되었으며 이들이 영학당이나 활빈당으로 활동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동학농민군이 전기의병을 거쳐 서학당, 남학당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영학당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였던 흥덕, 고부, 무장, 고창 등지에서 활동했다. 즉 서울에서 만민공동회의 시위에 참가하여 연설까지 했던 이화삼(李化三)과 동학접주로 망명 중인 이이선(李二先) 등이 주동하여 1898년 12월에 흥덕군을 점령하고 군수를 축출하여 공사(公事)를 집항한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이화삼 등이 구속되었는데 1899년 5월 4일에 흥덕군에서 영학당들이 이화삼의 석방을 요구하며 봉기하자 인근 각군의 영학당들이 호응하여 27일에는 400여명이 고부군아를 점령했고 5월 31일에는 고창군아를 습격했으나 관군의 반격으로 30여명이 사살되고 6명이 생포된 채 실패한 사실이 있다.
특히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으로 가장 뛰어난 활동을 하였던 전봉준은 둥학농민군으로 활동하였다가 수원에서 그의 동생이며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준과 같이 피난생활을 한 일이 있다. 그리고 1908년부터의 호남창의소를 주도했던 이백래 의병대의 임장록을 보면 동학당이나 영학당 출신이 다수 있으며 그들의 주요 병력은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했던 민중임을 생각할 때 동학농민혁명이 의병항쟁으로 직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이 쟁취하려 했던 반봉건의 민주화운동과 반외세의 자주독립투쟁은 그후 상황의 변화에 따라 여러 형태의 민족, 민주운동으로 표출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계승자들이 주축이 된 한말의 호남의병은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처절한 종말을 보았지만 나라가 망하자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저항했다.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기울면서부터 시작된 천도교의 독립자금 모금에 장흥지역에서만도 235명이 금, 은, 동장을 받을 정도로 적극 참여했다. 또한 도서지방에서는 피난 온 동학농민군이나 그 후계자들이 의병활동과 3․1운동 및 소작쟁의에 적극 참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은 바로 동학농민혁명이 민족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자주독립정신은 해방과 함께 분단 및 군정 하에서 독립․통일정부 수립운동이나 민족의 동질성 회복 및 민족통일촉진운동의 기본정신으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의 민주화정신은 의병활동 가운데서 꾸준히 이어져 계급적 모순의 해결과 악질 부호의 처단 그리고 토호나 불량한 양반의 응징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화사상은 일제시대에는 소작쟁의나 노동쟁의 그리고 형평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활동들에서도 동학농민이나 그 후계자들이 적극 참여했다. 그후 해방과 함께 분단이나 군정 그리고 독재 정권의 출현에 맞서 꾸준한 투쟁을 펼쳐나갔으나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정신의 계승․발전과 깊은 관련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1894년에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쟁취하려던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대사의 서막이요, 민족․민주운동의 원동력으로 한말의 의병항쟁 그리고 일제시대와 해방이후 이 나라를 지탱해 주는 기본이념이 되었다.
4. 결어
한말의 호남의병은 전국 의병의 중심이 되었고 최후까지 항전을 계속하여 일제침략자들에게 응징을 가하고 상당한 타격을 주면서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여 했다. 이것은 우발적이거나 일시적으로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깊은 뿌리와 역사의 계승․발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찾아지는 필연적인 결과였다는 것을 본론에서 상세하게 살필 수 있었다.
한말의 호남의병은 정의감과 충성심이 강한 호남인들이 나라가 위태롭고 민족이 고난에 빠질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서 살신성인하는 전통을 이어 받아 처절하고 장엄한 구국항왜의 혈전을 벌인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임진왜란에서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충성심과 정의감을 표출하여 나라를 건졌다는 사실로 실증하였다. 그것은 병자호란에서도 재확인되었고 실학이 현실을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학문으로 집대성되었으며 불교사상과 접합되어 근대화에 공헌하게 한 것도 호남지방에서였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이르러 봉건세력의 착취와 탄압 및 외세의 정치․경제적 침략으로 이 나라는 위기에 처해 있었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다고 일어선 것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호남인이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300만명 이상이 참여하여 근 1년간 이 나라를 침략하려는 외세와 그에 기생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위정자들을 몰아내고 자주독립과 민주화를 쟁취하려는 피나는 싸움이었다. 그로 인해 수천년간 지탱해 온 봉건체제는 종지부를 찍었고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에 항전하는 민족정신은 계승 발전되어 외세배격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사의 근대를 열었던 동학농민혁명은 그 참여자와 정신이 그대로 계승되어 전기의병으로 이어졌으나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제침략자와 그들의 앞잡이 정권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비록 동학농민혁명의 심각한 상처가 가라앉지 않아 전기의 호남의병은 뒤늦게 봉기하였지만 그런대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후 동학농민군이었다가 의병으로 참여한 농민대중은 영학당, 서학당, 남학당, 화적, 활빈당 등으로 변모했다가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자 후기의병으로 참여했다.
후기의병중 2차의병은 최익현, 임병찬이 주도한 호남의병이 전국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군대해산 이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3차의병 즉 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한말의병의 중핵인 3창의병은 호남지방이 그 중심을 이루었으니 그것은 지형적 특수성이나 일제침략자들의 탄압과 수탈이 이 지방에 집중되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호남인의 정의감과 충성심의 표출이었고 동학농민혁명정신의 계승 발전이었다. 그러므로 3차의병의 전개에서 볼 때 호남지역 특히 남도지방은 거의 전역이 전쟁터였고 그 사람들은 의병이나 그 지원세력으로 참여하여 끝까지 나라를 지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침략자들은 남한대토벌작전이란 전남의병의 소탕작전을 대규모로 전개한 후 마음 놓고 식민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따라서 호남지방은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요 간성이며 호남인들은 민족의 자존심을 세워 준 최후의 전사였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한말의 호남의병은 오랜 전통 속에서 길러 온 호남인의 정의감과 충성심을 아낌없이 표출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학농민혁명과 함께 시대적 상황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면서 이 나라를 지탱하는 지주요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