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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의 산풍고(山風蠱) 상구(上九)괘에 말하기를 "왕후를 섬기지 아니하는 그뜻이 고상하도다." 하였으니,생각하건데 우리 증시조 판도판서 장유공은 그때를 당하여 그 의를 다하시니 유능하시도다.
모든 사람은 벼슬을 함에 있어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를 당함에 누가 편안함을 보존하고 용감하게 물러설 계책이 없으리오마는 다만 이익에 골몰하고 벼슬을 탐내어 물러가지 못하다가 재앙을 당하고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자 많으니 참으로 슬픈일이로다.
우리어중시조는 고려말기에 벼슬하여 판서의 높은자리에서 청렴과 결백을 스스로 지키더니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법률이 해이해져서 아첨하는 무리가 들어서고 어진 신하가 물러나며 민심이 흩어져감을 수습치 못할세라 군자의 나갈바를 생각하고 도장끈을 풀어 벼슬을 버리시고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표연히 조용한 산골에 물러앉아 문을 닫아 손님을 끊고 다만 글을 벗하되 입으로는 조정의 잘못을 말하지 아니하고 귀로는 나라의 기우러짐을 듣지 아니하여 수록속에 쌓여 진실한 성품을 기르고 덕을 닦아 천수를 다하였으니 이를 일어
그 뜻이 고상하여 왕후를 섬기지 아니한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그 뒤 자손들이 창성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음에 이르니 이 모두가 우리 중시조의 청덕을 원차대한 계책아래 후손들에게 끼치신 음덕이어늘 후손으로서 보답한다는 것이 산소를 잃었으니 세월이 오래고 여러번의 병란을 겪은데서 온 결과라고는 하나 후손된 자로서 그 어찌 통탄하고 슬퍼하지 않으리오!
지난 어느 해 어느 날에 고을종족이 모여 단소를 설립하기로 뜻을 모으고 힘을 합하여 사단을 산소가 있던 마을앞에 저답촌 동쪽기슭에 세우고 집과 전답을 마련하여 해마다 10월에 축을
읽고 향사를 올리니 우리의 중시조의 영령이 때 맞추어 사단에 내려오시어 흠향하시게 하였다.
불초가 일즉 호주 한문공의 비문을 읽은바 그 속의 한구절에 "공의 신령이 천하에 계신 것이 마치 물이 땅 속에 있음과 같아서 가지 않은 곳이 없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럴진데 우리 중 시조의 신령이 한문공의 넋과 같다면 어찌 산소라면 흠향하고 사단이라 흠향치 않을 리가 있겠는가!
살피건데 조상의 마음과 자손의 마음이 기운과 피로 엉킨 바로 재실은 공경히 받드는 곳이 아니던가.
부인은 삼산이씨이니 판도판서의 벼슬을 사임하기 전에 귀향하셨고 송고(松固)의 딸이라. 이에 사단에 비를 세우고 글자를 새겨 함께 제사하노라.
그 큰아들 중남(仲南)은 벼슬이 감찰규정이니 이단의 동쪽에 자리를 베풀고 비를 세워 한 날에 제사올리나 부인은 고증할 바가 없으니 후손이 슬퍼할 바가 아니랴?
김장유는 경주인이나 신라경순왕의 후손이라 고려 때에 벼슬이 판도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말기에 정치가 어지러워짐을 보고 보은저답금평각리저돈론(報恩猪畓今坪角里猪敦論)으로 내왕한 후 보은면종곡리로 옮겨 대대로 살다.
숭정후 네번째 무진(서기 1868년) 8월에 불초17대손 수홍(秀弘)은 삼가 피 눈물로 씀
우리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는 고려말기의 판도판서 휘 장유를 鼻祖로 한다
판서공이 혼란한 정국을 피하여 報恩으로 隱居한 이후 자손이 그대고 世居하였고 후대에 分散하기도 하였으나 依然히 보은은 吾族의 根據地가 되어있다.
우리가 족보를 간행한 것은 조선인조 二十六年(1648)에 聾齊公 諱상과 典翰公孫인 諱涉이 함께 처음으로 시작하여 이를 戊子譜라 하였고 後世를 계속하여 지난 1957년에 이루어진 丁酉譜에 이르기까지 五次에 걸쳐 刊行 되었다.
이년전에 壯菴 충암의 後孫들만이 대전에서 派譜를 刊行하였으나 우리 보은종친들과 의견이 一致되지 않아 함께 修譜치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어 今年봄에 보은 종회에서 회의를 여러번 열고 따로 編纂하기로 합의되고 不肖가 그 책임을 맡고 相稙君이 總務職을 담당하여 修單과 編輯에 着手한지 一年 이내에서 印刷에 부치기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大業을 完遂하게 된 것은 모두가 총무 相植군이 敬祖愛族의 至誠으로 東奔西走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약한 결과로서 君이 아니였더라면 나로서는 도저히 이중책을 감당해 내지 못했을 것을 功感하고 그 勞苦에 대하여 다시 同族諸公과 함께 치하를 드린다.
이제 刊行에 즈음하여 修譜의 由來와 그緣起를 대략적어 卷頭에 쓰며 또한 내나름대로의 소감을 敷言附記코자한다.
족보의 의의에 대하여도 선인들의 至訓이 여러차례에 걸쳐 詳述되었으나 다만 오늘에 있어서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祖先崇拜의 傳統意識이 희박해가고 同族끼리의 親睦度가 날로 흐려지고 있는데 修譜의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고 否定的 態度를 가질 사람도 없지 않겠으나
宗族을 構成한 一單位이며 宗族의 形成과 發展은 곧 민족사의 한부분 일진데 족보는 결코 한집안만이 傳守할 사료가 아니라 곧 국사의 一部信史가 되는 것이며 敬祖愛族의 基本이 되는 것이니 이 譜冊안에 이름이 함께 들어있는 우리는 엤 선조들의 高邁한 精神과 文學懃業으로
그 業績을 우러러 思慕하고 이러한 선조를 함께한 동족끼리의 敦睦을 한층더 高楊하기를 바라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외람히 위원장의 자리를 맡았던 사람으로서 생각나는 것을 적어 대신한다 지난해 봄에 大谷書堂樓上에서 戊子譜의 刊板이 保存된 것을 발견하여 동족이 함께 기뻐하며 敬重히 奉安하고 있음을 겸하여 附記하여 둔다
檀紀 四千三百十七年 甲子
西紀 一千九百八十四年 世譜編纂委員長 萬哲 삼가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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