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연 (任 兗) [1567년~1619년]
본 관 : 풍천(豊川)
호 : 당호(黨湖)
자 : 자정(子正)
봉 군 : 豊安君
생.졸 년 : 1567년(명종22)~1619년(광해군11)
활동분야 : 문신/관료/문신-조선중기/문신
참고문헌 :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大同野乘. 등
양 력
1567년(명종22)~1619년(광해군11)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정(子正)이고 호는 당호(黨湖). 찬성공 임명필(任明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자는 판윤 임 열(任 說)이고 아버지는 종부시정 임영로(任榮老)이다. 어머니는 청릉부원군 심강(沈)의 따님이시다. 임장(任章)의 형으로 정인홍(鄭仁弘)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1년(선조2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03년(선조3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승정원 주서로 임명 되였으며, 이어 정언병조좌랑시강원사서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의 재위당시에는 동생 임장과함께 소북(小北)중 남당의 일원으로 인식되였다.
1608년(선조41년) 광해군 즉위 이후 헌납이 되었으며, 헌납 재직중 선조의 인사행정의 잘못을 비판한 소를 올린 정경세(鄭經世)를 공격하면서 피혐(避嫌)하여 정경세와 같은 입장을 지낸 홍가신(洪可臣)과 갈등을 빚었으나, 왕의 명으로 다시 출사(出仕)하였다.
이어 성균관직감을 거친 뒤, 1610년(광해군2년) 함경도 언무어사(按舞御使)로 파견 되였다.
그 해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이 옥사가 일어났을 때 공이 많았다는 것으로 녹훈(錄勳)되였다.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을 재 편찬했을 때,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
형제간에 소속 당파가 달라 한때 파직 되였으나, 다시 출사하여 장령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613년 9광해군5년)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 협의로 발생한 박응서(朴應犀) 옥사에 관련된 박치의(朴致毅)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파직 되였다.
그리고는 이듬해에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주장한 정조(鄭造)윤인(尹認)등을 귀양 보내라는 정온(鄭縕)이 상소에 관련되어 의금부의 신문을 받았다.
1617년(광해군9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 논의 때 폐출을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이듭해 명나라의 원병 용청에 대한 논의 때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등 광해군의 입장을 옹호하는 처세를 보였다.
이러한 연유로 언간의 바대에도 불구하고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제수(除授)되였으나, 1619년(광해군11년) 병사하였다.
이후 후금과 영합하여 화친을 주장 했다는 이유로 관작을 추탈 당하였다. 그 뒤 1664년(현종5) 아들 경상감사 임의백(任義伯)의 상소로 직첩(職牒: 관직 임명장)을 환급받았다.
풍안군(豊安君)으로 封君)되였다.
가족사항
부 : 임영로 (任榮老)
조부 : 임 열 (任 說)
증조부 : 임명필 (任明弼)
자 : 임준백 (任俊伯) 임의백 (任義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