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1402호(소수서원 문성공묘) written by 한국의 국보와 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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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 매표소를 지나면 소나무들이 울창합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 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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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5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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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간은 소수서원 입구 소나무 숲에 남아 있는 것으로, 서원내에 아직도 당시 숙수사의 여러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위치가 원위치로 보인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소수서원의 건립으로 폐사된 듯하다. 당간은 마주보는 면의 바깥면 중앙에 세로띠를 새기고, 꼭대기에서 1.17m 밑에서 부터 2.34m 까지 사이가 면이 쑥 들어가 있어서 마치 넓은 홈을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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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기둥 끝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늘어지고, 맨끝은 둥글게 경사지도록 하였다. 꼭대기 끝 안쪽 면에는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원래는 지주와 당간을 받치던 바닥돌이 있었을 듯하나, 현재는 지주 양쪽으로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소박하며 돌을 다듬은 솜씨도 세련되어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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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인데, 굉장히 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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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 입구 오른편 냇가 건너편에 있는 경자바위와 정자(취한대)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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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을 들어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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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 입구 전경 |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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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 입구 우측에 있는 경렴정 |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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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생단(위 사진 좌측에 무덤처럼 보이는 것)과 소수서원 입구 전경 |
소수서원 강학당(보물 140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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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강학당 모습 |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규모는 정면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면서도 고색이 잘 간직되어 있으며, 사방 둘레에 너비 1m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 가장자리는 높이 6.5㎝, 높이 8.5㎝의 턱을 두었고, 기단 네 모서리에 추녀를 받는 활주를 설치하였다. 강학당의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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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학당 전경 | ▲ 강학당 내부에 걸려있는 편액 모습 |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을 2개 설치하였고,기단3면(정면, 우측, 좌측)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하였다. 기둥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위에 놓인 주두와 결구시킨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 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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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 내부 전경(위 사진의 좌측 건물이 문성공묘입니다.) |
소수서원 문성공묘(보물 140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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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공묘 전경 |
문성공묘는 소수서원의 경내에 있는 제향기능의 사당으로 안향을 주향(主享)으로,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의 위패를 함게 봉안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집으로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좌(柱座)를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 주두를 놓고, 첨차를 내어 그 위에 소로가 주심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보 방향으로는 쇠혀(牛舌)를 내고 안쪽으로는 보아지 모양을 하여 퇴간의 보를 받치는 초익공식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건물의 좌측과 뒷편에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사방 돌담을 두르고, 정면에 외단문을 설치하고 우측에 협문을 두었다. 매년 3월, 9월 초정일(初丁日)날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주세붕이 직접 쓴 제향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홀기문서(笏記文書)가 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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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서각 | ▲ 일신재와 직방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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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사청 | ▲ 일영대(해시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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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각 | ▲ 영정각 내부에 전시된 영정 모습 |
주세붕 영정(보물 717호) |
▼ 하단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 옴. |
▼ 영정각에 모셔진 주세붕 영정(아래 사진 좌측) |
이 그림의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힘들지만 색이 바라고, 훼손된 상태, 복식, 필법 등으로 미루어 제작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16세기 초상화가 대부분 공신상인데 비해 학자의 기품이 드러난 학자상으로 매우 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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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이다. 주세붕(1495∼1554)은 중종
38년(1543)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후의 소수서원)을 세워 학문진흥에 힘썼다. |
회헌 영정(국보 11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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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각에 모셔진 회헌 영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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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 문신인 회헌 안향(1243∼1306) 선생의 초상화로 가로 29㎝, 세로 37㎝의 반신상이다. 안향은 고려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라고 할
수 있다. |
대성지성문선왕 전좌도(보물 48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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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공자 앞에 길게 늘어서 앉아 있는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65㎝, 세로 170㎝이며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 좌측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 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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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구재 | ▲ 지락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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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효교육관과 앞 마당에 전시된 숙수사지 출토 석조 유물 |
영주 선비촌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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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촌은 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거양하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괴리현상을 해소시켜 보고자 충 효의 현장에 재현하게 된 것입니다.앞으로 소수서원과 연계되는 영주선비정신의 계승 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그리고 역사관 확립을 위한 산교육장으로 활용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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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중한 자료 잘 보고 갑니다 항상 고맙다는 인사를 드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