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 재평가한 실학자들
유배 이후 완전히 잊힌 안용복을 되살려낸 이는 성리학에 갇혀 구태의연한 사고를 하는 선비가 아닌, 실학자들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해 강적과 겨뤄 그들의 간사한 마음을 꺾고, 여러 대에 걸친 분쟁을 그치게 하였으니, 계급은 일개 초졸에 불과해도 행동한 것을 보면 진짜 영웅호걸답다’라고 평가했다. 그 후 이규경을 비롯한 실학자들도 하나같이 안용복의 용기와 지혜를 예찬했다.
하지만 안용복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잊힌 인물이 됐다. 이러한 안용복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 반짝 되살아났다. 안용복은 안자미를 시조로 하고, 고려말 성리학을 도입해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에 모셔진 안향(安珦)을 중시조로 한 순흥안씨인 것으로 보인다. 안씨의 90%는 ‘순흥’을 관향으로 한다. 순흥 지역에 몰려 살던 이들은 세조 때 이곳으로 유배온 세종의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과 합세해 단종 복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로 인해 금성대군은 물론이고 순흥안씨 집안 사람 여럿이 처형되는 멸족의 위기를 맞았다. 이렇게 되자 순흥안씨 사람들은 산지사방으로 도주했는데 이때 일부가 부산과 울산 지역으로 옮겨왔다. 이들은 반역자의 후손인지라 관향이 순흥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어업을 하는 평민으로 살았다. 조선실록이 울릉도 독도 영유권을
확인하고 돌아온 안용복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지 않은 것은 반역자의 후손이라는 점 때문일 수도 있다.
안용복의 키가 185㎝라는 것은 안용복이 차고 있던 요패(腰牌·지금 군인들이 차는 인식표와 비슷한 것)에서 확인된다. 안용복을 납치해 일본으로 끌고 간 오야 집안 사람들은 안용복이 차고 있던 요패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 요패에 적혀 있던 안용복의 주소지는 바닷가인 동래부 부산면 좌천1리 14경3호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좌천1리 앞바다를 매립하고 그곳에 부산역으로 가는 철도를 닦고 그 앞쪽에 부산항을 만들었다.
그로 인해 육지가 된 이곳의 현 주소는 부산시 동구 좌천동 14-1번지인데, 신번지로는 범일5동 매축지9길 45번지가 된다. 현재 안용복의 생가 터엔 가내공업을 하는 가정집이 들어서 있었다.
1957년 부산에 거주하는 순흥안씨들은 ‘안용복장군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안용복 충혼탑을 세우자는 운동을 펼쳤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1961년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20만원, 직전 부산시장을 재내고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씨가 10만원, 김대만 부산시장이 10만원을 내는 등 250만원이 답지해, 안용복이 수병 생활을 했던 경상좌수영 터에 충혼탑이 세워졌다(1967년).
그리고 안용복은 다시 잊힌 존재가 됐다가 독도 영유권 문제로 시끄럽던 1990년대 말 다시 주목을 받게 됐다. 안용복장군기념사업회와 부산의 순흥안씨 종친회가 에도막부로부터 받은 서계를 들고 부릅뜬 눈으로 일본을 바라보는 안용복 장군 동상과 사당을 짓자는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운동이 널리 호응을 얻은 것이다. 이에 따라 2001년 경상좌수영 터에 안용복 동상과 땅을 지켜낸 사람의 사당이라는 뜻의 ‘수강사(守疆祠)’가 세워졌다.
그러나 수강사를 참배한 역대 부산시장은 순흥안씨인 안상영 시장(작고) 한 명뿐이다. 왕후장상이 영웅이 되면 찾는 이가 많으나, 신분을 알 수 없는 평민이 큰일을하면 쉽게 잊히는 것이 한국적인 현실이다. 안용복 동상이 있는 경상좌수영 터 안에는 ‘의용사(義勇祠)’라는 또 다른 사당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 최고지휘관인 경상좌수사 박홍은 재빨리 도망을 갔다. 그러자 의지할 곳 없는 25인의 수병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고 분전하다 죽었다고 한다.
의용사는 이 25인의 용사를 기리는 사당이다. 의용사에 모셔진 인물들은 대부분 평민이다. 수강사와 의용사를 안고 있는 경상좌수영 터 안에는 과거 이곳에서 근무했던 경상좌수사의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가 즐비하다. 경상좌수사들이 송덕비를 받을 만큼 제 임무를 다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전쟁을, 그리고 일본에 식민지가 되는 비운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안용복의 2차 도해는 극히 의도적이었다. 안용복은 일본의 약점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고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이러한 안용복의 회한이 서린 곳이 호산지의 아오시마다. 조선은 전통 사수라는 완고한 기풍과, 역모자의 후손일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안용복을 잊으려 했다. 그러나 ‘안용복 쇼크’를 받은 일본은 안용복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겨놓았고 이후 적극적으로 해외로 진출했다. 그리고 지금 독도 영유권 문제가 심각해지자 안용복에 대한 기록을 감추려고 한다.
독도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안용복을 위인의 반열에 올리고 제대로 추모행사를 여는 방안 마련을 고민해야 한다. 일본은 안용복을 지우고 한국은 미국산 쇠고기 논란에 휩싸여 독도와 안용복을 잊었다. 안용복이 사라진 아오시마에는 무심하게도 매미 소리만 요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