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00여 년의 한국 천주교회사가 엮어지기까지 선교회들과 수도회들이 이룩한 업적은 상당하다. 1831년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진출을 시작으로 선교회들이 진출하였고, 수도회로는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처음으로 진출하였다. 남자 선교·수도회의 경우 1909년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진출을 시작으로 수도회들이 진출하였고, 1953년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의 설립을 시작으로 한국 내에서 많은 수도회들이 설립되었으며, 1975년 한국 외방 선교회가 설립되었다. 선교회나 수도회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라는 기본 목표에는 다름이 없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성당 등을 통한 직접 선교, 교육·의료·사회복지 활동을 통한 간접 선교, 그리고 관상 생활을 통한 선교라는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수도자는 성직자와 평신도 양쪽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그래서 남자 수도회의 경우에는 성직 수사(수사 신부)의 길과 평수사의 길이 있지만, 모두 ‘수도자’라고 하는 하나의 공통된 신분에 속한다. 수도자는 그리스도를 더욱 충실히 따르기 위하여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정결, 청빈, 순명의 복음적 권고의 삶을 공적으로 서약함으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람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수도생활의 쇄신·적응에 관한 교령>에 의하면 수도회는 크게 관상 수도회, 활동 수도회, 절충 수도회로 구분된다. 절충 수도회는 수도생활 자체가 원천이며 수도 생활 그 자체로부터 경우에 따라 관상을 강조하거나 혹은 활동을 강조하거나 하는 수도회가 된다.
200여 년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많은 선교회와 수도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활동 영역이 다양해졌고 풍부해졌다는 의미이다. 한국 교회는 2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양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으며, 수도회들도 크게 성장하였다.
본고는 한국 사회 및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남자 선교·수도회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고찰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그동안 선교·수도회별로 각기 역사를 정리하고자 노력한 결과물들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각 수도회의 역사에 주력하다 보니 한국사 내지 한국 교회와의 연관성, 다른 선교·수도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파악이라는 측면에서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의 관계, 수도회 총본부와 한국지부(관구)와의 관계 설명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비판적인 시각에서의 고찰에는 거의 접근하지 못한 한계점이 있다. 그러나 수도회가 지향하는, 그리고 한국 교회 안에서 수도회가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할 때 그 성장에 긍정적인 시각만이 투영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본고는 개별 수도회사 추적이 아니라 한국 교회 내지 한국사와의 관련성 속에서 남자 선교·수도회의 위치와 역할을 규명하고자 한다. 시기적으로는 한국에 최초로 파견된 파리 외방 전교회가 진출한 1831년부터 1999년까지로 하며, 공간적 범위로는 남자 선교·수도회가 설립되고 진출한 한국과 외방 선교 지역까지를 포함한다.
이상과 같은 목적을 지닌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그 효용성이 기대된다. 첫째,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사 서술에서 소략하게 언급되었던 남자 선교·수도회의 위치와 역할을 부각시킬 수 있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구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남자 선교·수도회들이 각자의 개별 역사서를 편찬하는 데 한국 교회 내지 타 선교·수도회들과 관련하여 정리하고 서술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셋째, 여자 수도회사를 집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 여자 수도회사와 남자 선교·수도회사를 통합하는 한국 수도회사를 편찬 하는 데 기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한계가 있다. 첫째, 각 선교·수도회들의 자료를 충분히 입수·활용하지 못하여 섬세한 조망에는 아쉬움을 남긴다. 둘째, 자료 수집의 한계 때문이기는 하지만 몇 개의 선교·수도회를 제외하고는 충분한 자료 검증과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수도회들의 원고를 활용하였다는 점이다. 셋째, 선교·수도회들 고유의 설립 이념과 영성을 비교·분석하고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 안에서 그것들이 얼마나 적용되었는지 하는 점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 부분은 신학적인 지식과 그 지식에 근거한 고찰이 요구되므로 본고에서는 논외로 하였다. 이러한 점들이 보완될 때 본 논문은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후고를 기약한다.
2. 조선교구의 설정과 선교회들의 진출
1) 조선교구의 설정과 파리 외방 전교회
한국에 진출한 첫 선교회는 파리 외방 전교회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 1811년 10월 24일 자로 교황에게 보낸 조선인 신자들의 서한과 그 서한의 내용을 지지하는 북경주교의 서한은 교황청으로 하여금 조선 땅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촉구하였다. 1824년 포교성은 여러 수도회에 서한을 보내 조선 천주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 선교지는 유럽 교회에 그다지 매력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선뜻 나서는 수도회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1827년 샴 교구의 보좌주교로 활동 중이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브뤼기에르(Bruguiére)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리고 1831년 9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조선대목구(朝鮮代牧區)를 설정하고 파리 외방 전교회원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代牧)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조선 교회의 사목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위임하였다. 교황청이 한국교회를 위해 파리 외방 전교회를 지목한 것은 이 회가 당시 큰 선교단체 중 하나이므로 한국에 선교사를 지속적으로 파견할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또한 한국 교회를 포르투갈 보호권하의 교구인 북경교구에서 독립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조선교구 설정 이후 1835년 첫 선교사의 입국을 시작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계속 파견되었고, 조선 교회가 발전하자 1911년 조선대목구를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리하여 사목하였다. 1909년에는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성 베네딕도 수도회를 초빙하였고, 1920년 원산지목구를 설립, 사목권을 이양하였으며, 1923년에는 메리놀 외방 전교회를 초빙하여 1927년 평양지목구를 설립, 사목권을 이양하였다. 1933년에는 아일랜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를 초빙하여 1937년 광주지목구를 설립, 사목권을 이양하였으며, 같은 해 전주지목구를 설립하여 한국인 성직자에게 관할권을 이양하였다. 그리고 1941년에는 서울대목구의 관할권을 한국인 성직자에게 이양하는 등 국적이 다른 많은 선교·수도회를 초빙하고 관할권을 나눔으로써 한국 교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서울 성가 소비녀회, 포항 예수성심 수녀회의 창설에 기여하였으며, 각종 교리책을 출판하고,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120여 명의 한국 성직자들을 양성해냈다.
그런데 파리 외방 전교회는 당시의 대표적 선교단체였던 예수회나 도미니코회와 같이, 복음의 전파 방법을 사회·문화 활동에 두었던 단체가 아니었다. 이 선교회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들이 선교 활동에 절대적 영향을 행사하던 상황에서 선교의 순수성을 찾고자 하는 교황청의 노력으로 창설된 단체였다.한국에 입국한 초기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 문화 활동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입국 하자마자 사회복지사업, 의료사업, 교육사업, 언론 출판 인쇄사업, 지역사회 개발사업, 한국 문화연구 등을 추진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근대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들이 전개한 활동들은 형태나 규모에 관계없이 근대적인 지식과 서구적인 방법에 의한 한국 최초의 사회개발사업이었다는 점, 그 후에 전개된 한국사회개발사업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근대화에 선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의 사회문화 활동들은 상당한 한계성을 갖는 것이었다. 그 한계성은 1세기 이상 계속된 박해 상황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선교사들의 사회적 배경과 천주교 수용 계층의 계급적 특성, 그리고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다. 파리외방 전교회의 선교 방법은 사회문화 활동을 통한 복음 전파에 두었던 선교회가 아니었다. 이 선교회는 피선교지 교회의 자립과 영성 강화에 관심을 갖는 단체였다. 또한 당시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근대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성속이분법(聖俗二分法)에 토대한 경건주의 신앙(敬虔主義信仰), 그리고 문화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참여보다는 사회로부터의 초월에 관심을 가졌다. 게다가 당시의 신자들은 사회문화 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고 그러한 활동을 뒷받침할 인적·재정적 능력도 갖추지 못하였다. 선교사들이 전개한 대부분의 활동은 한국 사회나 한국 문화의 발전보다는 교리의 습득이나 전파와 관련된 것이었고, 그 내용도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저급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초기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19세기와 20세기 초엽은 민족사에 있어서 대전환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지식계급들은 서구문물의 흡수를 통한 개화와 자강, 그리고 독립을 갈망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폭넓은 사회문화 활동이 요구되었으며, 이러한 당시의 발전가치와 선교사들의 활동이 결합될 경우 한국 교회는 민족사에서 응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가졌던 초월주의적·내세주의적인 신앙과 사회 무관의 정교분리정책(政敎分離政策)은 한국 교회를 사회무관심주의로 흐르게 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창립 정신은 물론 민족사와의 만남도 스스로 차단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내재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으며, 한국 교회의 토착화나 민족 교회로서의 성장도 저지시키고 말았다.
한불수교(韓佛修交) 이후 종교의 자유,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았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1910년 ‘한일합병’으로 또 다른 국면에 부딪쳤다. 일제에 의한 직접적인 선교의 피해는 물론 일제의 물결을 타고 몰려온 급속한 개화의 파동은 선교사들을 더욱 당황하게 하였다. 종교 활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나 간섭은 나름대로 이해나 타협을 통해 타개해 나갔으나 급변하는 새 세대의 정신사조, 새 물결, 새 문화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새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선교방법을 모색해내지 못함으로써 그 시대인들의 교회에 대한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1890~1910년 사이에 개종이 많았으나 ‘한일합방’이 되면서 개종운동이 점차 이완되고, 한국인들의 정신 상태는 2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러므로 새로운 정책이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박해시대와 마찬가지로 외교인에 대한 직접 선교는 생각하지 않았고, 일제식민당국의 정교분리원칙(政敎分離原則)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간접 선교 또는 문화 선교를 멀리하게 되었고 따라서 직접 선교, 즉 복음 선교에 전념하는 안일한 방법을 취하게 되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활동은 19세기 조선 말기에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들은 한계를 드러낸 유교의 통치 체제 아래에 놓여 있던 조선인들을 자각시키고, 조선을 근대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성속이원론적(聖俗二元論的) 신앙구조와 유럽우월주의 등은 한계점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한말 일제 강점기에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조선인들의 민족감정을 외면하였던 태도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초기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갖고 있던 근대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성속이원론에 토대한 초월주의적 신앙유형 및 내세주의 신앙은 사회문화 활동의 폭을 크게 제한하였다. 또한 문화 우월주의적 태도와 프랑스 국민으로서의 행세는 그들이 전개하는 그나마의 활동도 한국 사회의 문화적 전통이나 내재적 요구, 그리고 역사적 현실과는 유리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그들이 주도한 개화기의 한국 교회는 창립 때의 교회정신과 단절되는 한편 민족사와도 단절되는 이중 단절의 부정적 측면을 나타내게 되었다.
2)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진출과 교육 활동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한국인의 교육열이 높아지고 많은 교육기관들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천주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05년 교세통계표에 나타난 천주교 학교 수는 60여 개교를 헤아렸는데 그 모두가 초등교육기관이었고, 중등교육기관 이상의 학교는 없었다. 1910년 천주교 학교 수는 120개로 증가하였다. 문제는 적절한 교사를 구하는 것이었다. 천주교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필요한 기초 교육뿐만 아니라 종교 교육도 담당할 수 있는 교육이 아울러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특수한 교사를 얻기 위해서는 천주교 자신이 사범학교를 운영해야 했다. 그래서 사범학교의 설립이 한국 교회의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조선교구장 뮈텔(Mutel) 주교는 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먼저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교육 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마리아니스트회와 한국 진출을 교섭하였다. 그러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재정이 어렵고, 인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뮈텔은 1908년 유럽으로 건너가 그해 8월까지 마리아니스트회, 살레시오회, 성 베네딕도 수도회, 그리스도교 교육회, 빈첸시오회 등 닥치는 대로 수도회들을 찾아가 한국 진출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부정적인 답변을 보낼 뿐이었다. 뮈텔은 다시 로마로 갔고 포교성의 격려로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서면으로 한국 진출을 요청하였다. 즉, 한국에서 직접 선교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생활을 실현하고 아울러 사범학교와 실업학교를 경영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어 1908년 9월 15일 수도원을 방문하여 다시 간청하였고, 며칠 후 베네딕도회는 한국 진출을 결정하였다. 당시 성 오틸리엔 수도원은 회원 수가 부족하고 사제가 9명뿐이어서 한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할 만한 형편이 되지 않았음에도 교황과 뮈텔 주교의 한국 진출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09년 성 베네딕도 수도회(이하 베네딕도회로 약칭)가 서울에 진출하였다. 이제 한국 교회는 처음으로 국적이 다른 선교회의 선교사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베네딕도회는 근본적으로 관상 생활의 베네딕도 회칙을 따르면서 동시에 선교를 목적으로 1884년 창설된 비교적 역사가 짧은 선교회였다. 그런데 선교 활동이 그들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일반 선교회의 경우처럼 직접 선교가 아니고 간접 선교라는 데 그 특징이 있었다. 즉, 성당 사목을 하거나 독자적으로 지역을 맡아 교구를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교구 안에서 공동체적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구 전체의 사목을 문화적으로 도와주는 것이었다. 또한 베네딕도회의 선교 활동은 문화적 활동이었다. 문화 활동을 통해, 특히 평신도, 의사, 예술가, 교육가들을 파견하거나 직접 수공업 학교나 농업학교 등을 운영함으로써 교구 내의 선교를 돕는 동시에 교구 내의 일반 주민의 생활수준의 향상에도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베네딕도회는 한국 교회 최초의 남자 수도회로, 한국 교회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을 설립·운영했다. 10여 년에 걸쳐 다양한 기술 교육을 실시한 실업학교 운영은 한국의 실업교육사에서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다. 1910년 베네딕도회는 실업학교 숭공학교(崇工學敎)를 설립하였고, 1911년 9월 2년제 사범학교 숭신학교(崇信學敎)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숭신학교는 ‘한일합병’ 이후 한국인을 위한 사범학교 운영을 일제식민 당국이 금하였기에 1회 졸업생만 배출하고 폐교하였으며, 숭공학교도 재정이 어려워 힘겹게 유지해 나갔다. 숭공학교는 1914년 7월 학생수가 70명에 이르렀고, 전망이 좋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전쟁으로 수사들이 동원되자 학생 수를 제한하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일본이 독일인이 경영하는 숭공학교를 적산으로 몰수하려 하였기에 파리 외방 전교회 측에 형식적으로나마 숭공학교의 경영권을 인계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네딕도회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였다. 한국 진출의 첫째 목적인 사범학교의 설립과 운영은 그 초기에 좌절되었고, 실업학교도 변화된 상황에서 예전의 방법으로는 더 이상 계속하기 어렵게 되었다. 베네딕도회는 수도회인 동시에 선교회이므로 선교지에 계속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다른 활동 분야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 분야가 서울에서는 모두 거절되었다. 서울 수도원의 신부들은 수도생활을 하는 한편 성당 사목을 하려 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종현(鐘峴)과 약현(藥峴), 두 성당밖에 없었다. 그래서 베네딕도수도원이 자리한 백동(白洞)에 제3의 성당을 설립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고 베네딕도회는 백동 성당을 설립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다른 지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교구장 뮈텔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를 맡도록 제의하였다. 그러나 베네딕도회는 적은 능력으로 그곳에 이미 정착한 개신교와 경쟁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아래 함경도를 선택, 1920년 간도(間島)를 포함한 함경도가 원산교구(元山敎區)로 설정되고 베네딕도회에 선교가 맡겨졌다.
1920년 원산교구가 설정되고 이 교구의 선교를 베네딕도회가 담당하기로, 그리고 서울 철수를 동의했음에도 노르베르트 베버 총원장은 숭공학교의 폐교가 한국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교성에 서한을 보내 재고를 간청하였다. 한국의 개신교가 성공하고 큰 영향을 미치게 된 원인은 그들의 교육사업과 사회사업 때문이니 한국의 천주교가 개신교와 경쟁하려면 이런 사업으로 한국인의 신임을 얻어야 하므로 기존 시설까지 없애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숭공학교는 처음부터 평판이 좋았고, 한국 천주교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으므로 이 학교가 폐교되면 한국 천주교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당시 서울의 신문들은 베네딕도회의 그간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들이 서울을 완전히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서울의 베네딕도수도원과 교육 사업의 포기는 어쩔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참작하더라도 한국 선교 사업의 전체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고등고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서울에 진출, 일제의 탄압과 세계대전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베네딕도회는 수도생활과 교육사업을 계속 발전시켰다. 그러나 1920년 원산교구의 설정과 더불어 베네딕도회는 이 지역의 선교를 떠맡고 서울을 떠나게 되었고, 동시에 교육 사업도 중단하였다. 베네딕도회는 덕원(德源)에서 제2의 출발을 하였다. 당시 함경도는 천주교 선교에서 제일 낙후한 지역이었다.
1921년 서울 수도원 내에서 소신학교를 설립하여 신학 교육을 시작하였고, 수도원과 함께 1927년 11월 덕원으로 이전하여 그해 12월 1일 덕원에서 개교하였다. 그리고 소신학교 설립 14년 만인 1936년 첫 사제를 탄생시켰다. 또한 1942년 2월 16일 인가를 받지 않은 서울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가 폐교되고 이듬해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도 폐교되자 이 두 신학교의 학생들을 모두 받아들여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 교육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북한공산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고, 1949년 5월 11일 신학교 건물이 몰수되어 설립 22년 만에 베네딕도회가 설립한 덕원신학교는 폐교되었다.
덕원 이전 이후 수사들의 활동은 의료, 농공, 출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의료 활동을 통해 괄목할 만한 전교 성과를 획득할 수 있었다. 1928년 5월 정식으로 일제식민 당국의 인가를 얻어 의원을 개원하고, 서울 국립병원 원장의 추천을 얻어 3년 동안 의사 실습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교부받았다. 의원 개설 후 1929년 5월까지 약 1년 동안 18,880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처음에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로 약을 주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실비로 받았으나 약값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점차 무료 진료를 줄이고 약값을 올려 받았다. 1929년 여름에는 수도원에 작은 병원을 건립하였고 1933~1934년 이를 증축하였다.
농공 활동은 서울에 있을 때 기초를 닦았던 목공소, 철공장(대장간), 농장(목축 포함) 등을 덕원으로 그대로 이전하여 추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장이 확대되면서 제분소를 건립하였고, 육림·원예·양봉 사업, 자물쇠 공장, 칠 공장도 운영하였다. 농장 경영과 건축 사업은 가난한 신자들의 구빈 활동에도 도움이 되었다. 1927년 인쇄소를 설립하여 출판, 인쇄 활동을 했다. 1930년 출판을 시작하였는데 첫 결실은 1933년 간행된 한글판『미사 규식』이었다.
뒤늦게 탄생한 원산교구에서도 현지인 포교지 교구의 신설을 서둘러 1928년 원산교구를 덕원면속구와 함흥교구로 분할하였고, 함흥교구를 한국인 성직자에게 위임하였다. 또한 1940년 덕원수도원 구역을 면속구로 분리시키는 동시에 종래의 포교지(원산대목구)를 함흥대목구로 개칭하고 적당한 시기에 그것을 한국인 성직자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국의 첫 선교회인 파리 외방 전교회와 첫 수도회인 베네딕도회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1835년 한국에 진출한 이래 40년간 박해를 받으면서 늘 숨어 살아야 했기 때문에 한국을 완전히 또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보다 75년 후에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한국관 형성 배경은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배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교회를 박해하는 한국정부를 체험하지 못하였고 ‘한일합방’ 직전에 도착하였으므로 한국 자체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의 여유조차 갖지 못하였다. 또한 베네딕도회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원산교구를 담당하게 된 이후 한국의 통치자인 일본 당국과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현실적인 한국을 연구하고 소개할 수는 없었으나 반면 한국의 전통문화, 외래문명에 오염되기 전 한국문화의 원형을 밝히고 소개하는 데에는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다. 들은 수도자였기 때문에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처럼 언제나 일선 사목에 종사해야 할 재속신부들보다는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고, 한국인들에게 고등교육을 실시하고자 내한하였던 만큼 기초 지식으로서 한국의 언어, 역사, 민속 등을 깊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3) 메리놀 외방 전교회와 골롬반 외방 전교회의 진출
유럽 대륙을 모국으로 하는 파리 외방 전교회와 베네딕도회에 이어 1923년 5월 10일 미국을 모국으로 하는 메리놀 외방 전교회(1911년 6월 29일 설립, 이하 메리놀회로 약칭)가 한국에 진출하였다. 메리놀회는 한국에 진출한 두 번째 선교회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진출로부터 92년 만이었다. 유럽이 아닌 미국을 모국으로 하는 선교회였으므로 선교의 다양성을 표방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선교회는 어느 선교회이든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일으키고 신자를 증가시키고 교회 조직을 발전시키는 것을 근본 사명으로 하지만, 그 방법은 선교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또 실제로 다르다. 메리놀회는 1927년 평안도를 관할구역으로 설립된 평양지목구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0년 메리놀회 소속 첫 한국인 신부를 배출하였고, 평양에 메리놀 센터와 한국어학당을 설립하여 선교에 주력하였다.
메리놀회의 진출에 이어 1933년 10월 29일 성 골롬반 외방 전교회(1916년 아일랜드에서 설립, 골롬반회로 약칭)가 진출하였다. 『Demange 주교 일기』(Journal de Mgr. Demange) 1933년 10월 29일자. 전라남도 선교를 목적으로 목포에 거점을 마련하고 전라남도 선교를 준비하던 중 1937년 4월 13일 광주교구가 설립되자 그 관할권을 부여받았고, 1938년부터 강원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다 1941년 춘천교구가 설립되자 그 관할권을 부여받았다.
이렇게 하여 1831년 파리 외방 전교회를 시작으로 1945년 8·15 해방 이전까지 한국 천주교회는 3개의 선교회와 1개의 수도회가 선교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 선교·수도회는 각기 모국을 달리 하였고, 수도회들에 의한 한국 교회의 지역적인 분할은 수도회의 모국에 의한 한국 교회의 내적인 분할의 모습도 띠웠다. 그러나 이들의 선교 노력은 한국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일합병’ 이전에 비해 새로운 입교자들의 증가율이 감소되고 신자들의 종교열이 식어졌다고 해도, 특히 재정난으로 선교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지만 일제하 35년간 선교사들은 교세 확장을 이루었다. 1910년 1개 교구이던 것이 1940년 일제 말에는 9개 교구로, 신자수도 73,519명에서 177,038명으로 약 2.4배 증가하였다. 이 같은 교회의 신장은 파리 외방 전교회·베네딕도회·메리놀회·골롬반회 선교사들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4) 작은 형제회와 수도 영성
3개의 선교회나 1개의 수도회와는 성격이 다른 또 다른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였다. 1937년 9월 15일 대전에 진출한 작은 형제회는(1223년 설립) 관상 생활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본에 진출해있던 캐나다관구가 한국 교회 사제단의 피정을 지도하면서 한국 진출을 모색, 1937년 4월 16일 서울교구장 라리보(Larribeau) 주교에게 건의하였다. 라리보 주교는 4월 22일 서울교구 평의회의 결정에 따라 대전에 수도회 설립을 허락하고 서울교구 성직자들을 위한 피정의 집 설립을 요청하였다. 캐나다 관구 소속 회원 2명이 진출하여 1938년 12월 대전 목동에 ‘천사들의 성 마리아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작은 형제회가 진출한 1937년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해였고, 일제의 전시총동원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종교계에 대한 압박도 심하였다. 일제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 태평양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그 모습과 활동을 잘 펼 수는 없었지만 프란치스칸 영성을 지닌 작은 형제회의 진출은 한국 교회에 수도 영성을 소개하는데 기여하였다. 베네딕도회가 진출해 있었지만 원산교구를 관할하고 있었고, 3개의 선교회들이 각기 관할구역을 나누어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당시에 작은 형제회는 성당 선교라는 활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생활로 한국 교회에 영성의 축을 형성함으로써 교회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교를 위주로 달리고 있던 한국 교회에, 일제 말기의 혼란기에 프란치스칸 영성에 의한 수도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1831년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진출로부터 1937년 작은 형제회까지 106년 동안 3개의 선교회와 2개의 수도회 등 5개의 남자 선교·수도회가 진출하여 한국 교회에서 활동하였다. 첫 번째 선교회의 진출로부터 두 번째 선교회의 진출까지는 92년, 두 번째 선교회의 진출로부터 세 번째 선교회의 진출까지는 10년의 시간이 요구되었다. 한편 1909년 교육 사업을 목표로 진출한 베네딕도회에 이어 두 번째로 진출한 수도회는 프란치스칸 영성을 펼치고자 하는 작은 형제회로 28년 만이었다. 포교지 교회라는 이유 때문이겠지만 100여 년 동안 겨우 2개의 수도회만이 진출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가 수도 영성을 접할 기회가 적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선교회에도 각기 고유한 영성이 있다. 그러나 선교회들은 최고의 목표가 포교지에의 선교이다. 그러므로 선교회들의 선교 노력을 뒷받침해준다는 측면에서도, 피선교지 현지인들의 신앙 활동의 다양한 접근이라는 측면에서도 수도회가 두 개뿐이었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할 것이다.
<표 1> 조선교구 설정 이후 8·15 해방 때까지의 남자 선교·수도회
수 도 회(교황청 설립) | 선 교 회 | 계 |
성 베네딕도 수도회(1909) 작은 형제회(1937) |
파리 외방 전교회(1831) 메리놀 외방 전교회(1923)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1933) |
5 |
2 | 3 |
3. 8·15 해방 이후 교육·의료 수도회들의 진출
1) 해방 이전 진출 선교․수도회들의 활동
1945년 8․15 해방은 민족의 해방이었으며, 교회에도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1948년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교회도 분단의 현실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38선 이북의 교회에는 종교탄압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으며, 38선 남쪽의 교회는 종교의 자유와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서는 휴전선 이북에서 종교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반면 남한의 교회는 더 많은 발전을 기약할 수 있었다. 8․15 해방 이후 1962년 교계제도(敎階制度)가 설정되기 이전까지 한국 교회에서 활동한 남자 선교․수도회는 크게 기존의 단체들과 이 시기에 새로이 진출 또는 설립된 단체들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기존의 선교․수도회들이 전개한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 말기 한국인에게 서울교구장직을 넘겨주고, 일본인에게 대구교구장직을 이관한 후 파리 외방 전교회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 동안 한국에 파견된 170여 명의 회원 중 25명이 순교하였고, 10명의 회원이 1984년 103위 한국 성인에 포함되어 있다. 8․15 해방 이후 1948년 대전지목구의 선교를 맡았고, 1958년 안동지목구의 선교를 맡아 한국에서의 활동을 재개하였다.
함경도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던 베네딕도회는 8․15 해방 이후 더욱 큰 어려움에 부딪쳤다. 당시 덕원수도원은 수도원 안에 정미소, 포도주 양조장, 인쇄소 등을 운영하는 한편 수도원 소유지를 경작하여 식생활을 자체 해결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군과 북한 공산정권은 처음에는 토지 개혁령을 이유로 농지와 전답을 몰수하였고 이어 1948년 덕원 수도원을 폐쇄하였으며, 1949년 5월 9일 밤부터 본격적으로 수도자와 성직자들을 체포하였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덕원 수도원은 전소되었고, 체포된 수도원 가족들은 교화소에 감금되었다가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겪은 후 1954년 1월 8일 독일로 송환되었다. 그 동안 25명이 사망하였고, 42명이 송환되었다.
한국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6월 베네딕도회는 경북 칠곡군 왜관 성당과 낙산 성당에서 피난 중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1953년 왜관․낙산․성주 등 3개 성당을 감목대리구로 설정, 관할하였고, 1955년 경북의 김천․문경․상주․금릉․선산․칠곡․성주군으로 감목대리구를 확장하였으며, 1956년 왜관공동체를 정식 수도원으로 인정받았다. 한국 진출의 목적이 교육 사업이었던 베네딕도회는 왜관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아 교육 사업을 가장 먼저 시작하였다. 1955년 4월 순심고등학교, 1961년 8월 순심중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또한 1960년 분도출판사, 인쇄소, 목공소를 시작하여 덕원수도원에서 펼쳤던 수도회의 삶을 계속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적성국 내지 준적성국 국민이라 추방되었던 메리놀회와 골롬반회도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메리놀회는 1947년 1월 한국에 재입국하였으며, 1948년 회원인 번(Byrne) 주교가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임명되어 한국 교회와의 관계가 한결 밀접해졌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그해 7월 11일 번 주교와 부쓰(Booth) 신부가 납북 당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1950년 11월에는 캐롤(Carroll) 몬시뇰이 메리놀회 한국지부장으로서 평양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53년 초 서울교구장 노기남(盧基南) 주교로부터 청주지역의 사목을 위임받아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해방 이전 선교 근거지가 평안도였던 메리놀회가 남한에서 선교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교구장의 배려였다. 또한 한국전쟁 과정에서 한결 위상이 높아진 미국이 메리놀회의 모국이며, 전후 복구비용의 상당 부분, 구제품의 상당량이 미국에서 전달되었다는 것도 일정한 이유가 될 것이다. 메리놀회는 1955년 청주에 농아와 맹아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58년 6월 청주교구가 설정되자 그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58년 인천감목대리구가 설정되면서 사목을 시작하여, 1961년 인천교구가 설정되자, 관할권을 이양 받았다.
골롬반회는 일제 말기 광주교구장직을 일본인 성직자에게 넘겨주고 태평양전쟁 중에는 적성국 내지 준적성국 국민이라 일제의 탄압을 받았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강원도 홍천에 연금 당하였다. 또한 6․25 한국전쟁 중 7명의 성직자가 피살되었고, 2명이 납치당하였다. 전후골롬반회는 한국교회의 성당 설립에 주력하였다.
작은 형제회는 1955년 12월 이탈리아 관구 소속의 회원들이 진주에 진출하여 남부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58년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수도원으로 인정받아 수련을 시작하였고, 1959년 6월 경남 진주 산청에 “성심원”을 설립하여 나환우를 위한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8․15 해방 이전부터 한국 교회에서 활동 중이던 남자 선교․수도회가 해방 이후 교계제도 설정 이전까지 전개한 활동은 해방 이전과 비슷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절반이 선교 지역에서 제외되고 그에 따라 평안도를 선교 지역으로 하였던 메리놀회, 함경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베네딕도회는 남한에서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도 황해도 선교지를 제외하게 되었으니 그만큼 선교회들의 선교 구역에 어려움이 드러났다. 한국인 서울교구장과 대구교구장은 선교의 근거지를 상실한 메리놀회와 베네딕도회에 선교지를 분할,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다질 수 있도록 하였다.
2)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의 창설
1937년 작은 형제회의 진출 이후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등으로 선교회도 수도회도 전혀 진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7년 7월 한국 교회에는 고유한 교황사절(서리)이 파견되었고, 1949년 4월 7일 교황사절로 승격되었다. 교황청의 이러한 조치는 한국 교회의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측면을 보증하는 것으로 해방 이후, 그리고 전후 한국 교회에 수도회들이 진출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전이 성립되고 1953년 10월 30일 방유룡 신부에 의해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인준 1956년 12월 6일, 이하 복자수도회로 약칭)가 설립되었다.) 35년간의 일제 식민지배와 3년간의 한국전쟁으로 많은 선교사와 한국인 성직자들이 목숨을 잃고, 본국으로 추방당하여 한국 교회에는 성직자의 숫적인 부족이 초래하였다.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는 1953년 10월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5명의 회원과 방유룡 신부가 공동생활 시작함으로써 그 모습이 드러났다. 최초의 한국인 설립 남자 수도회인 복자수도회가 전개한 최초의 활동은 1956년 6월 새남터 순교성지 관리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교회는 순교지 관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였는데 복자수도회가 순교지 관리를 통하여 순교자 현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새남터 성지 주변의 빈민들을 위해 1958년 ‘복자공민학교’를 설립, 교육 활동을 하였으며(1969년 도시 재개발로 빈민 이동, 폐교), 라리보 주교의 요청으로 천안의 ‘대건 남자중학교’를 경영하였다.(1959년 8월 17일 복자 수녀회에 인계, 철수) 또한 광주교구장 헨리(Henry) 주교의 요청으로 1959년 제주 서귀포 분원을 개설하고 귤 농장과 피정의 집을 운영하였다. 이어 1961년 5월 인천교구에 만수동분원을 설립하고 수도 생활의 일환으로 농장을 운영하였다. 복자수도회가 전개한 활동은 교육 사업과 농장 경영이 중심이 었다.
3) 교육 수도회와 의료 수도회의 진출
한국 최초의 수도회가 설립된 이듬해인 1954년 5월 6일 살레시오회가 진출하였다.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수도회의 진출을 필요로 하였던 광주교구장 헨리 주교가 당시 일본에서 청소년 교육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살레시오회를 초청하였다.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하였던 베네딕도회의 진출 이후 45년만이었다. 베네딕도회는 해방 이후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었다. 살레시오회는 1956년 3월 살레시오중학교(1974년 폐교, 1994년 재개교), 1959년 4월 살레시오고등학교를 개교하여 살레시오 교육을 전개하였다. 또한 1956년 4월 광주에 목공 훈련소를 개설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훗날 서울 대림동의 근로 청소년 기숙사 내에 마련된 목공 훈련소의 모체가 되었다. 1958년 6월에는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서울교구 도림동성당의 사목을 맡았다.(1969년까지) 당시 한국은 일본 관구에 소속된 선교지였으므로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살레시오회가 진출한 해인 1954년, 예수회(1540년 9월 27일 창설)가 10월 30일 진출하였다. 일제 말기인 1943년 10월 메리놀회와 골롬반회가 예수회의 한국 진출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세계 교회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으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47년 한국 주교들이 교황청에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육수도회의 진출을 요청하였고, 1948년 교황 비오 7세가 예수회에 한국에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요청하였다.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목적으로 한국 주교단이 요청하여 교황 비오 12세의 명을 받은 예수회가 당시 일본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1955년 1월 미국 윈스컨시 관구가 한국 교육 사업을 위임받아 사업 전 규모에 대한 계획을 구체화하였다. 이어 1956년 11월 대학 설립을 위해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토지를 매입, 1959년 11월 서강대학교 건물을 준공, 1960년 4월 제1회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61년 광주교구의 요청으로 “광주 대건신학대학”을 위탁 경영하였다.(1969년까지)
1956년 샤미스트회가 설립되었고, 1958년 10월 6일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1223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창설, 이하 꼰벤뚜알회로 약칭)가 진출하였다. 1937년 작은 형제회 진출 이후 21년 만에 진출한 프란치스칸 영성을 따르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였다. 1958년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중국의 공산화 때문에 로마로 강제 귀환 당하였던 파도바 관구의 프란치스코 팔다니 신부가, 일본의 꼰벤뚜알회에서 공부를 마치고 로마에 온 한국인 허철(안드레아) 신부를 만남으로써 한국 진출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국 선교를 의논하였고, 관구 차원에서 두 사람의 한국 파견을 결정하였다. 1958년 10월 부산 범일동성당 사목을 시작으로, 1959년 5월 대구교구 범어동성당의 사목을 시작하였다.
성당 선교와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남자 선교․수도회가 활동하고 있던 한국 교회에 새로운 목표를 지닌 수도회가 진출하였다. 1958년 11월 19일 한국 교회 최초의 의료 수도회인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1537년 설립, 이하 요한 수도회로 약칭)가 광주교구로 진출하였다. 요한 수도회 진출은 선교회와 교육 사업을 위주로 하던 수도회들과 더불어 의료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수도회의 활동 영역을 넓혔다는 면에서 첫 번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기존의 수도회들과는 달리 오직 수도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수도회라는 점에서 두 번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요한 수도회는 1960년 1월 광주에 ‘성 요한 의원’을 개원,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60년 9월 17일 마리아회(1817년 윌리암 요셉 샤미나드 신부에 의해 프랑스에서 창설)가 진출하였다. 광주교구장 헨리 주교의 초청으로 태평양관구에서 3명의 회원이 광주교구에 진출하였다. 마리아회의 아시아 지역 진출은 19세기 말부터로, 1888년 1월 5일 일본 요코하마에 진출한 이후 삿뽀로, 후쿠오카, 나가사키, 오사카, 도쿄 등지에 5개의 명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일본 교육계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08년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 있던 마리아회를 초청하였고, 1923년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도 초청 의사를 비쳤으나 당시는 거절하였다. 그리고 1948년 마리아회 태평양관구가 설정되면서 수도자와 수련자들이 증가하자 1950년대 말부터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고 선교지를 물색하던 중 광주교구장 헨리 주교의 한국 진출 요청을 받고 진출을 결정하였다. 한국 진출 처음에는 광주에서 소신학교 운영에 참가하면서 신학생 교육에 주력하였다.
1962년 1월 15일 성 바오로 수도회가 진출하였다. 일본에서 27년간 활동하였던 성 바오로 수도회의 회원들이 한국 지부 설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1961년 12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와 상의하여 서울 성북동 한국 순교 복자 수도원을 임시로 빌리고 1962년 1월 15일 강북구 미아 9동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인쇄 시설을 갖추는 한편 한국의 젊은이들을 받아들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교계제도 설정 이전까지 16년 동안 한국에 진출하였거나 설립된 남자 선교․수도회는 총 8개이다. 선교회는 전혀 없으며, 8개 모두 수도회이다. 이 시기 남자 수도회의 특징은 우선 수도회의 설립을 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회인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 그리고 샤미스트회의 설립은 아직 포교지 교회의 처지이기는 하지만 한국 교회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는 김대건과 동료 순교자들을 수호자로 모심으로써 한국인의 토양을 빚어내려 하였던 토착화를 위한 노력의 첫 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외국에서 진출한 수도회를 대상으로 할 때 활동 분야는 주로 교육이었다. 살레시오회와 예수회, 그리고 마리아회가 교육을 목적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의료와 출판․인쇄를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가 진출하고, 사회사업에 주력하는 수도회도 진출하여 활동 영역이 매우 다양해졌다. 또한 살레시오회와 천주의성요한수도회, 그리고 마리아회 등이 광주교구장의 초청으로 진출하여 이 시기에는 광주교구가 수도회 초빙에 가장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지역적으로는 교황청 설립 수도회일지라도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수도 회원들이 진출하여 일본 교회와 한국 교회가 수도회를 중심으로 볼 때에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의 혼란 시기,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 한국 사회와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한 것은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교육가 의료 사업을 목적으로 수도회들이 진출하였다는 것은 당시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들이 한국 사회와 교회의 요구에 상당히 부응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표 2> 해방 이후 교계제도 설정 이전까지의 남자 수도회
교황청 설립 수도회 | 한국 교회 설립 수도회 | 계 |
살레시오회(1954) 예수회(1954)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1958) 천주의 성 요한회(1958) 마리아회(1960) 성 바오로 수도회(1962) |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1953) 샤미스트(1956) |
8 |
6 | 2 |
4. 교계제도의 설정과 한국 수도회들의 창설
1) 교계제도 설정 이전 진출․설립 수도회들의 활동
1962년 3월 10일 교황 요한 23세는 교황서한을 통해 한국에 교계제도의 설정을 공포하였다. 현지인 교계제도의 수립은 포교지에서의 교회 조직의 최종 목표인 동시에 포교지에서의 교회 조직의 완성이다. 현지인 성직자가 복음전파를 책임지고 교구를 관할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포교지에서 뿌리를 내리기가 어렵다. 한국 천주교회는 130여 년간의 포교지 교구에서 정식 교구로 승격하였다. 교계제도의 설정으로 완전한 제도를 갖춘 지역교회로서, 또 자립 능력을 갖춘 교회로서 전 교회에 관한 중요 문제를 결정하고, 전 교회를 통치하는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첫 번째의 모습이 1962년 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한국주교단이 정식 초청됨으로써 분명하게 드러났다.
교계제도의 설정과 더불어 1963년에는 대한민국과 교황청간에 공사급 외교사절의 교환이 합의됨에 따라 12월 11일 주한교황공사관이 설치되었다. 1966년 양국은 공사급 외교사절을 대사급으로 승격시켰고, 그해 9월 5일 주한교황대사관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1960년대 초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 내적으로 뿐 아니라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천주교 선교 내지 활동을 위해 대단히 좋은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교계제도의 설정, 그리고 교황청과 대한민국의 외교 관계의 등급 승격은 세계의 많은 선교회와 수도회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교계제도의 설정은 자립 교회의 형성을 의미한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아니라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교회의 모습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에서는 상당한 아쉬움을 남겼다. 게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하였던 목표 중 하나였던 지역 교회의 가치 구현이라는 면에서도 한국 천주교회는 발전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다. 교계제도 설정 당시 한국에는 13개의 남자 선교․수도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단체들이 교계제도 설정 이후 전개한 활동은 크게 선교, 교육, 청소년 사목, 사회복지, 피정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선교 면을 보자면 파리 외방 전교회와 메리놀회, 골롬반회는 앞 시기와 비슷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골롬반회는 1971년 신설 제주교구의 사목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1970년대 150여 명의 선교사들이 광주대교구와 춘천교구, 그리고 제주교구에서 활동하였다. 1980년대 초에는 전국 7개 교구, 61개 성당에서 사목 활동과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에는 선교회들 뿐 아니라 수도회들도 성당 사목을 담당하였다. 살레시오회가 1963년부터 구로3동성당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꼰벤뚜알회는 1964년 4월 부산교구 대연동성당, 1965년 부산교구 해운대성당 기장공소, 1969년 11월 마산교구 하동성당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또한 1972년 서울 한남동 국제성당, 1977년 인천교구 갈산동성당을 설립하고, 1984년 1월 부산교구 기장 성당을 신축하였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 교육 활동을 전개한 수도회는 메리놀회와 마리아회이다. 메리놀회는 1963년 3월 성당 선교 뿐 아니라 부산 메리놀 간호전문학교를 시작함으로써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쏟았다. 마리아회는 1966년 11월 학교법인 목포 마리아회 학교의 설립인가와 1967년 9월 목포 마리아회중학교의 설립 인가를 거쳐 1968년 개교하였고, 1975년 3월 목포 마리아회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또한 목포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낙도 학생들을 많이 받아들였는데 당시로서는 드물게 도서지방의 학생들과 어려운 환경에 있는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를 운영하였다. 1983년 2월 인천교구의 요청으로 인천 대건고등학교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1988년 중학교는 폐교)
청소년에 대한 배려도 이루어졌다. 1963년 살레시오회는 대림동에 근로청소년을 위한 기숙사와 신학원을 설립하였고, 1964년 4월 6일 돈 보스꼬 청소년센터를 건립하였다. 1967년 돈 보스꼬 직업전문학교를 마련하여 1970년 사회복지기관 인가를 정부로부터 획득하고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계기술을 가르치는 동시에 공단지역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문화 교육, 가톨릭 노동청년회나 소년원 사목 등 사회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9년 12월 서울 영등포구 근로청소년회관에서 청소년 사회복지, 교정 사목에 주력하였고, 1979년부터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살레시오 교육회관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의 인성교육을 위한 수련회 활동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꼰벤뚜알회는 1971년 7월 대구 화선소신학교를 일반 남자학생 기숙사로 함께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마리아회는 1972년 11월 15일 서울 망원동에 불우 청소년을 위하여 효성야간학교를 개설, 중학교 과정을 교육하고 직장을 알선하기도 하였다.(학생 수 감소로 1985년 2월 28일 폐원)
이 시기 남자 수도회들이 전개한 사회복지활동은 나환우와 그 자녀들에 대한 배려, 유아원 설립, 양로원 운영, 야간 중학교 설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1962년 12월 9일 꼰벤뚜알회는 부산에 성당을 완공하고, 그해 대연동 난민 주택에 미감아 27명이 모여 살기 시작하자 이들을 돌보기 위해 ‘성 프란치스코의 집’(1994년 1월 나환자 자녀들이 감소함에 장애 아동을 위한 재활원으로 사업 전환)을 시작하였다. 또한 국립 부산 오륜대 나환자 마을 ‘상애원’ 공소를 돌보고, 1963년 3월 부산 대연동에 콜베 유치원을 개원하여 유아 교육(1963년 6월 6일 인가받고, 1983년 2월 20일 자립 유아원으로 독립)을 시작하였다. 또한 1973년 부산 대연동 수도원 건물에 야간 중학교를 개설하였고, 1978년 인천 갈산동에 요셉 양로원을 건립하였다. 예수회도 1966년 6월 서강대 내에 산업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1978년 3월 성 이냐시오 학교(야학)를 설립하였다. 교육 출판에 주력하던 베네딕도회는 1970년 경북 선산에 “선산양로원”(1992년 7월 그리스도교육수녀회로 이관)을, 1975년 경북 칠곡에 “결핵요양원”을 각각 개원하였다. 작은 형제회도 1974년 6월 진주에 성 프란치스꼬 양로원을 설립하였고, 1978년 서울 용산에 베들레헴의 집을 개원하여 행려자와 빈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 한국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평신도들에게 피정에 대한 장소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베네딕도회는 1965년 1월 한국 교회 첫 피정의 집인 왜관 피정의 집을 개원함으로써 신자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왜관 피정의 집은 신자들에게 기도와 영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영적인 성장에 기틀을 다졌다. 왜관에 이어 베네딕도회는 1972년 서울 장충동에 분도회관을 개원, 서울과 인근 신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베네딕도회에 이어 1973년 4월 예수회가 수원에 “피정의 집”(말씀의 집)을 개원하였으며, 1976년 5월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가 서귀포분원에 “피정의 집”(복자회관)을 건립하였다.
한편 요한 수도회는 1976년 신경정신과와 소년의 집을 개원하였으며, 1984년 1월 춘천시립복지원을 위탁 운영하였다. 꼰벤뚜알회는 1964년 9월 17일 대구에 화선 소신학교를 설립, 성소 육성의 신기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성 바오로 수도회는 1964년부터『교리교육을 하는 법』,『가정』이라는 제목의 책들을 발행하면서 출판 사도직을 시작하였다. 또한 1983년 2월 서울 논현동에 성 바오로 서원을 개원하고 12월 천호동에 서원을 개원하여 교회 출판물 보급에 주력하였다.
수도회 내부 조직 면에서도 작은 움직임이지만 변화를 보였다. 작은 형제회는 1969년 한국순교복자 준관구로 승격하였고, 꼰벤뚜알회는 1975년 12월 1일 준관구로 승격하였다. 베네딕도회는 1971년 제2대 아빠스로 한국인 신부가 피선되었고, 1981년 이동호 아빠스가 함흥교구와 덕원면속구 교구장서리로 임명되었다. 이는 한국 교회의 성장, 각 수도회들의 발전과 수도회들 안에서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성장에 기인한 것이었다.
2) 관상 수도회와 사회복지활동 수도회
기존 남자 선교․수도회 외에도 많은 선교․수도회들이 교계제도가 설정된 한국 천주교회에 진출하였다. 교계제도가 설정된 한국 교회에 가장 먼저 진출한 것은 과달루페 외방 선교회(1949년 10월 7일 멕시코 주교단에 의해 창설, 이하 과달루페회로 약칭)로 1962년 11월 26일이었다. 골롬반회 진출 이후 선교회로는 29년 만이었다. 회원들이 부산에 머물며 선교 대상지를 물색하던 중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광주대교구장 헨리 주교와 과달루페회 총장과의 협의에 따라 1963년 9월 1일부터 여수 동산동성당과 서교동성당에서 사목을 시작하였다. 1964년 8월 서울대교구 성수동성당의 사목을 시작하였고, 1965년 10월 3일 순천 저전동성당의 사목도 시작하였다. 1968년부터는 한국 신학생들 양성을 시작하였으며, 1970년 마산교구 남해성당, 1974년 부산교구 양산성당의 사목을 관할하였다. 그리하여 과달루페회는 광주․서울․마산․부산교구 등 4개 교구에서 성당 사목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기여하였다.
과달루페회의 진출 이후 1964년 9월 14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회(1720년 십자가의 성 바오로에 의해 창립)가 진출하였다. 광주대교구장 헨리 주교의 요청으로 미국 시카고관구에서 3명의 회원이 진출하였다. 초기에는 여러 교구의 성당 사목과 광주 대건신학대학의 영적 지도신부 등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 4월 28일 광주시 화정동에 피정센터를 건립하여 피정과 세미나 등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1969년 9월 15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초청으로 서울대교구에 진출하여 돈암동, 서교동, 부암동 등에 작은 연락처 및 피정의 집을 운영하다가 1977년 4월 20일 우이동에 명상의 집을 개관하여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들의 영적 쇄신과 성화를 위한 장소가 되게 하였다. 예수 고난회의 가장 본질적인 사도직은 피정센터를 이용한 피정 지도였다. 한국에서 최초로 피정센터를 이용한 피정을 소개하고 정착시켰다.
한편 1967년 5월에는 남자 선교․수도회 장상 협의회가 설립되었다. 그 동안 15개의 선교․수도회가 진출 혹은 설립되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지역적으로 활동 영역을 공유함에 따라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모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선교․수도회들 간의 영적인 유익을 촉진하고, 공동의 관심사와 그 문제를 연구하며, 상호 긴밀한 협력을 통하여 더 효과적인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주교단과 개별 주교와의 적절하고도 효율적으로 접촉하는 대표 기구의 역할을 하며, 각 교구장들과 협력을 강화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1969년 9월 15일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예수의 작은 형제회(1933년 10월 2일 설립)가 서울대교구에 진출하였다. 관상 수도회로 1976년 8월 경기도 양주에 수련소를 시작하였고, 1981년 한국관구로 승격하였으며, 1984년 경기도 광명시 철산리 분원을 시작하였다.
관상 수도회로 1974년 9월 8일 서울 삼선동에서 가르멜 남자수도회(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맨발 형제회, 1226년 1월 20일 교황청 인준)가 창립되었다. 관상 생활과 사도직 실천이라는 두 가지 축을 바탕으로 한다. 가르멜회의 총원장 휘니안이 1974년 3월 25일자로 한국에서의 수도회 창설을 허락하고, 1974년 8월 10일 서울 여자 가르멜 수도원의 초청으로 가르멜 남자수도회가 진출하였다. 그런데 이 수도회는 외국인에 의해 창설된 것이 아니고 몇 명의 한국인이 프랑스에 있는 가르멜회에 입회하여 수련과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스스로 수도회를 창설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1976년 2월 인천시 계산동에 수도원을 신축하였고, 1977년 5월 정식 수도원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수련 수도원이 되었다. 1980년 4월 인천 수도원에 피정의 집(기도의 집)을 마련하였는데, 많은 신자들이 개인 피정을 통해 기도 생활을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건립하였다.
1971년 9월 13일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1817년 창설)가 진출하였다. 진출 목적은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을 하느님께 인도한다’는 마리스타 교육정신을 바탕으로 특별히 한국의 불우 청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이를 통하여 한국 교회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살레시오회와 진출 목적이 비슷한데, 구성면에서 살레시오회가 성직자와 수도자로 구성된 수도회인 반면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수사들로만 이루어진 수도회라는 차이점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의 전체 수도회 차원에서 각 관구마다 10%의 회원들을 의무적으로 선교지에 파견하도록 결정하였다. 멕시코관구에서 이러한 수도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아시아 각국을 두고 대상지를 물색하던 중 1971년 4월 아르투로 차베스 관구장과 엔리코 수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관구 총회에 보고, 그해 말 한국 진출이 결정되었다. 1976년 2월 안동 마리스타 학생회관(1988년 3월 철수)을 개관하였고, 1979년 안동 마리스타 교육회관 내에 야간학교를 개설하였다. 1981년 3월 충주 농아학교에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1981년 3월 안동교구 영주 다미안 의원(1996년 9월 철수)을 위탁 운영하였다.
1977년 7월 5일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서울 삼산동에 사랑의 선교 수사회(1963년 3월 25일 교회 인가 획득)가 진출, 활동을 시작하였다. 앤드류 총장 수사가 극동 지역에서의 활동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홍콩, 대만, 일본을 경유 1976년 2월 내한하였는데, 이때 한국 진출이 결정되었다. 서울에 이어 부산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부산에 진출, 부산교구장의 정식 요청이나 허락이 내리지 않던 상황이었지만 1980년 9월 16일 부산 분원을 개설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주로 자갈치 시장의 걸인들, 알코올 중독자들, 부랑자, 산동네 움막에서 살아가는 이들, 빈민가 아이들, 시립병원 행려병자 등을 보살폈다. 1981년 앤드류 총장이 부산교구장 주교를 직접 방문하여 정식으로 승인을 요청하여 비로소 정식단체로 받아들여졌다. 1981년 10월 3일 광주대교구에, 1983년 9월 인천교구에 분원을 마련하고 극빈자 가정을 돕기 시작하였다.
1982년 9월에는 인천교구 나길모 주교의 초청으로 글라렛 선교수도회(1849년 7월 창설)가 진출하였다.
3) 외방 선교회와 한국 수도회들의 창설
교계제도 설정 이후에는 선교회와 수도회들이 한국 내에서 설립되었다. 1975년 2월 26일 한국 주교회의의 결의에 의해 한국 외방 선교회가 설립되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한국 교회에 대한 이웃 교회들의 형제적 협조에 대한 감사의 정신으로 복음화 활동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서든지 그 지방 교구장의 선교와 사목 협조 요청에 따라 봉사할 한국 선교 사제를 지도 양성한다는 것이 설립 이념이었다. 1977년 청주교구장 정신석 주교가 선교회 설립 교령을 반포하였고, 1981년 3월 선교회 소속의 첫 사제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인 1981년 파푸아 뉴기니의 마당교구에 선교 사제를 파견, 외방 선교를 시작하였다. 파리 외방 전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선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한국 교회가 보다 선교 조건이 열악한 지역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대만, 홍콩, 필리핀 등으로 선교 영역을 확대하였다.
한국 외방 선교회의 설립에 이어 1976년 9월 24일 미리내 천주 성삼성직 수도회가 정행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에 의해 수원교구장의 인가로 미리내 성지에서 설립되었다. 관상과 활동을 겸한 성직 수도회로 정결 성소가 특별한 카리스마이다. 1974년 수원교구장으로 임명된 김남수 주교가 교구장 착좌 후 정행만 신부에게 미리내 사적지 개발을 부탁하면서 수도회 설립을 실현하였다. 김남수 주교의 재가를 받아 1975년 10월 6일 지원자 1명의 수련을 시작하였다. 1981년 미리내 피정의 집을 증축하여 수도원으로 사용하였고, 1979년 5월 1일 첫 사도직 사업체로 경기도 안성에 “성 요셉 성물 공예사” 개설, 교회용품 제작함으로써 자립의 길을 마련하였다. 1982년 5월 1일부터 “부산 성 요셉 병원”에서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81년 5월 10일 미국인 사제 알로이시오 슈왈츠 몬시뇰에 의해 서울에서 그리스도 수도회가 창설되었다.(1999년 9월 15일 서울대교구 김옥균 주교 인준) 서울시에서 발생하는 부랑인들을 수용 보호하는 서울 시립 갱생원을 서울시의 의뢰로 위탁 운영하면서 시작되었다. 부랑인 시설인 은평의 마을에 2,000여 명의 노약자․정신질환자․지체장애자․정박아․결핵환자․알코올중독자 등을 수용하여 보살피고 있다.
1962년 교계제도 설정 이후 1984년의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전까지 23년 동안 진출, 설립된 남자 선교․수도회는 11개로 교황청 설립 수도회 6개, 교구 설립 수도회 4개, 선교회 2개이다. 포교지 교회에서 자립 교회가 된 후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설립된 수도회가 3개이며, 외방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선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가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경제개발정책과 유신체제로 인하여 한국 사회가 병들고, 노동자․농민들이 고통당하고 있던 때였는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도회들이 진출하여 활동하였다는 것은 교회와 수도회가 시대의 요구, 민족의 요구를 읽고 응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는 1970년대 한국 교회가 전개하였던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관상 수도회들의 진출은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과 더불어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성장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남길 수 있다.
그러나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토착화라는 측면에 비추어 볼 때 이 시기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자 선교․수도회들의 태도는 아쉬운 점도 남긴다. 이 시기 토착화에 선교․수도회들이 기울인 관심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었다. 토착화에 대한 관심은 남자 수도회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박약한 한국 교회의 토양을 바꾸고, 수도회들의 쇄신과 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수도회에서도 토착화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 내지 한국 교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연유한다고 할 것이다. 또한 교계제도가 설정되었지만 한국 교회가 여전히 복음 전파에 있어서 계속 선교사들의 도움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문화 선교로의 전환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표 3> 교계제도 설정 이후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전까지 진출․설립된 남자 선교․수도회
수 도 회(교황청 설립) | 수 도 회(교구 설립) | 선 교 회 | 계 |
성 바오로 수도회(1962) 예수 고난회(1964) 예수의 작은 형제회(1969)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1971) 가르멜 남자수도회(1974) 글라렛 선교 수도회(1982) |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1976) 사랑의 선교 수사회(1977) 그리스도 수도회(1981) |
과달루페 외방선교회(1962) 한국 외방 선교회(1975) |
11 |
6 | 3 | 2 |
5.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후 수도회들의 다양성
1) 200주년 이전 진출․설립 남자수도회들의 활동
① 성당 선교 활동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회는 설립 200주년(이하 200주년으로 약칭)을 기념하였고, 103위 한국 성인을 탄생시켰다. 당시 신자 수는 180만 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발전은 한국인 신자들의 노력, 파리 외방 전교회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선교․수도회들의 복음 전파 노력과 다방면에 걸친 사목 활동의 결과였다.
기존의 선교․수도회들이 200주년 이후 전개한 활동을 선교, 교육, 피정, 사회복지, 의료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선교회들은 각기 담당하고 있는 사목 관할구역에서 선교사들이 차츰 한국인들에게 관할권을 넘기고 떠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선교사 본연의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골롬반회의 경우 1980년대 초에는 61개 성당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한국인에게 이관하고 1992년에는 27개 성당으로 사목 영역을 감소시켰다. 대신 알코올 상습 예방, 단 도박 친목 활동, 영성 생활 연구소를 통한 신앙생활 상담, 노동 사목, 정신 지체인 교육 시설, 농촌 현장을 통한 선교 사업 등에 참여하였다. 또한 한국인 회원을 양성하여 다른 선교지에 파견하였다. 그 동안 한국 지부에서 활동한 숫자는 약 250명이다. 한국 순교 복자회는 1981년 9월 순교성지 새남터성당의 사목을 담당하기 시작하여 1987년 9월 새남터 순교성당을 건립하였다.
수도회들을 보면 베네딕도회는 1984년 왜관대리구의 금릉군과 김천시의 성당을 대구대교구에 이관하였고, 1986년 3월 왜관대리구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1986년 1월 한국 천주교회 ‘통신 교리부’를 통하여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마리아회는 1986년 1월 인천 산곡동성당을 위탁받았고, 메리놀회는 1988년 2월 서울 고속 터미널 사목을 시작하였으며, 1991년 12월 서울 가락동시장 사목을 시작하였다. 글라렛 선교회는 1985년 2월 인천교구 석남동성당 소속 4개 공소를 위탁받아 활동을 시작하였고, 1987년 2월 석남동성당 관할 서곳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자 선교성당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성당 사목은 글라렛 선교회의 고유 활동이 아니므로 1997년 2월 교구에 넘겨주고 공소 3개를 선교성당으로 신설하여(오류동성당) 교구와 5년 계약으로 사목을 담당하였다. 1998년 인천교구 도화동성당 관할 연평도공소를 선교성당으로 승격시켜 3년 계약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꼰벤뚜알회는 1996년 1월 대구 범어성당을 교구에 인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회는 1997년 1월 제주교구장 초청으로 제주교구 표선성당 사목을 시작하였다.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는 1991년 3월 19일 수원교구 설립 수도회로 인준 받았다. 그리고 1995년 6월 수원교구 송전성당, 1995년 9월 수원교구 갈전리 성당과 월피동성당, 1996년 수원교구 석수동성당, 1997년 2월 수원교구 고등동성당, 1997년 5월 인천교구 일신동성당, 1998년 1월 수원교구 인덕원 성당, 1999년 1월 수원교구 포일성당 등 수원교구와 인천교구의 성당을 맡아 사목에 주력하였다.
② 외방 선교
200주년 이후 개척된 새로운 사목 영역은 외방 선교와 북한 선교 준비였다. 외방 선교 중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선교는 다음과 같이 추진되었다. 1984년 사랑의 선교회가 대만에, 1986년 동 선교회가 마카오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1990년 3월 한국 외방 선교회가 대만에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1995년 살레시오회가 중국 연길을 한국관구의 선교지로 정하여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1996년 12월 한국 외방 선교회가 홍콩에 첫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1997년 10월 중국에 첫 선교사를 파견하였으며, 1998년 9월 연길에 공업기술고등학교 설립하여 9월에 개교하고 청소년들에게 기술교육을 통한 복음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메리놀회는 1990년 7월 필리핀외방선교회와 통일 후 이북에서 협력 활동을 하기로 하였다.
중국 선교와 더불어 한국의 남자 선교․수도회들이 진출한 지역은 아프리카와 미국이었다. 살레시오회는 1980년부터 아프리카 케냐와 수단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1989년 9월 한국 외방 선교회가 파푸아뉴기니에 한국성인 103위 성당을 건립하였다. 1991년 4월 성 바오로 수도회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한국인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1999년 10월 마리아회가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1994년 11월 미국 뉴욕 교포 사목, 12월 하와이 교포 사목. 1996년 미국 오클라호마 한인성당 교포 사목 등을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가 담당하였고, 1999년 6월 복자회가 미국 시카고 한국 순교자들의 모후성당 교포 사목을, 1999년 7월 꼰벤뚜알회가 미국 LA 마리아 레지나 성당의 한인 공동체 사목에 관하여 미국 관할주교와 계약을 체결,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③ 사회 복지 활동
200주년 이후 남자 선교․수도회들이 전개한 사회복지활동을 매우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빈민을 위한 구체적인 도움의 손길이 펼쳐졌다. 베네딕도회는 1985년 2월 “구미 노동사목연구소”를 개설하였고, 1992년 7월 경북 칠곡군 왜관에 “분도 노인마을 양로원”을 건립하였다. 한국 순교 복자회는 1988년 3월 서울 정릉분원에서 출소자를 위한 교정 사목을 시작하였고, 1993년 3월 경기도 양주에 정신지체아들의 공동체인 “인지의 집”을 인수 관리하였다.(1995년 인지의 집을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만남의 장으로 명칭을 “나루터”로 개칭) 작은 형제회도 1988년 7월 “청량리 빈민식당 프란치스꼬의 집”을 시작하였고, 1992년 4월 진주 하대동에 “노인요양원”, 1998년 6월 장성에 “노인요양원”을 각각 건립하였다.
예수회는 1998년 9월 “새 샘터 치유공동체”를 만들어 약물 의존자의 치료를 돕고, 1993년 10월 이냐시오의 집을 개설하여 빈민을 위한 사회사목을 전개하였다. 꼰벤뚜알회는 1986년 8월부터 인천에 “요셉의 집(양로원)”을 운영하였다. 요한 수도회는 1990년 11월 광주에 ‘알코올 상담 치료센터’를 마련하였고, 1991년 1월 서울 “늘 푸른 나무”를 위탁 운영하였다. 사랑의 선교회는 1985년 9월 대전에 분원을 마련하여 극빈자 가정을 돕는 한편 1998년 본원을 서울 신영동으로 이전하고 본원이 있던 삼선동에 행려자들을 위한 목욕 시설과 쉼터를 마련, 운영하였다.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도 1990년 4월 영주 다미안 의원 내에 양로원을 마련하였다.
④ 피정의 집 운영
200주년 이후 각 수도회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목 분야 중 하나가 피정의 집을 통한 복음전파이다. 이 시기에는 거의 모든 수도회가 피정의 집을 건립하고, 신자들의 피정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200주년 이후 한국 교회가 당면한 냉담자의 급증, 영세증가율의 감소, 신자들의 영적인 성장 소망에 기인한 것이었다. 1984년 10월 꼰벤뚜알회는 부산 성 프란치스꼬의 집을 건립하였고, 마리아회는 인천 샤미나드 피정의 집과 공동체를 개설하였다. 기존의 교육관이나 피정의 집이 대부분 서울 지역에 편중되어 있어 지방의 신자들이 이용하기 힘들었는데, 마리아회가 인천 지역에 대규모의 피정센터를 마련함으로써 지방 교구의 영성 성장을 돕는 조처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한국 순교 복자회는 농장지역의 도시화와 본원 신축으로 수련소가 이동함에 인천 만수동분원을 피정의 집으로 전환하여 1987년 9월 “성 안드레아 피정의 집”을 개원하였으며, 1995년 6월 서울의 제1신학원을 복자사랑 피정의 집으로 변경 개원하였다.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수도회는 1989년 8월 대전교구 공주 수리치골에 “사제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고, 베네딕도회는 1993년 11월 부산 명상의 집을 증축하였다. 글라렛 선교회는 1996년 10월 광주 남평 글라렛 교육관을 일반 피정을 위한 장소로 활용하였다. 가르멜 남자수도회는 1990년 5월 마산에 기도의 집(개인 피정의 집)을 준공하였고,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는 1997년 9월 “미리내 묵상의 집(피정센터)”을 설립하였다.
한편 1990년대 중반에는 피정의 집과 더불어 영성연구원들을 개원하여 보다 깊이 있는 영적 성장을 희구하였다. 예수회는 1993년 7월 서강대 내에 “이냐시오 영성연구소”를 설립한데 이어 1996년 9월 전북 완주에 “예수회 영성사목연수원”을 설립하였다. 1992년 10월 28일 전주교구장의 허락을 받아 전주교구에 정식으로 진출, 수류성당 인근에 자리 잡고 피정 지도 등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피정 지도 뿐 아니라 한국 교회 영성 흐름의 동향 등 영성 관계 자료 수집 및 연구와 교육을 위한 연수원으로 자리 잡게 됨에 교통이 편리한 곳을 물색, 전주교구에서 무상 임대해 준 대지에 1996년 9월 3일 “영성사목연수원”을 건축, 개원하였다. 영성사목연수원은 영성 자료 수집과 연구 등의 사도직을 수행하고, 성직자들을 위한 영성 수련과 개인 피정 등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예수 고난회는 1997년 5월 춘천교구 양양에 “고독의 집”을 축복하였다.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피정과 영적 쇄신에 주력하였던 고난회는 새로운 피정 문화를 개척하고 고난회의 영성을(고난의 기억, 기도, 참회, 고독, 청빈의 정신) 더욱 쇄신 발전시키기 위해 1999년 4월 16일 강원도 양양에 “오상 영성원”개인 피정의 집, 수련소, 영성 연구소의 목적으로 설립, (五傷靈性院)을 개관하였다.
⑤ 청소년 사목과 매스컴 활용
200주년 이후에는 청소년 사목에 많은 수도회들이 관심을 기울였다. 살레시오회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소규모 복지시설인 ‘나눔의 집’을 서울 양천구 신길동에서 1985년 시작한 이래 서울, 광주, 대전, 춘천에서 20여 개의 소공동체 운영, 청소년 사회복지에 기여하였다. 또한 1994년 9월 매스컴을 통한 청소년 교육의 필요성이 증대되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돈 보스꼬 정보문화센터를 서울 신길동에 세우고, 출판․영상․컴퓨터 등 첨단 분야에서 청소년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일선 사목자들을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청소년 이해를 넓혀주는 ‘청소년 사목전문학교’를 1996년 9월 개교하였다.
마리아회는 1993년 11월 교육을 통한 청소년들의 참된 인간성 형성을 목적으로 망원동의 마리아 가족 회관 내에 ‘가톨릭 교육 문화원’을 개원하였다. 학생들의 종합적 사고능력을 길러주는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학부모와 교사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및 정보를 제공하며, 청소년 상담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1986년 6월 서울 “마리스타 교육관”을 개관하였고, 1987년 3월 서울 망원동의 요한 보스꼬 기술교육원에, 1998년 청주교구 양업고등학교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 사명의 근본 요소는 가장 버림받은 이들, 특히 청소년들을 위한 그리스도교 교육을 통한 하느님 말씀의 직접적인 선포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의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청소년 교육에 우선 역점을 두면서 사도직 활동을 전개하였다.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는 1997년 3월 1일부터 서울 관악구에 예수 그리스도의 집을 운영하며 사회복지 관련 사도직. 가정 형편 어려운 아이들의 자립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소년에 대한 관심 고조와 더불어 인쇄 매체 및 매스컴에 대한 관심도 집중되었다. 마리아회는 1984년 ‘계성출판사’를 설립,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1993년 작은 예수회에 운영권 이양). 성 바오로 수도회는 1990년 4월 서울 저동, 1990년 8월 경남 울산, 1990년 8월 마산, 1991년 4월 강원도 강릉, 1991년 6월 수원, 1991년 12월 충북 청주, 1992년 7월 서울 영등포, 1993년 4월 부산에 서원을 각각 개원, 도서 보급에 힘을 쏟는 한편 복음의 전당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부터 시대의 조류를 파악하여 필요한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1991년 11월 월간 어린이 만화잡지 ‘내 친구들’을 창간하여 어린이 대상 복음 전파를 시작하였고, 1996년 4월 성 바오로 북클럽 제도를 시작하여 통신 판매, 1996년 6월 30일 성 바오로 선교 네트를 설립하여 컴퓨터 통신과 인터넷 통한 복음 전파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한국 순교 복자회는 1990년 9월 수원교구 이천 분원에 “성 안드레아 신경정신과병원”을,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는 1996년 1월 대구에 “성삼의원”을 개원하여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베네딕도회는 1984년 서울 장충동분원에 “종교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1999년 4월 월간『들숨날숨』을 창간하였다. 예수회는 1991년 5월 서울 공덕동에 “한몸 공동체(사회사목 공동체)”를 설립하였고, 1996년 5월 충북 괴산에 “누룩공동체(농촌 사목)”, 1999년 2월 서울 마포에 “아루뻬 공동체(빈민 사목)”를 설립하였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는 1993년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의 초청으로 전주교구에 진출, 일상생활을 통한 관상과 성체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경배, 복음적 가난의 실천, 육체노동과 가난한 이들의 사회적 조건에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생활을 하고자 하였다.
수도회 내적으로는 1983년 11월 사랑의 선교 수사회가 극동관구 소속에서 한국 관구로 승격하였고, 1985년 2월 예수회가 독립지구로 승격하였으며, 1987년 12월 10일 작은 형제회가 한국 진출 50주년을 맞아 로마 총본부로부터 정식 관구로 인가받았다. 1988년 2월 27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회가 시카고관구로부터 독립하여 ‘한국 순교자들의 준관구’로 승격하였고, 1988년 9월 15일 최초의 한국인 관구장이 임명되었다. 1989년 9월 마리스타 교육수사회가 지구로 승격하였고, 1992년 7월 18일 성 바오로 수도회가 총원 직할에서 준관구로 승격하였다. 1994년 5월 마리아회가 한국 지구로 승격하였고, 1999년 1월 31일 살레시오회가 관구로 승격하였다.
꼰벤뚜알회는 1999년 수원교구장으로부터 수원교구 내 수도회 분원 설립과 사도직에 관한 허가 공문을 받았고, 요한 수도회는 1972년 한국지부 수련소를 설치하고, 1983년 수도원 춘천공동체를 마련하였으며, 1986년 한국인 첫 종신 허원자를 배출하였다. 글라렛 선교회는 1992년 7월 3일 한국인 첫 사제를 배출하였고, 가르멜 남자 수도회는 1989년 10월 1일 마산수련원을 마련하였고, 1996년 9월 서울 명륜동에 학생 수도원, 1998년 서울 세검정 공동체, 1999년 3월 광주 공동체를 개원하였다. 1989년 9월 21일 로마본부 직속의 지부로 승격되었다. 한국 외방 선교회는 1986년 1월 첫 종신 서원식을 하였고, 1987년 2월 초대 총장으로 조원규 신부가 선임되었으며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는 1990년 2월 20일 제1회 종신 서원식을 거행하였다.
2) 200주년 이후 진출․설립 수도회
① 200주년 이후 수도회들의 활발한 진출
200주년 이후에는 그 전보다 더욱 많은 수도회들이 한국 교회 내에서 설립되고, 수많은 다양한 수도회들이 진출하였으며, 선교회들도 진출하였다. 이 시기에 진출한 수도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4년 8월 25일 신언회(말씀의 선교 수도회)가 수원교구장으로 초청으로 진출하였다. (1875년 창설) 하느님 말씀 선포가 신언회의 사명인데, 말씀을 전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성당 사목, 학교, 교육, 병원, 출판 인쇄, 피정 지도, 매스컴, 농어민 및 소수 부족, 특수 사목, 가난한 이들의 생활 개선, 사회 정의와 평화 운동 등 다양한 선교 활동을 전개한다. 1986년 9월 철산동성당에서 첫 성당 사목을 시작한 이래, 1987년 7월 소화동 성당 주임(~1993년 2월), 1988년 2월~9월 과천성당 보좌, 1988년 9월~1991년 12월 단대동성당 보좌, 1988년 3월~1990년 9월 서부성당 주임, 1992년 1월~1994년 목감동성당 주임, 1997년 3월부터 분당 마태오성당 주말 보좌, 1998년 4월 안양 중앙동성당 보좌, 영통성당 주말 보좌, 1999년 6월 분당 요한 성당 보좌, 1999년 6월 광북동 성당 주말 보좌, 1999년 9월 안산 대학동 성당 주말 보좌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1991년 4월부터 노동자 사목을 시작하여 1994년 12월부터 베트남 노동자 사목, 1996년 12월 폴란드 노동자 사목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97년 6월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 “갈릴래아”, 1999년 2월 어린이들의 쉼터 “마르첼리노의 집”을 시작하였다. 신언회는 성당 사목과 한국인 및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사회복지 사목을 전개하였다.
1985년에는 예수 성심 전교수 도회와 아우구스띠노 수도회가 진출하였다. 2월 17일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1854년 12월 8일 설립)가 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의 도움으로 부산교구장으로 초청을 받아 진출하였고, 9월 아우구스띠노 수도회가 진출하였다.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는 1985년 7월 서울 종로구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1986년 부산교구에서 괴정성당 보좌로 성당 사목을 시작하였으며, 1989년 2월 부산교구에서 해양사목, 1991년 2월 인천교구에서 해양사목을 시작하였다. 아우구스띠노 수도회는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가 로마의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총장에게 진출을 요청함으로써 영국 및 호주관구 소속 4명의 신부들이 인천교구에 진출하였다. 인천 전동 수도원에서는 신자․청소년의 영적 지도, 피정, 재속회 회원 지도, 교육을 하고, 서울 성수동 수도원에서는 수도회 양성 공동체,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강사와 영적 지도를 한다.
1986년에는 7월 16일 카푸친 작은 형제회가 서울대교구장 초청으로 서울교구에 진출하였다. (1528년 설립) 또한 1987년 11월 7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진출하였다. (1319년 설립) 1988년 8월 부산 베네딕도수녀원 경내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한국 진출의 특징은 모원인 몬떼 올리베또 대수도원에서 양성된 한국인들이 주축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1992년 11월 6일 부산교구 관할구역 내 ‘순교자의 여왕’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 설립 인준과 마산교구 관할 내 “복자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고성수도원” 설립을 인준 받았다. 1991년 11월 경남 고성에 수도원 건립 기공식을 하였고, 1993년부터 이곳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농산과 축산, 피정 지도를 주요 활동으로 한다.
1987년 12월 13일 한국 시토회가 서울대교구 설립 관상 수도회로 창립되었다. 1988년에는 1월 20일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1901년 1월 창설)가 인천교구에 진출하였다. 1986년과 1987년 꼰솔라따 수도회 총장과 참사회에서는 아시아 진출을 위해 한국, 일본, 필리핀을 방문하였고, 그 결과 당시 세계 성체대회 개최 등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한국 진출을 결정하였다. 인천교구의 도움으로 진출하여 1992년 3월 인천 만석동 빈민 사목 공동체를 시작하였다.(1999년 4월 철수) 이어 1999년 4월 부천시 소사에 종교간 대화의 집(위로의 샘터)을 마련하였다.
1990년에는 5월 1일 팔로티 수도회가 진출하였고(1835년 4월 4일 설립), 5월 12일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가 진출하였다.(1816년 1월 25일 설립)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허락으로 한국에 진출, 1992년 4월 신흥동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5월 25일에는 도미니코 수도회(1216년 구즈만의 성 도미니코에 의해 창설)가 진출하였다. 1971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김인중(베드로) 신부가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서원하였다. 1982년 도미니코 수도회 아시아 총회에서 한국 진출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성 로사리오관구가 관심을 표명하였다. 1984년 로마 본부에서 책임자가 파견되어 한국에 3개월 머무르면서 여러 곳을 순방하였고, 1987년 아시아 총회에서 성 로사리오관구에 한국 선교 위임을 결정하였다. 1988년 성 로사리오관구 책임자들이 한국을 순방, 서울대교구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스페인신부 1명이 파견되었다. 구체적인 사도직 활동은 서울대교구 소속 성당에서의 미사 집전, 강론 등 담당, 배론의 도미니코 관상수녀회의 영성 지도, 기타 수녀회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양성, 교회 내 소공동체들의 조직과 활성화, 비그리스도교인들을 향한 복음 전파이다. 1994년 8월 서울에 성도미니꼬수도원을 설립하였고, 1997년 9월 서울 수련원을 개원하였으며, 1998년 3월 7일 첫 수련을 시작하였다.
1991년 3월 15일 한국 구속주회(1732년 창설)가 서울대교구의 인가로 진출하였다. 가장 한국적인 공동체 생활을 만든다는 목적으로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고자 노력하였다. 성당에서의 신자 재교육과 영성 지도,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영성 지도와 피정 지도, 기타 다양한 선교 사업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동참하고자 한다. 선교. 특히 영원한 도움의 성모 신심 전파를 위해 노력한다. 1998년 8월 1일 처음으로 2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이외에도 1991년 12월 25일 성모 승천 수도회(1845년 설립)가 광주대교구에 진출하였고, 1992년 9월 7일 필리핀 외방 선교회(1965년 1월 설립)가 진출하였으며, 1996년 4월 13일 원죄 없으신 잉태의 아들 수도회(1857년 설립)가 진출하였다. 또한 1997년 2월 14일 부산교구장 이갑수 주교의 초청으로 사도 성 요한 수도회(1975년 12월 8일 설립)가 부산교구에 진출, 초장성당에서 사목을 시작하였다. 1987년 10월 6일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윤기선(마리아 요셉)이 사도 성 요한 수도회에 입회하여 1994년 사제 수품을 받고, 수도회는 한국 진출을 위해 각 교구와 협의하던 중 부산교구장 초청으로 진출, 초장 성당에서 사목하며 수도회 터전을 다지고자 노력하였다. 작은 형제 전교회도 이 때 진출하였다.
② 200주년 이후 한국 천주교회 설립 수도회
200주년 이후 한국 교회 내에서 설립된 수도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6년 12월 27일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가 설립되었다. 1980년 9월 청주교구 사제총회에서 꽃동네 설립이 가결되었다. 1987년 12월 28일 청주교구장이 정식 수도회로 설립하고자 전국 교구장주교들에게 강복 요청 서한을 발송하였는데, 1988년 1월 1일 14개 교구 중 13개 교구 주교들로부터 창설 동의가 있었다. 1983년 9월 부랑인 시설을 준공하였고, 1985년 10월 정신병 요양원, 1986년 10월 결핵요양원, 1987년 10월 노인 요양원, 1988년 10월 알코올중독자 요양원과 인곡자애병원, 1990년 심신장애인 요양원, 1992년 9월 가평 꽃동네 부랑인 시설, 1993년 10월 가평 꽃동네 정신요양원과 노인요양원, 1994년 성 빈첸시오 천사의 집, 1995년 10월 가평 꽃동네 심신장애인 요양원과 노체리 안드리 자애병원, 1996년 10월 사랑의 연수원 교육관을 각각 건립하였다. 그리고 1999년 3월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에 이어 1987년 9월 12일에는 한국 시토회(트라피스트)가 설립되었다. 공동 기도와 개인 기도를 조화 있게 하고 노동하면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추구하는 관상수도회로 피정의 집을 운영한다. 1991년 10월 28일 성 황석두 루카 전교 수도회가 설립되었고, 1992년 12월 8일 작은 예수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1986년 8월 15일 오순절 평화의 수도회가 경남 밀양에서 설립되었다. 사회복지 법인 오순절 평화의 마을을 운영하고, 산하 여주 천사들의 집과 평화의 재활원(1999년 6월부터) 등을 운영한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후 1998년까지 14년간 진출, 설립된 남자 수도회는 20개로 그 어느 때보다도 많다. 교황청 설립 수도회가 13개, 교구 설립 수도회가 5개, 그리고 선교회가 2개이다. 이 시기 남자 선교․수도회의 특징은 그 활동 범위가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활동 범위가 다양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 내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도회 고유의 영성 내지 활동 범위를 망각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이르면 거의 모든 수도회가 수도회 고유의 색깔을 퇴색시키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각 수도회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 수도회가 자리 잡고 활동하고 있는 지역 교회와 지역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하기 어렵다. 수도회마다 고유의 영성을 밝히고,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듯이 각자의 카리스마를 견고하게 하는 모습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표 4>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후 진출․설립된 남자 선교․수도회
수 도 회(교황청 설립) | 수 도 회(교구 설립) | 선 교 회 | 계 |
신언회(1984) 아우구스띠노 수도회(1985) 예수성심전교수도회(1985) 카푸친 작은 형제회(1986)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1988)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1988) 도미니꼬 수도회(1990)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1990) 구 속 주 회(1991) 성모 승천 수도회(1991) 원죄 없으신 잉태의 아들 수도회(1996) 사도 성 요한 수도회(1997) 작은 형제 전교회(1997) |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1986) 한국 시토회(1987) 성 황석두 루가 전교 수도회(1991) 작은 예수 수도회(1992) 오순절 평화의 수도회(1996) |
팔로티 수도회(1990) 필리핀외방선교회(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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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맺음말
40여 개의 남자 선교․수도회가 200여 년의 한국 교회사와 함께 하였다. 본고는 남자 선교․수도회에 대해 한국 사회 내지 한국 천주교회의 변화와 함께 시기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한국 진출 첫 선교회인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진출로부터 해방 이전까지 3개의 선교회와 2개의 수도회 등 5개의 남자 선교․수도회가 진출하여 한국 교회에서 활동하였다. 첫 번째 선교회의 진출로부터 두 번째 선교회의 진출까지는 92년, 두 번째 선교회의 진출로부터 세 번째 선교회의 진출까지는 10년의 시간이 요구되었다. 한편 1909년 교육 사업을 목표로 진출한 베네딕도회에 이어 두 번째로 진출한 수도회는 프란치스칸 영성을 펼치고자 하는 작은 형제회로 28년만이었다. 포교지 교회라는 이유 때문이겠지만 100여 년 동안 겨우 2개의 수도회만이 진출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가 수도 영성을 접할 기회가 적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선교회에도 각기 고유한 영성이 있다. 그러나 선교회들은 최고의 목표가 포교지에의 선교이다. 그러므로 선교회들의 선교 노력을 뒷받침해준다는 측면에서도, 피선교지 현지인들의 신앙 활동의 다양한 접근이라는 측면에서도 수도회가 두 개뿐이었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할 것이다.
해방 이후 교계제도 설정 이전까지 한국에 진출하였거나 설립된 남자 선교․수도회는 총 8개였다. 이 시기 남자 수도회의 첫 번째 특징은 수도회의 설립이었다.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회인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 그리고 샤미스트회의 설립은 아직 포교지 교회의 처지이기는 하지만 한국 교회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는 김대건과 동료 순교자들을 수호자로 모심으로써 한국인의 토양을 빚어내려 하였던 토착화를 위한 노력의 첫 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외국에서 진출한 수도회를 대상으로 할 때 활동 분야는 주로 교육이었다. 살레시오회와 예수회, 그리고 마리아회가 교육을 목적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의료와 출판․인쇄를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가 진출하고, 사회사업에 주력하는 수도회도 진출하여 활동 영역이 매우 다양해졌다. 또한 살레시오회와 요한수도회, 그리고 마리아회 등이 광주교구장의 초청으로 진출하여 이 시기에는 광주교구가 수도회 초빙에 가장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지역적으로는 교황청 설립 수도회일지라도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수도회 회원들이 진출하여 일본 교회와 한국 교회가 수도회를 중심으로 볼 때에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의 혼란 시기,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 한국 사회와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한 것은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교육가 의료 사업을 목적으로 수도회들이 진출하였다는 것은 당시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들이 한국 사회와 교회의 요구에 상당히 부응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962년 교계제도 설정 이후 1984년의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전까지 진출, 설립된 남자 선교․수도회는 11개였다. 포교지 교회에서 자립 교회가 된 후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설립된 수도회가 3개이며, 외방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선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가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경제개발정책과 유신체제로 인하여 한국 사회가 병들고, 노동자․농민들이 고통당하고 있던 때였는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도회들이 진출하여 활동하였다는 것은 교회와 수도회가 시대의 요구, 민족의 요구를 읽고 응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는 1970년대 한국 교회가 전개하였던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관상 수도회들의 진출은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과 더불어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성장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남길 수 있다.
그러나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토착화라는 측면에 비추어 볼 때 이 시기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자 선교․수도회들의 태도는 아쉬운 점도 남긴다. 이 시기 토착화에 선교․수도회들이 기울인 관심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었다. 토착화에 대한 관심은 남자 수도회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박약한 한국 교회의 토양을 바꾸고, 수도회들의 쇄신과 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수도회에서도 토착화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 내지 한국 교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연유한다고 할 것이다. 또한 교계제도가 설정되었지만 한국 교회가 여전히 복음 전파에 있어서 계속 선교사들의 도움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문화 선교로의 전환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후 1999년까지 진출, 설립된 남자 수도회는 20개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았다. 이 시기 남자 선교․수도회의 특징은 그 활동 범위가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활동 범위가 다양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 내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도회 고유의 영성 내지 활동 범위를 망각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이르면 거의 모든 수도회가 수도회 고유의 색깔을 퇴색시키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각 수도회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 수도회가 자리 잡고 활동하고 있는 지역 교회와 지역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하기 어렵다. 수도회마다 고유의 영성을 밝히고,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듯이 각자의 카리스마를 견고하게 하는 모습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하였던 남자 선교 수도회는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였고, 한국의 사회 발전과 교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국 교회의 발전은 1962년 교계제도의 설정으로 확인되었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 보다 활발한 활동들이 각 방면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전후한 때부터 일기 시작한 각 수도회들의 사목 활동 다양화는 수도회들의 고유 색상을 퇴색시키기 시작하였다. 또한 급변하는 시대 변화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시대를 이끄는 역할을 소화하지 못하는 한계도 노정시켰다. 각 수도회들이 고유의 카리스마를 지키며 협력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면들이 고려될 때 각 수도회들의 발전,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