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품 같은 섬진강은 소리 없이 흐르며 산 굽이 물길마다 마을을 떨구어 놓았다. 강이 길이고 놀이터이고 삶이었다. 호곡, 고리실, 삿골, 두계, 섬진강 마을들은 올해도 그렇게 봄을 마중하고 있었다. 옛 봄 같은 길을 걸어 강을 가슴에 품어본다.
- ▲ 강과 억새와 길이 함께 흐르는 것 같다.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 경계 부근에서 샘솟은 물줄기가 남도 땅 222㎞를 달려 남쪽 바다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섬진강, 그 물줄기가 굽이치며 임실과 순창, 남원을 지나 곡성으로 흘러든다. 곡성은 섬진강 물줄기의 중류쯤 되며, 곡성 아래로 구례와 하동을 지나 바다가 된다.
곡성은 버스보다 기차로 가는 편이 낫다. 용산역에서 하루에 10여대 운행하는 기차를 타고 곡성역에 내렸다.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옛 곡성역이 있다. 옛 곡성역은 1933년 건립됐다. 그 이후 곡성역은 섬진강에서 채취한 모래를 운반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 1999년 지금의 곡성역 자리에 새 곡성역이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옛 곡성역은 지금은 ‘섬진강기차마을’이라는 이름의 테마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섬진강기차마을’ 입구에 옛날 건물을 재현해 놓은 영화촬영장이 있다. 이곳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등 여러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했다.
역 건물도 옛날 그대로다. 플랫폼과 기찻길이 남아 있는 그곳에 증기기관차가 보인다. 실제로 옛 곡성역과 가정역 사이 10㎞ 구간에 증기기관차가 다닌다. 시속 30~40㎞ 정도로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타고 봄바람 부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여행을 즐길 수 있다.
- ▲ 1.가정리 섬진강을 건너는 다리. 이 다리가 유실돼 현재 새 다리를 놓았다. 2. 옛 곡성역과 가정역을 오가는 증기기관차. 한 번 쯤 타볼 만 하다.
‘섬진강기차마을’ 구경을 마치고 택시를 타고 ‘줄배’를 탈 수 있는 호곡나루터에 도착했다. ‘줄배’란 사공 없이 여행자가 직접 줄을 당겨 강을 건너는 배를 말하는데 ‘줄배’ 자체를 타보려고 이곳을 찾는 이들도 심심찮게 있다고 한다.
물을 건너는 방법은 나룻배 하나. 섬진강 양쪽 강기슭을 잇는 줄이 물 위에 선을 그었다. 줄을 당겨야 배가 움직인다. 이른바 ‘줄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강을 건너 줄 사공이 없다보니 여행자의 힘으로 줄을 당겨 한 치 한 치 강물을 접으며 건넌다. 푸른 강은 나룻배를 띄우고 곰살맞게 출렁인다. 아이를 안고 온 젊은 부부는 왔던 물길을 되짚어 간다. 섬진강에 하나 남은 ‘줄배’를 타러 온 거였다. 우리는 돌아가는 그들을 향해 허공에 손을 흔들며 인사를 전했다.
|Tip| 여행길라잡이
섬진강기차마을
•증기기관차 : 옛 곡성역과 가정역 사이 10㎞ 구간을 증기기관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연중무휴로 하루 5회 운행(기상 및 사정에 따라 운행 횟수는 증감 가능). 인터넷 예매 및 현장 발권. www.gstrain.co.kr
요금 : 왕복, 편도. 어른, 어린이 등에 따라 2700~6000원. 섬진강 기차마을 입장료 : 1000~3000원.
•레일바이크
침곡역~가정역 편도 5.1㎞ 코스. 인터넷예약. www.gstrain.co.kr 1만5000~2만2000원. 레일바이크 이용 후 무료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섬진강기차마을 내 왕복 1.6㎞ 순환 코스. 현장 선착순 접수. 7000원.
섬진강 자전거여행
가정역에서 다리를 건너면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자전거를 빌려 섬진강 따라 이어지는 자전거도로를 달릴 수 있다. 대여료는 1인용 2시간 3000원.
길은 강을 따라 흐르고 여행자는 길을 따라 걷고…
호곡나루에 내려 우회전, 산기슭에 달라붙은 길을 따라 걷는다. 강과 나란히 흐르는 길은 흙길이다. 작은 발걸음에도 흙먼지가 인다. 길가에 벚꽃나무가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에서 풀 먹인 호청이불이 사각거리는 하얀 속삭임이 들린다. 물결에 산란하는 햇살이 섬진강 은어떼가 일제히 물위로 뛰어 올라 반짝이는 것 같다. 은파금파 빛나는 그 풍경 앞에서 억새는 바람보다 부드럽게 일렁인다. 엄마 젖 같은 섬진강 물줄기가 말없이 깊어간다.
배 없는 나루, 고리실나루터를 지나 뺑덕어멈고개를 오른다. 고개 이름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고갯길은 뺑덕어멈처럼 ‘뺑덕’거리지 않았다. 그저 산 굽이가 그렇게 돌아가니 길도 따라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강이 그렇게 휘감아 도니 길 또한 그 따라 그렇게 감겨 도는 게 아니었겠는가.
- ▲ 곡성 섬진강 줄배는 호곡나루터 말고도 고리실나루터, 두계나루터 등 몇 곳이 더 있었는데 지금은 호곡나루터밖에 없다.
옛길은 지금처럼 산을 깎거나 굴을 뚫어 내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쌓이고 쌓여 희미한 오솔길 하나 생겼던 것이다. 호곡나루부터 1시간 조금 더 걸었을까. 두계마을이 나왔다. 우리가 하룻밤 묵어야 할 마을이다. 길은 마을 앞을 지나 가정리를 거쳐 구례로 흐른다. 우리는 길에서 벗어나 마을로 접어들었다.
갓김치에 꼬들빼기김치, 조기에 감자를 넣고 끓여낸 조기탕이 저녁 밥상에 오른 반찬의 전부였다. 다음날 아침은 돌부리해서 잡은 소로 국을 끓여 밥상에 올렸다. 반찬은 어제 저녁과 똑같았다. 아저씨 아줌마도 그렇게 잡수신단다. 꾹꾹 눌러 담은 밥그릇을 다 비우고 마을길로 내려서니 골짜기에 고인 동네 가득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 햇살 속에서 아줌마를 만났다. 방값, 밥값 생각해서 5만원을 내미니 3만원만 달라신다. 방값 3만원에 저녁, 아침밥은 그냥 차려주신 거란다. “요새 세상에 공짜밥이 어딨어요”라며 돈을 접어 아줌마 손에 꼭꼭 쥐어 주었다. 아줌마는 우리를 따라오며 돈 받아가라신다. 앞서 걷는 내 허리춤을 잡고 주머니에 돈을 넣을 것 같아 나는 아줌마 손을 잡고 “그럼 그 대신 어제 얘기해주신, 시집와서 아이들 낳고 기르던 옛집까지 길안내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시작한 아줌마의 발걸음을 뒤따랐다. 이끼 낀 돌계단을 밟고 산으로 오른다.아줌마 시집올 때도 있었던 돌계단이다. 경사가 얼마나 심했으면 꽃가마가 뒤로 기울어져 하마터면 새색시가 ‘깍다바튼’ 비탈 돌계단에 나뒹굴 뻔 했단다. 간신히 가마 문틀을 잡고 바짝 엎드려 봉변은 모면했다.
옛 기억이 봄풀처럼 돋아났을까? 아줌마 눈가에 실주름이 잡혔다. 그 순간 아줌마는 잠깐이나마 스무 살 ‘꽃색시’가 됐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줌마는 이곳에서 오남매를 낳았다. 시부모 살던 안채에는 안방과 아줌마 부부의 방이 있다. 그 옆에 있는 건물은 외양간과 아이들 방이었다. 작은 방에서 오남매가 자고 놀고 숙제하고 ‘옹송’거리며 자라났다.
부모의 한숨까지 함께 해야 했던 가난한 시골마을 아이들은 일찍부터 어른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어김없이 논으로 나가 김매고 밭을 일궜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어서 가 공부하라는 부모님 말씀도 거르고 주말을 꼬박 그렇게 햇볕 아래 논밭에 부모와 같은 하늘을 이고 일을 했다. 아줌마는 옛집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여기는 뒷밭이고, 여기는 헛간이고, 이것은 실 뽑던 물레고, 저건 곡식 갈던 맷돌이라며 눈길, 손길 가는 것마다 옛 이야기를 섞는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먹지도 입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뭉툭한 손끝, 주름살 깊은 골마다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다 아는 자식들이 엄마, 아버지 모시겠다고 하지만 아줌마, 아저씨는 마다했단다. 꽃다운 시절 꽃 같은 마음 꼭꼭 숨겨둔 옛집이며 논두렁 개울가, 산수유나무, 돌이끼 계단, 산모롱이, 봄 같이 피어난 돌담, 풀 한 포기 어느 것 하나 마음 가지 않는 게 없는 것이다.
- ▲ 곡성역 바로 옆에 있는 영화촬영 세트장. ‘태극기 휘날리며’를 여기서 촬영했다. 세트장이지만 어린시절 시골 읍내 분위기가 난다.
대숲 계단길을 내려와 마을길로 다시 나왔다. 앞장서겠다는 아줌마를 붙들며 이제는 우리끼리 마을을 돌아보겠다고 했다. “발 헛디디지 말고 조심히 걸으라”며 인사를 대신한 아줌마가 저 아래 밭으로 가는 걸 보면서 우리는 마을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대숲이 마을을 비호하고 햇살이 옛집들을 어루만져주었다. 돌담 골목을 돌아드니 옛 어른들이 쌓아 놓은 돌계단이 가파르게 이어졌다. 대숲이 울타리였고 벚꽃나무가 문패였다. 산수유 돌담은 그 옛날 붉은 열매 팔아 아이들 공부시켰던 효자나무였다.
마을을 빠져나온 우리는 다시 섬진강가에 섰다. 투명한 햇볕이 하늘을 닮아 파란빛이다. 물비린내 풋풋한 강가에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탄다. 섬진강가에 난 자전거 길이다. 우리는 강물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고, 자전거를 탄 아이들은 우리를 스쳐가거나 되돌아온다. 그 짧은 시간에 얼굴을 익혔는지 몇몇 아이들이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맑고 풋풋한 얼굴이 봄 햇살을 닮았다.
‘여기서부터 구례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곡성에서 구례를 지나 하동으로 섬진강이 흐르는 물길 따라 사람길도 이어진다. 그렇게 걸어 하동까지 갈 수도 있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오늘 여기까지. 다리 건너 가정역에서 ‘섬진강기차마을’까지 가는 증기기관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인근 식당에서 재첩국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벚꽃잎 피어나는 봄이 재첩철이다. 땅에서 벚꽃이 피고 질 때 강에서는 재첩꽃이 피어난다. 섬진강 모래바닥에서 건져 올린 재첩 뽀얀 국물에 풋풋한 봄이 가득하다.
|Tip| 여행길라잡이
길안내
•자가용 : 호남고속도로 곡성IC로 빠져 곡성읍내를 통과한다. 곡성읍내에서 17번 도로를 따라 압록, 죽곡 방향으로 가다보면 길 왼쪽에 호곡나루터(곡성읍내에서 약 4~5㎞ 거리. 나루터는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는 안 보인다. 도로 오른쪽에 ‘침곡가든’이라는 간판이 있는데 그 맞은편으로 내려가면 나루터다. ‘침곡가든’ 간판 길 맞은편에는 빨간 벽돌로 지은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다. 그 옆에 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가정리(곡성읍내에서 약 10㎞ 거리) 등이 나온다. 호곡나루터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한다. 차는 못 건넌다. 가정리까지 가면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널 수 있다. 다리를 건너 좌회전하면 두계마을이다.
•대중교통 및 호곡나루~두계마을 섬진강길 안내 : 용산역에서 곡성역 가는 기차를 탄다. 하루 10여차례 운행한다.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호남선(센트럴시티)에서 오후 3시에 차가 있다. 하루에 한 번 운행한다. 센트럴시티에서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에 내려 곡성행 버스를 이용하는 게 낫다.
곡성에 도착한 뒤 줄배를 탈 수 있는 호곡나루터까지는 버스 및 택시를 이용한다. 버스를 타려면 곡성읍내에서 압록, 죽곡행 군내버스를 타고 호곡나루터(‘줄배’ 타는 곳)에서 내려달라고 하면 된다. 곡성읍내에서 호곡나루터까지 약 5~6㎞ 정도 거리다.
호곡나루터에서 줄배를 타고 강을 건너 우회전. 강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고리실, 뺑덕어멈고개를 지나 두계리가 나온다. 1시간 조금 넘게 걸으면 된다.
걷기 싫은 사람은 곡성읍내에서 압록, 죽곡 방향 시내버스를 타고 가정리(가정역)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 좌회전, 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두계리 입구가 나온다(곡성~가정리는 10㎞ 정도 된다) .
아니면 곡성역에서 도보로 10~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섬진강기차마을’(옛 곡성역에 꾸며진 기차를 테마로 한 공원. 촬영 세트장과 레일바이크 증기기관차 등을 즐길 수 있다)에 가서 옛 곡성역~가정역을 오가는 증기기관차를 타고 가정역에 내려 다리를 건너 두계마을로 가면 된다.
먹을거리
•은어 : 섬진강의 은어는 향이 좋기로 유명하다. 몸에서 수박향기가 난다. 얇게 썰어 들깻잎에 싸먹으면 그 향이 입안에 오래 머문다. 소금을 뿌려 구워먹기도 하고 쌀을 넣어 죽으로도 먹거나 통째로 기름에 튀겨먹기도 한다. 가정역 부근과 압록유원지 부근에 식당이 있다.
•참게 : 섬진강은 참게 요리도 유명하다. 가정역 부근과 압록유원지 근처에서 맛볼 수 있다.
숙박
두계리 마을에 민박집이 있다. 펜션이나 통나무집처럼 잘 꾸며진 곳은 아니지만 시골마을 정취를 느끼면서 소박하게 하룻밤을 지낼 수 있다.
문의전화
섬진강기차마을(증기기관차 및 레일바이크) : 061-363-6174
두계마을 민박(낮에는 전화 연결이 어렵다) : 061-362-8542, 061-362-0640
나룻터가든(재첩국, 은어 및 참게 요리) : 061-362-8481
청소년 야영장(자전거 대여소) : 061-362- 4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