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아사다지로
십칠 년 전 눈 내리던 날 아침,
아내의 팔에 안긴 유키코를 저 홈에서 보냈다.
평소 하던 그대로 수신호를 하여 기차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기차로
유키코는 싸여 갔던 모포에 말려 차디찬 몸이 되어 돌아왔다.
“당신, 죽은 아이까지 깃발 흔들며 맞이해야 되겠어요?”
아내는 눈 쌓인 홈에 쪼그리고 앉아
죽은 유키코를 꼭 끌어안고 그렇게 말했다.
호로마이(幌舞)행 단선 기차는 비요로(美寄) 역 홈을 출발하여 시내를 통과하다가 잠시 본선 철도와 나란히 달리게 된다.
유리로 뒤덮인 리조트 본선 특급이 한 량짜리 기하 12형 기차를 뒤따라와 천천히 뜯어보기라도 하듯 나란히 달리다 이내 앞질러 가는 것이다.
기차 시각표 상의 장난인지 아니면 도회지 스키어들을 위해 준비한 연출인지, 특급 열차 차창에 다닥다닥 매달린 승객들이 옛 국영 철도의 상징인 붉은색 단선 디젤 기차를 구경하는 것이다. 이윽고 호로마이 선이 왼쪽으로 크게 커브를 그리는 지점에 다다르면, 열차의 넓은 차창에서는 플래시가 펑펑 터졌다.
18시 35분 비요로발 기하 12는 하루에 세 번밖에 운행하지 않는 호로마이 행 마지막 열차였다.
“쳇, 멋깨나 부리네. 사진까지 찍고 난리칠 게 뭐 있다고. 안 그래요, 역장님?”
젊은 기관사는 눈 덮인 평원을 가르며 내달리는 특급을 흘깃 돌아보다 조수석에 선 센지(仙次)를 올려다보았다.
“세상 모르는 소릴세. 요새 기하 12가 그야말로 문화재급인 거 모르나? 이거 한번 보겠다고 일부러 먼 데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어.”
“근데 왜 이 노선을 없앤대요?”
“이 사람아, 그거야 수송 밀도니 채산이니, 그런 문제 아니겠나.”
어련하시겠어요. 기관사는 엄지손가락을 어깨 위로 쳐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달랑 한 칸 달린 객차에 승객 하나 없이 초록색 좌석들만 침침한 형광등 불빛 아래 나란히 놓여있었다.
“비요로 중앙역 역장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왜 못 해?”
“역장님, 호로마이 선이 언제 수송 밀도니 뭐니 따져가며 운행했나요? 저도 벌써 사 년짼데, 고등학교 방학 때면 항상 이랬잖아요. 근데 이제 와서 왜 새삼스럽게 노선을 폐지한다고 하느냐구요.”
“난들 알겠나, 그런 걸. 지금까지 이렇게 버틴 것만 해도 과거의 실적을 크게 쳐준 거였지. 자네도 호로마이 출신이면 옛날에 이 노선이 얼마나 굉장했는지는 알고 있지?”
종착역인 호로마이는 메이지 시대부터 홋카이도(北海道) 제일의 탄광촌으로 기세를 떨쳤었다. 21.6킬로미터에 이르는 연선(沿線)에 여섯 개의 역이 있었고, 늠름하게 본선을 차지한 데고이치《D51형 증기 기관차의 애칭(본문 중의 《》표시는 모두 역주.)》가 석탄을 가득 싣고 쉴 새 없이 왕복하였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아침과 저녁, 고등학생 등하교 전용 단행 기차가 왕복할 뿐이고 중간에 지나치는 역에는 타고 내리는 사람도 없었다. 마지막 광산이 채탄을 중지한 게 벌써 십 년 전이었다.
“호로마이 역의 오토마츠(乙松) 씨가 올해 정년 퇴직이라는 것 같던데, 그래서 노선을 폐지하는 거 아녜요?”
“자네까지 부역장하고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먼. 삿포로에서 그런 것까지 신경 써가며 노선을 폐지하고 말고 할 것 같애?”
기하 12는 사람도 없는 기타비요로(北美寄) 역에 인사라도 하듯 잠깐 멈춰 섰다.
“야아, 홈에 눈이 엄청나네요. 내리는 대로 다 쌓였어요, 여기.”
“아, 신경 끄게. 출바알!”
조수석에 선 채로 센지는 재촉하듯 소리를 쥐어짰다. 커다란 신음 소리를 울리며 디젤 기차는 다시 설원을 향해 미끄러져 나갔다.
작업 외투의 털 달린 칼라를 단단히 여미며 센지는 하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남의 일이 아니지. 오토마츠가 올해 정년 퇴직이면, 내년은 내 차례야.”
“역장님은 역 빌딩의 중역이 되신다면서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
“누구고 뭐고, 비요로 역에 근무하는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내년 봄에 역 빌딩이 완성되면 거기로 가시기로 했다고들 하던데요.”
“넘겨짚지 말게. 아직 생각중이니까. 혼슈(本州)에서 건너온 백화점 점원들 틈에 섞여서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손님들에게 절하는 거, 당최 내키지 않아.”
“어이그, 저러시니까 될 일도 안 돼. 그저 천생 칙칙폭폭 뿌우-, 철도장이로 타고나셨다니까. 칙칙폭폭 뿌우- 하는 SL기관차 기관사로 그냥 남으시려는군요”
기관사는 왼손을 들어 “칙칙폭폭 뿌우-” 하며 기적 소리 흉내를 냈다.
센지는 자기도 모르게 페인트를 수도 없이 덧칠해서 이제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기하 12의 운전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훗카이도 여객철도(北海道 旅客
《한자가 일상용어인 일본에서는 복잡한 한자는 편리한 약자(略字)를 만들어 쓰고 있다. 철(鐵)은 ‘
’로 줄여 쓰도록 되어 있는데, 홋카이도 철도 회사는 회사명을 지을 때 쇠금(金) 변에 잃을 실(失) 대신 비슷한 모양의 화살 시(矢)를 붙였다.》道)’라는 로고에 눈이 멎는다. 국철이 분할 민영화되었을 때, 전국의 철도 회사들은 저마다 비슷비슷한 회사명들을 내걸었다. 그러나 홋카이도 철도 회사 이름에 ‘
’이라는 기묘한 한자가 쓰여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이 아니고 ‘
’ 것이다.
수많은 적자 노선을 안고 시작한 탓에 처음부터 경영난에 시달리던 홋카이도의 철도 회사는 재수가 좋으라는 단순한 바람보다 훨씬 더 간절한 염원을 담아 ‘돈을 잃는다’는 글자를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어딘가 어색한 문자다.
“근데, 전 어떻게 되는 거죠? 본선을 타라고 해도 어중간하고.”
“뭐가 어중간해?”
“본선 신차종을 제가 알아야지요. 그렇다고 매점 근무나 라면이니 국수 장사하는 데로 떨어져도 곤란하겠고.”
“걱정도 팔자다. 이 고철덩어리 끌고 다니던 실력이면 신칸센 할애비라도 맡겨만 달래. 운전이야 일류급으로 배웠지. 고맙게 생각하게.”
“그렇지만 저는 시속 오십 킬로만 넘어가면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구요. 그 속도만으로도 벌써 오금이 저릴 텐데요, 분명.”
센지는 유리에 서린 김을 장갑으로 훔쳐냈다.
기차가 완만한 비탈길을 올라서자 좌우의 능선이 바짝 다가들었다. 짧은 터널을 빠져나갈 때마다 쌓인 눈은 높이를 더해갔다.
“우와, 내일은 제설차를 보내야겠는데요?”
전조등에 비쳐 드러나는 환한 눈 빛의 길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불가사의한 이야기의 세계로 달음박질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센지는 배전반(配電盤)에 팔꿈치를 짚고 하염없이 앞으로만 앞으로만 뻗어나가는 빛과 어둠의 세계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호로마이에 닿으면, 그 길로 곧장 돌아오게. 도중에 오도 가도 못 하게 돼도 정월이라 기관구(機關區)에는 사람 하나 없을 테니까.”
기관사는 센지의 발치에 놓인 한 되들이 술병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호로마이에서 하룻밤 놀다 와도 되는 줄 알았는데요.”
“무슨 소리야? 마지막 상행선에 승객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승객은 무슨 승객이 있겠어요.”
기차는 산과 산 사이 역에 멈춰 섰다. 손님은커녕 폐점이 늘어선 역 앞에는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무슨 새해 인사나 하려고 오토마츠를 찾아가는 줄 아나? 다 늙은 영감 둘이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겠나. 그래도 부러워 보이면, 어때, 자네 오늘 밤에 우리랑 함께 술 마시고 세월 타령 좀 해볼래?”
“아, 그건…… 그냥 한번 해본 소리예요. 제가 그 자리에 감히 어떻게…… 추울바알-!”
“흠, 호령 소리는 제법 그럴싸하구나.”
“오토마츠 씨 흉내지요, 뭘.”
이윽고 얼어붙은 강 건너편으로 폐광된 광산들의 어두운 그림자를 등에 진 호로마이 마을의 불빛이 보였다.
“경적 울리게. 오 분 늦겠어. 오토마츠, 그새 홈에 나와 기다릴라.”
기하 12형은 남은 목숨을 서글퍼하듯 늙은 기적 소리를 이 산 저 산에 메아리로 울려 퍼뜨렸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터널의 둥그런 출구에 호로마이 역이 고스란히 담긴다. 채탄장 폐가들과 괴물 같은 컨베이어 그림자를 뒤에 거느린 새하얀 종착역이었다.
기관사와 센지는 나무로 된 구식 신호기 쪽을 가리키며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서치라이트가 붉은 벽돌로 지은 플랫폼을 비쳐냈다. 예전에는 무개(無蓋) 화차와 기관차들로 빽빽이 들어차던 화물야드가 이제는 그저 끝도 없는 설원이었다.
“저것 좀 봐요, 역장님. 어째 옛날 이야기 속 같네요.”
기차 바퀴가 삐걱이는 소리조차 어쩐지 먼 곳인 듯 아득하게 들렸다. 늙은 호로마이 역장이 눈 퍼붓는 종착역 플랫폼에 칸델라 등불을 들고 서 있었다.
“겨우 오 분 늦었는데, 계속 저러고 서 계셨나 봐요. 바깥 기온이 영하 이십 도는 될 텐데.”
두툼한 국철 외투 어깨 위에 눈을 한 뼘쯤 쌓아놓고, 짙은 남색제모의 턱끈을 단정히 잡아맨 채 오토마츠는 플랫폼 끝에 우뚝 서있었다. 기하 12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새삼 등을 꼿꼿이 세워 자세를 바로 하고, 장갑 낀 손가락 끝은 진입선을 향해 반듯하게 뻗어 신호를 보냈다.
“정말 멋있네요, 오토마츠 씨. 한 장의 엽서 같지 않아요?”
“젊은 사람이 그렇게 함부로 오토마츠 씨, 오토마츠 씨 하고 이름 부르는 버릇하는 거 아니야. 역장님이라고 해. 똑똑히 봐두게, 저게 진짜배기 철도원이야. 제복 벗고 터미널 빌딩 직원으로 불려가는 시시껄렁한 민영 철도 역장하고는 격이 다르지, 암.”
“예…… 보고 있자니 어째 콧등이 다 시큰하네요.”
기관사는 한바탕 기적을 울려댄 후 브레이크를 당겼다. 기하 12는 디젤의 굉음을 끌며 종착역 플랫폼에 멈추었다.
도착 시간에서 늦어진 오 분의 분량만큼 얇게 눈 덮인 플랫폼 위를 오토마츠는 장화를 저벅거리며 다가왔다.
“여어, 오토마츠. 여기 어지간히 춥구만. 늦어서 미안하이.”
부러 환하게 웃는 얼굴을 지으며 센지는 플랫폼에 내려섰다.
“미안하긴 무슨. 새해 복 많이 받게나.”
“자네야 말로 새해 복 많이 받아야지. 이번에는 자네하고 가는 해 보내고 오는 해 맞으려고 했는데, 히데오 녀석이 손주놈을 데리고 찾아오는 바람에 못 했지 뭔가.”
“허, 히데오가 벌써 애를 봤어? 그럼 센지 자네, 이제 영락없이 할아버지로군. 첫 손자는 진짜 이쁘다던데, 그래?”
“이쁘지.”
센지는 오토마츠에게 허옇게 독이라도 내뿜은 것만 같아 장갑으로 입을 가렸다.
“히데오 녀석, 자네한테 새해 인사 드리고 오라고 했더니만, 내일부터 일이 시작된다나 뭐라나. 그저 버릇없는 놈이려니 생각하게.”
“무슨 소릴. 삿포로 본사에서 과장 노릇 하기가 쉬운 일인가? 그렇게 출세한 것만도 나한테 인사한 거나 진배없네.”
“날 풀리기 전에 인사 한번 보냄세. 입사할 때는 제 눈 검은 동안에는 호로마이 선은 반드시 지킨다는 둥 어쩐다는 둥 큰소리 탕탕 치더니. 정말 미안하네, 자네에게 아무 도움도 못 되고.”
센지는 모자를 벗고 숱이 부쩍 줄어버린 머리를 오토마츠 앞에 깊이 숙였다.
“이게 무슨 짓인가, 센지. 비요로 중앙역 역장님한테 느닷없이 절을 받으니 황송해서 말도 안 나오네.”
오토마츠는 마주 받기가 진짜로 무렴했던지 센지의 절을 슬몃 비켜 기하 12의 낡은 차체 옆으로 다가가 운전석을 들여다보았다.
“수고 많구만. 안에 들어가 몸이라도 녹이고 가지.”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그대로 서 있는 센지의 뒷모습을 흘깃 쳐다보며 기관사가 대답했다.
“눈도 퍼붓고, 이대로 돌아갈랍니다. 역장님.”
“그럴텐가? ……근데 역장님은 무슨. 센지, 자네가 그렇게 부르라고 시켰군? 역장님이라니 민망하네. 역무원 하나 없는 역에 역장은 무슨 역장인가.”
오토마츠는 외투 등에서 수신호 깃발을 꺼내들고는, 학처럼 마른 몸을 숙이며 센지의 등을 두드렸다.
“센지, 자네 몸이 더 두툼해진 것 같은데?”
“그런가?”
센지는 그제야 머리를 들었다.
“설이라고 너무 먹은 모양이지. 이거 마누라가 자네 주라더군.”
“저런, 고맙구만. 드디어 나한테도 설날이 왔네. 먼저 안에 들어가 있게. 상행선 보내고 갈 테니까.”
센지는 마지막 회송 열차를 배웅하는 오토마츠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기도 민망할 것 같아 선로를 가로질러 역사로 향했다.
호로마이 역은 다이쇼 시대(大正 時代:1912~1926)에 지어진 모습 그대로 남겨진 훌륭한 건물이었다. 널찍한 대합실은 천장이 높았다. 오래 곤 엿 빛깔의 두툼한 대들보가 몇 줄기나 가로질러가고, 삼각형 천창(天窓)에는 로맨틱한 스테인드 글라스까지 새겨 넣었다.
나무로 짜넣은 개찰구 벽 위에는 아직도 국철 표장(標章)이 마치 잃어버린 물건처럼 걸려 있다. 벤치는 모두 검은 광택이 도는 옛 물건들이었다.
역사만이라도 이대로 보존할 수는 없을까, 센지는 중유 스토브에 손을 녹이며 곰곰 궁리하다가 비요로 역에서부터 줄곧 서서 온 몸을 벤치에 앉혔다.
정적 속에 기차의 경적이 길게 울렸다.
“오래 기다렸지? 어이, 저기 좀 보게. 기념품 가게도 결국에는 문을 닫아걸었네.”
오토마츠는 시린 눈 냄새를 한 짐 등에 짊어지고 역사로 들어오더니 깃발을 말면서 역 앞을 가리켰다.
“어라, 진짜네. 할망구는 어떻게 된 거야?”
단 한 짐 남아 버티고 있던 역 앞 기념품 가게는 처마가 기울어진 채 불이 꺼져 있었다.
“아들이 비요로에 맨션을 샀대. 칠십 넘은 할멈을 붙잡을 수도 없고. 자, 이렇게 되니 이제 여기에 담배나 신문 정도는 갖다놓아야 하게 생겼네.”
“아이구, 관두시게. 혼자서 차표 팔지, 청소하지, 선로 보선 작업까지 하는데, 거기에 매점 일까지 할 거 뭐 있어.”
“아직 호로마이에 한 백여 가구는 남았잖나. 죄 영감하고 할머니뿐이지만 그래도 신문은 읽고 살아야지.”
사무실 안쪽 라디오에서 구슬픈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역 머리에 있던 산 그림자가 덮쳐드는 듯한 느낌이 들어 센지는 담배를 붙여 물었다.
“이봐, 그래도 명색이 정월 아닌가. 술은 삿포로 토종술이어야된다나, 히데오가 싸넣더구만.”
“고마우이, 안줏감까지 얌전히 챙겼구먼. 마누라 죽고는 정월도 그저 오면 오나부다 가면 가나부다 했는데.”
“자네 마누라, 이제 몇 년 됐지?”
“몇 년이라고 할 것도 없네. 겨우 재작년이지. 어째 한 십 년은 된 것 같기도 하네만.”
“자네, 적적하겠어.”
“여긴 다 그런 할아범하고 할머니들인데 뭘, 나만 그런가. 자, 불끄고 안으로 들어가지.”
술자리를 벌이기 전에 말해두어야 할 게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오토마츠. 나, 내년 봄에 역 빌딩으로 발령날 것 같네.”
“그래? 그거 잘됐네.”
“그래서 자네도 비요로로 나왔으면 싶어서. 십이층 건물에다 유리 엘리베이터가 달렸다대. 도쿄의 큰 백화점하고 철도 회사가 공동 출자를 해서 짓는다는데, 어떤가? 거기 윗사람에게 나도 조금은 말발이나 내밀 만한데 말이야.”
“무리한 말발 내밀 것 없네.”
말을 잘못했는가 싶어 센지는 입을 다물었다.
“고맙기는 하지만, 난 됐어.”
“왜?”
“글쎄 난 겁이 나서 에스컬레이터도 못 타. 같이 철도원 생활이야 했지만, 비요로 중앙역 역장 자리까지 오른 자네하고 난 한참 다르지.”
“자넨 기계에 강하잖아.”
“무슨. 철도만 알았지 그것말고는 내가 아는 게 뭐 있어야지. 학교도 안 나왔지, 그저 삽자루로 맞아가며 몸으로 익힌 것뿐이잖나. 도쿄에서 온 사람들이 보자면 그야말로 문외한이지.”
이야기가 잠깐 끊기자, 눈 내리는 밤의 정적이 무서울 정도로 덮쳐들었다.
“이봐, 센지. 히데오가 나 때문에 꽤나 애먹었을 거야.”
“그렇지 않다니까. 그야, 그애도 홋카이도 대학 출신의 상급직이니까 제깐에 출세는 했다지만, 노선 변경에 이러쿵저러쿵 관여할 만큼 대단한 자리는 못 돼.”
“그럼 됐네만.”
오토마츠의 어깨에서 녹지 않고 그대로 쩌억쩍 얼어붙는 눈을 털어주면서 센지는 다시 말을 잃었다.
“자네 집사람은 건강하지?”
“음, 변함없이 피둥피둥 살만 찐다네.”
센지의 머릿속에 퍼뜩 어두운 기억이 떠올랐다.
죽은 아내가 누워 있는 비요로 병원 영안실에 오래도록 그저 엎드려만 있던 오토마츠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센지의 아내는 오토마츠가 아내의 임종 소식을 듣고도 곧장 달려오지 않은 것을 두고 아직도 고시랑거리곤 했다. 오토마츠는 박정한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몇 번이고 보냈건만, 오토마츠는 호로마이 역의 등까지 다 끄고서야 마지막 상행선으로 병원에 찾아왔다. 오토마츠에게 전화를 걸다 못해 결국 임종을 대신 지켜보게 된 센지의 아내가 지금껏 그 일을 마음속에 끓이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토마츠는 그때도 눈이 얼어붙은 외투 차림으로 조용히 베갯머리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센지의 아내가 어째서 울지도 못하느냐고 따지고 들자 오토마츠는 이런 중얼거림 한마디로 대답했었다.
“나도 철도원인데, 사사로운 집안 일로 눈물을 보이겠습니까?”
외투 자락을 쥐어뜯으면서도 끝내 눈물 한줄기 흘리지 않는 오토마츠를 보면서 센지는 데고이치의 바퀴 소리며 기름 연기 냄새가 어디선가 물큰 묻어나는 것 같았었다.
“센지.”
오토마츠는 모자를 벗어 스토브 불에 쬐었다. 손때에 전 붉은 띠를 두르고 철도 표장이 박힌 구식의 짙은 남색 국철 모자였다. 센지는 자신의 산뜻한 푸른 모자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왜?”
“나야 괜찮지만, 기하는 어떻게 되는 건가?”
“흠, 1952년 제작이니 아무래도…… 우리가 아직 데고이치에 불 때던 시절 물건 아닌가.”
“그럼 고철 신세가 되는 건가?”
“어지간히 많이 뛰었지, 저것도.”
문득 센지의 뇌리에 최신식 기하 12형이 호로마이에 입선(入線)하던 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자신은 짚다발을 틀어쥐고 데고이치의 바퀴를 닦았고, 오토마츠는 탄수차(炭水車)에 올라가 석탄을 퍼내고 있었다. 선로 옆에는 마을 사람들이며 갱부들이 빽빽하게 몰려들어 있었다. 번쩍거리는 기하 12형이 터널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군중은 마치 전쟁터에서 이기고 돌아온 귀환용사를 맞이하듯 환성을 올렸다.
-우와, 센지! 저것 좀 봐라, 기동차가 왔어. 기하 12형이라구!
오토마츠는 탄수차 위에서 삽을 번쩍 쳐들고 마구 흔들었다. 역장이 플랫폼에 나와 타블렛 륜《철도의 단선 운행 구간에서 열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발차역 역장이 열차 운전 승무원에게 교부하는 일조의 증표(證票)를 타블렛(tablet)이라고 한다. 타블렛을 넣은 상자에는 둥그런 손잡이를 달아 주고받기 쉽도록 하였는데, 이 둥그런 부분을 륜(輪)이라고 하며 상자와 륜을 통틀어 타블렛 캐리어라고 한다.》을 받아들 때까지 만세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하긴 기차에 불이나 넣던 까까머리가 낼 모레면 정년 퇴직을 맞는데, 인간보다 더 오래 일하라고 몰아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래도 저 기하 12가 이 나라 마지막 기동차 아닌가. 잘하면 박물관이나 철도공원 같은 데서 괜찮은 조건으로 얘기가 들어올지도 몰라.”
“그럼 나도 그참에 박물관에 같이 세워달라고 해볼까?”
두 사람은 그제야 겨우 소리를 맞춰 웃었다.
“자, 그럼 자네하고 설 쇠어볼까.”
홈의 전등불이 꺼졌다. 눈빛〔雪光〕이 대합실을 환하게 적셨다.
“어라, 누가 잊고 간 모양이네?”
벽에 붙은 벤치에 셀룰로이드 인형 하나가 조그만 손을 벌리고 앉아 있었다.
“아까까지 여자애 하나가 여기서 놀았는데, 그러고 보니 어느새 가버렸군.”
오토마츠는 어둠 속에 네모 반듯하게 잘라낸 듯 드러난 역 앞 댓돌까지 뛰어나가 길을 휘둘러보았다.
“셀룰로이드 큐피 인형이라…… 어지간히 오래된 인형이로구만. 손님이었나?”
“아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그만 계집아이인데, 여기서 한참을 놀고 있더라구.”
“이봐, 자네가 본 적이 없는 계집아이라니, 이 근방에 그런 어린애가 다 있어?”
“설이라고 고향집을 찾은 게지, 뭘. 가족끼리 자동차를 몰고 오면 나도 못 보지. 키가 요만하고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인데, 빨간 책가방까지 메고 있더라구.”
“책가방이라…….”
“올 봄에 학교에 입학한다고 아버지가 사줬대나. 아주 앙큼하니 귀여운 게 여기에 차렷 하고 서서는 학교 가는 연습을 한 대나 어쩐대나, 지가 잘하는지 보라고 나를 싸고 빙빙 돌면서 좀체 떨어지질 않더라구.”
“자네가 아이들을 끔찍하게 귀여워하니까 그렇지.”
오토마츠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사무실 안쪽이 방 한 칸에 부엌 하나 딸린 오토마츠의 살림방이었다. 제복 차림의 부친 사진과, 죽은 아내의 젊은 시절 사진이 조그만 불단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센지는 향을 피워 올리고도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어째 자식 사진만 없어?”
“으음, 두 달 만에 죽었는데 사진은 무슨.”
“이름이 뭐였더라?”
“유키코. 11월 10일에 낳았는데 마침 그날 첫눈이 오시길래 유키코(雪子)라고 지었지. 자네가 그때 우리 애를 히데오하고 혼인시키자고 했었잖은가?”
“아, 그래. 이제 생각났네. 히데오란 놈, 중학교 막 올라갔을 때던가, 저 애기 나중에 네 색시 삼아라 그랬더니 그놈이 그만 부끄러워서 애기 옆에 얼씬도 안 하려고 하더니만.”
둥그런 상을 끼고 마주 앉아 두 사람은 찬술을 따랐다. 라디오를 끄자 가늘게 떨어지는 물소리가 귓전에 어른거렸다.
“옛 우스갯소리도 있네만, 나도 죽은 자식 나이를 세어보곤 한다네. 살아 있으면 꼭 열일곱이야.”
“늦게 본 애였으니까.”
“내가 마흔셋, 마누라가 서른여덟에 얻은 자식이었지. 정말……너무 아까워.”
오토마츠가 드물게 속내를 비쳤다.
사토 오토마츠가 매표구에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뜬 것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는 벽시계가 밤 열두시를 쳤을 때였다.
“역장님…… 역장님…….”
아크릴 판 틈새에 입을 들이대고 가만히 부르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오토마츠를 깨웠다.
“누굴까, 이런 시간에. 급한 환자라도 생겼나?”
오토마츠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든 센지가 깰까 조심스러워 발소리를 죽였다. 커튼을 열자 빨간 머플러를 두른 여자아이가 매표구에 팔꿈치를 대고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젯밤에 보았던 아이보다 키는 좀 크지만 외꺼풀의 눈매가 꼭 닮은 여자아이였다.
“오, 잊어버린 거 찾으러 왔구나?”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툼한 솜옷을 잠옷 위에 걸치고 대합실로 나서자 어느 틈에 눈은 멎고 달빛이 현관 댓돌에서부터 눈부신 빛의 띠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하늘이 희미하게 우르릉거렸다.
“넌 그애 언니냐?”
셀룰로이드 인형을 건네자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인형이 없다고 자꾸 울어서요.”
“그것 참 착한 언니로구나. 너희들, 못 보던 애들인데 어느 집 애들이냐?”
이렇게 살빛이 희고 곱상한 애라면 분명 도회지 아이일 거라고 오토마츠는 생각했다.
“텐진 사마(天神 樣) 근처의 사토(左藤)네요.”
“호오, 근데 이 근처는 죄 사토 아니냐. 아저씨도 사토다. 텐진 근처라면, 으음, 기름집 아이냐?”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이사네? 도라오네?”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흔든다. 아마 노인만 가득한 마을 사정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냥 할아버지네 놀러 왔어요. 설날이니까요.”
오토마츠는 더 묻지 말자고 생각했다.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해. 한겨울이니까 곰 같은 건 나오지 않겠지만 눈 속에 빠지거나 축대에서 떨어지면 목숨까지 위험한 거야. 데려다줄 테니까 좀 기다려라.”
“아니오, 괜찮아요. 바로 요 근방인걸요. 달님이 떠서 환하구요.”
말속이 단정한, 영리해 뵈는 아이였다.
“너, 몇 살이냐?”
“열두 살이에요.”
“그럼 중학생이겠구나. 키가 좀 작은 편인가?”
“아직 육학년인데요, 이번에 중학교에 들어가요. 저, 역장 아저씨…….”
소녀는 추운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조금 말을 주저했다.
“아, 오줌마려운 게로구나? 화장실은 개찰구를 나가서 오른쪽이다. 잠깐 기다려라, 불 켜주마.”
사무실 문을 살짝 열고 배전반 스위치를 올렸다. 느릿느릿 깜빡이던 불빛이 눈 덮인 홈을 한순간에 밝혔다.
“저…… 무서워요. 같이 좀 가주세요, 아저씨.”
“그럼, 그래야지. 같이 가주고말고.”
소녀는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를 하고는 오토마츠의 손을 쥐었다.
“무서울 게 뭐 있냐. 봐라, 하나도 안 무섭다. 이렇게 환한데?”
자그마한 손을 꼭 쥐자 오토마츠는 불현듯 서글퍼졌다. 어쩐지 엊저녁의 동생이라는 아이도, 그리고 언니라는 이 아이도, 죽은 유키코인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걸핏하면 마음이 울적해지는 건 이제 철도원 생활도 석 달만 지나면 끝난다는 허전함 때문일까.
감기만 걸리지 않았더라면 유키코도 분명 이만큼 훌쩍 자라서 매일 밤 화장실 갈 때마다 아비의 단잠을 깨워 앞장을 세웠으리라. 병원 하나 없는 마을에서 태어나, 문풍지 바람이 끊일 새 없는 사무실 곁 살림방에서 어린것이 추위를 못 이긴 탓이었다. 자신의 직업이 아이를 죽인 거라는 생각이 들면 오토마츠는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화장실 앞에서 소녀를 기다리는 동안 오토마츠는 멍하니 건너편 홈을 바라보았다.
십칠 년 전 눈 내리던 날 아침, 아내의 팔에 안긴 유키코를 저 홈에서 보냈다. 평소 하던 그대로 수신호를 하여 기차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기차로 유키코는 싸여 갔던 모포에 말려 차디찬 몸이 되어 돌아왔다.
“당신, 죽은 아이까지 깃발 흔들며 맞이해야 되겠어요?”
아내는 눈 쌓인 홈에 쪼그리고 앉아 죽은 유키코를 꼭 끌어안고 그렇게 말했다.
그때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래도 내 일이 철도원인데 어쩌겠어. 내가 홈에서 깃발을 흔들지 않으면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데 누가 기하를 유도하겠어? 전철기(轉轍機)도 돌려야 하고, 학교가 파한 아이들도 다들 돌아올 텐데.”
“다른 애들 얘긴 다 그만두세요. 당신 애가 돌아왔어요. 이 꼴로요, 유키코가 눈덩이처럼 얼어서 돌아왔다고요!”
아내가 그를 향해 큰소리로 대든 건 그때 단 한 번뿐이었다.
아내가 그의 손에 덥석 안겨준 죽은 아이, 자신의 몸이 얼핏 휘청해지는 듯하던 그 무게를 오토마츠는 잊지 못한다. 그것은 분명 얼어붙은 전철기보다 더 무거웠다.
기억 속에서 또하나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아저씨, 유키코가 죽었다구요?”
히데오의 목소리였다. 히데오가 책가방을 내던지며 기차에서 내려 달려들었다. 부부 사이에 왈칵 끼어들더니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오토마츠의 팔에서 유키코를 빼앗았다.
“유키고, 불쌍해서 어떡해요? 꼭 내 색시가 될 줄 알았는데, 불쌍해서 어떡해요? 아줌마, 울지 마세요. 아저씨는 우리 학교 잘 다니라고 깃발 흔드시는 거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네, 아주머니?”
-오토마츠는 괴로운 기억을 품 안에 집어넣고 앞깃을 여미며 등을 펴고 꼿꼿이 섰다.
봄이 되어 철도원 생활을 그만두면 그땐 실컷 울어도 될까, 오토마츠는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역장 아저씨.”
“으음, 자, 이거 마시고 가거라.”
화장실에서 나온 소녀에게 오토마츠는 품 속에서 데운 캔커피를 건네주었다.
“너, 참 귀엽구나. 어머니가 상당한 미인이시겠어. 근데, 뉘 집 앨 꼬?”
“자, 반씩 나눠 먹어요.”
“아저씨는 일없다. 내 걱정 말고 너나 마셔라.”
마을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오토마츠는 줄곧 지켜봐왔다. 하나둘 도회지로 떠나버렸지만, 어떤 얼굴도 잊을 수 없었다. 남의 아이가 커가는 모습이었지만 그렇게 귀엽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기 피를 나눈 제 아이라면 어떠랴, 오토마츠는 생각하곤 했다.
그가 어지간해서는 비요로 읍내에 나가지 않는 건 한창 나이의 여자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더 허망해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거리를 걷다 보면 꼭 죽은 유키코 또래의 아이들만 눈에 띄어 견딜 수가 없었다. 빨간 책가방을 집었다 놓은 일도 있었다. 한번은 점퍼에 머플러까지 정말 사들었다가 그대로 들고 돌아올 수도 없어 지나가던 아이에게 줘버린 일도 있었다.
소녀는 캔커피를 다 마시더니 오토마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입을 꼭 다물고 조그만 손을 까닥거리며 그에게 엎드리라고 한다.
“어쩌라고?”
허리를 구부려 제 얼굴만큼 키를 낮춰주자 소녀는 서슴없이 오토마츠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입에서 입으로 옮겨준 커피가 오토마츠의 혀 위로 흘러들었다.
“아이쿠, 갑자기 이 무슨 짓이냐? 아저씨, 깜짝 놀라지 않니!”
소녀는 얼어붙은 플랫폼에서 펄쩍펄쩍 뛰다 못해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웃어댔다.
“역장 아저씨하고 키스했다!”
“어른을 놀리면 못써. 요놈, 아주 장난꾸러기로구나.”
“후후, 그럼 내일 또 올게요. 안녕.”
“그래, 안녕……이다. 조심해라. 길 가장자리로 걷다가 눈에 빠질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
소녀는 춤추듯이 팔랑거리며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얘, 뛰지 말라니까.”
대합실로 돌아오자 소녀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달빛이 듬뿍 비쳐들어 누르스름한 벽에 스테인드 글라스의 일곱 가지 빛깔이 환등처럼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센지가 사무실 문을 삐그덕 열고 잠 덜 깬 얼굴을 내밀었다.
“자네, 뭐 하는 거야? 아직 날 새려면 한참 남았겠는데. 아니, 이제 겨우 열두시 넘겼잖아. 이봐, 계속 안 자고 있었어?”
센지는 벽시계를 돌아보며 크게 하품을 했다.
“어젯밤 왔던 애의 언니 되는 아이가 잊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왔었어. 아니 이런, 또 잊어버리고 갔네!”
셀룰로이드 인형이 벤치 위에 놓여 있었다.
“또 오겠지.”
“음, 그러겠지? 갖다주고 싶어도 뉘 집 앤지도 모르고…….”
센지는 개찰구 너머로 눈빛이 환한 홈을 한번 쳐다보고 이상하다는 듯 오토마츠를 바라보았다.
“자네 꿈꾼 거 아냐? 이런 늦은 밤에 어린애가 왜 밖에 돌아다니겠어?”
“그러게나 말야. 그애, 아주 곱상하긴 한데 여간 말괄량이가 아니던걸. 아마 삿포로나 아사히가와(旭川) 아이지 싶어. 도회지 애들은 여간 영악스러운 게 아니거든.”
“아, 아무리 그래도 이런 한밤중에…… 자네, 혹시 유키 온나《雪女:눈이 많이 내리는 지방의 전설 속의 여인. 눈의 정령이 흰옷 차림의 아름다운 여자 모습으로 나타나 눈길에 헤매는 사람을 홀리고, 입에 찬 기운을 불어넣어 얼어죽게 한다.》본 거 아니야?”
“하하, 그애가 유키 온나였다면 내가 지금 이러고 서 있지도 못 할걸? 벌써 얼음이 되었지.”
“뭐?”
“아니, 아닐세. 아무것도 아냐.”
인형을 안고 사무실로 돌아온 오토마츠는 책상에 앉아 기입할 것도 없는 여객일지에 뭔가 적어넣기 시작했다.
삿포로 본사에서 전화가 온 건 센지가 아침 기차로 돌아간 그날 오후였다.
본사란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직립부동 자세를 취했던 오토마츠의 귀에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히데옵니다. 안녕하셨어요?”
“야, 히데오구나. 아참, 본사 과장님 이름을 이렇게 막 불러도 실례가 안 될는지 모르겠다. 늬 아버지는 첫 기차로 비요로에 돌아가셨다만.”
“저도 함께 찾아뵈려고 했는데, 오늘 시무식이라 못 갔어요.”
“무슨 소릴. 그보다 너한테 이래저래 폐가 많구나. 네 덕분에 아저씨도 호로마이 선과 함께 은퇴할 수 있게 되었어. 적자투성이인줄 나도 아는데 참 오래 견뎠다. 정말 철도원치고 나처럼 복 받은 사람도 없다고 네 아버지하고도 얘기했다.”
전화가 입을 다물었다. 히데오가 삿포로 본사 데스크에 앉은 채로 고개를 숙여 절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오토마츠는 일부러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섞었다.
“저, 아저씨. 조금 전에 퇴직 서류 보냈습니다. 서류만 삐죽 보내는 게 아저씨께 너무 죄송스러워서 인사라도 드리려고 전화했어요.”
“무슨 소릴. 그보다 너, 그간에 호로마이 선 일로 윗사람에게 무리한 요구를 너무 많이 한 것 아니냐? 공연히 네 앞길에 지장이나 생길라.”
“아니오, 저는 아무 도움도 못 드렸어요. 저보다 아버지가 본사에 자주 찾아와 윗사람들을 만나셨지요. 호로마이 선 없애면 안 된다고 비요로에서 해마다 만 명씩 서명을 받아주셨고요.”
“그랬어? 네 아버지, 나한테는 그런 소리 한마디도 안하더니. 나는 몰랐구나.”
“일부러 역장 옷 벗고 사복 차림을 하고서요. 쉬는 날이면 아침부터 밤까지 지하도 길목에 서 계셨어요. 이런 말을 아들 된 제가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아버지가 애는 꽤 쓰셨어요. 그래도 호로마이 선을 못 지켰으니, 드릴 말씀이 없네요. 다른 사람보다 아저씨가 가장 마음 아프실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아저씨, 정말 죄송합니다. 제 힘이 모자랐어요.”
“아니, 무슨 소릴…… 이것 참, 과장님한테 인사를 다 받다니.”
전화기 건너편이 다시 조용해지며 히데오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아저씨, 저 말이죠, 진심으로 아저씨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야, 무슨 소릴. 내가 부끄럽잖냐.”
“아니오, 진짜예요. 제가 이만큼 자리잡을 수 있었던 건 아저씨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호로마이 홈에서 저희를 보내고 맞아주신 덕분이죠……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아저씨께 너무 큰 신세를 졌어요.”
“그만 일로 홋카이도 대학생이 만들어진다더냐. 다 네가 노력한 덕이지. 상급직 시험만 해도 그거 보통 일이 아닌데…….”
“아녜요. 다른 애들도 다 그럴 거예요. 도쿄로 나간 애들도 모두 고향 하면 우선 아저씨 생각부터 난대요.”
“아, 그러냐? 야, 이것 참 어쩔 줄을 모르겠다.”
수화기를 놓자 힘이 다 빠졌다.
반세기의 시간이 지닌 무게가 어쩐지 한꺼번에 어깨에 덮씌워진 듯해서 오토마츠는 사무실 책상에 두 손을 짚은 채 한동안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고개만 쳐들고 있었다.
오후가 되어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 눈이 앞산 그림자를 희미하게 감출 정도로 자욱했다. 소리 하나 없는 세계에 레일 굉음 같은 이명이 찾아와 오토마츠는 짧게 자른 허연 머리를 감싸안았다.
별안간 매표구 유리 두드리는 소리에 오토마츠는 얼굴을 들었다. 갈래머리의 여고생이 오버코트의 눈을 털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역장님?”
공손하게 절하는 몸짓이 어디선가 본 듯했다. 어제 저녁 그 아이의 또 그 손위 언니가 잊어버린 인형을 찾으러 왔구나! 오토마츠의 마음이 금세 환해졌다.
“어라, 넌 또 그 위 언니인 게로구나?”
“알아보시겠어요?”
털장갑을 뺨에 대며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알고말고. 얼굴하며 목소리까지 아주 꼭 닮았는걸?”
“어제는 실례했습니다. 죄송해요, 역장님.”
“무슨. 재미있게 놀아줘서 고마운 건 되레 이쪽인걸. 자, 들어오너라. 그쪽은 바람이 들이쳐서 춥다.”
소녀는 신기하다는 듯 대합실을 둘러보고, 굵은 대들보며 낡은 스테인드 글라스에 감탄의 소리를 올렸다. 옆얼굴이 빛나듯 아름다웠다.
“자매가 모두 함께 고향 집을 찾은 게로구나.”
“예.”
소녀는 허리까지 닿게 땋은 머리를 끈처럼 흔들며 돌아보았다.
아, 그렇군. 오토마츠는 비로소 깨달았다.
“너희들, 엔묘지(圓妙寺)의 요시에 씨네 집 애들이로구나.”
“예?”
소녀는 잠깐 어리둥절하더니 다시 방긋 웃었다.
“닮았어요?”
“음, 요시에 씨 어릴 적하고 똑같애. 야, 이제 겨우 가슴에 걸린 게 내려가는 것 같다. 누구네 집 아이들인가 하고 계속 궁금했었거든. 너희 어머니 또래에서 귀여운 학생이라고 하면 단연 사토 요시에 씨지. 공부도 잘했고 비요로 고등학교 학생회장까지 했어. 자, 들어와라. 요시에 씨네 아가씨라면 내가 당연히 단팥죽 한 그릇이라도 대접해야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사무실 문을 연 소녀는 코트를 벗어 단정하게 접어놓고 스토브에 손을 쬔다. 청색에 하얀 리본이 달린 세일러복을 보고 오토마츠는 깜짝 놀랐다.
“어라, 그 교복…… 옛날 비요로 고등학교 것하고 똑같지 않냐? 지금은 다른 걸로 바뀌었다만. 야, 그러고 있으니 정말 요시에 씨로구나.”
“도립고등학교 교복은 아직도 이게 많아요.”
마지막 광산이 남아 있을 즈음, 고등학생으로 가득 차곤 하던 대합실의 야단법석을 오토마츠는 생생하게 떠올렸다. 금단추와 세일러복이 매일 아침 서른 명 남짓 모여들었던가. 오토마츠는 발차전이면 빠진 아이가 없나 헤아려보았고, 아내는 한창 먹성 좋은 아이들에게 단팥죽이며 감주로 선심을 쓰곤 했었다.
“어제 설날에 먹던 것이다만, 자, 어서 들어라.”
소녀는 마루턱에 앉아 단팥죽 그릇을 받아들었다.
“엔묘지 주지는 이렇게 귀여운 손녀들이 셋이나 와주고, 좋은 설을 맞이했겠구나.”
소녀는 추위에 언 손을 팥죽 그릇에 녹여가며 안쪽을 기웃거렸다.
“참 정갈하게 지내시네요.”
“성질이 그래서. 낮에는 할 일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나서 오토마츠는 엔묘지 주지, 그 사람 쓸데없는 소리까지 했군, 싶었다. 남들 눈에 육십 홀아비의 살림살이를 들키면 공연히 면구스러웠다.
소녀는 꽃잎 같은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려 단팥죽을 마셨다. 이따금 영리해 뵈는 미간에 가늘게 선을 넣어가며 오토마츠를 가만히 바라본다.
“왜 그러니, 시골 역장이란 게 어떤 인물인가 궁금해?”
“아뇨, 그런 게 아니고, 제복이 너무 멋있어요.”
“이게 말이냐?”
오토마츠는 더블 버튼의 낡은 외투 소매를 들어올렸다.
“새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오래 입던 옷이 정이 가서.”
유리창 밖에서 눈발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또 퍼붓는군. 천천히 쉬었다 가려무나. 바람이 세니까 눈이 아예 비스듬히 누워서 쏟아지는구나.”
대답이 없어 돌아보니 소녀는 어느 틈엔가 마루 위에 올라서서, 선반에 꾸며놓은 오토마츠의 수집품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와, 데고이치 플레이트네!”
“응? 네가 그런 걸 좋아하니?”
“이거 삼십만 엔이나 하는걸요. 굉장해요, 에나멜 행선판《여객용 열차의 옆면이나 앞면에 붙이던 행선지 표시판.》까지 이렇게 많이.”
“굉장히 좋아하는구나. 너, 매니아냐?”
“학교에서 철도 동호회 회원이에요. 여학생은 저밖에 없지만요.”
“그거 참, 특이하구나.”
오토마츠는 기뻤다. 이 역에도 해마다 한두 명씩, 도회지에서 철도 소년들이 찾아왔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좋은 국철 이야기를 그들에게 한바탕 풀어놓는 것은 오토마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철도 이야기를 나누다가 때로는 하룻밤 묵어가게 되는 소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소년들이 다시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단 한 칸짜리 기차가 왕복하는 지방선은 그들의 흥미를 오래 끌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다.
오토마츠는 우쭐우쭐 흥에 겨워 설명을 했다. 에나멜 행선판. 기관차 플레이트. 갖가지 해체부품이며 낡은 승차권. 타블렛 캐리어. 다른 역에서는 이제 구경할 수도 없게 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중인 날짜 인자기(印字機).
“괜찮다면 뭐든 좋아하는 걸 가져가거라. 어차피 이번……”
어차피 이번 봄에는 폐선된다고 말하려다 오토마츠는 입을 다물었다.
“그치만 돈이 없는걸요.”
“돈 같은 거 일없다. 걱정 말고 가져가.”
“진짜 뭐든 괜찮아요? 데고이치 플레이트두요?”
“음, 괜찮고말고. 엔묘지 할아버지한테 신세진 것도 있고, 독실하지는 못하다만 나도 신자니까.”
소녀는 단팥죽을 다 먹고는 늘상 드나들던 집마냥 그대로 빈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괜찮다, 설거지는 그냥 둬.”
그러나 어둑신한 부엌에서 백합꽃 같은 세일러복 등을 보이며 소녀는 물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저씨, 이야기 좀더 해주세요.”
엔묘지 주지, 손녀딸을 보낼 것 같으면 그렇다고 미리 전화 한 통 넣어주면 좋았지.
그러나 이것도 주지의 마음 씀씀이인지도 몰랐다. 이 아이가 와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분명 낮술 몇 잔 마시고, 저녁 차편이 도착할 때까지 잠이나 청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센지까지 서로 다 짜고 내가 적적할까 봐 마음 써주는 게 아닐까 하고 오토마츠는 생각했다.
그날 호로마이에는 시간도 장소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큰눈이 졌다.
낡은 역사는 소리도 빛도 없는 순백의 세계에 파묻혔다.
소녀는 노(老)역장이 말하는 옛이야기를 하나하나 깊이 감동하며 들어주었다. 오토마츠는 스스로도 자기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반세기분의 어리석은 푸념이며 자랑을 생각나는 대로 수다스럽게 주워섬겼다.
그런 얘기는 낡아빠진 제복 안섶 깊숙한 가슴속에 이를테면 기관차의 기름연기 냄새며 탄재의 꺼끌꺼끌한 감촉과 함께 진흙처럼 딱딱하게 응어리져 있던 기억이었다.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 놓을 때마다 오토마츠의 마음은 확실하게 가벼워져갔다.
특수 경기로 한창 흥청거리던 시절. 역사 안이 시체로 가득 찼던 탄광 사고. 기동대가 떼로 달려왔던 노동쟁의. 그리고 등불이 꺼지듯 하나씩 폐광되어가던 산들.
가장 괴로웠던 일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오토마츠는 딸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간 사토 오토마츠로서 가장 괴로웠던 일은 물론 딸의 죽음이고, 두 번째로는 아내의 죽음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철도원으로서 오토마츠가 가장 슬픔에 잠겼던 건 매년 집단 취업으로 떠나가는 아이들을 플랫폼에서 배웅하는 일이었다.
“……너보다 두세 살 어린 아이들이 울면서 마을을 떠나갔지. 그걸 보고 차마 나까지 울 수가 없었어. 모두 정신 차리고 똑바로 잘들 해야 한다, 그렇게 아이들 어깨를 두드려가며 웃어야 했던 게 제일 괴로웠지. 저쪽 홈 끝에 서서 기차가 안 보일 때까지, 기적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경례를 하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그 무렵 센지는 기관사였다. 집단 취업 기차에 탔을 때는 경례 대신 오래오래 경적을 울렸었다.
철도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 대신 호루라기를 불고, 주먹 대신 깃발을 흔들고, 큰소리를 내지르는 대신 호령을 뽑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철도원의 괴로움이라면 아마도 그런 것일 것이다.
“아차, 내 이야기에만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더니 벌써 막차가 도착할 시간이 됐구나. 아저씨 일 끝내고 와서 절에까지 데려다주마. 자, 감기 걸리니까 이거 입고 있으렴.”
오토마츠는 솜 두른 겉저고리를 소녀의 어깨에 걸쳐주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외투를 입고 모자의 턱끈을 조여맨 뒤 칸델라를 들고 역사를 나섰다. 벽시계가 저녁 일곱시를 쳤다.
오토마츠는 빠른 솜씨로 눈을 쓸어내고 플랫폼 끝에 섰다. 터널에 빛의 동그라미가 나타났다. 눈의 장막을 뚫고 온 것은 늠름한 DD15 러셀이었다.
텅빈 객차를 끌고 눈을 흩뿌리며 달려오는 러셀의 모습을 본 순간 오토마츠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억지를 부려 정년 퇴직할 때까지 적자투성이의 호로마이 선을 그대로 밀고 온 셈이었다. 그런 만큼 회사로부터 퇴직금이나 연금은 절대로 받아선 안 된다고 오토마츠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칸델라를 들고 왼손 손가락을 똑바로 선로를 향해 뻗으며 오토마츠는 적당히 억누른 호령 소리를 뽑아올렸다.
젊은 기관사와 함께 낯익은 조작원이 내려왔다.
“어이, 미치오, 오늘은 엄청나게 퍼부었지? 담배 한 대 태우고, 팥죽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갈 텐가?”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이 길로 돌아가서 본선 러셀을 손봐야 돼요. 잠깐 소변만 보고…… 그리고 이건 기관구 사람들이 역장님께 전해 드리라고……”
조작원은 큼직한 과일 바구니를 내밀었다.
“저런 저런. 아직 퇴임식은 석 달이나 남았는데, 이별 선물로는 너무 빠르잖은가?”
“그런 게 아녜요. 불단에 올리세요.”
두 승무원은 어깨를 맞부딪쳐가며 변소로 달려갔다.
러셀을 배웅한 뒤 오토마츠는 기관구에서 보내온 물건을 들고 역사로 돌아왔다.
짐짓 모르는 척 농담 같은 대꾸를 했지만 그게 무엇을 위한 선물인지 오토마츠는 잘 알고 있었다. 기관구의 동료들이 유키코가 죽은 날을 기억해준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타블렛 륜이라도 건네듯 아무렇지도 않게 공양물을 건네주었고, 오토마츠 또한 그들의 호의를 말없이 받았다.
오토마츠는 나무로 짜넣은 개찰구에 서서 눈 쌓인 역자모를 벗고, 기차 바퀴 소리가 멀어져가는 눈 속 어둠에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이런 큼직한 과일 바구니는 혼자 다 먹을 수도 없을 것이고, 소녀를 절에 데려다주는 길에 그대로 공양으로 올려야겠다고 오토마츠는 생각했다.
“자, 그만 가볼까? 데고이치 플레이트 챙겨오너라. 그렇지, 인형도 잊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김이 보얗게 서린 사무실 문을 연 순간, 오토마츠는 흠칫 발을 멈추었다.
“여, 여보……”
아니, 아니었다. 그러나 솜 두른 빨간 겉저고리를 걸치고 마루방에 단정히 앉은 소녀의 뒷모습이 한순간 죽은 아내의 등으로 보였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어서 올라오세요, 진지 드셔야죠.”
“아, 아니 이렇게 근사한 밥상을 네가 차려놓았니?”
“제 맘대로 부엌이랑 냉장고를 뒤졌어요, 죄송해요.”
“무슨 그런 소릴. 내가 나갔다 온 사이에 이걸 죄 만들었단 말이냐?”
작은 밥상 위에는 두 사람분의 국과 달걀찜, 나물 등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이거 제가 써도 되지요?”
막 지은 밥을 퍼담으며 소녀는 빙긋 웃음을 머금고 밥공기와 젓가락을 들어보였다.
“죽은 집사람 것인데, 너만 괜찮다면 써도 좋고말고. 야, 아저씨 정말 깜짝 놀랐다. 너 요리를 아주 잘하는구나.”
“전기밥솥은 시간이 걸려서 그냥 솥에 했어요. 제대로 불리지 못해서 꼬들밥이 됐을지도 몰라요.”
“햐아, 그냥 굴러다니던 재료로 이렇게 훌륭하게 상을 차리다니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어째 마법에 걸린 것처럼 기분이 붕 뜨는구나. 아저씨, 그럼 사양할 것 없이 다 먹어볼란다.”
“전 철도일 하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게 꿈이거든요. 그러자면 이렇게 후다닥 밥상 차려내는 법을 배워둬야겠죠?”
“하하, 그래? 그렇담 합격이다, 합격.”
된장국을 한 입 떠넣은 순간 오토마츠는 놀랐다기보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영락없이 죽은 아내가 끓여내던 된장국 맛이었다.
“맛있죠?”
“응? 으음…… 아저씨, 어째 가슴이 그들먹해지는구나.”
“왜요?”
유키코가 살아있다면 제 어머니에게서 배운 솜씨로 이렇게 된장국을 끓여주었으리라. 마지막 기차편을 배웅한 뒤에는 항상 이런 저녁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오토마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토마츠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무릎을 가지런히 모아 단정히 앉았다.
“아저씨, 지금 참 행복하다. 나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다가 그 바람에 어린것도 아내도 죽게 했는데, 그런데도 모두가 나한테 참 잘 대해주니 말이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정말루요?”
“암, 정말이고말고. 이제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전화가 울렸다. 오토마츠는 실내화를 발에 꿰고 사무실로 내려섰다.
“여보세요. 아아, 엔묘지 화상이신가? 새해 복 많이 받으시우. 손녀딸을 내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소. 어찌나 영리하고 참한 아가씨인지. 지금 댁의 손녀딸이 밥까지 차려줘서 먹던 참이오.”
그러나 엔묘지 주지의 전화는 귀가가 늦은 손녀딸이 걱정되어 걸려온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요령부득의 말이 오고 간 끝에 화상은 올해 공양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오토마츠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어 어깨를 떨군 채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주지의 말소리가 귓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오토마츠, 자네 어떻게 된 거 아냐? 우리집엔 요시에고 누구고 자식들이라곤 코빼기도 안 비쳤어.”
오토마츠는 책상 위의 셀룰로이드 인형을 손에 들고 레이스가 누르스름해진 드레스를 손끝으로 가만가만 건드려보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니……?”
매표구 유리창에 고개 숙인 소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너 어째서 거짓말을 했니?”
얼어붙은 창에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눈발이 흩어졌다.
“무서워하실까 봐서……, 죄송해요.”
“내가 왜 무서워하겠니. 세상 어디에 제 딸을 무서워하는 아비가 있겠니?”
“죄송해요, 아버지.”
오토마츠는 천장을 올려다보아도 막을 수 없어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유키코…… 어제 저녁부터 차례차례 자라가는 모습을 이 아비에게 보여준 게로구나. 저녁 참에는 책가방을 메고 아비 눈앞에서 차렷 해 보였지. 그리고 한밤중에는 좀더 자란 모습을, 그리고 이번에는 비요로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십칠 년간 성큼성큼 자라는 모습을 아비에게 보여준 게로구나……”
소녀의 목소리는 내려쌓이는 눈발처럼 조용했다.
“왜냐면요, 아버지는 변변히 기쁜 일 한번 없으셨잖아요. 저까지 자식 노릇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죽어버렸구요. 그래서……”
오토마츠는 셀룰로이드 큐피 인형을 가슴에 품었다.
“이제 생각나는 구나. 이 인형, 네 어미가 울면서 네 관에 넣어주었던 것이지.”
“예, 제일 소중한 친구였어요. 아버지가 비요로에서 사다주셨지요? 어머니는 레이스 달린 드레스를 만들어주셨구요.”
“그까짓 게 뭐 대단하다고…… 아버지는 네가 죽었을 때도 플랫폼의 눈만 쓸어내고 있었단다. 이 책상에서 그냥 여객일지만 쓰고 있었어. 오늘 아무 이상 없다고……”
“그야, 아버지는 철도원이시니까요. 아버지 직업이잖아요. 그런 거,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오토마츠는 의자를 돌려 돌아보았다. 유키코는 솜 두른 빨간 겉옷의 어깨를 움찔하며 서글프게 웃었다.
“유키코, 그래 잘 왔다. 어서 밥 먹자. 밥 먹고 목욕하고, 오늘은 이 아버지랑 함께 자자. 유키코, 정말 잘 왔다.”
오토마츠는 그날의 여객일지에 ‘이상 없음’이라고 적어넣었다.
이윽고 한밤중에 눈이 멈추었다. 호로마이 앞산에 은빛 보름달이 떠올랐다.
“히야, 호로마이 선이 이렇게 붐비는 거 처음 봤네. 완전히 만원이에요, 만원.”
젊은 기관사는 차장 가방을 들고 홈을 걸으며 기하 12의 객차 칸을 넘어다보았다.
“그야 물론이지. 사십오 년을 근속한 호로마이 역장님이 돌아가셨어. 겉만 번드레 잘난 사람들 장례식하고는 다르지.”
“그건 그렇지요. 오토마츠씨, 아니, 호로마이 역장님, 진짜 좋은 얼굴이셨어요. 저도 훗날 꼭 그렇게 가고 싶을 정도예요. 저기, 홈 끝의 눈더미에 손깃발을 꼭 쥐고 쓰러져 계시더라구요. 입에 호루라기까지 무신 채로요.”
“됐어. 이제 그 얘기는 그만 하게.”
센지는 운전대에 오르기 전에 홈 끝에 서서 눈을 꼭꼭 밟았다. 오토마츠가 이곳에 쓰러진 채 발견된 것은 쓸쓸한 정월 초하루를 함께 지내고 돌아간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첫차로 찾아갔던 러셀이 앞으로 엎드리듯 쓰러져 있는 시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자네, 분명 그날 밤에도 이 차 탔었댔지?”
“예. 기관구의 미치오하고 러셀로요.”
“오토마츠 씨, 뭔가 평소와 다른 기색 없던가?”
“아뇨. 아주 정정해 보이셨는걸요. 그러니 건강진단을 때맞춰 잘 받아두셔야 하는데. 아참, 그러고 보니……”
“뭐야?”
“이제 생각이 나네요. 제가 미치오하고 역 변소에 들렀었어요. 변소에 가다가 애인한테 전화 좀 할까 하고 사무실을 잠깐 들여다봤거든요? 그랬더니 안에 밥상이 한 상 잘 차려져 있더라구요. 그것도 두 사람분이요.”
“두 사람분?”
“그렇지, 이제 생각하니 그때 어째 소름이 오싹 끼치더라구요. 역장님이 누구랑 둘이서 나란히 밥 먹을 일이 있을 리 없잖아요?”
“뭐가 있을 리가 없어? 손님이야 제법 많았지.”
“아니, 그게 아녜요. 아주머니 살아 계실 때 제가 밥을 한두 번 얻어먹었나요. 그런데 그날 밥상에 놓인 게 바로 옛날에 보던 아주머니 밥공기더라구요. 그리고 아주머니의 빨간 겉저고리가 방석 위에 놓여 있었어요. 얼핏 봤지만, 소름이 오싹 돋았었지요.”
“그러려니 하고 생각해서 그런 거지.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자주 놀러 오곤 했던 모양이야.”
“사신이 왔었던 것 아닐까요? 역장님 맞으러요.”
“바보 같은 소리. 귀여운 아이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신이 세상에 어디 있어? 오토마츠, 정신이 좀 흐릿해졌던 게지. 마누라는 죽었지, 폐선 당하지, 정년 퇴직이라지, 그러면 누구라도 정신이 멍해지지 않겠나?”
“흠. 그러고 보니 아까 엔묘지 주지도 그런 말씀 하시던데요. 역장님이 요즘 좀 이상했었다구요.”
센지는 사방을 감싸안으려는 듯 둘러싼 호로마이 산을 건너다보았다. 눈 걷힌 하늘은 그림물감으로 공들여 칠한 듯한 푸른색으로, 국철의 붉은색 기하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극락왕생이야. 눈 덮인 플랫폼에서 첫 열차를 기다리다 뇌일혈로 깨끗이 갔으니까. 이봐, 운전 바꿔. 오토마츠 보내는 건 내 손으로 해야겠네.”
“예에? 역장님이 운전을 하신다구요?”
“걱정 마라. 이래봬도 데고이치 십 녀, 기하 십 년 운전한 몸이다. 자네 같은 사람보다 솜씨야 한참 위이지. 어이, 좀 비켜보게.”
센지는 기관사를 밀어내고 기하 12형의 좁은 운전대에 앉았다.
“사람들이 내가 운전하는 줄 알면 기겁할라. 커튼 내려놔. 어이, 오토마츠, 자리잡고 잘 탔나?”
제복의 역무원들로 가득한 객석 통로에는 천에 덮인 오토마츠의 관이 타고 있었다.
“예, 타셨어요. 그런데 참말로 좋은 생각이네요, 호로마이 역 역장님을 비요로의 화장장까지 기하에 태워 모셔가는 거요. 드라마틱해요, 정말 공양도 이렇게 큰 공양은 없을 거예요.……근데 말이죠, 내일부터 저는 석 달간이나 다시 이 텅 빈 기차를 타야 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네요.”
“그래도 다행인 줄 알아. 미치오는 당장 오늘 밤부터 돌아가신 역장님 대리로 이 역에서 자고 깨고 해야 한다더라.”
“히이익, 생각만 해도 무섭네.”
센지는 낡은 가죽 차장 가방을 열고 오토마츠의 유품을 꺼냈다. 장갑을 끼고, 차양이 틀어진 짙은 남색 국철 모자를 쓰고 턱끈을 단단히 죄었다. 기름에 전 사내의 냄새가 센지를 꼿꼿이 일으켜 세웠다.
“출바알!”
센지는 목청껏 호령을 외쳤다.
앞쪽에 있는 완목식(腕木式) 신호기를 향해 검지손가락을 뻗자, 눈부신 오후의 햇살이 눈자위를 찔렀다.
역사 앞에 늘어선 수동 전철기. 대못을 박아넣은 침목. 녹슨 레일이 깔린 화물 야드. 옛날 그대로 조금도 변하지 않은 호로마이의 풍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늙은 기차의 확실한 손맛이 전해져오자 오토마츠와 보낸 강철의 나날이 센지의 가슴을 덮었다.
“오토마츠, 잘 봐두시게. 나랑 자네랑, 이 고철하고 함께 가세.”
“진짜 눈물나게 하실 참이에요, 역장님?”
기관사는 조수석에 선 채 콧물을 훌쩍였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는 철도원이다. 칙칙폭폭 뿌우- 미련한 쇳소리를 지르며 강철 팔뚝을 흔들며 꿋꿋이 달리는 철도원이다. 인간처럼 눈물 따위는 흘릴 수 없지, 암. 센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터널에 들어서자 힘차게 달리는 바퀴소리가 귀를 막았다.
“역장님! 기하는 어쩌자고 이렇게 기막힌 소리로 운데요? 신칸센 경적 소리도, 혹토세이 경적 소리도 근사하지만 기하 경적 소리는요, 듣고 있으면 괜히 눈물이 나요! 어째서 그런지 저는 들으면 그냥 눈물이 나더라구요!”
“멀었다, 멀었어! 그 소리 듣고 눈물이 나면 아직도 진짜 철도원 되긴 멀었어!”
센지는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할 때마다 등줄기를 꼿꼿이 세우고 기하의 경적을 있는 힘껏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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