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님께 배운 초등시절 배구선수생활,
나의 첫 사회생활 버팀목이 되었네.
모든 운동은 어릴 때부터 해야 기초가 몸에 배어 나이가 들어서도 폼(자세)이 유지되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3까지 근 7년을 선수생활하며 배웠으니 선친의 반대로 계속 운동을 하진 못했지만 훗날 직장생활하면서 스타로 떠오르며 회사 근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고향방문길 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며 교정이 떠나가도록 파이팅! 을 외치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운동이 끝나면 단체급식으로 옥수수 죽을 끓이고 남은 딱딱한 전지분유 덩어리들을 선생님이 “수고 많았다‘” 며 한두 개 가방 안에 넣어주시면 어머니께 자랑하고 동생들과 우유로 끓여먹던 추억도 그립다.
배구를 가르쳐주신 최운탁 선생님은 키가 아주 크셨고 영화배우처럼 잘생기신 데다 밴드도 가르치시어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는데 운동을 가르치실 때는 호랑이 같은 선생님으로 변하셨다.
큰 대회가 있을 즈음엔 성균관대학교 배구선수를 지낸 지전리 김수종 선배와 그의 큰형(김하종, 전 옥천군 청산면 지전리 이장)도 배구선수로 이름을 날렸는데 고향후배들을 위해 큰 시합이 있을 때 마다 한두달씩 고향에 머물며 코치로 나섰다, 하종 형님은 안타깝게도 고향에서 천렵하다 오른쪽 손목을 잃었는데 왼팔하나로도 기가 막히게 학생들을 지도했다. 하종 형님은 선수생활을 못하자 축구로 전향해 훗날 청소년 국가대표팀으로도 뛸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았다.
두 선배와 최운탁 선생님의 스파르타식 훈련을 통해 시골학교서 충청북도 남부삼군 체육대회 출전해 우승을 거두는 등 청산초·중학교는 배구학교로 지역 내 평판이 자자했다.
청산중학교 진학해서도 배구를 계속 했는데 마침 배구로 유명한 서울 대신 중·고 배구선수들이 모교로 내려와 친선게임을 벌이던 중, 필자와 조용암, 박응현 친구 3명이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나는 운동이 좋아 계속 서울로 진학해 선수로 뛰고 싶었지만 선친은 ‘외교관이 되어야 하는데 운동하면 배곯는다. 며 극구 반대해 가질 못하고 조용암 친구만 선발되어 배구선수의 길로 나섰다.
중1 때 부친의 병환으로 우리가족은 잠시 흩어 지내야 했고 나는 외가댁이 있는 보덕중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체육선생님이 청산중학교서 왔다하니 배구할 줄 아느냐고 해, 배구부를 만들어 배구선수로 3학년 때까지 뛰었다. 청산중학교의 배구선수 노랑유니폼을 만날 입고 다녀 여학생들로 부터 ‘노랑셔츠 입은 사나이’란 별명이 붙었고, 연대장을 맡아 매일 조회시간 국민체조 할 때면 연단에 올라 아침체조 진행을 했다.
학교서 인기가 오르자 동네 여학생들이 초롱불 켜고 열심히 공부하는데 밤마다 쪽문으로 작은돌맹이를 던져 놀러가자 꼬셨다. 어느 날 학교 앞 장터에서 노천극장이 열려 여학생들 몇 명과 보러갔다,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학교서 보지 못한 동네 불량배 녀일곱명이 나를 둘러싸더니 말도 없이 집단으로 신나게 두들겨 팻다, 난 평생 그렇게 많이 맞아본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동생도 형의 뒤를 이어 대전자양초등학교서 선생님 댁에 합숙하며 배구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전국대회가 열린 서울 대신중·고교 강당서 KBS 라디오 중계 아나운서가 해설하는 가운데 동생의 강 스파이크가 내리꽂히는 순간, 관중석의 모든 응원객이 ‘하나! 둘! 셋!’ 을 외치며 응원하던 모습이 선하다, 동생은 힘이 장사였고 그의 강 스파이크는 아무도 받아내질 못했다.
초·중 시절 비록 짧은 선수생활이었지만 나이가 들어도 조금 몸을 푸니 예전의 실력이 되살아났다. 1976년 현대경제일보(현 한국경제신문)편집국 기자로 언론계 입문당시엔 언론인들의 체력과 친목도모를 위해 각종체육대회가 많았다. 배구선수로 잔뼈가 굵은 내게 이름을 떨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한국기자협회축구대회(1974.5) 골키퍼로 출전해 대회 연속 2연패를 하는가 하면, 문화공보부장관기 쟁탈 사진기자단 배구대회(1975.5)에선 최우수선수로 뽑혀 3연패, 신문협회장기 배구대회(1974), 전국 일간신문·통신·방송 편집기자 배구대회(1974.9), 심지어 기자단 탁구대회에서도 우승을 했다, 「스포츠 맨 쉽」을 지닌 기자는 일도 잘 한다 며 배구를 좋아하는 K편집부장님으로부터 스카웃 제의도 받았다.
스포츠 맨 십이란 정정당당하고 공정하게 승부를 겨루고 아무리 경쟁관계 있더라고 경기 후에는 깨끗한 우호관계가 형성되므로 사람들은 스포츠로 깊은 우정을 쌓을 수 있다. 덕분에 경력기자로 들어와 외톨박이로 구박받던 코리아헤럴드 시절, 사내 체육대회가 열렸는데 갑자기 얌전하던 동료기자가 배수선수로 나서 파이팅! 을 외치며 놀라운 기지를 보이자, 악감정을 가졌던 한 노조원이 찾아와 자신의 불손함을 용서해 달라며 사과를 한 적도 있었다.
나의 고향 청산은 동학혁명의 전진기지로 선조들께 세상을 밝게 비추는 정의감을 키워주셨고, 운동과 글짓기! 은사님을 통해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는 두 가지 틀을 세워주셨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앞으로의 인생 2모작도 멋지게 살아가리란 희망의 미소가 샘솟았다.
직장도 정년하고 다소 여유가 생겨 은사님들 찾아뵈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이미 최운탁 선생님은 소식이 끊겨 중병이시고 조금 있다 소식을 들으니 이미 타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