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삼상15:1]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말렉 진멸 명령]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 선지자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사울 왕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에게 다시 온 때는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13:15)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인 듯하다. 대략 당시의 시점을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때인 B.C. 1010년 경에 왕위에 올랐는데, 만일 다윗이 최초 기름 부음 받은 때를 대략 15세 때로 본다면(16:11, 12) 그때는 아말렉 전투 직후였으므로(16:1), 아말렉 전투는 B.C. 1025년 경에 벌어졌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사무엘이 사울에게 다시 온 이때는 믹마스 전투 때(B.C. 1048년)이므로 사울과 헤어진 지(13:15) 약 23년 후라는 계산이 나온다(Leon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기름을 부어 -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이 열방의 왕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왕임을 보여 준다. 즉 선민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열방의 왕과는 달리 신적(神的)인 기원을 가지며, 따라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선지자의 지도를 받아야만 하는 왕이었다. 한편, 여기서 '기름을 부었다'는 선지자 사무엘의 말은 10:1의 사건과 연관되는 말이다(Keil, Fay).
`이제 왕은...말씀을 들으소서 - 이말은 사울이 전에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의 직무를 침범했던 제사 사건(13:8-14)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사울은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일차 시험을 통과치 못했었다. 그러므로 여기 사무엘의 이 언급은 사울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할 새로운 시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질 것을 예시한다. 이로 볼 때 믹마스 전투 개시 직전,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에 대해 심판적 경고(13:13, 14)를 내린 것은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그 선언 이후 사무엘이 다시금 사울을 찾아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킬 것을 당부한 것은 여호와께서 아직 사울을 버리지 아니하사, 그로 하여금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계심을 의미한다(13:14 주석 참조). 이것은 마치 니느웨 성에 대한 요나의 심판 선언도 최종적인 선언인 것 같았으나, 니느웨 성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신 것과 같은 이치이다(욘 3:4-1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사 죄인이 회개하고 살기를 바라시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겔 18:23; 33:11; 롬 2:4). 그러나 사울은 금번 아말렉 전투에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거역과 반역의 죄를 범함으로써(9절), 마침내 하나님께 버림받고 만다(26절; 16:14).
성 경: [삼상15:2]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말렉 진멸 명령]
`만군의 여호와 - 이 표현은 특별히 성전(聖戰)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된다(1:3, 11; 4:4; 17:45; 삼하 5:10). 따라서 사무엘은 여기서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본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아말렉과의 전투 명령의 엄숙성을 더욱 강조한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 아말렉 족속(the Amalekites)은 에서의 손자 아말렉의 후손들로서(창 36:12, 16; 대상 1:36), 유다 남부 광야 지역을 거점으로 유목과 약탈로 살아간 호전적인 족속이다. 이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직후 르비딤 광야에 이르렀을 때, 교활하게 이스라엘 후미(後尾)를 기습 공격했었다(출 7:8-13).그런데 그때는 이스라엘이 오랜 노예 생활 끝에 해방된 직후였으므로 아무런 전투 능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신 25:17-19). 따라서 그때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입은 타격은 실로 막대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은 바로 이러한 아말렉의 기습 공격 사건을 뜻한다. 아말렉의 이 공격 사건이 특히 용서받지 못할 사건이 된 것은 이것이 (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베푸신 크신 출애굽의 은총을 무시한 채 가나안 여정을 방해했던 사건이고, (2) 피곤하고 지친 이스라엘의 후미를 공격하는 비겁한 전술을 구사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족속을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제 1의 대적국으로 간주하시고, 그 족속을 천하에서 도말하고 진멸할 것을 선언하시고 명령하셨는 바(출 17:14; 신 25:19), 이러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는 이방의 술사(術士) 발람의 예언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민 24:20).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형벌 하에 놓여진 아말렉 족속은 비단 이 사건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이스라엘이 요단을 통하지않고 네게브(Negeb, 유다 남부 사막 지대) 지역을 통과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것도 방해하였다(민 14:43-45). 그리고 사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잔인하고 난폭한 침입은 결코 중지되지 않았었다(삿 3:13; 5:14; 6:3, 33; 7:12; 10:12; 12:15). 이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울을 통해 아말렉 족속을 진멸코자 하셨던 것이다. 출 17:14; 민 24:20; 신 25:19 주석 참조.
`내가 추억하노니 - '추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 '생각하다'란 뜻으로서, 곧 어떤 일에 대해 잊지 않고 내내 기억하고 있다가 때가 되어 찾아가는 행위를 뜻한다. 물론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에게 행한 아말렉 족속의 적대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아말렉의 적대 행위 자체만을 기억하고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1)아말렉 족속에게 복수하라고 당신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던 사실(출 17:14; 신25:19), (2) 그리고 아말렉에 대한 복수를 위한 성전(聖戰)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사실(출 17:16) 등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성 경: [삼상15:3]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말렉 진멸 명령]
`지금 - 출애굽 직후 가나안 행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한 아말렉 족속의 적대 행위에 대해 이스라엘이 복수해야 할 때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러 측면에서 안정을 이룩했을 시기로 지정하셨었다(신 25:19).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 치하에서 정치적인 안정을 이미 구축하고 있었다(14:47, 48). 즉 아말렉을 칠 시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가서(*, 얄라크) - '진군하다', '쫓아가다'란 뜻이다(출 13:21; 24:5,8). 곧 총공격을 하라는 의미이다.
`아말렉을 쳐서 - 여기서 '치다'(*, 나카)란 말은 '때리다', '쳐죽이다'란 의미로서,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해(傷害)를 입히는 것을 가리킨다(13:4; 14:14 ;17:35; 수 10:20).
`그들의 모든 소유를...진멸하되 - '그들의 모든 소유'는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란 뜻으로, 곧이어 언급되는 '남녀...나귀' 등 모두를 가리킨다. 한편 '진멸하되'(*, 하람)는 원래 '금지하다' 혹은 '바치다'란 의미이나, 여기서처럼 사역형으로 사용될 경우 '분리시키다', '금지시키다'란 의미가 된다. 특히 이 단어는 성경에서 사역형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목적으로 부정한 것을 제거하거나 저주받은 물건을 제사장에게 바치는 행동을 나타낸다(Lange).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 '헤렘'(바쳐진 것, 금지된 것)으로 지정된 것은 결코 다른 용도로는 쓰여질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만족을 위해 반드시 '헤렘의 법칙'대로 시행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만일 이 '헤렘'이 산 것이면 죽여야 했고, 그 밖의 물건들은 불로 다 태워버려야 했으며, 불로 태워지지 않는 금.은 등은 성소에 귀속시켜 하나님께 봉헌되어야만 했다(레 27:28; 신 13:16 ;수 6:17). 한편, 이와 비슷한 법칙은 성경 외적 문헌들에도 나타난다. 곧 어떤 고대 문헌에는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의 장년, 소년과 소녀, 하인 등을 잡아간 후 그들을 모두 죽여서 자신의 신 그모스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Pritchard). 따라서 여기의 '진멸하되'는 단순히 정치.군사적 행동이 아닌 영적.종교적 행위라는 점에서, 사울로서는 반드시 그대로 이행해야 될 사항이었다. 레 27:28; 신 13:17; 수 6:17 주석 참조.
`남기지 말고 - 여기서 '남기다'(*, 하말)는 '긍휼히 여기다', '동정하다', '아까워하다'란 뜻이다(23:21; 삼하 12:6; 대하 36:15, 17). 그러므로 이 말은'일말의 동정도 하지 말고' 또는 '조금도 아까워 말고'란 뜻이다. 곧 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의롭고 공의로운 심판대로 철저히 시행하라는 엄숙한 명령이다.
성 경: [삼상15:4]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 여기서 '소집하다'(*, 솨마)는 원래 '듣다'란의미이나, 여기서처럼 강조형으로 쓰일 경우 '불러 모으다', '듣게 하다'란 뜻이 된다(시 66:8; 렘 51:27). 결국 이것은 전투의 필요성을 알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전투하기 위하여 모여 들도록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 '들라임'(Telaim)은 유다의 한 성읍으로서 '델렘'(수15:24)과 동일 지역인 듯하다(Kimchi, Keil). 그런데 '델렘'(Telem)은 여호수아서에서 유다의 또 다른 성읍 '십'과 같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그곳에 인근한 지역일 것이다. 한편 '십'(Ziph)은 헤브론 남쪽 약 51km지점에 위치해 있다. 결국 '들라임'은 유다 남방의 국경 지대에 있는 장소로서, 곧 아말렉과의 경계 지점에 위치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아말렉 경계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여건상, 아말렉 전투를 수행키 위한 군사들의 집결 장소로 이곳이 채택된 것 같다(Fay). 한편 '계수하니'는 오히려 '소집하다'란 의미로 봄이 좋다(11:8).
`보병이 이십만...유다 사람이 일만 - 여기서 '유다 사람'만 유독 구별되어 있는 것은, 여기에는 본서 기록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의도적으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11:8). 즉 이 아말렉 전투가 벌어졌을 당시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와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Klein). 한편 '이십만...일만'은 야베스 길르앗 전투때 소집된 병력 '삼십만...삼만' 보다는 적은 숫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유다 지파는 병력 소집 장소인 '들라임'에 가까이 거주했으면서도 참여율이 다른 지파에 비하여 훨씬 적었다는 사실이다(11:8). 이것은 결국 유다 지파가 사울의 왕국에 대하여 특별히 도전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 유다 사람들은 그때 자신의 지파에서 왕이 나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창49:10).
성 경: [삼상15:5]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아말렉 성에 이르러 - '아말렉 성'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곳으로서, 지금도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때 사울의 군대는 국경을 넘어 아말렉의 영토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골짜기에 복병하니라 - 여기서 '골짜기'는 건기(乾期)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와디'(Wady)를 가리킨다. 그리고 '복병'(伏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정복전을 치룰 때 이미 전술의 한 형태로서 사용되었다(수 8:2; 삿 20:29). 그러나 여기의 '복병'은 아말렉을 기습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말렉 사람들과 함께 거주했던 겐 사람들(the Kenites)을 대피시킬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15:6]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사울이 후대의 다윗처럼(27:10; 30:26-30),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던 겐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겐 사람 - '겐'(*, 케니)은 '금속 세공업자' 혹은 '대장장이'란 의미이다. 이와 같은 명칭은 그들이 살던 아라비아 지역에 질이 좋은 동광석(銅鑛石)이 풍부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당시 유목민으로서 가나안 땅에 거주한(창 15:19) 겐 족속의 일파는, 모세 당시에는 미디안 지역에 거주했었으며(출 2:16-21; 18:1; 민 10:29),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때에는 그 족속의 한 사람이었던 모세의 처남 호밥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길 안내자가 되면서(민 10:29-32) 이스라엘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그 민족은 이스라엘의 남부 브엘세바 근처에서 살게 되었다(삿 1:16). 그리고 이때로부터 점점 남부로 내려가, 사울 시대에는 아말렉 족속들의 지역에 함께 거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겐 사람들 모두가 이스라엘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언급된 '겐 사람' 이외의 또 다른 '겐 사람'의 일파는 아라비아의 페트레아(Petrea) 지역에 살면서 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등,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의를 갖고 있었다(Lange). 그러나 여기 언급된 겐 사람은 이후 다윗 시대까지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30:29).
`선대하였느니라 - '선대'(*, 헤세드)는 '인자', '긍휼' 등의 의미로서,이 단어는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가리킬때 사용되었다(창 19:19; 시23:6; 106:45). 그러나 여기 언급된 겐 사람들의 '선대'는 구체적으로 그들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행 길 안내자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이다(민 10:29-32). 출애굽 당시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대(敵對) 행위를 한것에 비하면, 겐사람들의 이같은 태도는 '선대'(善待)라고 하기에 가히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삿4:11-22; 5:24-27). 한편 혹자(Hengstenberg)는 이처럼 아말렉 족속으로부터 겐 족속이 구별되어 보호 받을 것이란 사실은 이방의 술사 발람의 예언(민 24:20, 21) 속에서 이미 나타난다고 한다. 민 24:21 주석 참조.
`떠나니라 - 이것은 겐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영원히 떠났음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전투를 피해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 대피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후 사울 왕 말기에도 겐 사람들이 네게브(Negeb) 지역에 계속 살고 있었다는 사실로써 확증될 수 있다(27:10; 30:26-30).
성 경: [삼상15:7]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 - '하윌라에서부터 ~술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은 당시 아말렉 족속들이 흩어져 살던 거의 모든 영역을 가리킨다(창 25:18). 한편 '하윌라'(Havilah)는 '광황한 모래 사장'이란 의미로서, 아라비아 반도 북서부 쯤에 위치한 한지역 정도로만 추측된다(S.Cohen). 카일(Keil)과 스트라보(Strabo)는 현재 이곳을 아라비아의 페트레아 경계 지점에 위치한 '하우로테안'(Chaulotoeans) 지역으로 본다. 그리고 '술'(Shur)은 딤사 호수 동쪽에 위치한 시나이 광야를 뜻하는 일반적 명칭인듯 하다(창 16:7). 즉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최초로 도달한 지역으로(출 15:22), 애굽과 팔레스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라비아 사막의 일부이다(Keil). 그리고 현재의 지명은 '이팔'(Jifar) 광야이다(Fay). 한편, 위의 언급을 통해 우리는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유다 국경 지대로부터 애굽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족속의 거의 전지역을 초토화(焦土化) 시켰음을 알 수 있다(Smith).
성 경: [삼상15:8,9]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본문은 사울이 하나님의 진멸 명령을 부분적으로만 이행하였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일반 백성들과 짐승의 열등한 것들은 명령대로 모두 진멸했지만, 자신에게 실리적으로 유용한 짐승 또는 우수하고 질 좋은 것들은 진멸치 아니했다.
`아각을 사로잡고 - 사울이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처럼 아말렉 족속의 왕 '아각'(Agag)을 살려둔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아각'을 통하여 큰 실리(實利)를 얻기 위한 목적(왕상 20:31-42), (2) 혹은 '아각'을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목적(12절)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아각'(*)은 애굽 왕을 '바로'라고 하듯이, 아말렉 왕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불려지던 명칭이다(민 24:7 주석 참조). 그리고 '아각'의 의미는 '맹화'(猛火)란 뜻이다(Lange).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 이 말은 아각을 제외한 모든 아말렉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진멸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거의 모든 아말렉 족속을 쳐죽였다는 뜻이다(Fay). 사실 아말렉 족속이 거주하던 유다 남부 광야 지대는 광활했을 뿐만 아니라, 아말렉 족속은 유랑 생활을 하던 족속이었으므로 이들을 완전 진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Smith). 따라서 당시 일부는 피해 달아났거나 또는 발각되지 않았던 관계로 살아 존속했을 터인데(27:8; 30:1; 삼하 8:12). 결국 이들은 히스기야 시대에 시므온 사람들에 의해 전멸되었다(Keil, 대상 4:43). 한편, 여기서 진멸하였으되(*, 헤헤림)란 말의 개념에 대해서는 3절 주석을 참조하라.
`기름진 것(*, 미쉐님) - 직역하면 '두번째로 태어난 것'이란 뜻이다(D. Kimchi, R. Tanchum). 그러나 이는 다른 것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것보다 좋다는 의미이다(Keil, Fay). 사실 고대인들은 동물의 태(胎)에 있어, 첫번째 태보다 두번째 태를 더 좋은 것으로 간주하였다(Smith).
성 경: [삼상15:10,11]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여호와의 탄식]
사무엘의 제사권 침해 사건(13:9)에 이어 여기서는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제시된 두번째 시험, 곧 아말렉 진멸 사건에서도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1절; 13:8-14).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 여기 하나님의 '후회'는 인간의 후회와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즉 하나님의 후회는 당신의 어떤 특별한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여, 거기서 돌이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29절). 이것은 다만 죄인의 거역에 대한 신적(神的)인 슬픔을 의인법적(擬人法的)으로 묘사한 표현일 뿐이다(창 6:6, 7).
`돌이켜서(*, 슈브) - 성경 용례상 이 말은 종종 여호와께 대한 반역 및배교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민 14:43; 32:15; 수 22:16, 18; 렘 3:19).
`사무엘이 근심하여 - 여기서 '근심하다'(*, 하라)란 말은 '(분노로) 타오르다'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 이 말은 오히려 '진노하여'로 번역함이 타당하다(창4:6; 민 11:33; 신 7:4; 삼하 24:1). 아마도 이때 사무엘은 자신의 간곡한 권면(1절)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자신의 이기적 충동을 따라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결국 왕을 세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이 손상되고 파괴되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거룩한 의분(義憤)을 느꼈을 것이다(Keil, Fay).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 사무엘의 이같은 태도는 왕과 백성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겠다고 했던 자신의 각오(12:23)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자신의 각오처럼 이때 사무엘은 (1) 하나님께로부터 사울의 불순종의 죄를 사죄받기 위하여,(2) 그리고 무엇보다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바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사무엘이 여호와께 부르짖는 모습은 이전에도 수차 나타나는데(7:8, 9; 12:18), 이로 보아 진정 사무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죄인이 죄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가장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있으니, 곧 당사자인 그 죄인의 회개이다. 그러나 사울은 끝내 회개치 않음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만다. 한편, 유대 학자 아바르바넬(Abarbanel)은 여기서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그처럼 간절히 중보 기도한 것은, 사무엘이 개인적으로 사울을 그 용모와 용감성 때문에 진정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Lang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
성 경: [삼상15:12]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사울이...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 여기서 '자기를 위하여'란 말은 사울의 이기적 행동 원리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한편 '기념비'(*, 야드)는 원래 '손'(hand)이란 뜻이나, 손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낼 수 있다는 효과 때문에 '기념비'란 의미로 전의(轉義)된 듯하다(삼하 18:18; 사 56:5). 한편 여기서는 아말렉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勝戰碑)를 가리킨다.
`갈멜에 이르러 - 여기의 '갈멜'(Carmel)은 헤브론 남동쪽 약 15km 지점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성읍으로서, 원래 갈렙에게 주어졌었다(수 15:55). 이곳은 또한 나발과 아비가일의 고향이기도 하였다(25:2-40). 현재의 '쿨물'(Kurmul) 지역으로 추정된다(Fay, Keil).
`돌이켜...길갈로 내려갔다 - 사울이 자신의 고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인 기브아(10:26)로 가지 아니하고 '길갈'로 간 까닭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단이 있는 여러 곳(7:16) 중 가장 가기에 용이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1절). 한편 '내려갔다'(*, 야라드)라는 말은 길갈(Gilgal)이 요단 골짜기 저지대에 위치했었다는 지리적 특성을 잘 반영해 준다(10:8; 창 43:20; 수 16:7; 18:16). 즉 사울은 갈멜에서 승전비를 세운 뒤 유다 산맥을 가로질러 요단 계곡의 길갈로 향했던것 같다(13:4). 한편 '길갈'(Gilgal)에 대해서는 수 4:19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15:13]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 '여호와의 명령'은 분명 아말렉에게 속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것이었다(3절). 그러나 사울이 이같은 여호와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치 않았으면서(8, 9절), 명령을 온전히 이행한 듯 묻기도 전에 말한 것은 죄의식(罪意識)의 소산이요, 외식(外飾)의 결과였다.
성 경: [삼상15:14]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여기서 사무엘은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를 증거로 사울의 말(13절)이 위선이요 거짓임을 예리하게 폭로한다. 이에 대해 스미드(R. Payne Smith) 박사의 다음과 같은 표현 역시 날카롭다. '사울의 양심은 침묵하나 오히려 짐승은 사울의 위선과 불복종을 외치고 있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상15:15]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그것은 무리가...끌어 온 것인데 - 여기서 '무리가'란 말은 13절의 '내가'란 말과 너무나도 대조된다. 즉 13절에서는 자신을 내세워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다가, 이제 상황이 불리해지자 재빨리 '무리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회개 및 죄의 고백으로부터 점점 멀리 떠나가는 사울의 위선이 애처롭다. 이는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 죄를 하와에게 떠넘기려는 책임 전가와 다를 바 없다(창 3:12). 그러나 당시 백성들은 사울의 허락이나 묵인 없이는 결코 짐승들을 끌고 올 수 없었다(14:24-26).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남김이요 - 사울의 이 말은 거룩한 제사 의식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범죄와 이기심을 합리화 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그러나 비록 사울이나 백성들이 짐승들을 실제로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하여 진멸치 아니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짐승들을 하나님께 제사드린 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은 바로 이같은 이기적인 계산에 따라 '제사'를 빙자하여 짐승들을 진멸치 아니한 것이었다(Keil).
성 경: [삼상15:16]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가만히 계시옵소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레프'(*)는 문자적으로'중지하라!'(Stop!)란 뜻이다. 결국 이 말은 핑계와 변명, 책임 전가 등을 이제 그만두라는 의미로서, 사울의 구차한 변명을 더이상 듣지 않겠다는 사무엘의 확고한 의지를 반영하는 말이다.
`간밤에...이르신 것 - 이 계시는 사무엘이 철야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임하신 사울에 대한 말씀인 듯하다(11절).
성 경: [삼상15:17]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사를 보였을 때에 사울이 취했던 겸손한 행동을 가리킨다(9:21).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 권력이 생기자 사울은 점차 교만한 자가 되어, 결국은 비천한 자신을 들어 왕으로 세우신 여호와의 명령까지 무시하는 패역한 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여호와께서...기름을 부어...왕을 삼으시고 - 이것은 (1)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2) 따라서 사울의 왕권은 이방의 그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온전히 실행할 의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삼상15:18,19]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여기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달된 여호와의 신성한 명령을 사울이 전적으로 이행치 아니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사울의 주장(13, 15절)이 자기 변명과 외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길로 보내시며 - 여기서 '길'(*, 데레크)은 여호와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족속을 진멸하라는 신성한 명령을 주어 내보낸 원정의 길을 뜻한다(Fay).
`죄인 아말렉 - 여기서 '죄인'이란 말은 '아말렉' 족속들이 마땅히 진멸됐어야 할 합당한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 아말렉 족속의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멸절시키려 했던 죄이다(2절; 출 17:8-13).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 이것은 문자적으로 '탈취물에게로 날아갔다'(flew on thespoil, KJV)란 뜻이다. 이 말은 아말렉과의 전투시 사울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보고 그 마음에 탐심이 생겨, 그것을 간절하고도 열정적으로 원했다는 뜻이다. 결국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남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성 경: [삼상15:20]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아각을 끌어왔고 - 사울은 여기서 여호와의 진멸 명령을 거역하고 '아각'을 살린 자신의 사악한 행위(8, 9절)를 전혀 죄로 인정치 않고 있다. 오히려 여호와의 명령을 좇아 아말렉과 전투를 수행했다는 그 실제적인 증거로서 아각을 사로잡아 왔다는 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다.
성 경: [삼상15:21]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사울은 15절에 이어 여기서도 아말렉의 짐승을 진멸치 않은 자신의 범죄를, (1) 하나님의 제사를 빙자하고 (2) 또한 백성들에게 떠넘김으로써 정당화시키려 한다(15절).
성 경: [삼상15:22]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번제와 다른 제사 - '번제'는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이다(레 1:3-17). 그리고 '다른 제사'(*, 제바힘)는 문자적으로 '희생'(sacrifices)이다. 그런데 이것은 복수로 언급되어 있다는 점에서, 번제 이외의 다른 희생 제사 모두를 가리킴이 분명하다<레위기 서론, 7.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아말렉 족속에 대한 여호와의 진멸 명령(3절)을 무시한 채, '여호와께 제사드릴 목적으로'(15, 21절) 그 족속의 가장 좋고 기름진 짐승들을 끌고 왔노라고 극구 주장하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명쾌히 선포한 이 말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외적 의식(儀式) 행위 보다는 내적 마음의 순종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금언적(金言的)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무엘 이후 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여호와께 대한 합당한 예배의 기본 자세로 거듭 강조되었다. 즉 시편 기자(시 50:8-15; 51:16, 17), 이사야(사 1:11-17), 예레미야(렘 6:20), 호세아(호 6:6), 미가(6:6-8), 그리고 마침내 참 선지자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사실이 다시금 확증되고 강조되었다(마 9:13 ;12:7).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을 다시 요약하면, (1) 예배의 형식 보다는 예배자의 마음 자세가 더욱 중요하며(전 5:1; 미 6:6-8), (2) 영(靈)이신 하나님께서는 수양의 피나 기름보다 인간의 전인격적 마음을 원하시며(시 51:17; 요 4:24), (3)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모든 신앙 생활의 척도가 된다(딤후 3:16, 17)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구약 시대의 모든 희생 제사 행위는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그 고기를 제단 위에서 태우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인간이 그 행위 속에 담긴 참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이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즉 '제사'는 그림자요, '순종'은 실체인 것이다. 벧렌베르겔성경(Berlenberger Bible)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제사(sacrifices)로는 인간이 단지 비이성적인 짐승의 고기만을 드릴 뿐이지만, 순종(obedience)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뜻을 바친다. 그러므로 순종이야말로 이성적이고 영적인 제사인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156). 한편, 그러나 사무엘의 이 말은 '제사'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사무엘이 여기서 강조한 근본 사상은 제사 행위 속에는 반드시 순종의 자세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요, 제사로 말미암아 순종이 거부되거나 무시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말은, 후대의 예언자들이 합당한 예배에 앞서 성도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를 언급하면서 많이 사용하였다(사 1:10, 11,13; 렘 7:21-26; 호 6:6; 암 5:21-24; 미 6:6-8; 막 12:28-34).
`수양의 기름 - 여기서 '기름'(*, 헬레브; fat)은 희생 제사에서 하나님께 태워지던 부분으로서, 주로 가축의 내장 및 꼬리 주위의 '기름진 부분'을 가리킨다(레 3:16, 17; 7:23-25).
성 경: [삼상15:23]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사술의 죄 - 여기서 '사술'(*, 케셈)은 점(占)을 치는 행위를 뜻하며, 이같은 행위는 당시 이방 세계에서 보편화 되었었다(6:2; 민 22:7; 신 18:14; 수13:22). 그리고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행해졌었다(렘 14:14 ;27:9; 29:8; 겔 13:6, 23; 미 3:7).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우상 숭배죄로 규정되어 성경에서 절대 금지되었다(신 18:10; 왕하 17:17).
`사신(邪神) 우상 - '사신'(*, 아웬)은 '악함', '무가치함', '허탄한 것'등의 의미로서, 성경 다른 곳에서는 '우상'으로 번역되었다(사 66:3). 그리고 '우상'(*, 테라핌)은 중근동 사람들이 가신(家神)으로 섬기던 우상의 한 종류인데(창 31:34, 35; 삿 17:5; 18:14),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점(占)을 치는 수단으로써 언급되기도 한다(겔 21:21; 호 3:4). 창 31:19 주석 참조.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 여기서 '버려'(*, 이므아스카)는 미완료형이므로 미래형의 의미로 번역해야 된다는 점에서, 사울의 왕권이 머지않아 끊어질것을 시사해 주는 단어이다. 그러나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그 말씀을 제대로 좇았다면, 그의 왕권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세습될 수 있었을 것이다(13:13). 한편 여기의 '버려'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배척했던 그 행위를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단어이다<8:7>.
성 경: [삼상15:24]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후회]
사울은 사무엘의 날카로은 심문과 경고에 의하여, 변명으로 일관하던 태도를 바꿔 이제 자신의 죄를 시인했지만, 그 시인한 죄조차도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백성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 사울의 이 고백은 진정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범죄하였는지를 깨닫고 뉘우치는 참된 회개라고 볼 수 없다(Keil, Fay, Smith). 그 이유는 (1) 계속 자신의 죄를 시인치 않고 변명과 책임 전가로만 일관하다가, 사무엘의 무서운 심판적 선언(22, 23절)을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시인했기 때문이며,(2) 또한 죄의 고백 후에, 다시금 백성들의 탓으로 그 죄의 원인을 책임 전가하는 말(24b)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3) 나아가 고백 후에도 계속 왕위 보존과 왕권의 명예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30절). 결국 라피데(C.V. Lapide)가 정의한 것처럼, "사울의 이 고백은 순수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통회의 회개가 아니라, 단지 왕국의상실과 명예의 실추를 두려워한데서 비롯된 '입술의 회개'(repentance of the lips)였다"(Keil & Delitzsch, op. cit. p. 157).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 사울의 이 변명은 어느 정도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당시 사울의 왕권은 웬만큼 백성들로부터 인정은 되고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왕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눈치를 실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30절). 바로 이 사실이 사울 왕권(王權)의 한계요, 비극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고, 당신께로부터 비롯된 마음에 합당한 한 인물(다윗)을 따로 세울 필요가 있었다(13:14; 행 13:22).
성 경: [삼상15:25]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후회]
`지금 내 죄를 사하고 - 사실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여기서 사무엘에게 자신의 죄 용서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이 사실은 사울이 아직까지도 그가 지은 죄의 근본 성격을 제대로 이해치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즉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를 인간에 대한 범죄 정도로 가볍게 인식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 돌아가서 - 이때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가려고 했던 목적지는 길갈 제단이었을 것이다(21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 여기 사울의 이 '경배' 허락 요구는, 사울이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갖고자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사울은 그때 사무엘이 집전하는 제사의 현장에 사무엘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이 왕으로서 건재함을 만백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사무엘에게 함께 제사를 드리러 가자고 요청했던 것이다<30절>.
성 경: [삼상15:26]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사울의 심중(心中)을 간파한 사무엘은 여기서 사울의 폐위된 왕권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단호히 선포한다. 여기에 왕권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참 선지자로서의 절개가 돋보인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왕직 박탈은 단순히 사무엘의 제사직 침해 사건(13:9)과 아말렉 왕과 짐승을 살려둔 사건(15:9)의 두 가지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이 두 가지 불복종 사건은 사울이 저지른 유일한 불복종 사건이 아니라, 많은 반역적이고 불순종적인 사건들 중 대표적인 경우라는 점이다(Leon Wood).
성 경: [삼상15:27]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 사무엘의 이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사울에게 그의 폐위가 확정적임을 행동으로 선언한 것이다.(2) 사울의 반복되는 간청 때문에 인정에 얽매여 혹시 범할지 모르는 인간적 실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겉옷 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 여기의 '겉옷'(*, 메일)은 몸에 꽉 붙는 옷을 가리킨다(R. Payne Smith). 따라서 사울이 붙잡았다는 것은 그가 사무엘에게 극렬히 매달렸음을 뜻한다. 한편 사무엘의 옷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따라 이뤄진 일임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옷이 찢어지게 하심으로써, 그 일을 사울의 왕권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징조(sign)로 삼으셨던 것이다. 그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 '찢어진지라'는 말이 28절의 '떼어서'(*, 카라)란 말과 동일한 단어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 경: [삼상15:28]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 - 여기서 '이웃'(*, 레아)은 비한정적인 용법으로사용된 말로, 곧 '누구든 간에 어떤 다른 사람'(an other)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후 전개되는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여기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곧 다윗을 가리킨다(13:14; 행 13:22).
`주셨나이다(*, 네타나흐) - 여기서 이 단어는 13:14에서처럼, 다윗이 이미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과거 완료형의 의미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 사무엘은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차기(次期) 왕 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었다(16:3, 6-13).
성 경: [삼상15:29]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사무엘은 인간의 가변적(可變的) 속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불변적(不變的) 속성을 소개함으로써, 사울의 왕권이 다시 회복되기 불가능함을 명확히 선언하고있다.
`지존자(*, 네차흐) - 하나님의 신적(神的) 속성을 시사하는 명칭 중의 하나로서, '영광스러우신 분', '영원히 계시는 분', '승리하시는 분', 그리고 '변함이 없으신 분'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Klein).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 여기서 '변개(變改)하다'(*, 나함)란 말은 11, 35절의 '후회하다'란 말과 같은 어근(語根)의 말이다. 그렇지만 본절의 '변개함이 없다'란 말과 11, 35절의 '후회하셨다'라는 말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1, 35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후회(변개)는 사람의 후회나 변개처럼 그 마음의 변덕이나 어떤 계획의 차질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타락에 대해 가지는 신적 긍휼과 슬픔을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 안드로포파도스)으로 묘사한 것 뿐이고(창 6:6, 7), 본절에 묘사된 바 '변개(후회)함이 없다'란 표현은 신적 섭리와 경륜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을 순수하게 신성론적(神性論的, *, 데오프레포스)으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Keil, Fay). 실로 스스로 계시는 영원자 하나님께서는 과거.헌재. 미래가 동일하신 분이시다(출 3:14). 다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맞물려 역사가 진행될 때,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영고 성쇠(榮枯盛衰)가 마치 하나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뿐이고, 또한 11, 35절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의인화시켜 묘사했을 뿐이다(R. Payne Smith). 민 23:19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5:30]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범죄하였을지라도...나를 높이사...경배하게 하소서 - 여기서 사울은, 하나님의 작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왕권이 건재함을 만인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줄것을 사무엘에게 다시금 요청한다<25절>. 이로써 사울은 죄의 고백(24절)이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음을 보여 주었으며, 또한 여호와께 대한 경배 역시 자신의 명예 때문이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실로 사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딤전 6:5)로서, 선민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끌 왕의 직무를 감당하기에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 백성의 장로들 - 여기서 '내 백성'이라는 말은 사울이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앞에서 갖는 언약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삼상15:31]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하나님의 최종적인 폐위(廢位) 선언으로 말미암아(23, 26절), 사울은 이후 왕위에는 있으나 실상은 왕이 아닌 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무엘은 함께 제단으로 가서 여호와께 제사드리자는 사울의 간절한 요청(25, 30절)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사무엘이 사울의 요청을 허락한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1) 비록 형식적이긴 하지만 차기 이스라엘 왕이 등극할때까지 그래도 사울을 통하여 외적인 정치 질서를 유지시켜 나갈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O.V. Gerlach). (2) 사울과 함께 가서 아말렉왕 아각을 죽임으로써, 사울이 완수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마저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C.F. Keil).
성 경: [삼상15:32]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각의 처형]
`아각이 즐거이 오며 - 여기서 '즐거이'(*, 마아단노트)는 '부드럽다', '느슨하다'의 의미를 갖는 아랍어 어근 '아단'(*)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기쁘게', '기꺼이' 등의 뜻이다. 아마도 아각은 자신이 왕의 손에서 제사장의 손으로 넘어가게 됨을 알고, 이제는 자신의 목숨이 부지될 줄로 확신했던 것 같다(Clericus). 한편 '아단'이라는 동사에서 '복락', '기쁨', '환히' 등의 의미가 있는 '에덴'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창 2:8; 시 36:8).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 벌겟역(the Vulgate)과 수리아역(the Syriac)은 아각의 이 말을, 그가 자신의 죽을 운명을 예견하고 불안과 체념으로 한 말이라고 보고 "실로 죽음은 괴롭도다"란 의미로 번역했다(R. Payne Smith). 그리고 혹자는 아각의 이 말을, 죽음을 앞둔 전사로서의 영웅적 용기로 치켜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볼 때, 여기 아각의 이같은 언급은 자신이 사무엘에게 넘겨짐을 알고, 여호와의 선지자 특히 노년의 선지자는 적어도 왕이나 군대 보다는 긍휼이 풍성할 것이라는 그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공동번역)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Lange).
성 경: [삼상15:33]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각의 처형]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무자하리라 - 사무엘은 '동해 복수법'(Lex Talionis, 출 21:24, 25; 신 19:21)에 근거하여 아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한편 사무엘의 말을 통해 우리는 아말렉 왕 아각(Agag)이 수많은 전쟁과 약탈을 통해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란 말은 아각이 여인들을 얘기 못낳는 불임 여성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여인들의 자식을 죽여 없앴다는 뜻이다.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쪼개니라 - '여호와 앞에서'는 곧 여호와의 제단 앞을 가리킨다. 본서 저자가 여기서 특별히 이같은 언급을 한 까닭은, 사무엘의 아각 처형이 단순히 정치 보복적 차원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아말렉 족속 진멸 명령(3절)에 근거하여 영적.공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한편 선지자의 이같은 직접적인 형 집행은, 왕이 합당한 형 집행을 게을리하는 경우에 대신 이뤄졌었다(왕상 18:40).
`찍어 쪼개니라 - 기본 동사 '솨사프'(*)는 '여러 조각내다'(cut inpieces) 또는 '토막토막 끊다'(hew in pieces)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아각의 비참한 죽음을 연상시켜 주는데, 우리는 이를 단순히 잔인하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포악한 아말렉 족속의 아각 왕에 의해 더욱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수많은 자들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그 백성을 파멸시키고자 끝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말렉 족속의 극한 죄악을 기억해야 한다. 즉 이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 왕국의 우두머리에 대한 신적(神的) 공의의 정당한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 경: [삼상15:34]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과 헤어지는 사무엘]
`사무엘은 라마로...사울은 기브아 본집으로 - 길갈에서 여호와께 대한 제사와 아각의 처형을 마친 후, 사무엘과 사울은 각자의 거처로 각각 돌아갔다. 이 사실은 단순히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의미 외에, 이후 두 사람의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한편 사무엘의 고향 '라마'(Ramah)에 대해서는 1:1주석을, 그리고 사울의 고향 '기브아'(Gibeah)에 대해서는 10:26 주석을 각각 참조하라.
성 경: [삼상15:35]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과 헤어지는 사무엘]
`사무엘이...사울을 다시...보지 아니하였으니 - 이 말은 사무엘과 사울이 죽기까지 서로 상면조차 아니했다는 의미라기 보다는(19:24), 사무엘이 사울에 대해 선지자로서의 권고를 더이상 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결국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신정(神政)왕국의 왕으로 더이상 인정치 아니했음을 뜻한다. 즉 신정 왕국의 특성은 왕에 대한 선지자의 신의(神意)의 전달 및 권고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선지자가 왕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왕의 폐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었을 때는 그를 진정 위하는 마음으로, 사울의 왕직(王職) 수행을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계속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열방과 같은 왕으로 전락하자,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왕직을 박탈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23,26절). 따라서 이제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폐위시켜버린 왕을 위해 더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사울을 위해 슬퍼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사무엘이 사울의 회개를 위해 개인적으로는 계속 기도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 11절 및 29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6:1]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하나님께서 택한 이새의 아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위를 배척하셨다는 언급은, (1) 사울이 선지자 사무엘의 제사 행위를 침해했을 때(13:8, 9, 13, 14), (2) 그리고 사울이 이기적 욕심에 따라 아말렉에 속한 것을 잔멸치 아니했을 때(15:23, 28) 나타났었다. 그러나 첫번째의 경우때에만 해도, 사울은 자신의 이후 행위 여하에 따라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두번째의 거역 행위로 인하여 사울에게 선언되었던 '폐위(廢位) 선고'는 완전히 확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 사무엘의 이같은 깊고 오랜 슬픔은 단순히 개인 사울의 비극에 대한 사적(私的) 심정 때문만이 아니라, 사울의 폐위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회 전반에 나타날 부작용을 염려한 때문이었다(Keil, Smith). 사실 그때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사울의 군사적 능력만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후일 사울의 전사(戰死)를 슬퍼한 다윗의 애가(삼하 1:19-27) 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한편 여기의 '슬퍼하겠느냐'(*, 미트아벧)는 특별한 원인에 따라 심히 애통하는 행동을 가리킨다(사 3:26; 암 1:2; 8:8). 그런데 여기서는 특히 강조적 재귀형으로 사용되어, 그 슬픔을 밖으로 강력하게 표출시킴을 가리킨다(15:35;삼하 14:2; 대하 35:24; 스 10:6).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책망과 더불어 사무엘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심으로써 그의 슬픔을 소망으로 승화시켜 주셨다.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 여기서 '뿔'(*, 케렌)은 양의 뿔을 가리킨다.그런데 왕의 기름 부음을 위해서는 '병'(*, 파크)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10:1). 그러나 '뿔'이 사용되는 경우와 '병'이 사용되는 경우는 분명 어떤 대조점이 암시되고 있는 듯하다. 즉 '뿔'이 사용될 경우에는 주로 그 왕의 정통성 및 긍정적 성격이 암시되며(왕상 1:39). 반면 '병'이 사용될 경우에는 그 왕의 비정통성 및 부정적 성격이 암시되는 듯하다(10:1; 왕하 9:1-13). 성경이 이처럼 의도적으로 '뿔'의 사용을 보다 긍정적 차원에서 보는 것은, 성경의 여러 문맥상 '뿔'이 왕권(王權)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2:10; 겔 29:21; 단 8:3, 21).
`내가 너를...보내리니 - 여기서 '보내다'(*, 솰라흐)란 말은 '가기를 강요하거나 허락하다'라는 의미 보다는, 오히려 '사명을 주다'란 의미로 봄이 더 타당하다(민 14:36; 신 19:12; 삿 6:14).
`베들레헴 사람 이새 - '베들레헴'(Bethlehem)은 '떡집'이란 뜻으로, 이곳은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 남서쪽 약 16km, 그리고 예루살렘 남서쪽 약 10km지점의 해발 690m에 위치한 유다의 작은 성읍이다(룻 1:1). 한편 '이새'(Jesse)는 부호(富豪) 보아스와 모압 여인 룻 사이에서 태어났던 오벳의 아들로서(룻 4:17, 22; 대상 2:12; 마 1:5,6; 눅 3:32).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사람'이다(Klein). 이새는 그의 할아버지가 부자였으므로, 그 당시 그 역시 부유했었음이 분명하다(룻 2:1). 그러므로 사무엘은 인근 마을의 유력한 가문인 이새의 집에 대해 개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Fay,Smith). 그러나 그가 당시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에 대해서는 몰랐음이 분명하다.
`그 아들 중에서 - 당시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다(6-11절).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 여기서 '예선하였다'(*, 라아)는 문자적으로'보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성경 전반에서 이 단어는 '선택하다'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17절; 창 22:8; 41:33; 왕하 10:3). 그리고 여기의 '왕'(*, 멜렉)은 사울에게 적용되었던 단어 '지도자'(*, 나기드)와는 그 의미에 있어 다르다<9:16>. 즉 '방백'(方伯)의 의미인 '지도자'와는 달리, '왕'은 명실공히 한 나라의 군주(君主)를 뜻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 여호와에 의해 왕으로 예선된 자는, 이미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13:14), '사울보다 나은 사울의 이웃'(15:28) 등의 표현으로 암시되어 왔던 다윗을 가리킨다. 즉 사울은 인간적인 기준에서 백성들에 의해 선발된 왕이었으나(8:5, 20; 11:15), 다윗은 오래전부터 신적인 기준에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예비된 왕이었다(7절; 행 13:22). 이런 점에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신정적(神政的) 왕정 체제는 사울의 때가 아니라, 다윗의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룩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신 17:15).
성 경: [삼상16:2]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하나님께서 택한 이새의 아들]
`사울이 들으며 나를 죽이리이다 - 비록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최종 폐위 선언을 당함으로써(15:23, 26) 영적 왕권은 이미 상실된 처지였지만, 그래도 당시 사울은 정치.군사적으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일 사무엘이 다른 사람을 왕으로 기름 부을 경우, 그 일은 당연히 역모(逆謀) 행위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일이 그런 식으로 전개된다면 자신의 죽음이나 추방이 문제가 아니라, 이새 가문까지 화를 면키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사무엘은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솔직히 하나님께 아뢰었던것이다(Smith, Fay). 따라서 사무엘의 이같은 반응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우려되는 불행한 상황을 방지하고, 보다 나은 방법을 하나님께 아뢴 선지자의 사려깊은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그러한 반응을 전혀 책망하지 않으시고, 즉시 지혜로운 방법을 그에게 알려 주셨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입증된다(Keil).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 사무엘에게 지시한 여호와의 이 명령은, 여호와께서 당신께 드려지는 거룩한 제사를 사울을 속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명령이 결코 아니다. 실로(Shiloh)의 중앙 성소가 훼파된 당시 상황에서, 백성들을 영적으로 지도할 자격과 책임이 있는 선지자 사무엘이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백성들과 함께 드리는 일은 지극히 정당하며,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때 사무엘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실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아울러 그곳에서 기름 붓는 일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Calvin, Keil, Fay). 다만 사무엘은 자신이 기름 부으러 간다는 사실을 공개할 필요나 책임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의 '제사'(*, 자바흐)는 (1) 화목제를 가리킬 때 종종 사용된단어라는 점(1:3) (2) 제물이 암컷이라는 점(레 3:1-5)등으로 미루어 볼 때 화목제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16:3]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하나님께서 택한 이새의 아들]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 여기에 언급된 '제사'는 제사 후 함께 나누어 먹는 잔치가 동반되는 화목제였기 때문에, 사무엘이 제사에 그 지방의 사람을 칭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9:22). 그러므로 사무엘에게 있어서 사실상 이새를 청하는 것은 그의 아들에게 기름을 붓는 일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그러나 그 소식을 듣게 될 사울에게는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붓는 것은 사울에게 기름 부은 것과는 그 성격.목적에 있어서 전혀 다름을 암시하고 있다. 즉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던 목적은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8:5, 20) 다만 이스라엘의 군사.정치적 독립을 위한 것이었지만(9:16, 17),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일은 '하나님의 일'로서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임을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삼상16:4]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성읍 장로들이 떨며...영접하여 - 베들레헴 성읍 장로들의 이같은 태도는 (1) 당시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가장 권위있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며, (2) 또한 사무엘은 사사로서 그 직무상 종종 죄 범한 성읍을 방문하여 책망하고 징벌하는 일을 하는 자였기 때문에, 성읍 장로들은 갑자기 방문한 사무엘을 불안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Klein, Keil, Fay, Smith).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 "언짢은 일로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공동번역),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혹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what is wrong? why haveyou come? - Living Bible). 베들레헴 장로들의 이같은 질문은 사무엘이 자신들의 잘못을 징치하기 위하여 오지는 않았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Mauchline; 왕상 2:13; 왕하 9:17, 19)
성 경: [삼상16:5]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스스로 성결케 하고 - 부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몸과 의복을 깨끗케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합당하도록 준비하는 것을 뜻한다(출 19:10; 수 3:5; 7:13; 욥1:5; 요일 1:7-10).
성 경: [삼상16:6]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 여기서 '보고'(*, 야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사울을 선택할 때 그의 탁월한 신체를 중시했던 것처럼(9:2; 10:23, 24), 여기서 지금 사무엘도 그같이 외모를 중시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엘리압'(Eliab)은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란 뜻이며, 그는 블레셋의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사울을 따라 종군하였다(17:13, 28).
성 경: [삼상16:7]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처음 외모를 중시하여 왕을 선택했던 일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사실을 사무엘로 하여금 회고케 함으로써 그같은 실수의 재발을 방지하려고 한신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여기서 '용모'(*, 마르에)는 '보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라아'(*)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곧 얼굴 생김새나 풍채 등내면은 관계없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appearance) 자체를 가리킨다(창 2:9; 12:11; 민8:4).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머리에 기름부을 자를 택할 때 결코 외적인 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용모나 신장은 무조건 배격하고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사람은 외모를...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여기서 '외모'(*, 아인)는 직역하면 '눈'(eye)이란 뜻으로서, 곧 '육신의 눈'(肉眼)을 가리킨다. 그리고 '중심'(*, 레브)은 직역하면 '마음'(heart)이란 뜻으로서, 곧 '마음의 눈'(靈眼)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원문의 뜻에 맞추어 본절을 해석하면,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보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의 눈)으로 보느니라"란 뜻이 된다(Klein). 즉 이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에 있어서 인간의 척도와 하나님의 척도가 전혀 다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는 비록 인간은 육신의 눈을 가지고 사람의 외적 용모, 신장, 배경등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사람의 내적 겸손, 신앙, 인격, 진실성 등을 감찰하신다는 의미이다(대상 28:9; 시 7:9; 눅 16:15).
성 경: [삼상16:8,9,10]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사무엘은 이새의 여러 아들들 중 누가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선택됐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이새의 아들들을 차례로 자기 앞으로 지나게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으나, 그러나 이새의 일곱 아들들 중에는 왕으로 선택된 자가 끼어있지 않았다. 아마도 사무엘은 그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주신 내적 음성 또는 내적 확신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Fay).
`아비나답...삼마 - 이 두 사람은 모두 형 엘리압과 함께 블레셋의 골리앗이 침범했을 때 사울을 따라 종군했었다(17:13, 28). 한편 여기서 '아비나답'(Abinadab)은 '아버지는 훌륭하시다'란 뜻으로서, 이새의 둘째 아들이다. 그런데 사울 왕의 둘째 아들이름도 '아비나답'이었다(31:2). 그리고 '삼마'(Shammah)는 '황무지'란 뜻으로서, 삼하 13:3; 대상 2:13에서는 '시므이'로 표기되어 있다.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지나게 하나 - 대상 2:13-15에 기록된 다윗의 가계에 따르면, 이새의 아들은 다윗까지 포함하여 도합 7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윗까지 포함하면 이새의 아들은 도합 8명이 된다. 이러한 차이는 분명 이새의 8아들들 중 한 사람이 어려서 일찍 죽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Smith, Fay).
성 경: [삼상16:11]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기름 부음 받은 다윗]
`말째가 남았는데 - 여기서 '말째'(*, 하카탄)는 '가장 어린'이란 의미외에 '가장 작은'이란 의미도 있다는 점에서, 당시 다윗의 모습은 사울의 '큰 키'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9:2; 10:23).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 이것은 그당시 이새의 가족들이 다윗을 아직 어른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당시의 풍속으로 볼 때, 어른만이 제사의 초청에 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왕은 고대 중근동에서 종종 '목자'로 인식된다는 점에서(De Vaux), 여기서 다윗이 양무리 가운데 있는 것으로 언급된 것은 다윗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예시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Klein).
`앉지 아니하겠노라 - 이 말은 그때까지 사무엘이 앉아 있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의 '앉지'(*, 사바브)는 '둘러싸다', '에워싸다'란 의미로서(삼하 22:6; 대하 33:14; 시 17:11; 전 9:14), 곧 식사하기 위하여 식탁에 둘러앉는 것을 가리킨다(Keil, Smith, Fay). 따라서 그때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후 식사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성 경: [삼상16:12]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기름 부음 받은 다윗]
`그의 빛이 붉고 - '빛이 붉고'는 머리털 색깔이 붉음을 뜻한다(Klein, Keil, Lange).대부분 검은 머리털 색깔을 지닌 중근동에서 이 붉은 색 머리칼은 귀한 것으로서, 그 지역에서는 아름다움의 한 조건이었다(Keil).
`눈이 빼어나고 - 여기서 '빼어나고'에 해당하는 원어 '야페'(*)는 '아름답고', 또는 '반짝이고'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총기어린 아름다운 눈을 가리킨다. 이것도 뛰어난 얼굴 모습의 소유자가 갖추어야 했던 한 조건이었다(창 29:17).
`얼굴이 아름답더라 - 이것은 단지 외적 아름다움만을 의미치 않고, 내면에서 풍겨나오는 아름다움을 뜻한다. (25:3; 창 41:5; 신 1:25; 9:6; 삼하 18:27; 행 7:20). 그러나 여기 '얼굴'(*, 로이)은 분명 '겉모양' 혹은 '외모'란 의미도 있는바, 이는 또한 그 외적 얼굴도 아름답게 잘 생겼다는 사실을 시사한다.(Klein).
성 경: [삼상16:13]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기름 부음 받은 다윗]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부었더니 - 다윗은 모두 3차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았다. 즉 여기 첫번 기름 부음은 비공식적으로 이새의 가족만 참석한 가운데 은밀히 부어졌고, 두번째의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올랐을 때(삼하 2:3, 4) 기름 부음 받았다. 그리고 세번째는 마침내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을 때(삼하 5:3)받았다.
`그 형제 중에서 - 이것은 형제들이 목격하는 가운데서 다윗이 기름 부음 받았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때 이새의 가족 이외의 사람들은 그 장소에 아무도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윗의 형제들은 사무엘의 엄중한 부탁과, 그리고 사울의 보복등을 우려해 그 사실을 비밀로 유지한 듯하다(Leon Wood).
`이 날 이후로 - 이것은 여호와의 신이 다윗에게 즉각적으로 임했고, 또한 영속적으로 임재하고 계셨음을 시사하는 문구이다(Fay).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치적.도덕적.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역량과 은사를 허락하셨음을 뜻한다. 그 결과 다윗의 행동과 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18절). 한편, 이처럼 기름을 붓는 객관적 의식(儀式)의 결과로 여호와의 신이 주관적으로 임했다는 이 사실은 사울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었다(10:1, 10). 그러나 사울의 경우와는 달리, 다윗의 경우는 이같은 일이 (1) 기름 부음의 의식 직후에 있었으며 (2) 임재하신 여호와의 신이 끝까지 떠나지 않으셨으며 (3) 여호와의 신이 임할 때 발작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10:9-12; 11:6, 7) 사울의 경우와는 구별된다(Klein). 따라서 본서 저자는 위의 두 경우를 암시적으로 비교함으로써, 사울에 대한 다윗의 우월성을 강조하려고 한 듯하다. 한편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여호와의 신(神)을 부어주신 까닭은 (1) 다윗이 왕의 신분에 합당한 도덕성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며, (2) 왕의 고유한 직무를 감당할 능력을 소유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삼하 5:4에 이하며,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에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된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받을 때, 그의 나이를 레온 우드(Leon Wood)는 15세 가량으로, 그리고 카일(Keil)은 20세 가량으로 추정한다. 아무튼 당시 다윗이 제사 의식에 공식 참여치 못했다는 사실은 그가 만 20세 이상의 성년 남자가 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므로(11절), 따라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마침내 등극될 때까지 약 10-15년 가량을 예비 왕으로서 연단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혹자는 사무엘의 생전에 다윗이 라마의 선지 학교에서 일정 기간 동안 훈련받았다고 추정하기도 한다(R. Payne Smith, f.r. Fay).
성 경: [삼상16:14]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 사울에게 임했던 '여호와의 신'은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왕직을 제대로 수행토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11:6>. 따라서 이제 사울의 왕위가 폐위된 이상,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 원문은 '여호와께로부터 온 악신'(an evil spirit from Jehovah)이란 뜻이다. 여기서 이 '악신'(*, 루아흐 라아)은 인간의 도덕적.영적 생활을 고양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는 본질상 뚜렷이 대조되는 사단의 영으로서, 곧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억누르고 파괴하는 사단의 사악한 영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사단의 영은 하나님과 허락과 지배하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욥 1:12). 따라서 이것은 선악(善惡) 간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주재권 아래 있다는 구약의 전반적 사상과 잘 조화된다(신 13:2-4; 삿 9:23; 삼하24:1; 왕상 22:19-22; 대상 21:1; 욥 1:6-12).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이같은 악신이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그것은 (1) 사울의 왕위가 폐위되었다는 사실을 가시화(可視化)하여, (2) 새로이 영호와의 신을 받은 다윗과 대조시키며, (3) 또한 악신에 시달리는 사울로 인해 다윗이 수금 연주자로 성경이 무대에 공식 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듯하다. 한편 여기서 '번뇌케 한지라(* 바아트)는 '두렵게 하다', '놀라게 하다'란 의미이다(삼하 22:5; 욥 18:11;사 21:4). 즉 이것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 혹은 정신병적 우울증이나 착란증 현상을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상16:15]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본절은 사울 주변의 신하들에게도 사울의 폐위가 가시화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성 경: [삼상16:16]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수금(*, 킨노르) - 이 악기는 음량을 크게 하기 위한 소리통 곧 본체에서 뻗은 두 개의 가지가 달린 현악기로서<10:5>, 이 두개의 가지 사이를 가로지른 막대기와 본체의 끝에 동일한 길이의 현(絃)들이 여러개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약 B.C. 140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로 이와 같은 모양의 악기가, 최근에 일단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므깃도에서 발굴되었다(Klein).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 이것은 사울에 대한 악령의 활동이 간헐적(間歇的)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가...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 당시 사울이 당하던 고통은 원인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정신 심리적 현상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고대 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던 음악을 통한 심리적 치료 요법이 어느 정도 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10:5; 왕하3:15>. 그러나 사울에게 나타난 현상은 근본적으로 영적(靈的)인 원인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에서, 음악을 통한 심리적(心理的) 요법은 임시 방편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성 경: [삼상16:17,18]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여기서는 장차 왕위에 오를 자로서, 다윗의 여러 뛰어난 자질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이미 어느 정도 널리 인정되기 시작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소년 중 한 사람 - 이 소년(*, 네아림)도 사울의 신하 중에 있었다는 점에서, 사울의 신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의 연소함은, 또한 연소했던 다윗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었던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 다윗에 대한 이같은 호칭은 하나님께서 1절에서 직접 사용하셨던 것으로서, 다윗을 소개하려고 한 그 소년 신하가 다윗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 - 다윗에 대한 저자의 이같은 언급은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탁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서 '호기'(豪氣)는 문자적으로 '능력있는 용사'(a mighty valiant man, KJV)란 뜻이다.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다윗이 자신의 가축을 해치려던 사자나 곰 등을 쳐죽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다(17:33-37). 그리고 '무용'(武勇)은 '전사'(戰士, a man of war; KJV, RSV)란 뜻이다. 이것도 위의 '호기'와 같은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 또한 '구변'(口辯)은 '매사에 분별력 있는'(prudent in matters, KJV), '말을 신중하고 현명하게 하는'(prudent in speech, RSV)이란 뜻이다. 특히 이러한 자질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우 귀중히 평가되던 덕목(잠 23:9; 25:9, 11, 15; 29:20)인데, 이것은 시편 기자로서의 다윗의 작시(作詩) 능력을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준수한'(*,토아르)은 '잘 생긴 미남자'(a finelooking man, NIV; a man of good presence, RSV)를 가리키는 말로서, 특히 이 점에 대한 묘사는 이미 12절에 언급되었었다(25:3; 창29:17; 39:6; 신 21:11; 에 2:7).
`여호와께서...함께 계시더이다 - 기름부음 받은 결과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된(13절) 다윗은, 이후 그의 행적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었다. 즉 내적으로는 겸손, 성실, 진실함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는 사자나 곰을 맨손으로 물리치는 호기와 무용으로 그 증거를 나타내었던 것이다. 아무튼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게신다는 이 사실은 이후 모든 면에서 다윗에게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어구이다(3:19; 10:7; 18:12, 14).
성 경: [삼상16:19]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사울이...다윗을...보내라 하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던 바대로(8:11-18), 사울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백성들을 징집하는 일을 거침없이 시행하고 있었다.
성 경: [삼상16:20]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이새가...보내니 - 당시 이새는 왕의 권위를 존중하였으며 - 또한 자신의 아들이 왕실의 일에 종사케 되었음을 명예롭게 여겼기 때문에(Klein), 자신의 아들을 기꺼이 사울에게 보냈을 것이다. 특히 이때 이새는 자신의 아들이 미래의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실(13절)을 상기하고, 자신의 아들이 왕실에서 일하게 됐다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 - 이와같은 예물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1)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표명하거나(9:7, 8), (2) 또한 상대방에게 감사를 나타낼 때(창 14:18). (3) 그리고 상대방을 진정시킬 목적(25:18) 등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왕에 대한 예의라는 점에서 첫번째의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성 경: [삼상16:21]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그 앞에 모셔 서매 - 이것은 (1) 분부를 받기 위하여 가까이서 기다린다(왕상3:16), (2) 또는 본격적으로 신하의 한 사람이 되어 일을 하다(창 41:46)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분명 다윗은 사울이 악신으로 고통당할때 수금을 타 그의 마음을 위로함으로써 봉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사울의 마음을 매우 흡족하게 하였고, 또한 사울에게 크게 사랑받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23절).
`자기의 병기 든 자를 삼고 - 처음 수금 연주자로 사울에게 봉사한 다윗은 얼마 후 사울의 병기 든자(armor - bearer, RSV)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한다. 즉 (1) 다윗에 대한 사울의 사랑과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2) 또한 사울이 다윗의 무예를 어느 정도 인정하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병기 든 자'는 주인의 창칼이나 방패 등을 가지고 다니는 일종의 부관으로서(Smith, Keil), 주인으로부터 가장 신임받는 정예군 중에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14:1; 17:41; 31:4-6; 삼하18:15). 이처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 말미암아, 마치 모세처럼 다윗도 사울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상황 가운데서 왕실의 보다 고상한 직책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왕궁의 여러 법도와 국사를 익히게 하셨는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착실히 준비시켜 나가셨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172).
성 경: [삼상16:22]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본절에서 사울은 다윗을 계속적으로 자신의 곁에 두겠다고 이새에게 고지(告知)함으로써, 다윗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신임을 강력히 표명하고 있다.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 문자적으로는 '그가 나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느니라'란 뜻이다. 이것은 결국 다윗이 사울 자신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21절). 이처럼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이 생기기 전에는 그를 진정 사랑했다. 그러나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칭송이 자신을 앞지르자(18:7), 이후로 사울은 이전에 다윗을 사랑한 것 이상으로 그를 적대하게 되었다.
성 경: [삼상16:23]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본절은 다윗이 사울에게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21, 22절) 중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 - 이는 하나님의 허락과 지배하에서 주로 악인들에게 활동하는 사단의 영을 가리킨다. 14절 주석 참조.
`다윗이 수금을...탄즉 사울이...낫고 - 굳이 현대 의학적으로 사울의 병명을 분류하자면, '심한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 착란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심리학상 좋은 음악을 통한 치료법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울을 번뇌케 한 원인은 사단의 활동이므로 일반 음악 요법으로는 결코 그를 치료할 수 없었다. 다만 여기서 다윗의 수금연주가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13절) 다윗이 수금을 통한 음악으로 그것을 표현했기 때문에, '악신'(惡神) 곧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사단의 영이 사울에게서 일시적으로 떠나간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16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7: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블레셋의 침입]
`블레셋 사람들이...싸우고자 하여 - 블레셋 사람들의 이같은 전의(戰意)는 당시 악신으로 고통받던(16:14) 사울의 통치력 약화를 기화로, 믹마스 전투에세의 패전(14:31)을 설욕키 위한 것이었다.
`유다에 속한 소고 - '소고'(Shochoh)는 '가시가 많은 곳'이란 의미이다. 이곳은 유다 산지와 블레셋 평원, 곧 세펠라 지역에 위치한 요새 도시 중 하나로서(수 15:35), 오늘날 와디숨트(Wady Sumt)지역에 위치한 '슈웨이케'(Shuweikeh)로 추정된다(Keil,Smith). 베들레헴 서쪽 약 22.5km, 아세가 남동쪽 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블레셋 군이 유다에 속한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스라엘에 대해 기선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세가 - '파헤친 땅'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은 아얄론 골짜기(수 10:12) 남부의 견고한 도시로서, 해발 약 120m 가량이다. 수 10:10 주석 참조.
`에베스담밈에 진치매 - '에베스담밈'(Ephes-dammim)은 '피의 경계선'이란 의미이다. 이같은 지명은 그곳에서의 잦은 전투로 많은 피가 흘려졌기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다. 이곳은 소고(슈웨이케) 북동쪽 약 2.5km 지점으로 현재의 '다뭄'(Damum)으로 추정된다(Keil, Fay). 한편 대상 11:13에는 '바스담밈'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 경: [삼상17: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블레셋의 침입]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 '엘라 골짜기'(the vally of Elah)는 '상수리 나무의 골짜기'란 의미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서남쪽 약 22.5km에 위치한 오늘날의 '와디 에스상트'(Wadies Sant)로 추정된다. 당시 그 지역 내에는 나무가 무성하였고, 그 골짜기 밑바닥에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 사용했을 듯 싶은 조그만 돌들이 지금도 깔려있다고 한다. 또한 이 골짜기는 '소고'의 북쪽에서 동서로 가로질러 있다. 한편 이곳은 여름철만 빼고는 항상 골짜기에 물이 흘렀으므로,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이 전투는 물이 말랐을 여름철에 벌어졌음이 분명하다(Hertzberg).
`항오를 벌였으니 - '항오(行伍를 벌이다'(*, 아라크)는 '상대를 엄습하다', '일렬로 정렬하다'란 의미이다(4:2;욥 6:4). 여기서는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방어적 자세를 가리킨다.
성 경: [삼상17: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블레셋의 침입]
본절은 블레셋 족속이 자신들의 본진이 있는 '에베스담밈'<2절>을 떠나 이스라엘이진을 치고 있던 '엘라 골짜기'로 진격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때 양군은 골짜기를 경계로 낮에는 양편 언덕에 대열을 이뤄 길게 늘어서서 전투 내세를 취하다가, 밤에는 자신들의 장막으로 돌아가기를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다(Hertzberg).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 여기의 '골짜기'(*, 가이)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일반적 의미의 골짜기(*, 에멕)와는 전혀 다른, 좁고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협곡(峽谷)을 뜻한다(Conder). 바로 이같은 지형적 요인 때문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마주보면서도 쉽사리 전면전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PulpitCommentary).
성 경: [삼상17: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싸움을 돋우는 자(*, 아쉬 하베나임) - 문자적으로는 '둘 사이에 있는 사람'(a man between the two)이란 뜻이다. 이것은 결국 단신으로 싸워 단번에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하기 위해 두 군대 사이에 개입하는 중간사람(middle-man)이란뜻으로, 곧 선봉장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같이 전군(全軍)을 대표하여 선봉장이 상대방의 선봉장과 전투를 하는 방식은 성경 다른 곳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같은 전투 방식은 헬라 민족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바로 이 블레셋 족속들이 헬라권에서 이민 온 민족이라는 사실은 골리앗의 이같은 전투 형태를 넉넉히 이해케 해준다.
`그 이름은 골리앗 - '골리앗'(Goliath)이란 이름이 갖는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이 사람이 비셈계 인종에 속하기 때문이다.
`가드 사람 - '가드'(Gath)는 아세가 서쪽 약 8.9km 지점으로, 블레셋 5대 도시 중 하나이다(5;80. 그런데 이 지역에는 거인족인 아낙 족속(Anakim)이 섞여 살고 있었다(수 11:22). 그러므로 분명 골리앗도 이 거인족의 후예일 것이다.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 고대의 측략법에 근거하여 한 규빗(Cubit)을 약45cm 정도로, 한뼘(Span)을 약 13cm 정도로 본다면, 골리앗의 키는 약 283cm 정도로 추정될 수 있다. 한편 NEB는 274cm로 환산하였고, NIV와 Living bible은 '9피트 남짓'(over nine feet, 약 270cm 남짓)으로 보았다. 아무튼 골리앗은 270cm 이상으로,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장대한 거구였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17: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머리에는 놋투구 - 여기서 '놋투구'(*, 코바)는 이 단어의 첫 철자가 본절에서는 '카프'(*)로, 반면 38절에서는 '코프'(*)로 각기 다르다는 점에서, 헷 족속이나 아랍 민족으로부터 수입한 것이 듯하다(Krinetzki).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 '어린갑'(*, 카스케세트)은 천 위에 비늘모양의 놋이나, 철판 조각을 다닥 다닥 붙여서 만든 갑옷(coat of mail, KJV; coat ofscale armor of bronze, NIV)으로(Aquila), 고대의 전투 때에 왕이나 군장에 의해 주로 착용되곤 하였다(Layard).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 - 한 세겔(Shekel)은 약 11.5g이므로, '오천 세겔'은 약 57.5kg이다.
성 경: [삼상17: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 어린갑에 의해서는 허리나 허벅다리 부분까지도 보호되었다. 그러므로 이 놋경갑은 다리 부분을 보호하는 장비임이 분명하다.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 '놋단창'(*, 키돈)은 어깨의 뒷 부분에 차는 창을 가리킨다. 혹자는 이것을 방패라고 주장하나(LXX, Vulgate, theSyriac) (1) 고대에 방패는 대개 병기 드는 자가 별도로 갖고 다녔으며(7절) (2) 견고한 갑옷에 의해서 등 부분도 충분히 보호될 수 있다는 점(Josephus) 등에서, 여기 '놋단창'은 방어용 무기인 방패라기 보다는 오히려 창과 같은 공격용 무기로 봄이 타당할것이다. 그리고 본 단어가 단수라는 점에서, 이것은 손으로 던져 적을 살상케 하는 단검류는 아닌 듯하다.
성 경: [삼상17:7]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 이것은 멀리 던지기 위해 창자루에 고리가 달린 가죽끈을 감아 놓은 창의 모양에 대한 표현이다(Yadin). 즉 창자루에 긴 끈이 달려있었기 때문에 '베틀채'(weaver's beam, KJV; weaver's rod, NIV) 같고'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자루'(staff, KJV; shaft, NIV)에 해당하는 '헤츠'(*)는 케리(Keri)에 따라 '에츠'(*)로 고쳐 읽어야 한다(삼하 21:19;대상 20:5).
`창 날은 철 육백 세겔 - 600 세겔은 약 7kg이다. 따라서 이것은 골리앗의 창이 엄청나게 컸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4-7절에 묘사된 바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 골리앗(Goliath)은 그 거대한 신장이나 육중한 무기등이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을 만큼 크고 강했다. 마치 우뚝 솟은 난공 불락의 요새와 전혀 다를 바 없었던것이다.
성 경: [삼상17: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본절에는 골리앗이 자신을 블레셋의 대표로 자처하면서, 이스라엘 군대에게 자신과 싸울 대표를 뽑아 보내라고 호통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골리앗이 이처럼 일대일 결투를 신청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협곡을 경계로 서로 대치했던 지형 형편상 전면 선제 공격이 곤란했으며 (2) 골리앗이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이스라엘의 그 누구라도 쉽사리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 이같은 일대일 결투는 고대 이방의 전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 경우 선봉장의 승리는 곧 전체의 승리로 간주되어, 패배한 측은 상대국에게 패전국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다해야 했다(Klein, 9절).
`그가 서서 - 골리앗은 그때 언덕위에 있던 자신의 진을 나와 골짜기의 중간쯤에 우뚝 버티고 서있었을 것이다.
`어찌하여...항오를 벌였느냐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와 진을 치고, 골짜기 언덕에 대열을 이루고 있는 사실을 가리킨다.
`나는 블레셋 사람...너희는 사울의 신복 - 여기서 '나는 블레셋 사람'이란 말은 골리앗 자신이 블레셋 군대의 힘을 대표하는 자란 뜻이다(Keil). 그리고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란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중앙 집권적 군주 사울에 의해 철저히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이다. 이것은 여기의 '신복'(*, 아바림)이란 단어가 '종들' 혹은 '노예들'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로써도 잘 알 수 있다. 아무튼 골리앗은 이같은 언급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흥분케 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한것이다.
성 경: [삼상17:9]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종이 되어...섬길 것이니라 - 본절에 언급된 골리앗의 이 제안은, 결국 그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때(52-54절), 다만 이스라엘을 공포 분위기 속으로 빠뜨리기 위한 공갈 협박용이었음이 확실하다(10, 11절).
성 경: [삼상17:10]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내가...모욕하였으니 - 이것은 골리앗이 (1)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울의 노예 혹은 종이라고 깔보았고(8절), (2) 또한 이스라엘은 겁장이들이므로 블레셋의 종노릇이나 해야 할 무력한 민족이라고 조롱했던 사실(9절)을 가리킨다.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 골리앗이 이스라엘에게 자신과 맞서 싸울 용사를 요구만 하고 이스라엘 진으로 접근해 갈 수 없었던 이유는 (1)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진이 가파른 산 위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2) 또한 그는 중무장을 하여 몸이 무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삼상17:1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 여기서 '놀라'(*, 하타트)는 원래 '파괴되다', '부서지다'란 의미로서, 극단의 공포심을 표현할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왕하 19:26;사30:31;렘 8:9). 그리고 '두려워하니라'(*, 야레)는 '경외하다', '엄위하다'란 의미로서, 어떠한 유.무형의 강력한 힘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완전히 압도당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18:15;19:30;신 5:5;수 4:4;시 119:120). 이처럼 이스라엘은 사울 왕으로부터 전체 병사에 이르기까지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겁을 집어먹고 기가 질려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총지휘자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신이 떠나 버린 필연적 결과였다(F. W. Krummacher).
성 경: [삼상17:1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 '에브랏'(Ephrath)은 베들레헴의 고대 명칭으로서(창48:7), 족장 야곱의 아내 라헬이 산고로 죽은 곳이며(창 35:16-19), 무엇보다도 후일 선지자 미가의 입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로 예언된 곳이다(미 5:2). 한편 본서 저자는 여기서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과 구별했고(수 19:15;삿 12:8), 또한 '에브랏 사람'(Ephrathite)이라고 밝혀줌으로써 이새의 집안이 베들레헴 본토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결국 유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의 고향으로서, 그리고 장차 메시야 그리스도가 태어날 곳으로서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새는...나이 많아 늙은 자 - '늙은 자'(*, 자켄)는 성경에서 보통 '장로','노인'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한편 '나이 많아'는 '나이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섰다'란 의미이다. 결국 이같은 언급은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이 참전하고 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 이새가 참전치 아니했던 이유를 제시해 준다(Fay). 한편 스미드(R.Payne Smith) 박사는 당시 이새에게는 장성한 세 아들이 있었고, 도합 8명의 자녀가 있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이새의 나이를 최소한 60세 이상으로 보았다.
`여덟 아들이 있는 중 - 16:10, 11에서도 이새의 아들은 여기서처럼 여덟 명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역대상 2:13-15에서는 일곱 명으로 나와 있다. 이같은 차이를 규명해보려는 시도로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즉 (1) 이새의 아들은 원래 여덟 명이었으나 한 명은 죽었다고 보는 견해(Keil, Smith), (2) 이새의 아들은 원래 일곱 명이었으나 16:10에서 다윗을 제외하고도 일곱 명이라고 한 까닭은 많은 다른 아들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지 못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Klein) 등이다.
성 경: [삼상17:1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장성한 세 아들은...싸움에 나갔으니 -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군대에 나갈 자격과 의무가 있는 자는 이십 세 이상의 남자였다(민 1:3).
`엘리압...아비나답...삼마 - 16:6-9 주석부분 참조.
성 경: [삼상17:1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다윗은 말째라 -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형들과는 달리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를 제시해 준다. 즉 이는 당시 다윗의 나이가 20세 미만이었음을 시사해준다.
성 경: [삼상17:1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 여기서 '왕래하며'(*, 훌레크 와사브)는 다윗이 사울의 궁전과 베들레헴 집을 반복적으로 계속 오갔음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히브리 원문은 다만 '갔다가~그리고 (사울에게로부터) 왔다'라고 말하고 있기때문이다. 즉 다윗은 수금을 타기 위해사울에게 갔다가(16:19, 22), 그의 병이 호전되자 양을 치는 자신의 일을 위하여 다시 베들레헴의 자기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베들레헴에서...양을 칠 때에 - 이것은 오히려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기 위하여'(to feed...sheep at Bethlehem, KJV)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즉 이것은 다윗이 수금을 타던 일을 그만 두고, 사울의 곁을 떠났던 한 가지 목적을 언급하는 어구인 것이다.
성 경: [삼상17:1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그 블레셋 사람 - 이것은 단수로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블레셋 군대가 아닌 '골리앗'(Goliath) 개인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사십일을... 몸을 나타내었더라 - 이것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계속적으로 소강(小康)상태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같은 상태가 계속된 까닭은 (1) 이스라엘측에서 골리앗을 상대할 용사를 아직껏 내보내지 못했으며(11절) (2)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진(陳)이 자리잡고 있던 지형적 조건상 전면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절 주석). 그러나 블레셋의 선봉장 골리앗의 계속 되는 위협으로 말미암아 전황(戰況)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사십 일'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예시해주는 어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창 8:6;삿 13:1; Krinetzki). 즉 본서 저자는 여기서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이같이 시련과 위기의 수인 '사십 일'이라는 말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다윗이 매우 필요 적절한 시기에 이새에 의해 블레셋과의 전투 장소에 보내졌음을 강력히 암시하려고 한 듯하다.
성 경: [삼상17:17,1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이새가 여기서 이같은 조치를 위한 이유는, 블레셋과의 사십 일 이상의 대치로 인하여(16절) 이스라엘 군대의 식량이 고갈되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각 가정은 싸움에 징집된 자식들에게 일종의 병참 지원을 했던 것같다.
`볶은 곡식...떡...치스 - 성경에서 이것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곤고한 자들에게 적절한 음식으로 주로 언급되고 있다(25:18;삼하 17:28;룻 2:14). 특히 '볶은 곡식'과 '떡'은 서민들에 의해 애호되던 음식이었다(Krinetzki). 그리고'치스'(*, 할라브)는 문자적으로는 '우유'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건조한 우유덩어리'를 가리킨다. 한편 '한 에바'는 약 23리터에 해당하는 구약 시대 고체량의 부피 단위이다(출 16:36).
`안부를 살피고 - 이것은 건강 및 생존의 여부에 관한 '솰룸'(*, '평안')의상태를 알아보라는 당부이다.
`증표를 가져오라 - 이것은 (1) 다윗이 제대로 형들을 만나 형들의 안부를 살폈는지의 여부, (2) 예물이 전달됐는지의 여부, (3) 다윗에 의해 이새에게 전달될 형들에 관한 소식의 진위(眞僞) 여부를 증명할 어떤 '증거물'(token, RSV)을 뜻한다. 틀림없이 이것은 서신(書信)의 형태였을 것이다(F. R. Fay).
성 경: [삼상17:19]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본절도 18절에 이어, 이새에 의해 다윗에게 전달됐던 내용이다.
`엘라 골짜기 - 2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7:20,2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일찌기 일어나서 양을...맡기고 - 다윗의 순종과 부지런함, 그리고 책임감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아마도 저자는 여기서 사울의 왕권을 계승할 자로서의 다윗의 인품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 같다.
`진영 - (*, 마갈라). 이것은 '둥글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 '아갈'(*)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고대 수비 진지의 일반적 형태인 둥근 모양을 한 바리케이드를 가리킨다(Lange). 한편 칼빈(Calvin)은 이 바리케이드가 병거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병거의 장소'로 이해하였다(26:5, 7).
`항오를 벌이고 - '항오(行伍)를 벌이다(*, 아라크)란 말은 '정렬하다', '배열하다'란 의미로서, 곧 전투 대형으로 군사를 적절히 배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17:2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짐을...맡기고 - 다윗은 이같이 함으로써 형들이 있는 전투 대열로 신속히 가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여기서 '짐'은 형들에게 주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가져온 음식 보따리를 가리킨다(17절).
짐 지키는 자 - NEB(the New English Bible, 새 영어 성경)는 이 말을 '병참 장교'(quartermaster)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을 따른다면, 다윗은 그때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전하지 않고, 여기의 이 병참 장교의 손을 통해 형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성 경: [삼상17:2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골리앗...항오에서 나와서 - 여기서 '항오'(*, 마아로트)는 골짜기를 경계로 양쪽 언덕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군사 대열을 가리킨다<3절>. 그리고 '나와서'(*, 올레)는 '올라가다'란 의미인데, 이것은 골리앗이 자신의 진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진쪽의 언덕으로 어느 정도 올라왔음을 가리킨다(F. R. Fay).
`전과 같은 말 - 곧 8-10절의 내용과 같은 모욕과 조롱의 말.
성 경: [삼상17:2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심히 두려워하여...도망하며 - 즉 골리앗이 더이상 따라 올라올 수 없는 안전 지대로 피신했다는 말이다. 이로 볼 때 당시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한 사람으로 인하여 얼마나 사기가 저하되고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혔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삼상17:2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여기서는 사울 왕에 의해 약속된 바(27절)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주어질 세 가지 상급이 언급되고 있다.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 이와 같이 큰 재물을 약속함으로써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는 경우는 성경에 많이 언급된다(수 15:16;삿 1:12;삼하 18:11;대상 11:6). 한편 당시의 왕정(王政)이 실시된 지 20여년<15:1> 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으므로, 아마도 사울 왕가(王家)는 어느 정도의 행정 조직을 갖추고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임으로써 많은 재정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8:15, 17). 사실 고대 군주국에서는 군주(君主)가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하의 충성에 대한 보상이 뒤따랐고, 따라서 그러한 관습이 군주가 많은 재정을 보유하려 했던 목적 중의 하나였다(8:14, 15).
`그 딸을 그에게 주고 - 성경에는 '메랍'과 '미갈'이라는 두 딸만이 사울의 딸로서 언급되고 있다(14:49). 그러나 사울에게는 이들 외에도 또다른 딸들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에 이 두명 만이 언급된 까닭은, 이 둘만이 다윗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즉 맏딸 '멜랍'(Merab)은 결국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하지만 처음에는 다윗에게 주기로 약속됐던 처지였고(18:17-19), 또한 둘째딸 '미갈'(Michal)은 결국 다윗에게 주어졌던 것이다(18:20-27). 어쨌든 왕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며, 의미 심장한 일이었다. 특히 이미 기름 부음을 받아 차기의 왕으로 확정된(16:13) 다윗에게는 그 일이 왕좌로 나아가는 자신의 길을 보다 평탄게 할수 있을 것이었다.
`그 아비의 집을...자유하게 하시리라 - 사울의 이 약속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즉 (1) 왕과 백성 사이의 중간 계급 혹은 귀족 계급으로 올려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Lemche, Ewald), (2) 세금 납부를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Fay), (3) 부역을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Smith) 등이다. 그러나 첫번째 견해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중간 계급이 형성되어 있지않았다는 점에서 (Mccarter), 그리고 두번째의 견해는 '자유하게 하시리라'(*, 하파쉬)는 단어가 성경 용례상 세금의 면제를 전혀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출 21:2;신 15:12;렘 34:10) 타당치 않다. 반면에 세번째의 견해는 '자유케 하시리라'라는 단어가 대체적으로 육체적 억압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며, 또한 우가릿 문서에 용감한 행동을 한 사람이 왕에 의하여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었다는 평행 구절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Klein) 타당성이 있다. 한편 여기 '아비의 집'은 가문(家門) 전체를 가리킨다.
성 경: [삼상17:2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 이 말은 다윗의 의분(義憤)이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또는 골리앗을 죽이려한 다윗의 의도가 자신의 영달이나공명심 때문이 아니라, 오직 골리앗으로부터 당한 민족적 치욕 및 신성 모독을 제거하려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서 '치욕'(*, 헤르파)은 골리앗이 이스라엘에게 준 '모욕'(10절)과 동일한 어근의 말이다.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 이것은 다윗이 이미 약속된 것(25절)보다 더 큰 상급을 사울에게 약속받으려 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만 다윗은 그때 이 말을 함으로써 골리앗을 죽이는 일의 당위성.시급성을 시사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1)본절의 후반부 '이 할례 없는...모욕 하겠느냐'라는 말과 (2) 이후 딸을 주겠다는 사울의 제안을 다윗이 사양했다는 언급(18:18) 등을 통해 분명해진다.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 - 이 말은 블레셋 사람들이 대체로 포경 수술을 안했다는 사실 자체 보다는, 그들이 이스라엘과는 달리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 관계하에 있지 않은 이방 민족이라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다<14:6 주석 참조>. 그러므로 다윗의 이 말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하나님께서 자신과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라는(16:18) 확신이 담겨 있었다.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 - 이같은 문구는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동에 관한 언급이 다뤄지는 문맥중에 종종 나타난다(Klein, 수 3:10;왕하 19:4).그리고 여기 '사시는 하나님'(*, 엘로힘 하임)은 말할 나위없이 블레셋이 섬기던 다곤(Dagon, 5:2 주석 참조) 우상의 무기력함과 무가치함을 경멸하는 말투임이 분명하다(렘 10:6-10). 이같은 다곤 우상의 무기력성은 다곤의 이름을 빙자한 골리앗의 다윗에 대한 저주가 아무런 효험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결과적 사실로써 증명되고 말았다<43절>. 뿐만 아니라 다곤 우상의 무기력함은 과거에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완전한 항복을 함으로써 백일하에 폭로되지 않았던가(5:3, 4)! 한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분으로 훨훨 타올랐던 소년 다윗의 이 말은 당시 사울 통치하의 무기력하고 침체된 이스라엘 군대의 무감각성을 일깨워 주는 각성제가 되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17:27]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본절은 골리앗을 이기는 자에게는 세 가지 상급(25절)이 주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결코 근거없는 유언 비어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삼상17:2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엘리압이...노를 발하여 - 다윗의 맏형 엘레압의 이 분노는 다윗의 거룩한 분노와는 뚜렷히 대조되는 것으로, 곧 자신의 편협한 소견에서 비롯된 세속적 분노이다. 어쩌면 엘리압의 이같은 분노는 자신을 제쳐놓고 동생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한 질투 및 시기심이 근본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어찌하여...내려왔느냐 - 이것은 베들레헴이 해발 690m 높이의 고지에 위치한 성읍이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15:12;16:2).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 엘리압의 이 말은 (1) 양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에 태만했다는 것, (2) 쓸데 없는 일에 공연히 참견했다는 것 등을 지적한, 다윗에 대한 부당한(20절) 책망이다(Lange).
`나는 네 교만과...완악함을 아노니 - 여기서 '교만'은 목동의 주제를 벗어난 이기적 욕심(25절)을 지적한 말이고, '완악'은 피흘리는 전쟁을 보고 즐기고자 하는 사악한 심성을 지적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과 '완악'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지적코자 할때 성경에서 종종 사용되는 단어들이다(신 17:12;18:22;렘 7:24). 그러므로 결국 형 엘리압은 이같은 단어를 다윗에게 적용함으로써, 다윗의 거룩한 열정과 의분을 한낱 이기적인 교만과 사악함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실로 교만하고 완악한 심성은 엘리압 자신의 부당한 비난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성 경: [삼상17:29]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 이 말은 자신이 책망받을 일을 전혀 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말이다(Fay).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 이것은 문자적으로는 '그것은 한 마디의 말에 불과하지 않은가?'란 뜻이다. 곧 이것은 다윗 자신이 골리앗과 싸울 의사를 밝히는 말 이외에는 기타 아무런 교만하고 완악한 말도 하지 않았음을 기라킨다. 이처럼 여기서 다윗은 자긴이 그곳에 간 일차적 목적(17, 18절)을 제쳐두고, 골리앗을 쳐죽이는 일을 자신이 그곳에 간 목적으로 형에게 제시한다. 그때 다윗이 이같이 한 까닭은, 골리앗으로 인해 빚어진 이스라엘의 위급한 상황을 목격하면서 강렬한 신적(神的) 소명을 느꼈고, 바로 이같은 신적인 소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자신을 그곳으로 가게끔 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삼상17:30]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전과 같이 말하매 - 이것은 문자적으로 '이 말(*, 다바르)을 따라 말하매'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다다르)은 골리앗에 대한 자신의 도전 의사를 가리킨다(26, 29절).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 - 이것은 골리앗을 물리치는 자에게 세 가지 상급이 약속 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25, 27절).
성 경: [삼상17:3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사울에게 고하였으므로 - 문자적으로는 '사울의 면전(面前)에 고하였으므로'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 면전'이라는 말은 특정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는 특수한 표현이다(Thenius). 따라서 여기서 이같은 표현법을 사용한 까닭은, 다윗이 사울앞에 나아간 것은 그에게는 매우 영광스러우며 또한 의미 심장한 일이었음을 암시하려는 의도 때문인 듯하다.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 여기서 '부른지라'(*, 라카흐)는 '취하다', '맞다들이다'란 의미이다. 결국 이 단어는 골리앗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사울에게 있어 다윗이라는 인물의 출현이 얼마나 반가운 일이었는지를 잘 시사해준다.
성 경: [삼상17:3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그를 인하여 - 여기서 '그'는 '저 블레셋 사람'(골리앗)을 가리킨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이라는 이름의 사용을 기피한 까닭은, 그때 다윗이 이스라엘의 군대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모욕하고 있던 골리앗을 증오.경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Klein).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 여기서 '사람'(*, 아담)은 정관사가 없으므로 '한 사람'으로 번역해야 타당하다. 따라서 본 어구는 '한 사람도 낙담하지 말 것이라'로 번역해야 좋다. 그런데 70인역은 '사람' 대신에 '나의 주'(*, 아도니)로 번역하여 읽고 있다. 그러나 그처럼 원문을 고쳐 읽을 근거는 전혀 없다(Fay). 아무튼 일개 시골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한 나라의 통치자용 군대 총지휘관인 사울에게 오히려 이같은 위로의 말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주의 종이 가서...싸우리이다 - 다윗의 이 말은 엘리압이 비난했던 것처럼(28절) 결코 쓸데없는 만용이나 교만이 아니었다. 오직 소년 다윗은 할례받지 못한 이방 족속 블레셋 사람의 그 모멸스런 치용과 경멸로부터 여호와의 군대인 이스라엘의 명예를 되찾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겠다는 거룩한 열정에 불타 믿음과 확신으로 결연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성 경: [삼상17:3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너는 소년이요 - 사울의 이 말은 다윗이 나이가 어린 관계로 실제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던 사실을 가리킨다(12-14절).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 - 여기서 '어려서'(*, 나아르)는 앞의 '소년'과 동일한 단어이다. 결국 이 말은 골리앗이 다윗의 나이만큼 밖에 안되었을 때부터 이미 전투 경험을 쌓아온 백전의 노장임을 뜻한다. 한편 '용사'는 문자적으로 '전쟁의 남자'(a man of war)란 뜻이다.
성 경: [삼상17:34,3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여기서 다윗은 자신에게 '전투 경험'은 없지만 '전투 능력'은 충분히 있음을 사울에게 강력히 호소한다<16:18>.
`사자나 곰 - '사자'(*, 아리)는 오늘날과는 달리 다윗 당시만 해도 소아시아 전역을 포함하여 헬라와 인도까지에도 서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자는 대개 풀이 많은 초원 지대나 삼림 지대에서 주로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지대에서 양떼를 방목하는 목자들에게는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의 곰'(*, 도브)은 연한 갈색을 띤 '시리아 곰'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잡식성으로서 보통 때는 사람이나 가축을 안건드리지만, 동면이 끝날 시기인 늦겨울이나 이른 봄에는 먹을 것이 없으므로, 자신들의 서식지인 고산 지대를 내려와서 새풀을 뜯고 있는 어린 양들을 거침없이 잡아먹는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 언급된 '사자와 곰'은 양떼를 돌보고 지킬 책임이있는 목동에게는 가장 경계해야 할 맹수의 대표격인데, 본문의 언급은 이러한 맹수들이 동시에 내려와 양떼를 해쳤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때는 사자가, 그리고 어떤 때는 곰이 내려와 양떼를 해하려고 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묶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 아마도 곰과의 사투(死鬪)를 묘사하는 말인것 같다. 왜냐하면 실제 곰은 적을 일거에 강타하여 쓰러뜨리기 위하여 뒷다리로 의지하고 일어서서 앞 다리를 치켜 내리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의 취약 부분은 머리 부분으로서 그곳을 정확히 지팡이로 강타하면 제압할 수 있다고 한다(Pliny). 아마 다윗도 목자의 지팡이로써 곰과 싸워 이긴 듯하다(R. Payne Smith). 사실 고대 문헌을 살펴보면, 이처럼 지팡이로 곰이나 사자와 싸워 이긴 기록이 나타난다(Rosenmuller,Thevenot). 한편, 고대 히브리인들은 그 덩치와 외모의 험상굼음 때문에 사자 보다도 곰을 더 무서워하고 공포스러워 했다고 한다(Fay). 따라서 다윗도 여기서 곰과의 싸움을 일례로 이야기한 것 같다.
`수염을 잡고 - 사자나 곰은 '수염'이 없다는 점에서, 여기의 '수염'은 '턱'(chin)을 가리킴이 분명하다(R. Payne Smith). 이같이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여기 '수염'에 해당되는 '자칸'(*)dms '수염'이란 의미 이외에도 '턱'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Bochart). 한편 이러한 관점에서 갈대아역(the Chaldee)은 '아래 턱'으로, 그리고 70인역(LXX)은 '목구멍'으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삼상17:3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사자와 곰도 쳤은즉...모욕한...블레셋 사람이리이까 - 여기서 다윗은 가축을 해하려하여 자신이 쳐죽였던 맹수와, 그때 이스라엘을 해하여 하고 있는 골리앗을 암시적으로 동일시한다(Klein). 이같은 동일 묘사를 통해서 다윗은 골리앗에 대한 자신의 승리가 확실함을 사울에게 강력히 시사하였던 것이다.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 - 26절 주석 참조.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 - 26절 주석 참조. 한편, 특별히 여기서 이 호칭을 골리앗의 명수와 같은 야만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 경: [삼상17:37]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여호와께서...건져내셨은즉...건져 내시리이다 -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도전 의사는 결코 일시적 흥분이나, 충동으로 인한 만용이 아니었다. 즉 그때 다윗은 (1) 과거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양떼를 해하려고 한 사자와 곰을 물리친 경험에 근거하고(2)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여호와를 능멸하고 있는 사자와 곰 같은 골리앗을 직시하면서 (3)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자신과 함께하사 그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을 거꾸러드릴 것이라는 미래적 확신에 불타올랐기 때문에, 이스라엘 생사가 걸린 이 골리앗과의 결투에 결연히 자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 이번 골리앗과의 일대일 결투는 전체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 짓는 중요한 대결투였고(9절), 나아가 이 전쟁의 승패 여부에 따라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와 위협으로부터 자유하느냐 아니면 또다시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소국으로 전락하고 마느냐 하는 역사적 기로의 한판 승부였다. 따라서 사울은 40일 동안이나 골리앗의 온갖 모욕과 조롱을 감수하면서도 선뜻 도전자를 내보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 다윗의 자원(32절)은 일면 반가운 일이었으나, 일면 무시할 수 밖에 없는 에피소드적 사건이었다(33절). 그러나 거룩한 열정과 확고한 신앙에 근거한 다윗의 논리적인 설득에 결국 사울은 크게 감동을 받고, 마침내 골리앗과의 결투를 허락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 여기서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흐예)란 말은 미래형이라는 점에서, 차라리 '계실 것이다'로 번역함이더 좋다. 따라서 이것은 결국 사울이 다윗의 승리를 강력히 염원했을 뿐만 아니라 더나아가 확신까지도 했음을 뜻한다. 이것은 다윗의 말(34-37절)이 그만큼 믿음과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음을 시사한다.
성 경: [삼상17:3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이에 사울이...입히매 - 이러한 시도는 사울의 신앙과 경험(34-37절)을 완전히 이해치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Klein). 즉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골리앗과 싸우려는 다윗에게 인간적인 전투 장비 등은 전혀 무가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골리앗의 중무장을 의식하고(4-7절) 다윗에게도 그와 같은 무장을 시키려 했던 것이다.
`군복을...입히고 - 여기서 '군복'(*, 마드)은 찢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4:12), 갑옷을 입기 전에 입은 겉옷 종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Smith, Keil).
성 경: [삼상17:39]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익숙치 못하므로 - 여기의 '익숙하다'(*, 나사)는 '시험하다', '시도하다'.'입증하다'라 의미이다(창 22:1;출 15:25;신 6:16;삿 3:1). 결국 위 문구는 다윗이 사울의 군장을 자신의 몸에 착용한 채 전투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봤으나, 불가능 했었음을 가리킨다.
`시험적으로 - 여기의 이 말은, 그 의미가 본절의 내용 중에 스며들어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히브리 원문에는 없다.
`걸어보다가 - 이 말은 오히려 앞에 나왔던 '익숙치 못한지라'의 앞에 두고 '걸어 보기를 시험하다가'로 번역함이 좋다.
`익숙치 못하니...가지 못하겠나이다 - 결국 이같은 현상은 당시 사울과 다윗이 체격에 있어 그 차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나타났을 것이다(9:2;10:23).
성 경: [삼상17:40]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막대기(*, 마켈) - 보통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 만든 것으로, 한쪽 끝을 굽어지게 하여 손잡이가 되도록 한 지팡이(staff)를 가리킨다. 이 지팡이는 목자가 산을 오르거나, 걸으면서 나뭇가지와 잎을 칠 때, 그리고 웅덩이에 빠진 양을 구출할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창 32:10;출 2:11;민 22:27). 한편,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막대기(rod) '맛테'(*)는 구부러지지 않고 곧게 뻗은 모양의 지팡이를 가리킨다(출 4:2;7:9).
`시내에서 - 여기의 '시내'(*, 나할)는 '골짜기'. '하수', '강' 등의 의미로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던 엘라 골짜기를 가리킨다(2절). 이곳은 우기(雨期)인 가을부터 봄까지는 물이 흐르지만, 건기(乾期)인 여름에는 강 바닥이 말라붙어 버린다.
`매끄러운 돌 - 이 돌은 물이 말라붙은 골짜기의 시내(Wadi) 바닥에서 주은 단단하고 매끄러운 차돌을 가리킨다.
`물매(*, 켈라) - 이것은 주로 양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던질 돌을 넣을 수있도록 가운데 부분이 넓게 엮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물매의 한쪽 끝에는 끈이 달려져 있어 엄지에 연결하여 물매를 돌려 던질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이러한 물매는 막대기와 더불어 목자들의 필수 도구였는데, 곧 목자들은 물매로써 (1) 옆길로 새는 양떼를 멀리서도 통제하고 (2) 양을 노략하려는 야수들을 쫓아내었다. 뿐만 아니라 물매는 조직된 군대에 의해서도 사용된 듯하다. 즉 우선 베냐민 사람들은 성경에서 물매사용의 명수들로 언급되며(25:29;삿 20:16;대상 12:2;대하 26:4), 심지어 최근에 발견된 앗수르왕 산헤립의 궁궐 벽에는 구리로 된 투구를 쓰고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은 물매꾼이 그려져 있을 정도이다.
`다윗과 골리앗 - 이스라엘군과 블레셋군은 엘라 골짜기를 경계로 서로 대치한다. 아비의 심부름으로 베들레헴으로부터 전장(戰場)에 도착한 다윗은 선봉장 거인 골리앗의 신성 모독에 의분을 느끼고, 그와 결투할 것을 결심한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되고, 이에 사기가 충천한 이스라엘군은 블레셋군을 에그론과 가드까지 추격하여 물리친다.
성 경: [삼상17:4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블레셋 사람...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 본절은 무장을 안하다시피한 다윗과는 대조적으로, 그러한 다윗과 싸울 골리앗의 완벽한 무장 상태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4-7절>.
성 경: [삼상17:42,4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여기서는 골리앗이 다윗의 연소 혹은 왜소함, 그리고 허술한 무장으로 인하여 그를 조롱하고 그에게 독설(毒舌)을 퍼붓는 장면이 언급된다.
`다윗을 보고 - 여기서 '보다'(*, 라아)란 말은 '자세히 들여다보다', '관찰하다'란 의미이다(레 13:3;왕하 7:13;대하 12:17;욥 28:24).
`젊고(*, 나아르) - 흔히 '소년'이란 말로 번역되는 단어로(16:18), 곧 나이의 연소함을 가리킨다<33절>.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 이 말은 외형적 아름다움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12절), 한편으로는 나이 어린 사람의 외형적 특징을 묘사한 말이기도 한다.
`개로 여기고 - 문자적으로는 '내가 개냐?'(Am I a dog?)란 뜻이다. 한편 '개'는 중근동에서 가장 싫어하고 금기로 여기는 대표적 동물이다(왕상 21:23;왕하 9:36).
`신들의 이름으로...저주하고 - 여기서 '신들'은 히브리 본문에는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다만 '신'이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골리앗은 분명히 다신주의자(多神主義者)였을 것이라는 추정적 사실과 충돌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이 모순을 해결할 두가지 방법이 제안되어 왔다. 즉 그 방법은 (1) 단수 '신'을 사본상의 오류로 보고, 복수인 '신들'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 (LXX, KJV), (2) 단수'신'을 정확한 것으로 보고, 다만 '신'을 다윗의 신 곧 여호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Keil) 등이다. 그러나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믿는 수호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상대방을 경멸하는 일이 고대 용사들에게는 보편적이었다는 사실(Lange)에 근거하여볼 때, 위의 두 가지 견해 중 첫번째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R. Payne Smith). 또한 이같은 추축은 45, 46절에서 다윗이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상대방 골리앗을 경멸했다는 점에서, 보다 신빙성을 띠게 된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의 '이름으로'는 히브리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서, 번역자의 의역으로 삽입한 것이다.
성 경: [삼상17:4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네 고기를...들짐승들에게 주리라 - 고대의 전사(戰士)들이 결투를 벌이기 전 이처럼 저주와 위협의 독설(毒舌)을 상대방에게 퍼붓는 것은 스스로 사기를 앙양시키고, 기선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흔히 사용되었다. 고대 서사시인 호머(Homer)의 작품속에도 이러한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한편, 이러한 위협은 실제 고대 중근동에서(1) 패배당한 상대 장수의 옷을 벗기는 등 신체에 모욕적 행동을 가하며, (2) 또한 시체를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둠으로써 새나 들짐승의 밥이 되도록 하는 등, 보편적인 관습으로 행해지고 있었다(Klein, 31:8-13).
성 경: [삼상17:4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여기서 다윗은 군대의 무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우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성전(聖戰)을 수행하는 자임을 분명히 밝히고있다.
`칼과 창과 단창 -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인 거인 골리앗이 소유하고 있던 막강한 무기들로서(4-7절), 곧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무력(武力)을 상징한다고 볼수 있다.
`만군의 여호와(*,.예호와 체바오트) - 이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들을 징치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당신의 군대로 삼고, 친히 그 지휘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밀이다<1:3>.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 이 말은 앞에 언급된 '만군의 여호와'가 갖는 의미를 설명해주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 나타난 다윗의 말을 통해 볼 때, 다윗은 자신과 골리앗과의 싸움을 단순히 개인과 개인 또는 국가와 국가간의 사움만으로 보지 않고, 골리앗이 숭배하는 블레셋 족속의 신들과 자신이 믿고 의뢰하는 이스라엘의 신, 곧 여호와 하나님 간의 싸움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방의 헛된 목석(木石)의 신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 앞에 여지없이 거꾸러지리라는 신앙과 확신으로 담대히 나아갔던 것이다.
성 경: [삼상17:4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내 손에 붙이시리니 - 이 말은 주로 성전(the Holy War)을 수행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완전한 승리를 주시고자 할 때(수 6:2;8:1, 7) 사용되는 말이다<14:10 주석>.
`온 땅으로...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 다윗의 이 말은 성전(聖戰)의 일차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수 2:9-11). 즉 성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보여 준다(수 2:9-11). 즉 성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살아계셔셔 역사를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섭리.운행해 나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널리 증거하는 데 있음을 다윗은 올바로 인식한 것이다(고전 10:31).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약 백성으로 만천하에 널리 드러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성 경: [삼상17:47]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알게 하리라 - 만일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과 맞싸울 장수로 이스라엘에서도 최대한 비슷한 조건의 용사를 고르고 골라 내보내어 혹시 이겼다면, 그 싸움의 모든 영광은 그 승리한 용사에게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골리앗의 조건과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현격한 대조를 보이는 다윗이 '창 칼 없이' 막대기와 물매만으로 승리한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요, 오직 그 이름만이 영광받을 것이었다. 따라서 소년 다윗은 이러한 점까지 내다보면서, 진정 골리앗의 창칼이 썩은 지푸라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이스라엘의 거인 하나님과 함께 나아갔던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 이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전쟁의 하나님'으로서, 곧 (1) 모든 전쟁의 승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좌우되며(대하 20:15;시 127:1;144:1) (2) 또한 그러한 모든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뜻이다.
성 경: [삼상17:4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 여기의 '일어나'(*, 쿰)는 문자적 의미의 일어남 보다는 차라리 어떤 결정적 행동에 선행되는 의지적 결단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블레셋 사람에게로...빨리 달리며 - 이러한 다윗의 적극적인 전투 자세는 오직 여호와의 능력만을 힘입어 싸우려 했던 다윗의 신앙과 용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이는 다윗이 골리앗과는 달리 극히 가벼운 무장, 즉 막대기와 물매 만을 지니고 있었던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40:, 43절).
`항오를 향하여 - 본 문구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블레셋의 진영과 가까운 지점에서 벌어졌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도 골리앗은 중무장(4-7절)으로 인해 행보가 둔했던 반면, 다윗은 평상시 목동의 복장과 소도구 그대로였기 때문에 블레셋 군대의 대열쪽으로 많이 전진해갔던 것 같다. 한편 '항오'는 '군대의 대열(隘列)'을 의미한다<23절>.
성 경: [삼상17:49]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돌을...물매로 던져 - 여기서 '물매'는 블레셋 사람들이 예기치 못할 정도의 비밀 병기는 결코 아니었다. 그 이유는 (1) 물매는 이미 고대 중근동에 널리 알려져 있던 병기였으며<40절>, (2) 또한 골리앗은 다윗이 물매를 휴대한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골리앗은 자신의 거대한 몸집이나 거의 빈큼없는 무장 상태로 보아 그까짓 물매로 인해 어떤 타격을 입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무력을 과신했던 것이다.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 이같은 결과는 일차적으로 (1) 그당시에는 중세기의 기사(騎士)들이 착용했던 것과 같은 안면 보호대(面甲)가 개발되지 않았으며, (2) 골리앗 앞에 있던 방패드는 자가 골리앗의 큰 키로 인하여 그의 안면을 방어하지 못했으며, (3) 그리고 다윗의 뛰어난 물매 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전과(戰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거두어질 수 있었음<45-47절>이 분명하다(Galling). 그러므로 실로 이것은 "40일 동안이나 그 교만한 블레셋 사람(골리앗)의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다윗의 물맷돌 속에 응축되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힌 것이다". 한편 '이마에 박히니'라는 말은 (1) 골리앗에대한 다윗의 승리가 결코 다윗 자신의 물매 솜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과 (2) 골리앗이 단 하나의 물맷돌로 인하여 죽기까지 했던 이유를 시사해 준다.
`땅에 엎드러지니라 - 외형적 자세로만 볼 때 이것은 상대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표할 때에 취하는 자세이다. 일찍이 여호와의 법궤 앞에서 블레셋의 다곤(Dagon) 신상이 이처럼 엎드러졌었다<5:3>. 그러므로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모멸하던 자를 강제로라도 굴복시켜 그로부터 합당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윗의 물맷돌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종종 주위의 흔하고 평범한 물체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물체나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사용에 합당하도록 하나님께 헌신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우리는 우리 주변에, 또는 우리 자신 속에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실 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 원하시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것, 그리고 그 무엇이라도 당신의 목적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들어 사용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성 경: [삼상17:50]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 여호와께서는 창.칼 등 무기의 도움없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다윗의 확신과 신앙(47절)이 실제적으로 입증되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이처럼 다윗의 물맷돌이 대적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쳐서 거구러뜨린 것은 다니엘서 2:34, 35에 나타난바 '뜨인 돌이 큰 신상(神像)을 부숴뜨리고, 이어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다'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물맷돌 사건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단의 세력을 징치하고 전멸시킬 것이라는 심판 사건의 전조(前兆)에 다름 아니었다.
성 경: [삼상17:5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다윗이...블레셋 사람을 밟고 - 밟는 행위는 완전한 승리.정복의 의미를 갖는다(수10:24;롬 16:20). 따라서 블레셋 사람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이같은 행동은 (1) 다윗을 통한 블레셋 민족 정복(삼하 8:1), (2) 그리스도를 통한 사단 세력 멸절(룸 16:20;계 20:10) 등의 의미를 이중적으로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칼을...빼어 내어...그를 죽이고 - 전쟁 관례상 자신의 무기를 사용치 않고 상대국 장수로부터 칼을 빼앗아 그 장수를 죽이는 일을 강대국과 그 장수에 대해 수치심을 안겨 주려는 것이었다(Klein, 삼하 23:20, 21). 한편 여기의 '칼'은 골리앗이 소지했던 창과는 달리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같은 추정은 (1) 소년 다윗이 능히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 (2) 제사장 아히멜렉이 그 칼을 다윗에게 적당한 것으로 생각했었다는 사실(21:9) 등으로 충분히 뒷받침 된다. 아무튼 자신의 칼과 창만을 믿고 큰소리쳤던(43, 44절) 골리앗이, 결국 자신의 그 칼로 자신의 목을 베임 당한 이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악인은 결국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그 자신이 빠지고 만다는 진리를 보여 준다(시 7:15;9:15).
`그 머리를 베니 - 고대의 전투에서 적국의 적장을 죽이고, 그 승리의 증거로서 그 머리를 베어 왕에게 바치는 일(57절)은 하나의 관례였다.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 블레셋 군대는 골리앗의 승리를 확신하고 이스라엘 군에 대한 총공격 태세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골리앗의 패배라는 어이없는 결과에 그만 전의(戰意)를 완전 상실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골리앗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초에 약속했던 것, 곧 양쪽의 대표 중 진쪽의 군대는 이긴 쪽의 군대에게 완전한 항복의 예(禮)를 갖추어야 한다는 선언(9절)을 스스로 파기한 행동이기도 했다.
성 경: [삼상17:5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쫓아 - 여기서 본서 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같이 분리 언급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1) 본 전투가 있었던 당시와 본서가 기록된 당시의 유다 지파와 타지파가 상호 대립하고 있었다는 사실(11:8;15:4), (2) 본 전투에서의 승리가 유다 지파 사람 다윗의 결정적 역할에 따른 결과였다는 사실, (3) 본 전투가 유다 지파의 땅에서 벌어졌었다는 사실(1절) 등의 정치.군사적 배경을 암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여기서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이 함께 블레셋 군대를 추격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이방 원수를 격퇴함에 있어서는 온 이스라엘 민족이 한 마음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Klein).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 이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7:14>. 그런데 한편 여기서 '가이'(*)에 대한 해석으로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즉 이를 (1)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 '골짜기'(3절)로 보고, '성문'처럼 '에그론'에 속한 한 지점일 것이라는 해석(Targum,Vulgate), (2) 필사자의 실수에 따른 오기(誤記)로 보고,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를 가리킬 것이라는 해석(Keil, Klein, LXX) 등이다. 그런데 첫째, 블레셋이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다는 언급과(52b절) 둘째,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시사하는 구절 속에 '가드'와 '에그론'이 나란히 언급됐다는 점(7:14)등에서 (2)의 견해가 더욱 타당성이 있다.
`사아라임 가는 길 - 이것은 '엘라 계곡'을 가리킨다<3절>. 한편 '사아라임'(Saaraim)은 여호수아 15:36의 언급을 통해서 볼때, 소고 및 아세가<1절>와 인접한 한지점에 위치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현재의 '텔 케플 자카리야'(Tell Kefr Zakariya)지역으로 추정된다(Keil).
`가드와 에그론 - 블레셋의 주요 도시 국가들. 수 13:3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7:5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진을 노략하였고 - 고대 중근동에서 승전국이 패전국으로부터 전리품을 획득하는 일은 극히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행위는 본서 저자의 눈에 부정적으로 비쳐졌음이 분명하다. 그 같이 볼 수 있는 까닭은 저자가 여기서 합법적인 탈취를 뜻하는 '솰랄'(*)이라는 단어를 사용치 아니하고(민31:31;신 2:35;수 8:2;11:14;삼하 3:22;대상 20:2), 부정적 의미의 탈취를 뜻하는 '솨사스'(*)를 사용했기 때문이다(삿 2:14;시 89:41;사 13:16;렘 30:16). 그렇다면 저자가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략 행위를 부정적으로 본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1) 그 물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했던 블레셋 족속의 소유물이었으므로, 필연 하나님께 바쳐진 저주받은 것들이었음이 분명하며(15:3 주석 참조;수 6:18-21),(2) 따라서 그 물건들은 반드시 영적 지도자의 조언에 따라 처분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임의로 취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Klein, 민 31:21-24;수6:18).
성 경: [삼상17:5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가고 - 이같은 언급은 여기의 '예루살렘'이 그 당시 여전히 여부스 족속(the Jebusites)의 수중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상충된다(삼하 5:6-9). 바로 이같은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시도로서 다음과 같은 해석이 제시되었다. 즉 그것은 (1) 당시 예루살렘이 여부스 족속에 의해 부분적으로 장악되긴 하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곳에 이미 살고 있었기 때문에(수 15:63;삿 1:21), 다윗은 그때 블레셋과의 싸움 직후 골리앗의 머리를 가까운 그곳으로 가져갔다는 해석(Keil, Lange), (2)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이 여부스 족속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싸움 직후에는 골리앗의 머리를 다른 곳에 임시 보관하였다가, 마치 임시장사 되었던 사울의 시체가 후일 그 아비의 매장지에 완전히 안장되었듯이(삼하21:12-14),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그곳으로 옮겼다고 보는 해석(Willis) 등이다. 그런데 다윗 당시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일부 거주 하기는 하였으나, 그 도시는 여부스 족속의 강력한 지배 아래 있었고 또한 다윗과 같은 특별한 인물들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다는 점에서 두번째의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는 여기의 언급은 후대에 본서를 기록한 저자의 결과론적 진술임이 부명하다(R. Payne Smith). 본서 저자는 이같이 의도적으로, 후일에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 '예루살렘'으로 적장의 머리를 가져갔다고 함으로써, 적국 블레셋에 대한 다윗 혹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 여기서 '갑주'(*, 켈리)는 문자적으로는 '기계' 혹은 '물건'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다른 문맥에서처럼 여기서도 '무기'(weapons,NIV)란 의미로 보아야 할 듯하다(14:1, 12;20:4;21:8). 그리고 여기서 '자기 장막'은 혹자들(Hertzberg, Abravanl)의 주장처럼 '여호와의 장막'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다윗의 베들레헴 집을 가리키는데(Keil, Smith), 그 근거는 여기서 '장막'(tent)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헬'(*)은 '거주지'를 가리키는 고대 어휘로서(Fay), 그 용례가 성경 다른 곳에서도 종종 나타나기 때문이다(4:10;13:2:삼하18:17;19:8;20:1). 한편 이러한 사실은 후일 골리앗의 칼이 높(Nob)에 있던 여호와의 성막에 보관되었다는 본서 21:8, 9의 언급과 모순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후일 다윗이 블레셋 거인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내 승리케 하신 여호와의 영광과 명예를 기리기 위해 놉에 있던 여호와의 성막에 그 칼을 기념물로 바쳤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기 때문이다(J. P. Lang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Kil &Delitzsh, Commentry on the O. T. Vol. - . pp. 184-185).
성 경: [삼상17:5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을 접견하는 사울]
`군장 아브넬 -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로서 사울과는 사촌 형제지간이다(삼상14:50, 51). 사울의 군장(軍長)이자 사울 가의 능력있는 무사로서, 사울을 보필하다가 사울 사후 다윗 가에 대항하기 위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 사실상 실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사울 왕의 첩 이스바와의 통간 사건으로 이스보셋으로부터 질책을 당하자 격노하여 다윗 가로 귀순하려고 한다. 그러나 귀순의 과정에서 다윗의 군장 요압의 계교에 걸려 살해당하고만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격분했으며 슬퍼했다. 다윗은 후일 아들 솔로몬에게 아브넬의 원수를 갚을 것을 유언하였다(삼하3:6-39;왕상 2:5, 6). 한편 아브넬은 적어도 아들 하나 이상은 가졌던 것 같다(대상27:21).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 이같은 사울의 질문은, 이미 다윗은 사울을 위해 궁중 악사로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16:21-25) 우리에게 큰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따라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견해들을 제시해 왔다. 즉 (1)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사울이, 당시 자신과 잠시 함께 있다가 헤어진지 오래되어 많이 변해있었을 다윗을 실제로 알아보지 못하여 이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Klein, Lange, Smith), (2) 사울은 그때 개인적으로는 다윗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골리앗과의 결투를 계기로 그처럼 용감 무쌍한 다윗의 가문(家門)이 어떠한 혈통과 신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이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Keil) 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은 첫째, 골리앗과 싸우도록 하기 위하여 이미 다윗과 대면을 했었고(31-40절) 둘째, 불과 몇 년 전에 자신의 옆에서 자신의 고통을 덜어 주었던 은인(恩人)을 완전히 잊어 버렸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때 두번째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서론, 7. 사무엘서에 대한 고등 비평 비판>.
성 경: [삼상17:5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을 접견하는 사울]
`청년(*, 엘렘) - 그 당시 다윗에게 적용되었던 '소년'(*, 나아르)이라는 단어(35, 58절) 대신 사용된 이 단어는 다윗의 연소함을 특별히 강조한다(Klein,20:21, 22).
성 경: [삼상17:57]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을 접견하는 사울]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 손에 있는채 - 고대의 전투에서 패배한 적장(敵將)의 머리는 승리의 기념물로서, 또는 전사(戰士)의 업적으로서 흔히 베어졌고, 그리고 그것은 존경과 충성에 대한 표시로서 왕에게 바쳐지는 관례가 있었다.
성 경: [삼상17:5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을 접견하는 사울]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 대해서는 16:1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그러나 이같은 다윗의 대답만으로는 다윗 가문의 사회적 지위가 분명히 밝혀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구 뒤에 다윗 가문의 혈통이나 사회적 신분 등에 관한 사울과 다윗의 긴 대화가 분명 있었는데, 여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해야만 할 것이다(Keil). 그리고 18:1의 첫 문구는 그러한 추측을 충분히 가능케 한다. 사울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고자 그의 사위가 되기로 작정했는지 모른다(Smith).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 폐백금으로 사울이 다윗에게 양피 일백을 요구한 기한이 이르기 전에 다윗이 일어나 그 일을 수행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27절의 내용과 연결된다.
성 경: [삼상18:1]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 이는 본장이 17장의 마지막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아울러 다윗의 가문.혈통.신분 등에 대해 오랫동안 다윗과 사울간에 많은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요나단...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 사울과 다윗이 대화를 나눌때 요나단도 거기에 함께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여기의 '마음'(*, 네페쉬)은 하나님이나 왕을 향한 순수하고 전인격적인 사랑과 충성의 정신을 가리킨다(Achnoyd). 그리고 이같은 정신은 요나단이나 다윗에게 공통적으로 있었다(14:6;17:32-36, 45-47). 바로 이같은 정신적 공통점 때문데 다윗과 요나단은 특별한 우정을 맺을 수 있었고, 또한 그 우정을 변치 않고 오래도록 나눌 수 있었다. 한편 '연락하다'(*, 카솨르)란 말은 '매다'(tie), '묶다'(bind), '짜다'(knit) 등의 의미로서, 곧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마음의 띠로 단단히 동여 매는 것, 또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 정신적 쇠사슬로 굳게 묶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창 38:28;신 6:8;잠 3:3).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어, 이같은 일이 극히 자연스럽게 이뤄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요나단이...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여기서 '생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영혼'(soul)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로서, 곧 이것은 다윗에 대해 요나단이 품었던 정신적이고도 고상한 우정의 성격을 나타내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20:17).
성 경: [삼상18:2]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
`그 날에...머무르게 하고 - 이 말은 골리앗과의 전투를 다윗이 승리로 이끈후, 사울은 자신의 등용 정책에 따라(14:52) 다윗을 자신의 궁중에 영속토록 거주하게끔 하였다는 말이다. 아울러 이는 다윗이 전처럼 일개 궁중 악사로서가 아니라(16:23), 정치적 비중을 소유한 한 신하로서 왕 사울과 가까이 있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아비의 집으로...허락지 아니하였고 - 이는 사울이 다윗으로 하여금 고향 아비의 집으로 문안 인사차 방문하는 것조차 금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는 다윗이 전처럼(17:15) 아비의 집에서 양떼를 돌보는 것과 같은 집안 일을 하기 위하여 돌아가는 것은 사울이 허락치 아니했다는 말이다.
성 경: [삼상18:3]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
`요나단은...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 이것은 상호간의 우정.신뢰.사랑을 계속 유지하자는 엄숙한 약속으로서, 아마도 이러한 신뢰.우정이 자신들의 당대 뿐 아니라 후손들의 대(代)에 이르기까지 영속적으로 지속되기를 바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20:14-16;23:18). 결국 다윗과 요나단은 혈연 관계 보다도 더 진한 의형제를 맺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들이 이렇게까지 자신들의 우정을 높이 승화 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동기는 무엇보다도 상호 변치않는 여호와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20:42). 그리고 결국 이러한 언약은 요나단 편에서나(19:4, 5;20:17-29), 다윗 편에서나(삼하1:17-27;9:1-7;21:7)죽을 때까지 신실하게 이행되었다.
성 경: [삼상18:4]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
`겉옷을...다윗에게 주었고 - 요나단의 이같은 행위는 언약을 확증하고 그 표징을 남기기 위한 행위였다. 한편 여기서 '겉옷'(*, 메일)은 상류층 인사들이 입었던 외투(robe)로서, 이는 곧 요나단 자신이 사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능히 과시할 수 있는 외적 표시였다. 따라서 당시 합법적으로 인정받던 사울 왕의 후계자 요나단으로부터 다윗이 그같은 의복을 언약의 징표로 인계받았다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 군복...칼...활...띠도 그리하였더라 - 이처럼 자신의 의복을 벗어 준다던지, 또는 자신의 무기를 상대방에게 선물로 주는 것 등의 행위는 고대에 있어서 용사들간에 상호 우정이나 혈맹 관계를 다지고 돈독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흔히 행해졌던 풍습이었다(Keil, Philippson). 한편, 여기서 다윗이 요나단으로부터 의복과 함께 이같은 무기를 넘겨받은 것은 (1) 당대의 정치적 실력자 사울에게서 무기를 일시 넘겨받은 것(17:38), (2) 당대의 군사적 영웅 골리앗으로부터 무기를 탈취한 사건(17:54) 등과 함게 다윗이 미구(未久)에 근동 지역을 장악할 정치.군사적 영웅으로 부상하게 될 것을 능히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일들임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18:5]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
`다윗이...가서 - 여기의 '가서'(*, 야차)는 보통 군사적 출동을 뜻한다. 따라서 이것은 다윗이 국경 너머까지 원정(遠征)갔었음을 가리킨다(8:20;삼하 2:13;왕상20:39).
`지혜롭게 행하매(*, 사칼) - 이것은 '깨닫다', '형통하다', '신중하다' 등의의미가 복합적으로 담겨져 있는 단어이다(신 32:29;수 1:8;왕하 18:7). 따라서 본 문맥상 이 단어는, 다윗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행함으로써 만사가 형통하는 결과를 얻었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 문자적으로는 '전쟁의 사람들 위에 세웠다'(set him overthe men of war)란 뜻으로, 곧 '여러 군사들의 지휘관으로 삼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의 '군대의 장'은 아브넬의 계급인 '군장'(軍長)과는 전혀 다르다(17:55).즉 13절에서야 다윗은 사울에 의해 천부장으로 세워진다는 점에서, 여기의 '군대의 장'은 백부장(白夫長)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본절은 다윗의 빠른 승진을 시사해 주는 구절이다.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 문자적으로 '모든 백성들의 눈에 선했다'(창 1:12,31). 이같은 언급은 결국 다윗이 미래의 왕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차츰 닦여져가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 이것은 백성들의 경우와 더불어 다윗의 명성이 궁궐 안팎에서 점차 높아져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아울러 이것은 다윗이 정치적 경쟁심. 질투 등을 초월하여 칭송을 받았다는 점에서, 다윗의 인격.처신이 대단히 훌륭했음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삼상18:6]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 여기서 '블레셋 사람은 정관사와 더불어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골리앗'(Goliath)을 가리킨다(17:10, 16, 23,26, 37, 41-43, 48, 51, 57). 따라서 본 전투는 엘라 골짜기의 전투를 가리키는데, 그 전쟁은 골리앗을 죽인 후에도 나머지 블레셋 군대를 쳐부수는데 상당한 기일이 소요된 대전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전투의 특징은 역시 다윗과 골리앗과의 일대일 결투 장면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묘사된 것같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바로 그러한 긴 엘라 골짜기의 전투가 최종 마무리 되고, 마침내 이스라엘 군대가 사울과 다윗을 앞세우고 왕성(王城)으로 개선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인들이...노래하며 춤추며 - 고대 근동 사회에서 여인들의 이러한 가무(歌舞) 행위는 절기나 승전(勝戰) 등의 사유로 매우 기쁠 때 축제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행해졌었다(출 15:20;삿 11:34).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 '소고'(*, 토프)는 영어 성경들에서는 보통 '탬버린'(tambourine)으로 번역되어 있으며, 성경에서는 항상 즐거움 및 기쁨과 관련하여 언급된다(출 15:20;삼하 6:5;사 5:12). 그리고 '경쇠'(*, 솰로쉬)는 '삼중' 또는'세개'란 뜻으로서, 보통 '트라이앵글'(triangle) 또는 삼현(三鉉) 악기(three-stringed instrument)로 이해된다. 아무튼 소고와 경쇠는 춤이 수반되는 야외 행사에 알맞는 축제용 악기들이다(R. Payne Smith).
`환영하는데 - 엄밀히 말하여 히브리 원문에는 '환영하는데'라는 의미의 말은 없다. 따라서 틀림없이 여기의 '환영하는데'란 말은 원문에 원래 나와있는 '만나기 위하여'(*, 리크라트)라는 단어와, 그리고 '소고'와 '경쇠' 사이에 나타나 있으나 번역 중 생략된 '기쁨으로'(*, 메시므하)라는 단어가 합성 의역(意譯)된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분명한 이해를 위하여 위의 두 단어를 분리시켜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소고'와 '경쇠'처럼 마치 악기의 하나같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같은 관점에서 혹자는 그 단어를 '기쁜 소리로'라고 주석하기도 한다(Stoebe).
성 경: [삼상18:7]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뛰놀며 창화하여 - 원문상으로는 이 두 단어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한편 여기의 '뛰놀다'(*, 사하크)는 (1) 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다(삿 16:25), (2) 악기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다(삼하 6:5, 21), (3) 어린이들이 집단으로 장난을 치며 놀다(슷 8:5) 등의 의미로 성경에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기쁨에 겨워 음악에 맞춰 천진난만하게 춤추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창화하다'(*, 아나)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단순히 '대답하다'란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처럼 음악적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서로 주고 받는 형식, 즉 교차적으로 노래하는 교창(交唱)을 가리킨다(21:11;29:5).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 여기서 '천천'이나 '만만'은 원문상으로는 다만 '천'(*, 엘레프)과 '만'(*, 레바바)이지만, 우리말의 운율을 맞추기 위해 이같이 번역되었다.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사울은 그의 천을, 그리고 다윗은 그의 만을 죽였도다!"(Saul has slain his thousands, and Davidhis ten thousands). 물론 고대 우가릿 문서나 중근동의 문서들을 통해 볼 때 '천'이나 '만'은 모두 '많음'을 상징하는 보편적 숫자라는 점에서 여기 여인들의 노래가 담고있는 기본 의미는 '우리의 두 영웅 사울과 다윗은 많고 많은 원수들을 죽이셨도다'란 뜻으로 볼 수 있다(Klein). 그러나 또한편 여인들이 '사울'과 '다윗'을, 그리고 '천'과 '만'을 분명히 상호 대구(對句)하여 노래했다는 점에서, 이 여인들의 노래 속에는 분명 당시의 인기도 또는 민심(民心)이 반영된 생생한 백성들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이 노래는 민심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결국 이러한 백성들의 노래 속에는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그의 왕위(王位)를 후임자인 다윗에게 평화적으로 이양하게끔 촉구하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한편, 이 여인들의 노래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널리 애송(愛誦)되었기 때문에, 이웃 블레셋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21:11;29:5).
성 경: [삼상18:8]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 본래 사울은 열방과 같은 무사적(武士的) 왕을 요구한 백성들의 세속적 동기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8:5, 20). 따라서 사울이 왕으로 옹립되었다(8:5, 20). 따라서 사울이 왕으로서의 권위와 명예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그 용맹성에 있어 누구보다도 뛰어나야만 했었다. 그런데 골리앗의 출현 이후 그러한용 맹성에 있어 자신보다 다윗이 더 인정받게 되자, 사울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가 저하되었다는 사실에 그의 가슴은 그만 시기와 질투로 가득차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 결국에는 "왕의 자리마저 그에게 돌아가겠구나"(공동 번역)란 뜻이다. 이렇나 사울의 우려와 불안 기저(基底)에는, 아마도 일찍이 사무엘에 의행 선언되었던 바(13:14;15:28) 자신의 폐위와 후임자의 등장이라는 현실적 문제 인식이 깔려있은 듯하다(R. Payne Smith). 실로 이방의 침입자(골리앗)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위기적 상황 가운데서, 왕으로서 사울은 속수 무책인데, 한 목동이 나와서 그 침입자를 제거해 버렸다면, 그것은 곧 왕직(王職)의 이동을 의마하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O.V. Gerlach).
성 경: [삼상18:9]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사울이...주목하였더라 - 여기서 '주묵하다'(*, 아완)란 말은 '눈'(eye)이란 뜻의 '아인'(*)에서 파생된 말로, 곧 '의심에' 찬 눈으로 관찰하다';란 의미이다(Klein). 즉 이것은 사울이 왕권(王權) 수호 차원에서 다윗을 정치. 군사적으로 경계하고 배타하였다는 뜻이다.
성 경: [삼상18:10]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그 이튿날 - 블레셋과의 승전을 기념하는 공개적이 환영 행사가 벌어진 다음 날을 가리킨다. 그 환영 행사에서 사울은 여인들의 노래(7절)를 통해자신보다 다윗이 더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질투와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고(8절), 결국 그 일로 인해 밤새 잠못 이루고 설치는 통에 그 마음은 악신(惡神)이 임하기에 좋은 터전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힘 있게 내리매 - 이 강신(降神) 현상은 차기의 왕으로 예정되어 있던 다윗에 대해 사울이 가지고 있던(9절) 극심한 피해 의식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점에서, 사울의 왕위 폐위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선언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때 이같은 현상을 통해 사울로 하여금 왕권에 대한 미련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게 하시려 한 듯하다. 그리고 여기서 '힘있게 내리다'(*, 찰라흐)란 말은 '앞으로 세게 밀다', '터져나오다', '강력하게 다가오다'란 의미로서, 곧 돌진해오듯 힘있게 닥쳐오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악신의 적극적인 활동 상태를 시사하는데, 이는 사울에게 최초로 악신이 임했을 때의 상황보다 더 악화된 상태이다. 결국 악신의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은 하나님의 묵인하에서 이루어지는 일로서, 이는 사울의 종말이 가까왔음을 강력히 암시 하는 징조인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에 대해서는 16:14 주석을 참조하라.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 여기의 '집'(*, 바이트)은 말할 나위없이 사울 자신의 궁전을 가리킨다(삼하16:21;20:3). 한편 '야료하는 고로'(*,이트나베)는 문자적으로는 '예언하다'(prophesy ; KJV, NIV)란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말이 재귀적 사역형으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이교적(異敎的) 성격의 헛소리로 이해함이 타당하다(19:20, 21, 23, 24;왕상 18:29;렘 23:13). 즉 재귀적 사역형의 동사로 표현된 사울의 이같은 야료(惹鬧) 행위는 황홀경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탈인격적(脫人格的) 행위로서,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마치 미친 자처럼 마구 말을 내뱉는 '헛소리' 또는 '지껄임'(rave, RSV)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18:11]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그 창을 던졌으나 - 여기의 '던졌으나'(*, 야텔)란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즉 (1) 여기 이 단어를 그 원래 의미인 '던지다'로 보고, '창을 던졌으니'라고 해야 한다는 견해. (2) 이 단어의 본래 의미를 '뻗다'로 보고, '창을 던졌으니'라고 해양 한다는 견해 등잉 있다. 그런데 이 견해 중에서 첫째, 다윗이 그 창끝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 둘째, 사울이 계속 연거푸 두번 다윗을 향해 창을 사용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19:10의 경우와는 달리 (2)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Fay,Keil).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향해 1차 던진 창을 또 집어 재차 던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무튼 그 때 다윗은 그 용맹과 기지에도 불구하고, 전혀 대항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다만 사울의 창을 두번 피했다.
성 경: [삼상18:12]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여호와께서...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신이 다윗에게 임했다는 사실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권을 빼앗아 다윗에게 이미 넘겨주셨다는 사실까지를 의미한다.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일개 경쟁 상대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하였음을 가리킨다. 이같은 단정은 여기의 '두려워한지라'(*, 야레)는 말이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신적인 경외를 가리키는 단어라는 점에서 확실시 될 수 있을 것이다(창 22:12;출 9:20;왕상 18:3). 아무튼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하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즉 버림받고 거절당한바 된(13:13, 14;15:26) 사울은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만사 형통하는 다윗을 볼 때마다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18:13]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백성앞에 출입하며 - 여기서 '천부장'(*, 사르 알레프, '천 명의 우두머리')은 (1) 내정(內政)을 관장하는 중앙행정 관리(Lange, Smith) (2) 국경을 지키는 국방 관리(Keil, Klein) 등으로 이해되고있다. 그런데 첫째, 당시 사울은 다윗을 전쟁터로 보내어 그곳에서 죽게 하려는 음모의 일환으로 그를 천부장에 임명했으며 둘째, 여기서 '출입하며'라는 말은 성경에서 '전투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다'란 의미로 흔히 사용되며(Klein;8:20;민 27:17;삼하 5:24) 셋째, 다음 절(14절)에 '지혜롭게 행하다'라는 단어가 다윗의 군사적 활동을 다루는 문맥에서 사용됐다는 점<5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후자의 견해가 훨씬 더 타당성이 있다. 즉 그때 사울은 틀림없이 다윗을 변방의 일선 지휘관으로 보내버림으로써, 잦은 전투로 인해 거의 목숨이 위태하게 되기를 바랐으며, 아울러 다윗의 정치적 역량이 중앙의 상류 계층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성 경: [삼상18:14,15]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지혜롭게 행하니라 - 5절 주석 참조.
`사울이...두려워하였으나 - 여기의 '두려워하였으나'(*, 구르)는 12절의 '두려워 한지라'보다 더 강한 의미의 공포심을 갖는 것을 가리킨다(Driver). 이는 다윗의 형통과 사울의 두려움이 상호 반비례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다윗과 함께 한다는 인식에서부터 비롯된 사울의 두려움은 악신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점차 다윗을 향한 광기적(狂氣的) 증오로 발전된다.
성 경: [삼상18:16]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초월하여 거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한편, 이전의 몇몇 경우처럼(11:8;15:4) 여기서도 '이스라엘'과 '유다'가 구별되어 기록된 것은, 본서가 반드시 왕국 분열 이후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다. 다만 사울과 다윗의 당대에도 유다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간에 주도권에 관한 알력이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표현으로 이해 가능하다.
`그가...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 '출입하다'(*, 요체 와바)란 말은 직역하면 '나가고 들어오다'(go out and come in, KJV)란 뜻인데, 이는 곧 자신이 맡은 고유한 직무의 수행을 위하여 공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성경의 관용어이다(12:2;29:6;민 27:17;신 31:2;수 14:11;삼하 5:2;왕상 3:7;대하 1:10;렘37:4;행 1:21). 이런 견지에서 여기의 이 말은 천부장으로서 다윗의 성공적인 군사 역할 수행을 의미한다(5, 14, 15절).
성 경: [삼상18:17]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맏딸 메랍을...주리니 - 일찍이 사울은 골리앗을 이기는 자에게 딸을 주리라고 약속했었다(17:25). 그런데 그 약속은 즉시 지켜지지 않고 상당히 지연된 것 같은데, 그이유는 (1) 사울의 변덕스런 성격과 (2) 다윗의 연소한 나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이 백성들의 신뢰와 사랑을 점차 크게 받게되고, 그의 나이도 점차 성숙해지자 이제 그 약속을 더이상 지연시킬 명분이 없었다. 때마침 사울은 자신의 약속도 지킬겸 다윗을 제거시킬 음흉한 계획을 가지고 자신의 약속 이행을 수행코자 한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하여 - 이 말은 딸과 결혼하려는 자는 그 딸의 아버지에게 그에 합당한 예물을 제공해야 했던 고대 중근동의 결혼 풍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창29:15-20, 25-27). 따라서 사울 왕은 그러한 결혼 예물 대신 전쟁터에서 이스라엘의 적들과 용맹히 싸워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울 왕의 이러한 요구는 부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울은 이미 결혼 예물대신 골리앗을 이기는 것 자체로 자신의 딸을 주겠다고 공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17:25). 그러므로 사울은 아무런 또다른 조건이나 요구없이 자신의 약속을 이행해야만 할 의무가 있었고, 반면 다윗은 당연히 사울 왕의 사위가 되는 명예를 누릴 권리가 있었다(F.R. Fay).
`용맹을 내어...싸우라 - 여기의 '용맹을 내어'는 문자적으로 '용사가 되어'란 뜻이다. 사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이같은 주문은 그로 말미암아 큰 전과(戰果)를 올리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윗으로 하여금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도록 함으로써 전장(戰場)에서 죽게끔 하려는 음모에 따른것이었다(13절;삼하 11:14, 23-25).
`여호와의 싸움 -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을 위하여, 하나님의 전적 도우심을 의뢰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원수들과 싸우는 거룩한 전쟁을 가리킨다(25:28;삼하 5:19-23). 그러나 사울이 다윗에게 주문한 여기서의 전쟁은 다윗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사악하고 간교한 음모에 빙자된 전쟁이라는 점에서 결코 '여호와의 전쟁'이 아니었다.
`생각하기를 - '마음에 이르기를', '스스로 이르기를' 등과 같은 표현으로, 곧 독백(獨白)이나 심중(心中) 의지를 나타내는 성경의 관용 어법이다.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대게 하리라 - 지난번 사울은 악신에 사로잡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다윗을 죽이려 시도하기도 했지만(10, 11절), 이제 이성(理性)을 되찾자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이 간교한 음모로 발전되어 여호와의 싸움을 빙자, 블레셋 사람의 손을 빌려 다윗을 살해코자 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린 사울의 마음 속에는 온갖 죄된 생각만이 넘치고 있었다.
성 경: [삼상18:18]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내가 누구며...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 다윗의 순수하고 겸손한 이 고백은 사울왕의 간교하고 음흉한 제안과는 날카롭게 대조된다. 즉 사울이 자기 딸을 이용하여 교활한 방법으로 다윗을 죽이고자 획책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자신과 아비의 집 신분이 사회.정치적으로 비천하고 무명함을 겸손하고도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다윗의 이러한 고백은 결국 자신이 골리앗과 싸운 이유가 형들이 오해했듯(17:28) 사울 왕이 내건 명예와 부의 보상에 조금도 유혹된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실로 다윗은 이전 자신의 목동의 신분을 사랑했을 뿐, 부마(駙馬)의 신분을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를 들어 왕의 자리에까지 올리우신다.
성 경: [삼상18:19]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 이것은 기한적인 의미보다는 여건의 성숙을 뜻하는 표현이다. 즉 당시 다윗은 사울의 표면적 주문대로(17절) 블레셋 족속과 용감히 싸워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을 것이다.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준 바 되었더라 - 이같은 사울의 처사는 메랍이 다윗을 사랑하지 아니했기 때문(Keil;20절)이라기 보다는 다윗에 대한 사울의 증오심과 그자신의 변덕스러운 성격에 기인한 것임이 분명하다(Lange). 어쩌면 사울이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로부터 많은 패물을 제공받았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 결혼의 불합리성은 결국 이 결혼이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로써 확증되고 말았다(삼하 21:8). 한편 '므홀랏'(Meholath)은 갈릴리 호수 남방 약 37km 지점의 요단 서쪽 강뚝 인근에 위치한 지역이다(Stoebe). 그리고 '아드리엘'(Adriel)은 아람어로는 '아스리엘'(대상5:24;27:19;렘 36:26)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란 뜻이다.
성 경: [삼상18:20]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 이때는 다윗과 메랍의 결혼이 깨어진 후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난 다음인 듯하다. 메랍과 다윗의 결혼이 약속됐을 때만해도 사울의 작은 딸 '미갈'은 아직 결혼 적령기에 도달치 못했을 것이다.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궁지에 몰아 넣을 수 있는 또한번의 기회를 포착했음으로 인하여 기뻐했다는 뜻이다(17, 21절)
성 경: [삼상18:21]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딸을...주어서...올무가 되게 하고 - 여기서 '올무'(*, 모케쉬)는 '함정에빠뜨리다', '덫을 놓다'란 뜻의 '야코쉬'(*)에서 파생한 단어로, 곧 짐승을 잡는 '올가미'(noose)또는 코를 꿰는 '갈고리'(hook)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 속에는 자신의 딸을 이용하면서 까지 다윗을 올가미로 덧씌우려는 사울의 간악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성 경: [삼상18:22]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본절은 작은 딸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는 사울 왕의 제안(21절)에 대하여 다윗이 크게 신뢰하지 않았으며, 사울 자신도 다윗이 그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음을 보여 준다. 바로 이같은 사정으로 인하여 사울은, 다윗에 대한 자신의 제안이 맏딸 메랍의 경우(19절)와는 달리 반드시 이해될 것임을 다윗에게 확신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자신의 설득(21절)과 병행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다윗을 설득케 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다윗이 사울의 제안을 신뢰하지 않고 탐탁치 않게 여긴 까닭은 분명 (1) 맏딸 메랍의 경우처럼 미갈과의 결혼도 사울의 변덕스런 마음 때문에 성취될 가능성이 적다고 보았으며(19절) (2) 왕의 딸을 데려올 때 왕에게 지불해야 할 막대한 '폐백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23, 25절).
성 경: [삼상18:23]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왕의 사위 되는 것을...경한 일로 보느냐 - 이것은 왕의 사위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경제적 부담이 뒤따름을 가리키는 말이다(25절). 그러므로 결국 다윗의 이 말은, 메랍과의 결혼이 성사되지 못한 주요한 이유를 사울 왕의 변덕, 사회적 신분의 차이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왕의 사위가 되기에 합당한 막대한 폐백금 지불 능력의 부재(不在)로 인식했음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삼상18:25]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폐백...양피 일백 - 여기서 '폐백'(*, 모하르)은 '그 아비에게 돈을 주고 아내를 사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마하르)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런데 고대 중근동에서의 '폐백'은 대개 장인의 요구액 만큼을 사위될 자가 현금.재물로 지불하는 것이 통례였다(De Vaux;창 34:12;출 22:16, 17).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장인될 자의 요구에따라 그외 다른 것으로도 대치할 수 있었다. 다라서 '양피 일백'은 금전.재물이 아닌 노력 봉사로써 '폐백'을 대신할 수도 있었던 고대의 풍습과 잘 부합된다(창 29:15-30;수 15:16;삿 1:12). 그런데 여기 '양피'(陽皮, foreskin)는 남자 생식기의 포피(包皮)를 말하는 것으로서(창 17:11-14), 이는 반드시 사람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었다(27절).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 사울의 요구대로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양피를 벨 경우, 그 행위는 곧 블레셋 족속을 할례받지 못한 족속이라고 모욕하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다윗이 그 일을 행하게 되면 그는 블레셋 족속의 민족적 분노를 사게 될 것임며, 끝내는 군사적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더욱이 양피를 베는 행위는 대외적인 명분이 서는 공식 전쟁이 아니라 사적(私的)인 목적을 위해서 수행되는 전투이므로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생명을 건 모험을 감행해야만 했다. 결국 사울의 이 같은 제안을 자신의 정적(政敵)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을 빌려 죽이기 위한 주도 면밀한 계책이었다.
성 경: [삼상18:26]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 다윗이 사울의 음흉한 계책을 전혀 의심치 않은 채, 단지 사울의 제안을 성실히 수행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다윗은 사울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고자 그의 사위가 되기로 작정했는지 모른다(Smith).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 폐백금으로 사울이 다윗에게 양피 일백을 요구한 기한이 이르기 전에 다윗이 일어나 그 일을 수행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27절의 내용과 연결된다.
성 경: [삼상18:27]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
`그 종자(*, 아나솨우) - 이 단어는 여기서 복수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시 천부장의 지위에 올라있던(13절) 다윗의 휘하 병력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Klein, Lange).
`딸 미갈을 다윗에게...주었더라 - 이같은 사울의 행위는, 후에 그가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또 다시 주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25:44), 마지 못해 취해졌던 것임이 분명하다. 즉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이 죽기를 바란 자신의 계책과는 달리, 오히려 다윗이 자신의 요구에 갑절이나 부응하는 용맹을 떨침으로써, 공개적인 왕의 약속상 어쩔수 없이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18:28,29]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 - 이것은 다윗이 차기의 왕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지명되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객관적 표시였다(12절).
`딸 미갈도...사랑하므로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 칠십인역(LXX)은 '딸 미갈'을 '온이스라엘'로 읽는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근거없이 히브리 원문을 변화시킨 것에 불과하다(Bunsen). 한편 여기서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 일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더욱 두려워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1) 미갈은 다윗을 사랑하는 까닭에 사울의 계략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것이 분명하며(Smith) (2) 다윗이 자신의 딸로부터도 사랑을 받을만큼 흡인력있는 인물임이 명명백백히 밝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의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란 말은 12절의 '두려워한지라' 또는 15절의 '두려워하였으니'보다 한층 심각한 공포심을 가리킨다.
`평생에...대적이 되나라 - 이같은 언급은 사울이 죽을 때까지 계속 다윗을 죽이려했었던 이후의 역사적 사실로써 능히 증명된다.
성 경: [삼상18:30]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
`블레셋...방백들이 나오면 - 여기서 '블레셋...방백'은 이들이 지위했던 블레셋 군사들을 포함한다. 한편 여기의 '방백'(*, 사르)은 '귀족'이란 의미가 있기도 하나(출 2:14;사 23:8), 여기서는 천부장 등의 군대 지휘관으로 봄이 타당하다(창 21:22;욥 39:25). 그리고 '나오면'(*, 야차)은 군사적 행동의 개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5절;삼하 2:13;왕상 20:39).
`더 지혜롭게 행하매 - 이것은 형통하는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게끔 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다윗이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혜롭게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사 그를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5절 주석 참조.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 '이름'은 고대인들에게 한 사람의 인격 전체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귀중히 되니라'(*, 야카르)란 말은 '영광을 받다', '존경을 받다'란 뜻이다. 결국 본절은 사울의 책략으로 다윗을 위험한 전장에 내보낼 때마다 오히려 다윗이 그 전쟁을 통해 혁혁한 무훈을 세움으로써, 용장(勇將)과 지장(智將)으로서 다윗의 명성이 이스라엘 뿐 아니라 주변의 적대국들에게조차 알려지고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는 어떠한 역경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전화위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한편, 그러나 이처럼 다윗이 전공(戰功)을 통해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한몸에 받으면 받을수록 사울은 더욱 더 두려움, 질투, 증오심에 사로잡혀 자윗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로써 다윗에 대한 사울의 계속되는 살해 음모와 다윗의 정처없는 도피 생활의 역사가 이후 전개된다.
성 경: [삼상19:1]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 원문상 차라리 '다윗을 죽이는 것에 관해서 말하였더니'로 번역해야 한다(Klein, Smith, Lange, Keil). 결국 이것은 (1) 다윗에 대하여 살의(殺意)를 품는 단계(18:8, 9), (2) 살해하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는 단계(18:17, 25)를 지난 마지막 단계로서, 곧 이제는 공개적인 궁중 회의를 통해 다윗 살해 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사울이 다윗을 끝까지 죽이려 했던 까닭은 자신의 왕권 수호 뿐 아니라, 자신의 후손에게 그 왕권을 세습시키려 한 세속적 아집과 욕심 때문이었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 여기서 '기뻐하다'(*, 하페츠)란 말의 기본 개념은 '마음이 기울다'란 의미로서, 요나단의 마음은 이미 다윗에게로 향했음을 의미한다. 실로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다(18:1). 특히 다윗의 영광은 자신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그러한 이기적인 욕심을 떠나 변함없이 다윗을 사항했다. 이러한 요나단의 자기 부인(自己否認)과 자기 희생의 정신은 후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말한 침례 요한의 예수께 대한 사랑과 희생의 정신과 유사하다.
성 경: [삼상19:2]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
`아침에...숨어 있으라 -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로 꾀한 이상 그 모든 일은 신속히 진행될 것이 확실하였으므로, 요나단은 급히 다윗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되도록 아침 일찍부터 몸을 피신하여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라고 요청했다.
`은밀한 곳 - 문자적으로는 '그 은밀한 곳'. 결국 여기의 '그'라는 정관사는 다윗도 이 장소를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삼상19:3]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
`너 있는 들 - 이곳은 2절의 '은밀한 곳'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아마 이곳은 사울이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산책을 즐기던 궁정(宮廷) 근처의 들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나단이 다윗을 이곳에 숨어있게 한 까닭은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 부자(父子)간의 대화를 엿듣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단지 요나단은 다윗에 대한 부친의 살해 음모에관해 어떤 정보를 입수했을 경우, 신속히 그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다윗이 거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토록 하려는 목적에 다른 것이었다(Keil).
`무엇을 보거든 - 차라리 '무엇을 알거든'으로 번역함이 좋다(7절). 즉 이때 요나단은 자신의 간곡한 중재(仲裁)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이 다윗을 반드시 죽일 작정인지, 또는 그렇게 할 경우 사울이 언제 어떻게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할 것인지 등에 대하여 알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성 경: [삼상19:4,5]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
여기서 요나단은 다윗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기에 앞서 다윗을 죽이는 일의 부당성을 부친 사울 왕에게 간곡히 설파한다. 다윗을 위한 요나단의 변호는 다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1) 지금까지 다윗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스라엘과 사울 왕을 위해 충성.헌신한 사실 (2) 그러므로 만일 다윗을 죽일 경우 그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경우가 되고, 또한 그것은 여호와께 큰 범죄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밝히는 요나단의 변호는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포장하여(*, 토브) - 문자적으로는 '선하게(좋게, 기쁘게) 말하다'(speakwell of~ ; NIV, RSV)란 뜻이다.
`왕께 행한 일은...선함이니이다 - 여기의 '왕께 행한 일'은 원문상 복수라는 점에서, 다윗이 왕을 위해 지금까지 충성되이 실행했던 모든 선한 일들을 가리킨다.
`그가...블레셋 사람을 죽였고...왕이...기뻐하셨거늘 - 여기서 '블레셋 사람'은 단수로 사용되어 '그 블레셋 사람'이란 뜻인데 곧 '골리앗'을 가리킨다(17:10, 42). 그러므로 여기서 요나단은 이스라엘이 그 블레셋 거인의 위협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다윗이 생명을 걸고 이스라엘과 왕의 명예 회복을 위해 단신으로 싸웠고, 결국 승리했을때 사울 왕이 사심없이 기뻐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때만해도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해 어떤 시기나 질투심 없이 그를 사랑했었다. 요나단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함으로써 사울 왕의 양심의 심금을 울리고자 한 것이다. 한편 사울 왕이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한 때는 여인들의 노래(18:7) 사건 이후부터였다.
`무고히...무죄한 피를 흘려 - '무조지한 피'를 흘리는 일은 모세 율법에서 철저하게 금지되고 있다(신 19:10;21:8;27:25). 그러나 후일 바로 이같은 범죄를 저질렀던 므낫세 왕은 하나님의 특별한 진노의 대상이 되었었다(왕하 21:16;24:4).
성 경: [삼상19:6]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
본절은 다윗을 위한 요나단의 간곡한 설득이 실효를 거뒀음을 말하고 있다.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어 정직하게 진실을 호소한 요나단의 간곡한 변호는 사울 왕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맹세하되...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 혹자의 주장처러 여기 사울 왕의 이 맹세는 요나단을 일시 속이기 위한 거짓 맹세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악신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는(9절) 사울 왕이 다윗을 곁에 두고도 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단의 간곡한 변호에 사울 왕이 감동을 받아, 일시동안 사울과 다윗간에 화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울 왕의 이 맹세는 오래지 않아 또 변하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린 사울 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맹세를 하는 등 변덕과 광기의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시는 것처럼'(As the Lordlives, RSV)이란 뜻으로(Klein), 곧 '여호와의 삶을 두고서(결고서)' 맹세한다는 뜻이다.
성 경: [삼상19:7]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 - 이 말은 다윗이 예전처럼 천부장으로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타는 궁중 악사로서 계속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음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19:8]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크게 도륙하매 - 엘라 골짜기 전투(17:1-54)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에는 국지전(局地戰)이 빈번히 발생했다(18:30). 다윗은 그때마다 숙적 블레셋을 당당히 격퇴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천부장으로서의(18:3) 본분을 충실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감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성공과 형통은 또다시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따라서 사울 왕은 자신의 맹세(6절)를 스스로 깨뜨리고 다시금 다윗을 죽이기 위해 광분하였다.
성 경: [삼상19:9]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여인들의 창화(唱和) 사건(18:7) 이후 시도된 사울의 다윗 살해 기도는 18:11,17,21;19:1 등에 이어 또다시 재현되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첫번의 경우(18:10, 11)와 비슷한 상황 가운데서 발생하였는데, 즉 악신(惡神)의 영향으로 사울 자신이 직접 창으로 다윗을 살해하고자 시도한 경우이다. 이처럼 사울이 또다시 악신의 영향을 받은 주된 이유는 다윗의 형통과 성공이었다(8절). 즉 자신은 하나님께 버림당했다는 심한 콤플렉스, 다윗이 자신의 왕좌를 노리고 있다는 강박 관념, 백성들의 마음이 온통 다윗에게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피해의식 등등이 시기와 질투심으로 불타 올라 걷잡을 수 없는 광기적 형태로 분출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에 대해 하나님께서 악신이 활동하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사울은 악신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 - 16:14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9:10]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 여기 사울의 이같은 행동은 18:11에서와는 달리 실제 창을 던지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18:11에서의 사울의 행동은 창을 쥐고 두어번 휘두른 경우이지만, 여기서는 다윗을 겨냥하고 창을 날린 것이다.
`그는...피하고 - 무예가 뛰어난 사울의 투창이 이처럼 빗나가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사울이 악신의 영향으로 정신이 혼미해 있었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는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창은 벽에 박힌지라 - 이것은 사울이 실제 다윗을 향해 창을 던졌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성 경: [삼상19:11]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아침에...죽이게 하려 한지라 - 사울이 다윗을 그 밤에 죽이지 아니하고 다음 날 아침에 죽이려 한 까닭은, 아마도 섣부른 야간 행동은 오히려 다윗의 야음(夜陰) 도주를 도와 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죽임을 당하리라 - 다윗에 대하여 사울이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미갈은 (1) 사울의 사자들이 집 주위에 매복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든지 (2) 오빠 요나단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입수했든지 (3) 궁전에 들어갔다가 사울과 다윗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거나 혹은 어떤 정보를 입수했다든지 함으로써 사울의 음모를 알아챘을 것이다(R. Payne Smith). 특히 두번째의 추측은 이전의 경우(19:2, 3)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 추측이다.
성 경: [삼상19:12]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 사울의 사자들이 문을 지키고 있어기 때문에, 미갈은 창문으로 다윗을 도피시키고 있다. 이처럼 생명을 노리는 자들의 손을 피해 창문으로 도피한 유사한 경우가 여호수아 당시의 여리고 정탐군(수 2:15), 초대 교회 당시의 사도 바울(행 9:25;고후 11:33) 등의 경우에서도 나타난다. 한편, 이때 다윗이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토로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원을 간구한 내용이 시편 59편이다. 즉 시 59편에서 다윗을 '환난날에 피난처'(시 59:16)되신 하나님께 자신의 애매한 고난을 가탄원하며(시 59:3, 4) 구원을 호소하였던 것이다(시 59:1, 2, 4-13).
다윗의 도피 생활-1 - 다윗은 처음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의 음모를 듣고, 창문을 통해 도망쳐, '라마'(Ramah)의 사무엘에게로 피신했다. 이어 다시 '기브아'(Gibeah)로 돌아와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과 뜨거운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놉'(Nob)으로 도피했다. 놉에서 다윗은 그곳 제사장으로부터 음식과 무기를 제공받고 계속 도망쳐 다니다가 결국 블레셋 땅의 '가드'(Gath)로 도망쳤다. 그런데 다윗이 블레셋 족속드로부터 의심을 당하자, 그는 급히 그곳을 빠져나와 '아둘람'(Adullam) 근처의 동굴로 피신했다. 그리고 다윗은 그곳에서 많은 동지들을 규합했다(19:12-22:1).
성 경: [삼상19:13]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우상을...침상에 뉘고 - 여기서 '우상'은 곧 '드라빔'(*, 테라핌)을 가리키는데, 단어 형태는 복수지만 단수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드라빔'(teraphim)은 '편안히 살다'란 뜻의 '타라프'(*)에서 파생된 말로, 구복(求福)과 점술(占術), 그리고 신탁(神託) 행위와 관련된(겔 21:21;슥 10:2) 가정 수호신(守護神)이다(삿18:17, 24). 즉 아람과 갈대 족속들로부터 도입된 이 우상은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가정에 행운을 가져다 주는 가정의 수호신으로 널리 인정되었다. 그리고 이 우상은 인간의 형상을 닮은 반신상(半身像)으로서 보통 나무나 은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크기는 약대 인장 밑에 숨길 정도의 작은 크기로부터(창 31:34) 사람의 키와 맞먹을 정도의 큰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최근 발견된 누지(Nuzi) 서판에 의하면, 어떤 가정내에서 이것을 소유한 자는 그 가정 전체에 대한 지배권 및 그 가정의 재산을 가장 많이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한 것으로 인정되었다(창 31:19, 30-35). 바로 이같은 점에서, 라헬이 그랬듯이(창 31:19) 미갈도 이 우상을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서 훔쳤을 가능성이 있다(Klein). 한편 이것은 한 가정을 단위로 해서 모셔졌던 우상이라는 점에서 그 크기는 전반적으로 다른 우상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았다. 그러나 여기서 '침상에 뉘고'라는 말은 미갈이 소유하고 있던 이 '드라빔'이 사울의 신하들로 하여금 다윗이 누워있는 줄로 믿게할만큼 큰 규모의 드라빔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아무튼 이 드라빔은 많은 종교 지도자 및 선지자들의 우상 척결 정책에도 불구하고 족장 시대로부터 포로 시대전까지 이스라엘 사회내에 면면히 존재하고 있었다(창 31:19;삿17:5;18:14;삼상 19:13;겔 21:21;호 3:4;슥 10:2).
`염소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 여기서 '염소털로 엮은 것'은 보통 (1) 두터운 누비 이불(Stoebe, 왕하 8:15), (2) 베개(Hertzberg), (3) 가발(Mccarter)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엮은 것'(*, 케비르)이라는 단어의 용례상 (1)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따라서 여기의 '그 머리에 씌우고'는 '그 머리 부분에 놓고'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씌우고'로 번역된 '사마'(*)라는 단어는 원래 '위치 시키다', '놓다'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70인역(LXX)은 이를 '염소의 간'(*, 헤파르 톤 아이곤)으로 번역했는데, 그이유는 마치 사람이 숨쉬듯이 위장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갈의 의도는 멀리서 보았을 때 마치 사람의 머리털 처럼 보이려고 했기 때문에, 70인역의 번역은 설득력이 없다.
`의복으로...덮었더니 - 여기서 '의복'은 헐겁게 입는 통상복을 가리킨다(Smith). 이 통상복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흔히 이불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성 경: [삼상19:14]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그가 병들었느니라 - 우상으로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만든 미갈은 아침이 되어 사울의 군사들이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치자 이처럼 둘러댐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멀리 도망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게해 준다.
성 경: [삼상19:15]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사울이...다윗을 보라 하며 - 이것은 사울이 보낸 최초의 군사들이 미갈의 계략에 완전히 넘어간 채, 사울에게 돌아가서 다윗이 병들어 누웠다고 보고했었음을 암시해준다. 한편 여기의 '보라'는 다윗이 병들어 있는지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명령이다.
`침상 채...가져 오라...죽이리라 -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반드시 다윗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뜻으로, 폭군 사울의 잔인성이 드러나고 있는 구절이다.
성 경: [삼상19:16,17]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미갈은 다윗을 보호하기 위해 '그가 병들었느니라'(14절)고 첫번째의 거짓말을 한 이후, 사울의 확인 명령으로(15절) 그 사실이 거짓으로 발각되자(16절) 이제 여기서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에게는 다만 방조죄(放調罪) 밖에 없다고 두번째로 거짓말을 한다.
`어찌하여...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 이 말은 곧 다윗의 협박에 의해 마지 못해 그의 도피를 방조하고, 또한 거짓말(14절)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미갈의 자기 변호이다.
성 경: [삼상19:18]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다윗이...라마로 가서 - 여기서 '라마'(Ramah)는 다윗의 출발지인 '기브아'(10:26)에서 북쪽으로 약 3.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이자 그의 활동 중심지였다(1:1;7:17).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 다윗이 이처럼 사무엘에게로 도망간 이유는 (1) 우선 사울의 살해 음모로부터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며 (2) 앞으로 자신이 취해야 될 처신에 대해 선지자의 자문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Keil). 그때 다윗은 사울이 적어도 사무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존중하여, 거기가지 자신을 죽이러 사람을 보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한편 이처럼 다윗이 자신의 도피처로 사무엘의 고향 라마를 쉽사리 택한 것은 이전부터 사무엘과 다윗 사이에 개인적인 교제가 이루어져 왔음을 시사한다(F. R. Fay).
`사울이...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 아마도 이것은 (1) 이스라엘 왕인 사울이 정신적으로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으며 (2) 그 결과 다윗 자신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때 사무엘은 사울에 관한 다윗의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바 된 상태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13, 14;15:26, 35).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 사무엘보다 다윗을 앞서 언급하는 본 어구는 다윗이 이미 역사의 주역이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여기서'나욧'(*)은 '거처', '거주지', '초원지대' 등의 의미를 가지는 아카디아어 '나움'에서 온 단어로서, 마치 오늘날의 기숙사와 같은 숙소 시설을 가리킨다(Smith, Keil, Fay). 이같은 추정은 이 단어가 항상 특정 지명과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로써 보다 분명해 진다. 즉 '나욧'은 사무엘이 자신의 주변에 모여드는 제자들을 수용키 위해 세운 기숙 시설을 가리키는 특수한 명칭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나욧'은 단순한 기숙 시설 이상의 '교육의 집' 또는 '선지 학교'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리고 '나욧'이 '초원 지대'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사실은 이 교육을 위한 기숙사가 목자들이 거주하는 초원 지대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Klein,삼하 7:9;렘 33:12). 아울러 '나욧'이 복수로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여러 동(棟)으로 구성된 교육용 숙소 시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Keil).
성 경: [삼상19:19]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혹이...고하여 가로되 - 다윗이 처 미갈의 도움으로 기부아 집을 도망쳐 나온 이후, 아마도 사울은 군사들에게 그의 도피처를 탐색하라고 명령했을 것이며, 어쩌면 많은 현상금까지 내걸었는 지도 모른다. 아무튼 다윗의 도피처는 발견되었고, 그 사실은 즉각 사울에게 보고되었다.
성 경: [삼상19:20]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 - 여기서 '선지자 무리'는 당대의 대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영적 지도를 받기 위하여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훈련을 받던 젊은 생도들이었다(10:5). 그리고 '예언하는 것'(*, 니브임)은 '예언하다'(*, 나바)의 단순 수동형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의 신령한 상태 즉 성령에 감화 감동되어 (1)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10:5) (2)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에 담아주신 신령한 계시를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Wilson). 따라서 이들 선지자 무리는 이때 자의식을 상실한 채 무아지경 곧 황홀경(ecstasy)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이때 이들은 분명한 자의식(自意識)을 소유한 채 경건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R. P Smith).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 - 이것은 사무엘이 그때 그 선지자 무리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왕상 4;7;왕하 2:5). 그리고 '나욧'에서 그 선지자들의 무리를 직접 지도.감독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상황은 확실히 본서 10장의 상황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즉 그때는 사무엘이 그 선지자 무리를 일일이 지도하지 않았으나, 여기서는 사무엘이 그들을 직접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의 변화는 당시 사무엘이 선지자직을 제외한 모든 일에서 해방되어, 그들을 지도하는데 전념할 수 있게 된 때문일 것이다.
`볼 때에...사자들에게 임하매 - 이같은 현상은 '볼 때에'라는 말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때 사울의 사자들은 선지자 무리가 엮어낸 독특한 분위기를 '본' 후, 즉 접한 후 그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볼 때에'(* 야르, 원형은 '라아')가 3인칭 단수로 표기된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아마 본 저자가 사울의 사자들 전체를 하나로 취급했기 때문일 것이다(Keil). 즉 본 저자는 이같이 표기함으로써 사울의 사자들 모두가 마치 한사람처럼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독특한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갔음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임하매...예언을 한지라 - 다윗을 잡으러 간 사울의 사자들은 사무엘과 선지자 무리의 신련한 예언의 노래에 휩쓸려 들어가고, 또한 그때 위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강권적으로 임하므로, 그들 역시 자제할 수 없는 예언의 상태에 사로잡힌 것이다. 특히 여기서 '예언'(*, 나비)이란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받아 미래의 일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선지자적 예언이 아니라, 영감받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울의 사자들은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묵시적(默示的) 황홀경 상태에 들어가 자신들도 모르는 중에 영감 깊은 신령한 노래를 하였다고볼 수 있다(Fay, Smith). 결국 라마 나욧의 다윗은 더이상 피할 곳도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19:21]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 본절은 사울이 보낸 세 그룹의 사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신'에 의해 사로잡히는 바람에 다윗을 체포하려 했던 사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말해준다. 그러자 마침내 사울이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22절).
성 경: [삼상19:22]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예언하는 사울]
`세구에 있는 큰 우물 - 여기서 '세구'(Sechu)는 '전망대'란 의미이다. 이곳은 기브아와 라마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라마 북쪽 4.8km 지점의 오늘날 '슈웨이케'(Suweikeh)로 추정된다(Conder). 한편 '큰 우물'은 문자적으로 '그 큰 우물'이란 뜻인데, 여기에 정관사로 '그'가 붙어 있다는 사실은 이 우물이 그 근처에서는 매우 유명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혹자는 이것을 '저수지'나 '물탱크'로 이해하기도 한다(Smith). 한편 칠십인역(LXX)에는 '세구에 있는 큰 우물' 대신 '산 위에 있는 타작 마당'으로 되어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히브리 본문(Masoretic Text)에그 독법(讀法)의 우선권을 두어야 할 것이다.
`라마 나욧 - '라마의 선지 학교'란 뜻이다. 18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9:23]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하나님의 신이...임하시니...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예언을 하였으며 - 사울의 체험은 그가 보낸 세 그룹의 사자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20, 21절). 즉 여기의 '이르기까지'는 사울이 자신이 보낸 사자들과는 달리 선지자 무리의 신령한 분위기를 접하기도 전에 이미 '세구'(Sechu)로부터 예언을 시작하여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계속 예언 행위를 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결국 사울은 자신의 사자들과는 달리 보다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로, 그리고 보다 지속적으로 황홀경의 상태 속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당시 성령의 역사는 보다 강퍅한 사울의 심령 상태를 완전히 주장하시어, 그로 하여금 다윗을 체포하겠다는 의지를 스스로 포기 하게끔 만든 것이다. 즉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사울 왕의 강퍅한 심령을 녹이고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F. R. Fay)
성 경: [삼상19:24]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그가 또 - '그는 심지어'란 뜻으로, 이는 사울에게 임한 기이한 현상으로 말미암은 저자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하는 말이다(Klein).
`그 옷을 벗고 - 옷을 벗는다는 것은 성경 용례상 수치스러운 행동 중의 대표적 경우로 취급된다(창 3:7, 10, 11;삼하 10:4, 5;미 1:11). 그러므로 사울이 이같은 행동을 한 까닭은 (1) 근본적으로는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정도로 성령의 역사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며 (2) 또한 실제적으로는 사울이 황홀경의 영적 심리 상태로 발생하는 체열(體熱)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Abarbanel, Fay). 그러나 여기서 사울이 벗은 것은 겉옷(*, 베게드) 뿐이었지 속옷은 아니었다(사20:2-4;미 1:8).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 칠십인역은, 사무엘이 사울과 길갈에서 헤어진 후 죽을 때까지 사울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본서의 언급(15:35)과 조화시키기 위해 여기 '사무엘 앞에서'를 '그들 앞에서'로 고쳤다. 그러나 여기의 '사무엘 앞에서'는 15:35의 언급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여기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은 사울이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무엘을 거저 보았을 뿐, 15:35절의 언급처럼 상호 교제를 나눈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 여기서 '종일 종야'는 그때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한편 '벌거벗은 채'란 의미인데, 이것은 사울이 속옷까지 완전 벗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겉옷을 벗어 사울이 왕으로서 체통을 잃을 만한 부끄러운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리고 '누웠더라'(*, 나팔)는 '엎드러지다'란 의미로서, 결국 이것은 대단히 오래도록 지속된 예언 상태로 인해 그때 사울이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빠진 상태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한편, 그러나 사울이 이같은 영적 상태에 계속적으로 빠져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아마 한동안 하나님의 신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황홀경의 상태에서 손짓 발짓을 섞어 노래를 하는 등의 행위를 한 후, 그로 인한 피곤감으로 깊은 잠에 빠져버렸을 것이다(R. Payne Smith).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 이 말은 본래 어떤 사람이 본래의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할 때 적용되는 말이다. 10:11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0:1]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 당시 다윗은 자신을 잡으러 라마 나욧까지 온 사울의 사자들 및 사울이 하나님의 신의 불가항력적 임재로 말미암아 황홀경의 심리 상태에 빠져 있을 때(19:20-24), 그 때를 호기(好機)로 삼아 그곳에서 도망할 수 있었다(Smith, Keil).
`와서 - 이것은 다윗이 당시 사무엘의 선지학교가 있던 라마 나욧(19:18)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궁성(宮城)이 있던 기브아로 돌아온 것을 가리킨다. 다윗이 그때 사울로부터의 위협이 상존해 있는데도 기브아로 돌아온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1) 친구 요나단에게 사울이 자신을 계속적으로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2) 그럼으로써 요나단의 도움을 요청하고, 향후의 신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4절).
`죄악...죄가 무엇이관대 - 다윗의 이 질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역설적 질문으로서, 곧 자신은 사울에게 죽임을 당할만한 아무런 죄악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편, 여기의 '죄악'(*, 아온)과 '죄'(*, 핫타트)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들인데, 다윗은 이같은 동의어의 반복을 통하여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강력히 호소한다.
`내 생명을 찾느뇨 - '내 목숨을 노리는가'란 뜻이다(공동 번역). 특별히 여기서 '찾다'(*, 바카쉬)란 불을 켜고 샅샅이 수색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출 4:19).
성 경: [삼상20:2]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부친이...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 이 말은 (1) 왕과 왕세자로서 사울과 요나단이 특별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2) 아울러 당시 요나단은 사울의 모든 정책 결정에 깊이 참여할 만큼 중요한 직위에 올라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그런데 요나단의 이같은 말은, 그가 이때 사울이 다윗을 몇 차례 죽이려 했던 것을 다만 일시적 광기(狂氣)의 결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Keil). 따라서 요나단은 자신의 힘으로 다윗을 그러한 부친의 광기적 살인 시도로부터 충분히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다윗을 안심시키려 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0:3]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내가 네게 은혜받은 줄을 - 문자적으로는 '내가 너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한 줄을'이란 뜻이다. 결국 이것은 왕자 요나단이 목동 다윗을 깊이 사랑하고,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18:1; 19:1).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을 경우 반드시 자신에게 알릴 것이라는 요나단의 호언 장담(2절)에 대한 다윗의 반론이다. 즉 사울은, 만일 자신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요나단이 알면 다윗과 두터운 우정 관계에 있는 요나단이 (1) 다윗이 살해되는 것을 매우 슬퍼할 것이며, (2) 따라서 틀림없이 다윗에게 그 음모를 누설할 것을 예측하고, 그러한 사실만은 요나단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 즉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자신의 음모를 아들 요나단에게 알릴 경우 그에 관한 비밀이 누설될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결국 자신의 계획이 실패할 것이므로 다윗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해도 결코 그에 관해서는 요나단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 - 이 말은 요나단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사울의 음모에 의해, 다윗 자신의 생명이 마치 사망의 문턱에 도달한 듯한 매우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비유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다. 즉 생명의 위협을 시시각각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성 경: [삼상20:4]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네 마음의 소원...이루리라 - 본절은 요나단(2절)이 다윗의 논리(3절)에 설득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처해있는 긴박한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이처럼 친구 요나단으로부터 헌신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성 경: [삼상20:5]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월삭(*, 호데쉬) - 매월 첫날을 가리킨다. 이때는 상번제 외에 속죄제를드려 지난 한달 동안 지은 죄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고 새 마음을 다지는 등의 종교적 행사와 아울러 민간 축제가 거행되었다(민 10:10; 28:11-1; 스 3:5; 느 10:33; 느10:33; 사 1:13). 레위기 서론의 '히브리 절기와 축제'를 참조하라.
`내가 마당히 왕을 모시고...식사를 하여야 - 월삭(月朔) 때의 식사는 아마도 가족이나 친척 단위로 함께 모여 공동 식사를 했던 것 같다(Smith, Fay). 따라서 다윗도 사울의 사위였으므로(18:27). 마땅히 사울의 식탁에 참석하여야 할 자격과 의무가 있었다.
`제 삼 일 저녁까지...숨게 하고 -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같이 요청한 까닭은 관례상 월삭 잔치는 이틀 동안 계속되었으므로(27, 34절). 이에 따라 '제 삼일'에야 요나단이 자신에게 사울의 반응(30, 31, 33절)을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에 - 문자적으로는 '그 들에'이다. 이처럼 여기에 정관사 '그'가 붙었다는 사실은 여기의 '들'이 다윗이 이미 먼저 번에 숨었던 궁전 근처의 '들'이었음을 시사해 준다(19:2, 3).
성 경: [삼상20:6,7]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여기서 다윗은, 왕의 식탁에 불참한 후 요나단을 통해 사울에게 전달될 변명에 대해 나타날 사울의 반응을 통하여, 사울이 자신을 향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
`온 가족을 위하여 - 여기의 '가족'(*, 미쉬파하)은 (1) 이새가 속한 유다 지파(Smith), (2) 이새의 가족(Klein) 등으로 주장된다. 그러나 첫째, 왕정(王政) 하에서 한 지파 전체가 왕의 허락없이 모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둘째,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 전체가 모이기에는 너무 협소하며 셋째, '매년제'(每年祭)는 소가족단위로 드려진 제사(1:3)였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거기서 - 이는 베들레헴을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지역적으로 드려진 가닭은 실로의 중앙 성소가 파괴된 후(4:10) 새로운 중앙 성소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제단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소가족 단위로 각종 제사가 드려질 수 있었다(Keil, Gerlach).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 '매년제'(a yearly sacrifice)는 가족 단위로 매년 1차씩 드려지던 제사를 가리킨다(1:3 주석 참조). 그러나 모세 율법에서는 매년 3대 절기(유월절, 맥추절, 수장절)를 맞이하여 세 차례씩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한다(출 23:14-17; 34:24). 따라서 매년 1차씩만 드리는 여기의 '매년제'는 일종의 편의주의적 편법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기의 '드릴 때'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중의 하나였을 것이다(출 23:14-16). 즉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 절기 중 자신들에게 편한대로 한 절기를 택하여 '매년제'를 드렸던 것같다. 아무튼 이처럼 이 제사는 율법에서 엄중히 명령되는 만큼, 다윗에게는 사울 왕이 베푼 월삭 잔치에 불참할만한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때 베들레헴에서 이 매년 제사가 그의 가족에 의해 드려진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좋다 하면...노하면 - 요나단을 통해 전달될 다윗의 처사(6절)에 대하여 만일 사울의 반응이 긍정적으로 나타날 경우 그것은 그가 다윗을 기뻐한다는 증거요, 만일 부정적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사울이 다윗을 여전히 증오한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러한 방법을 통하여 사울의 마음을 알기를 원했는데, 이는 사울이 하나님의 신을 접한 이후(19:23, 24)처음 그의 의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다윗은 향후 자신에 대한 사울의 의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성 경: [삼상20:8]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그런즉 - 7절의 내용과 연결시켜 주는 상관 접속사이다. 따라서 본 접속사에 뒤따르는 내용은 7절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네 종에게 인자히 행하라 - 이 말은, 다윗이 베들레헴에 매년제를 드리러 갔다는 요나단의 보고에 대하여 사울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를 가상해서 요나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말이다. 사실 사울이 죽이려 할 경우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 도망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여기의 '인자히'(*, 헤세드)는 원래 명사로서 언약적 관계에 따라 베풀어지는 특별한 사랑 및 은총을 가리킨다.
`네가...너와 맹약케 하였음이니라 - 다윗이 요나단에게 담대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근거는 요나단의 주관하에 맺어진 신실한 언약 때문이었다(18:3, 4). 다윗이 이처럼 단순한 우정이 아닌 언약 관계를 근거로 해서 도움을 호소한 까닭은 (1) 단순한 우정 관계는 부자(父子)관계보다 우선될 수 없으며 (2) 여호와 앞에서 그 이름으로 맺은 언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통념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죄악이 있거든...친히 나를 죽이라 - 이 말은 다윗이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다윗은 이같은 말을 함으로써, 요나단이 부친 사울의 뜻과는 달리 자신을 돕는 일이 하등에 거리낌 없는 옳은 행위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성 경: [삼상20:9]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이 일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리라 - 이 말은 문자적으로 '그것이 네게로부터 멀리 있다'란 의미를 갖는 감탄문이다. 즉 이것은 (1) 다윗에게 결코 죄가 없다는 의미(Lange, Klein), (2) 다윗에게 결코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Smith)등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원문상 본 문구 다음에 나오는 문구가 '왜냐하면'의 의미를 갖는 '키'(*)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즉 요나단은 자신의 손으로 다윗을 죽인다든지, 또는 다윗을 사울에게로 데리고 간다든지 하는 불행한 일이 결코 다윗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Keil).
성 경: [삼상20:10]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네 부친이 혹 엄하게...대답하면 - 여기의 '대답하면'은 요나단이 다윗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고, 또한 다윗에 관한 사울의 음모를 알아내려고 사울에게 질문했을 경우 사울이 요나단에게 보일 전반적인 반응을 가리킨다. 따라서 '엄하게...대답하면'은 다윗의 행동(6절)에 대해 사울이 격노하고, 아울러 사울이 자신의 음모가 다윗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협박을 하거나, 방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누가 그것을 내게 고하겠느냐 - 이것은 사울로부터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 관한 정보를 요나단이 입수했다고 해도, 사울의 방해.협박 때문에 요나단이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 경: [삼상20:11]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본절에서 요나단과 다윗은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신호를 만들기 위해 들로 나갔다.
`들 - 문자적으로는 '그 들'이다.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사울 궁전 근처의 들판을 가리킨다(5절; 19:3).
성 경: [삼상20:12]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 이러한 신(神) 명칭은 서원이나 맹세를 할 때 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칭호로서, 여기서 요나단은 자신의 맹세의 신실성을 확증키 위해 바로 이같은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한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명칭은, 하나님께서는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때 언급된다(2:30; 25:32, 34; 삼하 7:27; 왕상 1:30, 48).
`증거하시거니와 - 이것은 원문에는 없는 말이나, 의미를 강화키 위한 번역자의 적절한 삽입구이다.
`내일이나 모레 - 월삭(月朔) 잔치가 벌어지는 이틀 동안을 가리킨다 <5절>.
`내 부친을 살펴서 - 이것은 다윗이 매년제에 참석하러 베들레헴에 갔다는 얘기를 사울에게 하고, 또 그 얘기를 들은 사울의 반응을 살피는 것을 가리킨다(6, 7절).
`보내어 - 이것은 요나단이 직접 전달하지 아니하고, 사자를 보내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다윗에 대한 부친 사울의 의향이 선하게 나타날 경우 요나단이 사자를 보내겠다고 한 까닭은, 그러한 경우에는 분명 사울의 마음이 누그러진 상태일 것이므로 사자를 보내도 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20:13]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 이것은 사울의 동향에 관한 적절한 정보를 다윗에게 제공하여 사울로부터 무사히 피신토록 협조함을 뜻한다.
`여호와께서...벌을...내리시기를 원하노라 - 이같은 맹세적 표현은 원래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동물을 죽이는 상징적 행위와 함께 이루어졌었다 <3:17>. 즉 맹세를 파기할 경우 그 동물의 죽음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만큼 맹세에는 책임과 의무가 뒤따른다는 의식이었다. 한편 맹세를 지키지 않을 경우 여호와께 벌을 받을 것이라는 요나단의 이 맹세적 표현은 '여호와'를 증인으로 세웠던 12절의 맹세와 잘 부합된다.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신 것 같이 - 여기서 '하신'(*, 하야)이 완료형이라는 점에서,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과거에는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계셨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16:14>.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 여기서 '하시기를 원하노니'(*, 예히)가미완료 시제 즉 미래형이라는 점에서, 여기 이 문구는 지금부터 앞으로 계속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실 것을 소원.확신하는 말이다 <1:13; 17:37; 18:12>. 이것은 결국 요나단이, 이스라엘의 왕권(王權)이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넘어갔다는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음을 뜻한다(14, 15절; 23:17).
성 경: [삼상20:14]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본절에서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간청은, 고대 중근동에는 축출된 왕조의 가족들이 새로운 왕에 의해 몰살되는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Fay, Smith; 삼하19:28; 왕상 15:29; 16:11).
`나는 사는 날 동안에...나로 죽지 않게 - 이 말은 요나단이 다윗의 등극이 자신의 생전에 있을 것으로 예측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실상 요나단은 길보아 전투에서 자신의 부친 사울과 함께 전사함으로써, 생전에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31:2-6).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 '여호와의 인자'(*, 헤세드 예호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약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신실한 계약적 사랑을가리킨다 (8절). 여기서 요나단은 이 말을 함으로써, 자신과 다윗 사이에 맺어진 언약 관계를 다윗으로 하여금 깊이 상기시키려 한다. 한편, 이처럼 요나단이 현재 다윗을 돕는 자이면서도 오히려 겸손히 다윗에게 '인자'를 요청하면서 그를 축원하고 있는 것은, 그가 왕자로서 명예욕과 권세욕에 초연했음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전적 협조와, 그리고 장차 인자 베풀 것을 요청한 것은 사울 대신 다윗을 들어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요나단이 전적 순종하였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바, 실로 요나단은 탁월한 신앙 인격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상20:15]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다윗의 대적들 - 이것은 (1) 사울의 가문(Lange), (2) 사울의 가문을 포함한 모든 대적(Klein)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첫째, 요나단 자신이 자신의 아버지 집만을 멸망받을 자로 직접 지명할 리가 없다는 사실, 둘째, '대적'(*, 오예브)이라는 단어가 복수라는 사실, 셋째, '대적'이라는 단어가 사울이외의 대상에게도 다윗에 의해 적용된다는 사실(25:26, 29, 39; 삼하 3:18)등으로 미루어 볼 때 (2)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요나단이 다윗의 여러 대적들 중 자신의 아버지 사울의 멸망에 대하여 주된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것은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사울의 멸망은 그의 아들인 자신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네 인자를 내집에서...끊어 버리지 말라 - 이것은 장차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사울의 가문은 멸망될 때에, 요나단 자신의 직계 후손만은 멸망되지 않도록 특별한 배려를 원한다는 뜻이다. 사실 요나단의 이같은 간청은 후일 다윗에 의해 받아들여져, 후에 요나단의 후손으로 다윗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삼하 9:6, 7).
성 경: [삼상20:16]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 이것은 요나단이 다윗에 대하여 충성 서약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자기 아비의 집과 다윗의 집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할 당시 상황에서, 요나단은 (1) 다윗을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차기의 왕으로 확신했으며(13, 14절; 23:17). (2) 그 사실을 아는 이상 자신의 후손들을 헛되이 죽게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같이 언약했음이 분명하다. 한편 여러 학자들은 이부분을 15절의 하반부와 연결된 것으로 보고, '요나단의 이름이 다윗의 집으로부터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let not the name of Jonathan be cut off from the house ofDavid, RSV)로 번역해야 된다고 주장한다(Hertzberg, Klein). 그들이 이같이 번역하는 까닭은 (1) 여기서 '언약 하기를'로 번역된 '카라트'(*)라는 단어는 뒤에 '베리트'(*, '언약')라는 단어가 뒤따르지 않을 경우 '언약을 하다'란 의미로 번역하기 곤란하므로(Davidson, Keil) 이에 따라 15절에서의 용례처럼 '끊어버리다'로 번역해야 되기 때문이며, (2) 그리고 칠십인역(LXX)은 '요나단'이 아닌 '요나단의 이름'으로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바로 이같은 이유로 여기서 그들은 맛소라 사본에 의존한 전통적 번역 방식보다 칠십인역을 좇는 번역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 앞 절의 해석 방법에 근거할 때 이 문구 역시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적들의 손으로부터 그것을 요구하실 것이다'(Let theLord even require it at the hand of David's enemies, KJV)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결국 이것은 다윗이 요나단 자신과의 언약을 이행치 않을 경우, 다윗은 여호와께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뜻으로(창 31:39; 삼하 4:11). 요나단은 그 신적인 저주가 다윗의 대적들을 통해서 내려질 것이라고 말한다. 즉 대적들을 토벌하려다가 오히려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뜻이다.
성 경: [삼상20:17]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본절은 요나단이 자기 자손들에 대한 약속 이행을 다윗으로 하여금 맹세토록 강요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두 사람간의 기본적인 언약 관계(18:3)를 보다 견고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요나단이...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 이는 요나단이 먼저 다윗을 도와줄 것을 맹세한 뒤, 이어 다윗이 후일 요나단의 후손들을 배려해 줄 것을 맹세하였음을 뜻한다. 그 맹세의 내용은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만일 ...을 지키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란 말로 구성되었을 것이다(13절). 아무튼 이러한 맹세는 맹세한 쌍방 중 어느 한편이라도 그 맹약을 어긴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친히 심판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자기 생명...같이...사랑함이었더라 - 18:1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0:18,19]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월삭 - 5절 주석 참조. 한편, 19절의 내용은 사본상의 문제 때문에 몇 군데가 수정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사흘을 있다가 - 이것은 원문대로 '제 3일에'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이틀 동안 계속되는 월삭 잔치가 끝나는 다음 날을 가리킨다.
`빨리 내려가서 - 여기의 '내려가서'(*, 테레드)는 본 문맥의 흐름상 적절치 못하다. 왜냐하면 여기의 언급처럼 만일 다윗이 빨리 내려가야 '숨었던 곳'에 도달한다면, 다윗이 사흘 동안 숨을 곳은 자신이 원래 숨어있겠다고 요나단에게 약속한 지점(5절)과 다르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의 '내려가서'는 사본상의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라 혹자는 칠십인역(LXX)을 좇아서 '테레드'를 '파카드'(*, '찾다', '묻다'란 뜻)의 단순 수동형인 '티파케드'(*)로 고쳐야 된다고 주장한다(6절). 만일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말 번역의 '내려가서'는 '찾아지리니'란 의미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빨리'(*, 메오드)는 '무척', '대단히'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 - 여기서 '그 일'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의 음모 때문에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 숨었던 사건을 가리킨다(19:1-3). 따라서 여기 '숨었던 곳'은 사울 궁전 근처의 은밀한 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이르러 - 이것은 다윗이 요나단과의 담화가 끝나는 즉시 '은밀한 들판'으로 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말 개역 성경의 번역은 마치 사흘째의 그리고 가라는 말처럼 오인케 한다.
`에셀 바위 곁 - '에셀'(*, Ezel)은 '가다', '출발하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아잘'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여기의 '에셀 바위'는 방향 표시를 위하여 세워진 바위를 가리키는 듯하다(Smith).
성 경: [삼상20:20]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내가...살 셋을 그 곁에 쏘고 - 여기서 요나단이 활 쏘는 것으로 신호(sign)를 삼으려 한 것은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자신이 직접 다윗에게 결과를 알려 줄 수 없게 될 경우를 대비키 위함인 듯하다. 한편 여기서 요나단이 화살을 셋씩이나 쏜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을 향해 쏘는 사람이 요나단임을 알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성 경: [삼상20:21]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아이(*, 나아르) - 여기 '아이'는 그 용례로 볼 때 '요나단의 병기 든 자'를 가라킴이 분명하다(14:1).
`살을 찾으라 - 이같은 일은 전쟁 물자가 매우 부족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병기 든 자에게 매우 당연한 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병기 든 자가 이 일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다윗에게 정보를 제공할 기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 직역하면 '네게 평안이 있을 것이요'(peace shall beto you)란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살의(殺意)를 품지 않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 경: [삼상20:22]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네 길을 가라 - 곧 지체말고 도주하라는 뜻인데, 이것은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살의를 품었을 경우를 대비해 예상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성 경: [삼상20:23]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본절에서 요나단은 자신과 다윗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불변성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재천명한다.
`너와 내가 말한 일 - 이는 단지 둘 사이에 묵계(默契)된 암호(20-22절) 뿐만 아니라, 요나단과 다윗이 새롭게 다지고 맺은 우정의 맹약(12-17절)도 포함한다. 즉 그맹약에 살아 계신 여호와께서 증인과 판결자로서 영원히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 경: [삼상20:25]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왕은...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았고 - 사울이 이같이 벽 곁 자리에 좌정한 것은 (1) 그 위치가 자신의 몸을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자리이며(Hertzberg),(2) 고대 중근동에서 출입구 반대편의 그곳은 가장 상좌(上座)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Fay, Smith, Keil).
`요나단은 섰고 - 여기의 '섰고'(*, 야캄; 원형은 '쿰', * )는 요나단이 그때 식탁을 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매우 부자연스러운 자세이다. 따라서 이같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1) 여기의 '야캄'을 사본상의 오류로 보고 '코프'(*)와 '멤'(*)사이에 '달렛'(*)을 삽입시켜 '에카뎀'(*)으로 수정하여 '맞은 편에 위치하다'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LXX, Klein, Ewald, Bunsen, Thenius), (2) 여기 '쿰'의 의미를 '오다'란 말로 이해하여 '요나단이 왔다'란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De Wette, Maurer), (3) 사본을 정확한 것으로 보되, 다만 '(요나단이) 자신의 위치를 잡다'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견해(Mastin)등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첫째, 여기의 '섰고'(쿰)라는 동사가 단순히 서있는 동작만을 의미하지 않으며(16:12; 창 43:13) 둘째, 히브리 본문을 최우선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일반 해석론에서 볼 때 (3)의 견해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곧 처음 요나단이 사울의 곁에 자리 잡았다가, 아브넬이 들어옴으로써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양보했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군대 장관이요 숙부인(14:51) 아브넬이 들어오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단순히 잠깐 일어나는 자세를 취했다가 다시 앉은 행위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the Vulgate, Keil, Fay).
`아브넬...다윗 - 결국 월삭 어전 잔치의 참석자는 왕 사울, 왕자 요나단, 군장 아브넬, 천부장 다윗 등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사울 왕을 중심으로 부자(父子) 관계, 사촌 형제 관계, 사위 관계 등 혈연으로 얽혀있었다는 점에서 가족 잔치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아무튼 이들 4인은 당시 이스라엘 왕정 제도의 핵심 수뇌부인데, 고대 초창기 왕정의 성격상 이러한 혈연 중심의 통치는 당시 보편적이었다(Leon Wood).
성 경: [삼상20:26]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부정한가보다 - 모세 율법의 정결 의식법상 시체를 만지거나(레 7:20, 21;15:16-18), 혹은 잠을 자다가 몽설(夢泄)을 하는(신 23:10) 등의 사유로 인하여 의식적(儀式的) 부정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모세 율법은 이같은 상태에 이른 자가 제사, 축제 등의 성별된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성 경: [삼상20:27]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이새의 아들 - 성경 용례상 이 말은 다윗의 대적들에 의해서 주로 부벙적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에서(30, 31; 22:7, 8; 25:10; 삼하 20:1). 당시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심경을 보여 주는 말이다(Klein).
`어찌하여...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뇨 - 사울의 이 말은 여러 사유 등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 자는, 그 당일에는 부정하지만 그 다음 날에는 깨끗케 된다는 율법규정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레 15:1-27). 바로 이같은 율법 규정을 아는 사울은, 다윗의 첫날 식사 불참은 그가 부정하게 됐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고 용납할 수 있었으나(26절). 그 다음 날에도 불참한 것은 첫날의 불참과는 달리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상20:28,29]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다윗의 행방을 묻는 사울의 질문에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갖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이틀 전 다윗과 이미 약조한대로(6절) 다윗의 불참 사유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실은 당시 다윗은 베들레헴으로 내려갔던 것이 아니라, 에셀 바위가 있는 들에 숨어 있었다(19, 24절).
`나의 형(*, 아히) - 70인역(LXX)은 '형제들'로 이해하나, 히브리 원문은단수이다. 아마도 다윗의 맏형으로서 가족의 제사를 주관하는 형을 가리키는 듯하다(Keil, Fay).
성 경: [삼상20:30]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 이것은 요나단이 다윗으로 하여금 베들레헴으로 가도록 허락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를 가리킨다. 이같은 반응은 결국 사울이 월삭 잔치를 기회로 다윗을 사로잡고자 한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보여 주는 증표였다.
`패역 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 여기서 '패역'(*, 나아와트)은 '구부러지다'(*, 아와)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극도로 사악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잠 12:8). 그리고 '부도'(*, 마르두트)는 '반역하다', '거역하다'(*, 마라드)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반항적이고 배타적인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창 14:4; 수 22:16; 왕하 18:20). 또한 여기의 '계집'은 사울 자신의 아내 곧 요나단의 생모(生母) '아히노암'(14:50)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 아히노암에 대한 사울의 이같은 언급은 그녀가 그같은 행위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사울은 요나단의 어머니를 나쁜 여자로 몰아버림으로써, 즉 요나단을 처음 출생부터 잘못된 인물로 선언함으로써 그 아들 요나단의 '패역 부도'(悖逆不道)함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문을 따라 직역하면 "너 사악하고 반역적인(계집의) 아들아!"(you son of a perverse and rebellious woman!; NIV, RSV)란 뜻인데, 이처럼 어머니까지 들먹여 욕하는 이런 행위는 특히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는 극도의 증오와 분노를 나타내는 가장 격렬한 감정의 표시였다. 결국 이러한 사울의 행동은 다윗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로 말미암아 이제는 자신의 아들마저 아들로 인정치 않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이 지니는 악한 감정은 결국 자신의 인격마저 파탄시키고 만다.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 - 여기서 '택하다'(*, 바하르)란 말은 사랑과 신의(信義)로써 사랑하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곧 요나단이 다윗과 친구가 되어 그 편을 들어 행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편 여기 '이새의 아들'에 대한 해석은 27절 주석을 참조하라.
`네 수치 -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 넘어갈 경우 마땅히 사울의 왕권을 이양받을 권한이 있던 왕자 요나단이 당할 여러가지 부끄러움을 가리킨다.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 이 말은 다윗에게 사울의 왕권이 넘어감으로써 심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요나단으로 인하여 요나단의 어미가 그를 낳은 일 자체를 부끄러워 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말은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독선이고 아집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다윗을 성실히 도와준 요나단은 오히려 그의 그러한 선행 때문에 가문의 수치를 벗고 다윗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게 되었다(31:9-13; 삼하 4:12; 9:1-13).
성 경: [삼상20:31]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너와 네 나라가...서지 못하리라 - 사울 자신의 왕권이 다윗으로 인하여 요나단에게 양위(讓位)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말이다. 일찍이 사울은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그 왕위(王位)가 단절될 것이라는 선언을 들은바 있었고(13:13, 14), 이제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차기의 왕으로 세워진 자라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18:12; 23:17) 이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음으로써,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신을 소유치 않은 비합법적인 왕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16:14).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 문자적으로는 '그는 사망의 자식이니라'이다. 반드시 다윗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이는 곧 다윗을 차기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에 정면 도전하는 선전 포고를 볼 수 있다. 이처럼 사울의 악한 감정은 이제 그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대항하는 자로까지 발전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결국은 멸망 뿐이다(31:4, 5; 나1:2).
성 경: [삼상20:32]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요나단이...가로되...무엇을 행하였나이까 - 부친 사울 왕의 격심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변치않는 신의(信義)로써 친구 다윗을 위해 변호함으로써 부친의 마음을 바로 잡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19:4-7). 그러나 당시 사울은 이미 감정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성 경: [삼상20:33]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단창을 던져 치려 한지라 - 여기의 '던져'는 '창을 뻗다'란 의미로 이해함이 타당하다(18:11). 그리고 '치려'(*, 나카)는 죽이거나 혹은 치명상을 입힐 목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등의 과격한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37:21; 출 2:12; 신13:15; 삼하 1:15). 그런데 이같은 행동은 사울이 악신에 사로잡을 때 나타났다는 점에서 볼 때(18:11; 19:10). 이때도 사울은 극력한 분노와 증오심으로 인하여 마치 악신에 사로잡힌 바 된 상태와 다름이 없었던 것 같다.
성 경: [삼상20:34]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심히 노하여 - 이같은 요나단의 분노는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한 사실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아버지가 하나님에 의하여 차기의 왕으로 특별히 선택된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분명한 사실 때문이었다. 따라서 여기 요나단의 노(怒)는 불의를 참지 못하여 일어난 의분(義憤)으로서 사울의 불의한 분노(30절)와는 뚜렷이 대조된다. 즉 요나단의 분노는 사랑과 신의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사울의 분노는 증오와 시기로부터 나온 것이다.
`달의 제 이 일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 이것은 월삭 잔치 둘째날의 음식(27절)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 이는 매년제를 드리러 고향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다윗을 부친 사울이 정당한 이유없이 반역자로 몰아, 반드시 '죽일 자'(31, 33절)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20:35]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아침에 - 다윗과 요나단이 만나기로 약속한 제 3일(5, 19절) 곧 이틀 동안의 월삭잔치가 끝난 그 다음날 아침을 가리킨다.
`작은 아이(*, 나아르) - 차라리 '소년'으로 번역함이 자연스럽다(22절;14:1).
성 경: [삼상20:36]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 요나단은 아이가 달려간 거리보다 더 멀리 활을 쏘았다. 이것은 요나단이 병기 든 소년에게 '살이 네 앞편에 있다'(22절)라고 말할 구실을 마련키 위한 의도적 행동이다. 즉 요나단은 다윗과 사전에 약속하기를, 만일 자신이 소년에게 '살이 네 앞에 있다'라고 말할 경우 사울이 그에 대하여 살의(殺意)를 품고 있다는 뜻으로 알고 도망쳐야 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었다(22절).
성 경: [삼상20:37]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 아마도 요나단은 근처 어딘가에 숨어있을 다윗도 족히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이 말을 외쳤을 것인데, 이것은 다윗에게 도망쳐야 될 필요성을 고지(告知)하는 암호(sign)였다.
성 경: [삼상20:38,39]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 요나단이 이처럼 소년을 독촉한 이유는 소년으로 하여금 숲 속에 숨어 있는 다윗을 발견할 여지나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Keil, Fay). 그리고 이 의도대로 소년은 살을 주워오기에 바빠 다른 눈치는 전혀 채지 못했다(39절).
`살을 주워 가지고 - 히브리 본문에는 여기 '살'(*, 헤치)이 단수로 표기되었지만, 난외주(keri)에는 복수 '살들'(*, 힛침)로 표기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미 요나단이 다윗과 약속할 때 '살 셋'을 쏘기로 했기 때문이다(20절). 아마도 요나단은 화살 셋을 연이어 쏜 것 같다(Bunsen).
성 경: [삼상20:40]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병기를...가지고 성으로 가라 - 여기서 '병기'는 활과 화살, 그리고 화살통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은 베냐민 기브아의 사울의 궁성(宮城)을 가리킨다. 한편 요나단의 이 명령은 말할 나위없이 소년을 돌려보낸 후 다윗과 은밀한 작별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다. 사실 주인의 마음에 따라 이같은 종류의 명령을 받아 하인만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당시 매우 보편적이었다는 점에서(Pritchard, Hertzberg), 그 소년은 별다른 생각 없이 홀로 성으로 돌아갔을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20:41]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 문자적으로는 '남편쪽으로부터'이다. 따라서 히브리 원문에는 '바위'라는 말이 없지만, 요나단이 '에셀 바위 곁에' 숨어 있으라고 지시한 19절의 말을 고려하여 '바위'라는 말을 첨가한 것 같다. 아무튼 여기의 '바위 남편'은 궁전쪽, 즉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가 있던 곳의 반대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 '일어나서'는 몸을 웅크려 숨어있던 자세에서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이 행동은 요나단이 다윗 자신에게 크나큰 호의를 베풀어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 것이다(Hertzberg). 즉 땅에 엎드려 얼굴을 숙이는 자세는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경의와 예우를 갖추어하는 절을 의미한다(삼하 9:6; 14:33). 그러나 여기 다윗의 절은 그러한 형식적인 경의나 예우의 표시가 아니라, 풍전등화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런 의미에서 요세푸스(Josephus)는 이 언급에 대하여 '다윗은 요나단을 존경하여 그를 자신의 생명의 주라고 불렀다'라고 의역하였다.
`피차 입맞추고 - '입맞춤'은 보통 '만남의 기쁨'이나 '이별의 슬픔'을 표하기 위해 포옹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대체로 이마나 볼이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슬픈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여 생명같이 사랑하는 친구의 앞날을 서로 걱정해주면서 우정과 사랑의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이다(창 29:11; 33:4; 45:15; 출 4:27;18:7; 룻 1:9, 14; 왕상 19:20; 행 20:37).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 이것은 (1) 깊은 사랑과 우정의 교제를 나누던 친구가 비극적 현실 앞에서 기약없이 서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 (2) 그 중 한 친구는 목숨의 보존을 위해 향후 정처없이 방랑해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다윗은 전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반역자로 몰려 왕과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갖기는 커녕 친구와 가정과 별리하고, 왕과 원수가 되어 정처없이 도피의 길을 떠나야 된다는 그 어이없는 현실에 그동안 참았던 설움이 복받쳐 올라와 길고깊은 울음으로 터져나왔으리라!
성 경: [삼상20:42]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본절에서는 (1)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평안(샬롬)의 기원, (2) 이미 맺어졌던 두사람 간의 언약의 재확인에 대해 언급된다.
`평안히 가라(*, 레크 레솰롬) -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이 함축된 마지막 작별 인사이다. 다윗과 요나단은 마음놓고 길게 작별을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과 그 측근들의 눈초리가 사방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나단은 순간의 격정이 지난 뒤 '평안히 가라'(Go in peace!)란 말로 다윗을 기약없이 떠나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진정 요나단의 작별 인사처럼 깊은 사랑과 우정이 깃든 평안(솰롬)에의 기원이야말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나눌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떠나고 요나단은...들어오니라 - 마침내 다윗은 친구와 가족을 등지고 사울의 추적을 피해 사울의 죽는 날까지(31:6) 온갖 고난이 뒤따르는 정처없는 도피 생활에 접어들게 되었다(21-31장). 한편 다윗과 요나단은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부친 사울과 함께 전사하기 전, 십 황무지 수풀 속에서 잠시 상면한 일(23:16-18)을 제외하고는 다시 서로 만나지 못했다. 후일 다윗의 궁가(弓歌) 속에는 요나단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다윗의 애도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삼하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