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날씨가 따뜻하다니 너무 반갑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추운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답니다. 모두에게 좋은 날 되시길 바라며 오늘의 큐티 같이 시작해 보시죠!
7장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는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아이러니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에 부르신 후에 땅을 ‘한 평’도 갖게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족장시대가 흘러갑니다.
그들의 소유는 사람(종)들과 양/소/염소 등 짐승들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애굽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요셉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좋았지만 그가 죽자 그들은 바로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 세월이 자그마치 400년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스데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7:6)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어서 정말 사백 년이 차자 새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출 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 삼십 년이라”
그러니까 딱 30년만 좋았네요!
400년 간의 종 살이,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이 뭘 잘못했다는 기록이 없는 데도 그들은 그런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해석하기가 힘든 부분입니다.
아뭏든 그들은 출애굽을 통해 약속의 땅에 들어가 마침내 정착민이 됩니다.
언제요? 하나님의 때/하나님의 시간에(7: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따라서 우리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 시간들을 살아갈 때 이런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결국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8절은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이, 하도 할례, 할례 하니까 그들조차 할례가 율법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바로잡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부터라고.
할례가 남성의 성기를 자르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브라함 때부터 할례 제도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 후손이 이어져 내려온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잘라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고는 종족 번식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7:30, “사십 년이 차매”
하나님의 때는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거듭나기까지는 400년이 걸렸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데는 40년이 걸렸습니다. 정해진 때에 하나님은 계획하신 일을 성취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긴 호흡을 우리는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그래도 적응해야 합니다.
“천사가 … 보이거늘” 구약에서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인 경우가 많습니다.
“주의 소리가 있어”(7:31), “주께서 이르시되”(7:33)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시켜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십니다.
즉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으니”(7:34)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7:38)
이 말씀은 스데반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스데반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생동하는 생물이었습니다. 이런 느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한다면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도 성취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우리의 인식/우리의 믿음)에게 달렸습니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7:43)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죄와 싸워야 하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에 따라 죄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고 꼭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7:48)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지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맡았던 사두개인들 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절대시했습니다.
성전은 그들에게 정신적인 안식처이자 그들의 신앙의 기초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여기에서 그들이 믿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후로는 사실 성전의 의미(고전 6:19, 우리의 몸)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스데반의 진술은 맞습니다. 실제로 AD 70년에 성전은 다시 한번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다시 재건된 적인 없습니다. 지금도 과거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이슬람 사원이 찬란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유대인/또한 오늘날의 유태인들에게 자신들의 조상들이 예수님(7:52, “의인”)을 죽인 사실은 두고두고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스데반이 그들을 가리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7:53) 않은 사람들임을 지적하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스데반이 죽기 전에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확신이 생길 경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뒤로 물러나게 되니까요.
스데반은 마치 예수님처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라는 기도를 하면서 그의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눅 23: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이 얼마나 거룩한 마지막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8장
사울(나중에 바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8:1).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큽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지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만약 그런 사건이 없었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주구장창 예루살렘에 머무르며 새로운 은혜의 ‘맛’을 추구했을 지 모릅니다.
우리들 중 어떤 사람은 부정할 지 모르지만,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회가 흩어지는 데 앞장섰던 바울이 나중에 교회들을 다시 모으게 된 것을 우리는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순서가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최적의 조합은 바울이 나중 된 자인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행 17:27) 하신 뜻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흩어짐은 확장을 가져왔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8:4)
교회가 흩어졌을 당시 있었던 일 중 사마리아에서의 일을 가장 먼저 기록한 것은 눈여겨 볼 만한 일입니다. 사마리아는 당시 일반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가장 절박하게 은혜가 필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응은 유대인들과 달리 아주 좋았습니다(요 4:39-42).
그들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8:6)랐습니다. 그 결과, “그 성에 큰 기쁨이 있”(8:8)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보십시오. 사마리아는 복받은 지역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처음으로 성령 강림이 임한 지역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사마리아를 점검하게 했는데, 그때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예수님이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 4절의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it is necessary~)”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마리아의 부흥(8: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에디오피아 내시 사건은 초대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성령이 친히 빌립더러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하신 것과 그에게 세례를 베푼 후에 빌립이 어디론가 홀연히 이끌려간 것 등이 그것입니다. 이때 사용된 동사가 헤르파센 ἥρπασεν(ἁρπάζω)인데, snatch/take away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성령 안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육과 더불어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육의 영역에서만 아니라 영의 영역에서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빌립이 순간 이동을 하게 된 것이 이상한 일만은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입신해서 천국에 갔다 오는 것도 그와 비슷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육의 영역에만 갇혀 살지 말자는 것입니다. 생각의 영역을 성령께 맡길 때 시공간의 제한 없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이 있습니다. 영의 눈이 뜨이면 이 땅의 것은 너무나 제한적이고 불편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비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제한없이 바라보며 그분과 동행하자는 것입니다. 삶의 새로운 영역이 열릴 것입니다.
오늘도 모든 분들께 은혜의 날, 기쁨의 날, 소망의 날, 풀어지는 날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성령강림후 베드로의 설교에 많은 자들이 회개하며 병자가 고침받고 많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남으로 믿는 자가 삼천, 오천에 이르렀어도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2:41, 4:4, 5:14, 6:7)
그런 중에, 칭찬받는 성도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많은 이적을 행하며 논쟁을 걸어오는 자들을 지혜와 성령으로 이기던 스데반이 갑작스레 죽임을 당합니다.(6:1-8:1) 이제 막 세워지고 부흥하기 시작했을 교회의 기반을 뒤흔들만한 사건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져 증인이 됩니다.(8:1)
우리도 성도로써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리로 움직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안주하려고 하는 자리를 흔드시는 것 같습니다. 편안한 자리에 머무르려고 하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고 동역자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 은혜에 감격해서 다시 일어서서 움직일때,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방법은 온전히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알고 늘 물으며 나아가야함도 함께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 데도 마치 선심쓰듯 해서는 안 되겠죠^^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8:39)
날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목회, 삶, 인생이 되시기를 바랄게요^^!
모세가 사십년이 차매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 그에게 보이거늘...시.공간을 살고있는 우리는 알수없는 하나님의 시간 앞에 기다림에 지쳐 넘어지고 낙심과 좌절도 되지만 결국 그 시간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것으로 주실것을 믿습니다.~
가장 좋은 것 주실 주심을 찬양합니다!
대문글처럼 생각의 영역 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랍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시길 빕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에 부르신 후에 땅을 ‘한 평’도 갖게 하지 않으셨을까... 조금이라도 주셨으면 약속을 믿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을 듯 한데 안그러셨어요. 대신 그보다 먼저 나그네의 삶을 살게 하셨어요.
우리도 그런 것 같아요. 하나님의 나라는 약속으로 있지만 눈에 보이게 설립되진 않았어요. 오직 말씀에 의지하고, 그 말씀을 뒷바침해줄 증거들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이들... 스데반이 그러했듯 우리도 확신을 가지고 그 나라를 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그네의 삶,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삶으로 이끌어 주소서!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으나 정작 자신은 땅 한뼘 갖지 못하고 아내 사라장사 지낼땅도 여의치 않았던 아브라함의 사례를 생각해봅니다. 은혜롭게 복음을 증거하지만 세상적으로는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스데반집사의 모습도 생각해 보게됩니다.
정말 알수없는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인생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고 넘어지지 않으며 인생여정을 헤쳐 나갈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의 면면에 스며드는 하나님의 섭리가 더욱 충만한 은혜로 이끌어 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