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죽가에 살던 여인
이 순금
수양버들이 연못가에서 긴 머리를 풀어 감고 있는 궁남지를 따라 천천히 발을 옮긴다. 남부여의 무왕이 만든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연못이다. 오랜 세월만큼이나 역사 속에서 얽힌 얘기도 많고 버드나무와 연蓮의 꽃대도 많다. 연못 가운데로 다리가 놓여있고 그다리를 따라 바라보니 포룡정이란 정자가 그림처럼 서 있다. 주변 풍광이 아름다우니 몸도 마음도 쉬어가기 안성맞춤이다.
연못가에는 푸른 창포들이 무성하게 자란다. 수면위로 무리지어 쑥쑥 올라와 있는 모습은 힘이 넘치는 소년을 닮았다. 봄이 무르익으면 창포 사이마다 새 식구들이 신고식을 할 것이다. 자라풀, 개구리밥, 붕어말 등이 물속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창포 무더기를 두 손으로 가만히 헤쳐보면 우렁이와 청개구리도 숨어 있을 것만 같다.
궁의 남쪽, 물가에 살던 여인을 따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그녀가 통정을 한 남자는 밖에서 얻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세력하고는 거리가 먼 여인의 자식이 어떻게 권좌를 물려받았을까. 일연은 삼국유사를 그늘, 벤치에 앉아 잠시 두 눈을 감는다. 환한 달빛 속 버들가지 사이로 얼핏 스치는 것이 있다. 검은머리 길게 묶어 내리고 야윈 듯 흰 얼굴에 소박한 남부여의 여인이다. 그때는 작은 방죽이었을 이곳에서 달빛을 따라 홀로 거닌다. 다리도 쉴 겸 그녀는 버드나무에 기대서서 그 달을 보며 수줍게 웃고 있다.
그 무렵 잠 못 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보름달이 유죄라고 울부짖는 용을 닮은 남자가 이 방죽을 주시하고 있었다. 긴 머리의 여인은 그의 영토를 밟은 힘 없는 사슴 한 마리였다. 그녀는 힘센 남자의 아이를 가졌고 열 달 후엔 아들을 낳았다. 평범하지 않은 남자와의 인연, 아이를 혼자서 키워내야 하는 고통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어느 시대로 보든지 분명한 미혼모와 사생아다. 정식으로 혼인을 한 사이도 아니다. 혼외 자식을 키우며 사는 젊은 여인의 심정이 예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를까. 시공을 초월해서 헤아려 본다. 왕의 자식을 낳았다면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그녀와 아들은 마를 심어서 생계를 유지했다면 어찌된 일일까 아리송해진다. 서동의 어릴 적 이름은 장(璋) 이라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왕재교육을 위해서라는 말도 떠올려 보지만 이해하기가 어렵다. 모자는 분명 고생을 하며 살아간 듯하다. 훗날 그녀의 아들이 왕위 계승자로 책봉되지 않았다면 그림자도 없이 사라졌을 여인이다. 통해 선화공주의 능력을 부각시킨다. 많은 금을 가진 공주가 금을 적절히 활용해서 서동을 무왕으로 만들었다고. 며느리를 잘 얻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녀는 아들이 왕의 자리에 앉는 모습을 당당히 지켜보았을까? 아니면 아들을 넘겨주고 생의 무대에서 퇴장하진 않았을까. 숨어서도 볼 수 없는 운명은 아니었을까. 무왕의 생모는 그 그림자가 남부여의 역사 속에서 진정 짧기만 하다.
그녀의 손자는 나라를 잃어버렸다. 외세와 손잡은 동족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의자왕은 궁남지의 포룡정에 올라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망해가는 나라의 운명 앞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으리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그리고 할머니의 그림자가 길게 깔려있는 연못의 물결을 슬프게 바라보았을, 그 마음을 더듬어본다.
나부끼는 버들가지 사이로 황포 돛을 달은 작은 배가 떠 있다. 그때 나라를 잃은 남부여의 백성들이 저렇게 생긴 배에 몸을 싣고 구드레나루터를 떠나 남쪽으로 노를 저어가며 한없이 울고 또 울었으리라. 그녀도 생과 사를 초월해서 어디선가 같이 눈물을 흘렸으리라. 손자의 패망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나라를 빼앗긴 원통한 백성들의 흐느낌은 궁남지의 버드나무 사이를 맴돌다가 차곡차곡 가라앉아서 천 겹의 진흙이 되었으리라. 누가 바지랑대 하나 들고 휘휘 저어본다면 잠자던 회한들이 공기방울처럼 솟아 올라와 저마다 입을 열 것만 같다.
지나간 얘기는 흩어져버린 구름과 같다. 다시 붙여 놓을 수도 없고 붙여서도 안 된다. 과거와 현재를 따로 볼 수가 없다. 천년의 세월로 날줄을 삼고 흥망과 성쇠로 씨줄을 삼아 짠 옷을 우리는 입고 살고 있다. 지금 이곳에 모여 슬픔과 기쁨을 같이 느끼고 있다. 선조들의 허와 실을 물위에 비춰보면서.
봄바람에 버들가지가 나부끼는 모습이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온다. 궁남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과거의 자취를 슬퍼할 수만은 없다. 모든 것들이 희망으로 싹을 틔우며 봄비를 기다린다. 연꽃뿌리들도, 창포도, 그때 떠올랐던 보름달도 모두가 방죽가에 살던 그녀의 얘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연못에 뿌리를 내린 식구들은 소박하면서도 겸손하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릴 줄 안다. 여기 물가에 살았던 그녀처럼.
2009년 4월 20일
첫댓글 고문님 편하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