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20세기의 명저 중 하나인 카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에는 중세 연구가로 유명한 바라클로Barraclough 교수의 다음 말이 인용되고 있다. “우리가 읽는 역사는 비록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만 엄격히 말해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련의 공인된 의견의 기록에 불과하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공인된 평가가 비판받거나 뒤바뀌고 있는 이 시점에서 바라클로 교수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역사가는 과거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사람이며 때로는 뒤집어보는 사람이다. 한국 현대시문학사를 근 3년여의 기간을 두고 한 권의 책으로 기획하고 집필한 것도 이와 같은 의도에서였다. 이 책의 기획 의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면 다음 네 가지이다.
첫째, 한 세기를 보내고 새 세기를 맞았으므로 이에 걸맞은 새로운 시문학사를 기술하자. 최남선이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1908년 즈음을 한국 현대시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이제 비로소 100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으므로 이 연륜에 해당하는 무게를 지닌 시문학사 책자를 만들자.
둘째,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 필자의 나이를 30~40대로 한정하여 보다 참신한 시각으로 문학사를 쓰도록 하자. 선배들의 연구를 참조는 하되 그 성과를 그대로 답습하지는 말자.
셋째, 191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시대적 특성을 고려해서 10년 단위로 구분해 집필하되 시문학의 흐름을 보다 구체적으로 반영해 1930~1945년까지를 한 시대로 하고, 1945~1950년까지의 해방기를 또 하나의 시대로 구분하자.
넷째, 해당 시대의 문학을 전공한 필자들이 집필하되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여 용어와 문체의 완전한 통일을 꾀하지는 말자. 각자의 자유로운 역사관 및 세계관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시문학사를 정리하자.
이러한 원칙을 갖고 집필에 들어간 결과 『한국 현대시문학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게 되었다.
「근대 이행기 한국 시문학의 특성」(이명찬)은 내부적으로는 봉건 잔재의 청산과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 침탈에 맞선 1910년대의 시문학을 ‘근대 이행기’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고찰하였다. 기존의 ‘개화기’라는 명칭은 외래적인 것의 수용만을 부각시킨다는 차원에서 지양하고, 우리 문화의 전통을 지켜내면서도 낡은 틀을 벗고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면을 강조하고자 ‘근대 이행기’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옛 시형의 지속과 변모는 가사와 시조를 통해서, 새로운 시형의 발견은 창가와 신시를 통해 정리하였다.
「근대 자유시의 정착과 이념적 분화」(전도현)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정치’ 속에서 우리의 민족의식이 확립되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근대 자유시 형식이 정착되고 본격적으로 전개된 사실과 계급주의와 민족주의로 양분되어 분화 과정을 보였던 한국 시문학의 전개 양상을 고찰하였다. 우선 1920년대 초반에는 박종화 · 박영희 · 이상화 등을 통해 암울한 식민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낭만주의적 경향의 시세계를 살펴보았다. 이어 20대 중반 이후의 시적 흐름은 신경향파에서 카프로 이어지는 계급주의 문학 운동과 전통 양식의 재인식 및 부흥 운동을 내세운 민족주의 진영의 문학 운동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이를 통해 뚜렷한 사회의식과 이념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프로시 운동, 그리고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전개된 민요시 창작과 시조부흥운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밖에 해외 망명지에서의 항일시와 당대의 집단적 조류에서 한 발 비껴서 있으면서도 탁월한 시적 성취를 이룬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에 대해서도 정리하였다.
「확대와 심화, 혼란과 좌절의 양상들」(김유중)은 1930년대와 일제 말 암흑기의 시문학사를 정리한 장이다. 필자는 일제에 의한 도시 중심의 기형적인 소비 형태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도시 세대의 새로운 감각과 정서에 관심을 갖고 프로문예운동의 변모, 서구 문예 사조의 본격적 유입, 지식 계층의 확산, 표현 매체의 변화 속에서 형성된 시들을 고찰하였다. 이와 아울러 임화 · 박세영 · 이찬 · 이용악 등의 계급주의 시, 정지용 · 김광균 · 이상 등의 모더니즘 시, 박용철 · 김영랑 · 신석정 등의 순수시, 서정주 · 유치환 등의 생명파 시, 박목월 · 박두진 · 조지훈의 청록파 시를 고찰하였다. 그리고 이광수·김기진 · 서정주 등 암흑기의 친일시와 윤동주. 이육사 등의 저항시도 살펴보았다.
「해방 직후 시의 전개 양상」(유성호)은 민족에게 다가온 광복을 어떻게 새로운 민족사의 전망으로 연결시키면서 자주적인 통일 국가로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시인들의 고민과 그 실천 방안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임화 · 오장환 · 여상현 · 유진오 등의 ‘조선문학가동맹’ 계열의 시인들을 통해 민족 주체의식을 강조하는 시세계를, 청록파 · 서정주 · 신석정 · 백석 등의 시인들을 통해 민족주의 혹은 전통적 서정주의를 지향하는 시세계를 함께 고찰하였다.
「한국 전후 시의 형성과 전개」(남기혁)는 6·25전쟁을 통한 시단의 재편성, 세대 교체, 전통주의와 모더니즘의 대립 등에 주목하였고, 서정주 · 박재삼 · 김관식 · 이원섭 등의 전통주의 시들과 박인환 · 김수영 · 조향 · 전봉건 · 송욱 등의 모더니즘 시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박봉우 · 신동엽 등을 통해 전개된 현실참여 시의 태동도 고찰하였다.
「4.19혁명 이후 우리 시의 유형과 특징」(문혜원)은 4·19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라는 정치적 소용돌이와 경제적 성장이라는 문제가 맞물려 있는 시대 속에서 논의된 시문학의 사회성에 관심을 갖고 김수영과 신동엽을 중심으로 시의 현실참여를 고찰하였다. 그리고 정진규 · 오세영 · 이수익· 김종해 등의 ‘현대시’ 동인을 통해 서정시의 변화를, 문덕수 · 이승훈 · 이건청 · 황동규 · 김영태 등의 주지적 경향과 언어의 실험도 아울러 다루었다.
「산업화시대 시의 모색과 발전」(이승하)은 유신헌법으로 인한 강압적인 정치체제와 경제개발 정책에 의한 산업사회로의 진입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토대로 해서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 등 계간지의 역할, ‘창비시선’, ‘문학과지성시인선’, ‘오늘의 시인총서’가 주도한 시집의 상품화현상을 살피면서 시사의 흐름을 정리하였다. 시인은 몇 개의 부류로 나누었는데, 예컨대 김지하 · 신경림 · 고은 · 이성부 · 조태일 · 정희성 · 김명인 · 정호승 등의 현실참여 시, 정현종 · 강은교 · 오규원 · 박제천 · 김형영 등의 자유정신 시, 임홍재 · 이유경 · 홍신선 · 이시영 · 박용래 · 김종삼 · 전봉건 · 박희진 · 이성선 · 조정권 등의 서정시, 신대철 · 이하석 · 김광규 등의 문명비판 시, 감태준 · 김종철 등의 소시민의식 시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또한 장르 확산, 전통 리듬의 수용, 현실 풍자, 연작시 유행 등 시 형식의 변화도 살펴보았다.
「광주항쟁 이후 시의 양상과 특징」(맹문재)은 후기산업사회에 등장한 노동자계급에 특히 주목을 하고 동인지 및 무크의 활발한 활동, 장시의 등장, 베스트셀러 시집의 출현 등의 현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박노해 · 백무산 등의 노동시, 김남주 · 기형도 등의 지식인 시, 이광웅 · 도종환 등의 교육문제 관련 시, 김용택 · 고재종 등의 농민시, 이성복· 황지우 등의 해체시, 조정권 · 최승호 등의 서정시, 고정희 · 최승자 등의 여성시 등으로 분야를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 노동시는 기존의 서정시가 추구하는 비사회적 혹은 반사회적인 세계관에 대해 부정하고 시가 추구할 수 있는 사회성을 최대한 담아내었다. 그 결과 1980년대는 시가 시대와 사회의 반영이라는 인식이 시인이나 독자에게 보편적으로 인정받았다. 흔히 1980년대를 ‘시의 시대’라고 일컬음은 시인들이 문단에서 수적인 면에서 월등히 앞섰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가장 열정적으로 담아냈음을 뜻하는 것이다.
「현대시의 풍경, 그 다원성의 미학」(고명철)은 1990년대의 시문학사를 정리한 것이다. 1980년대와 급격히 단절된 1990년대 이후의 현실 속에서 다양하게 펼쳐진 시의 풍경은, 인문학의 위기 또는 문학의 위기를 무색케 할 정도로 1990년대의 시문학사를 풍요롭게 채워 넣고 있다. 물론 현재 진행 중에 있는 1990년대의 시문학사의 풍경이 후대의 문학사가들에 의해 어떻게 평가될지는 미지수이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의 시문학을 중간 점검한다는 차원에서 민중시 · 여성시 · 생태시 · 신서정시 · 환상시 등으로 범주화하여 살펴보았다. 1990년대 민중시의 경우 1980년대식 민중시의 전통과 긴장관계를 갖는 바, 현실 속에서 빚어진 구조악과 행태악을 외면하지 않고 민중의 일상적 욕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여성시의 경우 가부장 중심의 근대적 주체의 파행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문제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생태시는 근대의 자본주의적 물신화의 삶을 넘어선 생태학적 상상력에 천착하고 있으며, 신서정시의 경우 낡고 고루한 서정시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현실에 대응하는 새로움의 진정성을 보이고 있다. 끝으로 환상시는 1980년대를 관통해오던 주체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타자의 타자성을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환상적 리얼리티를 통해 1990년대의 현실에 나름대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세기가 막 바뀐 무렵에 이승하와 맹문재, 문혜원 세 사람이 사당동에 모여서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였다. 우리의 목표는 한 권의 시문학사로서 손색이 없을 수준으로 책을 만들자는 원대한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원고를 쓰고 모으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어떤 연대의 경우 애초의 필자가 끝끝내 원고를 쓰지 못해 한참 뒤에 필자가 몇 번이나 교체되기도 했다. 시대 구분의 문제, 용어 사용과 장 · 절 나누기 등에 따른 통일성의 문제, 원고 취합의 문제 등 여러 가지 난관을 헤쳐 나오면서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새로운 문학관, 혹은 역사관이 확립되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아울러 북한의 시문학사를 반영하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책이 다음에 쓰일 보다 완전한 시문학사를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애써 위안으로 삼으며 앞으로 약점들을 낱낱이 보완하여 보다 참신하고 성실한 시문학사로 채워나갈 것을 약속드린다. 책의 틀 짜기는 세 사람이 했지만 맹문재가 원고 취합을 했고, 이승하가 머리말 쓰기, 책임 교정, 사진 수집 및 캡션 부기 작업을 했다. 각 연대의 대표시를 선정, 전문을 부록으로 실을 예정이었으나 양이 너무 많아 편집 과정에서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다.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는 출판계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출판을 기꺼이 맡아준 소명출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05년 봄
저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