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팔꽃 일기
아무리 추운 겨울에다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해도, 시절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이런 화사한 봄날을 가져다준다.
화창한 봄날, 토요일 아침이다.
그렇지만 별 일 없이 나는 아파트에 앉아있다.
문득, 누군가 날 찾아와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딱 잡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딱히 내가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그저 누구라도 좋으니, 오늘 지나가다 들르듯 나에게 놀러오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그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 그리 한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설사 한가하다한들 나 같은 사람을 찾아오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도 의문이고.
그래서 이렇게 화사하고 한가한 날에도 나는 맹맹하게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고 이 좁은 아파트 안에 처박혀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3. 24
봄빛이 가득한데도 나에겐 맹숭맹숭한 나날이 이어진다.
아,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데......
3. 26
시간 강사 강의를 끝내고 캠퍼스를 걸어 내려오는데, 갑자기 슬퍼지는 것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사는 게, 그저 슬펐던 것이다.
혼자 살아서 생기는 병일까?
3. 27
재미가 없다. 사는 게 재미가 없다.
재미로 사는 건 아닐지라도, 살아가는 재미가 별로 없다.
요즘의 내 삶이다.
오늘은, 이제 완전히 가버려 잊어버릴 것 같던 겨울 날씨였다. 요 며칠 내내 뿌옇고 나른한 봄날이 이어지더니, 갑자기 쾌청하고 쌀쌀한 날씨로 바뀌어 겨울을 방불케 했다.
글쎄, 차라리 이런 날씨가 나는 좋다. 맥 풀어지는 나른한 날보다 조금 긴장할 수 있어서.
이제 날이 저문다.
상쾌하고 아름다워서 설레기까지 했던 낮에 비교한다면,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밤을 맞는다.
이럴 땐,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은데......
3. 28
나는 화가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거론의 여지없이 화가로써의 작품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혼자 사는 나에게도 삶에 활력을 실어줄 뭔가 다른 요소가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 다음 쯤으로 중요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 사실, 오늘은 그 얘기를 하려고 글을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여행’을 생각하거나 그것과 연관된 얘기를 하려고 하면, 뭐랄까? 어쩐지 일반적인 다른 사람과는 다른 입장이거나 차원에서 다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니까 여행은 나에겐 뭔가 특별하게 먹고 보고 즐기는 ‘휴가’ 개념이 아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거나 어느 정도의 고통까지 수반된 ‘모험’ 같은 그러면서도 일상적인 자세로 받아들여야 할 숙명적인 일 같다는 것이다.
글쎄, 그런 걸 ‘역마살’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지독히도 그런 성향을 타고 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게 결국 나를 이렇게 혼자 살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어릴 적부터 나는 ‘울안’보다는 늘 어딘가 모를 바깥세상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성향은 시간 날 때마다, 특히 비 오는 날이거나 추운 날 등 밖에 나가지 못할 때 ‘지도책’을 펼쳐놓고 알 수 없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을 꾸는 행동으로 이어지곤 했는데, 그게 바로 내 여행의 시초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다 커 나오면서 슬슬 시작됐던 여행은 성인이 되면서 본격화되어 수시로 전국 여기저기를 살펴보듯 돌아다니다, 10 년쯤 전엔 또 해외로도 눈을 돌려 외국 여행을 하는 것도 모자라 현지 몇 나라에 머물며 살아보기까지 했고, 최근 한국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어딘가로 떠날 생각만 하는 식으로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런데 그렇게 내 평생 동안 해왔던 여행도, 남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안락하고 즐거운 게 아닌, 늘 뭔가 인내와 고통을 수반한 모험적인 게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요즘 희망을 실어주는 게 하나 있다. 아직도 그 실행 여부가 확실치 않아서 입에 담기 조심스럽긴 하지만, 사실은 올 여름에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가는 길(El Camino de Santiago)’을 걸어볼까 생각 중이다. 그건 즉흥적이 아닌 이미 지난해부터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일이기도 한데, 이제 더 이상 감쳐둘 수만은 없어서 여기 홈페이지에 이런 식으로나마 밝히는 것이다.
작년 여름이었다. 나는 이 홈페이지의 ‘스페인 여행’ 창을 유지 운영하는 한계점에 다다랐음을 깨닫고는, 겸사겸사 몇 년 만에 석 달 여정으로 그 전에 몇 년을 살았던 스페인으로 떠났다. 그런데 돌아오기 며칠 전 인사차 들렀던 호아낀(Joaquin)씨 집 식사에서 아들 호아낀(Joaquin)이(스페인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같은 경우가 흔하다.), 자신이 전해에 걸었다던 그 길에서 찍었던 사진 한 뭉치를 보여주면서, 길을 걷는 동안 얼마나 내 생각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는 말에,
“그게 무슨 소리야?”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시작된 일이다.
그는, 그 길이 나 같은 예술가에겐 무한한 작품에 대한 영감을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얻었다며, 날 다시 만나면 어떻게든 그 길을 걸어보라고 강력하게 추천하려고 벼르고 있었다면서 흥분까지 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 길은 프랑스 국경에서부터 스페인 북부 지방을 관통하여 서쪽 대서양 연안 ‘갈리시아(Galicia)'지방의 ‘산티아고(Santiago)’까지 800여 km를 걸어가는 ‘성지 순례길’이자 ‘도보여행 코스’인데, 그 전 내가 바르셀로나에 살 땐 그 게 기독교인들, 특히 광신도들만의 ‘순례길’인 줄로 알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는데, 호아낀에 의해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방랑길’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더구나 그 길의 ‘철 십자가’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마치 홀린 듯 끌려 들어가면서 지체 없이 떠나기로 정했을 정도의 ‘유혹의 길’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엔 귀국 날짜가 사흘밖에 남지 않아서, 내년에 가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며 한국으로 돌아왔었는데, 그 내년이 바로 올해다.
그런 걸로 보면 사실은 내가 바르셀로나 현지에 살 때 이미 했었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데, 당시엔 관심은커녕 ‘종교적인 순례길’이라며 부정만 하다가 한국에 돌아와 그것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상사병에 걸린 사람처럼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린 꼴이라 스스로도 머쓱하기도 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길이도 하다. 더구나 요 근래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만사가 귀찮은데도 그것만 생각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설레기까지 하니, 내가 미쳐도 보통 미쳐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이 사이트에는 내색조차 하지 못했던 이유는, 기본적인 생활마저 힘들어 하는 처지에 팔자 좋게 무슨 외유냐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비난조차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 아마 그런 이유로 일기와는 달리 내가 이 사이트에 독백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누군가 상대방을 느끼며 편지를 쓰듯 말을 해대는 거니까.
그런데 이제 이 사이트를 새롭게 이어가려고 작정한 마당인 데다, 지금 내 생활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는 그 일을 더 이상 속에 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표면화시키게 된 것이다. 사실 나에겐 여기에 그 사실을 밝히는 일도 상당히 부담스러웠는데, 이렇게 내뱉고 나니 오히려 속이 뻥 뚫린 것처럼 후련하기만 하다. 그래서 내가 이 사이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아무튼 올 여름에 내가 스페인에 가서 근 1,000km가 되는 그 길을 걷게 될 것인지는 스스로도 의문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그렇게 하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건 내 바람일 뿐 장담할 순 없는 일이니까.
아, 나는 몇 달 뒤 인생의 또 하나의 커다란 행사를 치르게 될 것인가.
행사?
그래, 행사다. 그 뒤로 나는, 그 일을 내 인생의 한 중요한 ‘행사’로 여기게까지 되었다.
3 . 29
오늘, 미친 듯 날씨가 변덕을 부렸다.
눈이 흩날리다가 바람 불다가, 다시 해가 뜨고 다시 눈발이 허공 가득히 산개하고. 그래도 나는,
‘멋진 날이군!’ 하며 날씨를 즐기기까지 했다.
때마침 대학의 전임으로 있는 한 고등학교 후배의 전화를 받았는데, 나는 그의 사회적인 지위가 날로 높아져 간다는 얘길 들으면서도, 어째 하나도 부럽지가 않은 내 자신이 오히려 이상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래서 생각해 보니, 비록 내가 그에게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다지만, 화가로써 열심히 내 작업을 하고, 또 ‘산티아고 가는 길’처럼 다소 생뚱맞은 여행에 대한 꿈도 꾸면서 내 멋대로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만큼 내가 인생에서 그런 여행의 비중을 크게 둔다는 뜻이기도 하다.(오늘 아침 여기 홈페이지에 그 뜻을 밝힌 것만으로도 이전보다 자신감이 붙은 기분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에게, 주제에 그런 허튼 꿈이나 꾸며 살아간다고 욕을 한다 해도, 나는 이 한 번뿐인 인생을 내 맘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는 말이다.
비록 내가 지금 하찮은 교통비 걱정까지 해야만 하는, 숨길 수 없는 ‘몽상가’이긴 해도.
3. 29
오늘 모처럼 유화 ‘섬진강 나루터’에 손을 댔다.
지난 2월 말, 불현듯 떠났다가 우연히 들렀던 섬진강의 한 나루터에서 다가왔던 영감을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간단한 드로잉으로 표현했고, 그 느낌이 좋아서 60호 크기의 캔바스에 유화로 옮겼던 것인데, 이미 보름 전에 초벌을 끝내고 물감 마르기를 기다린다며 작업을 멈췄던 게 어느새 2주가 훌쩍 지나도록 쉽게 다시 붓을 잡기가 힘들었던 그림이다. 그건 게을러서였다기보다는 내 약점인 부분적인 작은 터치의 묘사가 필요했던 시점이라, 또 그만큼 마음을 다잡고 정성을 들여야 할 작업에 선뜻 대들지 못했던 이유가 크다.
일단 미리 짜놓았던 물감이 다 말라버렸기 때문에, 작업에 앞서 새 종이 빠렛으로 갈고, 강물 색 위주의 물감 몇 개를 그 위에 새로 짰다. 그런 뒤, 긴장감을 늦추기 위해 평소처럼 PC의 음악을 틀어놓고, 심호흡까지를 한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위에서부터 강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절해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붓질을 하다 보니 그동안 손이 굳었는지, 이전의 좋은 느낌의 붓자국마저 자꾸만 죽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도 없는 일이라 또 잔 붓질을 하다 보니, 전체적인 색깔의 조화와 분위기는 좋아진 것 같았는데 조잡해진 면도 없지 않다 보니, 갑작스레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허기야 난폭한 걸 좋아하다 보면 섬세한 표현이 아쉽고, 섬세하게 표현하다 보면 난폭한 자연스런 맛도 죽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그렇게 상당히 긴장한 상태로 작업을 했는데도 마음만 앞섰을 뿐 그림은 결국 내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는 수 없었다. 오늘 채색했던 부분이 다 마르면 조금 더 수정할 수밖에.
남녘엔 벚꽃이 만개했다는데, 그 위로 함박눈이 내리는 이상 기후현상이 TV를 통해 나온다.
탐스러운 벚꽃 위에 떨어지는 눈송이들.
둘 다 아름다운 것들인데, 하나에 의해서 다른 하나는 처참하게 파괴되어갈 것이다. 결국 둘 다 사라져갈 것이다.
이 세상은 그렇게 미칠 수도 있으리라.
아, 나 역시 미쳐보고 싶은데, 차라리 미치고 싶어 미치겠는데, 미칠 일이 없어서 못 미치고 있는 건 아닌지.
어수선한 달 3월도 다 갔다.
마음만 어수선했지, 사실은 날 어수선하게 할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진 않았다.
3. 30
4월이 되었다.
점심을 먹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달력을 보게 되었고, 오늘이 일요일이면서 4월의 첫 날이란 걸 알게 되자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바로 일어나 나는 책상 서랍에 있던 나팔꽃 씨앗 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작년에도 화분으로 사용했던 스티로폼 상자 두 개의 흙을 파 엎어 고른 뒤 나팔꽃 씨를 심고 물까지 주었다.
나에겐 나팔꽃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이 아파트로 이사 와 처음으로 맞았던 작년 봄, 훵하기만 했던 베란다가 쓸쓸해 보여서 나는 여기서 머지않은 시골에서 나팔꽃 몇 포기를 얻어다가 심어 보았었다. 그런데 화분에서 자란 것이라 잎이나 꽃이 그리 크고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것들은 그래도 애기 손바닥만 한 이파리의 넝쿨을 뻗었던 건 물론 꽃까지 제법 피어 주는 등, 기대 이상으로 내 무료함을 달래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팔꽃은 푸른 넝쿨을 뻗어 올라가면서 직사광선 차단은 물론, 답답한 게 싫어서 베란다에 커튼조차 하지 않아 아파트촌 앞 동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 방의 발로써의 역할까지를 톡톡히 해내기까지 했다.
그러자 나를 찾아온 사람마다 그 모습에 탄성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 등, 심심풀이로 심었던 화초라기보다는 오히려 내 아파트의 명물로 자리를 잡았던 식물이다. 물론 작년에도 이 사이트에 그런 얘길 편지로 써서 올렸었는데, 내 컴퓨터 조작 미숙으로 작년 편지글을 다 날려 보냈기 때문에 이 사이트에서 그 얘긴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지만 그 모든 게 공짜로만 생겼던 건 아니다. 나팔꽃을 가꾸는 일도 상당한 정성이 필요했던 것으로,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한 바가지의 물을 퍼다 주어야만 했고, 한 번 뻗어가던 넝쿨은 그다지 높지 않은 베란다 천장까지는 금세 올라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면 어찌할 바를 몰라 고통을 당하는 것 같아 그러기 전에 가는 줄을 사다리꼴로 연결시켜가며 인위적으로 넝쿨을 좌우 지그재그로 길을 잡아주는 등 상당한 애정을 쏟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자, 훵- 했던 베란다엔 나팔꽃의 가느다란 줄기에서 하나 둘 생겨 나오던 이파리들이 이야기하듯 때로는 다정하고 때로는 앙증맞게 점점 촘촘하고도 생생하게 유리창을 덮어가는 아름다운 모습마저 연출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올해도 그걸 꿈꾸며 나팔꽃 씨를 심은 건데, 사실 작년처럼 올 해 역시 그 끝을 보지 못할 우려도 없지만은 않다. 물론 올해도 내가 스페인에 간다는 가정하에서지만.
그러니까 작년엔 나팔꽃을 심어 가꾸다가 중간 세 달을 스페인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 끝을 보지 못했던 것으로, 그렇다고 올해 역시 스페인에 간다는 가능성 때문에 나팔꽃을 심는 일마저 그만 두고 싶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적어도 스페인에 가기 전 두어 달 동안은 그 모습을 보고 즐길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올해 뿌린 나팔꽃 씨는 내가 작년에 바르셀로나의 ‘람블라(Rambla)’ 거리의 꽃가게를 지나다가, 이 아파트에서 나도 없이 살아 있을 나팔꽃이 그리워서 충동적으로 사온 스페인 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은, 그러고 보면 만약 올해도 내가 스페인에 간다면, 이 나팔꽃 역시 작년처럼 내가 다시 돌아올 땐, 거의 말라 비틀어져 줄기와 을씨년스런 이파리 몇 개만을 단 지저분한 모습으로 뎅그러니 남아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팔꽃이 그런 모습으로라도 나를 기다려주기만 한다면,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으면서도 이따금 이 나팔꽃을 그리워할 게 분명하다.
4 . 1
어제는 하루 종일, 정말 하루 종일,
지루하게도
세상은 음산한 안개에 젖어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정말 하루 종일,
단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지루하게
아파트에서 하루를
다
보냈다.
좁은 방에서 음악을 켰다가 껐다가
TV를 켰다가 껐다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일도 없이 서성이기도 했다.
천장을 뚫고
지붕을 뚫고
이 세상을 뚫고
어딘가
밖으로 뛰쳐나가고도 싶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단 한통의 전화도 없었던 이 세상에서
나는
어디
갈
데도
없었다.
4. 3
모 대학의 교수임용에 몇 사람의 지원자로부터 수억 씩의 돈을 받아 챙긴 대학의 관계자가 쇠고랑을 찼다는 뉴스가 들린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한편으론 통쾌하고 또 한편으로는,
‘놀고 들 있네, 겨우 그 정도 가지고?’ 하는 냉소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그 보다 더 많은 돈과 연루된 비리가 있었고, 또 이렇게 밝혀진 일들이라고 해봤자 ‘빙산의 일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밉살스런 내 대학 동기 하나도 모 대학의 교순데,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내가 아는 사람의 논문을 베껴 썼기 때문이다. 난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과히 충격이었다. 허긴 그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도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소리와 함께 유독 교수들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었는데, 대학원을 다닌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교수가 됐고 이따금 대학 동기들 모임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거기서 까지 교수행세를 한다고 동기들의 눈총을 받곤 했는데, 최근엔 나도 그를 보면,
“니 논문이 어떤데?”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는 걸 참으면서도, 이럴 때마다는 또,
“너는 얼마의 돈을 주고 교수가 됐냐?” 묻고 싶어져서 하는 말이다.
물론 내가, 40대 중반이 되도록 몇 차례 교수 임용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사람으로써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대상도 없는 원망이거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한 임용자에 대한 질투이자 시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는 현상에 화가 치밀기도 하거니와, 그런 사람들이 교수랍시고 가르치는 대학이 걱정스러운 데다, 어쩌면 나 또한 그런 비리의 희생자일 수도 있기 때문에 결코 무심할 수만은 없고 약까지 올라 지껄여보는 소리다. 더구나 이젠 그런 일을 포기했기 때문에 관심조차 갖지 않으려 하지만, 매스컴에서 이렇게 떠들어대는 데야 아예 안 들은 척 넘길 수도 없어서 하는 소리다. 그러자니,
‘잘들 논다. 나는 그런 데에 갖다 줄 돈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늘에 두고 장담하지만 그런 일에 추호의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다!’ 라고 그런 부류를 싸잡아 비판하면서 스스로 청렴하다는 것이나마 강조하며, 그러면서도 허탈해서 큰소리라도 쳐보고 싶은 것이다.
허기야 나는 이런 얘기를 그 누구와도 나눈 적이 없고, 설사 그런 자리에 끼어 있었다 해도 그저 듣기만 할 뿐 대화에 끼어들 시도 자체를 않는 것으로 일관해왔던 사람인데, 그런데도 내가 이 사이트 안에서 이렇게 씩씩대는 것은, 이런 얘기가 들려올 때마다 왜 그런지 여전히 가슴이 아파 와서, 내 개인 홈페이지에나마 답답한 속마음을 털어버리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독백을 하면서도 왜 자꾸만 누군가의 눈치를 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글쎄, 비록 거짓은 아니지만, 나 같은 사람까지 나서서 교수 세계를 싸잡아 돈으로 사고판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럴 텐데......
에이!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매스컴에서 떠들어대서 거기에 동조했을 뿐이니까. 게다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나만의 공간인데 왜 남을 의식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런 자유마저 없다면, 내가 왜 이 ‘독백’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겠는가 말이다. 어차피 나에겐 내 얘기를 들어 줄 ‘가상의 대상’이 필요했던 거고, 여기가 바로 그런 공간인데 말이다.
대학교수?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우스꽝스럽지만, 난 교수가 되려고 목을 맸던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굳이 이런 얘기까지 하는 이유는, 설사 내가 교수가 되었다 해도, 오래지 않아 그 일을 그만두려고 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그렇다면 내가 왜 교수임용에 지원했는지도 밝혀야 하는데......
꿈도 야무지게 나는, 기본적인 생활 보장은 물론 많은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최상의 대우를 받는 ‘교수라는 직업’을 이용해 미국에 가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가난한 화가인 나는 재산도 일정한 수입과 공식적인 직장도 없어서 미국행 비자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몇 년 동안 교수직으로 일을 하다 보면 비자는 물론 일정기간 미국에서의 체류 여비까지도 마련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으로 교수직에 덤볐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교수에 임용될 수 있었겠는가. 온갖 정성을 다 들여도 될까 말까 할 어려운 직장인데, 사명감은커녕 미국 가려는 중간 다리로 이용하려 했던 내 얄팍한 행동이었으니 떨어진 건 당연한 거고, ‘대학 교수도 못 된 주제에......’ 하는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할 말은 없다.
그렇게 그것 역시 얼마나 내가 세상 물정에 어두웠는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해준 일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아예 다 포기하고 마음 정리까지 해버린 상태다. 다만, 이 나라의 현실이 안타깝고, ‘교수 세계’가 나와 전혀 무관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나마 허허롭게 지껄여보는 거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만 할 건, 내가 지금 한 대학의 시간강사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수 세계에 대고 큰소리쳤던 것이 더욱 찝찝했던 건데, 이 일 역시 내가 큰 미련을 두고 하는 게 아니란 변명은 하고 넘어가야겠다.
‘오죽하면 여북하랴?’ 는 말처럼, 나는 이 강사 일로 입에 풀칠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지 어떤 큰 사명감을 갖고 임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자니 또, 무엇보다도 지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수업마저 대충 넘기는 사람은 아니고 또 학생들 역시 내 수업을 억지로 듣는 게 아닌 것으로 알기 때문에, 거기서나마 다소의 위안을 삼기로 하겠다.
그런데 더 이상 이 얘길 하다 보면 자꾸만 세상이 서글퍼질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다.
대학 교수?
하 하 하.
나는 예술가다. 대학교수가 내 인생의 목표는 이미 아니었다.
4. 3
내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
지금 하는 일에서 얻는 수입만으로는 생활하기가 어렵다.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내가 아무리 돈을 아껴 쓴다고 해도 기본적인 생활하기에도 급급한 수준이라 그 외의 지출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나는 올 여름 스페인행만 생각하며 산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 삶이 답답하기만 한데, 그렇다고 당장 어떤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 뭔가 일을 꾸미기도 하고 서로 도와가며 살아간다. 그런 식으로 그리고 매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몇몇 있고, 또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는, 역시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살아야한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그런 걸 빤히 알고 있고 정작 기본적인 생활마저도 힘들어 하면서도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을 만나 일을 꾸미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사람 만나는 것도 점점 피동적으로 바뀌는 추세이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가는 것 같다. 거기에 내 문제가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기는 하지만.
물론 나 역시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살아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껏해야 나를 찾는 사람에게 호응해주는 수준에서의 만남이었을 뿐, 스스로 사람을 찾아 나선다거나 사무적인 일을 만드는 법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내 삶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아니, 불평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빤히 알기 때문에 불만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게 내 생활에 위협이 되는 일이라는 걸 너무 잘 알면서도 참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내 자신이 무기력하고 답답해서 미치겠다. 나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가는 방법을 바꾸려하지 않는다.
그래설까?
내가 아는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숨어 사는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사실 나는 떠들썩하게 사람 앞에 나서는 걸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긴 하다. 그렇지만 그건 내 필요에 의해 누군가를 찾아 나서지 않는 것일 뿐, 일부러 숨어사는 내 모습이랄 순 없다. 나도 가끔씩은 그립거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연락해서 만나기도 하니까.
어쨌든 좋다.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숨어 사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에 어설픈 것이지 스스로 숨어 사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리고 내 스스로도, 숨어 살도록 정마저 없는 사람이라고는 믿지 않으니까.
4. 3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세 번씩이나 독백 글을 써 올려놓은 꼴이다. 이 글까지를 합하면 네 개가 된다.
물론 어제 쓰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가 는 것이기는 하지만, 또 다시 살펴보니 그 하나가 다른 하루치보다 더 긴 것 역시 놀라운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렇게 했는데도 아직도 내 가슴이 후련하지 않은 걸로 보면, 오늘은 정말 누구라도 붙잡고 하염없이 하소연을 늘어놓고 싶었던 하루였던 것 같다.
아무튼,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러기 위해서 이 홈페이지가 필요한 것인데, 교수 문제를 얘기한 두 번째 글에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나 자신도 헷갈리기만 하다. 내 자신을 탓하는 건지 아니면 홈페이지에 던져놓는 글이라 뭔가 변명을 하려고 말을 돌리는 것인지 다소 애매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내가 맘에도 없는 말을 한 건 아닌데, 아니 하고 싶었던 말을 속 시원히 한 거나 다름없는데 여전히 씁쓸한 뒷맛도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물론, 하지 않았던 것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에 나쁘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근데 어쨌거나, 그전에는 글을 며칠 만이거나 또 한 달에 두어 번 올릴 때도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바뀐 것이 자못 신기하기까지 하다. 글 한 번 올리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근데, 그건 좋은 일일까? 아니면 심리적으로 지금 내가 불안하다는 뜻일까.
허기야 내가 힘에 부쳤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인데, 이렇게 하루에 세 번씩이나 업로드시키면서까지 홈페이지에 매달려 있었던 걸 보면, 더구나 마음도 웬만큼 후련해진 걸 보면 하지 않았던 것과는 비교할 바가 아닌 것 같다.
그래, 내가 하루에 한 번씩 올리자고 작정한 것도 아니고, 또 하루에 몇 번씩 글을 올리는 게 안 된다는 규칙을 세워놓은 것도 아니니 하루에 열 번이면 어떻고 스무 번이면 어떠랴? 내 맘 내키는 대로 하면 된다.
어차피 이렇게 따로 또 홈페이지에 올리지 않는 글을 쓰는 것 역시, 내 마음 따라 하는 짓이니까.
4. 3
환율이 올라가면서, 달러에 비해 우리 돈의 가치가 자꾸만 떨어져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걱정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하겠답시고 안달인 나는, 요즘 환율에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쪼들리는 형편인데, 우리 돈의 가치가 이렇게 떨어지면 외국에 나가 쓸 경비도 그만큼 더 늘어난다는 거고 마련하는 일 역시 점점 더 힘들어 질 거라는 얘기라. 더구나 이 번 스페인 행은 거의 석 달을 꼬박 돌아다니며 숙식을 해야 하는 일인데, 정작 실제적인 돈 문제는 아직까지 뭐 하나 준비된 게 없는 실정이다 보니, 나는 그걸 생각하며 행복해 하면서도 또 그것만 생각하면 동시에 기가 팍 죽는 두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 스페인 행을 보다 신중하고 조용히 추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내가 그 길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던 몇몇 친구들은 대부분 아니 모두는 나를 여간 부러워하는 걸로 그친 게 아니라, 가능하다면 나와 함께 떠나기라도 할 태세까지 보이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거의 모두가, 그건 비단 한국 사람뿐만이 아닌 내가 알던 미국이나 영국인 영어회화 선생들까지도, 평생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일을 해보고 싶어 할 정도로 갈망하기도 한 일이어서, 내가 이런 식으로 떠들고 다니다 보면 조용히 사는 그들을 자극하거나 약을 올릴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힘들게 사는 한국인에겐 꿈같은 일일 수밖에 없는 일이라서.
직장과 가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나처럼 이렇게 훌쩍 떠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돈이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외국에 나가 근 3개월 동안 떠돌이처럼 걸을 시간을 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선 가능하면 그 얘길 꺼내지 않으려 한다. 부러움을 사는 것도 즐겁지 만은 않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도 아직 준비가 안 된 데다 혹시 못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미리부터 동네방네 떠들어대는 게 우스꽝스러울 거라는 판단에서다.
어쨌든 나는 지금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스페인 친구들과 그 길에 대한 정보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길 떠날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기분만 내고 있는 꼴이지 실제적인 면에선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다.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고, 그 핵심은 ‘돈’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돈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자유마저 자유롭게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안타깝기만 하다.
4. 4
오늘이 수요일.
지난 금요일에 나갔다 온 뒤 5일 동안 꼼짝하지 않고 아파트에 처박혀 있었다. 그랬더니 세상과 뚝 끊긴 기분이다.
베란다의 커다란 창을 통해 멀리 아파트촌이 보이고, 그 아래 이 아파트 앞동산의 아직 새싹이 돋지 않은 나목들 위로는 구리로 가는 고속도로도 보이는데 차들이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그런데 나에겐 지금, 넘어가는 밝은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반짝이는 그 아파트 군의 모습과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차들의 모습까지도 까마득한 꿈속 같기만 하다.
나갈 일은 없지만 굳이 나가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건, 아파트에 처박혀 사는 생활에 내가 익숙해져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날씨 변화가 심한 철이라, 만약 지금 외출한다 해도 난 어떤 옷을 어떻게 입어야할지 한참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요즘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조차 잘 모른다는 것이다.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식으로 며칠을 지내다 외출했다가, 나만 계절도 잊은 듯 철지난 옷을 입고 있어서 낯이 뜨거워지도록 당황했던 적도 있었다.
아무튼,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걸까? 한창 일하고 한창 세상과 싸워야할 나이에, 그것도 활기가 넘치는 4월에......
내 인생의 수많은 날들 중 한 일주일이 이런 식으로 가고 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보내고 있다. 아파트 안에 처박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잊어진 상태로, 아니면 마치 잊어지길 바라는 사람처럼.
4. 4
청소년들의 흡연율이 85%로 성인들의 64% 보다 훨씬 앞선다는 TV보도가 있다. 그러면서 흐린 그림으로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의 담배 피는 모습까지를 보여준다.
참 큰일이다.
담배 피는 일이 큰일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나라가 이런 식으로 변한 것인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담배 핀다는 일을 도덕이나 예의에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우리네가 가지고 있는 정서로 보아도, 그렇게 어린 학생들이 더구나 여학생들이 그것도 교복을 입은 채로 담배를 핀다는 건 도무지 고운 시선을 던질 수 없는 일 같다.
허기야 어디 중고등학교 뿐이랴? 내가 요즘 시간 강사로 나가는 미술 대학의 여학생들이 캠퍼스 여기 저기 오픈된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는 건 너무 일상적인 일인데.
그러고 보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나에게도 그런 류의 예가 하나 있다.
얼마 전 강의에 나가느라 조금 서둘러 캠퍼스를 지나가는데, 바로 내 수업에 들어오는 외모가 출중하면서 청순하고 여리게 보이던 여대생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잔디밭에서 너무나 태연하고도 무심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과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당황했던 건 물론, 심한 배신감에 갑자기 그 과의 수업이 있던 강의실에 들어가기조차 싫어지는 것이었다. 비록 생계수단으로 나가는 시간강사지만, 그래도 재미도 있고 보람도 느끼던 수업이었는데, 순간,
‘이것도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순 없었고.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강의에 들어가긴 했는데, 내 못된 성격은 수업 중에도 가능하면 그 학생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고, 그 뒤로도 눈길을 주는 것조차 피하곤 했다. 그러다 어쩌다 캠퍼스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차라리 내 쪽에서 외면해버리기까지 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나의 아주 못된 ‘에고’다.
그런데 하물며 중고생이, 그것도 여학생이 학교에서 담배피우는 것을 어찌 내가 볼 수 있겠는가.
그러다 보니 예고 교사직을 그만 둔 게 너무 잘한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만약 아직도 현직에 머문다면, 어떻게 요즘 아이들의 그런 꼴을 볼 것이며 또 그에 따른 갈등을 감당했을까.
글쎄, 천만 다행인지 내가 일을 했던 몇 년 동안은 그런 일이 없었다. 아니,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내가 운이 좋아서 그런 꼴을 직접 보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나 역시도 아직 교직에 있다면,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 듯 어떻게든 나도 그 상황에 맞춰 견뎌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든다. 지금 내가 시간강사 일을 하고 있듯.
어쨌거나 그런 날 보고 고약한 성격의 소유자라거나 쾌쾌 묵은 구세대라고 해도 하는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이제 난 어쩔 수 없는 구세대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난, 담배 피는 여자는 싫어한다. 오죽했으면, 외국에 살면서도 담배 피는 여자는 가능하면 상대하지 않으려 했었으니까.
아무튼 큰일이다. 그리고 싫다. 그런,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난무하는 세상이 싫다. 누구에게 원망할 수조차 없는 이 세상의 현상이긴 하지만.
그래서 짜증이 난다. 어떤 때는 대상도 없이 울화가 치민다.
나라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은, 내 스스로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4. 5
오늘, 식목일이다.
나에게 땅이 있다면 묘목 몇 그루를 사다 심어보고 싶다. 매화나무나 대추나무, 또는 살구나무 같은 유실수를 심고 싶다. 아무래도 열매나 꽃을 바랄 수 있는 것이 덜 심심하고, 뭔가 기다림이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이런 십일 층이나 되는 아파트에 사는 나에겐 그저 꿈같은 일일 수밖에 없다.
나는 나무 한 그루 가꾸며 살 팔자도 못 되나보다.
4. 5
며칠 전 갑자기 생활의 숨통이 콱! 막혀버렸다. 그런 즈음에 쌀이 떨어졌고, 다른 식료품도 하나 둘씩 떨어져 갔다. 그래서 나는 요즘 며칠을 감자나 달걀 등으로 식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아니, 그 사이 오랫동안 씽크대 찬장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라면도 하나 둘씩 먹게 되어, 요 며칠은 거의 날마다 점심은 라면을 먹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평소의 나는 라면을 거의 먹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사실 그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이미 기한이 지난 돈인 ‘시간 강사료’가 들어오지 않아서다. 그렇다고 대학 측에 독촉할 수도 없고 해서, 요즘 근근이 내 하루하루를 그렇게 연명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요즘, 그 어떤 지출도 없이 오직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에너지 공급만으로 삶을 유지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로 만 일주일 째 밖에 나가지 않은 상태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들이 ‘수학 여행’을 갔기 때문에 이번 주에는 나갈 일도 없어서다.
4. 6
경기도 평택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늙은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자녀들에게 강제로 부모를 부양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도 안 지킬 경우엔 재산이나 봉급을 강제로 압류할 거라면서.
그 뉴스를 접하면서 나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반면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서글픔도 함께 한다.
그 얘긴 그렇다 치고, 내 자신으로 돌아오자.
나는 어떤 자식일까?
사실, 나는 그런 자식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아니다. 비록 외국을 떠돌고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못 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언제라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어 했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젠 양친 모두가 돌아가신 뒤라 그런 기회마저 없어졌지만 나는 늘 부모님은 내가 모시려고 했던 건 분명하다. 허기야 과거 일이라 이렇게 쉽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선지 어디선가,
“다 지난 일, 말로는 무슨 얘길 못할까?” 하는 말이 들리는 듯도 하지만, 내가 헛말을 한 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난 막내였고 대학 졸업 후 미술학원 강사로 일도 했지만 스스로 집을 가질 수 없도록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를 모실 수 없었다. 그러다가 모 예술 고등학교의 교사로 채용되어 자리를 잡아가면서야 겨우 시내에 전세방을 갖게 되었고, 그제야 당시 혼자 남아 계시던 어머니를 안정되게 일정기간 모실 수는 있었다. 물론 아버지는 그 훨씬 이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런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나는 아직 노총각이었기 때문에 혼자 밥을 끓여먹고 사회생활 하는 것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날 거두셨던 거지, 내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어릴 적부터 늘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왔던 나지만, 또 어릴 적부터 너무 독립적이면서 또 역마살이 낀 천성 때문에, 그 와중에도 나는 어딘가로 늘 떠날 생각만을 하고 살았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좋은 아들이었다면, 그 당시는 안정된 직장도 있었고 혼기가 꽉 찼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 안정된 가정을 이루며 계속 어머니를 모셔야만 했는데,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는 말이 더 맞다. 왜냐면 남들이 부러워하기도 했던 직장에다 또 누구 못지않게 직장 생활도 잘 했다는 주변의 칭송도 자자했는데도, 그놈의 역마살로 결국 나는 훌훌 먼 나라로 떠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일을 감행하면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 역시 어머니의 허락을 받는 일이었는데, 처음엔 놀라셨던 어머니도 결국은 담담하게 내 뜻에 동조해 주시는 결단력을 보여주셨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당부 말씀도 잊지 않으셨는데,
“파란 눈의 며느리는 데려오지 마라!” 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끝내는 그것을 지켜냈다. 그런데 그건 결국, 나이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일로 이어졌고, 그 와중에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이제 3년이나 돼 가는데, 나는 결혼에 대해선 잊고 사는 중년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이제와 돌이켜 보면, 굳이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스페인 현지에서 있었던 두어 번 연애사건 중 고민하고 자제했던 일들이 오히려 어머니께 불효를 저지른 결과로 남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외국에 체류 중에도 언제라도 어머니를 내가 모실 거라고 여전히 장담을 해댔으면서도, 그러지 못한 건 물론 평생 호강 한 번 시켜드리지 못한 채 어머니를 떠나보낸 것에 대한 회한도 깊기만 하다. 그리고 만약, 설사 어머니가 지금 살아계신다고 해도, 아직까지도 나는 어머니를 부양할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는 현실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어떤 이들은 이미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리를 잡고 살아갈 나이에, 나는 말로만 부모님 공양 운운하며 평생 입방아를 찧었으면서도 내 한 몸 추스르지도 못하며 살고 있는 못난 자식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남 얘긴 할 게제가 못된다.
4. 7
아침에 물을 줄 때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는데,
“어?”
점심 무렵에 우연히 베란다에 나가 스티로폼 상자를 바라보는데, 뭔가 변화가 눈에 띄어 나는 소리까지 질렀다.
일주일 쯤 전에 심었던 나팔꽃 씨앗 하나가 검은 껍질을 머리에 인 채, 흙을 뚫고 나와 있었던 것이다. 노란연두색 싹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하나 뿐만이 아닌, 두세 개가 더 낮은 모습으로 흙을 뚫고 나오고도 있었다.
허, 이놈들 봐라! 결국 싹을 틔우는구나.
일단, 기뻤다. 뭔가 희망적인 기운이 내 온몸에 좍 퍼져오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참을 그것만을 바라보고 쭈그린 채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한 순간,
‘내가 이렇게 너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면, 얘들이 무서워하거나 또는 부정 타서 나오는 걸 멈추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못 본 척해주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음악을 틀었다.
바로 컴퓨터 Mp3 음악에선 맨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가 흘러나왔고, 나는 그 멜로디를 흥얼대면서도 슬쩍슬쩍 나팔꽃에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4 . 8
며칠 전, 내 메일 박스에서 이상한 메일 하나를 발견했다. D메일이었는데, 생각치도 않았던 전혀 생각치도 않았던 국민학교 시절 여자 친구한테서 온 것이었다.
순간, 당황하다 못해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까지 했다.
국민학교 고(高)학년 2~3년 동안 나는 온통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가 졸업과 함께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중학생이 되었던 어느 날 시내 한 골목에서 우연히 그녀와 마주쳤다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말을 걸기는커녕 얼굴이 화끈거려 도망치듯 씽씽 지나쳐, 그 길로 ‘월명산’ 공원도 넘어 바다가 잘 보이는 ‘대머리산’(나는 그 산 이름을 정확히 몰라, 그렇게 부르곤 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 가슴을 치고 후회를 한 것도 모자라, 정말 두고두고 후회를 했다.(지금도 그 생각이 나면, 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에 ‘내가 왜 그랬던고?’ 하는 식이다.) 그리고 정작 이성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지고 그리워 할 고등학교 시절에도 3년 내내 그녀를 그리워하기만 했을 뿐, 단 한 번 만나 얘기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일방적인 짝사랑만 했었는데, 그런 그녀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던 것이라.
그런데, 사실 나는 D회사의 ‘사람 찾기 프로그램’에 정식으로 가입신청을 했던 사람도 아니다. 언젠가 나에게 놀러왔던 한 고향친구가, 동창생을 찾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면서 날더러도 신청해 놓으라고 권한 적이 있었는데...... 그렇지만 그런 일에 별 관심이 없던 나는 싫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자기가 해놓겠다고 내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뭔가 하던 건 기억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때거나 또 그 뒤로도 나는 그 일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고, 이젠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녀의 메일이 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아들 딸 하나 씩을 둔 40대 엄마가 되어 있다는 그녀는,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조심스럽긴 해도 옛 친구가 그리워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달라면서, 서로 궁금한 것들이거나 그런 마음의 교류나마 해보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유럽에 사는지, 맨 아래엔 ‘프랑스 빠리에서’라고 적혀있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니,
‘할려면, 그 때 내가 애닳 때 하지?’ 하는 투정어린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그게 다 무슨 말라비틀어진 생각이란 말인가?’ 하고 말았다.
물론 나 역시 최근에 인터넷에서 유행한다는 그런 얘기를 이따금 매스컴을 통해서거나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전해 들었던 적은 있다. 그렇지만 그냥 다른 사람들의 얘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나에게까지 그런 일이 생길 줄은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춘기 시절 몇 년 동안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여자한테서 그런 메일이 와 있다니.
그 즉시, 갈등이 시작되었다.
답을 해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답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 또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을 해도 이상할 것 같았고, 하지 않는다 해도 뭔가 찝찝하긴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나는 차츰 답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혀 갔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이트의 동창회 명부에 올려져 있던 내 이름을 아예 삭제해버리기까지 했다.
‘또 다시 그녀에게서 메일이 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미련과 우려를 동시에 해대면서.
그러나 다행히, 그 뒤로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다. 그러니까 그녀도 그 사이트에서 내 이름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을 것이고, 그러면서 당연히 내가 그런 걸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끝날 수도 있었고, 또 끝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야박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안해 하지 않도록 최소한, ‘그러지 말자’ 라는 한 줄의 짧은 메일이라도 보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는 미련도 생겼다. 비록 다 지난 일이지만, 한 때는 내 모든 걸 걸고 사랑해보고 싶었던 여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단 번에 그리고 쉽게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내가 그녀에게 이런 묵묵부답의 방식으로 거절한 건, 지금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한 가정의 핵심인 그녀의 삶에 내가 연루되어 어떤 흠집을 남길 소지를 아예 없애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즘 간간히 들려오는, 이런 인터넷을 통해 동창들끼리 찾고 만나는 과정에서 벌어진다는 잡스런 얘기가 우리라고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테니까.
4. 8
비록 조그맣긴 해도 어제 싹을 낸 나팔꽃은 하루사이에 양쪽으로 두 개의 떡잎을 내 뵈고 있다. 그 나머지 녀석들도 씨앗 뚜껑을 떨쳐버리려고 용쓰는 모습인데,
아,
생명은 자생력 만으로 이 세상에 그렇게 빠르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거참!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더니, 나팔꽃 씨를 뿌려 놓았더니 신기하게도, 정말 나팔꽃이 나오는 게로구나.’
나는 너무나 당연한 현상을 마치 커다란 진리라도 깨달은 것처럼, 감탄하기까지 했다.
유화 ‘섬진강 나루터’의 물감이 말라 있어서, 저녁을 먹은 뒤 다시 손을 댔다. 많은 색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색깔의 변화가 아예 없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다양한 색깔의 물감도 짜야 했고, 그만큼의 붓도 필요했다. 게다가 원근에 따른 물결 위의 산 그림자에도 공간감이 느껴지도록 색감의 차이도 줘야 하는 섬세함까지 요구되는 그림이라서, 물결의 방향까지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런 섬세한 작업이 힘에 부치다 못해 귀찮기까지 했다.
‘무슨 일일까?’ 스스로도 의아해 하다가,
‘작업하는 데도 갱년기가 있나?’ 하는 생각까지 했지만, 어쩌면 내 심리 상태가 평안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 자가진단을 내리는 걸로 넘기기는 했다.
작업하는 데에도 나이와 체력이 관련되나 보다.
4 . 9
내가 오랫동안(며칠이지만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이 4월에 그것도 일주일 여, 아니 열흘 쯤이라면(‘개교 기념일’과도 겹쳐 강의가 없어서 그건 분명히 오랫동안이니까.)) 아파트에 처박혀 있어서였는지, 오늘 밖에 나갔더니,
아!
세상은 온통 꽃 천지였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살구꽃, 목련 등.
어쩌면 ‘꽃 피기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아니면 함께 피자고 자기들끼리 단합대회라도 열었던 것처럼, 많은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있었다. 더구나 어제 오늘, 초여름 같이 기온이 높아서 어느 새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도 제법 눈에 띄는 날씨이다 보니.
그런데 나는 그 꽃들에게 조금 섭섭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만약 내가 오늘 밖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많은 꽃들이 피어있는 줄도 모르고 계속 아파트에 처박혀 세상과 동떨어져 살아있을 것이라는 소외감 때문이기도 했다. 더구나 일기예보로는 오늘 밤에 비가 올 거고, 내일은 다시 오늘보다 10도 정도 낮은 기온이 될 거라니, 그러면 저 피어난 꽃들은 비바람에 다 날려버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 그렇다면 더더욱 만약 오늘 내가 나가지 않았더라면 이 꽃 천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이 봄을 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꽃들도 당황할 것 같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변하는 날씨 때문에, 늦었을 거라거나 이른 것 같기도 해서 언제 꽃을 피워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을 테니. 어쨌거나 그렇게 애써 꽃을 피워놓긴 했는데, 하늘은 찬비를 내리거나 또는 비바람을 몰아쳐 저 아름답게 피워 놓은 꽃들을 유린할 것이라.
그러게, 하늘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저 꽃들은 알고 있는지.
4. 10
지금, 꼭 일요일 아침 같은 느낌이다.
밖에 나갈 일은 없고, 아파트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앉아 있노라니, 휴일인 것처럼 느슨한 기분이 들어서다.
허기야, 내가 그렇다고 이 세상 모두가 그럴 리는 만무하지만.
어제 비가 내렸고, 오늘은 갠 봄날이다. 물기에 젖은 나무들은 연한 색깔로 봄을 얘기하고 여기저기에 꽃들도 울긋불긋 피어있다. 저 아파트 뒤에 보이는 ‘봉화산’의 나무들도 물이 올랐는지, 엊그제와는 색깔 자체가 사뭇 달라져 있다.
평화로운 봄날 아침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다 바쁘기만 한데, 나는 이렇게 한가로운 것도 모자라 맨날 어딘가 떠날 생각만 하고 있으니.
4. 12
살다 보면 모든 게 귀찮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을 때도 있다. 지금이 그렇다.
아침인데, 밝은 해가 떠오르는 상큼한 아침인데도 왠지 모든 것이 귀찮기만 하다.
제일 먼저 싹을 틘 나팔꽃은 떡잎 두 개가 앙증맞은 모습으로 붙어있는 듯하더니, 이제 그 떡잎 사이에 깨알 같은 본 잎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조그만 점 같은 것이 커서 창을 덮는 잎이 된단 말이지?
스티로폼 상자에 열 개도 더 되는 씨를 심었던 것 같은데, 그 중 네 개만이 싹을 낸 상태다. 그런데 스페인 산인 고 놈들은 그 떡잎부터가 날카롭고 전투적으로 이렇게 여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나팔꽃의 성장이 작년에 비해 더딘 것 같다.
어제는 흙(소조) 작업을 했다. 점심을 챙겨 먹고 시작했는데 작업을 끝내고 보니, 저녁 일곱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섯 시간 이상 흙을 가지고 놀았던 셈인데, 시간이 그리 빨리 지나간 줄을 정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이 다 빠진 건 물론 어찌나 배도 고픈지, 밥을 챙겨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했다.
그 일로 밤에도 축 늘어져서, 어젯밤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잠자리도 일찍 들었는데, 오늘 아침엔 또 그만큼 일찍 일어날 수밖에.
채 여섯 시가 되기도 전에 눈이 떠졌던 것이다.
오늘도 나갈 일은 없다. 내 스스로 뭔가 일을 만든다면 어떻게든 나가기야 하겠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그럴 것 같지가 않아서 하는 말이다.
아무런 의욕이 없는데 나간들 뭘 하겠는가.
해가 많이 길어져 있다.
일찍 뜨고 늦게 지고, 그만큼 낮에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는 얘기이기도 한데, 나는 이렇게 나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사실, 어젯밤 잠자리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가인데, 그냥 혼자 이렇게 아파트에 처박혀 조그만 작업이나 하면서 살아가도 될까? 물론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 나쁠 건 없지만, 이런 식으로만 살아도 될까? 언제까지 나는 이렇게 살게 될까? 그런데 화가라는 사람이, 화단과 관계되는 그 누구와의 접촉도 없이 아파트에 혼자 처박혀 개인적인 작업만 하고 있으면, 전시는 언제 할 것이며, 또 언제 내가 하고 싶은 벽화나 대형 조형물 같은 환경미술을 하게 될까.’
그러면서 계산해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개인전을 연 게 만 2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2년 남짓의 세월 동안, 너무 힘들게 지내왔던 기억밖에 남은 게 없었다. 그만큼 그 전시의 후유증이 컸고, 마음고생도 심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니 나는, ‘전문가’일 수도 있는 이 ‘화가의 길’을 가면서, 여태까지 벽화거나 공공미술 등의 아무런 일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아, 오늘도 해는 밝게 떠오르는데.
4월은 힘차게 가고 있는데......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