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에서 만난 첫 번째 동양인#
힘들게 피레네 산맥을 올라 막 내리막 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저 아래로 스페인 쪽 풍경이 펼쳐지고 있어서 땀도 식힐 겸 길가 한 나무 그늘에 배낭을 내려놓으려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언덕 한 구비를 돌아 머리에 하얀 수건을 질끈 동여맨 웬 동양인의 얼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반가워(그도 그런 표정이었다.)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데,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런데 아이고! 일본말 아닌가.
그래서,
"No, I'm not a japanese but a korean.(나는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인데요.)" 조금은 실망한 채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그도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입장에서도, 이런 곳에서 동양인을 만난다는 것이 뜻밖이면서 반가운 일일 수도 있었겠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영어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더욱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었지만, 건방지거나 거만한 인상은 아니었다.(어저께 빰쁠로나에서의 일본인들처럼) 더욱이, 약간의 수줍음도 타는 순수한 젊은이였다.
그래도 몸짓을 섞어가며 몇 마디 띄엄띄엄 인사를 나누었고, 그가 먼저 길을 떠나고 나는 그 자리에 조금 더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땀만 식힌 뒤 나도 숲길을 내려왔다.
그렇게 네 시 반경에 24km의 피레네 산맥을 횡단하는 오늘의 산길 여정을 끝내고, '론세스발예스(Roncesvalles)'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내가 도장을 받으러 사무실로 가면서 보니, 아까 나를 앞질러 갔던 그 일본 젊은이는 '끄레덴시알(Credencial : 증명서)'이 없는지, 사무실 앞 줄 속에 끼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그래서 내가 웬일이냐고 묻자, 그가 띄엄띄엄 몇 마디 말을 하는데...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빤한 일이었다. 증명서가 없었던 것이다.
그냥 지나치려다, 난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는 영어도 안 되고 스페인어는 더더욱 할 줄 모르니......
그래서 그와 함께 줄을 서 있다가 증명서 발급을 받도록 도와주었고, 알베르게의 같은 침대에(그는 1층 나는 2층) 짐을 풀었다. 그리고 화장실이 빌 때를 기다리다가, 그를 먼저 샤워하게끔 시키고 나는 그가 나온 뒤에 들어갔다.
내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그는 일본사람 특유의 모습으로 연신 고개를 굽신거리며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천히 그와 얘길 나눠보니, 무슨 '레이저'에 관계되는 일을 한다는 30대로 이름은 'H'라고 했다.
그저께 프랑스 '빠리(Paris)'에 도착한 뒤 바로 피레네 산 너머 '상 쟁 삐에 드 뽀르(Saint-Jean-Pied de Port)'로 와서도, 그러니까 어젯밤은 현지 호텔에서 잤고, 오늘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면서 나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길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고, 오늘이 알베르게에서 자는 첫 밤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와 함께 저녁 식사도 하는 등, 처음 시작하는 사람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일 어설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면서 그를 안내하고 도왔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길을 떠나기 전에 내가 그에게 일정을 물으니, 그는 별 계획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일정을 차근차근 얘기해 주었더니, 자기도 나랑 같이 가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하듯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나 역시도 이 길이 처음이지만, 난 이미 일주일 정도의 아라곤 코스를 걸었기 때문에 그동안의 내 경험이 그에게도 도움이 되어 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그는 나와 같이 가서 손해 볼 것은 없을 초보자라서......
그렇게 동행이 되어 마을을 빠져나온 뒤, 나는 피레네 산맥에서 흘러내려오는 찬물로 시원한 강가에 앉아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내 처분만 바라고 서 있기에, 나는 배낭에 있던 하몬을 꺼내 스페인 식 햄버거인 '보까딜료'를 두개 만들어서 하나는 그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내가 먹었다. 물론,
"잘 봐!" 하면서 보까딜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내가 하는 것에는 무조건 찬성이었고, 또 따라하려고 노력도 했다. 물론 이 길에 적응하기 위해선 그래야만 할 것이었지만......
그렇게 오후까지 걸었고, 우리는 공식적인 알베르게가 없는 '비스까레따(Biscarreta)'라는 마을의 한 조그맣고 깨끗한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각자 하나씩의 침대를 사용했고, 물론 비용은 반반씩 부담하기로 했다.
그런 틈틈이 나는 일본 젊은 친구와 잘 통하지도 않는 얘기를 나누었는데......
어떻게 이 길을 떠나오게 되었냐는 내 물음에 그는 조금 망설이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실연의 아픔 때문에 무작정 이 길로 떠나왔다고 담담하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는 그를 그저 친구로만 생각할 뿐, 그 혼자서만 애를 태우다가... 급기야 사랑의 고백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직장에서 급하게 휴가를 내고는 무작정 떠나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것만 같았다. 그 건, 나이 든 사람의 연륜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일단, 너무 실망하지만 말고 다시 도전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아줬다. 그리고 사랑을 쟁취하고 싶으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여자를 감동시켜보라고, 인생 선배로서의 충고(?)를 해주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마음은, 어쩐지 그가 원하는 사랑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사랑은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그런 아픔들을 하나 둘 겪다가 보내는 게 인생이니까......
그리고 또 누가 알겠는가? 나에게 이 길을 걷게 한 장본인이었던 내 스페인 친구 '호아낀(Joaquin)'처럼 이 길을 걸은 뒤 새로운 여자를 만나게 될지......
그러고 보니, 호아낀도 여자와의 갈등 때문에 떠나와 이 길을 걸었다고 했는데, 이 일본친구도 그런 모습이니......
이러다간, 이 '산티아고 가는 길'이 실연한 사람들로 꽉 찰지도 모르겠다......
일본 친구 H와 세 번째 알베르게인 ‘수비리(Zubiri)'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또 한 명의 일본인이 있었다.
H는 너무 반가워하며 그동안 못했던 말의 한(?)을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그 일본인과 떠들어대며 저녁식사도 하는 등, 한층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건, 일본인을 만났다는 반가움 말고도 이제 이 길에 많이 익숙해져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내일은 그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아침 내가 짐을 챙기고 있는데, H는 이미 짐을 다 챙긴 듯 나에게 다가와 스스로 인사를 해왔다.
그 동안 매우 고마웠다며 내 주소라도 적어가겠다고 하기에, 메일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그래도 그는 일단 알베르게에서는 나와 함께 출발하려고 하는 것 같이 서성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먼저 보낼 양으로, 일부러 시간을 끌기 위해 화장실에 간다며 먼저 가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다른 일본 젊은이와 함께 알베르게를 나갔다. 그 밝고 씩씩한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래, 그렇게 실연의 상처를 잊고... 돌아가서는 더 좋은 여자를 만나거라......' 하고 있었다. #
'그 글의 본문은 이렇게 끝나는데,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글을 정리하면서 작성했던 글(괄호로 묶은)에는,
(그런데 그 뒤, H로 부터는 그 어떤 메일도 오지 않았다. 그건 조금 섭섭한 일이었고 의외이기도 했는데... 그 건 아마, 영어로 글을 써야하는 게 힘들어서 그랬을 거라는...... 추측만 했을 뿐이다.) 고 적어두었네.' 하면서 이 인야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 섭섭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뭐 대단한 미련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 이 세상 어디서든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는 거니까......' 했을 뿐이다.
#한 여름 낮의 꿈# ( 7 . 2 )
모처럼 오늘은 점심을 식당에 가서 정식으로 먹었다.
깔끔한 식당이라 음식도 맛깔스럽게 나왔다.
첫 번째 접시는, 시원한 스페인 멜론 두 쪽에 기름진 하몬을 한 조각씩 얹은 '멜론 꼰 하몬(Melon con Jamon)' 이었다. 생소한 음식이기에 식당 주인에게,
"나는 이 음식을 처음 먹어보는데, 어떻게 먹나요?" 하고 물었더니,
우선 멜론을 먹을 만하게 잘라 그 한 조각에 하몬도 적당한 크기로 곁들여 먹으라면서, 식물성과 동물성을 동시에 섭취할 수 있어서 좋을 거라는 것이었다. 하몬만 먹으면 기름지니 멜론으로 느끼한 맛을 깔끔하게 잡아준다는 뜻이기도 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보기에 근사했던 첫 접시는 보기도 좋앗지만 맛도 썩 괜찮았다. 뭔가 색다르면서도 별식을 먹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음식은 다른 곳에선 보지 못했는데, 혹시 이 지방에서 즐기는 음식인가요?" 하고 묻자,
이 식당에서 자주 제공하는 메뉴이긴 하지만, '빰쁠로나(Pamplona: 여기 나바라 지방의 주도)'의 일부 식당에서도 이 음식을 맛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아무튼 맛깔스런 첫 번째 음식을 먹자, 두 번째 접시로 손바닥 만한 쇠고기 구이 둥근 한 조각에 감자튀김이 나오는 흔한 메뉴였다.
그런데 주방장의 솜씨가 좋은 듯, 두 번째 요리도 맛이 썩 좋았다. 거기다 비노(Vino. 스페인 와인) 두어 잔을 곁들여 마셨더니, 시원한 생명수가 몸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몽롱해지는 기분으로 후식으로 천연 요구르트까지를 즐겼다.
그런 뒤 기분 좋게 값을 치르고 햇볕이 쨍쨍 내려 쬐는 바깥으로 나왔다.
두어 잔 마셨던 비노 덕분이었을까?
머리에 내리쬐는 햇살은 뜨겁다기 보다는 뭔가 충동감을 주는 묘한 자극제 같이 나를 자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숙소에 들어가 돗자리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와 강가 그늘로 갔다.
물가라 시원한 기운이 더했고, 어디선가 스치듯 상큼한 바람도 불어왔다.
나는 풀밭에 돗자리를 펴고 벌러덩 누웠다.
나뭇잎들이 맑은 햇살을 받아 연두 빛 투명한 색을 발산하며 불어오는 바람에 반짝거리고 있었고, 햇볕은 피부가 익을 것 같은데도 그늘에 누워 있으니 조금 쌀랑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었다 .
그러고 보니 여기 기후는 이렇게 건조하기에 끈적거리지는 않아, 기온은 한국보다 더 높은데도 쾌적하기까지 한 것이 여간 신기한 게 아니고 그 후텁지근한 한국의 더위를 피해서 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걷기를 끝내고 그늘에서 쉬고있는 지금은, '아름다운 여름 날'이라는 생각까지 미쳤는데,
사람은 간사해서(?), 다, 자기가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느낌도 다른 거라,
이 땡볕 아래를 걷고 있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 '천국' 같기도 했던 것이다.
푸르름이 가득한 높은 미루나무는 스산한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고, 키 큰 나무의 맨 위쪽 이파리들 그 위로는 파란 하늘이 신비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술기운 때문이었겠지만,
나는 갑자기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자유롭게 자연을 벗 삼아 걷고 싶을 때 걷고 쉬고 싶을 때 쉬고......
'사람이 이렇게만 산다면, 무슨 불만이겠나?' 싶었다.
그러다가 또,
'근데, 그깢 비노 두어 잔에 내가 이리 행복해진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대로 그 파란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햇살은 눈부셨고 푸른 나뭇잎들은 우수수 춤을 췄고, 골짜기의 바람은 내 몸을 푸르고 시원한 하늘로 날려주는 듯했다.
'아, 이대로 세상이 멈춰진다면......' 하고 있을 때, 그 푸른 미루나무 끝 위로 펼져진 하늘엔 까만 점점의 몇 마리 매들이 무게가 없는 듯 떠 있었다.
아, 꿈같은 한 여름 낮이 펼쳐지고 있었다. #
#예감# ( 7 . 3 )
이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여러 가지로 많이 무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하는 거나 느끼는 거나......
어떤 면에서 보면, 몸이 낯선 이국 땅에 내던져져있어서 긴장된 상태일 텐데도, 힘들다는 것, 편히 쉬고 싶다는 것, 자고 싶다는 것 등의 기본적인 욕구에만 생각이 따라갈 뿐, 서울에서의 초조해하던 내 마음마저 멍- 한 상태로 많이 무뎌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산티아고 가는 길'에 심신이 많이 익숙해져 있다는 얘기겠지요.
'쏨뽀르뜨(Somport)'에서 첫 발을 내디딘 뒤, 그 사이 보름이 지났습니다.
그러고 보면 곧, 또 보름도 지나가겠지요.
달라지는 건, 내가 있을(통과할) 곳의 예측할 수 없는 날씨와 풍광 뿐일 겁니다.
그렇게 이 길이 다 끝나고 나면, 아마 나는, '내가 살아왔던 사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듭니다. #
#자유인# ( 7 . 3 )
알베르게(숙소)에 침대 한 칸을 얻어놓고, 밖으로 나와 풀밭의 나무 그늘에 누워서 하늘만 멍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웬 60대로 보이는 한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배낭을 멘 것으로 보아 그 분도 나 같이 산티아고에 걸어가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에 나는 벌떡 일어나, 그 분과 짧은 인사 '올라(Hola!, 안녕하세요.)'를 교환했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 멋쩍었다.
그 분은 서양사람인데, 동양에서처럼 노인이 온다고 몸을 벌떡 일으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했던 내 자신이......
내가 그렇게 한다고, 그 사람이 그런 걸 알아주기를 할까, 혹시 안 일어났다고 버릇없는 놈이라 야단을 칠 것인가......
그렇게 전혀 부끄러울 일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내 스스로 어색해졌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사람의 한 평생 살아가는 관습이 무섭다는 생각도 드는 순간이었다.
비단 이 일뿐만이 아니래도, 이와 비슷한 일도 잦은데,
나는 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지나가는 인사를 하면서도, 한국에서처럼 고개를 숙이면서 하다간,
'아차!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하곤 스스로 머쓱해 하기도 해왔다.
아무튼 그 분께 그렇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음에도 더 이상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면, 그 분 역시 나만큼이나 사람과 쉬 말을 붙이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분은 한 쪽 구석 풀밭에 배낭을 내려놓더니 주위를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분에게 관심을 주지 않기로 하고, 다시 기지개를 켜며 누워버렸다.
하늘은 아직도 깊고 파랗기만 했다.
그러다 무슨 소리가 나기에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 분은 웃통을 다 벗어 젖힌 채로 벗은 옷을 햇볕이 있는 풀밭에 펼쳐놓고 있었다. 땀에 젖은 옷을 강한 햇살에 펴 말리는 것이리라.
그러더니 나무 그늘 아래에 눕는 것이었다.
이 뜨거운 햇볕을 쬐고 걸어왔으니 얼마나 덥고 피곤할 것인가......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또 다시 무슨 소린가 들려 그 쪽을 바라보니, 그 노인은 나무 숲 그늘 아래에 텐트를 치고 있었다. 아마 오늘밤엔 텐트에서 잘 모양이었다.
그 것도 썩 괜찮은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로 빽빽한 숙소의 2층 침대 한 칸을 얻어 자는 것 보다 훨씬 자유로울 테니까.
순간, 나는 그 분이 너무 부러웠다.
모르긴 해도, 그 분은 이 길을 걷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숙소를 잡기 위해 바삐 걸어 도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혼자서 천천히 쉴 것 쉬고 생각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흐름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걸어왔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늦게 도착한 숙소에 여분의 자리가 남아있을 리 없겠고,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숙소 바깥 가까운 곳 어딘가에 자신의 텐트를 치고 하루 밤을 자는......
그러니까 그 분은 바로 '자유인'인 것이다.
아, 참으로 자유로운 길이다.
남녀노소의 구분도, 인종의 구분도 없는...... 그런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자기 모습으로들 걸어가는 길이다.
그 중에는 저 노인 같은 '자유인'도 있는데,
아, 나도 그들 속에 어우러져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 댓자로 뻗어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자유인'의 시늉(?)이라도 내보고 있는 것이로구나...... #
#인연의 끈# ( 2001 . 7 . 4 )
오늘 스페인 북부 '나바라(Navarra)' 지방의 주도인 '빰쁠로나(Pamplona)'에 도착했다.
'프랑스 코스'를 따라 죽 걸어온 이 나바라 지방은 '바스크'족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빠이스 바스코(Pais Vasco)'라는 지방과 바로 이웃한 곳이다. 바스크족들은 '에따(ETA)'라는 과격 테러조직을 결성하여 스페인 정부 요인을 암살하거나 주요 시설을 폭파하는 등, 아직도 독립을 주장하며 스페인 정부에 대항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나바라 지방은, 북으로는 빠이스 바스코 지방, 남으로는 아라곤 지방과 접하면서도 피레네 산맥에 걸쳐있는 산악지방이다. 그래서 여기 나바라도 그런 바스크인들이 상당히 분포하고 있어서, 언어도 '에우스까디(Euscadi): 세계적으로 가장 어려운 언어중의 하나라는 바스크 어'를 공용하고 있어 도심에는 스페인어와 에우스까디 두 언어를 병기해 놓은 간판과 안내가 자주 보이기도 한다. 지형은 피레네 산맥을 끼고 있어서 아름답고, 면적은 그리 크지는 않아도 생활수준은 꽤나 높은 곳이기도 하다.
빰쁠로나 대성당 앞을 지나다 언뜻 한 건물의 내부가 보였는데, 사람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지나치다 생각해보니 바로 그 곳이 '인터넷 카페'였다. 아무래도 국제적으로 이름이 있는 큰 도시라서인지 '인터넷 카페'가 있었던 것이다.
반가움에 나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값을 물어보니 한 시간에 800 뻬세따(pts, 우리 돈으로는 여섯 배를 곱해 대략, 4,800원)로 우리 PC방에 비교해 보면 매우 비쌌다.
그래도 한국을 떠나온 지 벌써 20여 일......
나는 인터넷 세계가 그립기도 해서 메일만이라도 확인해보고 싶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일반적으로 스페인에서 한국 메일을 확인하려면 글자가 깨져 나오기 때문에 최소한 알파벳으로 된 메일주소만이라도 보고, 그 사이 누가 나에게 메일을 보낸 것이 있는지 만이라도 확인해보려 함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그 곳에서는 한글이 제대로 떠줘서 메일의 글도 읽을 수 있었다.
그 사이 몇 개의 새로운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 중에는 두 누님의 아들, 조카 둘에게서 거의 같은 내용으로 각자 하나씩 온 것도 있었는데,
나에게 연락이 안 돼 엄마와 이모 그리고 외삼촌 숙모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으니, 메일을 받는 즉시 최소한 어디에 있는지라도 알려달라는 간절한 내용이었다.
그 메일을 읽으면서 나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형제들 중에 누군가 나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전화는 여기 스페인으로 떠나오기 바로 전에 취소를 시켜놓았기 때문에, 뭐, '없는 전화 번호'라는 둥의 안내가 나갔겠고... 핸드폰에 전활 걸어 봐도 '본인의 요청에 의해 일시 정지......'라는 안내가 나갔을 테니......
일단은,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 서로에게 전화를 걸어 내 소식을 물어봤을 거고, 그 소식을 들은 다른 형제들도 나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을 거고,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고......
그렇게 확인하고, 내 행방에 대해 친구들에게까지 수소문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마 (우리 집안이)난리났을 거다.
그러다 그 중의 한 가지 가능성인 메일에 나를 찾는 글을 남겨놓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요즘엔 인터넷 세상이 되어 누구라도 메일을 자주 접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 방법이 가장 현명하리라는 의견을 맞추면서......
스페인으로 떠나기는 할 것이었는데, 한국을 떠나오기 막바지까지 나는 너무 복잡한(돈 문제 등) 상황에 쳐해 있어서, 형제들에게 이런 얘길 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겨우 일이 해결 돼, 비행기를 타기 전 영종도 공항에서 전화를 걸어 전화를 하리라 맘먹고 있었는데, 출국수속 등으로 정신이 없어 깜박하는 바람에 그냥 온 것이,
이제와 생각해보니 일을 좀 복잡하게(크게)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형제들에게 미안했다. 그토록 무심했던 내가 잘 못했다는 식으로 스스로 뉘우치기도 했고, 가슴까지 아팠다.
여기 와서도 최소한의 기별은 해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국제전화 건다는 일이 그리 쉽게 실행되지 않은 데다, 내 신경은 오직 이 길에만 빠져있었기 때문에 그 외의 일에는 등한시했던 결과였다.
게다가 이렇게 걷다보니, 더구나 산간벽지 마을로 다니다보면 인터넷과 접할 기회가 없어서, 전화니 메일이니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멀어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나 편할 대로의 생각으로 잊고 있었다. 아니, 저절로 잊혀졌었다.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들른 인터넷카페에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글 자판은 없기 때문에 영어로나마, '나는 지금 스페인에 있으니 엄마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거라. 여기서는 컴퓨터를 접하기가 어려워 메일도 자주 보낼 수 없으니 그리 알거라. 가을에나 돌아갈 것이다.'라는 소식을 보냈다.
몇 분을 이용했는지, 나는 300pts를 지불하고 그 곳을 나왔다.
아, 이 길에 온통 빠져있어서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갑자기 형제들에게 죄를 지은 것 같아 뒷맛이 영 께림칙하기만 하다.
내 메일을 받아보면,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일 텐데......
에이, 그 건 '인연의 끈'이다.
지금 나는, 이런 길을 걷고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마치 속세를 떠난 무슨 수도자나 되는 것처럼, '인연의 끈' 운운하고 있다...... #
‘그때는 그런 자세였었지. 그렇지만 그 다음에도 나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뻔뻔하게도 형제들에게, '내가 없으면 어디 멀리 떠난 줄 알아!' 하고 사전에 '그런 경우엔 너무 호들갑을 떨지 좀 말아 줘.' 하면서, 귀찮아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점점 형제들에게도 '내 놓은 동생'으로 자리잡아갔었다.' 하면서 이 인야는, '물론 그 때는 처음이라 그렇게 순수했던 거라서, 지금 보기엔 스스로도 머쓱해지는 느낌인 것이다......' 하고 있었다.
#빗길# ( 7 . 9 )
새벽부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퍼부었다.
그 천둥 소리에 잠이 깨었으나, 아직은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냥 누워있었다.
'비가 계속 내리면 떠날 수 있을까?'
잠이 드는 둥 마는 둥 누워 있는데, 다섯 시가 조금 넘자, 아니나 다를까 벌써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그저 가만히 누워 있다가, '못 떠나드래도 일단 배낭은 챙겨놓자'며 나도 일어났다.
그 사이 예닐곱 명이 일어나 부시럭 부시럭 배낭을 챙기게 되었다. 물론 나를 포함한 그들 대부분이 40대가 넘은 사람들로 보였다.
'나이가 들어가면 이렇게 새벽 잠이 없어지는 건 서양사람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짐을 챙기면서도 사이사이 바깥을 살펴보았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상큼한 새벽길을 나서려던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찬 새벽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에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듯, 모두들 얼굴 마다에는 걱정스런 빛이 역력했다.
그러다 한 뚱뚱한 벨기에인이 문을 열더니, 용감하게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고도 모두들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는데, 키가 몹씨 큰 스웨덴인도 나갔다. 그리고 5 분쯤 있다가, 더 못 견디고 한국인인 내가 나왔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비가 개기를 멀거니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이렇게 날마다 걷다 보니, 한 곳에 정지해 있는 것은 못 견딜 일이었던 것이다.
발을 디딜 때마다 진흙이 신발 바닥 사이사이에 들러붙어서 걷기만 불편한 게 아니라, 그 진흙의 무게까지 더해져서 걷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어서 다른 날보다 하늘은 어두웠고 땅도 질어 악조건이었지만, 그래도 떠나는 기분은 상쾌했다.
곧,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산으로만 길이 이어졌다.
군데군데 추수가 끝난 밀밭엔 기계로 잘려나간 밀짚의 밑 둥지만 남아있었는데, 비에 젖어 부드러워져 있어서 진흙보다는 그 밀짚을 밟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뜻 뒤를 돌아 보니, 지팡이를 짚고 우중충한 판쵸 우의를 깊숙히 걸치고 궂은 비를 맞아가며 그 산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무슨 장중한 의식행렬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광경을 사진에 담아두고 싶었는데, 배낭을 내려 둘 곳도 마땅치 않았고, 카메라에 물이 들어갈 것 같아서 이래저래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비 때문에 오늘은 어디 멈춰 쉬면서 내 개인적인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앞서 떠난 키가 2 미터에 가까운 스웨덴인을 추월하기도 했다.
그 사람보다 다리는 짧아도, 나도 한 번 걷기 시작하면 제법 잘 걷는 사람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사이에 그 스웨덴인과 몇 마디 나누다보니, 그는 일정이 꽤나 바쁜 사람으로 오늘 하루만도 35 킬로미터를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비가 오는데, 그리 많이 걷는 게 무리 아닐까요?" 하고 묻자,
그의 대답이 무척 재미있었다.
8월 초에 50회 생일을 맞는다는 그는, 이 '산티아고 가는 길'을 무사히 끝내고 스웨덴에 돌아가서, 온 가족의 축하를 받으며 뜻 깊은 자신의 생일 파티를 하려고 하루에 35 킬로미터 정도를 걷는 빡빡한 스케줄을 잡고 이행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혼자 사는 나는, 그가 다시 보여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부럽기까지 했다.
'가족과의 약속이라...... 참, 아름다운 일이다!'
키만 멀쑥하게 커서 싱겁기 그지없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 자기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힘든 일정으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잠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는,
'아, 이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길을 무사히 끝마치겠구나.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없던 힘도 솟구치겠구나......' 하고 생각에 잠겨있는데,
그 꺽다리 스웨덴인은 나에게 주소를 남겨 놓고는, 갈 길이 바쁘다며 성큼 성큼 걸어나갔다.
각자 일정이 달라, 게다가 나는 길에 멈춰 내 개인적인 일을 하는 등의 천천히 걷는 이유로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본인의 50회 생일 파티에 '개선 행진곡'이라도 울리며 들어갈 그 꺽다리 스웨덴인에게 나는 마음의 축하를 보내고도 싶었다.
그런데 그가 점점 멀어지면서 거기 산모퉁이로 돌아서려는 순간, 이제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려는데...
내 눈이 뭔가로 인해 아련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자꾸만 감상적으로 되려는 마음을 다잡느라, 나는 잠깐 길을 멈춰 선 채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다행히 안경 때문에 빗방울이 눈으로 떨어지진 않았지만,
잿빛 하늘이 아른거리며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만 갔다...... #
#산은...#
멀리 산이 보였습니다.
그 산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그 산은 내 앞에 턱! 버티고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 커다란 산은,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 며칠이 지났습니다.
#모기와 파리# ( 7 . 10 )
낮의 그 후끈거리던 열기는, 태양의 기운이 약해지는 저녁 무렵부터 선선한 바람으로 바뀌어 숨통을 틔어주 듯 불어온다. 그래서 해가 질 무렵 그늘에 있다 보면, 조금 스산한 느낌까지 든다. 그러니 밤에는 선선해서 뭔가 덮어야만 잠을 잘 수 있다.
더위에 잠 못 드는 것에 비한다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좋은 건, 모기가 거의 없다는 거다.
건조한 기후라서 그런지 스페인은 모기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번에도 여태까지 몇 마리의 모기를 보았을 뿐, 모기 때문에 잠 못 든 일은 없었다. 그러니 문은 활짝 열어놓고 자도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오히려 시골일수록 모기 보기가 더 힘든 것 같다. 그래서인지 스페인 집들은, 아니 유럽의 집들에선 방충망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곳도 있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다녀본 곳들은 그랬다.
대신, 집들에 방충망이 없다보니 창을 열어놓으면 파리들이 무사통과 하게 된다. 당연히 식당이나 부엌엔 파리들이 적지 않은 편이다.
그런 것까지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긴 하는데,
문제는 파리들이 우리 인간을 가만 놓아두질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페인은 낮에 더워서 일반적으로 낮잠을 자게 되는데(그 유명한 '시에스따(Siesta)'), 몸에 찰거머리처럼 집요하게 달라붙어 귀찮게 구는 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잠에서 깨기라도 하면, 그놈의 파리들을 잡아서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길을 걸으면서 보이는 숙소의 낮풍경 중에는, 남녀를 안 가리고 손으로 파리를 잡는 모습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파리를 잡는 방법도 다양하지만, 그 죽이는 방법도 다채로웠다.
가장 일상적인 방법이 파리채를 이용하는 거지만, 어떤 사람들은 휴지를 한 손에 든 채 다른 손으로 채어 잡은 파리를 휴지로 눌러 죽이고, 나 같은 사람은 오른 손으로 파리를 채어잡은 뒤 허공에 빙빙 돌리다(파리가 정신 못차리게) 땅 바닥에 잽싸게 던져 충돌사를 시켜버린다.
그런데 오늘은 좀 재미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낮잠을 자다 짜증스럽게 일어난 한 프랑스 젊은이가 파리를 손으로 채어 잡던데(나와 같은 방법이었다.), 그렇게 잡은 파리를 반투명한 비닐 봉지에 하나 둘씩 집어넣는 것이었다.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그는 파리를 계속 잡아대고 있었는데, 상당히 많이 생포한 파리들을 죽이는 게 아닌, 그 얼마 뒤에 봉지 끝을 꽁꽁 묶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파리들을 질식사(?)시킬 생각인가 보았다.
결국 그는 그 봉지를 바깥으로 가지고 나갔고 빈손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쓰레기통에 버린 모양이었는데......
그 모습을 내내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러면 그 안의 파리들은 죽을까? 언제까지 목숨이 붙어있을까?'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그 쪽에 집착을 한 건 아니지만,
파리를 잡아 죽이는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된 수확은 있다고 본다. #
#라 리오하(La Rioja)# ( 7 . 13 )
와인(Wine.포도주)의 고장답게 '라 리오하(La Rioja)' 지방에 접어들면서는 포도밭이 여기저기 자주 눈에 띈다.
나무는 뭉툭하게 작은데, 그 나무에 벌써 무게가 느껴지는 엷은 푸른색의 포도송이들이 송송이 알알이 맺혀있는 것이 무척 재미있게 보인다.
'로그로뇨( Logroño)'는 라 리오하 지방의 주도이다. 그러니까 나는 '빰쁠로나(Pamplona)'가 주도인 '나바라(Navarra)' 지방도 이제 완전히 벗어난 셈이다. 건조한 '아라곤(Aragon)' 지방에서 걷기 시작하여, 나바라를 거쳐 다시 프랑스로 갔다가, 또 다시 나바라를 지나 이제 라 리오하 지방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북동부 내부에 자리한 라 리오하 지방은 다른 곳에 비해 면적도 작고 큰 특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지방도 나름대로의 개성과 경쟁력을 가진 특징이 있는 곳이다.
'라 리오하'는 이 지방의 이름이자, 스페인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와인 상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라 리오하'라는 상표의 와인은, 일반적으로 다른 상표에 비해 가격이 상당히 비싼 편이다. 그만큼 이 지방의 와인을 알아준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라 리오하' 상표의 와인은 평상시에 식탁에 자주 오르내리지 않고, 뭔가 특별한 날이거나 분위기를 찾고 싶은 장소거나 하는, 일반적으로 격이 높은 행사 등에나 볼 수 있는 와인이기도 하다.
'로그로뇨' 시에 들어오는 입구엔 한 노파가 순례자들에게 직인을 찍어주며 헌금을 받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고서 하는 일인 것 같았다.
그런데 신기하기까지 했던 일이 있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 부근엔 무화과가 컸고, 다른 곳과는 달리 벌써 익어가고 있었다. 여태까지 다른 곳을 지나오면서 보니 이제야 나무에 연두 빛 열매가 맺혀, 겨우 손톱 만하던데, 이 곳엔 벌써 붉으죽죽 하다 못해 어떤 것들은 아이 주먹 만한 크기로 먹음직스럽게 익어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노파는 헌금을 하는 사람에게 주먹 만한 무화과를 하나씩 답례로 선물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냈는데, 노파는 그 바로 뒤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더니 말랑말랑한 무화과 하나를 꺼내와, 밝은 얼굴로 나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물론 나이 많은 노파가 주시는 것이라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무화과 맛이 원래 그렇지만, 약간은 낯선 듯하면서도 달짝지근했다. 그래도 길을 걷는 나그네에겐, 아주 훌륭한 과일 맛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 테레사 노파는 내가 그 다음에 갔을 땐(2004. 2) 이미 돌아가신 뒤였고, 그 분의 뒤를 이어 그분의 큰 딸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책 2 권 '겨울 베짱이'에 실림)
그런데, 그 노파는 대뜸 날더러 '브라질에서 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날더러 브라질 출신이냐고 묻는지가 궁금했지만, 별 말없이 한국사람이라고만 대답해 주었다. 그랬더니, 자기가 25년 동안 거기서 그 일을 하고 있는데, 한국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예에?"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내가 그 분의 말씀을 부정하는 건, 내가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듣기엔 ('아레스'의 알베르게의 자원 봉사자로부터), 어떤 한국인 신부님과 학생들이 그 곳을 작년에 지나갔다고 했었고, 각 숙소에 비치된 방명록에서도 이미 한글의 흔적을 몇 번은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얘길 해드리면서,
"여기도 한국 사람이 이미 지나갔을 걸요?" 하고 말해도,
자기에게는 내가 '첫 한국인'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 노파는 날더러 자기 노트에 한 마디 적어놓고 가라기에, 나는,
'여기에도 한 한국 사람이 지나갑니다.'라고, 제법 큰 글씨의 한글로 써놓고 그 노파와 작별했다.
그런 뒤 생각을 해보니 그 노파가 날더러 브라질 사람이냐고 묻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 산티아고 가는 길에는 역시 카톨릭 국가인 브라질에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온다하고 또 내 눈으로도 보아서 아는데,
특히 브라질 '상파울로'에는 동양계의 이민이 많아, 아마 얼마간의 동양계 브라질 이민도 이 곳을 지나며 그 노파와 얘길 나누었으리라는 추측을 해볼 수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곳을 지나 조금 더 로그로뇨 시에 가까워 지는데, 길가엔 많은 자두나무가 있었고, 거기엔 붉거나 발그레 익어 가는 자디잔 자두가 수도 없이 열려 있었다.
자두 열매가 얼마나 많이 열려있는지, 가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야! 이러다가 정말 가지가 찢어지지나 않을까?' 했을 정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나무들 아래 아스팔트 위엔 아마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따먹고 버렸음직한 많은 자두 씨들이 새까맣게 닥지닥지 붙어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니 나라고 그냥 지나칠 수 있나?
나도 노릇노릇한 색깔로 골라 한 주먹의 자두를 따서 먹고 지나왔다.
막, 맛이 들어가는 상큼한 자두였다.
그렇게 많은 과일의 열매가 풍성한 '라 리오하'임을 로그로뇨 입구를 지나며 본, 그런 자두와 무화과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이 곳은 포도의 주산지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스페인의 과일들은 왜 그리도 달고 맛있는지...... #
#새벽길# ( 7 . 13 )
나는 아침 일찍 길을 떠난다.
원래 잠이 많지 않은 나는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서 길을 떠나기도 한다.
새벽에 옆에서 누군가 일어나는 기척만 있어도, 난 잠에서 깨어난다. 아니 어떤 때는 그 전에 이미 저절로 깨어 있을 때도 있는데,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그저 누워있곤 할 때가 더 많다. 그러다 누군가의 알람시계 소리가 나거나 또 일어나서 짐을 챙기면, 여정이 길지 않아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는데도,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짐을 챙기는 것이다.
보통 새벽 5시에서 6시로 넘어가는 사이에 사람들은 일어나 배낭을 꾸리고 행장을 차려 떠난다.
그렇게 바삐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30 킬로미터 이상의 장거리를 걷는 일정이거나, 뜨거운 낮을 피해서 이른 새벽에 걷는 것이지만, 나는 하루에 20 킬로미터 정도로 그리 많이 걷지도 않을 뿐더러 서두를 일도 없는데, 잠에서 깨어나면 바로 떠나고 싶어서 늦장을 부릴 수가 없다.
그리고 화장실만 갔다오면 나는 금방 배낭을 꾸리기 때문에, 나보다 일찍 일어나 있던 몇몇 다른 사람들보다도 먼저 숙소에서 나올 때가 다반사다. 그러다 보면, 5시 반에도 가능하다.
그런데 너무 일찍 출발하면, 길을 표시한 노란 화살표 찾기가 힘들어(안 보여서) 길을 잃을 때도 종종 있어서, 어떤 때는 일부러 천천히 걷는 경우도 많다.
새벽길은 참으로 상쾌하다.
아직 아무 것도 시작되기 전 세상의 산뜻한 새로움을 만끽하는 기분이랄까.
어쨌거나 새벽길은, 전날의 피로가 휴식으로 많이 회복된 상태에서 출발한 뒤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조금씩 밝아오는 세상을 뚫고 나가는 상쾌함이 배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새벽길을 걷다 보면 해가 뜨기 전과 그 이후의 차이가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해가 산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것은 한 순간의 일일지 모르지만, 그 순간의 차이로 기온과 기분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해가 솟은 뒤부터의 기온은 긴 여름 날의 느슨함으로 바로 무뎌지지만, 그 전은 뭔가 신비롭고 싱그러운 긴장감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새벽길을 떠나는 나에게 무엇보다도 기분 좋은 것은, 마을이거나 도시거나 사람들의 근거지(숙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마을을 벗어난다는 것은, 바로, 자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들판이나 산으로 빠져 나가게 된다는 것인데,
그 홀가분함과 후련함이 가슴 깊숙이에서 우러나오곤 한다.
그런데 그 맛은, 꼭 기쁨만은 아닌...
어쩐지, 깊게 잠들어 있는 인간 세상을 등지며, 홀로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 같은 스산한 안타까움이거나 서글픔(?)도 함께 하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느낌을 싫어하지 않는 건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
#방랑의 한 달# ( 7 . 16 )
한국을 떠나온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한 달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걷다보니 그리 짧다고 할 수만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루하루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시간개념이 많이 무뎌져 있습니다.
그래도 날마다 내 나름대로의 기록은 하기 때문에 날짜가 가는 것은 느끼고 있지만 무슨 요일인지는 전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일 필요도 없고 알아봤자 써먹을 데도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내 머리속도 많이 비어있어서, 무척 단순한 사람이 되어있는 느낌입니다.
사람들과의 접촉이라는 것이, 고작 같이 걷는 사람들과 지나가는 인사로 몇 마디를 나누거나,
새로운 숙소에 도착하면, 거기 자원봉사자들과 입소절차를 하는 게 전부인데,
가는 곳마다 환경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그 절차라는 것도 그 게 그 거라, 크게 신경 쓸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일 신경써지는 게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일 텐데요,
여기서는 거의 그럴 일이 없으니, 뭐 복잡할 일이 있어야지요.
그러니 단순해질 수 밖에요.
이런 게 바로, '나그네(떠돌이) 생활'인가 봅니다.
어쨌거나 꽤나 긴 길을 걸어왔습니다.
아직도 걸을 길이 많이 남아있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여태까지, 이렇게 방랑하는 기분으로 먼 길을 오래 걸으며 자연의 풍광을 직접 내 피부로 느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자유를 만끽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도, 다른 곳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너무 값지고 소중한 체험 같습니다.
아, 참으로 평안하고 자유롭게 먼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왜 걷느냐?'는 내 스스로의 의문은 아직도 남아있지만, 이제 뭔가를 조금 느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타고난 '역마살'로, 한국에 있을 때나, 그 이전에도 자주 여행을 해왔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입니다.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다니는 여행과는 많이 다른 느긋함과 편안함, 자연 속에서의 자유......
그런 것들이, 뭐랄까... 좀 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방랑'이랄까요?
오래 전부터 내 맘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방랑에 대한 동경을 실행해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것도 어느새 한 달씩이나...... #
#한국 소식# ( 7 . 16 )
오늘도 하루 종일 걸어 숙소에 도착하고 있는데, 요 며칠 걸으며 안면이 있던 한 스페인 여자가 반색을 하며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조금 전에 오늘 신문을 읽었는데, 한국에 관한 기사가 났기에(내가 한국사람이란 걸 이미 알고 있던 터라), 그 소식을 전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또,
"좋은 소식은 아닌데......" 라고 금세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나는,
"무슨 소식인데?"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울에 홍수가 나서, 스물 두 명이나 죽었다는데?" 하는 것이었다.
'뭐야? 홍수가? 그래서 스물 두 명씩이나 죽어?'
물론 나는 놀라긴 했지만, 역시 좋은 소식이 아니라서,
"음... 지금이 한창 여름철이니, 한국에서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야......"라면서, "여름철 동양에서는 태풍이 부는데, 그런 일이 이따금 발생하거든?" 하고,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받아 넘겼더니,
오히려 그녀가 더 멋쩍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자꾸만 뭔가 캥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또 오늘 우연히 알베르게에서 인사를 나눈 미국인 여자(초등학교 선생이라고 했다.)가 차를 한잔 사겠다며 같이 나가자는 호의를 베풀었는데도,
"고맙긴 하지만, 내가 지금 몸이 별로 안 좋아서......" 하고 거절하며 나는 내 침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는 대홍수가 나서 난리라는데, 나는 그 무더위와 홍수까지를 피해 외국으로 나와서 유유자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도, '김포'에 사는 누님네는 아파트 11층이니 큰 일이야 없겠지만, 상습 침수지역인 사당동에 사는 형님네는 무슨 일이 없었을까? 전화라도 걸어야하나? 그래서,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 당장 돌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마음이 편칠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오후 내내 불안했고, 기분도 밑으로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전화를 걸어볼까?' 하는 생각도 안 했던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와 일곱 시간 차이가 나서, 여기 오후 시간은 한국에서는 다들 잠을 자는 깊은 밤이라, 그것도 맘 같이 되질 않아서...
그냥 미적대고 말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 근방 마을들은 다들 자그마해서, 한 이틀 후에나 조금 큰 도시를 지날 때에나 전화를 걸던지 메일을 뒤져보면 뭔가 그런 소식을 접할 수 있을 것이기에(지난번에도 메일로 나에게 소식을 전했었으니까, 집안에 무슨 큰 일이 생겼으면 최소한 메일에 뭐라도 남겨놓았을 테니까),
그때까지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근데, 그러나 저러나, 그 놈의 비는 왜 그리 심술을 부려서 사람 마음을 이다지 불안하게 만드는지...... 그 동안 내내 가물어 온 나라가 난리였었는데, 그래, 한꺼번에 그렇게도 많이 퍼부워서, 사람 목숨까지 앗아갔단 말인가?' 하고 짜증을 내다가,
'에이! 그러게, 못 믿을 건 하늘이라니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자기 자신의 문제# ( 7 . 20 )
이 길을 걷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독일이거나 프랑스거나 또 영국이거나... 유럽의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사람들이 공중질서를 안 지키거나 줄 서야할 때 차례를 무시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물론 평소에 자기 나라에서 질서를 잘 지키는지는 내가 직접 확인한 건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이렇게 먼 길을 걷다보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은 몸이 피곤해서인지 너나 할 것 없이 빨리 씻은 뒤 쉬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순서가 있고 또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불문율이자 기본적인 약속이다.
그런데, 숙소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 문이 열리면, 자기가 늦게 도착했음에도 먼저 도착한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표정도 없이 후다닥 들어가는 사람들을 몇 번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기들끼리는 숙소 안에서 더 떠들고 예의도 지키지 않는 것 같은데......
그렇게 무례한 사람들은 어딜 가도 존재한다.
물론 이 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내가 이 길을 걸어오면서 여태까지 개인적으로 겪었던 것만 봐도, 여기 유럽의 선진국이라는 나라의 무례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동양사람을 무시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상당수의 백인들에겐 동양인 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 뿐 아니라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도 적지만은 않은 것 같고......
그런데 그런 그들도, 동양인 중 일본인들에겐 고개를 숙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경제대국에다 이미 선진국 대열에 오른 지 오랜 시간이 지나, 그 국민들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어디서거나 처신을 바르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역시 보이기 때문에, 그 만한 대접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 한국이야, 이들에게는 동양 한 구석의 조그만 나라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습게 본다는 거다.
그런 못된 생활 습성이 몸에 밴 유럽 사람들이 더러 있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사람들에겐 경멸의 시선을 던지면서 상대조차 하지 않기는 하지만, 공공연히 밖으로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런 상황(공간)일수록 남들에게 책잡힐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행동거지를 더욱 조심하기는 하는데......
어제 있었던 일이다.
왜 그런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걷는 거리를 줄여 알베르게에 일찍 도착했다.
그래서 알베르게 문 앞의 의자에 짐을 풀고는 축 쳐저 앉아있었다.
그런 뒤, 띄엄띄엄한 간격으로 몇 사람이 도착하여, 그들 역시 여기저기에 배낭을 벗어놓고 쉬고 있었는데,
마침내 알베르게 문이 열리고 자원 봉사자가 직인을 찍어주려고 입실을 알렸다.
그런데, 한 독일인 부부가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는 거 아닌가.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어서, 짐을 들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 그룹으로 보이던 세 명의 스페인 여자들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인데,
아무튼 나도 어리둥절, 이 사람 저 사람을 한 번 훑어보다가, 그들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양보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이 먼저 도착했잖아요?" 하고 웃으면서, 나부터 들어가라고 사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럼, 그럴까요?" 하고... 좋지 않았던 몸이라, 천천히 나도 들어왔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이 알베르게는 각자 알아서 기부형식으로 숙박료를 내는 곳이라, 나는 500 뻬세따를 통에 넣고 나오는데,
내가 몸이 안 좋다는 걸 알고 있던 자원봉사자가,
"오늘 걸을 수 있겠어요?" 하고 물어왔다. 그러면서, 몸이 영 불편하면 이 알베르게에서 하루 더 쉬었다 가라고도 했다.
나는 고맙다면서, 웃으며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어제 낮에, 순서도 안 지키고 자기 먼저 입실했던 독일 남자가 화장실 쪽에서 나오면서 큰 소리로,
"화장실에 화장지가 없네!" 하며 불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자원 봉사자가 휴지를 찾으러 안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그 순간, 그렇잖아도 그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던 나는,
그가 한층 가증스럽게(?) 보일 뿐만 아니라, 입이 근질근질해서 혼났는데,
그 꼴이 보기 싫어, 얼른 알베르게에서 나오고 말았다.
내가 그랬던 이유는,
어제 알베르게에 입실한 뒤, 배낭을 정리하고 샤워를 하려고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순간, 막 화장실에서 나오던 그 독일인과 마주쳤는데,
그의 손에는 새 것으로 보이는 두루마리 화장지 하나가 통째로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용으로 사용할 화장지를 슬쩍(?)했으면, 화장지가 없다는 불평이나 하지 말든지......
그런 사람이 불평은 더 많고 또 뻔뻔한 법이다......
허기야, 어디든 사람들이 다 똑 같으라는 법은 없다.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분명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 안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게 이 세상이니까.
그러고 보니, 내가 전에 스페인에서 살 때에도 영국이나 독일인들이 더 공중도덕을 안 지키는 것을 자주 보았었다. 처음엔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사람들의 얘기인 즉,
자기 나라에서 억압된 사회 분위기에서 지내다가, 조금 자유롭고 헐렁한 스페인 같은 나라에 오면, 긴장이 풀어져서 더욱 그렇다고도 하던데......
천천히 걸어 마을을 벗어나니 기분은 좋아졌으나, 내 몸의 컨디션은 영 말이 아니었다.
한참 뒤에 구릉에 오르는 가파른 경사의 언덕길을 힘들게 오르니, 다시 고원평원이 펼쳐졌다.
솟아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아침햇살이 등 뒤에서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가는데, 바로 그 독일인 부부가 나를 추월하는 것이었다.
내가 몸이 안 좋아 천천히 걸었기 때문에, 늦게 출발했던 그들이 나를 추월한 것인데,
물론 그들에 대한 인상이 안 좋았던 나는 속으로,
'차라리 나에게 아는 체를 하지말고 지나쳐주면 좋겠는데......' 했는데,
그들은 뭐가 좋은지 활짝 웃는 얼굴로,
"날씨가 참 좋네요!" 하고 영어로 인사까지를 해오는 것이었다.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수는 없어서 나도 희미하게 웃어주긴 했는데,
그들이 조금씩 멀어지는 걸 보면서, 아니 내가 그들과의 거리를 더 벌리기 위해 더 천천히 걸으면서,
'내가 왜 저들을 미워할까?' 를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나는 나 나름대로 이 길을 걸을 뿐인데, 그리고,
'이 세상에는 나와 정서가 맞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수많은 사람들, 그들 중에 단 한 점에 불과한 난데......' 하면서.
아무튼 난 그들이 잘 안 보일 때까지 걸음을 늦췄다.
이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다 많고, 내가 싫어한다고,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물러나주지도 않는다. 여태까지도 살아오면서 보니, 착하게 살아간다고 복 받아서 잘 사는 것만도 아니었다.
그 반대로,
'저렇게 살아선 안 되는데......' 하고 욕을 먹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면서 잘만 살아가는 것도 많이 보아왔다.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가르쳐준 것처럼 살아간다고, 세상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서, '잘했다'고 칭찬해주지도 않을 뿐더러, 또 그런 세상도 아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하늘에서 날벼락을 때리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본인 스스로의 마음가짐인 것 같다.
다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