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숨과 날숨 : 메를로 퐁티의 몸의 현상학을 통한 요가 수행
James Morley(런던 미국국제대학 심리학과 교수)
introduction
이 글은 마리우스 메를로 퐁티의 실존 현상학에 영향을 끼친 프라나마나(호흡법)의 요가 수행법에 대한 해석을 제공한다. 요가에 대한 내 접근은 메를로 퐁티의 사고와 전통적인 요가 텍스트들 사이의 비교에 관심을 갖는 것보다 살아있는 몸에 대해 메를로 퐁티의 철학이 제공하였던 구조를 통해 호흡법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을 명료화하려는 데 있다. 요가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분명히 교육적인 목표들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지만 결코 요가 수행과 단절될 수는 없다. 전적으로 요가 철학들에 대한 이론적인 개념들에 초점을 맞추었던 학문적 논의들은 어느 정도 불완전함을 남겨두어야만 했다. 파탄잘리의 요가 경전은 그 자체가 수행의 지침서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내 배움의 기초를 학자이면서 동시에 수행자인 T.K.V. Desikachar의 논평을 배제하는 것 보다 이론적인 논평을 보다 많이 배제시키는 것으로 채택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일련의 학문적인 논쟁에 있어서의 문제들 뿐만 아니라 경험 혹은 현상으로서의 요가에 도달하였다.
요가와 현상학이 비교되는 동안 이들 학문들은 현재의 학문과는 다른 노선을 걸어왔다. 보다 초기의 비교학은 메를로 퐁티의 철학적 선배인 에드먼드 후설의 사고에 관심을 집중해 왔고, (또한) 후설의 초기 사고에 대한 관점과 선험적인 요가의 보다 관념론자 학단의 사고 사이의 일치에 관심을 집중해 왔다. 나는 이들 비교들의 정당성에 대해 시험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반면에 나는 요가-현상학의 비교에 있어서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하길 바란다. 우리의 목표에 있어서, 그것은 관념론적이거나 선험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존재론적이고 구체적이다. 우선, 나는 선험적인 현상학에서 존재론적인 것을 구별하고, 그런 다음 어떻게 현상학에 대한 이들 다른 관점들이, 선험적인 현상학이 이미 공통 개념의 근거를 세우는 수단으로 기여했던 것과 같이, 요가 수행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서양 철학적인 전통 안에서 뼈대를 제공하는 것과 함께 적절한 기여할 수 있는 지에 대해 보여줄 것이다.
전통적인 요가 개념과 선험적인 현상학 간의 개념적 공통점에 대한 요약.
일반적으로 현상학은 형이상학적인 범주화에 앞서 지각되고 살아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학적 환원", 또는 epoche로서 폭넓게 알려진 이성적 반성에 의한 방법으로 가능한데, 아마도 (이것은) 세계와 대상의 존재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전제, 믿음, 의심 등에 대한 완전한 판단중지로써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요가와 현상학에 대한 보다 초기의 비교학자들은, 처음에 후설의 초기 선험적인 접근법으로 설정되었으며, 요가적인 명상 수행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은, 현상학의 이 개별적 관점에 크게 스트레스 받았다. 확실히 요가 문학의 관점은 선험적인 현상학의 epoche와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특별히 산스크리트어인 nirodaha가 후설의 epoche에 매우 근접해 있음을 보여주는 파탄잘리의 요가 경전 속에 그 증거가 있다. "chitta vritti nirodaha"은 요가 경전에 대한 파탄잘리의 전통적 잠언인데, "요가는 사고(chitta)의 동요(vritti)에 대한 판단중지(nirodaha)"라고 거칠게 번역할 수 있다. 이처럼 nirodaha는 현재의 열정, 미래의 욕망 또는 과거의 인상(karma)과 같은 정신적 상태나 버릇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지각(purusa)을 목표로 하는 강력한 명상 기술이다. nirodaha는 지각자와 지각대상 사이의 구분을 포괄하고 심리적인 마음(chitta) 너머에 놓여져 있는 순수의식(samadhi)을 포함하는 과정이다. 자기검증의 지식인 순수 samadhi는 단지 수행자들에게 채워질 수 있으나 결코 기술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기술하는 것은 그 경험이 대상 속에 있는 것으로 변해버릴 것이고 게다가 그것의 의미를 왜곡할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유사한 방식으로 후설은 선험적 주관성인 "숨겨진 나"와 주체·객체의 이분 안에 여전히 잠겨있는 심리학적인 자아를 구분한다. 파탄잘리와 같이 후설도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는 과정과 함께 반성적인 "의식의 목격자"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분명한 지각을 방해하는 정신적 구조의 변형을 역설한다. 양 이론 속에 세워진 것은 이 방법론적인 명료화 과정-선천적이거나 혹은 순수 주관성을 외부 대상 세계와 구별하는 것-의 끝(나머지)에 남겨진 순수 의식의 관념이다.
존재론적 현상학 : 순수 주관성에 대한 비판
존재론적 현상학은 "순수 물질"에 대해 두 가지로 반대하면서 "순수 주관성"의 관념을 함축하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을 통해 나타나게 되었다. 두 반대말을 통해서 생각하는 서구의 사고 관례를 거부하면서 하이데거는. 어떤 주관성도 세계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으며, 또는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주체와 세계와의 관계이며 그것은 그들의 범주적 구분보다 앞선다. 개개의 인간 존재들은 존재 일반에 깊이 잠겨있거나 새로이 발생한다. 전형적으로 "세계 속 존재"라고 번역되는 하이데거의 dasein(글자 그대로는 "거기에 존재함")의 개념은 그 스스로 죽음과 함께, 유한한 시간의 지평선에 존재하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역사적으로 설정된 존재이다. 선험적 주관성이라는 후설 초기의 현상학과는 다른 발전으로서 하이데거의 dasein은 항상 이미 '세계의 안에, 그리고 세계에 대해'(in and of - 아마도 '세계 속 존재'와 '관계의 존재'를 말한 것일 것) 있다. 이처럼 존재론적 현상학에서 인간 존재는 내재성이나 외재성도 아니고, 주체와 개체도 아닌 시공간적으로 열려진 세계에서 살고 있다. 메를로 퐁티의 기여는 인간 몸에 대한 존재론적이고 현상학적인 재생을 통해 desein의 개념을 확고히 하였다는 데 있다.
메를로 퐁티의 살아있는 몸(lived body)에 대한 개념
자기 세계(self-world)의 관계보다는 차라리 세계와 따로 떨어진 의식으로서 하이데거의 주관성을 개정하였던 메를로 퐁티는 이들 관계의 "zero point"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살아있는 몸은 그가 하이데거와 후설에 의해서 찾아졌던 선험범주화의 근거를 보았던 관계이며, 주관성과 객관성을 가로지르는 관계이다. 메를로 퐁티가 관심을 집중했던 것은 인간의 감각 경험이 주체와 객체 또는 내재성과 외재성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반대어들에 대해 표상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sens"라는 말은 "감각경험"과 "의미" 양자를 내포한다. 의학적 몸이나 물리적인 몸과는 달리 살아있는 몸은 비인격적, 혹은 그것이 참여하는 대상적인 자연의 차원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삶도 배경으로 한다. "우리 몸이 거주하는 자연을 인지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지금 인간의 몸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살아있는 몸은 의식을 구현하며, 지각에 대한 활동적인 중개자라는 역할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지각되는 것에 대한 열정적인 대상이라는 역할 사이의 결합을 구현한다. 이러한 결합은 아마도 주체와 객체, 또는 자아와 세계를 분리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근본 토대를 뒤흔들지도 않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이 글의 목적을 위해서 "lived body"라는 말을 남겨둘지라도 그것은 여기에서그의 마지막 작업이었던 "보여짐과 보여지지 않음"에서 메를로 퐁티가 세계와 몸의 표면과 심연 사이의 연속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flesh"란 단어를 채용한 것을 언급하는 것이 될 것이다. 초기 글에서의 "살아있는 몸"은 마지막 작업에서 그것의 원초성, 혹은 본질적인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flesh"로 대체되었다. flesh는 주체와 객체, 내재적과 외재적인 것들 사이의 모호한 상호작용을 포함한다. 메를로 퐁티의 새로운 "세계 속의 flesh"라는 구문은 느리게 하이데거의 "세계 속의 존재"를 대체했다.(철학적으로 "being"이라는 말은 전통시대에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로 하나의 추상이고, 굉장히 지성화된 말이다.) 또다른 면에 있어서 "flesh"는 철학을 현실 속으로(down to earth) 가져오려는 메를로 퐁티의 목적에 보다 잘 부합한다. 그것은 친교·인격을 포착하며, 인간 삶의 특징을 구현한다. 메를로 퐁티에게 있어서 flesh는 몸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세계의 근본 실체를 기술하려는 방법이다. 그는 차라리 비활성의 물질적 요소를 통해서 몸을 기술하려고 하지, 몸의 요소적인 물질성을 통해서 외재 세계를 보려는 관례를 외면한다. "몸"이 복잡한 시스템이라고 제안될 수 있는 곳에서 "flesh"(chair)는 어떤 요소적인 것을 보다 잘 표현할 수 있다. 거친 차원에서 그것은 주체와 객체 주체와 대상, 몸과 세계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살아있는 몸과 요가
주체-객체라는 구분에 반대하는 살아있는 몸이라는 개념은 특별히 요가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요가는 외재 세계에 대한 경험을 긍정할 뿐만 아니라 명상 수행을 통해 자아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지각한다는 것도 수용한다. 몸에 대한 통제는 외재 자연에 대한 지배와 동등하고 이 통제는 감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통해서 달성된다. 감각 경험에 대한 초점은 몸의 일차성을 승인하는 것이다. 몸은 외재적 우주에 대해서 또는 일리아드의 말에서, 소우주로서 이해되어지며, 요가의 목표는 몸과 세계 사이의 우주적 "일치"(homology)를 달성하는 것이다. 호흡조절법은 이 목표에 대한 상징이거나 또는 주된 은유이다. 요가가 제안하는 이론과 수행에 있어서의 몸이라는 주된 장소는 몸의 일차성에 대한 메를로 퐁티의 전제와 비교되며, 그리고 요가의 이러한 제안은 상호 명료화라는 점에서 기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몸에 대해 깨닫는 데 있어서 우리의 습관적인 경향은 우리가 스스로의 내면으로 전하는 '정신적인 몸'(inner body)으로부터 외재적 세계와 접촉하는 '물질적인 몸'(outer body)을 분리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우리의 몸에 관계된 경험을 소외하기 쉽다. 외재 감각 대상들이 우리 경험의 초점으로 맞춰지기 때문에 우리는 외부에 있는 관찰자가 조망하기 쉬운 우리 몸의 생김새에 특권을 가지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相(이 相은 외부에서 관찰가능한 것인데)을 통해서 스스로에 대해 생각한다. 이에 응답하여 우리의 지각은 통상적인 경험의 변두리로 격하되는 우리 몸의 무수히 많은 민감함으로부터 소외되어진다. 요가 수행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prayanama 또는 호흡법은 이러한 소외를 극복해낸다. 그것은 내면과 외면 사이의 관계로서의 몸에 대한 확고한 경험이다. 숨쉬기는 바깥 공기를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이고, 리듬감있게 우리 안의 무언가를 바깥으로 내놓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공통되는 이런 간단한 경험은 요가 수행에 의해서 초점이 맞춰졌다.
自己刺戟感受는 물리적인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에 대해 몸 깊은 조직의 지각으로 전환된다. 우리가 아프거나 비정상적인 신체 감각을 경험할 때 지각은 불안의 근원으로 인도된다. 아픔은 우리에게 지각의 전환에 대한 우리의 잠재력을 정확하게 깨닫게 해준다. - 이때의 지각은 세계의 바깥으로 향해 있다기보다 차라리 몸의 텅빈 곳을 따라 안쪽으로 인도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픔과 같은 불유쾌한 경험은 우리가 우리 자신 혹은 고통의 충격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하는 것의 간극으로부터 우리 몸을 "비인격화시키기"(depersonalize) 쉽다. 대조적으로 prayanama의 요가식 호흡법은 우리에게 아픔이라는 문맥 바깥에서 자기자극감수를 준다. prayanama와 함께 자세(asana) 수행을 통해 우리는 근육, 아킬레스건, 판막, 그리고 폐강(肺腔)의 감각을 전환되도록 개발한다. 우리는 외부적으로 눈에 보이는 육체들이 하는 것과 같이 이들 물질적인 영역들을 여닫는 것을 통해 결국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공기를 흡일할 때 가슴이 팽창하고, 심장의 템포와 동맥을 통한 피의 흐름이 빨라진다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는 자발성의 영역 속에 있는 자율 신경 조직을 통합한다. 우리는 숨쉬는 찰라에 폐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주목하고, 그리고 다음 숨쉬기의 주기가 시작되기 전 숨쉬는 찰라에 내쉬기의 움직임이 정점에 달하면서 안쪽으로 집중된 움직임에 주목한다. asana-prayanama의 입장에서 우리는 단지 숨쉬는 율동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무엇이 자발적인 것이고 적당한 것인지를 집어다가 후설이 "자신만의 球"(the sphere of ownness)라고 불렀던 것으로 집어넣는다. 정신분석학적인 언어에 있어서, 우리가 관심을 집중하는 것(cathect)은 달리 말해 습관적으로 외재적 자연의 영역에서 소외되었던 물리적 공간의 차지함, 혹은 점함에 대한 것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외부 세계와 접촉되어 있는 "물질적인 몸"으로서, 또한 "정신적인 몸"이라는 존재로써, 단지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공간을 점유하고 있기도 한 몸에 대해 깨달았다.
prayanama의 경험은 살아있는 몸에 대한 메를로 퐁티의 철학의 집중된 관점, 내재성과 외재성에 대한 그의 설명과 같이,을 우리들에게 지적해준다. 외부와 내부처럼 관례적으로 사용되어진 말들은 주체-객체의 구별을 무너뜨리려는 메를로 퐁티의 기획에 적대적이다. 그것은 몸과 세계가 연속되어 있다는 관점 때문에 그렇다. "세계가 flesh인 이래로 우리는 어디에서 몸과 세계 사이를 한계짓는 것일까?" 외부와 내부가 사물과 세계 환경으로 정확하며 엄격하게 분할된 것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퐁티는 반대한다. 동시에 내면과 외면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몸의 공간성에 대해 투쟁할 때 의미론적으로만 필요하게 되었다. 퐁티의 공간성, 깊이 또는 차원에 대한 기술적인 언어는 뉴톤주의자들의 절대공간 개념, 나중에 주관성에 의해 제거된, 으로부터 구별되는 내재성과 외재성이라는 구조에 의한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전통철학에 있어서 공간(space)은 무생물에 관련하여 사용되어졌는데, 퐁티는 이와 달리 감각하는 flesh의 경험가능한 완전공간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퐁티의 초점은 의식적으로 점유된 flesh의 집합체로서의 인간 몸에 대해 공간의 의미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집합체(mass)란 인간 구현을 정의하는 내재와 외재의 연속체이다. 인간 몸을 둘러싼 공간은, 요가에서의 말과 마찬가지로 세계와 같으며, 세계에 대한 소우주이다. 이것은 보는 현상에 의해서 예시된다. 지각하거나 감각하는 몸은 그것 자체가 다른 감각하는 존재들의 보는 힘에 의해 가시화되는 만큼 대상들을 가시화한다. 이처럼 보는 것에 대한 활동적인 힘은 볼 수 있는 사물들의 세상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의 열정적인 에워쌈과 함께 서로 뒤섞인다. 그러나, 볼 수 있는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또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존재는 또다른 사람 속에서 붕괴되지 않는다.
"관찰자와 사물 사이의 flesh의 얇음은 관찰자가 그의 물질성에 대해 가시화하는 사물들로 구성된다……같은 이유로 나는 볼 수 있는 중심에 있고, 그것과 떨어져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얇음을 지녔으며, 그렇게 본성적으로 몸으로서 보여지도록 운명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퐁티는 "얇음"(thickness)이나 "물질성"(corporeity)과 같은 단어를 몸 공간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그는 계속해서 "세계에 대해 경쟁하는 것과 달리 몸의 얇음은 대조적으로,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가고, 세계를 flesh로 만들어가는 것에 의해서 사물들의 중심 속으로 가야한다는 단독의 의미만이 있다" flesh가 표현하는 개념은 거칠게 말해서, 정체성 안의 차이에 대한 관념이다. 내 몸의 표면이 나를 둘러싼 대상물들로부터 나를 차이화하는 만큼 이러한 차이화는 사물들의 표면에 동감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깊은 곳에 있다. 차지하고 있거나 닫힌 곳에서 머무르는 내 몸의 공간적인 外形은 그 자체로 내가 내 주위를 동시에 에워싸고 있는 사물들과 실재들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corporeity는 뉴톤주의자들의 개념에서의 물질과는 달리 전통적인 개념인 요소-실체와 결합하는 특성을 지닌 흙, 공기, 불, 물 등에 가깝다. 물질로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지각 가능한 것으로 예시되는 것으로서의 몸은 전적으로 몸 안에 잠겨버린 "바깥"을 허용한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몸과 세계와의 관계가 인식되자마자, 거기에는 내 몸의 분기와 내 세계의 분기가 있고, 세계의 안쪽과 내 바깥쪽, 내 안쪽과 세계의 바깥쪽 사이는 일치한다"
퐁티의 내부성과 외부성에 대한 설명은 즉시 우리의 경험이 정확히 이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통해 프라나야마 수행과 관련된다. 엄격히 말해서 그가 자기세계(self-world)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호흡이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은 명확히 프라나야마의 경험에 적용된다. 마지막으로 출판된 그의 책인 "Eye and Mind"에서 그는 "우리가 '들숨'이라고 말할 때 그 단어는 문자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거기에는 참으로 존재의 들숨과 날숨이 있다"고 하였다.
요가와 전환가능성(Reversibility)
내면과 외면의 관계에 대한 물질성(corporeity)의 본성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gestalt 심리학자들의 '형태 배경'(figure-ground)의 율동성의 개념에 대한 퐁티의 적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gestalt 심리학자들은 모든 지각이 '장소에 따른 현상'(field phenomena) 또는 '형태 배경'(figure-ground)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를 명료하게 지각하는 법칙에 매여져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사물들의 배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잃어버리는 대신에 사물들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들 배경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배경은 사물의 모양새를 지탱한다. 배경은 영역을 제공하거나 사물들을 담아내는 것을 통한 현재일 때, 아마도 그것은 완전히 초점 속으로 편입될 것이다. 가시화는 그것의 보여지지 않는 영역을 통해서 가능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형태(figure)와 배경(ground)의 구조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완결되어있음은 전환될 수 있다. 우리는 의지로써 형태와 배경을 앞뒤로 바뀌거나 되돌릴 수 있다. 특히 자기세계 관계에 대한 그의 이해의 본질인 전환가능성(Reversibility)은 , '형태 배경'(figure-ground) 관계의 중심이며, 퐁티의 철학적 기획의 기반이다. 거기에는 내 몸의 내면과 세계의 외면 "사이의 일치", 그리고 거꾸로 세계의 내면과 내 몸의 바깥면 "사이의 일치"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은유를 원한다면, 몸이 감각되고 몸이 감각하는 것들은 표면(obverse)과 배면(reverse)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이처럼, 삶이 온통 에워싸고 있는, 활동적으로 감각하는 것으로서의 몸과 열정적으로 감각되는 것으로서의 몸 사이에 전환가능한 관계가 있다. 퐁티는 인간 몸에 대한 이들 활동적이고 열정적인 관점들 사이의 상호 구조적인 관계를 주장하면서도, 감각하는 것과 감각되는 존재 사이의 구별을 유지하기 위해 후설에게서 "상호섞임"(interwoven)과 "제3자 안에서"(within one another)라는 말을 받아들인다.
상호 구조화하여 주는 것으로서의 인간 몸에 대한 활동적이고 열정적인 관점에 대해, 전환가능성에 대한 개념은 아마도 요가 수행에 대한 Desikachar의 설명에 근거해서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The Heart of Yoga : Developing a Personal Practice"라는 그의 지침서에서 Desikachar는 "요가는 판단없이 어떤 사람을 바라보는 연습"이라는 것을 상기하도록 수행자들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경험하는 무언가는 우리 존재 안의 깊은 것이다. 요가는 외부적 경험이 아니다"라고 간략히 요가를 정의한다. 그것은 청중들 앞에서 공연되는 다른 예술과 구별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해 할 뿐이다. 우리는 동시에 관찰자와 관찰되고 있는, 둘 모두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수행에 있어서 스스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요가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요가의 입장은 "의식의 목격"(witness consciousness)을 관찰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관찰되는 것"도 관찰하는 것이라고 Desikachar는 설명한다. 수행자의 자기동일성은 관찰가능한 것으로부터 추출된 것이 아니라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에 참여하는 완전성으로서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메모하면서 퐁티는 "진정한 철학"은 "어떤 사람의 외부로의 떠남이 어떤 사람의 내부로의 온축을 이루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vice versa를 이해하는 것"이며, "이 교차와 이 전환을 잡아라. 그것이 마음이다"라고 썼다.
많은 동일한 경로에서 Desikachar는 요가 수트라 1.12에 언급되어 있는 "요가의 상태는 동시적인 격동(abhyasa)과 안식(vairagya)으로 성취된다"는 말을 발견한다. Desikachar가 "감각의 재료들로부터 어떤 사람 스스로 움츠려드는 것"으로 번역했던, pratyahara라는 요가의 기술은 그 자체로 퐁티 이론의 중심인 '형태 배경'(figure-ground)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비교된다. "pratyahara라는 말은 글자그대로 움츠림(withdrawal)이라는 말로 해석되지만, (실제로) pratyahara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외부적 산만함을 제거하거나 배경 속으로 그 외부적 산만함을 집어넣음으로써 어떤 감각 대상(어떤 감각에 대한)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pratyahara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성취 능력을 계발하며, gestalt 심리학에서의 말과 같이 보편 세계와 개별 사물들 사이의 '형태 배경'(figure-ground)을 전환한다. '형태 배경'(figure-ground)에 있어서의 관계는 수행자들에 의해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고 수행할 것인지에 대해(이미지나 소리와 같은 그런 것) 신중하게 채택되어지지만 숨쉬기는 가장 대표적으로 초점을 맞춘 것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배경(background) 안에서 지각한 세계의 나머지를 숨쉬면서 내 속에 집어넣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요가에서는 역설적으로 자기 감각의 진행을 조절하기 위하여 자기 감각을 자기 속으로 움츠리게 한다. 즉, 나는 외부 대상들을 강화시키는 내 감각들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내 지각은 내가 지각을 움츠리게 하는 것을 배우자마자 보다 고양되어 진다. 고전적인 요가 전통에서는 이러한 요가적 집중을 기술하기 위하여 ekagrata 또는 "하나의 첨예"(one pointedness)라고 부른다. 집중이 달성되자마자 초점을 맞춘 점에 의해서 이러한 집중은 지속되고 지탱(dharana)되며, 자아와 대상 사이의 연접이나 관계가 발전되는데, 이것은 중간적 제안이다.(dhyana) 주체는 사람들이 수행하고, 그리고 초점 맞춘 점에 대한 위치가 가정될 때까지 초점 맞춘 점과 투쟁을 벌인다.
결론
이 글의 도입부에서 나는 요가 수행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간단한 요약을 제공하였고, 이른바 순수의식 혹은 samadhi는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을 통해 이론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나는 samadhi라는 개념과 후설의 선험적 주체라는 개념의 이론적인 공통점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samadhi를 달성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확고한 요가 수행을 생각할 때, 수행의 열쇠가 되는 pranayama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제까지 요가와 현상학의 비교를 위해 유일한 기초를 제공하였던 후설의 선험론에 있어서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몸의 표면들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우리는 후설을 배제하지 않고 선험론에 대한 후설의 후기 개정에 대한 퐁티의 발전으로 생산적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몸(lived body)이라는 개념이 열쇠가 되는 퐁티의 존재론적 현상학은 수행에 있어서 몸의 주된 역할을 보다 더 고려하는 요가 수행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내부와 외부에 대한 그의 설명과 전환가능성(reversibility)에 대한 그의 이론은 학자이면서도 수행자인 T.K.V. Desikachar의 책에서 예시화되고 있는 요가에 대한 현상학적인 설명과 공명한다. 퐁티의 생각과 요가 비교에 대한 강조 또는 가치는 비서양적 전통을 확립하기 위해 서양 철학적 구조를 수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시도는 요가 전통에 대해 완전하다고 판단하는 것보다 덜 의미있는 일이다. 차라리 나는 이 간단한 학문을 통하여, 퐁티에 의해 규정된 진행중인 기획에 있어서 요가라는 것이 미래에 연구해야할 현상학자들의 일을 위한 중요한 자료라는 것을 확립하기를 바란다. 즉,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영역으로서의 살아있는 인간 몸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서양의 사고가 "현실 속으로"(down to earth) 돌아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