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5) 2024. 6. 16
사도의 자격
사도행전1:15-26
주님의 승천 이후에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가룟 유다의 최후>
그러던 중에 베드로가 가룟 유다에 대해 언급합니다.
15~19절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가룟 유다의 배신은 제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3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했던 친구이며 동역자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제자들은 세 번 놀랐습니다.
첫 번째,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자들의 길잡이로 오는 것에 놀랐습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를 가리켜서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길잡이’란 곧 안내자, 인도자란 뜻입니다.
두 번째, 그가 그 대가로 대제사장에게 은 30을 받았다는 것에 또 놀랐습니다. 동기가 어떻든 (크든 작든) 돈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추한 모습입니까? 말 그대로 ‘돈을 받고 스승을 판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놀란 것이 있습니다. 예, 가룟 유다가 자살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입니다.
누가는 오늘 본문 18~19절에서 가룟 유다의 죽음을 괄호 안에 넣어 설명하였습니다.
마태는 가룟 유다의 죽음을 보다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마27:3-8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삼십을 되돌려주고 스스로 목매달아 자살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그가 결국 자살을 했고, 그 끈이 끊어져 시체가 땅에 떨어지면서 배가 터지고 창자가 흘러나오는 비참한 모습으로 죽음). 대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유다가 죽은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습니다. 나름 좋은 목적으로 밭을 샀지만, 사람들이 어떤 돈으로 그 밭을 샀는지를 알기 때문에 아무도 거기에 묻히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사람들은 ‘피 값으로 산 밭’이라는 뜻으로 ‘아겔다마’라고 부르면서, 그 밭을 지날 때마다 가룟 유다를 욕하면서 그 땅에 침을 뱉고 저주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상처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가룟 유다에 대해 공적으로 언급하기 꺼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공적으로 가룟 유다의 배신과 죽음에 대해 언급합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배신과 죽음이 구약성경에서 이미 다윗의 입을 통해서 예언된 일었음을 분명히 말하면서, 시편의 말씀을 예시로 들었습니다.
20절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대부분의 성경에는 이 부분에 주가 달려 있습니다. 앞부분(“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은 시편69:25의 인용이고, 뒷부분(“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은 시편109:8의 인용입니다. 약 천 년 전에 이미 다윗 시대의 시편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천 년 전에 쓰인 시편입니다.
물론 다윗이 가룟 유다를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았겠지요.
놀라운 것은 베드로입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그냥 읽으면 예수님의 이야기인지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많은 시편의 말씀 중에서 이 두 군데를 딱 집어서 가룟 유다의 배신과 죽음에 적용하여 해석한 것입니다. 참 놀라운 변화입니다. 2장이 되어야 성령을 받고 변화가 되는데, 그 전에 이미 말씀을 깨달았다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가르치셨을 때 그것을 귀담아듣고 마음에 새겼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성경에 예언된 일이니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겠냐고요? 그렇지요. 그러나 그 악한 일을 해야 할 자 가 가룟 유다로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악한 일을 가룟 유다가 행하였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가룟 유다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악한 일을 스스로 저지른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악한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의 제안>
그런데 20절의 시편의 예언 중 하나는 가룟 유다의 비참한 죽음으로 이루어졌는데, 나머지 하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20절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그 예언의 말씀을 이제 이루자고 제안합니다.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해야 합니다. 그의 직분은 ‘사도의 직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자고 제안합니다.
중요한 신앙의 원리가 있습니다. 자기 자리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구원도,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b)고 말씀하셨습니다. 빼앗는 자가 있고, 뺏기는 자가 있습니다. 또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마19:30)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 직분, 사명 뺏기지 말고 끝까지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새로운 사도를 뽑아 12명을 맞추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11명이면 어떻고 12명이면 어떻습니까? 그러나 유대인의 입장에서 12라는 숫자를 매우 중요한 숫자입니다. 12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이고, 하늘의 수(3)과 땅의 숫(4)가 곱해진 완전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도의 직분을 이어받을 새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사도의 조건>
그리고 새롭게 뽑힐 사도의 기준도 제시합니다.
21~22절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기준이 엄격합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약 3년간 줄곧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120명의 다락방 회원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70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이 자격을 갖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 것일까요? 그것은 초창기부터 늘 같이 먹고 자고 다니면서 예수님의 인간성도 알고, 그의 가르침의 내용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야고보서의 저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훗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함께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자격 미달).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사도라 칭했습니다(자칭 사도). 그러나 사도들은 그를 진정한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반대로 처음에는 함께 했지만 지속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한 사람은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120명이 있는데, 이전에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만 해도 남자만 5천 명이었으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따라다녔겠습니까? 그런데 남은 사람은 120명입니다. 열두 사도와 예수님의 가족들을 빼면 100명도 되지 않았을 겁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하는’ 이 자격을 갖추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우리나라 축구 유튜버 중에 한준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중국 축구는 왜 못하는가?’란 내용을 자신의 유튜브 ‘한준 TV’에 올렸습니다. 자신의 중국 유학 생활을 회상하면서, 그들과 축구를 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유학생들과 중국인들이 함께 섞여 축구팀을 구성했는데, 감독이 선수 선발을 하면, 한국 사람은 11명의 출전 명단에 들지 못해도, 응원을 하면서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답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자신이 주전 명단에서 빠지면 그냥 가버린답니다. 그래서 한준 씨의 말에 의하면 중국 사람들은 팀에 대한 헌신과 배려가 부족한 것이 중국 축구가 성장하지 못하는 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뽑고는 더 이상 제자를 뽑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함께 다닌 사람 중에는 실망감도 컸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인정받지 못함을 알고, 중간에 돌아간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 신실한 사람입니다. 신실함(Faithfulness)이란, 한 번 약속한 것은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로 중간에 포기한 사람은 신실하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끝까지 함께하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처음에도 같이 했고, 그 어려운 시기를 겪었고, 지금도 같이 하는 사람 중에 사도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니다. 부활의 증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2절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사도’(使徒)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라는 직분은 단순한 명예직이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자입니다. 순교자가 될 각오를 하고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사명은 아닙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증인 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새 사도를 뽑는 삼 단계>
그럼 베드로의 제안을 들은 120 문도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모두 베드로의 권위에 순종했습니다. 베드로의 제안대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일에 동의하였습니다.
새 사도를 뽑는 과정을 삼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베드로가 제시한 조건에 합당한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23절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베드로는 자신이 지명하지 않고, 120명의 성도들로 하여금 공천하게 하였습니다(오늘날의 공천위원회). 베드로의 사적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공정한 선거를 위함입니다.
120명의 성도들은 베드로가 제시한 조건에 맞는 사람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바사바와 유스도라는 별명)과 맛디아를 천거하였습니다. 딱 이 두 사람만 사도의 조건에 해당이 되어서 이들을 추천한 것인지, 아니면 더 있었는데 이 두 명만 한 것인지는 확실치는 않습니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은 베드로가 제시한 ‘사도의 조건’에 맞을 뿐 아니라 제자 공동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후보자의 숫자는 제한이 없었으므로 자격이 되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더 있었다면 당연히 천거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만 천거된 것으로 보아, 둘 중 누가 되어도 사도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어 추천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24~25절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기도한 내용을 보면, 두 사람 중에 주님이 택하신 자가 누구인지 보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기를 원한 것입니다(기도는 하나님께 결정권을 드리는 행위).
그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세울 때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뽑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묻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 든다고 해서 세우고 일을 맡겼다가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분을 맡기면 아주 잘 감당할 것 같아서 맡겨 보면 제대로 잘 감당하지 않고 속을 썩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직분을 제대로 잘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데 예상외로 아주 충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직분자를 세울 때는 예상자들을 정해 놓고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비단 직분자를 임명하고 사람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매사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역사의 주권자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뜻을 깨닫고 그대로 행하는 것은 사역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도와주시고, 기도로 준비하는 일에 분명한 뜻을 보이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준비하면서도 과연 그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사람의 계획을 아시고, 마음과 생각을 다 아시고, 그 일의 결국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을 행하든지 하나님께 충분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충분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단계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26절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제비뽑는 것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여겼습니다(제비뽑기의 정확한 방법은 알 수 없음).
결국 뽑힌 사람이 ‘맛디아’였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성경은 더 이상 언급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사도의 사명’을 잘 감당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편,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비뽑기가 끝난 다음, 교회 안에 그 어떤 분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고, 그 결과가 나왔을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따르는 겁니다.
속으로 ‘요셉이 되었으면’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맛디아가 되었으면’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왜 없었겠습니까?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속으로 서운한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이 씨’하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떨어진 당사자 요셉도 하나님의 선택을 인정하고 순종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가장 크게 박수 쳤을 것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 후에도, 그들은 ‘더불어 한 마음으로’, ‘오로지 기도에 힘쓰며’ 성령님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성숙한 자세입니까? 그리하여 머지않아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는 베드로가 제시한 사도의 조건을 물리적으로 충족할 수 없습니다. 그 시대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해석하면, 새롭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은 ‘성령님과 늘 동행하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사도교회 성도들이 ‘요셉’과 ‘맛디아’처럼 사도의 후보로 천거되기에 부족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같이 사도의 자격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그 맡은 직분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뽑히지 않는 ‘요셉’의 신앙과 인격을 닮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택하시든 그 선택을 존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직책을 받았든지 그 받은바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직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일하게 된 것을 감사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끝까지 충성하다가 하나님 나라에 상급과 이 땅에서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