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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역사 개론 (3) : '라오스 왕국'과 제1차 연립정부
History of Laos since 1945
1945년 이후의 라오스 역사 (상편)
주의 : 이 부분에서 라오스어 고유명사들을 표기할 때 채택한 방식은 마틴 스튜어트-폭스(Martin Stuart-Fox)가 <라오스 역사>(A history of Laos)에서 사용한 자역(transliteration, 字譯) 방식이다. 따라서 다른 부분에서 사용하는 표기방식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역주: 역자는 번역 과정에서 일반적인 표기를 복원하여 병기해 놓았다.) |
1. 라오스 왕국
1.1. 개 요
시사왕 웡(Sisavang Vong, ເຈົ້າມະຫາຊີວິດ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 [재위] 1904~1945 및 1946~1959) 국왕의 조카였던 펫사랏 라따나웡(Phetxarāt 혹은 Phetsarath Ratanavongsa: 1890~1959) 왕자는 [3개의 공국으로 나눠져 있던 라오스 내에서] 루앙프라방(Luang Prabang) 왕국(=공국)의 총리로서 그 지역 바깥에 관한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27일 일본 군으로부터 위앙짠(Vientiane, 비엔티안) 지역의 관할권을 장악했다. 당시 프랑스는 이미 루앙프라방을 통제 하에 두고 있었고, 참빠삭 왕국(Champāsak 혹은 Kingdom of Champasak) 왕자(=참빠삭의 통치자)의 조력을 받아 라오스 남부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회복하고 있었다. 펫사랏 왕자는 시사왕 웡 국왕이나 시사왕 와타나(Sisavang Vatthana 혹은 Savang Vatthana, ເຈົ້າສີສະຫວ່າງວັດທະນາ: 1907~1978 혹은 1984, [재위] 1959~1975) 왕세자와는 도타운 관계가 아니었다. 시사왕 웡 국왕이 프랑스에 대한 충성심을 바꿀 기미가 안 보이자, 펫사랏 왕자는 루앙프라방 왕위라는 이름 하에 국가 통일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이후 라오스의 독립도 선언했다.
(사진) 호부(호신용 목걸이)에 들어 있는 펫사랏 라따나웡 왕자의 초상화. 많은 라오스인들은 펫사랏 왕자가 주술적 초능력을 가졌었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호부들은 오늘날에도 라오스 전역에서 널리 판매되고 있다.
1945년 9월, 위앙짠을 장악한 정부가 어떤 정부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중국 군이 이 지역으로 들어왔다. 중국 군 지휘관이 무엇을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는 펫사랏 왕자를 인정했고, 중국 군은 루앙프라방에서 프랑스 군대를 무장해제시켰다. 하지만 연합국 정부들은 펫사랏 왕자의 정부를 승인하길 거부했다. 10월이 되자, 프랑스에서 정권을 잡은 샤를르 드 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장군이 시사왕 웡 국왕에게 전보를 보내, 펫사랏 왕자의 루앙프라방 왕국 총리 직위를 해제시키라고 조언했다. 펫사랏 왕자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시사왕 웡 국왕의 폐위를 선언했다.
펫사랏 왕자는 자시의 이복 동생인 수파노웡(Suphānuvong 혹은 Souphanouvong, ສຸພານຸວົງ, 수파누봉: 1909~1995) 왕자에게 국방부장관 겸 내무부장관이라는 직함을 주어 신정부의 방위 활동을 조직토록 했다. 수파노웡은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상태였고, 전쟁 기간 중의 대부분 시간을 베트남에서 보낸 인물이었다. 그는 베트남 체류 당시 호찌밍(Ho Chi Minh, 胡志明, 호치민: 1890~1969)의 밀접한 지지자이자 동맹세력이 된 상태였다. 수파노웡의 조언에 따라 호찌밍의 군대는 펫사랏 왕자의 정부를 지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베트남 영내에서 프랑스에 대항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First Indochina War: 1946.12.19.~1954.8.1.)을 벌이고 있었고, 베트남의 호찌밍 세력은 항상 이 전쟁에 제일의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라오스로 파견할 병력의 여유는 별로 없는 상태였다.
펫사랏의 친동생인 수완나 푸마(Suvannaphūmā 혹은 Souvanna Phouma, ເຈົ້າສຸວັນນະພູມາ: 1901~1984) 왕자는 공공사업부 장관에 임명됐다. 수파노웡 왕자와 함께 베트남에서 귀국한 이들 중에는 [훗날 공산정권의 지도자가 될] 까이손 폼위한(Kaisôn Phomvihān 혹은 Kaysone Phomvihane, ໄກສອນ ພົມວິຫານ: 1920~1992)도 있었다. 까이손은 베트남-라오스 혼혈인으로서, 공산주의 운동에 헌신하고 있었다. 그는 때마침 라오스 공산당의 지도자가 됐고, 라오스 내에서 베트남의 주된 첩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1945년 말 경에는, 이후 30년간 이어지는 라오스의 정치적 갈등을 주도할 모든 주요 지도자들이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펫사라 왕자가 이끈 '라오 이싸라'(Lao Issara, 자유 라오스) 운동 정권의 과장된 위세는 대체로 허황된 것이었다. 남부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군대가 위앙짠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아준 것은 북쪽의 절반을 점령했던 중국 군대의 덕분이었을 뿐이다. 펫사라 정권 내에 존재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실제로 매우 미약하긴 했지만, 태국과 연합국 정부들은 그들의 명백한 역할에 의혹을 두고 있었다. 1946년 3월, 마침내 약탈을 중단해달라면서 중국 군을 설득할 수 있었고, 그들은 중국으로 돌아갔다. 프랑스에게 이 사건은 사완나켓(Savannakhēt 혹은 Savannakhet, 사반나켓)으로 진출하라는 신호였다.
수파노웡 왕자는 자신의 잡동사니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가 위앙짠에 당도하기 전에 그들과 대면했다. 하지만 수파노웡의 군대는 타켁(Thākhaek 혹은 Thakhek)에서 대패했고, 그 자신도 중상을 입었다. '라오 이싸라' 정권은 태국으로 피신하여 방콕에 망명 정부를 수립했다. 4월24일 프랑스는 위앙짠을 점령했고, 5월 중순에는 루앙프라방에 당도하여 프랑스를 고마와하는 시사왕 웡 국왕을 구해냈다. 프랑스는 시사왕 웡 국왕의 충성심에 대한 보상으로 이해 8월에 그를 '라오스 국왕'으로 선언했다. '참빠삭 왕국(=공국)'은 폐지됐다. 하지만, 이곳의 제후였던 보운 오움(Bunūm na Champāsak 혹은 Boun Oum Na Champassak, ບຸນອຸ້ມ ນະ ຈຳປາສັກ: 1911~1981) 왕자에게는 보상으로 '왕국 감찰관'(Inspector-General of the Kingdom)이란 직함이 주어졌다.
1.2. 프랑스의 라오스 개량 계획
프랑스는 이후 라오스에 근대국가의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때늦은 노력을 시작했다. '원주민 경비대'(Garde Indigène)는 '라오스 국립 경비대'(Lao National Guard)로 교체됐고, '라오스 경찰'도 창설됐다. 1946년 12월에는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선거도 실시했는데, 이 선거는 남성 유권자들의 보통선거로 실시됐다. 제헌의회는 1947년 헌법을 제정하고, 라오스의 입헌군주제 및 프랑스 연방(French Union) 내에서의 "자치 국가" 지위를 확인했다.
위앙짠에는 고등학교 1곳이 개교했고, 빡세(Pākxē 혹은 Pakse, 팍세), 사완나켓, 루앙프라방에도 새로운 학교들을 세웠다. 비록 자격을 갖춘 직원들은 굉장히 부족했지만, 새로운 병원들과 진료소들도 설치됐다. 더 많은 라오스인 공무원들을 단기간에 집중교육시킬 수 있는 기관1곳도 설립됐다.
1947년 8월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고, 의원 35명이 선출됐다. [펫사랏 왕자의 이복 동생이기도 한] 왕실 종친 소우완랏(Suvannarāt 혹은 Souvannarath: 1893~1960) 왕자가 내각 수반인 라오스의 총리가 됐다. 그는 내각의 거의 모든 각료들을 라오-롬(Lao Loum 혹은 Lao-Lum: 계곡 평원의 라오족) 계통의 영향력 있는 가문의 출신 인사들로 구성했다. 라오스 정치에서 이러한 특징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다양한 과도기의 정당들이 출현했다 사라졌지만, 대략 20개 정도의 동일한 가문들이 서로 관직을 다투는 가운데 권력을 주고받으며 대체했을 뿐이다.
1.3. 라오스의 독립 : 1950년
1949년,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입지가 점점 악화되면서 라오스의 지속적인 호의적 태도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더 많은 양보가 이뤄졌고, 라오스의 각료들이 외무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장악하게 됐다. 하지만 라오스는 자국 경제를 프랑스의 원조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독립은 실제의 현실보다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었다. 1950년 2월 라오스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고, 미국이나 영국 같은 국가들이 라오스 독립을 인정했다.
라오스는 유엔(UN) 가입도 신청했지만, 소련(Soviet Union)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하지만 이 모든 움직임들이 프랑스가 여전히 라오스에서 핵심적인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춰주진 못했다. 라오스의 외무, 국방, 재무 부문은 사실상 프랑스의 통제 하에 있었고, 법무 부문도 오직 느린 속도로만 라오스의 각료들에게 이관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프랑스 육군(armée de terre)이 라오스에서 자유로운 작전권을 갖고 있었고, 그들이 라오스 내각과 상의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라오스 군대에 대한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 태국에 망명 중이던 '라오 이싸라' 임시정부는 위앙짠에 있던 라오스 왕국 정부를 프랑스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보면서,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세력의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다. 스파노웡 왕자가 지휘하는 '라오 이싸라' 반군은 잠시 동안 태국을 근거지로 작전을 벌일 수 있었고, 약간의 성공도 거뒀다. 특히 사완나켓 주변 지역에서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1947년 11월, 방콕에서 쿠테타가 발생해 쁠랙 피분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 1897~1964) 원수가 권력에 복귀했다. 피분송크람은 미국의 조언을 받아 프랑스와의 관계를 복원하려 했고, '라오 이싸라' 반군의 기지들을 폐쇄했다. 이후 '라오 이싸라' 반군이 라오스로 침투하는 작전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통제한 지역에만 기반을 둘 수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라오 이싸라' 지도부 내에 있던 비-공산주의(중도+반공) 성향 지도자들에게는 정치적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펫사랏 왕자와 수완나 푸마 왕자는 그러한 댓가를 지불할 마음이 없었다.
1949년 1월, 까이손 폼위한이 이끄는 라오스 공산주의자들은 베트남 지역에서 공산당이 통제하는 새로운 라오스 반군을 창설했다. 이들은 명목상 '라오 이싸라' 정부에 충성했지만, 실제로는 인도차이나 공산당(Indochinese Communist Party: ICP)의 지령을 받고 있었다. 수파노웡 왕자는 새로운 반군을 관리함에 있어서 공산주의자들 편에 섰다. 이로 인해 '라오 이싸라' 세력은 급속히 분열했다.
1949년 7월, '라오 이싸라' 내의 비-공산주의 계열 지도자들은 망명정부의 해산을 선언했다. 그리고 수완나 푸마 왕자를 비롯한 비-공산주의 계열 지도자 대부분은 사면을 받고 라오스로 귀국했다. 비-공산주의 계열 지도자 중 망명생활을 계속한 이는 펫사랏 왕자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때부터 이전에 갖고 있던 영향력을 상실했다. 1951년 8월, [평생 4번에 걸쳐 총리를 맡게 되는] 수완나 푸마 왕자가 처음으로 총리가 되면서, 라오스 비-공산주의 진영의 새로운 지도자라는 위상을 확인시켰다.
2. 라오스의 공산주의
'인도차이나 공산당'(ICP)은 호찌밍 등이 1930년 홍콩에서 창설한 '(구) 베트남 공산당'(Vietnamese Communist Party, Việt Nam Cộng sản Đảng)을 모태로 하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최초 베트남인만 당원으로 받아들였지만, 모스크바(Moscow)에 있던 '코민테른'(Comintern: '공산주의 인터내셔날'[Communist International] 혹은 '제3차 인터내셔날'[Third International]로도 불림)의 지령에 따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French Indochina)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받았다. ICP는 1930년대에 라오스인 당원 극소수를 입당시켰다. 그들은 주로 약간의 서구식 교육을 받은 교사들과 중산층 공무원들이었다.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보면, 라오스는 정통적인 공산주의 봉기 이론에 잘 들어맞지 않았다. 주석 광산에서 일하던 일부 광부들을 제외하고는 임금 노동자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라오스에는 '농지 문제'(agrarian question)도 존재하지 않았다. 라오스 농민 중 90% 이상이 농기를 소유한 쌀농사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와 같은 지주들도 없었고, 농촌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무산 노동자) 계급이 될 소작농도 없었다. 따라서 라오스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착취할만한 민중들의 고통은 식민통치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1940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라오스인들은 프랑스 세력을 시암(=태국) 및 베트남에 맞서 자신들을 보호해줄 필수적인 힘으로 여기고 있었고, 펫사랏 왕자와 소우완나 푸마 왕자 같은 상류층 출신 지도부가 나서고 난 후에야 라오스 민족주의가 출현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라오스인들에게 라오스 공산주의가 베트남과 밀접하게 연관됐다는 사실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CP는 1940년대 말에 라오스인 핵심 활동가들을 입당시켰다. 그들 중 일부는 까이손처럼 베트남계 혼혈인들이었고, 그 밖의 인물들은 누학 품사완(Nūhak Phumsavan 혹은 Nouhak Phoumsavanh, ໜູຮັກ ພູມສະຫວັນ: 1910~2008)처럼 베트남인과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프랑스의 신뢰도가 실추하고 '라오 이싸라' 망명정부가 실패한 일은 라오스인 공산주의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왜냐하면 1949년 이후의 반-식민지 투쟁은 오직 베트남 영내에 위치한 반군 기지들에서만 수행됐고, 그 후원자들 역시 베트남 공산주의자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라오스 공산주의자들은 수파노웡 왕자를 수장으로 내세워 '자유 라오스 전선'(Free Laos Front: '신 라오 이싸라'[Naeo Lao Issara])이라는 "전선" 조직을 창설했다. 이 조직은 이후 '라오 조국 저항정부'(Resistance Government of the Lao Homeland)로 개편됐고, 1975년까지 '라오 조국(=빠텟 라오)'(Pathēt Lao 혹은 Pathet Lao, ປະເທດລາວ: 파텟 라오)이라는 말이 라오스 공산주의 운동의 일반 명사로 사용됐다.
공산주의자들은 재빨리 고지대 소수민족 대표들을 '자유 라오스 전선' 지도부로 승진시켰다. 여기에는 북부지방의 몽족(Hmong, 흐몽족) 지도자 파이당 로블리아야오(Faidāng Lôbliayao 혹은 Faidang Lobliayao), 식민지 시대의 남부지방 반군 지도자였던 엉 꼼마담(Ong Kommadam 혹은 Ong Kommadam)의 아들이자 그 지역 라오-텅(Lao-Thoeng 혹은 Lao Theung, ລາວເທິງ: 능선의 라오족) 주민들의 지도자였던 시톤 꼼마담(Sīthon Kommadam 혹은 Sithon Kommadam: 1910~1977) 같은 이들이 포함됐다. 공산주의자들의 근거지는 소수민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들 지도자들을 포용하는 일은 이 지역들에서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결집하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라오스 공산당 지도부의 실질적인 권력은 라오-롬 인들이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1955년, 라오 인민혁명당(Lao People's Revolutionary Party 혹은 Phak Paxāxon Lao: LPRP)이라는 별도의 라오스 공산당 조직이 창설됐다. 까이손 폼위한이 서기장을 맡고 누학 품사완이 부서기장을 맡은 LPRP의 정치국(Politburo: [역주] 각국 공산당의 중앙 집행기구) 위원들은 라오-롬 출신 인사들로 구성됐다.
라오스 공산당은 베트남 공산당의 감독을 받았고, 이후 20년 간의 전쟁기간 중 '빠텟 라오' 운동은 무기, 자금, 훈련 등을 베트남(=북-베트남[월맹])에 의존했다. 또한 많은 수의 베트남 군 병력이 '빠텟 라오' 반군과 함께 전투에 나섰고, '빠텟 라오' 반군 지휘관들은 항상 베트남인 "고문관"과 동행했다. 라오스의 반공 정부는 항상 '빠텟 라오'가 베트남의 꼭두각시들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러한 평가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기도 했다.
라오스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공통의 목표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첫번째 목표는 먼저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고, 이후 사회주의(socialism) 국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라오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이러한 목표들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산주의 이념은 "플로레타리아 국제주의"(proletarian internationalism)가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의무라고 가르쳤다. 라오스 공산주의자들은 자발적으로 베트남의 지도를 수용했고, 그것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빠르면서도 실제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빠텟 라오' 운동은 심지어 정부를 전복시킨 후에도 국가를 통치하는 데 베트남 군대 및 베트남 정치 고문들에 의존했다. 라오스 공산 정권과 베트남의 관계는 동유럽 공산국가 정부들이 구-소련과 가졌던 관계와 유사했다. 하지만 라오스 공산당이 베트남의 지원을 얻는 댓가는 라오-롬 다수파에서 적대감을 얻는 형태로 나타났다. 라오-롬 인구는 프랑스를 싫어했던 것보다 더욱 강한 정도로 베트남을 싫어했다. '빠텟 라오'가 라오-롬 지역에서 지지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에 가서야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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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53년 삼느워(Xam Neua) 지역에 모여 있는 '빠텟 라오' 반군들의 모습. --- 촬영자 미상, 출처: Kenneth Conboy, War in Laos 1954-1975, Carrollton, TX, 1994. |
3. 제네바회담과 제1차 연정 (1954년)
3.1. 개 요
* 이 부분의 추가적인 정보는 '제네바 회담(1954년)'(Geneva Conference 1954) 항목을 참조하라. |
1950년대 초, 위왕짠의 라오스 왕국 정부는 지속적인 불안정을 보이고 있었다. 프랑스 및 미국의 원조와 함께 한 프랑스 세력의 유입은 경제적 붐을 조성했다. 하지만 도시 지역들에서는 높은 물가인상율을 보였고, 시골 지역 대다수 농민들에겐 그다지 이익이 되지 못했다. 자금이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되면서, 보건과 교육 같은 분야들의 발달은 저해받고 있었다.
정부는 연약하고 파벌싸움에 시달리고 있었고, 주요 정치인들이 외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자기 자신이나 친인척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면서 부정부패도 증가했다. 소우완나 푸마 왕자는 비-공산주의 계열 정치인 중 여전히 선도적 위상을 갖고 있었고, 국왕의 신임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보운 오움 왕자가 이끄는 우익 진영은 '빠텟 라오' 운동과 연립정권을 꾸려 국가화합을 시도하던 소우완나 푸마 왕자의 정책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감춰주던 역할을 할 뿐이던 허울 뿐인 독립이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1953년, 라오스 왕국은 프랑스로부터 완전하게 독립했다. 하지만 베트남의 지원을 받고 있던 '빠텟 라오'가 국토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빠텟 라오'가 지배하는 지역은 대부분 베트남과의 국경선을 따라 위치한 산악지대였고, 거주하는 인구도 매우 적었다. 또한 위앙짠의 통치력이 단 한번도 환영받지 못했던 남부지방의 일부 지역 역시 '빠텟 라오'의 지배 하에 있었다. 프랑스 국력의 쇠퇴는 라오스 왕국 정부를 취약하게 만들었고, '빠텟 라오'와 베트남의 연합 군대는 루앙프라방 인근 30km 지점까지 진격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점차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자, 프랑스 국내에서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더욱 강하게 자라났다. 1954년 5월 프랑스 군대가 디엔비엔푸 전투(Battle of Dien Bien Phu)에서 '비엣민'(Viet Minh, 베트남 독립동맹)의 공산주의-민족주의 연합군에 패배했다. 군사적 관점에서 이 전투의 결과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정치적 관점에서는 프랑스에 재앙적인 결과였다. 인도차이나 정책과 관련하여 프랑스에서는 정권이 총사퇴했고,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Pierre Mendès France: 1907~1982)가 총리가 됐다. 스위스의 제네바(Geneva)에서는 이미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한 국제회의(=1954년 제네바 회담)가 진행 중이었는데, 이 회담은 '디엔비엔푸 전투'로 인해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제네바 회담에서 라오스 문제는 부차적인 의제였고, 라오스에 관한 의사결정은 베트남 문제의 해법에 따라 규정됐다. 이 회담에서 라오스 왕국의 대표는 [한 차례 총리를 역임한 바 있는] 푸이 사나니꼰(Phuy Xananikôn 혹은 Phoui Sananikone: 1903~1983) 외무부장관이었고, '빠텟 라오' 측 대표는 베트남 공산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포함되어 참석했던 누학 품사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강대국 열강들이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업서버 그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 제네바 회담은 라오스의 독립을 인정했고, '빠텟 라오' 운동을 포함한 라오스의 모든 정파들이 참여하는 연립정권을 구성하여 중립국가 지위를 부여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제 라오스에서 모든 외세들의 군대가 철수한 후 휴전이 이뤄져야만 했다. 또한 '빠텟 라오' 반군의 해체, 연립정부의 구성, 자유선거의 실시도 이뤄져야만 했다. 그러나 제네바 회담의 결과에 관한 뉴스가 라오스에 전해지자, 반공 정치인들 사이에서 폭력적인 분노가 발생했다. 이들의 분노는 회담 내용에 합의해준 푸이 사나니꼰 외무부장관에게 맞춰졌다. 1954년 9월, 우익 세력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은 갱 한명이 푸이 외무부장관의 암살을 시도했다. 푸이 외무부장관은 경상을 입었지만, 꾸 워라웡(Ku Vôravong 혹은 Ku Voravong) 국방부장관은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완나 푸마 왕자가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까따이 돈 사소릿(Katāy Don Sasorit 혹은 Katay Don Sasorit [Sasorith], ກະຕ່າຍ ໂດນສະໂສລິດ: 1904~1959)이 총리가 됐다.
(사진) 수완나 푸마 왕자. 중도 성향이었던 그는 1951~1954, 1956~1958, 1960, 1962~1975 등 총 4차례에 걸쳐 라오스 총리를 지냈다. 보운 오움(우익), 수완나 푸마(중도), 수파노웡(좌익) 왕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라오스 정계에서 각 정파를 대표했던 "3 왕자"(Three Princes)로 불린다.
3.2. 제네바 회담 이후
제네바 회담이 끝나고 2달 후, 북-베트남은 라오스 정부에 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 그에 따라 '그룹 100'(Group 100)이라는 무장 단체가 조직됐다. '그룹 100'의 본부는 반나메오(Ban Namèo 혹은 Ban Nameo)에 설치됐다. 이 조직의 구성 목적은 '빠텟 라오'의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시키며,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베트남은 라오스 동부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장악력을 강화하는 일 말고는 제네바 회담에 큰 관심도 없었고, 라오스에 중립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일도 흥미로와 하지 않았다.
까따이 총리는 수완나 푸마 총리보다 섬세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네바 회담의 합의사항 실행을 자신의 능력 밖의 일로 보았다. 핵심적인 문제는 프랑스 군대가 예정대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고지대에서 '빠텟 라오' 반군을 지원하던 베트남 군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라오스 정부는 그들을 몰아낼 수단을 갖고 있지도 못했다.
제네바 회담의 합의내용에 따른다면, '빠텟 라오' 반군들은 [북동부 오지 지방들인] 후워판(Houaphan) 도와 퐁살리(Phongsālī 혹은 Phongsali) 도에 모여 해산해야만 했다. 그러나 '빠텟 라오' 세력과 베트남은 그렇게 하는 대신 이 지방들이 자신들의 "해방구"(liberated areas)라고 지속적인 위협을 가하면서, 중앙 정부의 관리들이 이 지역에서 권한을 행사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이 지역 몽족들은 과거 프랑스를 지지하다 새로운 라오스 정부에 대한 지지로 입장을 바꿨는데, '빠텟 라오'와 베트남 세력은 이들 몽족들을 이 지역들에서 쫒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남부지방에서도 지하조직 군대를 유지했다.
일년 동안의 교착 상태가 지난 후, 정부는 1955년 12월 국토의 나머지 지역들에서 총선을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까따이 정권이 패배하고 수완나 푸마 왕자가 다시금 총리로 복귀했다. 새로운 국회는 중도 연립 정부 구성을 결정했다. 수완나 푸마 왕자는 항상 라오스가 외부의 간섭만 없다면 국내 세력 간의 입장 차이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좌익 지도자이자] 이복 동생인 수파노웡 왕자와 의견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은 제네바 회담의 내용을 비준하지 않았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 [재임] 1953~1961) 행정부, 특히 호전적인 반공 입장을 지니고 있던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 국무장관은 라오스의 우익 정치인들과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덜레스의 입김이 작용하면서 미국은 베트남에서 진행 중이던 프랑스의 전쟁을 후원했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가 떠나기 시작하자, 덜레스는 베트남에서 반공 세력을 지원하면서 호찌밍의 세력이 남-베트남을 장악하는 것을 막고 있던 프랑스의 역할을 미국이 떠안아야 된다고 결심했다. 덜레스는 라오스에서 반공 정부를 유지하여 북-베트남이 라오스를 남-베트남으로 군수물자를 운송하는 루트로 활용하는 일을 막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사진) 라오스 반공 우익 진영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보운 오움 왕자. 그는 부왕의 뒤를 이어 참빠삭 왕가의 수장이 됐지만, 통일된 라오스 왕국 탄생을 명분으로 참빠삭에 관한 권리를 스스로 반납했다. 이어 잠시 총리를 역임한 후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하기 전까지, 경제적인 사업에 전념하는 동시에 정계의 권력 브로커 역할도 담당했다.
표면상 미국은 제네바 회담의 합의내용을 존중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 협정의 금지조항을 피해나가기 위해, 미 국무부는 1955년 12월 윙앙짠에 '사업평가 사무소'(Programs Evaluation Office: PEO)라는 명칭의 민간기구로 위장한 군사 사절단을 설치했다. PEO는 1955년 12월 13일부터 운용을 시작했고, 문민 원조 사업소로 위장했지만 그 직원들은 군사 요원들이었고 책임자도 장성급 장교였다. 그들은 모두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었고, 마 국방부의 현역 복무자 명단에서도 배제되어 있었다.
1955~1961년 사이에, PEO는 점차로 프랑스 군사 사절단의 업무를 대체해나가면서 왕립 라오스 육군(Royal Lao Army: ARL)과 반공 성향의 몽족들에게 [군사적인] 장비 및 훈련을 제공했다. 미국은 이런 방식으로 '왕립 라오스 육군'이 야전에서 활동하는 모든 비용을 부담했다. 그것은 소련과 베트남이 '빠텟 라오'의 운용 비용 전부를 대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이었다. 또한 미국 중앙정보부(CIA)는 정보 및 정치적 방향에 관한 지침을 제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빠텟 라오'를 정부 내로 끌어들여 라오스를 "중립" 국가로 만들려던 수완나 푸마 왕자의 정책을 강력히 반대했다. 실제에 있어서 라오스의 중립성이 의미하는 바는 베트남으로 하여금 라오스 동부를 영구적으로 점령하게 만들고 '빠텟 라오' 운동이 자신들의 군대를 야전에 보전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말했다. 수완나 푸마 왕자는 라오스 내의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베트남이 철수를 거부하고 '빠텟 라오'도 무장해제를 거부했기 때문에 항상 실패하고 말았다.
1956년 8월, 총리였던 수완나 푸마 왕자는 [좌익의 명목상 수장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수파노웡 왕자와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형 펫사랏 라따나웡 왕자 덕분이었다. 펫사랏 왕자는 10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1956년에 라오스로 귀국하여, 1959년 사망할 때까지 원로 정치인으로서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후 연립정부가 구성되어 좌익 진영의 수파노웡 왕자가 기획재건부 장관을 맡았고, '빠텟 라오'의 또 다른 지도자 푸미 웡위찟(Phūmī Vongvichit 혹은 Phoumi Vongvichit, ພູມີ ວົງວິຈິດ: 1909~1994)이 종교예술부 장관을 맡았다.
'빠텟 라오'는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후워판 도와 퐁살리 도를 다시금 정부에 재통합하도록 허용하겠다고 합의했고, '빠텟 라오' 반군도 '왕립 라오스 육군'에 통합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연립정부는 또한 라오스가 향후 중립국이 될 것이며, 자국 영토가 어떠한 이웃 국가들에 대해서도 공격용 기지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보장하기도 했다. 연립정부는 1956년 11월에 공식 출범했고, 1958년 5월에는 상당히 자유로운 총선도 실시됐다. 이 선거에서 '빠텟 라오'는 총 21석의 의석 중 9석을 차지했고, 수파노웡 왕자도 전국 최다 득표율로 위앙짠 선거구에서 당선됐다.
(사진) 라오스 공산당의 명목상 수장이었던 수파노웡 왕자. 그는 1975년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 초대 대통령(=국가주석) 직에 올라 1986년 은퇴할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그는 프랑스 국립토목학교(École Nationale des Ponts et Chaussées)에서 공학을 전공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등 외국어도 8개나 공부한 엘리트였다.
프랑스, 영국, 소련, 중국, 그리고 북-베트남 및 남-베트남 정부 모두 1956년의 합의를 환영했다. 미국은 반대하는 의미에서 침묵했지만, '빠텟 라오'가 정부에 참여할 경우 원조를 삭감하겠다던 이전의 경고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은 막후에서 라오스의 반공 성향 정치인들을 접촉하여, 양측의 합의에 반대하도록 자극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런데, 베트남과 라오스의 공산주의자들 역시 1956년 합의 정신을 존중할 의사가 없었다. 그들은 이 협정을 순전히 전술적 합의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빠텟 라오'는 일부 무기들을 반납했고, '빠텟 라오' 소속 반군 2개 대대가 명목상 '왕립 라오스 육군'의 예하 부대로 등재되기도 했다. 하지만 까이손 폼위한이 이끌고 있던 '빠텟 라오'의 주력군 대부분은 베트남 국경지대에 위치한 기지들로 퇴각하여 사태의 발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트남 군대 역시 라오스의 최전방 산악지대를 안전지대 및 남쪽으로 군수물자를 보내기 위한 통로로 이용했다. 이 루트는 훗날 '호찌밍 루트'(Ho Chi Minh Trail)로 불리게 된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총리였던 수완나 푸마 왕자는 연립정부의 단결을 위험에 빠지게 만들기보다는 베트남의 활동에 눈을 감아버리는 편을 선택했다. 하지만 미국의 CIA는 이러한 사실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가 관할하던 미국의 대 라오스 원조액은 (고작 300만명의 인구를 가진 이 나라에) 매년 4천만 달러 규모로 지원됐지만, 수파노웡 왕자가 관할하던 기획재건부를 건너띈 채 라오스 군대와 친미 성향의 정치인들에게 직접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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