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씨 인물
고광오(高光五. 자-응삼, 호-국창. 장흥인)
진사 부진의 후손이다.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심지가 고결하여 주변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다. 덕과 학문이 높아 주위의 우러름을 받았으며 서적을 많이 구입하여 자제와 후진들을 가르쳤다. 부귀와 공명을 구하지 않고 깊은 자연에 묻혀 유유자적하였다.
고동재(호-성재. 1921-1997. 무안읍 용월리 상동. 장흥인)
공은 아버지 광일과 어머니 달성배씨 사이에서 삼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이 가난하여 많은 공부를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천성이 총명하고 재질이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치는 능력을 보였다. 야학에서 늦은 공부를 하다가 일로에 있는 실습학교를 졸업하고 무안군의 공무원이 되었다. 공의 근면하고 성실한 근무에 동료와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던 중년에 다른 길을 가기 위해 공직을 그만두었다. 서울에 올라가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크게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알뜰하게 모은 돈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문중과 마을을 위해서 사용하여 주민과 문중 종원들을 감동시켰다. 마을회관 건립과 선조사업은 그 대표적인 정성이었다. 이에 주민들은 공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마을 앞에 공적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고두문(高斗文. 자-문약. 호-약재. 무안읍 용월리 상동. 1614 - 1668. 장흥인)
기묘명현 좌랑 운의 후손이고 목사 청백리 경조의 증손이다. 공은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또한 절개가 있었다. 효종 5년(165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무안읍 용월리 약곡 마을에 그의 호를 딴 제각이 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종조인 의후와 재종조인 순후를 따라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여러 고을에 보내었다. 공은 소모유사로서 병사와 양곡을 모아 근왕하러 가고자 하였는데 남한산성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동안 모은 곡식들을 전주 감영에 보내어 군수에 보태쓰도록 하고 귀향하였다. 1657년 당파싸움의 영향으로 자산서원을 훼철하려고 하자 이듬해 공의 주도로 ‘현사의 훼철은 불가한 일’이라고 주변고을에 발문통고하고 중의를 모아 훼철의 불가함을 상소하였다. 이어 곤재 후손의 상소와 윤선도의 ‘만언소’도 자산서원 훼철불가의 상소를 올렸다. 1659년 공과 유림들이 올린 상소가 사설이라 탄핵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어 부산광역시 기장군으로 유배당하였다. 1661년에 풀려났으나 1663년에 다시 경상남도 웅천에 유배되었고 1666년에서야 유배가 풀리게 되었다. 자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유배생활 중 주변 유림들의 격려와 유배의 안타까움을 기술한 약재문집이 남아있으며 市南 유계가 용월리 약곡에 있는 재실의 기문과 행장을 지었다. 정조 때 司僕寺正을 증직 받았다.
고만희(명종대. 자-자성, 호-돈쌍. 일로읍 복룡리 회산. 장흥인)
용호동과 한 마을이었을 때 무안군에서 발행한 무안유래지에서는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온 성씨는 나주 임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회산마을에는 신씨가 제일 처음 들어왔으나 지금은 없고 다음에 장흥 고씨, 나주임씨, 전주 이씨 순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장흥고씨 입향조는 1500년대 중반에 들어온 고만희씨이다. 공은 무과에 급제하고 문화현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던지 이임할 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 유임을 간청할 정도였다. 공에 관한 송덕비가 그곳에 있다. 후일 모략을 피해 이 마을로 들어왔다. 아랫 마을인 두래미 마을에 장흥고씨 제각인 장영재가 있다.
고부진(高傅進. 자-자점. 호-만취정. 1586-1680. 무안읍 용월리 상동. 장흥인)
고응인의 아들로 1612년 증광시에 생원으로 3등 합격하였다. 사계 김선생과 종유하였다. 학문이 순수하고 깊었으며 문장이 화려하고 담백했다. 의리가 있었으며 분별함이 있어 분명히 나아가 따랐다. 덕을 갖추어서 많은 제자를 거두었다. 공의 묘가 고절리 오리정 마을 뒤에 있다.
고시운(高時運. 1854 -1937. 청계면 남성리 남성동. 장흥인)
공은 일제강점기 때 高膏藥이란 널리 알려진 고약을 제조하여 팔았던 사람이다. 원래 광산구 대촌에서 동학군으로 활동하다 일본군에게 잡혀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 이곳으로 옮겨와 공부를 해 한의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한의학 뿐만 아니라 조각 그림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공이 만든 고약이 종기에 얼마나 잘 들었든지 당시 삼남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고언수(高彦壽. 호-수암. 1550-1597. 시호-정렬. 무안읍 용월리 상동. 장흥인)
공은 위풍이 당당했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1570년 무과에 급제해 어모장군행용양위사과로 훈련원봉사를 역임했다. 또한 배향공신(配享功臣)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정유재란에서는 분전하다 적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록에 오르고 호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정렬이라 내리고 금산사에 배향되었다. 공의 행적은 호남절의록과 무안군지에 기록되어있다. 묘는 몽탄면 학산에 있다.
고영호(高榮豪. 자-사걸, 호-쌍괴당, 선조대. 청계면 연동. 장흥인)
원래는 영광에서 세거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만나 해남으로 가서 살았다. 그 후 外艱喪(외간상 - 아버지를 여의었음)을 당해 편모를 모시고 청계면 연동에 정착하였다. 쌍괴당 공은 총명이 절륜하여 효우로 처세하였으며 학문의 도저함이 주변의 자랑이 되었다. 아들 평서는 주부이며 손은 봉거 학거 홍거로 3형제를 두었다. 이중 맏이 봉거는 청계면 남성리에 남고 학거는 운남면 연리의 진천동에서 자작동으로 옮겼다. 또한 홍거는 작은자작골(수항동-수경동)에서 시목동을 거쳐서 자작동으로 왔다. 이들이 자작동에 자리를 잡은 것은 1600년대 중반이다. 마을유래지에는 고두익이 입향조라 하나 그것은 잘못 정리된 것이다. 두익은 학거의 아들이다.
고윤(高玧. 자-윤옥. 호-수분재. 1660-?. 무안읍 용월리 상동. 장흥인)
공은 약재 고두문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고 몸가짐이 발랐다. 마음이 굳세고 의리에 대처함이 돈독하고 확실했으며 학문을 익힘에 총명함이 뛰어나 견줄 바가 없었다. 경서는 물론 강론도 잘 하였으며 후진들에게는 도의의 중요성을 일러주었다. 밝은 세상에서 은거하여도 스스로 소박한 분수를 편안하게 여기며 종신토록 산림에 있었다. 곤재 정개청 선생의 우득록 판각에 참여하였다. 묘는 일로읍 죽산리 비로촌에 있다.
고응후(高凝厚. 자-여혼, 호-지봉. 1564-1640. 무안읍 용월리 평교. 장흥인)
공은 장흥백 11세 손으로 임천군수를 지낸 고경조의 아들이며 제봉 고경명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임진왜란 때 첨지중추부사 절충장군으로 권율의 막하에 합류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에는 호은 고의후(1569-1640)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주까지 올라갔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며 고향의 산중에 들어가 세상을 마쳤다. 후에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후일 후손들이 무안읍에 ‘송암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공을 추모했다는 1923년에 편찬한 ‘무안군지’의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없다. 묘는 무안읍 용월리 평교 뒷산에 있다.
고익승(高益昇. 자-달부, 호-경암. 1684-1722. 무안읍 용월리 상동. 장흥인)
공은 1684년 용월리 상동에서 수분재 고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깊어 주위의 기대를 모으더니 1713년 성균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고재현(高在鉉. 초명-재봉. 자-치구, 호-지산. 1885-1967. 무안읍용월리상동. 장흥인)
선생은 의병장 제봉 고경명 선생의 후예로 성품이 올곧고 강직하여 그 기상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가까이 하여 소년시절에 칠서(七書)를 독파했다. 견문을 넓히기 위해 향리의 박민재 선생에게 공부를 하고 송병준 선생에게 출입하며 세상사를 논하기도 했다. 천성이 총명 강직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향내에서 50여년 동안 한문서당을 개설하여 미명한 시대의 문맹퇴치와 후진양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그 제자만도 수백 명에 이르고 있다. 21세가 되던 을사년 당시에는 선생은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켜 향리에 통문을 보내고 회동할 것을 약조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정미년에는 박사시를 보기위해 경성으로 가는 도중에 공주에 이르러 ‘지금 벼슬에 나갈 때가 아니다‘라는 결심을 하고 강에 나가 낚시를 하며 때론 하늘을 우러러 긴 통분을 내품기도 하면서 나라가 망함을 슬픔으로 시문에 그 심정을 남겼다. 고종과 순종이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삭발령이 내리고 수령으로 회유하였으나 우국충정이 강하여 동요하지 않았으며 조상에 대한 崇祖思想이 강하였고 부모를 모시는 효심이 지극하였다. 선생은 초가삼간에 살면서 자신에게는 항상 경계심을 버리지 않고 경계를 하면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는 후하게 대접하며 자손들에게도‘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굴러가지 않으니 사람 일을 다 하고 천명을 기다려야한다.’ 고 가르쳤다.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집 안에 가득하였고 선생을 불러 배우고자 하는 후학들에게는 거절하지 않고 후학을 길러내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알았다. 50여 년 동안 서당을 개설하여 그 제자가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한다. 선생의 나이 35세에 석존대제(釋尊大祭) 집례의 제관(祭官)으로 유림의 지도자로써의 역할도 하여 향교 발전과 사도진흥에 많은 기여를 했다. 선생은 정미년 5월 17일 83세로 별세하였고 유고집 2권을 남겼다. 유고집 2권은 손자집에 소장 되어 있다. 지산유고 서문에서 한학자인 임창순 선생이 글을 남겼는데 지산 작품에 대해 ‘시대를 아파하고 풍속을 경고하는 작품이 많았는데 폐부에서 직출하고 꾸밈없고 순수함이 흩어지지 않아서 정신이 자연히 사람을 감동 시키나 이 작품을 통해서 시대를 알고 지산의 생애를 알 수 있다.’고 서술하였다. 서간문은 손자 영창에게 보낸 30여 편의 서간이 남아 있다. 제자들은 1983년 상동 마을 앞에 ‘고재현숭모비’를 세워 선생의 큰 업적을 기리고 있다.
고정명(高廷明. 자-문보. 현경면 평산리 유수정. 장흥인)
유수정 마을의 입향조는 장흥고씨 고정명이다. 공은 함평 송정에서 세거하였는데 살기 좋은 곳을 찾아 1700년대 중반에 이 마을로 이주한 것이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장흥고씨 고태욱이 1800년경 함평에서 이 마을로 들어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잘못된 기록이다. 고태욱은 본명이 고기주(자-태욱. 1864- ?)로 마을 앞 현재 서해바다 식당이 있는 곳에서 노두목 까지 언을 막았던 사람이다.
고준(자-제원, 호-樂窩. 1742-1806. 일로읍 상신기리 중촌. 장흥인)
중촌 마을은 처음 경주김씨가 들어와 살았으나 현재는 한 세대도 남아있지 않고 마을 주변에 흔적들만 남아 있다. 이후 들어 온 성씨가 장흥고씨로 입향조는 고 준이다. 공은 1700년대 후반에 이 마을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해서 얼마 전까지 고씨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여러 성씨가 사는 복합성씨의 마을이다. 공은 효자로 신정동 마을 입구에 있는 효자고공유허비의 주인공으로 효행이 뛰어나 10세에 아버지의 병환에 斷指引血로 5일을 연명케 하였을 뿐 아니라 육순의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심히 슬퍼하여 몸이 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상규를 벗어난 삼년상을 치루기도 해 후일 進士 林基洙가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한 추천장을 작성하여 효행을 널리 알렸다.
고처대(高處大. 자-만중, 호-죽포, 1651-1692. 일로읍 죽산리 양지촌. 장흥인)
공은 일로읍 양지촌 마을 장흥고씨 입향조로 약재공 두문의 아들이다. 공은 기우가 청수하고 학문이 높았으나 지조와 절개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은거하여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손자인 익경이 귀하게 되어 좌승지를 증직받았다. 마을에 공을 모신 재각이 있다. 마을유래지에는 ‘400여년 전 광산에서 살던 장흥고씨 고처대에게 어명을 내려 지금의 이곳 陽芝村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니 사방 30리를 다스리라는 명을 받고 정착하게 되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고처일(高處一. 자-만초, 호-지재. 장흥인)
약재공 두문의 아들이다. 가문의 학문을 잘 익혔으며 옛 사람들이 스스로 명리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약하였다. 어버이를 섬기거나 제사를 지냄에 정성과 공경을 잘 갖추었다. 가난한 자들을 구휼하거나 고아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어도 자랑하는 기색을 짓지 않았다.
효자 고택진(高宅鎭. 자-순명. 호-모약재. 장흥인)
약재공 두문의 후손이다. 공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영특하여 주변의 기대를 모았다. 성담 송환기에게 학문을 배워 학문의 깊이가 있었다. 부모에 대한 효성으로 널리 알려져 임금이 직접 ‘효행섬’이라는 당호를 지어주었다. 증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
고학거(高鶴擧. 1612-1696. 자-덕휘, 호-월곡. 운남면 연리 자작. 장흥인)
자작 마을의 입향조는 장흥고씨 지평공파 고학거이다. 공은 무안의 장흥고씨 입향조인 고영호의 후손이다. 高榮豪(자-사걸, 호-쌍괴당, 선조대)는 영광에서 세거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만나 해남으로 가서 살았다. 그 후 外艱喪(외간상 - 아버지를 여의었음)을 당해 편모를 모시고 청계면 연동에 정착하였다. 쌍괴당 공은 총명이 절륜하여 효우로 처세하였으며 학문의 도저함이 주변의 자랑이 되었다. 아들 평서는 주부이며 손은 봉거 학거 홍거로 3형제를 두었다. 이중 맏이 봉거는 청계면 남성리에 남고 학거는 운남면 연리의 진천동에서 자작동으로 옮겼다. 또한 홍거는 작은자작골(수항동-수경동)에서 시목동을 거쳐서 자작동으로 왔다. 이들이 자작동에 자리를 잡은 것은 1600년대 중반이다. 마을유래지에는 고두익이 입향조라 하나 그것은 잘못 정리된 것이다. 두익은 학거의 아들이다.
고형진(호-묵헌. 일로읍 상신기리 중촌. 장흥인)
효자 고형진은 약은 시무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평소 성품이 강직하고 남을 잘 돕는 성격이다. 우연찮은 일로 횡화를 입어 박주에 귀향 가게 되었다. 귀향지에서 무려 20여년을 지낼 때 늙은 어머님 못 모시는 것을 한으로 여겼다. 형진은 아버지인 시무가 귀향지에서 외로운 혼이 될 것만 같아 상경하여 왕조에 목숨을 걸고 풀어달라고 애원하니 대소관료 모두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귀향에서 풀리게 하였다. 형진은 귀향지에서 돌아온 아버지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으며 두 분이 돌아가시자 무덤 옆에서 시묘를 살았다. 이러한 공의 효행을 기록한 장흥고씨 4대 비각이 상신기리 중촌 마을 입구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