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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일심사상의 체계화 과정 고찰
김 도 공
(원광대 원불교학과 강사)
목 차
Ⅰ. 서 론
Ⅱ. 원효의 불교사상 습득과정
1. 원효의 생애
2. 원효의 불교학 습득과정
3. 원효 저술의 차제관계
Ⅲ. 원효 사상의 체계화 과정
1. 원효의 유식사상
2. 원효의 {기신론} 사상
3. 원효의 화엄사상
4. 원효의 실천적 불교사상
Ⅳ. 결론
Ⅰ. 서 론
元曉의 思想을 일반적으로 和諍思想이라 한다. 그러나 元曉의 思想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元曉思想의 겉모습만을 보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왜냐하면 和諍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思想을 정립해가는 하나의 방법이지 그 대상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元曉의 종교적 철학적 연구와 구도의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一心사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元曉의 思想은 一心思想이라고 표현해야하는 것이 더욱 어울리는 표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元曉의 一心思想은 和諍의 방법을 통하여 정리되고 체계화되었기 때문에, 다른 종파나 학자들의 一心과는 차별성이 있는 一心인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렇게 차별화되는 元曉 一心思想을 그 성립과정 즉 체계화과정을 연구하고자 한다.
특히 체계화 과정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는 것은 元曉의 불교적인 깨달음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한 인간의 깨달음의 내용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깨달음으로 인하여 어떠한 사상체계가 일시에 완성된다고 보기보다는, 이러한 깨달음에 기초하여 깨달음의 내용들을 저술을 통하여 표현되고 논리화하는 과정에서, 그 방법론적으로 여러思想을 접하면서 체계화 되었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다.
특히 元曉의 思想的 위대성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많이 있었으나, 상당수의 연구가 대개 연구자의 전공의 눈으로만 보는 元曉를 이야기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기신론을 전공하는 학자는 元曉의 思想을 기신론 혹은 기신론종으로만 보기도 하고, 또한 화엄학자는 元曉의 思想을 화엄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유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元曉의 思想을 어떠한 하나의 思想체계로만 설명한다는 것은 元曉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본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一心이라는 대한 元曉의 생각과 思想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변화되고 완성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Ⅱ. 원효의 불교사상 습득과정
원효의 불교사상 습득과정을 밝히기 위해서는 원효의 인생역정이 드러나 있는 행장에 대한 연구가 병행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행장에 대해서는 기존에 많이 연구되어 있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 결과들을 통해서 원효의 인생역정에 대한 대체적인 줄거리만을 정리하고자 한다. 최고(最古)의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원효의 행장에 대한 자세한 연구나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정리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 원효의 생애
원효의 성은 설(薛)이요, 그 아버지는 담내내말(談 乃末)이며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 한다. 고향은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이다. 신라 제26대 진평왕 39년(617년)에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서당(誓幢)이고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여 15세 이전에 세속의 학문을 통달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불법을 배우고자 15세의 나이에 출가하여 삼장(三藏)을 모두 공부하였으나 원래 총명하여 불법의 오의를 자득하였고, 특정한 스승에게 배우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약간의 기록에 의하면 낭지(朗智) 보덕(普德)에게서 배웠다는 사실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현장법사가 서역 천축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太宗의 보호 아래 역경사업을 벌이고 유식 법상학을 강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덕여왕 4년(650년) 義相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났으나 유학 길을 가던 도중 고구려 순찰병에게 잡혀 고생을 하다 간신히 돌아왔다. 이에 원효는 항상 마음 가운데 당나라로 떠나기를 고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문무왕 원년(661년) 45세에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향했으나, 유학 길을 떠나던 도중 유심소조(唯心所造)의 원리를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왔다. 일체유심조의 원리를 알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원효는 이후 무애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무애행의 대표적 내용으로는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설총을 낳고 나서 옷을 속복으로 갈아입고서 소성거사라 칭하면서 천촌만락을 돌아다니면서 대중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하는 대중교화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대중교화를 위해서 무애행을 하였으나 전통적인 승려와 식자들의 눈에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으로 보였다. 그래서 왕실에서 베푸는 각종 불교 행사에는 참가하지도 못하는 수모를 당하였으나, 원효의 마음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결국 난해한 책으로 알려진 {금강삼매경}에 대한 疏를 짓고, 그 강의를 위해서 다시 중앙의 불교계에 진출하여 자신의 불교사상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리고 다시 혈사(穴寺)로 돌아와 수행하던 중 686년 입적하였다. 이상과 같이 정리된 원효의 행장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통설이다.
그러나 여기 간략히 소개된 행장 가운데서 원효의 깨달음이나 사상체계와 관련해서 주의 깊게 보아야 될 내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 이유와 시도 횟수, 경론에 대한 본격적인 주석의 시점, 환속의 시점, 학승으로 복귀의 시점 등이다.
그러면 당나라 유학의 시도는 어떤 이유이며 어떻게 했는가에 대해서부터 알아보자. 원효가 당나라에 유학하고자 했던 이유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현장 삼장을 흠모하여 당시 유행하던 신유식학의 습득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원효는 당나라에 유학을 마음먹기 이전에 이미 유식학을 접했으나 신라사회에 이미 퍼져 있던 기존의 구유식학 체계로는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유식학에 대한 궁금증이 원효의 유학 동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유학 시도 횟수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원효의 깨달음과 그에 의한 환속 그리고 무애행의 시점을 요석공주와의 결혼이라고 본다면, 그 역사적 시기는 바로 태종무열왕(654-660)때의 일이므로 원효의 나이 37세에서 43세 사이가 된다. 그런데 굳이 결혼하여 설총까지 낳은 원효가 661년에 다시 유학을 시도하여 유학 도중 고총에서 깨달음을 얻어 돌아온다는 것은 전후 관계상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다. 이것은 역으로 추리해보면 원효의 입당시도는 1회뿐이었다는 것이 추정된다. 그렇다면 고총에서의 오도 설화도 바로 1차 입당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추정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1차 유학시도 당시 생사의 갈림길을 오간 원효가 이러한 극한체험 속에서 바로 일체유심조의 원리를 깨달았던 것으로 추정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서 돌아온 원효가 그 깨달음에 기초하여 본격적으로 각 경론에 대한 주석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던 도중 각종 경론에 대한 주석으로 이미 학승으로서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또한 깨달음에 자신감을 가진 원효가 만천하에 공개구혼을 하였던 것이고, 원효의 인물됨과 학덕을 익히 알고 있던 태종이 이러한 공개구혼을 듣고 당시 과부인 요석공주와 결혼을 시키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효는 결혼 후에 스스로 속복으로 갈아입고 소성거사라 칭하면서 백성들과 함께 하였다. 그러던 중 {화엄경소}를 짓다가 [십회향품]에 이르러 절필하였다.
무애행으로 천촌만락 온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불교의 대중화에 힘을 쓰던 도중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을 부탁 받고 학승으로 복귀하여 경에 대한 주석을 쓰고 강의를 마친 후에는 다시 혈사로 돌아가 수행 정진하다가 입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상의 논의를 통해 원효의 주요한 행장을 한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원효는 617년에 탄생하여 15세 경 출가하였고, 천성적인 영민함으로 특정한 스승없이 불교의 삼장을 섭렵하였다. 645년경부터는 경론에 대한 주석을 짓기 시작하였고 상당한 명성을 얻었으나 마음가운데 유식학을 공부하기 위한 생각이 있어 입당 유학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입당 유학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그 와중에 극한 체험 속에서 원효는 깨달음을 얻어 신라에 돌아온다. 신라에 돌아온 원효는 그 깨달음에 기초하여 경론의 주석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고, 이러한 경론의 주석으로 신라사회에 명성을 얻은 원효는 자신있게 공개구혼하여 요석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요석공주와의 결혼으로 파계한 원효는 속복을 입고 소성거사라 칭하면서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경(經)에 대한 주석도 지속한다. 그러나 {화엄경} [십회향품]을 주석하다 절필하여 백성들에게로 완전히 회향하게 된다. 길거리에서 주막에서 매음굴에서 각종 무애행을 행하던 원효는 그의 무애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앙의 승려와 식자층으로부터 지탄을 받게 된다. 그러나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을 왕으로부터 요청 받고 학승으로 다시 복귀한 후, 주석과 아울러 경(經)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혈사로 돌아가 수행하다 입적하게 된다.
2. 원효의 불교학 습득과정
이상과 같은 원효의 행장 정리에 기초하여 원효의 불교학 습득과정을 추적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출가한 이후로 원효는 대부분의 경론들을 습득하여 그 개요를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불교사상 습득의 경로나 스승은 정확히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朗智 惠空 등으로부터 법을 묻고 고구려에서 망명한 보덕에게서 {열반경}, {유마경}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으나 법을 전하고 받는 사제관계는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원효는 불교 입문이후로 다양한 불교사상을 섭렵하고 이해하였으나, 원효가 그 당시 가장 관심이 많았던 분야는 불교사상 중에서도 아마도 유식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런 이유로 유식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알기 위해서 입당 유학을 계획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도중에 {대승기신론}을 만나거나, 혹은 이전에 알고 있었던 {기신론} 한 구절 그 뜻의 진수를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이것이 입당 시도 중 극한적 체험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신론}의 오의를 알아채고 그것을 직접 체험하고 깨달아버린 원효는 바로 신라에 돌아와 그 체험에 바탕하여 각종 경론을 본격적으로 주석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시기가 원효 사상을 잘 나타내는 주요한 저작이 주석된 시점인 것이다. 이러한 주석을 지속하다가 {화엄경}을 주석하고 난 원효는 드디어 백성들에게로 완전히 회향하여 무애행과 불교 대중화 운동을 일으킨다. 이런 불교 대중화 운동과 실천에 작용한 원효의 사상적 기반은 바로 정토사상과 실천적인 禪사상이고, 이러한 것은 그의 정토관계 저술과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의 禪的인 경향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추정하고 확증할 수 있는 근거와 역사적인 사료는 없다. 약간의 사료와 역사적 선후 관계를 통해 추정해 보는 것이다. 다만 한가지 근거로 삼는 것은 원효의 이러한 평생에 걸친 불교사상 습득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이러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대답은 바로 원효가 깨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불자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깨치고자 한 것이라는 대답이다.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혼란스런 시대상황 속에서 육두품이라는 신분적인 제약을 가지고 태어난 원효, 그가 타고난 영민함과 웅지의 나래를 펼 수 있었던 곳은 바로 신분 제약이 없는 불교계였고, 불교계에 입문한 그는 천성적 영민함으로 단기간에 삼장(三藏)의 대체를 파악하여 어린 나이에 학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원효가 삼장을 연구하고 수행하던 시기는 바로 삼국통일 직전에 삼국간에 전쟁이 극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은 극심하였다. 원효는 나름대로 불교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고통 속의 백성구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원효의 마음은 번뇌와 싸우는 고민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번뇌에 휩싸인 원효는 그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 내지는 나라를 구할 지혜를 얻고자 하였다. 즉 망식(妄識)으로서의 마음을 하나씩 변화를 시켜 번뇌를 없애고 전식득지(轉識得智)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다면 원효는 더욱 더 유식학에 대한 궁금증이 더하여 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식학을 더 접하려고 입당유학을 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가운데 생사를 오가는 극한의 체험을 하게된다. 이 가운데 {대승기신론}의 한 구절 혹은 전체적인 대의와 요체를 깨닫게 된다. 바로 그 깨달음의 내용은 '번뇌가 바로 보리요 보리가 바로 번뇌이라는 것' 즉 망령되이 보이는 바로 이 마음이 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 비린내가 멈추지 않고 고통이 가득한 세속과 청정무구한 열반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가 하나로 만나지는 깨달음 바로 진(眞)과 망(妄)이 하나로 화합하는 마음을 얻은 것이다.
세속과 열반이 따로 있지 않다는 깨달음이 있어서 인지, 원효는 깨달음을 얻고 신라사회에 돌아와 이제는 본격적으로 중앙의 정치무대에서도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활동 그리고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원효는 본인의 깨달음에 대한 경전적 사상적인 근거는 찾지 못한다. 그러나 671년 당으로부터 귀국한 의상으로부터 본인이 이미 오득하였으나 경전적 사상적으로 검증을 하지 못한 세 가지 의문을 물어보아 그 의문을 완전히 해소하고 경전과 사상적 근거를 확보 一心思想을 완성하게 된다.
즉, 망령된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마음이 바로 참마음이라는 것 그래서 그 진식과 망식을 하나로 화합해버리는 진망 화합의 마음에서, 망령 그 흔적조차도 모조리 지워버리고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無碍의 경지 그래서 온통 참마음인 화엄의 세계, 참마음 즉 일심(一心)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원효는 이러한 불교사상의 습득과정을 통하여 사상적 완성은 이루어지게 된다. 사상적 완성을 이룬 원효의 할 일은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바로 오랜 전쟁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삶과 마음에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지한 백성들에게 어려운 화엄의 철학적 원리나 본인이 깨달은 일심(一心) 참 마음의 경지를 일러주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원효는 백성들로 하여금 '나무아비타불' 만을 일심(一心)으로 염송하면 서방극락에 갈 수 있다고 전파하기 시작한다. 또한 원효는 교학 중심으로 치닫는 당시의 불교계를 경계하기 위해서 실천적인 선(禪)사상을 전파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바로 {금강삼매경}의 주석을 통해서이다.
3. 원효 저술의 차제관계
원효는 수많은 저술을 하였지만 그 저술의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판비량론} 하나 뿐이다. 원효의 저술의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찬술이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원효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반면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나는 원효 저술의 정확한 시기를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둘은 원효 저술의 저작 순서와 사상의 형성과정이 바로 일치한다고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매우 중요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연구와 결론적인 연구는 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각 저술간의 인용문 관계를 검토하여 저작의 순서를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중요한 저작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저술의 차제를 밝히고자 한다.
원효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은 유식, {기신론}, 화엄, 정토, 선 이렇게 간추려 볼 수 있는데, 원효는 대체로 대승경전을 위주로 한 저술을 많이 남겼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러한 사상과 관련된 저작의 선후 관계를 정리해 본다.
원효 사상을 형성하고 설명하는 주요한 저작으로는 {이장의}, {기신론별기}, {기신론소}, {화엄경소}, {금강삼매경론}, {무량수경종요} 등으로 볼 수 있다. 이 저작들간의 인용관계를 보면, {이장의}에 {기신론별기}가 인용되고, {기신론소}와 {금감삼매경론}에 {이장의}가 인용이 되고, {기신론소}에 {무량수경종요}가 인용이 된 것, {금강삼매경론}에 {기신론소}가 인용된 것을 보면, 그 저작의 순서가 윤곽이 드러난다.
{기신론별기} - {이장의} - {무량수경종요} - {기신론소} -{화엄경소} - {금강삼매경론} 이러한 순서로 저작이 된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금강삼매경론}과 {화엄경소}와의 관계이다. 이 두 저작간의 선후관계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검토되고 있지만 각 학자의 견해마다 선후에 대한 주장이 다르다.
본고에서는 이 저작의 선후관계를 {화엄경소}가 먼저이고, {금강삼매경론}이 후대의 저작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Ⅲ. 원효 일심사상의 체계화 과정
이 장에서는 원효의 각종 저술속에서 나타나는 원효의 일심사상을 그 체계화 과정을 행장과 비교해가면서 논증해 보고자 한다.
1. 원효의 유식사상
원효의 유식사상이라고 하지만 유식사상이 원효만의 것일 수는 없다. 일반적인 유식사상의 흐름과 그 내용을 크게 달리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유식사상이란 무엇인가? 특히 유식사상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유식사상에서는 중생들이 현실속에서 고통받고 괴로움 속에서 사는 이유를 본래 불성을 가리고있는 장애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장애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현실 속에 사는 중생들의 괴로움은 바로 본인의 무명(無明) 때문이고, 이 무명은 무아(無我)의 이치를 모르는 집착 때문이라고 설명되었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설은 부파불교에 와서는 아공법유(我空法有)의 설로 이해가 되었으며, 이것이 다시 대승불교에 와서는 아공법공(我空法空)의 일체개공(一切皆空)설로 다시 초기불교 제법무아의 입장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일체개공설의 입장을 유식학파에서는 삼성설(三性說)의 방법으로 설명하여 변계소집성에 의한 집착이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 되어서 불성을 가리는 것이며, 이러한 두가지 장애는 아공(我空)관과 법공(法空)관을 통해서 소멸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식학의 내용은 특히 원효의 저술인 {이장의}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원효는 {이장의} 첫 부분에서
장(障)이란 가로막아 못하게 한다는 뜻으로 덮어 가리는 역할을 한다. 중생을 가로막아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이성을 덮어 열반을 나타나지 못하게 한다. 이 두 가지 뜻이 있으므로 장(障)이라고 한다.
이는 앞서 설명한 유식사상의 설명과 바로 통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가 되는 것을 지적하여서 바로 번뇌장과 소지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원효는 깨달음의 두가지 장애에 대하여 현료문과 은밀문이라는 두가지 범주를 가지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신유식과 구유식을 각각 종합하여 나타내고 있는 체계이다.
이러한 체계로 원효는 현료문에서 번뇌장과 소지장을, 은밀문에서 번뇌애과 지애를 배대하여 각각 설명하고 있다.
원효는 번뇌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번뇌장은 탐진등의 미혹을 말하는 것이다. 번로를 성질로 하여 적합하게 현재의 행동을 야기하며 심신을 괴롭히며 어지럽히므로 번뇌라고 한다. 이 번뇌의 당체는 공능으로부터 이름이 건립되었다. 다시 경계안에서 번뇌의 과보를 능히 감응하게 하는 것이니 중생을 핍박하고 어지럽혀 정적에 들지 못하게 하므로 번뇌라 한다.
이렇게 원효는 탐진치 등의 정적(情的)인 방면의 번뇌가 장애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원효는 이러한 번뇌장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번뇌장은 인집을 우두머리로 하여 근본번뇌와 분한복(忿恨覆) 등 여러 따르는 번뇌를 자성으로하는 것이다. 그 권속은 그에 상응하는 법과 발생하는 업보까지도 같이 번뇌장 번뇌장체에 속한다.
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인집(人執)이라는 것이 작용하여 항상 주재하는 내가 있다고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원효는 소지장에 대해서 아집은 버렸어도 법집을 버리지 못하는데서 일어나는 소지장이 있다고 하였다.
소지장(所知障)이라는 것은 盡所有性과 如所有性의 二智가 서로 비추어서 所知라 하고, 法執等의 미혹이 智性을 가로막아 관조를 못하게 하고 경계를 덮어서 마음을 관조하지 못하게 하므로 소지장 이라고 한다. 이는 가려지는 작용을 따라서 얻은 이름이다.
이와같이 소지장(所知障)이라는 것은 소지(所知)에 대한 장애이기 때문에 소지장을 없애기 위해서는 법집을 없애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소지장은 법집을 우두머리로 하여 분별망상과 법에 대한 애착과 거만 무명 등이 그 체가 된다. 그것을 조반이라고 하는 것은 저 상응법과 취하는 상이 또한 그 가운데 들어간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법집은 아집보다 깊숙한 차원의 장애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법집과 아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차원을 달리하는 같은 종류의 장애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은 은밀문에서 두가지 장애(二碍)로 번뇌애와 지애를 말하고 있다.
원효의 {이장의}에 나타난 번뇌애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육종염심이 마음을 움직이고 상을 취하여 평등성을 위배하여 상이 움직임 없는데서 벗어나 정적에서 멀어지므로 번뇌애라고 한다.
곧 마음이 이렇게 물이 들어서 주관과 객관이 대립적 이원적으로 인식이 되고, 이러한 분별의식에 의해서 본래의 평등성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지애에 대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근본무명이 제법에 자성이 없음을 바로 알지 못하여 속지를 장애하므로 헤아리지 못하게 하므로 지애라고 한다.
바로 여기에서 근본무명이 모든 미혹함의 근원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현료문과 은밀문의 두가지 장애 즉 인간에게 생기는 각종 무명의 실상과 원인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그러면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원효 {이장의}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처음은 인공으로 인집을 대치하고 다음은 법공으로 법집을 대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원효는 {이장의}에서 인집과 법집의 대치는 인무아와 법무아의 실현, 곧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의 체득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장의}의 전체적인 구조와 내용을 살펴보면, 무명과 반야지가 일심에서 화합하는 구조로 설명을 하고있는 것을 볼 때 {이장의}의 저술시기는 이 이치를 깨달은 이후의 저술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유식학이 기본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는 무엇인가? 바로 아리야식이라고 하는 망식의 존재이다. 망식의 아리야식에서 각종의 무명이 현현하여 중생의 고통스런 현실세계를 조성하고 있으므로, 그 현실을 벗어나 깨닫기 위해서는 순차적으로 아리야식을 맑혀야 하는 것이 바로 유식학의 전식득지이다.
이러한 전식득지의 과정은 아리야식이 전환하여 대원경지가 되고, 말라식이 전환하여 평등성지가 되고, 의식이 전환하여 묘관찰지가 되고, 오식이 전환하여 성소작지가 될 때 전식득지가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원효가 행장으로 돌아가 보자. 원효가 유식학에 관심을 두고 유식학을 더 배우고자 입당을 시도할 때는 이러한 {이장의}의 내용에 설명된 것과 같은 반야지와 무명이 일심에서 화합하는 경지를 체험하지 못하였던 시기로 생각이 된다.
현실세계의 고통스러운 모습, 신음하는 백성, 신분적 제약 속에서 웅지의 나래를 펴지 못하는 원효 자신, 그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고민과 번뇌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러한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을 추구하고자 입당을 추구했던 원효는 {기신론}의 사상을 접하고서 새로운 사상의 전환을 하게 된다.
2. 원효의 {기신론} 사상
원효가 {기신론}을 최초로 접한 시기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측하건데 입당 시도 전에 벌써 {기신론}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핵심적인 사상의 이해와 요체에 대한 파악은 입당시도 중 어떤 형태로든지 깨달음이 있었고 이때의 깨달음은 바로 {기신론}의 전체적 사상이 일심이문삼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고 진제와 속제가 하나되는 그런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깨달음에 얽힌 오도송이 {기신론}의 구절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즉 한생각이 일어나면 가지가지 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면 가지가지 법이 사라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로 표현된 이 구절은 바로 {기신론}의 다음과 같은 구절과 아주 유사한 구조와 내용으로 되어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일체의 분별은 곧 自心을 分別함이니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여 모양을 얻을 수 없으니 마땅히 알라 세간의 일체 境界가 다 衆生의 無明妄心을 依支하여 머물러 가짐을 얻나니라. 이런 까닭으로 일체의 법이 거울가운데 형상과 같아서 體를 가히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마음이라 허망함이니 마음이 生하면 가지가지의 法이 生하고 마음이 滅하면 가지 가지의 法이 滅하는 연고니라.
그러면 번뇌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유학길에 올랐던 원효가 이러한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과연 그 깨달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번뇌와 보리가 바로 하나의 마음에서 만나고, 고통 속의 세속과 청정무구의 열반의 세계가 하나로 합해져서 원융해지는 그런 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 진과 망이 하나로 만나는 진망화합의 일심 이것이 바로 원효가 보는 기신론관이기도 하고, 원효가 깨달은 내용인 것이다.
그러면 원효의 대표적인 저술이라고 하는 {기신론소}에는 어떤 내용으로 이런 일심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어떻게 표현이 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원효는 {기신론}의 핵심을 일심이문의 법으로 요약하여 開合이 자재하고 立破가 걸림이 없는 논리로 이해하고, 이문에 각각 眞如門과 生滅門을 배대하여 이해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眞如門은 청정무구의 열반의 세계요, 生滅門은 염정오탁의 세속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원효의 {기신론} 이해에서는 一心에서 하나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원효는 이 일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엇을 一心이라 하는가? 이른바 더럽고 깨끗한 모든 현상들이 그 성이 둘이 없으며, 진과 망의 이문도 다른 것이라 할 수 없으므로 하나라고 이름한다. 이 둘이 없는 자리가 모든 것 가운데서 실다운 것이어서 허공과 같이 있지 않으며 그 성이 스스로 신해하므로 心이라 이름한다. 그러나 이미 둘이 없다고 했으니 어찌 하나인들 있으랴, 하나도 있을 수가 없으니 무엇을 가지고 心이라고 하나? 이 같은 도리는 언어를 벗어난 것이요, 생각이 끊어진 자리여서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으나, 억지로 이름하여 一心이라고 불러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원효가 깨달은 일심의 구조는 진여와 생멸, 세속과 열반이 일심에서 하나로 만나는 그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면 이를 더욱 보충 설명하기 위해서 원효의 {기신론소}에서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관계를 어떻게 말하고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하자.
먼저 본각에 상대해서 불각의 뜻이 일어남을 보임이요, 다시 불각에 상대해서 시각의 뜻을 해석한다, 이 중 대의는 시각은 불각에 상대가 되고, 불각은 본각에 상대가 되는 것이며, 본각은 시각을 상대한 것이니 이미 서로 상대함에 말미암아 상대적 의미가 성립되니 각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각이라고 설명한다. 자성이 있지 않는 것을 각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원효의 설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본각 시각 불각이 서로가 서로를 전제함으로서만 의미가 성립되는 것이라는 것, 각각의 실체는 없다는 것, 그리고 각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적인 논리라는 것이다. 일심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언어를 벗어난 것이요, 생각이 끊어진 자리여서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으나 억지로 이름하여 一心이라고 불러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깨달음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실재로 존재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원래는 그 자체가 없다는 논리로 깨달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다시 원효의 행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 위해서 길을 가다가, 고구려 병사들에게 잡혀서 첩자로 오인 받아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게 된다. 이러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생사가 하나이고, 번뇌와 보리가 하나이고, 세속과 열반이 하나가 되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닌가?
번뇌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유학 길에 올랐으나, 극한의 체험 속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들끓고 있던 번뇌가 바로 보리의 씨앗이고, 수년간을 공부하고 수행하면서 깨닫고자 했던 깨달음이라는 목표가 바로 번뇌로 가득한 자신의 마음이고, 번뇌를 벗어나서 세속을 벗어나서 새로운 깨달음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남아 있는 한, 과연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깨달음,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바로 일심 한마음에서 융회되는 그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3. 원효의 화엄사상
{기신론}의 내용을 큰 틀로 하여 깨달음의 사상체계를 세우고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원효였지만 원효의 마음에는 아직 미진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신론}에서 이야기되고 본인의 주석에서 이야기하듯 일심에서 화합하는 진여문과 생멸문, 이 두가지의 상대적 개념이 계속 흔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원효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면 이미 그 흔적이 없어져 버렸지만 {기신론}의 논리적 구조상 그 흔적은 지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원효가 깨닫고 사상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진여와 생멸이 따로 없는 절대 무분별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신론}의 구조를 가지고서는 아무래도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귀입하는 듯한 경향성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기신론}을 후세 연구자들은 여래장연기 내지는 진여연기설로 파악을 하고 있는 것이고, 아울러 일부에서는 원효의 사상마저도 여래장 연기종 내지는 대승종교 정도로 판정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원효의 깨달음은 분명 {기신론}의 논리구조를 뛰어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기신론소}에서 원효는 一心마저도 깨달음마저도 그 흔적을 남기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사상적 경증으로 증명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화엄을 배우고 돌아온 의상에게 이러한 의문을 물어보고, 그 의문을 해소함과 동시에 원효의 불교적 깨달음의 사상체계를 사상적 검증과 아울러 경전적 근거를 확보하여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면 이러한 원효의 화엄사상은 어떤 것인가 그의 저술을 통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그러나 현존하는 그의 저술 속에서만 그의 화엄사상을 찾기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현존하는 {십문화쟁론}, {화엄경소} 그것마저도 온전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간 남아 있는 원효의 {십문화쟁론}을 보자. 여기에서 원효는 삼승과 일승, 공과 유, 진과 속 등을 화해시키고 회통시키고 있다. 이러한 원효의 화쟁사상은 원효의 저술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쟁의 근거는 어디까지나 일심이다. 일심이라는 흔적마저도 없는, 깨달음이라는 실체관념을 모두 넘어선 그 일심에서 모든 대립과 분별이 화해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체가 모두 다 참이고 참 깨달음인 여래의 성기 일심, 화엄의 일심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체의 경계를 초월한 세계를 원효는 그의 {화엄경소}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무장무애 법문이란 법이 없되 법 없음이 없고 문이 아니되 문 아님도 없다. 非大非小 非促非奢 不動不靜 不一不多이다. 크지 않으므로 극미가 되어도 남음이 없고, 작지 않으므로 태허가 되어도 남음이 없다. 빠르지 않으므로 능히 삼세겁을 머급고, 느리지 않으므로 온통 그대로 일찰라에 들어간다. 움직이지도 고요하지도 않으므로 생사가 열반이고 열반이 생사이다. 하나도 아니고 많음도 아니므로 일법이 일체법이고일체법이 일법이다. 이러한 무장무애의 법은 법계법문의 묘술을 지으니 모든 보살이 들어갈 바이고, 삼세제불이 나오는 바이다.
이렇게 원효는 모든 상대적인 대립과 분별의 세계를 무장무애법계로 보고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분별을 초월해 있어서 막힘도 걸림도 없는 세계인 화엄의 성기 일심을 원효는 깨달았기 때문에 본인의 깨달음과 가장 유사한 화엄경을 그의 사교판에서도 일승만교라하여 가장 수승한 교설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원효가 그토록 깨닫기를 기대하고 청정히 하고자 했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망식의 일심 즉 유식의 일심이라면, 유학 도중 깨달음을 얻은 것은 진과 속이 하나로 합해지는 즉, 진과 망이 화합하는 {기신론}과 여래장의 일심이었다. 그러나 일심이라는 그 실체마저도 넘어서서 모든 것을 다 참으로 화현시키는 진심으로서의 일심 화엄의 일심, 이것이야말로 원효의 깨달음에 대한 온전한 표현이고 그 참 사상 내용이 될 것이다.
{법계도기총수록}에 나오는 원효와 의상간의 화엄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내용, 즉 시각과 본각의 문제, 범부와 성인의 문제, 습과해의 문제, 능전과 소전의 문제 이것은 모두 깨달음의 분상에서는 구분할 수 없는 구분을 말하는 것이다. 원효는 {기신론}의 사상을 실마리로 깨달음을 얻었으나 진여와 생멸의 구분, 본각과 시각의 구분, 번뇌와 보리 등의 구분이 있는 {기신론}의 체계로는 그 같은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한 동안 경전적 사상적인 근거를 확보하지 못했다가 당으로부터 돌아온 의상으로부터 그 같은 궁금증과 깨달음에 대한 확인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4. 원효의 실천적 불교사상
이러한 사상적 내용과 깨달음을 가진 원효의 할 일은 이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인지도 모른다.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익 될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분황사에서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찬술하다가 제 4십회향품에 이르러 절필하고 화엄의 실천을 위해서 중생들 속으로 회향하러 뛰어들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된다. 원효가 중생들 속에서 무애박을 들고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라고 외치는 구절은 바로 화엄사상을 내포한 구절인 것이다.
그러나 오랜 전란에 멍이 든 백성들 중생들에게는 깨달음의 원리나 어렵고 철학적인 설명이 소용없었다. 그래서 원효는 그 일심에 대한 깨달음의 내용에 다시 한 번 변화를 주게 된다. 그것은 바로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아비타불을 외우면 서방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는 지극한 정성으로서의 一心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것은 모든 중생과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다.
이렇게 백성들과 하나되어 불교를 대중화시키다가 왕명을 받들어서 당시 교학만을 숭상하면서 경직되어가는 신라의 불교계에 일침을 가하는 {금강삼매경}을 주석하고 강의하게 된다. 이것은 교학중심의 중앙불교계에 실천적인 선불교사상을 불어넣기 위한 원효의 마지막 역점사업이었을 것이다.
1) 정토사상
원효는 그의 정토사상을 담고 있는 저술 {無量壽經宗要}에서 대승의 입장 특히, {화엄경}의 입장에서 인간의 심성문제와 부처의 인과문제를 논하고 있는데 그 대체적인 내용은 바로 보리심(菩提心)이 없으면 정토에 날 수 없다고 하는 보리심정인(菩提心正因)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저술의 내용에서도 그의 정토사상이 화엄사상 연장이고 그것의 실천적 전개라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중생의 심성은 원융무애하여 걸림이 없다. 크기로는 넓은 허공과 같고, 깊기로는 거대한 바다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광대하기 때문에 본래 성품이 평등하여 어떤 특별한 모양의 형상이랄 것이 없으므로 어찌 여기에 깨끗하고 더러운 세계가 있겠는가? ......(중략) 깨닫고 보면 이것도 저것도 없고 예토도 정토도 없다. 본래 일심이라 생사와 열반이라는 두 끝이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정토사상의 전개는 분명 너와 나의 구별, 진과 속의 구별, 예토와 정토 등의 모든 구별을 넘어서는 본래 일심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원효는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는 것이 곧 정토이며, 이 일심의 바탕에는 정토와 예토가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왕생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왕생이 아니라, 중생이 스스로 각자의 마음에 정토를 찾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원효는 이러한 화엄적 측면의 정토만이 아니라, 유식학적인 측면에서의 정토를 말하고 있다.
보살 및 여래의 유식지는 무상하고 공용이 없으므로 청정이라고 하며, 일체의 장애를 떠나 잃지 않음을 자재라 하는데, 이러한 유식지로 정토의 체를 삼는다.
또한 원효는 이러한 정토사상을 실천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 있다.
하물며 다시 진리의 소식을 듣고 무상에 들어가고, 부처의 광명을 보아 무생을 깨달음이겠는가? 무생을 깨달았으므로 생 아님이 없고, 무상에 들어갔으므로 상이 아닌 바도 없으며 지극한 청정과 즐거움이어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끝이 없고 제한이 없는데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요
이것은 원효의 정토사상을 이루는 근본 바탕이다. 서방정토에 나기를 바라는 인간의 원과 그 원을 이루기 위한 실천적인 행이 하나로 될 때, 참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이다. 이것을 원효는 {무량수경종요}에서 강조하고 있으며 그 방법으로 無相, 無生, 無願의 사유를 거듭하기를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화엄의 원리에 바탕한 원효의 정토사상은 종교적 참회로까지 전개가 되고 있는데 그의 저술 {대승육정참회}에서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참회할 때에는 억지로 지어서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응당 참회의 실상을 사유해야 할 것이다. 그 참회하는 죄라는 것이 이미 있는 바가 없는데 어찌 참회함이 있다는 것이 성립할 것인가.참회의 주체와 참회할 바가 모두 성립하지 않으니 과연 어느 자리에 참회의 법이 있다 할 것인가.
즉 참회해야 할 대상인 그 죄업이라는 실상마저도 성립하지 않는 참 세계, 그리고 참회할 바도 참회의 주체도 같이 성립되지 않는 그 세계는 바로 모든 분별과 대립을 초극한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세계를 안다면 자연적으로 착각도 없을 것이며, 번뇌를 없앨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한 마음'(一心)이 '한결같이 그러함'(一如)의 침상에 누워 있음을 알게 되리라. 만약 이와 같이 능히 여읠 수 있고, 자꾸자꾸 생각한다면 비록 육진에 얽혀있어도 그것을 실재로 착각치는 않을 것이며 번뇌가 부끄러워 스스로 게으름을 피우지 못할지니
2) 실천적 관행사상
{금강삼매경론}이 선사상과 관련이 깊다고 하여, 여기에서 원효의 선사상이라고 이름하기에는 사상사적 맥락에서 볼 때 이른 감이 있다. 굳이 이름을 붙여 본다면 원효의 실천적 관행사상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금강삼매경론}에 나온 원효의 실천적인 불교사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번뇌의 마음에서 번뇌와 보리가 하나로 만나지는 일심의 깨달음을 얻은 원효, 모든 분별과 대립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참으로 드러내는 一心을 깨달은 원효, 그러한 일심을 중생들과 백성들을 위하여 지극한 정성의 일심으로 사상적 변화를 하는 원효,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남은 일이 있다면 교학만을 숭상하면서 경직화되어 가는 당시의 불교계에 실천적인 사상을 불어 넣어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원효의 깨달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중앙의 승려들이나 식자들은 원효의 무애행이 파계승의 괴이한 행동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원효를 왕실에서 베푸는 행사에도 참여를 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효의 무애행과 그의 실천적 관행사상은 여전히 그가 깨달은 일심을 실천하기 위한 실천에의 여정인 것이다. 그리고 {금강삼매경론}에서도 그의 일심사상은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일심의 근원은 유무를 여위어 홀로 깨끗하고 삼공의 바다는 진속을 사무쳐서 담연하도다. 담연하므로 둘을 사무쳤지만 하나도 아니요, 양쪽 가를 여위었지만 중간도 아니로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도 그의 {金剛三昧經論}에 있는 관행사상은 깨달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 {金剛三昧經論}은 삼매를 정과 혜로 밝혔으며, 이 경의 7품중 전 6품은 관행을 밝히고, 후 1품은 의문을 변용한 것으로 無相觀 無生行 등으로 금강삼매를 실증하는 관행체계를 철저히 밝혔다. 이것은 {기신론}이 일심 이문으로 본각과 시각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밝혔다면, {金剛三昧經論}은 온갖 법은 적멸하여 불생 불감 무상 무생 무위 적정한 실상을 보고 본각의 실상을 체득하여 본각의 공덕으로 중생을 이익주는 보살도를 행한다는 내용으로 조직되어 있다.
Ⅳ. 결 론
이상과 같이 원효의 일심사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서, 인간 원효가 불법에 뜻을 두고 불교사상을 차례로 접하면서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또한 그의 불교사상을 어떻게 체계화하였는가를 알아보았다.
2장에서는 행장에 대한 기존 연구 가운데 필자의 눈으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행장을 선택하여 원효의 일생을 정리하여 보았고, 그 행장 가운데 원효 사상의 커다란 전기를 이루는 부분, 그리고 불교사상의 습득 과정을 중심으로 검토를 하여 보았다. 그리고 원효 사상의 체계화 과정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원효 사상을 나타내는 중요한 저술을 중심으로 그 저술의 차제 관계를 간략하나마 알아보았다.
3장에서는 원효의 일생과 저술의 선후관계를 고려해가면서 원효 사상이 체계화된 과정을 정리해 보았다. 여기에서 원효는 초기에 번뇌 가득한 마음을 맑히기 위한 유식에 관심이 있었으나, 그 번뇌가 바로 보리요 세속이 바로 열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원효는 화엄사상에 기초하여 번뇌와 보리 세속과 열반, 진제와 속제의 구분과 흔적마저 없애버리는 사상으로 그의 일심사상의 철학적 틀을 완성하고, 다시 중생들 속으로 들어가 그 사상을 실천적으로 전개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보았다.
원효 사상의 틀이 화엄에서 완성되었다고 해서 원효 사상을 화엄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종파의 대립이나 모든 분별을 떠나고자 했던 원효의 본래 생각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원효만의 깨달음의 경지, 깨달음의 마음, 일심사상이라고 표현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체계화되었다고 본다면, 원효의 사상 전체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원효의 사상을 이야기 할 때, 자신 전공의 영역으로 원효를 끌어들이려고 한다. 유식의 전공한 학자는 원효를 유식사상으로, {기신론}을 전공한 학자는 {기신론} 내지 여래장의 세계로, 화엄을 전공한 학자는 화엄의 영역으로, 정토나 관행(禪)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모든 분별과 대립을 넘어서고자 하는 원효를 어느 한가지 사상의 안목으로만 본다면, 원효 사상의 전체적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원효 일심사상의 전모를 알아보기 위해서 거대한 원효 사상의 기초작업으로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보았다. 커다란 그림에 밑그림이라고 생각하고 다시금 수정하고 가다듬어, 추후 온전한 그림을 완성하고자 한다.
.....<이하 본문; PDF>
출처; 원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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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체계.....원효는 너무 어려워....벌써부터 걱정된다.
원효 샘이 열심히 하셔서 한 수 갈켜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