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일이 만난 사람 꿈나무 육성 시스템의 새 길 실천하는 김희태 감독 ①
김희태(金喜泰)라면 1972년 대신고 재학시절 100미터를 11초7에 달리는 오른쪽 윙백으로, 차범근과 겨루어 조금도 뒤지지 않는 스피드와 함께 어지간해서는 볼을 빼앗기지 않는 기술을 장점으로 하던 선수로 기억된다. 1980년대 이후 윙백의 오버래핑 전술이 일반화되었지만 김희태라는 준족의 수비수로 인하여 그가 소속했던 팀들은 오버래핑을 팀의 주전술로 채용했다. 김희태는 1972년과 1973년 아시아 청소년대회에 연달아 출전하였고, 약관 20세에 국가대표선수로 발탁되었다.
필자와는 초면인 김희태 감독은 수인사할 땐 어눌하게 입을 열었지만 일단 축구 얘기가 나오자 현하(懸河)의 일변 그대로 숨 돌릴 틈 없이 자신의 축구 인생과 꿈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딱딱하지 않은, 정이 착착 감기는 특유의 목소리와 어법이었다. "1973년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대회 준결승이 기억납니다. 10만 수용의 아자디 스타디엄(당시 이름은 아리야메르 스타디엄으로, 이란의 팔레비 정권이 그 이듬해 열릴 아시안게임을 위해 건설한 세계 최대 규모의 경기장이었음 - 필자 주)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가운데 홈팀 이란과 맞서 싸웠는데 그렇게 열광적인 분위기는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심판의 호각소리는커녕 동료들이 악을 쓰며 외치는 소리도 안들리더군요. 결과는 우리가 0-1로 패했고, 우리는 3-4위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3-0으로 누르고 3위에 오르는데 그쳤어요." 그 대회에 출전한 청소년대표팀은 출국 전에 가졌던 연습경기에서 국가대표팀을 2-1로 눌러 이기는 등 탄탄한 조직력을 인정받아 기대가 컸지만 우리 선수들은 일찍이 상상도 못한 어웨이 게임의 핸디캡을 극복하지 못하고 우승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김희태 선수는 그 와중에서도 안정된 수비력으로 1970년대를 풍미한 이란의 스트라이커 마즈루미를 효과적으로 봉쇄하면서 대회 관계자들의 격찬을 받았다. 그 대회를 마치고 1973년 6월 국가대표 2진을 거쳐 7월에는 대표 1진에 발탁되어 1973년 서독 월드컵 지역예선 호주와의 플레이오프전 참가 선수단에 이름을 올린다.
불운했던 대표선수 시절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대표팀 유니폼 입는 것이 꿈이겠지만, 제 경우엔 대표선수가 된걸 후회할 지경이었으니...이해가 잘 안가시죠?" 이게 무슨 소리인가? 대표선수를 시켜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대표팀에서 나가기만을 학수고대하는 경우도 있단 말인지...그러나 김희태 감독 말을 들으니 그도 그럴 법했다. "유동춘(현재 경찰청 축구팀 감독) 선수가 제 또래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선수가 되었는데 부상으로 곧 나왔어요. 제가 그 다음으로 대표팀에 들어갔는데 팀 내에서 제가 제일 어린데다 동기도 없는지라 대표팀의 온갖 잡일을 도맡게 됐습니다. 지금이야 대표팀에 장비담당 직원이 있어서 선수들은 운동에만 전념하면 되지만 그 당시에는 신참들이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거든요. 수십개나 되는 축구공에 바람 넣고 장비 나르기, 훈련복과 축구화 빨아대기, 간식 사서 나르기...이거 뭐, 내가 축구선수인지 잡역부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고역이었습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때는 감독님과 코치님의 사이가 틀어져 제가 중간에서 메신저 역할을 해야 했어요. 감독님과 코치님이 벤치에 나란히 앉지 않고 서로 말도 안 하는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시달리다가 1975년 동남아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나가기 직전이었는데, 제가 다니던 연세대에서 출석일수 미달로 연세대 소속 선수들을 보내줄 수 없다고 협회에 통보했어요. 저는 얼씨구나하는 심정으로 그 지긋지긋한(?) 대표팀에서 뛰쳐나갔죠. 그 때만 좀 참았으면 대표선수로 오래 남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좀 철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1977년에 다시 대표팀에 들어갔지만 79년에 물러난 이후 국가대표와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성공한 대학 축구 지도자로서 지켜본 한국 축구의 문제 그의 1,2년 후배인 박창선, 조영증, 최종덕, 박성화, 조광래, 허정무 등이 선수로서 이름을 떨친 데 비해 김희태는 현역 은퇴 후 지도자로서 성가가 높은 축구인이다. 그가 감독으로 재직했던 아주대 축구부는 1990년대 대학 축구계에 신기원을 수립했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인상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명지대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박지성, 박재홍 등 든든한 재목들을 길러내어 '선수 키울 줄 아는 지도자'로 공인을 받고 있다. 하석주를 필두로 하여 1990년대 이후의 국가대표팀에는 김희태 감독이 직접 발굴해 키운 제자가 언제나 두세명씩은 붙박이로 자리 잡고 있다. 현 대표선수로는 안정환과 박지성이 그의 작품이다. "작년 월드컵 때 안정환과 박지성이 결승골을 넣는 장면을 보니 온몸이 희열에 감기더군요. 지도자의 보람이 이런 것이구나 싶더라구요." "1982년에 대우 로얄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이듬해 아주대 축구부 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4년 동안 코치로 일하다가 프로화된 부산대우팀의 코치로 4년 있었고, 아주대 감독으로 부임하여 4년 가르쳤죠. 대우팀 감독도 1년 했고, 명지대 축구부 감독으로 7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명지대에서는 저를 부교수로 대우해 주더군요. 그렇게 20년 동안 머리가 굵은 선수들을 데리고 축구를 했죠." 국가대표 지도자 경력도 없지 않다. 1990년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때 코치로 발탁되었고, 제1회 다이너스티컵에서 우승한 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벌어진 남북통일 축구대회 때 코칭스태프로 참여하는 감격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김희태 감독의 경륜은 프로나 대표팀보다 아마추어팀에서 선수들에게 기본을 잡아주고 큰 선수로 키우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김희태는 송병덕(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현재 외환은행 지점장), 조광래(안양 LG 감독) 등 1970년대 연세대 출신 축구 선수들 가운데에서도 학구파로 소문났다. "연세대 3학년이던 1975년 연습 도중 무릎연골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고 1년간 운동을 쉬었는데, 그 기간이 전화위복이었습니다. 비로소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왔거든요. 졸업 후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여 교수를 목표로 매달렸습니다. 대학 졸업 후 주택은행과 공군 축구팀을 거쳤는데, 대학원 수업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연세대나 고려대 선수들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재목들임에 비해 제가 근무한 아주대나 명지대 축구부에 들어오는 선수들은 솔직히 그들에 비해서는 처지는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아주대 시절 제가 가르친 하석주와 이민성은 청소년 대표 경력이 없는 선수들인데 대표선수로 성장했죠. 그 선수들이 가진 특징을 잘 살피고 기본 바탕 위에 개인적 장점을 결합시킨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 고등학교 지도자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성인축구팀에서 선수들을 가르치게 되었죠. 대학에서 선수들을 대하고 보니, 기본이 잡혀있지 않은 선수들이 너무 많더군요. 큰 선수가 되려면 체력, 기술, 전술 이해력에 개인의 특징을 살릴 수 있어야 하는 법인데, 그렇지 못하니 붕어빵같이 줄창 뛸 줄만 아는 선수들만 나오는 겁니다. 역시 효창운동장의 인조잔디 탓이었죠. 짧은 대회기간 중에 콘크리트 위에 깔린 인조잔디에서 경기하여 성적을 내려면 우선 잘 뛰는 것이 중요할뿐이니까요." "대학 지도자로서 선수들이 전술적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주로 가르쳤습니다만 기본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으니 한계가 있습니다. 한국 선수들의 체격, 체력, 기초기술은 세계수준에 비해 별로 떨어지지 않는데, 전술적 이해도에 있어서는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제가 명지대에서 붙잡는 것을 마다하고 축구센터를 만들게 된 것도, 이런 선수들을 모아 어려서부터 제대로 잡아주면 성과가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성적이라는 지도자의 굴레에 신경 쓰지 않고, 내 마음껏 지도해보고 싶어 만든 것이 김희태 축구센터입니다."
가르치고 싶은 것은 자율성과 전술 이해력 한 나라의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운동에 재능 있는 어린이들이 축구의 세계로 모여드는 가운데 축구 영재들이 끊임없이 발굴되어야 하고, 그 꿈나무들이 연령별로 특화된 프로그램에 따라 체계적인 훈련과 지도를 받으며 수준 높은 리그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기량이 검증된 선수가 줄지어 배출되어야 한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축구 선진국들은 하나같이 선진적인 선수 육성 시스템을 통해 우수선수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유럽의 프로구단들이 체계적으로 유스 클럽을 육성하여 선수 자원을 확보하고 있는데 비해 한국의 경우는 몇몇 구단들이 중고등학교 선수들 가운데 싹수 있는 재목들을 입도선매(立稻先賣)하는 데 그칠 뿐 아직 선진국 스타일의 유스클럽 시스템이라고 평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김 감독이 건네 준 명함을 보니 김희태 축구센터 대표라고 적혀 있다. 작년에 문을 연 포천 축구센터는 현재 김희태 축구센터로 개명하였다. 용인시 차원에서 투자를 주도한 용인축구센터와는 달리 포천시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지 못해 순전히 김희태 감독 본인이 투자하여 꾸려가고 있다고 한다. "제 출생지는 평택인데, 포천에 중학교 때까지 살았던 인연이 있어 여기에 자리잡게 되었죠. 우리 센터에는 포지션별 코치 4명을 포함하여 8명의 직원이 있는데, 매월 1천만원 정도 운영비의 적자가 나서 제가 메우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모두 일동중학교에 재학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학교 1학년이 20명, 2학년이 20명 등 40명의 학생이 있는데 내년에 20명이 들어오면 적자 규모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용인 축구센터 건립에는 저도 관여하였죠. 용인시의회 의장이 제 친구이고 해서 용인에 있는 명지대 축구부 연습장을 비롯하여 6개의 축구연습구장을 만드는데 시의 재정지원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후배인 허정무 감독이 제 뒤를 이어 용인축구센터의 총감독으로 일하고 있지만 용인과 포천 이 두 센터가 선의의 경쟁자로서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한다면 더 원이 없겠습니다."
허정무 감독과 박지성 선수 허정무 감독도 용인축구센터를 위해 개인적으로 출자하였다고 하니 이 두 축구인들이야말로 오직 축구 그 자체가 좋아서 사심없이 투신하고 있는 지도자라 할 것이다. 김희태와 허정무는 축구계에서도 친분이 두텁기로 소문난 사이다. "명지대 감독으로 부임할 때 학교 측에 조건을 걸었습니다.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재목을 길러내는 데에만 관심을 갖겠다고 말입니다. 학교측에서도 제 뜻을 수용해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허 감독과 바둑 두다가 박지성을 올림픽대표팀에 뽑으라고 청탁해서 지성이가 발탁된 거라고 이죽거리기도 하지만, 박지성 선수야말로 제 축구관에 딱 맞는 경우라고 해야 할 겁니다. 지성이는 고등학교 시절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선수였죠. 이두철 수원공고 코치가 지성이를 꼭 한번 보라고 권하기에 찾아갔습니다." 박지성 선수 얘기가 나오니 김희태 감독의 눈에 빛이 난다. "지성이의 특징은 볼을 쉽게 찰 줄 안다는 겁니다. 게임을 읽는 판단력이 좋다는 거죠. 지구력이 괜찮은 선수지만, 개인기로 재주를 부리지도 않고 체격이 좋아 파워로 밀어붙이는 선수도 아니어서 경기장에서는 눈에 띄지 않을 요소만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수를 볼 때 무엇보다 성격과 생활태도를 봅니다. 성격이야말로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운동을 시켜보면 알아요. 지성이는 자율성과 성실성 면에서 진국입디다. 고3이던 10월에 명지대 축구부에 데려와 웨이트를 시키며 힘을 기르는 데 주력했죠. 그 해 겨울 부산대우팀과 명지대, 아주대 이렇게 3개팀이 호주로 합동 전지훈련을 갔습니다. 거기서 만난 것이 허정무 감독이 지도하던 시드니 올림픽대표팀이었습니다. 올림픽대표팀과 15차례 연습시합을 가졌는데, 거기서 지성이를 지켜본 허 감독이 연습생으로 넣어주더군요." "일본 교토의 스카우터가 박지성이 1학년 때부터 주목하여 경기 데이터를 축적하더니 제발 보내달라고 애원하고 설득했죠. 아직 대표 경력도 없는 지성이가 2학년 때 휴학하고 J리그에서 뛰다가 히딩크호에 탑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타고난 성실성과 정신적인 원숙함에 기인합니다." 허정무 감독은 올림픽대표팀을 맡으면서 체격과 체력이 우수한 박재홍(전북, DF) 선수를 주전으로 기용하는 등 중용하였는데, 박재홍은 박지성만큼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다 성격 탓입니다. 그 때 재홍이는 성격이 아직 여물지 못했고 자율성도 부족했습니다. 시드니 올림픽 이후 축구협회에서 주선해서 월드컵 때 써보겠다고 박재홍과 심재원을 유럽으로 보내주었죠. 박재홍은 벨기에 리그로 갔는데 말도 통하지 않고 전술 적응에 실패하여 쓸쓸하게 귀국하였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히딩크에게도 밉보여 월드컵 멤버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어깨가 축 늘어져 돌아온 재홍이에게 제가 상무 입대를 강권했죠. 상무에서 잘 적응하고 전북현대로 가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재홍이가 극기하여 큰 선수가 되기 바랍니다. 그만한 체격에 스피드를 가진 수비수도 드물죠." ☞ 2편에 계속... [2003-07-01] 글: 신동일(축구팬, 교사)
첫댓글 이제서야 좋은 글을 보게되었습니다. 감동 입니다. 좋은글 부탁합니다
최근에 박지성 자서전을 봤는데, 발탁내용이 똑같은 얘기더군요.
중3이후 고등,대학에서는 박지성을 받고자 하는곳도 없었다고 씌어있어요.
너무 왜소한 체격 땜에.... 김희태 감독님과의 인연이..... 운 명 ? !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