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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징 교회 스크랩 이머징 교회 5. 고대적 미래 예배 - 로저 오클랜드 -
한아름 추천 0 조회 35 12.09.18 21: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머징 교회에 대하여 - 5. 고대적 미래 예배 - 로저 오클랜드 로저 오클랜드 글들

2009/07/02 23:14

작성자: 스데반(thebloodofx)

 http://blog.naver.com/thebloodofx/memo/20077075749

 
 
 
 

5. 고대적 미래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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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징 문화에서 어두움은 영성을 대표한다. 우리는 이러한 면을 불교 사원에서 발견하며 또한 카톨릭 교회 및 정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어둠은 뭔가 심각한 일들? 벌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i] - 단 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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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 12일, 뉴멕시코 주 글로리에타에서 국제 평가 포럼(National Reeval‎!uation Forum) 이라는 모임으로 약 500명 이상의 젊은 지도자들이 모였다. 모임의 목적은 새천년의 이머징 교회의 지도자들을 훈련하고 그들의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이었다.[ii] 이 모임에 대하여 영 리더스 네트워크는 교회 내 예술들을 회복시키는 것으로부터 예배와, 이야기 사용, 믿음의 신비주의적이고 체험적인 면 까지 모든 것에 대화를 나누었다.[iii] 주 강사로는 스탠리 그렌즈(Stanley Grenz), 레오나드 스위트, 브라이언 맥클라렌, 샐리 모전샐러(Sally Morgenthaler) 였다. 기사에 의하면 스위트가 그룹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포스트모던 시대로 변천하면서 가장 주된 도전은 항해 도구들이다.[iv]

 

1988년 뉴멕시코 주에서의 모임 이후 지난 여러 해 동안 이머징 교회는 많은 항해 도구들을 정의하였고 그것들을 이머전트 예배의 구조 속에서 구현해 왔다. 고() 로버트 웹버(Robert Webber)는 교회 갱신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되는 사람이다. 그는 1995년에 예배 연구 기관(The Institute of Worship Studies)을 설립한 후 규칙적으로 북미의 대부분의 주요 교단을 위한 워크샵을 인도하였다.

 

노던 침례 신학교(Nor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가 되기 전, 웹버는 신학 교수로서 위튼 대학에서 32년간 가르쳤다. 그는 40권 이상의 책을 썼으며 예배 인도자 (Worship Leader) 등의 신문 및 여러 잡지에 규칙적으로 글을 실었다.

 

나는 그가 쓴 글 중 구함: 고대적 미래 재능 이라는 제목의 글을 대하면서 처음으로 그의 관점을 알게 되었다. 그 글에서 웹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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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볼 때 고대의 것을 회복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분명히 보고 있다. 지난 40년간 여러 좋은 합창곡들이 만들어졌지만 최신 교회가 찬송가 및 예배의 자료들을 무시함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믿음은 아주 얄팍하게 되었다.[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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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버는 지금의 새로운 운동 가운데 성공할 수 있도록 재능있는 사역자들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믿는 여러 것들을 나열하였다. 그가 나열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

* 물, 빵, 포주주, 기름, 안수 등과 같은 거룩한 표시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한 재발견

* 빵을 떼고, 성체를 나누는 성만찬에서 주님의 식탁의 주요 속성을 재발견하는 것.

* 강림절, 크리스마스, 현현절(Epiphany), 고난절, 거룩한 주간, 부활절, 오순절 등의 기독교 축제를 통한 회중적인 영성의 재발견[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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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과거로 돌아가자는 웹버의 소망은 과거의 훌륭한 찬송을 재소개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사실, 고대적-미래 예배 재능에는 성경에서 발견될 수 없는 많은 예식들이 포함되어 있다.

 

과거로부터의 신비주의

 

다른 이머징 교회 지도자들처럼 로버트 웹버도 기독교는 새로운 세기를 위하여 수정된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다. 앞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다시 뒤로 거슬러 올라가 신비주의자들에게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이 기독교 믿음에 중요한 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는 또한 성경은 과거의 영적 신비주의자들의 가르침으로 보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다:

<

영성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자원은 성경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신비주의자들 및 행동주의자들을 감히 피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위대한 묵상집들을 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신비주의자들의 위대한 작품에 빨려들고 있다.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는 우리에게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 을 재 발견하며, 클레어보아(Clairvaux) 성 버나드(St. Bernard)의 겸손의 단계(The Steps of Humility)를 재발견하라고 부탁한다.[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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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버의 도서 목록에는 신비주의자들에 의하여 쓰여진 책들이 나열되어 있다: 토마스 아 켐피스, 마이스터 에크하트(Meister Eckhart), 아빌라의 성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멀톤 및 여러 다른 사람들이 있다.[viii] 당신은 이러한 이름들이 익숙하지 않겠지만 이들의 공통된 점은 이들은 카톨릭 신비주의자들이라는 점이다. 웹버는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

이러한 위대한 작품에 빠져드는 것은 영성의 위대한 보화로 우리의 비전을 넓히는 것이다.[ix]

>

 

웹버는 카톨릭 신비주의자들에게 매혹된 가운데 독자들에게도 그들의 작품들을 끌어안으라고 당부한다:

<

영성에 있어서 이러한 책들의 가치는 말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필수적인 것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무시하는 자들은 스스로 손해를 보는 것이요, 이러한 글들을 읽는 것은 자신들의 영적 성장과 영감에 도움을 얻는 것이다.[x]

>

 

웹버에 의한 언급은 매우 강하다. 과거 신비주의자들의 교훈없이는 우리의 영적인 삶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웹버는 이러한 고대적 미래 선생들에게 충성되려면 그들 자신의 종교적 전통을 절대로 떠나서는 안된다고 설명하였다:

<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복음주의자들의 목표는 역사적 실체로서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 다양성 속에서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카톨릭, 정교회, 개신교 교회들을 하나의 참된 교회의 여러 형태로 보게 한다. 모든 교회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권위 위에 서 있으며, 고전 기독교에 의하여 표현된 믿음 안에서 공통 분모를 발견하게 된다.[xi]

>

 

웹버가 나열한 신비주의자들에게 공통되는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로 믿고 있는 허깨비 여인에 대한 환상이다. 마리아를 본 성자들 (Saints Who Saw Mary) 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저자는 성자들을 방문한 마리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책에 나열된 마리아를 본 성자들로는, 아시시의 프란시스,[xii] 시에나의 캐더린,[xiii] 아빌라의 테레사,[xiv] 십자가의 요한,[xv] 로욜라 이그나티우스,[xvi] 클레어보아의 버나드[xvii] 등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러한 신비주의자들에게 매혹되게 될 때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 지 보이는가?

 

-감각(Multi-Sensory) 예배

 

영적 체험을 공급하는 자극적인 이미지들은 이머징 교회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왜 이머징 교회들이 예배실을 어둡게 하고 촛불과 향과 형상을 가져다 두는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는 반면, 이머징 교회 운동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말한다. 마즈 힐 휄로우쉽(Mars Hill Fellowship)의 막크 드리스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예배의 모든 것들은 뭔가를 설교하고 있다. 구조, 여러 불 빛, 노래들, 기도들, 친교, 향 냄새등 이 모든 것은 설교를 하고 있다. 사람의 오감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연관되어야 한다.[xviii]

>

 

종종, 평생 교회를 참석했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목사님들이 구축하는 변화들이 매우 불편하다. 그 이유는 성경을 가르치는 대신에 여러 감각들을 자극하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단 킴발은 어떤 연로하신 신사께서 이머징 교회가 신비주의적 예배 스타일을 구축하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을 인용하고 있다:

<

, 왜 당신은 향을 사용하십니까? 왜 그러한 버팀목이 있는 기도의 장소로 걸어가서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자리에서 기도하면 안됩니까? 왜 단지 성경만 가르치지 않습니까? 명상의 시간들이 내게는 불편합니다. 또한 예배실이 내게는 어둡습니다.[xix]

>

 

70세의 신사께서 하신 이러한 염려는 내가 북미를 여행하며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많은 사람으로부터 들은 염려와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염려스러운 언급은 연로하신 분들만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젊던 연로한 사람이던 다-감각 신비적 예배가 말씀 설교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대신하고 있음을 보면서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킴발과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머징 세대의 사람들은 다-감각 예배 체험을 원한다는 그들의 관점에 따라 자신들은 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예를 들어, 킴발의 책 고대 영성 예배를 위한 거룩한 공간을 만들기(Creating a Sacred Space for Vintage Worship)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미학(Aesthetics)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점점 다-감각이 되어가며 하나님께 관심이 없어져가는 우리 문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주기적으로 모이는 장소의 디자인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책임이 있다. 이머징 문화에서는 어두움이 영성을 대표한다. 불교의 사찰, 카톨릭과 정교회를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어둠은 뭔가 심각한 일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xx]

>

 

킴발은 더욱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

고대 초기의 예배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지금 가장 새롭고 최첨단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단지 교회가 존재하는 동안 언제나 함께 있어왔던 고대 영성의 예배 형태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xxi]

>

 

물론, 킴발의 언급은 사실이 아니다. 성경에는 제자들과 초대 교회가 예배의 원시 형태로 돌아갔다는 증거가 없다. 특히 그들이 더욱 영적인 것을 느끼기 위하여 어두운 분위기를 필요로 하였다는 증거는 더더욱 없다. 만일 초대 교회 신자들이 어두운 공간에 있었다면 체포되지 않기 위하여 비밀 장소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감각 예식들을 통하여 사람들의 환심을 간교하게 얻으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요, 초대 교회 교인들의 용기에 대한 모독이다. 성경 그 어디에서도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힌트마저도 없다.

 

미궁(Labyrinth)

 

미궁은 지금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는 관상(명상) 기도 시간에 사용되는 미로 형식의 구조를 말한다. 참여자는 이 구조를 따라 걷게 되는데 걷다 보면 중앙에 이르게 되고 그러면 다시 뒤로 돌아 나온다. 여러 길이 있는 미로(Maze)와는 달리 미궁은 하나의 길만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기도 장소를 만나게 되면 종종 기도 장소에는 촛불, 형상, 사진 등이 있다. 미궁은 맨 처음 이방 사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 관상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나리오이다. 미궁을 통하여 그 중앙에 다다르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집중하게 한다는 취지이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단 킴발의 글이 실려 있는데 제목은 놀라운 기도(A-Maze-ing: 미로 가운데) 이다. 이 글은 킴발과 그의 아내는 국제 목회자 모임(the National Pastors Convention)에서 미궁을 지나면서 가졌던 느낌을 서술한 것이다:

<

우리가 미궁에서 체험한 명상 기도는 이머징 세대의 마음과 아주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여유만 있다면 더 깊은 기도를 촉진하기 위하여 상설 미궁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레이스 랜드(국제 목회자 모임이 열렸던 멤피스 테네시의 큰 저택)가 체험적인 기도를 돕기 위하여 사람들이 방문하여 조용하게 기도할 수 있도록 격려할 것입니다.[xxii]

>

 

킴발과 그의 아내가 그 모임에서 미궁을 체험한 이후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돌아와 임기 응변의 미궁을 만들어 세웠다.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이 거룩한 공간의 시각적 효과를 만들기 위하여 모든 방 주변의 벽에 예술품들을 걸고, 천을 매달고, 촛불을 켰는지 설명하였다.[xxiii]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임시 변통의 미궁에서 어떤 체험을 하였는지 설명하면서 킴발은 체험적인 기도의 요소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무릎을 꿇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라고 말하였다.[xxiv]

 

미궁에 대한 현재 관심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러한 관례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었다면 이머징 교회에 대한 통찰력과 함께 왜 이머징 교회가 다-감각적 예배 예식을 사용하게 되는지 알게 된다.

 

샌프란시스코의 그레이스 성당의 여사제인 로렌 아르트레스(Lauren Artress)는 현대 미궁의 촉매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어떤 기사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

아르트레스에게 있어서 미궁이란 인간의 인격의 변화 과정을 위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영적으로 특별한 종류의 성숙을 추구할 때 의식의 변화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아르트레스는 1991년 세미나에서 그녀의 첫번째 미궁을 심리학자이며 신비주의이고 영들과 교통을 하는 진 휴스톤(Jean Houston)과 함께 걸었다고 말한다. 진 휴스톤은 몇 년 전에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 되어버린 힐러리 클링턴 여사를 도와 엘리너 루즈벨트의 죽은 영혼을 만나게 해 준 사람이다. 아르트레스는 그녀의 미궁의 첫번째 체험을 내 생애의 가장 놀라운 사건 중에 하나라고 불렀다. 그녀에게 있어서 미궁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부르는 빛에 우리 자신을 연합시키는 깊은 리듬으로 우리를 일깨우는 영적 수단이라고 한다.[xxv]

>

 

아르트레스는 미궁의 거룩한 구조는 고대의 거룩한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 라고 말한다. 그녀는 미궁을 여성적 신성에 연결시키는 길이라고 본다.[xxvi] 아르트레스는 아직 이머징 교회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매우 강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의 영성은 이머징 교회의 것과 흡사하다. 사제 알란 존스(Alan Jones)는 (나중에 이 사람의 믿음에 대하여 다루어 보겠다) 그레이스 성당에서 아르트레스를 목회 차원에서 감독하는 사람이다. 알란 존스는 브라이언 맥클라렌과 호흡이 아주 잘 맞는 사람이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존스의 책 재발상 기독교(Reimagining Christianity) 의 뒷면에 추천의 글을 썼다. 이 책은 이머전트의 책들과 매우 흡사한 색깔을 띄고 있다.

 

덕 패지트도 미궁의 사용에 대하여 언급하며 설명하고 있다:

<

개인적으로 그리고 우리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올해는 재의 수요일(the first Ash Wednesday)로 시작되는 사순절의 첫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저녁에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밝히고 미궁을 돌았다. 미궁을 도는 체험은 모든 사람들이 리듬에 맞추어 중심을 향하여 움직이고 또한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함께 미궁을 걸으려 어떤 사람들은 들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나왔다.[xxvii]

>

 

패지트는 사람들이 미궁을 마친 후에 사순절에 참여하여 죄를 고백하며 재를 뿌렸다고 추가로 설명하였다. 패지트의 미궁 체험은 로마 카톨릭에 의하여 지지되는 또 다른 비성경적 행위들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이머전트 지도자들은 미궁과 같은 신비체험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결국 큰 문제를 안게 될 것이다.

 

드럼을 쳐서 예수를 꺼내라

 

버지니아 리치몬드 서쪽 끝에 위치한 거룩한 위로자의 교회(Church of the Holy Comforter)의 드러밍 서클(drumming circle)은 리지나 스티쓰(Regena Stith)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인터뷰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드럼 서클은 말 그대로이다. 드럼을 들고 원형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이는 정말로 매우 고대적인 표현이다. 당신은 정신을 잃게 된다.[xxv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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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쓰가 처음으로 드럼의 힘을 체험한 것은 1990년 매사추세츠에서 요가 훈련을 받으면서이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선포하길, 당장 드럼에 필요해요[xxix] 라고 하였다.

 

어떤 기관에서 행사를 가지면서 그 모임에 대한 광고를 냈다:

<

우리는 함께 한시간 동안 드럼을 치면서 온 세상 사람들을 연합시키려고 합니다. 드럼을 치는 지구를 함께 만듭시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첫번 드럼 행사입니다. 온 세계가 같은 시간에 한 시간 동안 드럼을 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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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샤마니즘 식으로 드럼을 치는 것이 신비 체험으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최면의 상태로 우리의 두뇌를 맞추는 동안 드럼 소리는 몸의 지능에 직접 말을 건넨다.[xxxi]

 

이머징 교회 중에 몇몇 사람은 리치몬드의 거룩한 위로자 교회의 드럼 서클을 다소 치우친 것이라고 여기지만, 이 현상은 인기를 더해가고 있으며 포스트모던적인 종교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드럼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드럼을 치는 것은 통합적인 조화를 위한 문이라고 한다:

<

드럼은 마음을 진동시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손바닥으로 콩가 드럼의 표피를 때리면 교단과 문화의 경계선을 초월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생긴다.[xx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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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 말란(Johan Malan)은 남 아프리카의 림포포(Limpopo) 대학의 교수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이다. 그는 드럼의 붐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설명한다: 서구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아프리카 드럼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xxxiii] 그는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드럼의 기능은 방대하다. 자신과의 조화를 촉진해주고, 다른 사람과 자연과의 조화를 돕는다. 스트레스로부터의 쉼과 치유를 주며, 영을 불러일으키고, 우주의 에너지의 흐름을 촉진한다. 명상을 돕고, 실신 상태에 들어가게도 한다. 드럼을 더욱 공격적으로 칠 경우 여러 다양한 거친 열정들을 일으킨다. 후자의 경우 사회와 질서에 대항하는 반란의 형태를 취하게 만들기도 한다.[xxxiv]

>

 

드럼을 치는 것은 아직은 시작 단계이다. 그러나 점점 세력을 얻고 있다. 기독교 예배의 캘빈 기관(Calvin Institute of Christian Worship)의 어떤 글이 드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드럼을 치는 관습을 매우 선호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이방 문화에서 사용하는 자원들을 가져와 교회에 사용할 경우 예배자들에게 매우 유익이 된다. 그러할 경우 다양한 회중들을 이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보편성과 인간의 다양성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예배가 될 수 있다.[xxxv]

>

 

그러나 말란 교수는 조심스럽게 경고하고 있다:

<

성경적 기독교에 참으로 헌신되지 않은 사람들만이 감히 이방 문화의 악한 방법들을 모험해 보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강력한 미혹의 역사가 그들에게 임할 것이며 그러할 경우 복음의 빛에 눈이 가리게 될 것이다 (고후 4:3-4).[xxxvi]

>

 

과거의 것이 다시 새것이 되다

 

데일 더크센(Dale Dirksen)은 캐나다의 사수캐추완 브리어 크레스트 신학교(Briercrest Seminary in Saskatchewan)의 예배 및 교회 사역 부교수이다. 그는 과거의 것이 다시 새것이 되다: 이머전트 교회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그 글에서 더크센은 이머전트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의 힘과 같은 것들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면서 고대 사상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말하길, 이머전트 사람들은 신비를 갈망하고 하나님을 추구한다[xxxvii]고 말한다. 더크센은 이머전트 교회가 소원하는 변화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

문화적 변화는 신중하고 사려깊은 반응을 필요로 한다. 변화 속에서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옆으로 밀쳐내고 먼저 주요한 것들을 재정의하거나 또는 심지어 재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xxxviii]

>

 

대부분의 이머전트 교회 주창자들처럼, 더크센도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를 기대하고 있다:

<

만일 우리가 제자를 만들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이는 사명에 대한 새로운 자세와 새로운 감각을 의미한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에 대하여 배울 수 있는가? 그 언어는 무엇이며 어떤 풍습이어야 하는가? 새로운 문화 속에서의 신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xxx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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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크센은 그의 독자들에게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을 복음화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는 이머전트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제안을 한다:

<

이머전트의 언어는 말로 하는 언어 이상이다. 이머전트의 언어는 그림, 상징, 행동, 심지어 냄새를 포함할 것이다. 이머전트들에게 말하려면 교회는 이제 단순한 말만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기쁜 소식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 안에서 이머전트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한참 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xl]

>

 

더크센은 우리가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

그러나, 이머전트 사람들과 연결되려면 우리는 20세기보다, 심지어 종교 개혁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머전트 사람들에게 영적인 의미를 주는 고대 관습들은 종종 3세기에서 발견된다. 이때는 새천년이 시작된지 얼마 안된 때이며 또한 중세 시대의 예배 드라마가 한창 시작하던 때이다.[xli]

>

 

더크센에 의하면 제3세기의 신비주의자들에게 거슬러 올라갈 뿐만 아니라 고대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도 필요하다.

 

로마 카톨릭인가 아니면 카톨릭인가?

 

포스트모던 세대의 사람들을 끌기 위한 체험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이머징 교회 운동의 목표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심각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왜 첫번째 천년이 바뀌던 중세시대 및 혹은 제3세기의 시대로 거슬러가야 하는가? 이렇게 문을 여는 것은 마귀적 교훈들이 교회에 몰래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아닌가? 진리 안에 머물기 위해서 성경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교회 교부들 및 신비주의자들로부터 위대한 영적 통찰력을 모을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디모데후서 3:16절의 하나님의 분명하고 영감된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다. 성경은 안정되고 영원하다. 따라서 수세기 전에 기독된 진리들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관련이 된다. 현재 이머전트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과거 역사 시대로 돌아가 비성경적인 방법들, 예식들, 신비적 체험들을 모아 현 시대에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지만, 나는 이들의 주장은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고 믿는다.

 

고대 영성 지지자들은 신약 성경 외의 다른 계시를 왜 추구하게 되는지 변론을 한다. 로버트 웹버의 다음과 같이 변론하였다:

<

나도 한때는 1세기 끝에 교회가 배도로 들어가 종교 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다고 믿었다. 나도 농담조로 학생들에게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위텐버그 성당의 문에 95개조항의 반박문을 걸 때 마치 오순절 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개신교도들이 활동하게 되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초대 교회 교부들과 종교 개혁 이전의 기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관점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교회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강림 오순절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건강을 위하여 역사 속의 모든 교회로부터 골고루 속할 수 있어야 한다.[xlii]

>

 

웹버는 여러 사람들이 교회 교부들로부터의 가르침을 취하는 것을 의심하는 것을 인식하는 가운데, 특히 교부들이 카톨릭 교회의 교부들일 때 더욱 의심을 하는 것을 느끼면서 다음과 같이 변론한다:

<

초대 교회 교부들을 존경하다보면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진 복음주의자들에게 나는 카톨릭과 로마 카톨릭 사이에는 구분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초대 교부들이 카톨릭이었다는 의미는 고전적인 기독교 전통을 모든 교회에 적용했다는 뜻이다. 즉 모든 교회에 일반적인 전통을 만들어 내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일반 전통에 여러 가지를 추가한 전통이라 하겠다. 나는 일반 전통을 믿으며 나는 이러한 전통을 카톨릭의 형제 자매들과도 나눌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교회를 로마식으로 만들어 놓은 전통들에 대하여는 믿지 않는다.[xl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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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버는 여러 다른 이머전트 지도자들처럼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으로서의) 카톨릭을 구분한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자신들이야말로 사도 베드로로부터 시작된 교황의 사도적 계승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구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카톨릭은 로마 카톨릭이다. 이머전트 교회 내에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지만 웹버가 언급한 카톨릭 교회의 초대 역사와 관습을 포용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초대 카톨릭 교회의 역사와 교훈들과 관습들을 받아들인 많은 개신교도들은 결국 자연스럽게 로마 카톨릭 교인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웹버의 언급은 여러 사람에게 1세기로부터 3세기까지의 카톨릭 교회 교부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확신시킨다. 그러나 그 당시 교부들의 여러 사상들이 성경에 기초를 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웹버가 언급한 다른 말들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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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부들은 우리를 이끌어 현재 우리의 여러 전통 배후에 있던 공통적인 것들로 인도한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들을 거부하지 않지만 교회의 공통적인 것들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바로 이곳에서 교회의 연합이 가능하여진다. 요약하면, 하나의 거룩한 카톨릭 그리고 사도적 교회는 교회의 하나됨을 나타내는 믿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하나됨에 대하여 뭔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복음주의잗르은 교회의 하나됨에 대하여 논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모든 교회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통하여 교회의 하나됨을 체험하여야 한다. 따라서 동방 정교회, 카톨릭, 그리고 다른 개신교 지체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해야 한다.[x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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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부들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관점

 

웹버의 평가에 의하면 카톨릭 교회 교부들에게 배우는 것은 어머니의 모유처럼 안전하다. 웹버 및 다른 이머징 교회 선생들은 교회 교부들을 연구함으로 여러 영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유익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교회 교부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한다면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하지 않고 있으면 믿을 만한 지도자들과 교수들이 신비주의자들을 안전하다고 말하고 또한 성경에 준하는 것으로 옹호할 때 사람들은 실제로 성경적인 교리로부터 떨어져 나가 인간이 만든 교리, 나아가 마귀에 의하여 영감된 교리를 따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단적인 가르침이 이미 이러한 초대 교회 교부들에 의하여 교회 내에 침투했었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들의 가르침들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초대 카톨릭 교회 교부들을 살펴보자. 다음 내용은 국제 카톨릭 대학의 교회 교부들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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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왜 우리는 그들을 연구하는가? 교황(거룩한 아버지)은 우리에게 그 기본적인 이유를 알려 주었다. 교부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모퉁이 돌로 하고 사도들을 터로 삼아서 세워진 교회의 구조의 틀들이다. 특히, 그들은 전통을 증거할 수 있는 특혜를 입은 자들이다. 창설자들은, 기관의 창설자이던, 종교 공동체의 창설자이던, 언제나 특혜의 자리를 지닌다. 그들은 기독교의 근원들에 가장 가까운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의 교부들이라고 언급된 초대 교부들로서 사도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직접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회 전통의 살아있는 근원들을 그대로 접하였던 자들이었고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첫번째 틀을 개발하였던 자들이었다.[xl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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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이러한 초대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껴안게 된다면 그 교훈들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까? 위의 강의를 한 저자에 의하면 그들의 교훈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카톨릭 교회의 품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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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부들은 카톨릭 전통이 참된 것임을 보증한다. 많은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교부들의 글들을 묵상하고 숙고하면서 카톨릭 교회로 들어왔다. 19세기의 위대한 영국 추기경인 추기경 존 헨리 뉴만(John Henry Cardinal Newman)은 그가 어렸을 때에 영국 교회의 회원이었다. 그러나 교회 교부들의 생각과 그들과 사상에 빠지게 되었다. 후에 그는 그의 책 로기아 프로 비타 수아 에서 언급하길 그는 교부들을 통하여 참된 교회, 우주적인 교회, 카톨릭 교회를 보았다고 하였다. 교회 교부들은 그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바로 그 도구였으며 로마 카톨릭을 껴안게 되었던 이유라고 말하였다.[xl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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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추기경 존 헨리 뉴만은 카톨릭 교회 교부들의 글들을 묵상하고 숙고하기 시작하면서 카톨릭 교회로 개종하게 되었다. 현재 21세기에 이러한 개종이 날마다 엄청나게 발생하고 있다.

 

마르커스 씨. 그로디(Marcus C. Grodi)에 의하여 편집된 귀향(Journeys Home) 이라는 책은 이러한 개종을 여럿 기록한 것이다. 그 책의 서론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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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종하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로부터 온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그들은 카톨릭에 대한 온갖 종류의 좋지 않은 것들, 즉, 카톨릭의 믿음들, 끔찍하고 역겨운 사건들을 배우면서 카톨릭 교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의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각자에게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사 그들이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배워왔던 대부분의 것들이 사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xl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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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의 한 부분에 나오는 샤론 엠. 맨(Sharon M. Mann)은 로마교로 귀향을 한 많은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간증을 제공하고 있다. 그녀는 교회 교부들이 그녀로 하여금 로마 카톨릭을 향하여 여정을 떠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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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개 교회 교부들의 글들을 읽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무엇을 믿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개신교도들은 아니었다. 카톨릭식의 주제들이 교회사의 조경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나는 교회 교부들을 거부하지도 않았지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것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 1세기의 교회는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정신 나간 사상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의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가 대단한 카톨릭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xlv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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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글들과 다른 카톨릭 교회 교부들의 글들을 읽었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샤론은 카톨릭 전통을 더욱 알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녀는 성체 성사를 집행하는 예배에 참석하였고 결국 그녀의 삶을 변화시키는 체험을 갖게 되었다. 다음은 샤론이 자신의 체험을 서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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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토요일 밤 성체 미사에서 나는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꿇어 엎드려 성찬 앞에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았다. 내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도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단지 미친 것인지 아니면 실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매번 성찬을 대할 때마다 나의 목구멍이 꽉 막히게 되면서 나는 성체를 삼킬 수 없었다. 나의 확신들은 갈갈이 찢어지고 있었다. 만일 주님께서 참으로 내 앞으로 지나가신다면 당장 주님을 경배하며 예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나는 우상 숭배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 주에 있었던 사건들은 내 마음 속에 가장 강력한 자국을 남겼다. 개신교에 머물러야 한다는 나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나의 마음은 카톨릭을 사모하였으며 결국 모든 기독교 세계와 연합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다.[x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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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은 성체 성사를 경험한 후에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녀의 여정은 카톨릭 교회 교부들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되어 카톨릭 신자로 개종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던 세대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고대-미래의 믿음이 해답이라고 믿는 이머징 교회는 교회 교부들 (특히 신비주의자들)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이머징 교회는 샤론이 걸었던 여정을 그대로 답습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예배에 있어서 고대 미래의 길은 아마도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로마 카톨릭의 품으로 안기게 만들 것이다.

 

당신은 초대 기독교 교회에 어떤 일을 발생할 것인지에 대한 바울의 예언을 기억하는가?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행 20:28-3).

 

바울은 실제로 그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교회에 침투하여 양 떼들을 해칠 것을 경고하고 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바울의 예언적 경고가 들어맞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경고한 대로 그대로 발생하였다. 1세기에서 3세기까지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등장하였다. 성경의 원칙들은 무시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자칭 하나님을 접할 수 있는 새롭고 혁신적인 방법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체험적 가르침을 따랐다.

 

왜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는지 간단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대신할 때, 비록 그들은 계몽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공식들은 영적 어둠으로 완전하게 빠지게 만드는 주범들이 된다. 초기 신비주의자들은 성경에서 발견될 수 없는 사상들을 기독교에 도입하였다. 그 사상들은 영적인 폐해를 위한 처방들이었다. 예수님의 형제 유다는 초대 교회에 오고 있는 배교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 4)

 

이머징 교회의 여러 지도자들은 속사도 시대(the post-disciple era)의 교회 지도자들의 믿음과 사상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들은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과거로부터 이러한 가르침들을 재소개한다면 우리는 21세기에 성공적인 교회 및 영적인 전환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잠깐! 만일 신약의 교회로부터 등장했던 교회마저도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과 사상에 빠져 버린 적이 있다면 왜 우리가 과거의 오류를 흉내내어야 하는가? 사람의 교리가 성경의 교리를 대신할 때,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게 되어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된다. 과거에 이러한 일들이 이미 발생하였으며 지금도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교리를 따르는 것은 언제나 믿음의 파산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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