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의 현안, 특히 경제 및 정치와 관련한 사회 문제들에 관하여 천주교 교종 프란치스코가 그동안 발언한 내용들을 언론인 미켈레 찬추기가 편집하여 펴낸 [돈과 권력(Potere e Denaro)](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펴냄)을 일곱 차례에 걸쳐 요약합니다.
빈부 격차와 환경의 파괴 등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민감한 현안들에 대하여는 그동안 천주교 교종들이 <교종 회칙>이라는 문서를 통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발언해 왔으며,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 점에 있어서 훨씬 강도높은 내용의 발언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책 [돈과 권력(Potere e Denaro)]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제안들을 정리한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노동과 불로소득
노동의 존엄
그리스도교 성경에는 하느님이 아담에게 한 첫 명령이 ‘가서 땅을 가득 채우고 일구며 지배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수확할 땅의 일꾼들”이라고 불렀고,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노동은 인간의 본래 조건에 속하며, 삶에 근본적인 것입니다. 노동을 통하여, 개인은 ‘더욱 인격체’가 되고 인류는 번성하며 공동체는 유익이 됩니다.
젊은이는 일을 시작하고 나서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노동은 인간의 벗이고 인간은 노동의 벗입니다. 노동이 사람들을 서로 가깝게 해 주고 서로를 위하여 일하도록 해 주기 때문에, 노동을 둘러싸고 공동체를 유지시켜 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노동은 언제나 함께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는 두 요소입니다. 인간은 노동자가 될 때야 비로소 충만한 자아실현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개인은 다른 이들에게 열려있을 때, 노동으로 스스로를 꽃피울 때 인격체가 됩니다. 노동은 인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인간이 낳은 협력의 가장 공통된 형태이며, ‘시민애(amore civile)’의 한 형태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세상을 지탱하는 진정한 참사랑인 것입니다.
노동을 수호해야 합니다
노동은 인간 삶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의 권리이자 필요 요소이며,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는 활동입니다. 노동의 정당한 보수는 정의를 실현하는 근본적인 방식입니다.
베네딕토 수도승들은 묵상과 노동의 상호 작용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성숙과 성화(聖化)를 추구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을 실천할 때 우리는 건전한 현실주의와 온유한 깨어있음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노동은 창의력, 미래 설계, 재능 개발, 가치 실현, 사회적 소통과 같은 개인의 다면적 성장을 위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들에게만 국한된 이윤과 경제적 합리성을넘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안정된 고용보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노동을 수호할 때, 인간은 전인적으로 인간 존엄에 맞갖게 스스로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노동은 이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이며 성장과 인간발전과 성취의 길이기때문에, 기술 진보로 발명된 기계들로 인간 노동을 대체하려는 천편일률적인 시도는 옳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난하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금전적 도움만 주는 것은 임시방편에 그쳐야 하고, 노동을 통하여 품위 있는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언제나 참된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 수십년간 경제는 기술 발전을 촉진하여 일자리를 줄이고 생산 비용을 절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단기간에 더 큰 이윤을 얻고자 인적 투자를 중단하는 것은 경제적 차원에서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노동이 전부는 아닙니다
노동을 우상처럼 떠받들어서는 안 됩니다. 지나친 노동은 노동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해롭습니다. 휴식은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욕구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노동의 문화와 더불어 휴식의 문화도 있어야 합니다. 또 너무 어릴 때부터 일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몸이 아플 때와 나이 들었을 때는 일하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자아실현을 위하여 그리고 사회 전체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하여 일해야 할 때입니다. 젊은이들이 노동에서 밀려나 있으면 기업에 필요한 열정, 패기, 혁신 그리고 삶의 기쁨 자체가 부족해집니다. 경제활동을 향상시키고 공공의 행복을 촉진하는 소중한 공동선이 부족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다운 사회적 합의’, ‘노동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정년에 도달한 이들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 젊은이들에게 일을 주는 것입니다. 노동은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으뜸 선물이고, 사회의 으뜸가는 시민 자산이며, 젊은이들이 한층 도약하여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돕는 보증이됩니다.
노동의 문화를 위하여
시민들의 절반이나 2/3만 일하고 나머지는 국가의 사회보장과 지원을 받기는 하지만 계속 배척받는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이를 위한 수입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노동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노동이 없으면, 모든 이를 위한 존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은 모든 이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정년에 은퇴하고 연금 생활을 하는 것은 정의의 행위입니다. 반면에 장년들을 은퇴하게 하여 실업 수당을 주면서 체제에 순응하도록 압박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입니다. 일없이 수당만 있으면 근근이 살아갈 순 있겠지만, 참다운 삶을 위하여 노동은 꼭 필요합니다. 그저 생존이냐 아니면 삶이냐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일자리가 없어서 실의에 빠져 살아가는 청년층의 증가는 미래를 담보로 잡는 행위입니다. 노동이야말로 참다운 존엄성을 부여하는 인간 활동입니다.
불로소득의 문제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노동에서 생겨나는 존엄이 없다고 한다면, 불로소득(rendite)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그러한 존엄이 없습니다. 경제 금융화는 권력을 가진 사람과 권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 사이에 갈등을 없애기는커녕, 이윤-임금의 변증법적 논리에서 불로소득-임금의 변증법적 논리로 그 갈등의 축만 옮겨 놓았습니다. 즉, 오늘날에는 노동하지 않지만 소득이 있는 사람들과 노동을 해야 수입이 생기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기업가들도 불로소득의 논리에 따라 무너지고 있습니다.
불로소득의 힘은 널리 퍼져 있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국제연금기금, 민간투자기금(hedge fund), 국가보유투자기금(sovereign fund)은 그 지분 보유자들에게 한 해 수백억을 벌어주지만, 이 기금이 누구의 것인지, 누가 그 ‘주인’인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이 권력은 계속 더 강력해져서, 금융이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기 시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으면서 정치 권력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심지어 미사일과 폭탄을 비롯하여 각종 무기를 매매하는 ‘시장’을 위하여 새로운 전쟁을 선동하기까지 합니다.
흔히 오로지 은행 투기의 그늘에 가려져 기관 형태로만 존재하면서 인간의얼굴은 없고 디지털 형태만 지니는 경우가 다반사인 이러한 상업활동의 주인들은, 권력을 사유화하던 때에 비하여 훨씬더 비정한 권력논리에 따라, 형태도 실체도 이름도 없는 어떤 것들을 기금 운용 관리자들에게 지시합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자가 소유주와 뜻이 맞지 않을 때는 물리적으로라도 그에게 반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것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직접 명확한 사회적 임무를 맡을 수 없는 추상적인 익명의 단체가 지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로소득, 투기, 불투명 금융에 관한 주제는 권력의 주제와 직접 맞닿아 있습니다. 곧, 기업인들의 투자 추세가 기업 투자에서 금융 투자로 점점 더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980년대 이래, 금융 투자가 산업이나 농업에 대한 투자보다 훨씬 많았을 때마다 매번 국가들은 장기간 심각한 경제 침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기업의 생산 이윤보다는, 기업에 투자하는 자본으로 벌어들이는 불로소득이 여전히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경제 민주주의
불로소득과 소수의 금융세력이라는 주제는 필연적으로 경제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이어집니다. 공공생활에 대한 참여 없이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인권존중과 증진으로 뒷받침되는 참여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실업자가 될 노동자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파산해 버리는 많은 거대 기업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파산은 결코 소유주들만 관련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국가가 쏟아붓는 어마어마한 자금 규모는, 결국 언제나 정직한 납세자들만 그 대가를 치릅니다.
따라서 더 발전적인 경제 민주주의 형태들, 예를 들어 경영 감독과 촉진의 차원에서 대기업들의 운영에 대중이 참여하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기업들이 도산할 경우 그 대가를 치르는 주체는 국가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시민 사회를 대표하는 대의 감독기구들이 필요합니다. 또 대기업마다 실제로 사회의 중요한 선택들이 정의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감독하는 기구인 윤리위원회를 설치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근본정신을 되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한 국가의 정치 경제 문제에 대하여 백성이 주인 의식을 가지고 참여하여 과단성 있는 선택을 내리지 않고서는, 시대에 맞는 우리 사회의 미래는 그려볼 수 없습니다. 주인 의식이야말로 형식적 민주주의의 절차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참여 형태들에는 시민 사회, 시민 경제 단체, 친교와 연대 단체, 대중 운동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단체들은 그동안 사회에서 배척당해온 이들을 공동 운명을 구축해 나가는 일에 포함시키고, 여기서 생겨나는 강한 도덕적 활력으로 지역, 국가, 국제적 차원의 지배 구조들의 활성화에 이바지할 것입니다.
모든 시민들은 자기가 살고있는 도시와 나라에 대한 확고한 시민 의식을 지녀야 하며, 해당 지역의 주민으로서 고유한 책임감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두 하늘로부터 사람들 각자에게 부여한 선택과 책임의 자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민으로서 도시 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이며, 이렇게 할 때야 민주주의가 되살아납니다.
큰 악행인 부패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고질적인 결함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 경제적 부패입니다. 더욱이 정치의 부패는 한 나라의 경제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시장에 분열의 바이러스와 부정부패의 병폐를 퍼뜨려 올바른 시장 경쟁이 훼손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패는 대의기관들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왜곡합니다. 부패는 공동 문제를 처리할 때 부유하지 않은 이들과 매우 정직한 이들을 배제해 버립니다. 그래서 개별 국가뿐만 아니라 이제는 국제적 차원에서도 민주주의 생활에 심각한 상처(vulnus)를 입힙니다.
공동선과 전체선
오늘날 정치는 더이상 공동선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경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선은 사회를 몸으로, 집단으로 보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었고, 공동의 이익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단체든 순전히 개별적인 이익보다 우세하였기 때문입니다.
불의가 판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배척당하며 기본권을 박탈당하는 세계화된 현재 사회 상황에서, 공동선의 원리는 연대와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이익이 지배적일 때 공동선의 올바른 사회적 결속을 상기시키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공동선은 집단이든 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입니다. 공동선이 정치권위의 존재 이유라는 사실과, 정치권위가 여러분야의 서로다른 이익들이 조화되도록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선은 부자와 투기꾼과 불로소득자들로 이루어진 10퍼센트가 독차지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달을 근근이 살아가는 노동자와 농부 또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이들의 것입니까? 우리 사회에 개인의 단순 계약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되는 강한 사회적 유대나 진정한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지 우리는 늘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사회적 유대가 늘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납세의 필요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정당한 세금 납부는 유기체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경제학자 차마니(Zamagni)가 밝힌 대로, ‘공동선’이 합의와 연관된다면 ‘전체선’은 계약과 연관됩니다. 실제로 전체선은 공동선에서처럼 두 값의 곱이 아니라 두 값의 단순한 합입니다. 전체선을 이용하여 어떤 사람들은, 개개인이 맺은 무수한 계약들을 합산하고는 겉보기에 성공적인 노동정책이 시행되었다는 환상을 심어주려 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버리는 문화의 뿌리가 있습니다. 아무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지 않고도 0은 1,000 옆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동선이 경제적 이익의 중심에 있다면, 가장 힘없는 이들을 더이상 사회에서 배척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전체 함수의 계수로서 0값을 지닌다면, 공동선에서는 전체 함수의 결과가 0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체선의 논리가 만연해 있습니다. 새로운 버림이 있을 때마다 이러한 논리로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공동선의 논리에서는 그처럼 억지로 숫자들을 버리고 나서 이루어지는 계산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손가락이 아프다고 그 손가락을 잘라내지는 않습니다. 대신 치료하려고 애씁니다. 일이 난관에 부딪히고 적자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게 해결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잘 적응하도록 배려하여 모든 이에게 유익이 되게 해야 합니다.
논란이 되는 사유재산
지구는 공동 유산이고, 그 열매는 모든 이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창조주는 모든 이를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장 혜택받지 못하는 이들의 기본권이 존중받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유재산이 재화의 보편적 목적에 종속된다는 원칙은 사회 활동의 “황금률”이고 “윤리적 사회적 질서 전체의 제1원리”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사유재산권을 절대적이거나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한 적이 없으며, 모든 형태의 사유재산 행사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였습니다. 창조주는 온 인류에게 땅을 주어 아무도 제외되거나 특권을 누리지 않고 모든 성원의 생계를 누리게 하였습니다. 인격적 사회적 권리, 경제적 정치적 권리 그리고 국가들과 민족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신장시키지 않는 어떠한 개발도 인간에게 진정가치있는 것이 못됩니다.
모든 사유재산에는 언제나 사회적 담보가 지워져 있습니다. 재화는 소수의 복 받은 이들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이바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유익이 소수에게만 유리하도록 지구와 인류 자원들을 관리한다면 이는 창조의 섭리에 맞갖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일부 불의한 자들, 특히 절대 권한에 대한 망상으로 엄청난 재화를 축적하는 투기꾼들의 악습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