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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석가장, 천계산 만선산 태항대협곡 5일(18.4.24~28)]
[관광유적 전 일정]
●1일: 부산 김해공항→ 석가장→ 조운묘→ 신향 이동
●2일: 천계산(운봉화랑, 노야정)→ 왕망령(북석립)→ 만선산(단분구, 일월성석)
●3일: 통천협→ 도화곡→ 왕상암
●4일: 팔천협→ 한단 이동
●5일: 한단→ 석가장 이동→ 김해 공항→ 울산
<여행지도>
[1일] 2018년 4월 24일 화요일 ●일정: 10:00[제주 7C8851, 2h30] 부산 출발→ 11:30 석가장 정정공항도착
가이드 미팅→ 조운묘→ 민족루→ 신향 이동(4h30)→ 호텔[태항비즈니스(0373-6228888)]
[팀 구성]
울산 우리 팀은 나이가 70이 넘은 남자 8명, 부산과 양산에 거주하며 알고 지내는 5~60대의 여자 4명, 남자 2명
모두 14명이어서 딱 여행하기 좋은 인원이었고, 모두들 괜찮은 사람들이라 여행 내내 분위기가 좋았다.
[중국으로 향발]
10시 비행기이지만 7시 20분 공항미팅이 있어 4시 40분에 일어나 6시 리무진을 타고 김해 공항에 도착했으나
2시간 늦게 출발하여 1시 30분에 석가장 정정 공항에 도착했으며, 김해는 비가 왔지만 중국 날씨는 좋았다.
<석가장의 정정 공항>
[식당으로 가면서]
가이드의 인사가 있었고, 석가장은 하북성의 수도라고 하며, 중국의 행정구역은 23개의 성, 4개 자치구, 2개
직할시 그리고 56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 민족국가로 제일 많은 민족은 한 족은 94%이라고 한다.
6%인 55개 소수민족 중에 가장 알아주는 민족은 잘 살고 중국인들이 가장 좋은 물건을 만들어 파는 조국이
있는 조선족이며,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200만 명 정도이라고 한다.
이 중 100만 명 정도가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동부 3성인 흑룡강성, 랴오닝성, 길림성에 사는데 가이드는
길림성에 살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아니라고 하며, 할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도 나주이고 자신은
교포 4세라고 한다.
가이드는 중국학교에 다녔지만 중국말은 존대어가 없기에 할아버지는 집 안에서는 절대로 중국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는데 그 덕분에 지금 같이 조국관광객을 모시고 가이드를 하게 되었고 한다.
비록 작지만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있기에 중국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고 했으며,
가이드가 북경에서 시속 309km 달리는 고속열차를 1시간 반 타고, 석가장에 왔다고 한다.
고곡열차가 생기기 전에는 북경에서 길림성까지 24시간 걸렸지만 지금은 절반으로 줄었다고 하며, 천안문
사태에 대한 이야기 한 것을 옮겨보면 모택동이 1949년 천안문 광장에서 공산국가를 세웠다고 한다.
공산국가는 일을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똑 같이 분배했기에 모두가 게을러져 못살았지만 1976년 모택동이
죽은 후 등소평이 정권을 잡으면서 발전을 이루었으나 부정부패가 심해져 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한 것이
천안문사태라고 한다.
이때 등소평은 데모대를 탱크로 밀었다고 하는데 천안문광장은 세계에서 제일 크기에 13만 명 정도가 들어설
수 있는 곳이라고 하며, 간단하게 설명을 마쳤으며, 태항산맥에 대한 이야기 한 것은 아래에 기록해 놓았다.
자기선전을 했는데 다 믿어야 할지? 비교도 할 수 없으니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으니...
다이어트에 좋다는 보이 차 이야기는 조금 장사 냄새가 풍겼으며, 중국의 운전면허에 대한 유모를 했는데
면허는 3개의 대학을 나와야 한다고 했다.
빵빵 대, 들이 대, 돌려 대학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빵빵 대는 것은 실감했으며, 이번엔 가이드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복자가 촌스러워 이름 밝히기를 꺼려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그들은 복이 들어오라고 복(福)자를 거꾸로 붙여 놓기도 하고, 붉은 색을 좋아 하는 중국 사람들은 갓 시집 온
새댁은 친정 갈 때 옷, 가방 등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을 하고, 또 좋아 하는 숫자는 팔(八)이라고 한다.
우측에 중국풍이 물씬 풍기는 탑이 보였는데 간판은 천영사(天寧寺)라고 되어 있고, 가이드는 천영사는
산수보살을 모시는 곳이며, 이곳에는 절과 사찰이 많은 동네라고 하면서 식당에 도착했다.
<천영사(天寧寺) 전경>
※타이항 산맥(太行山脈): 한자 行은 동사로 쓰일 때는 행으로 읽고, 명사 쓰일 때는 항으로 읽는 다는 것을 어디서
읽은 기억이 있으며, 태항산맥은 남북 600km, 동서 250km인데 제일 높은 산은 소오대산이다.
소오대산 5대 봉우리 중에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 중에 동대(2,882m)가 가장 높으며, 하북성, 하남성,
산서성 3개의 성에 걸쳐있고, 산맥의 동쪽은 칭다오(청도)가 있는 산동 성이며, 서쪽이 산서성이다.
참고로 장강과 연결된 둥팅(동정)호의 북쪽을 호북성, 남쪽을 호남성이라고 하며, 이곳에는 유명한 장가계가
있는데 우리나라 벽제호 남쪽을 호남, 대관령 동쪽은 영동(嶺東), 서쪽은 영서(嶺西)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대협곡은 수 만년 동안 침식작용으로 형성되었고, 남태항 지역엔 구련산, 천계산, 만선산, 왕망령 등이 유명하며,
타이항산은 사자성어 ‘우공(愚公)이 산을 옮기다.’ 뜻인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배경이 되는 산이다.
※우공이산: 이 말은 ‘굳센 의지로 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다.’라는 비유의 이야기는 열자
(列子)의 탕문편 (湯問篇)에 나오데 나이 90세가 넘은 우공(愚公)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둘레가 700리 넘고
높이가 만 길이나 되는 태항산과 왕옥산(王屋山) 파서 발해의 은토라는 곳에 버리기로 작정하고 시작했다.
한번 운반하는데 1년이 걸렸는데 하곡의 지수(智叟)가 비웃으면서 말리자 우공은 자자손손 대를 이어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는데 조사신(操蛇神)이 이를 듣고 산을 옮기는 일을 그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상제에게 호소했으며, 상제는 그 정성에 감동하였다.
기주(冀州)의 남쪽과 하양(河陽)의 북쪽 사이에 있었던 두 산을 과아씨의 두 아들에게 하나는 삭동에 두고, 또
하나는 옹남에 두게 하여 기주의 남쪽과 한수의 남쪽에는 언덕조차 없게 되었으며, 이를 우공이산이라 한다.
<우리공이 옮겼다는 왕망령에서 본 태항산맥>
[조운(趙雲) 묘 관광]
점심을 먹고 일정에 있는 조운묘로 향하면서 이 동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엄청 잘 한다고 하며, 돈도 벌고
장도 보아 식사 준비도 하지만 여자 옷까지도 빨래를 다해주고 여자는 앉아서 치장만 한다고 한다.
차안에서 보는 곳이 여행일정에 석가장 시 중심에 있는 번화가로 높은 새 건물 사이에 있는 전통시장을
걸어서 시민의 삶을 본다고 했던 민족루라고 하며, 따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호텔을 주점이라고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중국 무술영화에 술 먹고, 잠자는 곳을 객장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대주점으로 오늘날 호텔을 말한다고 하며,
우리의 주막과 같다는 생각을 했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조자룡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조운은 삼국시대 때 촉나라 장군 조자룡을 말하는데 그는 사천성 사람으로 묘는 그곳에 있고, 이곳에서
죽었기에 사당이 있으며, 또 촉나라의 유명한 사람은 유비, 관우, 장비가 있고, 그 중에 관우는 재무의 신이라
큰 호텔이나 식당에서 꼭 모신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무당들이 최영장군과 관우를 모시는 것은 그들이 억울하게 죽어 억울한 사람의 사정을 잘 들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이드가 ‘조자룡이 잘 생겨서 박근혜의 첫사랑’이라고 뜻밖의 이야기를 해서 웃었고, 갑자기 엉뚱하게도 불에
타 죽은 개자추에 대한 유래로 한식(찬 음식)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차에서 내렸다.
광장에 조운고리(趙雲故里)라는 표지석과 함께 말 탄 조자룡 동상의 기상이 넘쳤고, 가이드를 따라 들어 가다가
입구에 있는 말의 고삐 잡고 있는 2개의 동상 중 우측은 조운의 말이고, 좌측은 조운의 아들 말인데 고삐 잡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마부라고 했다.
얼굴이 희고, 흰색의 갑옷을 입은 사람이 조자룡이고, 유비는 왕이어서 표시가 나며, 장비, 제갈량 등의 상들이
있으며, 다만 조금 특이한 것이 있다면 군인형상을 하고 있는 나무들이 창들을 들고 늘어서 있는 모습 정도이다.
이곳은 석가장에서 끼워 넣기 관광 정도로 생각하라고 했으며, 20분간 머물다가 떠났다.
▶조운(조자룡)묘: 삼국시대 촉나라 명장인 조운은 '항상 승리하는 장군'이라는 의미로 상승장군이라고 불렸고,
유비는 도망간 장판교 전투 때 자기 칼은 못쓰게 되자 조조군대들의 창과 칼을 빼앗아 싸워 유비의 부인 감씨와
아들 유선이를 구했다고 하여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이 생겼다.
남의 헌 칼을 빼앗아 마음대로 쓴다.’ 뜻이나 지금은 권한, 권력이 있다고 함부로 남용한다는 뜻으로 변했다.
<1 조자룡 동상 2 좌로부터 조자룡, 장비, 유비, 관우, 제갈량 3 조자룡 4 창칼로 무장한 군인나무들>
[신향으로 이동하면서 석탄과 가이드가족 이야기]
이곳에는 석탄이 많이 나서 엄청난 부자가 많고, 고속도로에서 만나는 대형트럭은 모두가 석탄을 실은 차로
이 석탄부자들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 했지만 자연스럽게 들리지는 않았느데 이 부자 중 한분이 외제
차량을 사려갔다.
예뿐 아가씨가 얼굴마저 검는 사람들이 비싼 외제 차량을 가격을 묻자 대답도 하지 않았더니 너까지 포함해서
가격을 말하라고 했다고 하여 웃고 넘겼으며, 이제는 주제가 다른 이야기로 가이드는 농민출신이라고 한다.
시내 사는 사람은 공민, 농촌에 사는 사람을 농민이라고 하는데 공민은 퇴직하면 퇴직금으로 평생을 살 수
있지만 농민출신이라 죽을 때까지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90년대부터 한국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한국 여권과 비자를 위조하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며, 큰할아버지 아들은 초청을 받아
나주에 갔지만 세월이 흘러도 아버지는 초청을 해 주지 않았는데 이유는 큰할아버지 아들이 내 땅을
내 놓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불상사가 일어날까봐 초청하지 않았다고 하며, 1997년 아버지는 한국 돈 3만원을 빌려 위조
여권으로 한국에 갔으나 소식이 끊겼고, 돈도 보내지 않아 무척 궁핍한 생활을 했는데 한국의 IMF로 아버지는
돈을 벌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인해 있는 사람이나 나간 사람이나 모두가 고생을 하다가 가이드도 성인이 되어 어머니한테 아버지를
찾아 갈려고 하던 중에 가족이 보고 싶다고 아버지가 10년 만에 귀국했다고 한다.
너무 힘들어 어머니가 한국으로 시집가라고 할 정도이어서 하마터면 한국으로 시집갈 번했다고 하는데
울고불고 해서 가지는 않았지만 잘 했다고 하면서 비록 한가정은 살리지만 남편은 나이가 많거나 조금
모자라거나 여자를 잘 패는 사람으로 당시는 그런 결혼이 많았다고 한다.
중국도 한국을 따라 하기에 지금 젊은이들은 혼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에 부모들도 강요하지 않지만 조선족
여자하고 한족 남자와 결혼하면 잘 살지만 반대이면 사랑의 유효기간인 3개월만 간다고 한다.
우선 중국여자는 밥을 잘 하지 않으며, 향료를 많이 사용해서 냄새가 집안에 밸 정도이고, 또 게으르고 발
냄새가 심하고, 지저분해서 견디기가 힘들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조국이 기회를 주어서 모두가 잘 살게 되었고, 젊은이들도 도시로 나가 일을 하게 되었는데 작년에는
아무 잘 못도 안했지만 사드 때문에 한국여행자들이 들어오지 않아 굶어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관광지도>
[중국인들 이야기와 한국 따라 하기]
중국관광지에 가면 예뿐 색깔로 만든 등산복이 한국관광객과 중국관광객의 차이를 나게 하는데 중국관광객들이
한국관광객들을 보고 산에 불났다고 했지만 이제는 중국도 예쁜 옷들을 입는 다고 한다.
그래도 얼굴에 화장을 안 하기에 중국인을 알아 볼 수 있는 있으나 이제는 화장도 따라 하기시작해서 앞으로는
구별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하며, 이제는 중국인들도 건강을 챙기기 때문에 산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중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한국드라마, ‘대장금’은 한국인들이 잘 먹는 다는 것을 인식시켰고, ‘별에서 온 그대’는
중국에 닭도 안 남아 났다고 할 정도로 치킨을 유행시켰다고 하며, 다음은 ‘태양의 후예’는 중국 애들도 송중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먹는 것이 너무 많이 나오고 또 잘 먹기에 엄청 배가 고프다고 한다.
차장 밖으로 보이는 끝도 없이 넓은 들에는 밀하고, 옥수수를 많이 심어 사료, 옥수수 우유, 옥수수 전분으로
많이 사용한다고 하며, 이곳에서 옥수수를 심지 않으면 한국은 소를 기를 수가 없다고 했다.
지금은 모두 화장을 하지만 옛날에는 들에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버드나무를 심어 나무가 번창하면 집 안이
번창한다고 믿었으며, 제사법은 꽃다발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놓고 온다고 하고, 지금은 잘 살게 되면서
아파트나 자동차모형을 두고 온 다고 한다.
중국 아파트는 땅은 국가 소유이기에 40~70년 임대하고, 외부만 건축해 주고 내부는 자기 돈으로 자기
취미대로 짓는다고 한다.
산 날씨는 변덕이 심해서 일기예보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때로는 운해가 되어 장관을 연출할 수 있기에
너무 날씨에 민감할 필요는 없지만 이번 일정에는 모두가 쾌청하여 날을 잘 잡았다고 한다.
평소에 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이 왔기 때문이라고 살짝 아부를 했으며, 우리는 신향시의 휘현까지 4시간 걸릴
것이라고 하며 내일 갈 임주의 홍기거라는 인공도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팔천협 가는 길에 보이는 태항산의 경관들>
[중국의 8대 기적(큰 공사)]
8대 기적 중에 첫 번째가 우리가 잘 아는 만리장성, 두 번째가 북쪽의 베이징(北京)과 중부의 항주(杭州를
연결하는 1,800km 길이의 인공수로인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라고 하며, 세 번째가 홍기거라는
인공도랑이라고 한다.
‘붉은 깃발아래 공사를 한 도랑’이라는 의미의 홍기거 인공수로(紅旗渠 人工水路)는 현대판 기적이라고
부르고, 또 하나의 현대판 기적은 1960년대 걸립 패 장영쇠가 촌민 7명과 함께 만든 괘벽공로라고 한다.
그 밖의 8대 기적은 진시황 병마용갱 외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홍기거 인공수로(紅旗渠 人工水路) 이야기]
인구가 많은 하남성은 늘 물이 부족했고, 그 중에 임주현은 더욱 심해서 여자가 태어나 평생목욕을 두 번 밖에
하지 않는데 태어날 때와 결혼할 때라고 하고, 늘 부족은 가난을 가져와 전국으로 동냥 다녔다고 한다.
그들이 왜? 못사는지를 북경의 당기부서기가 실태 조사를 나왔는데 여관 집 여주인은 당의 높은 분이라 물을
한 세숫대야를 주었고, 당 서기는 세수를 하고 평상시처럼 물을 버렸는데 그 관경을 바라 본 여관 집 여주인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고 한다.
그 물은 나머지 가족들이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세수를 하고 다시 흙을 가라 안쳐서 다시 사용한 후 최후에는
식물에게 줄 물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당시 그때를 겪었던 분들이 아직도 살아 계셔서 말하기를 우리는 언제
사발에 물을 가득 담아 마셔보겠는가?
라고 했다고 하며, 당기부서기가 정부에 몇 차례건의 해서 산서성에서 물을 가져올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단 산서성에 피해를 주지 말고 정부에서는 전혀 지원이 없다는 조건이어서 임주 사람들은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태항산맥 절벽에 도랑을 냈는데 1960~69년까지 9년 동안 도랑을 쌓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젊은이들은 안전을 위해 절벽에 말뚝을 매고 몸을 의지한 체 먼저 낙석을 제거했으며, 작업을 할 때는 붉은
모택동 초상화를 걸어 놓고 작업을 했기에 홍기거(붉은 깃발을 걸고 만든 도랑)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도랑의 길이는 선서성 평순에서 임주까지 150km이며, 태항산 대협곡 갈 때 잠시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인터넷을
검색하면 150km는 1.500km이며, 30만 명이 1.250개의 산을 뚫고 다듬어 만들었다고 했다.
<가장 난공사이었다고 하는 남녀 청년 300여명이 뚫은 615m의 청년동 터널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
[엄청난 들판]
4시간 동안 달려도 구릉하나 없는 평지어서 중국이 대국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며, 부럽기도 했는데 아마도
태항산이 옮겨져 언덕조차 없었다는 우공이 살았던 기주의 남쪽과 한수의 남쪽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탄복할 정도로 끝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평지에 놓인 도로는 너무 직선이라 기사들이 졸 정도이었으며, 도로
주위에는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버드나무와 포플러나무가 많았다.
<비행기에서 본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 석가장 주변의 들판>
[배꼽이 더 큰 여행]
우리는 인터넷 일정표를 보고 예약을 했는데 일정표에는 옵션관광은 천계산 풍경구 50달러, 왕망령 풍경구
60달러, 전신 마사지 30달러라고 알고 왔고 또 그 정도 준비했고, 옵션을 하지 않아도 불이익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가이드는 이 140달러는 무조건해야 하는데 안 하면 회사가 적자를 보지 않기 위해 본인이 회사에 물어야
한다고 했고 그리고 가이드를 위해서는 팔천협 100달러, 통천협 80달러, 비나리길 30달러인데 이것도 모두가
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비나리길은 왕망령에서 만선산으로 가는 길목이라 모두가 필이 해야 한다고 했는데 헌데 달러가 없다고 하자,
카드도 무방하다고 했으며, 옵션으로 새 일정을 제시해서 옵션도 안할 수 없고, 진통 끝에 모두들 하기로 했다.
여행 경비는 316,100원이었으나 옵션은 38만 원 정도 되어서 30여 차례의 해외여행 중에 처음으로 옵션
비용이 더 큰 여행을 했으며, 여행 첫날은 천계산, 왕망령, 만선산으로 2일 일정을 하루에 마치고, 둘째 날은
통천명, 도화곡, 망상암을 본다.
셋째 날은 팔천협을 보고 한단으로 이동하며, 다음날 석가장으로 이동하여 모든 일정을 마치는 일정이었고,
옵션에 대해 반감을 가졌으나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만선산이 좀 아쉬웠고, 왕망, 왕상, 우공이산 같은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석가장(石家莊, 스자좡): 중국 허베이 성은 황하의 북쪽이라는 의미인데 화베이 평원, 타이항 산맥 동쪽기슭에
있고, 1905년 베이징- 우한 철도가 지나면서 주요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해 대규모 철도도시로 성장했다.
1930년대 말 일본에 점령된 뒤 더저우(德州)까지 철도가 연장되었고, 2차 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허베이성 서부의
대도시로서 행정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곡물, 담배, 면화집산지이자 교역 및 공업도시로도 발전했다.
※신향(新鄕, 신샹): 중국 허난 성(河南省)은 황하 남쪽이라는 의미인데 신샹은 허난 성에 있지만 황하 북쪽과
허난 성 북부에 있는 도시로 40km 쯤 아래로 가면 황하가 있으며, 타이항 산맥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다.
※휘현(辉县): 휘현은 산동성 지난과 함께 춘추전국시대 강태공의 후예가 세운 제나라에 속한 지역으로
휘현에서는 은나라, 상나라, 전국시대의 고분군에서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발굴된 역사도시이다.
<석가장 도시의 풍경>
[2일] 2018년 4월 25일 수요일 ●일정: 천계산 이동(1h30)→ 천계산 풍경구 관광→ 왕망령 풍경구 관광→
만선산 관광 임주(Linzhou) 이동(3h)→ 호텔(휘현 태항 비즈니스호텔(0373-6228888)
[천계산으로 향하면서 배터리 자전차 이야기]
추가된 2개의 관광지는 거리로도 최소 하루가 소요되는데 짧은 일정에 이런 시간을 빼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루 일정인 만선산을 2시간에 끝내어 겨우 일정에 맞추었고, 또 일정에 맞추기 위해 매일 5시
기상, 6시 식사, 7시 출발해야 했다.
오늘은 딱그(운전기사 또는 오빠)가 바뀌었고, 이분이 동생이지만 차주로 돈 많은 사장이고, 휘현 거리에는 작은
배터리 오토바이가 많았으며, 춥지 않도록 손과 발의 바람막이 천이 있는 것이 좀 특이했으며, 가구당 한 대씩은
모두가 갖추고 있다고 한다.
한화로 가격은 30만원부터 50만 원 정도 이고, 여름은 배터리가 소모시간이 길고, 겨울에는 짧으며, 자전차로
간주하여 면허가 없이도 운전이 가능하고, 젊은 여자는 아이를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또 끝나면 태워 오는
것이 하루 일과 중에 하나라고 한다.
여기서 자전거와 자전차 차이를 두고 사용하면 어떨까? 자전차는 전라도 사투리라고 하니 자전거가 표준어
같은데 자전거는 타지 않고 끌고 갈 때 사용하고, 자전차는 타고 갈 때로 나누어 사용하자.
자전거를 타고 가면 당연히 차의 도로교통법을 따라야 하고, 끌고 갈 때는 보행자 도로교통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도로 달리는 자전차가 보행자를 위협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향의 배터리 자전차>
[학교, 일기예보, 도교 이야기]
옛날 중국에는 한 가정에 아이 하나만 낳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둘을 낳을 수 있지만 첫 아이 낳고, 4년이 지나야
하나 더 낳을 수 있다고 하며, 쌍둥이는 예외인데 이곳 하남성은 인구가 1억 명이 넘는다고 한다.
특이 아들을 선호하는 이고 사람들은 벌금을 물지 않으려고 딸을 낳을 때는 여자 형제들끼리는 쌍둥이로 올리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 조선족은 2명까지 낳을 수 있지만 낳지를 않아서 둘째는 정부에서 돈까지 준다고 한다.
돈을 주어도 애들 키우는 것이 힘들어 잘 낳지 않으려고 하는데 가이드가 학교 다니던 시절 한 어문(중국말)과
조선 어문(한국말), 수학 등을 배웠으나 지금은 조선 아이들이 없어 조선 어문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다고 한다.
가이드 딸도 집에서도 중국말을 하기에 부모들이 아이들을 따라가 한국말을 못하는 아이가 많기 때문에 북경에
있는 조선족 가이드 2만 명은 조선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기 위에 자금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 딸이 이번 9월 달에 초등학교 입학 절차를 밟았는데 80명이 1개 반으로 한 학년이 10개 반이 6학년까지
있다고 하니 그 학생 수가 엄청나서 한 번에 학생들이 모이면 교통이 마비된다고 한다.
그래서 1학년부터 3학년까지는 8시에 출교했다가 10시 반에 퇴교를 해서 점심을 먹고 잠을 잔 후 다시 학교 가고
나머지는 1시간 후에 똑 같이 집에가 점심 먹고 학교에 오기 때문에 어른 한 사람은 학생 위에 있어야 한다.
애 하나 키우는 것이 심각한 현상이라고 하며, 가이드는 호적이 길림에 있기 때문에 북경서 학교를 보내려면 초등
학생 한 명에 한화 육백만원의 돈을 주어야 하는데 호적을 옮기면 되지만 대신 땅이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농촌호적이 도시로 옮기면 농촌 땅은 국가에 돌려주어야 하므로 농촌 땅을 지키기 위해 호적을 지키고 대신 돈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하며, 오늘 점심 먹을 식당에 전화를 해 보았는데 구름은 있어도 경치는 볼 수 있다고 한다.
천계산 일기를 애기하다가 중국 일기예보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북경은 여름에 40도 이상 기온이 오르면 모든
직장들이 쉬도록 되어 있으나 40도가 오르는 날이 많아도 절대로 40도가 올라갔다고 예보하지 않는다고 한다.
태항산 일기는 황사도 아니고, 미세먼지도 아니며, 가장 중요한 것은 구름이라고 했으며, 노야정 도교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손자가 도를 닦은 곳으로 지금도 기도발이 잘 들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천계산 도교의 본산지 노야정과 안내문>
도교는 한 층 한 층 올라가면 36층이고, 그중 제일 높은 분이 홍균노조(洪鈞老祖)이고, 옥황상제도 도교사상에서
나온 것인데 오늘 일정을 말했는데 먼저 케이블카를 타고 노야정에 올라간다.
그리고 가장 높은 도교사당을 올라갔다가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내려온 후 운봉화랑을 둘러보고 점심은
이곳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하남성을 떠나 산서성의 왕망령으로 이동한다.
왕망령에서 50여개의 산봉우리를 보고 오늘 하이라이트인 비나리길을 본다고 하는데 이 이름은 처음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온 비나리 여행사 사장님이 이 길을 통해 이동하면서 여행사 이름으로 작명했다고 한다.
비나리는 순 우리나라 말로 대보름 때 무엇을 ‘걸립(乞粒)’하기 위해 풍악을 치며, 쌀이나 돈을 모으는 일을 할 때
덕담을 하는 것을 ‘비나리’이라고 하고, 이 들을 ‘비나리 패’라고 한다.
비나리길을 통해서 만선산 협곡으로 이동한 후 하산을 하게 되는데 비가 온 뒤라서 폭포가 매우 아름답다고 하며,
내려가는 길이라 그렇게 힘들지도 않으며, 한 시간 정도 이동한다고 한다.
[휘현의 영웅 장영쇠 이야기]
중국군대는 의무병제가 아니고 자원입대인데 4시간을 걸어야 도시로 나올 수 있고, 1949년 장개석을 몰아낸
모택동이 공산국가를 세워도 모르는 태항산 골짜기에 사는 장영쇠는 군대에 자원입대 했다.
군 생활을 하면서 머리가 터였고, 군대제대한 후 고향에 풍부한 돌을 사용할 수 있는 석채공장을 만들어 많은
돈을 벌어 거부가 되었으며, 그는 우리 돈 200억을 들여 천계산에서 하산 할 수 있는 길을 뚫었다고 한다.
현대적 장비 없이 곡괭이, 정, 망치 등 기본 장비만 갖추고 13명이 길을 냈으며, 후진타오 주석이 직접 천계산에
와서 장영쇠를 만나 악수만 했지만 그는 휘현의 영웅이라고하며, 그가 만든 길을 괘벽공로라고 한다.
<천계산 입구에 있는 장영쇠 사진>
[천계산 풍경구 노야정(老爷顶) 관광]
아침 설명을 마치면서 차는 오후 4시 반 쯤에 만나기 때문에 우의가 있으면 준비하고, 물은 꼭 한 병씩 챙기라고
하며, 구릉하나 없이 1시간 쯤 달렸는데 갑자기 안개 속에 높다란 산이 나타났다.
이것이 상상만 했던 태항산맥의 입구로 계속 험한 산길을 가다가 웅장한 바위산이 가로막는데 바로 이곳이
천계산 주차장으로 우비도 챙기고 물 한 병도 배낭에 넣고 더디어 태항산 협곡의 관광이 시작됐다.
청봉관 대문을 통해 입장해서 빵차를 탔으며, 가이드 고향인 길림성 사람들과 같이 탔는데 내 옆 남자는 손짓과
함께 아주 열심히 이곳에서 2차 대전 때 일본군과 전쟁을 했다고 했고, 후에 그 일본군을 지휘한 사람이
홍사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올라가는 도중에 좌측으로 사진에서 봤던 괘벽공로가 간간히 보였으나 우측에 앉았기에 사진에 담을 수가
없었으며, 청봉관 주차장에 내려 바로 노야정으로 가는 운임 30$하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2인용 미니케이블카를 10분 정도 타고 노야정 정상에 올라 더 넓게 태항산 풍경감상하고, 도보로 862개의
계단을 오르다가 오후 일정을 생각해서 중간쯤에서 하산해서 일행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정상엔 노자가 42년 기거했다는 천하제일정이라는 도교사원이 있으나 멀리서 어렴풋이 보일뿐이었으며,
사람들이 산 옆으로 가는 것을 보고 또 다른 볼 걸이가 있나 싶어 따라갔더니 변소이다.
이 변소는 문도 지붕도 없이 말로만 듣던 것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경사가 심해 물도 필요 없이 자연으로
바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구조로 이런 환경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홍사익: 홍사익에 대한 자세한 것은 필리핀 역사와 여행기 세부에 있으며, 그는 1941년 3월 육군소장으로
진급하여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이 되어 중국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와 전투를 했다.
팔로군에 소속된 우리 독립군도 4명이 전사했고, 2명은 포로가 되었는데 그가 여단장이자 화북지구사령관으로
있을 때 조선인들은 그의 덕에 일본인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1 천계산입구 2 뒤 보우리가 노야정 3 노야정 케이블카 승강장 4 천하제일정 계단 앞 5 우측 끝이 천하제일정> [회룡 천계산 운봉화랑(回龍 天界山 雲峰花廊) 유람구]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해서 운봉화랑을 관광하려 했으나 줄이 너무 길어 먼저 점심을 먹기로 하고 식당으로
향했는데 산채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다소 짧았진 줄 뒤로 다시 줄을 섰다.
운봉화랑유람구의 전망대는 7개 있고, 전망대마다 내려 경치를 감상하고 뒤차를 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차는
제1 청선 전망대로 가는 것이 아니고, 제7 귀진 전망대 쪽으로 향했다.
[간 떨어지는 유리잔도(琉璃棧道)]
어디가 어떤 전망대인지 알 수도 없었으며, 어디인지는 모르나 개통한지 한 달밖에 안 된다는 유리잔도 앞에
주차했으며, 유리 잔도는 험한 벼랑에 선반을 매듯 낸 유리로 바닥을 만든 길을 말한다.
이 유리 잔도는 수백 미터 낭떠러지 위해 기가 막히게 유리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중국 여행 때마다 느낀 것은
자연을 구경할 수 있도록 바위에 굴도 뚫고, 낭떠러지에 길도 내는 그들의 기술과 담력에 늘 놀라곤 했다.
이번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최고로 간지키기는 것이 너무 힘들었는데 옛날 회사서 타워 난간에 매달려 작업을
한 경험이 있어 고소공포증이 없다고 생각했었으나 전혀 무관하게 떨었지만 여자들은 간이 큰지 잘도 간다.
인터넷에 한 100m 정도 된다고 했지만 몇 km 정도 되는 것 같았고, 안전한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유를
가졌으나 낭떠러지 위의 유리잔도 위는 앞만 보고 걸었으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만 믿었다.
다음에 주차한 곳은 깎아지른 절벽 위를 돌출형으로 만들어 놓아 담력을 시험한다는 뜻을 가진 제2 전망대인
‘시담대(試膽臺)’로 동시에 6명이상 올라가지 못해 사람이 좀 밀렸다.
이곳쯤은 이젠 시담대도 아니고, 건너편 산 정상부에 부처가 누워 있는 듯한 ‘와불상’을 볼 수 있는데 좌측이
얼굴부분이고 우측이 가슴과 배 부분으로 이곳을 떠나 천계산 관광을 마쳤다.
▶회룡 천계산 운봉화랑: 하남성 신샹 현 후이셴 시에 위치한 노야정 남쪽에 있는 천계산(天界山)은 하늘과
산의 경계를 이루는 높은 곳이란 뜻이며, 운봉화랑은 ‘구름이 산위에 걸쳐 있는 그림 같다.’는 뜻이다.
해발 1,570m ‘노야정’ 산허리를 한 바퀴 도는 순환도로는 8km이며, 제1 청선대에서 제7 귀진대까지 각 포인트
별 전망대를 빵차로 돌면서 내려 관광하고 다시 타고 청봉관으로 다시 돌아오는 코스이다.
마지막전망대 귀진대에는 노자가 투신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사신애(舍身崖)는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두부처럼
네모난 바위 전망대는 시담대처럼 또 다른 아찔함을 느낄 수 있으며, ‘천계산’ 홍보 포스트에 나오는 곳이다.
<1 길이 8km의 운봉화랑순환도로 2~3 어마어마한 높이에 있는 유리잔도 4 시담대와 와불상>
[왕망령(王莽嶺) 절경구 관광]
청봉관에서 빵차를 타고 산서 성에 도착하여 다시 차를 갈아타려고 내렸을 때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사진을
찍었는데 그곳이 세외도원이라고 부르는 석애구인지는 돌아와서 알게 되었다.
남들은 석애구 표지석에서 사진도 찍었던데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왔으며, 열심을 다해 가이드를
한다는 그녀는 왜 알려주지 않았을까? 열심이라는 단어는 옵션에 해당하는 것이겠지!
가이드는 차에서는 관광과 조금 무관한 이야기를 잘 했으나 차에서 내리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지명의
유래 조차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지도를 들고 왕망령 어디를 관광하는지 물었을 때 북석립이라고 했다.
가는 도중에 보이는 바위산의 경치도 대단했으며, 왕망령 지질공원에 도착하여 전망대로 가는 길에 우측으로
보이는 흰 건물이 호텔이라고 했으며, 한 25분 쯤 걸어 전망대에 도착하였다.
50여개의 봉우리는 글로 표현 할 수 없도록 장관이었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잘 안 보였는데 그 험한 곳에도
트레킹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으며, 관광을 마치고 곤산 괘벽공로로 향했다.
▶왕망령(王莽嶺) 풍경구: 산서성 산시 진청시 링촨 현에 위치하며, 태항산대협곡의 일출과 운해를 조망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해발 800~1665m 사이에 있는 약 50여개의 높고 낮은 봉우리로 구성되어있다.
풍경구 총 면적은 40㎢으로 천계산 괘벽공로와 주가포(周家鋪) 동북쪽에 ‘세상 밖의 무릉도원’이란 뜻을 가진
세외도원(世外桃源)이라고 부르는 절경 속에 절벽장랑이란 뜻을 가진 석애구(锡崖溝)가 있다.
왕망령 유래는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웠던 왕망(王莽)은 훗날 후한을 세운 유수가 항산으로 도망하자
80만 대군을 이끌고 뒤쫓아 와 진을 쳤다고 해서 왕망령이라 불리게 되었다.
<1 왕망령으로 가는 산서성 환승주차장 2 주차장에서 보이는 석애구 절벽, 그 위 마을은 주가포? 3 가는 도중
경치 4 표지석과 입석대 5~7 호텔과 시설물 8~10 왕망령풍경 11 안내판 12 곤산 괘벽공로 환승주차장>
※왕망: 왕망은 젊은 시절을 불우했으나 외척으로서 권력을 한 손에 쥐었으며, 애제가 죽고, 원후가 왕망을 불러
의논 끝에 9살인 평제를 세워 평제 대신 원후가 조정의 일을 보았고, 대사마로서 왕망이 정치를 도맡아 하였다.
왕망의 딸이 황후가 되자, 그의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었으며, 평제를 14살에 독살하고 후계자로 2살인
자영(子嬰)이 옹립하였다가 AD9년 스스로 황제가 되어 신나라를 세웠다.
이로서 한나라는 멸망했는데 이를 전한이라 하며, 신나라는 주나라의 이상적인 나라를 그리며 급격한 개혁을
하려다 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은 장안을 함락했으며, 왕망은 그들로 부터 죽음을 당했다.
AD25년 유수는 한나라를 부활시켜 황제(광무제)가 된 것을 후한이라 하며,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곤산 괘벽공로(崑山 掛壁孔路)]
왕망령 입구에서 다시 6인승 4륜 차로 바꾸어 타고 오늘의 하이라이트라고 그렇게 자랑한 비나리 길이라는
곤산(쿤산, 崑山) 괘벽공로’로 향했는데 철문으로 닫은 터널 앞에서 열리기만 기다렸다.
괴벽공로는 국가에서 관리했으나 관광객이 많이 찾아와 돈벌이가 됨으로 이 길을 만든 후손들이 다시 권리를
찾아왔다고 하며, 문을 열어 주는 관리자는 무전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길은 좁아 차 2대가 교행 할 수 없기에 통행차량을 확인하는 것으로 짐작했는데 이것도 아니라는 것이
조금 가다가 판명되었으며, 터널 안으로 들어가면 이 길을 만들 때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정과 망치 그리고 곡괭이만으로 어떻게 바위를 뚫고 햇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10분 쯤 내려가다가 전부 내려 뒤로 보이는 괘벽공로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은 후 조금 내려가다가 올라오는
차량을 만났으며, 이 차의 기사는 후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맨 앞에선 우리 차 기사가 내려 뭐라고 애기했지만 막무가내였고, 다른 차 기사들도 내렸는데도 움직일 생각도
안하다가 우리 기사가 그 차에 오르고 그는 우리 차에 올라 운전을 했다.
아마도 상황은 앞 차 기사는 후진을 하다가 차가 터널 벽에 부딪쳐서 앞 범퍼가 망가져 도저히 후진할 수
없다고 한 것 같으며, 운전에 능숙한 우리 차 기사가 후진해 주기로 한 것 같다.
그렇게 해결을 하고 터널을 빠져 나와 가이드가 탄 우리 차는 뒤차는 헤어져 다른 곳으로 향했는데 만선산
입장을 하기 위해 매표소롤 가는 바람에 좀 더 구경을 할 수 있었으며, 이제는 하남성에 들어섰다.
후에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다시 만난 곳이 단분구라고 하며, 계곡 도랑을 따라 내려가면서 협곡을 구경했다.
※괘벽공로 ‘벼랑에 걸린 구멍 길’라고 해도 될까?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외부로 통하는 길은 협곡과 절벽
위를 오가는 위험하고 불편한 '천제(天梯)'라고 부르는 절벽 길 뿐이었다.
위험한 통행의 불편을 덜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하여 암벽을 뚫어 동굴도로를 만든 것이 태항산맥에만
9개나 있다고 하며, 그 중 왕망령과 만선산풍경구를 이어주는 ‘곤산 괘벽공로’가 가장 유명하다.
이 길은 1960년대 걸립 때 장영쇠가 촌민 7명과 함께 3년간 만든 산악도로로 터널이 1.5km, 총 길이 7.5km로
중국 건축사의 기적으로 불리는데 장영쇠는 우리 돈 200억을 들여서 원주민을 잘 살게 개발했다고 한다.
<1 곤산 괘벽공로 터널 입구 2 뒤에 보이는 구멍이 우리가 통과한 비나리 길 3 우리를 가로 막은 차 왼편
범퍼와 헤드라이트 사이가 찌그려 들었다. 4 곤산마을>
[만선산(万仙山) 관광]
본래 일정은 임주→ 만선산→ 절벽장랑→ 곽량촌→ 남평→ 흑용담→ 백용담→ 단분구로 하루 코스인데 거꾸로
단분구에서 흑룡폭포와 흑용담을 보고 일월성석이 있는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임주로 향했다.
단분구는 지층이 물에 의해 침식되면서 형성된 계곡으로 조각가 물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지층과 물이 함께
다이빙 하는 폭포는 장관이라고 하지만 세계 3대 폭포를 본 사람들은 ‘이게 뭐 당가?’
가이드에게 폭포 이름을 물었더니 만선산대폭포라고 대답했으나 아마도 흑룡폭포가 맞을 것 같고, 중국인들은
작은 물줄기를 보고도 용이라고 하니 어느 것이 백용(白龍) 폭포인지 모르겠다.
아무도 일월성석에 관심이 없었으며, 그 돌이 있다는 정자를 찾아간 것을 끝으로 딱 2시간 만에 만선산 관광을
마치고 오후 6시에 임주로 향했는데 조금 내려오니 만선산 표지석이 보인다.
※만선산: 하남성 신상현 후이센 시에 위치하며, 만 명의 신선이 살았다는 의미인데 곽량촌과 남평으로 나뉘고,
소박한 산골마을 곽량촌은 중국의 영화 촬영장소로도 유명하며, 협곡 길이만 45km 이다.
※절벽장랑(絶壁長廊): 입구에서 30분정도 이동하면 이곳 명물인 ‘절벽장랑’이란 동굴도로가 나오며, 이는
‘바위를 뚫어 만든 긴 복도’라는 뜻인데 아찔한 바위 절벽을 1972년 곽량촌 주민 13명이 5년간 곡괭이와
정으로 바위를 뚫어 1977년 완성된 길로 높이가 5m, 너비는 4m, 길이 1,250m이라고 한다.
이 바위동굴도로로 세계 8대 기적으로 불린다고 하며, 승용차 하나가 겨우 통과 할 수 있는 동굴도로로 동굴의
중간에서 내려 걸어보면 이 신비한 동굴도로를 구경해 볼 수 있고, 도로 중간 중간에 햇볕이 들어올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았고, 절벽장랑을 지나면 83가구에 320여명이 살고 있는 곽량촌이 나온다.
이 마을은 영화촬영지로도 유명하고, 이 절벽장랑을 통과하려면 1인당 $30의 통행료를 내야하며, 곽량촌에서
‘흑룡폭포’로 가는 도중에 해와 달과 별이 있는 천연석 일월성석이 정자 안에 있다.
※흑룡폭포(黑龍瀑暴): 홍암협곡을 내려가면 만선산(万仙山) 제일경인 ‘흑룡폭포’와 ‘흑룡담’이 나오며,
흑룡폭포는 하늘로 비상하는 용의 눈썹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 만선산입장권 산 곳 2~3 안내판 4~5 만선산 협곡 6 흑룡폭포 7 일월성석 8 만선산표지석>
[홍기거 대거리((紅旗渠 大路)]
임주는 인구가 백만 명 정도가 되며, 하남성은 임주 같은 도시가 100여개로 인구가 1억 명 정도로 가장 많다고
했으나 가장 많은 곳은 광동성으로 1억 100만 정도이고, 하남성은 9천5백 만명으로 3위 이다.
임주시로 들어와 색다른 가로등이 켜 있는 홍기거 대로를 들어서면서 어제 휘현으로 향하면서 들었던 중국의
8대 기적 중에 하나인 홍기거 도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을 기념해서 부쳐진 이름이라고 한다.
실제라고 하면서 들려 준이야기는 며느리는 만두를 만들었고 시아버지는 아주 먼 곳에서 힘들게 물을 길어 오는
것을 본 며느리는 한사코 거절하는 물지게를 억지로 받아 지고 오다가 그만 넘어져 물을 다 쏟았다.
옆집에서 물을 빌려 만두를 삶았는데도 며느리가 나오지 않아 방에 찾아보니 이미 목숨이 끊어진 뒤라고 했는데
임주의 물 사정을 대변하는 이야기로 들었으며, 혹시 호텔에 물이 나오지 않을 가봐 걱정들을 했다.
저녁은 조선족 가이드 출신이 태항산이 관광지로 유명해 질 것을 미리 알고 식당을 차린 곳인데 부폐식으로
무한정 리필해 주는 삼겹살로 너무 욕심을 내고 많이 가지고 와 폭식을 했다.
중국 사람들도 텔레비전를 보고 배워서 삼겹살을 쌈 싸서 먹는다고 하며, 홍기거 대거리 옆에 있는 호텔로
이동하여 어제 선택한 전신 마사지를 받았으나 전신은 너무 아파 발만 해달라고 했다.
※신향 풍경구: 하남성 신향시 휘현상 팔리진 경내에 위치하고, 신향에서 55km 거리로 관광지의 면적은 43㎢
십자령, 운봉화랑, 친수낙원, 용명협 등 다양한 자연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주 홍기거 대거리>
[3일] 2018년 4월 26일 목요일 ●일정: 임주→ 통천협→ 임주→ 도화곡→ 왕상암→ 임주 호텔
오늘도 7시에 통천협으로 출발하면서 한국 사람들은 계란껍질까지 먹는 민족이라는 아주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중국에서는 가짜 계란도 만드는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계란은 가짜가 아니고 계란의 50배 되는 고단백요리라고 했는데 전에 그 이야기를 읽고 노력 값도 안 나오는
거짓을 왜 할까? 의심을 가졌으나 오늘 그 궁금증을 해결했다.
짝퉁의 명가 중국은 한국의 종이 컵 하나 재료로 물이 세든 말든 3개를 만들 수 있다고 했는데 어제 노야정
가게에서 타준 커피가 세서 먹지 못한 사람이 있어 그 말을 입증한 셈이 되었다.
짝퉁은 유럽 유명 메이커에서 일하던 대만기술자들이 나이가 많아 고향에 돌아와 원단을 사서 만든 제품을
중국의 심천, 상해, 북경으로 판매한 것이라고 했는데 다는 아닐 것이고, 일부 그런 것이 있겠지.
[오늘의 일정]
통천협곡을 한 40분 걷고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에 오른 후 전망대에서 관광을 하고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전동카를 타고 입구까지 온 다음 다시 임주로 돌아와 김치찌개로 점심식사를 한다고 한다.
다시 태항산대협곡인 도화곡으로 이동하여 걸어서 올라갔다가 전동카를 타고 내려온 후 왕상암으로 이동하여
사진에 나와 있는 나사형 계단만 구경하고 돌아와 다시 임주로 오면 5시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한다.
저녁은 옵션을 다 해준 것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양꼬치를 무제한 대접해 준다고 한다.
<1~3 통천협으로 가는 도중 우측에 보이는 태항산맥의 경관>
[중국의 4대 미인과 3대 악녀]
이야기해 주었는데 세계 여행 중국편 [1]서안, 장가계, 계림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가이드는 초선을 왕소군과
착각하여 초선에게 기러기가 떨어졌다고 하여 ‘낙엽’이라고 했는데 낙엽이 아니고 락안(落雁)’이 맞고 달조차도
얼굴을 가렸다는 폐월(閉月)의 초선이의 설명은 잊었는지 이야기를 않했다.
또 중국의 3대 악녀를 애기했는데 여지, 측천무후, 서태후라고 했으나 여지가 아니고 한나라 시조인 유방의 아내
여후(여태후)를 여지로 착각한 것 같으며 참고로 여지는 측천무후를 숙청한 후 세운 중종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은
왕후 여씨가 아닌지 모르겠으나 그도 측천무후만큼 잔인 했다고 하지만 3대 악녀는 아니다.
또 측천무후를 산서성의 사람으로 중국의 하나뿐인 여자 황제라고 했으나 그것도 착각한 것 같은데 서태후가
산서성 사람이며, 측천무후가 얼마나 악질인지는 3장 중국 역사 중에 당나라 역사 편에 기록했다.
서태후의 악질과 머리카락이야기는 [3-1] 자금성에 자세히 기록했고, 악독한 내시 이연영은 [3-2] 이화원에
기록했으며, 1860년 제2아편전쟁 때 영불군대가 파괴하고 약탈한 이화원이야기를 했다.
1750년 효자인 건륭제는 일단 궁에 들어오면 세상 밖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생모 효성헌 황후를 모시고 어머니
고향 항주(杭州)에 갔을 때 어머니가 서호(西湖)를 보고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효성헌 황후의 환갑을 기념해 서호를 본떠 북경에 만들어 서호라고 했으나 1751년 곤명호수로 개칭했으며, 1
860년 영불 전쟁으로 전소된 청의원를 재건하기 위해 서태후가 해군경비를 유용해 중건한 후 이화원이라
개칭했는데 해군경비 400만량을 유용한 바람에 청일전쟁 때 있었던 일화가 있다.
1894년 우리나라 아산만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있었던 풍도해전 때 청군함포에 맞은 일본군함은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이유는 경비가 부족한 청군은 진흙으로 만든 연습포탄을 사용했고, 군인은 굶으면서 전쟁을 했다.
그러나 지금 이화원은 엄청난 관광수입을 올린다고 하며, 자금성은 하루 8만 명 입장이 가능하고, 이화원은
30만 명이 가능한데 이들 하루입장료가 약 만원하니까 380,000×10,000=3,800,000,000원 큰 유지비 들이지
않고, 하루 최대 38억이 입장료가 들어오며, 두 곳의 내용물은 대만의 고궁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통천협으로 가는 도중 우측에 보이는 태항산맥의 경관>
[통천협(通天峽) 관광]
임주에서 1시간쯤 달리면 산서성 창즈시 평순현의 통천협에 도착하는데 통천협은 ‘하늘로 통하는 협곡’이라고
하며, 상서성에 위치하고, 2017년 5월에 개장했으며, 입장을 한 후 7분 정도 빵차를 탄다.
도랑을 건너면서 시작되는 협곡의 장관을 40분 정도 구경하고, 터널을 통과한 후 10분 정도 걸어가 케이블카를
타고 7분 정도 올라가 정상에 이르며, 바닥을 유리로 만든 전망대는 20분 정도 내려가면 있다.
전망대에서 보는 경치는 과연 어떻게 이런 장소가 있을 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좀 민망한 것은 전망대에서
제일 좋은 자리는 중국사진사가 차지하고 관광객을 들어가지도 못하게 줄을 쳐 놓고 영업을 하는 것이었다.
중국이 G-2라고 큰 소리를 치지만 아직도 이런 것을 보면 후진국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우리 일행 중에도
아직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한 2명은 가이드와 약속한 장소를 벗어나 더 아래에 있는 전망대로 갔다.
2분 중에 우리 팀이 있었다는 것이 좀 충격적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할 일 없이 기다렸다가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해서 빵차를 탔는데 나가는 출구를 우리말로 수출이라고 번역한 것이 좀 특이했다.
<1 통천협 입구 2~3 협곡경치 4 중앙에 2개의 빨간 것이 케이블카 5 케이블카 안에서 본 우리가 걸어 온
하얀 시멘트 길 6 정상의 광장 7~9 전망대 주위의 통천협 경관 10 출>
<통천전망대에서 찍은 동영상>
[왕가대원(王家大院)과 진상(晋商)이야기]
출구에서 판매하는 것이 산서성 특산물인 진초(식초)로 이곳 사람들은 식초를 국수에 넣어 먹어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지만 이들은 식초를 넣지 않으면 맛이 없다고 하는데 산서성은 식초, 석탄, 밀 생산이 유명하다고 한다.
그리고 고량주 일종인 분주가 또 유명하며, 다른 하나는 1860년 서태후가 피난 왔다는 왕가대원(王家大院)에
대한이야기를 했는데 서태후는 시안(서안)으로 피난 갔기에 서태후와 얘기는 진실이 아니다.
단지 왕가대원에 대한 이야기는 검색한 것과 비슷했는데 검색한 것을 간추려보면 면적은 자금성보다 넓어
‘민간의 자금성’이라 불릴 정도이며, 크고 작은 대원이 231채로 각 방의 개수를 더하면 모두 2,078칸이다.
청나라 4대가문의 하나인 정승(靜升) 왕씨의 왕실(王实) 형제가 약 600년 전 두부와 소금을 팔아 막대한
갑부가 됐었고, 학문도 매진하여 고위관직에 올랐으며, 그의 일가가 무려 300년에 걸쳐서 완성한 주택이다.
왕씨 가문의 사람들이 사는 대저택이 소도시를 이룬 격이고, 중국의 주택 구조는 입구에 들어서면 주인이
사는 방, 동쪽은 서쪽은 딸이 사는 방인데 돈 많은 사위는 대릴 사위로 데려왔다고 한다.
돈 많은 왕서방이 서쪽 방에 살기문에 왕서방이라고 해서 웃었고 돈 많은 왕서방이 처음 했던 장사는 지금도
먹고 있는 작고 아주 짠 빨간 두부 이며, 왕서방이 많이 살았던 산서성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명나라는 국가가 쥐고 있었던 소금 전매권을 산서성에 넘겨주고 군량미를 조달해서 많은 부를 축적했는데
이 상인들을 특히 진상(晋商)이라고 부른 것은 산서성 춘추전국시대 진(晋)나라였기에 때문이라고 한다.
산서성 차량 번호 앞에도 ‘晋’ 자를 사용하는 이유라고 하며, 최초의 은행도 산서성에 생겼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가져온 왕가대원 전경>
[돈은 중국에서 벌어야 한다.]
한국에 가서 돈 벌어온 친구들이 많은데 한 10년 걸려 1~2억 벌어오면 어디에 투자할지를 모르는데 그 이유는
중국도 너무 빠르게 발전하기 때문이며, 잘 못 투자했다간 다시 돈 벌러 가야한다고 한다.
가이드는 장사를 하는데 라면을 팔면서 2천 원 하는 양은 냄비도 파는 것은 라면을 냄비뚜껑에 얹어 먹으면
맛이 있다는 것을 중국인도 알기 때문이라고 하며, 지금은 아웃도어 옷을 팔면 장사가 잘 될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는 한국과 같은 옷도 없기에 이월된 상품을 가져와도 신상품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 투자하라고 했으며,
점심 식사 후 죽탄섬유와 라텍스매장에 잠시 들려 쇼핑을 하고, 도화곡으로 향했다.
[도화곡(桃花谷) 풍경구 관광]
점심식사를 하고, 중국의 그랜드 캐년, 또는 태항의 혼이라고 불리는 이번여행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겨울에도
복숭아꽃이 핀다고 하여 이름을 가진 도화곡으로 향했는데 가는 도중의 경치가 웅장하고 아름답다.
그중 가장 멋진 곳은 주차장 주위 경치였고, 차에서 내리니 친절하게 환영하며 인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도화곡 한국인 지킴이라고 소개하며 지팡이도 무료로 빌러가라고 했다.
목적은 관광 상품을 팔기위한 것이 이였으나 밉지가 않았고, 걸어서 약 40분간 걸어 올라갔다가 빵차를 타고
내려코스로 처음 도착한 곳은 황룡담이고, 이곳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 가는 재미가 있다.
다시 더 올라가면 지도엔 함주라고 되었으나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고, 시루떡 같이 생긴 거대한 지층 사이로
흐르는 냇가가 있으며, 이 냇물은 폭포도 만들었다가 모이면 담이 되었다.
냇가 따라 이동로가 있는데 절벽에 놓인 잔도도 있고, 낮은 폭포는 중국인들이 자연이 더 아름답도록 인공으로
구조물을 만들어 자연과 비슷하게 한 것을 여러 번 봤기에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인공구조물들이 보였고, 15분 쯤 오르니 말 안 해도 알 수 있는 이룡희주가 보였다.
규모가 작아 감탄할 정도가 아니며, 이름은 용 2마리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구슬이고, 장사꾼이 진을 친 곳에
도착하니 새소리가 요란 했는데 일행이 무슨 새소리인가? 물었을 때 바로 가짜 새라고 했는데 맞았다.
자기로 새 모양으로 만든 장난감에 물을 넣어 불면 꼭 새소리처럼 들렸는데 손녀 생각에 하나에 천원 주고
샀으나 동료는 2개에 천원을 주어 좀 억울했고, 구련폭이라는 바위는 종착지가 가깝다는 것을 알려 준다.
본래 일정은 도화동촌에서 빵차를 타고 왕상암으로 이동하여 부운정에서 입구까지 하산하게 되어 있는데
공사 때문에 가지 못하게 되어 섭섭했지만 그 보다 더 한 것은 ‘하늘 길’이라는 천로(天路)를 못 가는 것이다.
가이드가 자꾸 천로라고 하니까 철길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빵차를 타고 내려와 왕상암으로 향했다.
※도화곡 코스 정문: 도화곡 입구→ 도보등반→ 황룡담→ 함주→ 이룡희주→ 구련폭포(도보 1h)→ 도화곡 입구
※도화곡: 하남성 안양 현 임주 시에 위치한 도화곡 유래는 태항산맥이 북쪽 추위를 막아 겨울에도 복숭아꽃이
핀다고 해서 생긴 것이며, 수억만 년 전 지질 형성 중에 물의 침식으로 홍암석이 씻겨 생겨난 깊은 골짜기이다.
협곡에는 맑은 물이 만든 연못과 폭포가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으로 주요 볼거리는 황룡담, 비룡협, 함주,
이룡희주(二龍戏珠), 구련폭포가 있으며, 전동카를 타고 환산선을 이용해 왕상암으로 간다.
<1~3 주차장 주위의 경관 4 황룡담 5~6 협곡풍경 7 이룡희주 8 구련폭포 9 도화곡 마지막풍경>
[왕상암(王相岩) 풍경구 관광]
오후 3시 20분에 왕상암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주위경치도 일품이었으며, 가이드는 나사형의 계단까지만 갔다
온다고 했는데 올라가지 말고 고가대로에서 빵차를 타고 올라가서 내려오자고 했다.
가이드는 그 코스를 가보지 않았다고 했지만 아마도 비용문제 아닌가? 생각했는데 우선 부운정까지 빵차
대금과 또 전부 입장료까지 내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했다.
가이드를 따라 여자 2명과 남자 4명이 섰으나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포기하고, 4명만 다녀왔고, 5시 10분에
임주로 출발해서 오늘 일정을 마쳤고, 오는 길에 조선족이 하는 농협매장에서 농산물을 샀다.
부산 팀은 참깨를 많이 사 고생 좀 했으며, 저녁 메뉴인 양꼬치는 처음 먹어 보았지만 맛있다.
※왕상암: 하남성 안양 현 임주 시에 위치하며, 중국역사 3,300여 년 전에 있었다고 하는 왕조 은나라의 무정
(武丁)과 노예 신분으로 재상까지 지낸 부열(傅說)의 고사가 있는 곳이다.
왕과 재상이 함께 거주했다고 해서 얻어진 지명이다.
※무정(武丁): 은나라 22대 왕으로 BC 1137년 단군조선의 소태단군을 공격하다가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백성의 안위만 걱정하는 무정에게 감복한 상제는 꿈속에 부열을 보여주었다.
무정은 꿈 속 인물의 초상화를 전국에 뿌리고 수소문하여 마침내 찾은 그가 바로 부열(傅說)이며, 그는 무정을
도와 은나라의 중흥기를 이끈 인물로 이 일화가 열감무정(說感武丁, 무정을 감동시킴)이다.
※환산선: 도화동촌에서 출발하여 고가대에 이르는 32km의 코스로 해발 약 1,200m 내외의 절벽상단을 달리는
'태항천로코스로 전동카 또는 미니밴을 타고 각 포인트별 전망대에서 태항산의 멋진 풍경을 감상 할 수 있다.
<1~4 주차장과 출입장 주위 경관 5 오늘 반환지점인 나사형 철 계단>
[4일]2018년 4월 27일 금요일 ●일정: 임주 태항대협곡 팔천협 이동(1시간) 후 관광→ 한단 이동(2h30)→ 호텔
[팔천협(八泉峽) 관광]
산서성 창즈시 후관현에 위치한 팔천협은 ‘8개의 샘’이라는 뜻 가진 곳으로 오늘 코스가 가장 멋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2016년 3월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는데 이 태항산은 중국의 5대 악산과 5대 명산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며, 주차장에 도착하여 빵차를 타고 터널을 통과 하면 유람선을 탈 수 있는 선착장에 도착한다.
<1~3 팔천협 가는 도중에 보이는 경관 4 팔천협 충입장 5 터널 6 선착장>
[고협평호 유람선과 계곡 트레킹]
이 호수는 중국에서 많이 봤던 댐을 막아 인공으로 만든 호수로 유람선은 타고 가면서 협곡을 구경했는데 다른
곳처럼 해설을 하지 않았으며, 배의 천장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좀 못마땅했다.
배에서 내려 케이블카 승강장까지 걷는 40분 정도의 코스는 도화곡처럼 경치가 아름다웠다.
<1 배에서 본 풍경 2~3 케이블카 승강장까지의 경관>
[팔천협 케이블카]
2016년 5월부터 운행한 케이블카는 팔천홍분에서 옥황정까지 총 3,000km으로 투자액은 1.2억(CNY)이고,
8명이 탈 수 있는 상자가 50개 매달려 있고, 받침대는 34개가 있으며, 상, 중, 하 3개의 정류장이 있다.
타는 시간은 12분 정도이며, 중국 첫 번째로 걸개식 회전 케이블카이어서 이제까지는 직선으로 가는 케이블카만
타 보았으나 팔천협 케이블카는 중간 지점에서 110도 정도 우측으로 꺾어 운행되는 것이 신비롭다.
<팔천홍분 승강장에서 하차장까지 차례대로 찍은 사진이다.>
[옥황각(玉皇阁) 광장]
내려 걷노라면 내부에는 옥황상제가 모셔져 있다는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 옥황각(玉皇阁)과 광장에 도착하며,
광장엔 우리가 그려 놓은 것 같이 태극무늬의 문양도 있고, 난간에는 팔천협 사진들이 걸려있다.
광장에서 내려가는 계단은 구불구불하고 급경사이어서 주위의 경치를 살피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 줄 모르니
계단만 보고 내려 오다보면 북천문이라는 석문이 보인다.
<옥황각에서 석문까지>
[북천문(北天门)]
이 석문도 인공으로 뚫은 것이 아닌지? 북천문 뒤 멋있는 배경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 있어
우리도 기념촬영을 하고 또 계단만 쳐다보고 내려왔다.
내려오다 들린 위생간(卫生间)의 물줄기는 높은 위치에 있는데도 호텔보다 더 세고 깨끗했으며, 조그만 더 가면
바닥이 유리로 되어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엘리베이터 승강장이 나온다.
<1~3 석문까지 경관 4 석문 아래에서>
[천공지성(天空之城) 엘리베이터 승강장]
승강장은 ‘하늘 위의 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공지성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고 하며, 높이가 무려 208m로
타러 가는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어 공포 속을 걸었는데 정말 간 지키기가 6.25 때보다 더 힘들었다.
엘리베이터로 1분 정도 내려와 모든 일정을 마치고 차를 타고 조금 내려가면 식당이었으며, 이곳에서 한식으로
식사를 했는데 맛있는 반찬은 접시 당 5천원을 받아 모자라도 시킬 수가 없었다.
한단까지 4시간 동안 차를 탔으며, 호텔에 도착하여 저녁은 호텔식이었지만 좋았고, 저녁엔 귀국 짐을 쌌다.
※빵차: 한국인이 지어준 별명으로 구불구불한 길에서 서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빵빵해서 빵차라 한다.
<1 천공지성과 석문 2 빵차>
[5일] 2018년 4월 28일 금요일 ●일정: 석가장 이동(2h30)→ 12:25[7C8852, 2h30] 정정 공항 출발→
16:05 부산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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