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터키와 그리스(E-랜드 여행사 1997년 11.6-11.12일) 알지 못하면 이해 할 수가 없다고 했는데 이 지역은 성경과 그리스 신화 속에 나타나는 곳이다. 이번의 여행은 성지순례으로 성경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은 거부감이 지며, 이번 기회를 통하여 성경에 대하여 알아두는 것이 터키 여행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유래나 역사에는 관심도 없고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다. 대부분 남아 있으며, 터키도 로마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오직 인류애로서 미국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병했다. 한국전쟁에 5.000명 정도의 병력을 보낼 작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병결과 1만5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자원을 했으며, 1만4936명을 파병했는데 한국동란에 참여한 군인이 운영하는 상가 간판에는 코렐리(Koreli-한국인 뜻)라는 이름을 표시한다고 한다. 가진 나라로 선진국보다 한국인을 일등 국민으로 대우를 한다고 한다. 잘살게 된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고 한다. 하였고, 국제 대회 때마다 한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잘나서 이 만큼의 부를 누리고 산다고 생각해왔던 게 사실이다. 참으로 부끄럽고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우리를 피흘려 도와준 맹방을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고 하며, 유럽이나 중동지역을 무수히 드나든 대통령이나 총리나 장관 등이 있었다. 갈 때나 오는 중도에 한번쯤 들러 볼만도 한데 아무도 들리지 않았고, 전두환 대통령이 유럽을 순방 할 때에 터키에도 들려 달라고 간청했으나 불행하게도 거절당하여 몹시 불쾌했다고 한다. 달러를 보내 왔는데 한국정부는 7만 달러를 재난 복구 지원금 조로 보냈다고 한다. 한 정신과 의사 등이 중심이 되어 모금한 100만 달러를 현지 공관장이 받았다고 한다. 그런 후에 정부지원 금과 함께 전달해 겨우 체면을 차렸는데 한국이 거꾸로 그런 대접을 받았다면 은혜를 모르는 나라고 노발대발하였을 것이며, 우리도 언제 그런 대접을 받지 말라는 법이 없다. 1973년 한국과 터키는 이러한 우호 협력의 관계를 보다 증진시켰다. 정부가 조성하였고, 한국 여의도 인도네시아 대사관 옆에 '앙카라 공원'을 조성하였다. |
|
되지 않아 여행객이 적어 여행객이 한쪽으로만 앉게 되었다. 그러면 비행기가 평형 되지 않는다고 여행객들을 분산시켰는데 개통 때 주었던 선물도 받는데 옆에 사람도 없어 지루하였고, 한 칸 건너 아가씨가 무료한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에게 아그립바에 대하여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모르지만 석고상을 통하여 안다고 했는데 알고 싶으면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하였더니 아가씨도 무료했던지 옆으로 왔다. 아가씨는 홍익대 미술과를 졸업하게 되어 기념으로 유럽여행을 가는 중이었고, 그녀의 여행일지를 보면서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다가 5시간을 소비하였다. 귀국 할 때 그녀를 앙카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가 달려와 나를 안아 줄 때도 누구인지 몰랐으나 자기가 올 때 옆에 앉았던 사람이라고 해서 알았다. 그녀는 고동안에 너무 얼굴이 타서 알아 보지 못했으나 그녀는 아저씨 덕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는데 가이드가 설명을 하면 무슨이야기인지 알기에 듣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남는 시간에 사진도 찍고, 다른 것도 살피는 여유를 갖게됐다고 해서 보람을 가지기도 했다. 11시간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에 도착하였고, 앙카라는 비햏기로 이동하여 호텔에 투숙하였는데 우리는 터키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들의 역사를 알면 대단하다. 어쩌면 서양의 역사 보다 중요하고 세계역사의 중심에 있었는데도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사가 쓰여 지면서 중심에서 비켜서게 되었으며, 유적도 많고 볼 곳도 많았으나 일부만 보고와 섭섭했다. 터키를 여행한 사람은 가장 다시 가보고 싶은 나라이며, 나 또한 그러한데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후진국도 아니고 비행기도 생산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경제는 높은 물가 상승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환전을 해보면 부자가 된 것 같았는데 1 달러에 약 50만 리라를 환전하여 주었고, 물건 값은 단위가 얼마나 큰지 머리가 복잡했다. 만원 단위만 쓰던 우리는 숙달되지 않았으며, 물건값에 아예 천 단위 000 3개는 기록하지 않았다. 1997년 11월 7일 금요일 갑바도기아(카파도키아, Cappadocia, Kapadokya) 관광 아침 일찍이 일어나 8시가 되기 전 관광차안에서 조장로님의 기도로 성지순례가 시작되었으며, '갑바도기아'는 페르시아어 '카트파두키아'에서 유래한 말로 '좋은 말들의 땅'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갑바도기아는 터키 중부의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를 일컫는다. 신기한 지형으로 외계의 화성 같은 나라에 온 느낌을 받는다. 나온 화산재가 약400㎢ 넓이에 퍼져 쌓였다고 한다. <갑바도기아의 절묘한 바위들> 그래서 버섯모양이 동화 속의 요정 같은 바위들을 만들어 졌고, 응회암은 잘 부서지나 일단 공기와 접하면 단단하게 굳어져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크리스천들은 굴을 뚫고 예배실을 만들었다. 동굴 속에서 무소유로 살았으며, 이들을 '디아스포라스(Diaspora)'라고 불렀고, 그들은 '지하에서 영원으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았데 디아스포라스는 ‘흩어짐’의 뜻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설교에도 듣는 단어이며, 먼저 '테린규유(데린구유)'라는 곳에 들렸고, ‘깊은 우물’ 뜻인데 Derinkuyu의 Derin은 영어로 deep(깊은) 뜻이고, Kuyu는 영어로 wall(우물) 뜻이다. 이곳은 지하 11층(혹은 17-18층이라고도 함)으로 만들어진 지하도시로 지하도시인 카타콤베보다 더 웅장하여 감탄사만 나오는데 누가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지는 자세한 문헌이 없다고 한다. |
|
구조상 이 도시가 지하에 만든 이유는 로마시대에 기독교인이 박해를 피하여 지하로 들어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수용인원은 2만 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한다. 55m에서 통행이 차단되는데 우물 같은 곳은 공기통로이자 굴뚝의 역할도 했다. 불을 피워 연기가 나면 흔적도 없이 분산되어 바깥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공기가 유입되어 지하에서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과학적으로 만든 지혜의 통로라고 한다. 같은 것도 갖추어 있고, 통로 입구는 좁게 만들어 군인들이 침입하는데 불편하게 하였다. 지하도시를 여러 개 만들어 도시와 도시는 지하로 연결하여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안내 없이는 이곳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으면 돌아 나올 수가 없다고 하며, 관광객을 위하여 조명을 하여 놓은 곳에도 안전을 위하여 가는 길에 안내 표시가 붙어 있었다. 숙여졌는데 그들 신앙이 유럽을 통하여 미국으로 갔고, 미국은 우리나라에 전했다. 모든 크리스천은 그들이 피 흘리며 지하에서 지킨 덕택이지만 복음은 2000년 만에 지구를 한바퀴 돌아 다시 그들에게 우리 선교사님들이 선교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irony) 하기도 하다. 복음도 지구를 한바퀴 돌았고, 역사도 2000년이면 우리는 아마도 역사의 끝자락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곳에서 우리나라 볼펜은 1달러 정도의 물건과 교환이 가능했다. <요정 같은 바위속의 집 '가바도기아'> 굴속을 불도 없이 앞의 가이드만 따라 통과하여 보았다. 이것으로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며, 여기서도 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 쳤는지 실감나게 느꼈다. 수도원이 형성되어 있다고 하며, 지금도 그들이 교회에 남긴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다. 많이 키운 곳이 비둘기 골짝이이며, 그들이 살았던 동굴 집 위에는 전형적인 작은 구멍이 있다. 그곳이 비둘기의 통로로 그들은 비둘기를 한 식구로 생각했다고 하는데 이곳에 도착하니 벌써 어둠이 시작되어 제대로 보지 못했으며, 갑바도기아는 이 교도들에게 철저히 점령당했다. 그런 후 역사의 뒤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바위 속의 흔적은 지금 우리들에게 그들이 지킨 진정한 신앙과 삶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갑바도기아의 요정 같은 바위> |
|
오늘 여행은 카페에 이미 많은 부분을 소개하였는데 먼저 터키의 2번째로 큰 도시인 이즈밀(성경 서머나)로 이동하기 위하여 비행장으로 나갔다. 불꽃이 튀어 나와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마음을 졸였다.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신앙이 매우 좋은 분이었다. 하였는데 비행기에 오르자 터키어로 만든 작은 성경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었다. 성경을 앉은 좌석에 놔두라고 했는데 이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 읽고 신앙을 가질 것을 기도하며, 자비로 만든 성경으로 이런 방법으로 간접적으로 성경을 전하고, 엄격한 회교도와 마찰을 피했다. 가이드는 현지선교사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 중 어느 선교사는 선교에는 관심이 없고 보내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로 향하였다. (서머나 교회) 계시록 2장 8-11절에 '영적 부를 누리라는 칭찬과 함께 환란을 두려워 말라'는 당부를 받은 교회로 이 교회를 지키는 사람은 나이 많은 아주머니 한분만 계시어 이 나라가 회교국이어서 그런가 보다. 아주머니는 문만 열어 주고는 사라졌으며, 조용한 교회 안을 돌아다니며 살폈는데 벽화에 그림이 초대 감독 폴리갑과 차만익에 대한 그림이 있어 너무 반가웠다. 순교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으로 그렸다고 한다.
<서머나교회의 내부> <서머나 유적> (버가모 교회) 서머나 교회를 떠나 버가모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버가모는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였으며, 이곳에도 로마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교회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가이드의 이야기로는 일반 성도의 집이 교회로 쓰였기 때문에 교회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버가모는 서적 20만 권을 소장하고 1만 명이 입장 할 수 있는 도서관이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도서관의 맨 꼭대기 층이 37m나 된다고 한다. [페르가몬(버가모) 왕조(BC 241-133)] 소아시아에서 번영을 누린 헬레니즘제국의 하나로 에우메네스(BC362-316)는 알렉산더 후계자중 유일한 그리스인으로 마케도니아를 통일하려고 셀레우스코1세와 싸웠다. 초반에 승리하여 이집트까지 쫓아 냈으나 최후에는 패하여 암살되어 제국은 분열되었는데 에우메네스가의 한사람이 도둑(버가모) 왕조를 세운 내력은 이러하다. 못한다는 전설을 믿어 많은 사람이 이 산에 보물을 감추었다. 필레타이로스가 독립을 쟁취하여 아탈로스1세(재위 BC 241-197) 때 왕국이 되었고, 에네메스(재위 BC197-160) 2세가 성을 건설하여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로마가 힘이 커지므로 대시리아전 때 로마 편에 협력하여 소아시아의 서쪽을 지배하였고, 제6대 왕 아탈로스 3세(재위 BC 138-133)의 유언에 따라 왕국을 로마에 귀속하였다. BC 133년 소아시아의 한 주가 되었으며, 수도 페르가몬(버가모)은 후에도 번창하였으며, 이 도시에 장서 20만 권의 책을 애석하게도 불쏘시개로 터어키군이 전부 태워 버렸다. 이 왕국에 속한 도시는 성경 사도행전과 계시록에 기록된 7교회이다. <페르가몬의 로마유적> (두아디라 교회) 버가모를 떠나 루디아의 고향인 두아디라로 향하였고, 이곳은 동업조합(同業組合)이 유명한데 그 중에 사도행전 16장 14절에 자주(비단)상이 등장한다. 그들과 결탁하여 세속화되었고, 정권에도 아부하는 타락상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이르기 전에 회개하라고 책망 받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 다녔는데 구걸하지는 않았다. 다음은 사데로 향하였고, 사데는 현재 사트(Sart)로 BC 7세기 루디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두모르산 기슭에 세워졌고, 알렉산더에 점령됐다가 로마가 점령하여 버가모 왕국에 넘겨주었다. <사데의 유적> |
|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로 가는 중에 많은 포도밭이 보였는데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포도재배법을 가르쳐줬다고 하여 디오니소스 숭배가 성행하였으며, BC 133년 로마에게 점령당하였다. 로마의 박해에 의하여 이 교회 신도 11명이 폴리갑 함께 순교 당했다고 하며, 이 교회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두웠으나 가이드가 이곳 관리자와 친하여 들어 갈 수가 있었다. 교회 벽면에 그리스도와 사도가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사람들은 요한의 교회라고도 부른다. 변함이 없다고 하며, 늦게 시간에 파묵칼레(Pamukkale)에 도착하여 호텔에 들어갔다. (파묵칼레) 식당도 이미 파장이라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투숙하게 되었으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천에 와서 목욕을 안하고 가면 후회 될 것 같아 철원에서 오신 목사님 부부와 함께 온천을 하였다. 물이 많이 더러웠고, 터키탕의 대명사인 터키탕을 구경하엿는데 방 전체가 대리석으로 되어있고, 남탕과 여탕이 구별되어 있으며 이곳에서는 모두가 타월로 치부를 가리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이렇게 건전한 것을 일본사람이 나쁘게 만들었고, 그것이 우리 나라에 전하여졌다. [데니즐리(Denizli)] 터키에서 13번째로 큰 도시로 데니즐리 주의 주도이며, 시내의 북쪽 20km 지점에는 파묵칼레와 세계유산인 히에라 폴리스라는 유명 관광지가 있다. 파묵칼레 주변에는 성경의 유서 깊은 라오디게아 유적지와 골로새와 히에라 폴리스라는 3개의 도시(삼성도)가 있으며, 데니즐리는 유명한 수탉이 있다. 이 수탉은 세계의 가장 긴 울음을 울다가 스스로 기절한다는 닭으로 20∼35초 동안 지속되며, 데니즐리 도시 중앙로터라엔 수탉의 동상이 있었다. 하지만 사진 찍는 것을 놓친 것이 안타까웠으며, 또 시집갈 딸이 있는 집 대문 위에는 딸 숫자만큼의 병을 올려놓는다고 한다. 1997년 11월 9일 일요일 히에라 폴리스, 라오디게아, 에베소 관광 (히에라 폴리스) '동방견문록'의 마르코 폴로가 이곳의 아름다움을 보고 극찬하였다고 하며, 파묵칼레는 터키어이다. 영어로는 코튼캐슬(Cotton Castle-목화 성)이며, 옛 이름은 히에라폴리스로 '성스런 도시' 또는 하계의 신 '플루토'의 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신전의 도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며, 대지진으로 옛 교회가 파괴되어 지하에 묻히고 교회에서 온천물이 솟았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야외 온천장으로 조성하였으며, 교회의 기둥은 온천장 바닥에 깔리고, 그것도 모른 채 많은 사람들이 교회기둥 위에 밟거나 않자 온천 욕을 즐긴다. 하얗고 오후에는 푸른색으로, 낙조에는 붉은 색인데 그것도 날씨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우리가 너무 일찍이 도착하여 가계 문도 열지 않아 이런 토산품을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양들이 무덤사이로 다니면서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냥 큰돌 하나로 만든 석관형이 지상에 수 없이 많이 놓여있다. 나와 책을 사라고 따라다녔고, 이곳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보존상태가 좋은 원형극장이 있다. 극장은 2세기 하드리안 황제 때 만들었고 이것을 3세기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가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하였으며, 약 1만 5천명의 인원을 수용하였다는 대규모 원형극장 중앙의 무대주변에는 아폴로 신을 주제로 한 정교한 대리석 조각이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었다고 하나 우리는 보지 못하였다.
<히에라폴리스 교회자리에 <프뤼기아 지방있는 히에라 <파묵칼레의 목화성처럼 있는 야외 온천장> 폴리스의 고성> 보이는 아름다운 노천온천> |
|
(라오디게아) 가까운 곳에 있는 라오디게아로 갔는데 이곳은 구릉지에 아무도 살지 않았고, 파괴된 대리석이 발에 밟힐 만큼 많이 있었으며, 오늘이 주일이라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 교회 유적 중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것은 지금도 회교인 들이 계속 파괴하여 십자가가 얼마 있지 않으면 보지 못할 것 같았는데 대지진으로 파괴됐을 때에 외부의 도움을 거절했다. 자력으로 복구 할 만큼 상권을 쥐고 부유하게 살았다고 하고, 당시에도 은행이 있었다고 하며, 마지막에 식어 미지근한 물은 서민이 사용했고, 이 온천수가 교회에 비유되어 미지근한 믿음으로 책망 받았으며, 이 지역은 옛날에 바다였다고 한다. 최근에 안약에 쓰이는 식물이 발견되어 계시록 3장 18절을 뒤 바침 했다고 한다. 희랍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서머나는 아시아의 자랑이요 에베소는 아시아의 꽃'이라고 하였고 신화에 등장하는 쉬링크스 동굴 있다는 에베소로 향했다. 최초의 성읍과 신전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에베소라고 한다. <에페소스에 있는 헤라클레스문> 신전은 그들이 숭배하는 젊고 아름다운 처녀신인 아르미테스(아데미)를 모셨는데 이 여신은 다른 곳의 아르미테스와는 다르게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무수히 많은 유방을 가졌다. 일으켰고, 에베소는 해상과 육로의 중심지역으로 헬라문화와 동방문화가 잘 융합되었다. 돌아가실 때에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였다.(요한복음 19장 26-27절) 대하여 꿈을 꾼 것을 책으로 발간했고, 책 속에 마리아가 살던 위치가 쓰여졌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 나자렛 신부가 탐사대를 만들어 발견한 곳이 이곳이며, 주위의 나무에는 소원을 적은 기도문이 주렁주렁 달려있었고, 조금 외진 곳에 있는 누가의 무덤으로 갔다. 무덤인데 누가는 누구인지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에베소에 있는 누가의 무덤> 로마의 원로원이 있었다는 대로로 향하였는데 코린트식과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이 줄지어 서있다. 약 600m의 대리석 바닥인 도로가 쿠레테스 대로로 이 대로가 끝에는 알렉산더와 데메드리오가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가두고 소동을 일으킨 원형연극장이 나타난다.(행19:23-30) 전하던 바울 생각났고, 건너편에는 창녀촌이 있었으며, 도로에는 발의 모양을 새겨놓았다. 간다고 나선 사람들이 창녀촌으로 향하였다고 하니 당시의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다. 아니고 변기 아래에는 물이 흐르고, 그 위에 변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
|
변기 앞에는 작은 도랑에 물이 흐르게 하여 그 물로 뒤처리를 깨끗하게 하였고, 칸이 없는 변기에 앉아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정답게 일을 보았을 것을 생각하였다. 이곳에 앉아 보고 사진도 찍었지만 기분은 변소라는 이름 때문에 꺼림직 했고, 부자들이 살았다는 주거지와 서민이 살았다는 주거지를 지나 상인이 모였다는 장터는 무척이나 넓었다. 이 장엄한 거리를 지나 맨 끝자락에 있는 야외 원형연극장은 당시 25,000 수용했다고 하며, 아직도 잘 보존되어있고, 지금도 이곳에서는 유명 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잘하는 두 분의 모습이 아름답고 부러웠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는 말씀의 어머니임으로 하나님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결정하였다는 에베소 교회로 향했다. 가격도 다른 것은 1달러 정도였는데 40달러를 부르는 것이었다. 진품이 아니더러도 '성서의 역사'에서 본 Caesa와 SC가 마음에 꼭 들었으나 가격이 비싸 절반인 20달러를 내보이자 거절했으며, 차에 오르고 내다보니 그 청년이 밖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으로 30달러라고 했으나 모른척 했고, 차의 시동이 걸리자 내려오라고 하여 20달러를 주고 구입하였는데 차에 오르자 모두들 무엇을 샀는지 보자고 하였다. 보고 내 것은 진품 같다고 했는데 다른 일행은 바빠서 아무 것도 사지 못했다. 진품이면 그 가격에 살 수도 없다고 생각되지만 글자가 소중한 1 데나리온 청동화폐를 에베소의 기념품으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중이어서 조그만 늦었어도 못 봤을 것인데 요한의 무덤 위에는 꽃이 놓여있었다. 보였고, 가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못 갈 것이 분명하여 더욱 아쉬웠다. 향하다가 가죽옷을 파는 가계에 들어가 그들이 제공하는 차를 마시며 패션쇼를 구경했다. 그런 후에 쇼핑을 하였고, 그들이 실크가죽으로 만들었다는 잠바가 마음 들었으나 비싸다고 하여 포기했으며, 저녁 먹고 일행 몇 명과 캄캄한 바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왔다. 우리의 곶감과 비슷한데 우리나라도 무화과 말린 것을 보았는데 크기가 터키 것 보다 작았다. |
|
그들이 키가 커서 소변기가 높았는데 남자의 변기 수보다 여성용 변기가 훨씬 많아 편리하였으며, 여성용 변기는 공동으로 사용 할 수가 있어 많이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과일 중에 석류가 인상 남았는데 우리나라 것은 신맛과 함께 먹을 것이 없으나 여기 것은 맛있고, 가기 전에 점심을 먹은 식당 화단에서 구경 할 수가 있었다. <에베소에 있는 쿠레테스 대로> 울음소리도 듣게 되었으며, 어둠 속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고성이 있는 섬이 있었다. 이 섬에 보이는 곳에서 배를 타고 떠났고, 가이드는 이스탄불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고, 이 배는 우리 일행밖에 타지 안았으며, 해가 뜨면서 아름다운 섬들이 눈에 들어왔다. |
|
상점도 열지 않는 시간이라 조용하였는데 우리가 나타나자 가게를 몰래 열고 호객을 하였다. <밧모섬의 요한 동굴> (아테네)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인 아테네로 향하였으며, 어릴 때에 꿈꾸던 아테네를 본다는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찍은 파르테논 신전> <아레오바고의 바위와 뒤편 중간이 '아고라'이다> |
|
고린도로 향하다가 고린도 운하가 옆에 있는 겐그리아 쪽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물속으로 들어 가는 다리> <고린도산과 유적지 이 길을 통하여 항구로 갔다> 아테네로 되돌아오니 이미 날이 어두워 다른 일정은 포기하고 1896년 아테네에서 현대올림픽 1회가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옛 지명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오전 9시 비행기로 이스탄불로 향하게 되어 있으나 |
|
제1 도시인 이스탄불은 영국역사학자 토인비가 '인류 문명이 살아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고 그리고 소피아 성당은 들어갔는데 이곳은 1934년에 케말파샤가 성 소피아사원과 톱카프 궁전을 지루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토프카피 궁전 현재는 박물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