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먹는 거미가 8마리라고 한다.
정말일까?
궁금하다.
이번에 김경욱이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라는 소설집을 냈다.
와우!
커트 코베인은 내가 사랑하는 뮤지션이 아닌가?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사고야 말았다.
김경욱은 현대인과 사회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 사회에 몰입되지는 않는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가 소외된 채 살아간다.
왜 절망해야만 하며, 왜 단절되야만 하는지를 보여준다.
김영하와 비슷한 듯하지만,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
-거미의 계략- 김 경욱
지난 20일 합정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김모씨(남,30세)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김씨는 2년 전부터 그곳에 혼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뭔가 썩는 듯한 고약한 냄새를 이상히 여긴 옆방 세입자의 신고로 김씨의 죽음이 확인되었다. 외부로부터 침입한 흔적이나 이렇다할 외상이 없는 관계로 수사 당국은 자살 여부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숨진 김씨는 다음달 결혼을 앞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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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맡기 싫은 사건들이 있다. 특별한 이유 없이 피하고 싶은 사건들 말이다. 비린 생선을 맨손으로 만질 때, 손안에서 미끄덩거리는 이물감처럼 석연치 않는 느낌. 굳이 현장을 가보지 않아도 그런 느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는 죽음, 사건개요를 처음 들었을 때 머릿속에 스친 건 그런 생각들이었다. 이번 사건에도 그런 냄새가 났다. 이제까지 경험을 비추어 맹세컨대, 냄새는 거짓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불길한 예감이라는 것은 빗나가는 법이 없어서, 현장에 출동했을 때 꺼림칙한 기분은 더욱 강해졌다. 현장 감식을 하는 내내 나는 그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오히려 예감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찜찜한 사건이었다.
결혼을 코앞에 둔 젊은 사내가 자신의 원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죽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시체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었다. 시체는 믿어지지 않을 만치 깡말랐다.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다. 사내는 침대에 반듯하게 드러누운 채 죽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는 누리끼리하게 색이 바랜 채 시체의 코와 입을 완강히 틀어막고 있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전혀 없군. 창문과 출입문은 안에서 잠긴 상태 그대로야. 근데 옆방에서 사람이 죽어 있는 것도 모르다니! 냄새가 안 났으면 영원히 몰랐겠군."
강형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는 어젯밤도 꼬박 샜는지 얼굴이 까칠했다. 졸음을 몰아내기 위해 커피를 연신 홀짝거리고 있었다.
"외상이 없는 것을 보니 타살은 아닌 듯한데......"
내가 중얼거렸다.
"자기 살 썩는 냄새를 견딜 수 없었나보군! 자넨 마스크 쓰고 자살하는 사람 본 적 있나?"
강형사가 턱을 쑥 내밀어 시체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부검을 해봐야 단서가 나오겠지."
미간을 모으며 내가 말했다.
"그렇겠지. 그치만 쉽지는 않겠어."
강형사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마스크를 쓰고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깡마른 시체. 죽은 자는 말이 없었지만 죽은 자의 육체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당분간 집에 들어가긴 글렀다.
"난 수요일이라면 넌덜머리가 나. 수요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니까."
강형사가 투덜거렸다. 그는 여전히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날도 수요일이었다. 일주일 중 유독 수요일에 사건이 가장 많이 터졌다. 일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을 붉게 표시해야 할 판이었다. 수요일, 신은 육지와 바다를 만들었고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사람을 죽인다. 현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유서는 찾을 수 없었다. 자살이라면 눈에 띠는 곳에 유서를 남기게 마련이다. 생을 마감하는 마당에 자신의 죽음이 쓸데없는 억측과 곡해의 대상이 되기를 바랄 사람은 없다. 유서를 남김으로써 그 죽음의 의미는 완결된다. 더 이상의 구구한 분석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데 사내는 유서 한 잔 남기지 않았다. 임종을 지킨 사람도 없고 유서도 없는 경우 수사는 불가피하다.
강형사말대로 마스크를 쓴 채 자살했다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자살이 아니라면 타살? 타살의 가능성은 낮았다.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없고 저항한 흔적도 없다. 무엇보다 이렇다할 외상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사내는 원룸은 지나치다 싶을 만치 정돈이 잘 된 상태였다. 한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자살도 ㅇ니고 타살도 아니라면......
나는 새삼스레 시체를 바라보았다. 감식 반이 지문 체취와 현장 촬영을 끝내고 비닐 수트에 시체를 옮기고 있었다. 시체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다시 보니, 잔뜩 겁에 질린 얼굴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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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사는 건물 주인과 다른 세입자들을 만나보겠다며 나갔다. 시체는 국과수로 실려가고 현장에는 나만 남게 되었다. 반 지하라서 사월인데도 실내 공기는 서늘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씹기 시작했다. 금연 껌이었다. 담배를 끊은 지 한 달이 가까워지면서 금단 현상이 심해졌다. 지금처럼 담배 한 대 생각이 간절한 때면 금연 껌을 씹어댔다.
나는 찬찬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쇠창살이 덧대어진 창문 아래로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책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노트북PC도 보였다. 한동안 손대지 않았는지PC에는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았다. 책상 오른쪽에는 5단 짜리 책장 세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고 책장마다 한치의 빈틈이 없을 정도로 책이 빼곡이 꽂혀 있었다. 책장 맞은편에는 옷장과 서랍장이 물끄러미 서 있었다. 화장실도 깨끗했다. 간이부엌도 깨끗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자렌지 위의 냄비도 잘 닦여 있었고 밥통에는 밥알 한 톨 묻어 있지 않았다. 취사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소형냉장고도 텅 비어 있었다. 불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예 플러그를 뽑았는지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 책상 옆에 백화점 로고가 찍힌 쇼핑백이 세워져 있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청첩장이었다. 원앙새가 박힌 평범한 청첩장이었다. 결혼식 날짜는 5월 19일이었다. 이제 사내는 결혼식이 아니라 장례식을 치러야 할 것이다. 나는 수첩에 신부의 이름을 적었다.
책상 서랍에서 사내의 지갑이 나왔다. 운전면허증, 신용카드 세 장, 만원 권 지폐 다섯 장, 천 원 권 지폐 두 장. 지갑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죽은 사내의 이름은 김주은, 나이는 서른이었다. 운전면허증의 증명사진을 보고 나는 조금 놀랐다. 죽은 사내의 얼굴과 너무 달랐던 것이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나 시체가 썩기 시작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차이는 컸다. 사진 속의 사내는 제법 통통했다.
서랍에서 나온 것들은 잡다한 것들이었다. 오래된 영수증, 편지지와 편지봉투, 폐 건전지, 전기 면도기, 원고 청탁서.......원고 청탁서? 사내는 소설가였다. 나는 책상 위의 책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수북히 쌓여 있는 책 중에서 사내의 이름이 실린 잡지를 발견했다. 문학 계간지였다. 사내가 쓴 소설의 제목은 [거미의 계략]이었다. 그의 소설이 신인 공모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당선된 소설 바로 뒤에 당선소감과 작품 평이 이어졌다. 나는 먼저 당선소감부터 읽었다. 이것은 내 버릇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글쓴이의 후기를 읽곤 한다. 그러고 나서 그 책을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다.
사내의 당선소감은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 더러 감상의 그림자가 비치긴 했지만 그 정도면 절제의 미덕을 아주 내동댕이쳤다고 할 수는 없었다. 꾸미지 않고 담담하게 문학적 정진을 다짐하고 있었다. 그 다짐의 어조가 너무 담담해 싱거울 정도였다. 당선자를 축하하는 자리인지라 작품 평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만만치 않은 습작시절을 짐작코 하는 탄탄한 문장력과 구성력, 삶의 세목을 포착하고 재현하는 예민한 감수성 등, 칭찬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칭찬의 일색은 아니어서 말미에는 이런 평이 덧붙여졌다.
.....씨가 예의 작품에서 보여준, 일상의 각질에서 새겨진 삶의 아이러니를 포획하고 그것을 개성 있는 언어로써 재현해내는 발랄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다층적 삶의 의미를 그 기저에서까지 파고드는 통찰력과 항용 우리가 본질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삶의 아이러니는 결코 레토릭이나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대화적인 것이며 다성적인 것이 아니라 다성적인 무엇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시의 쉼 없는 정진을 바란다. 들끓는 욕망과 천박한 자본의 무차별적인 억압이 극악해질수록 거미처럼 언어의 씨실과 날실을 짜 영혼의 집을 짓는 작업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터, 구도자적인 열정으로 충만한 신인을 문학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보낼 때마다 마음 든든해짐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의자에 앉았다. 사내가 쓴 소설을 나는 천천히 읽었다. K라는 젊은 사내가 있다. 그는 대학교 다닐 때부터 사귀던 여자가 있다. 그녀는 H다. 그들은 결혼을 약속했다. 남자는 군대에 다녀왔고 여자는 졸업과 동시에 잘 나가는 다국적 기업에 취직했다. 남자는 평범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그리고 문학을 하겠다고 했다. 사실 남자와 여자가 만나게 된 것도 문학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학 연합 서클에서 만났다. 군대에 다녀와도 남자는 문학을 버리지 못했다. 여자는 남자더러 철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렸다. 상대는 K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부유한 집의 외아들이었고 젊은 나이에 이미 그럴듯한 자기 회사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는 했지만 H는 K를 잊지 못했다. 처음엔 배반감에 몸을 떨던 남자도 여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남자는 졸업을 하고 입시학원에서 새벽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남자에게는 다른 여자가 생겼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점점 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워지지 않기 위해 그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는 술이 엉망으로 취한 남자가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자는 난생처음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힘들어! 너무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아!" 여자는 침묵을 지키다 대답했다. "기운 내!" 여자의 목소리는 마치 천사의 그것처럼 다정하고 더없이 따뜻했다. 적어도 남자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그런 식이었다.
3
"흠, 세월 좋군."
강형사가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쓱쓱, 닦으며 소리쳤다.
"뭐 건진 거라도 있어"?
나는 읽고 있던 잡지를 덮으며 말했다.
"꽝이야. 다른 세입자들은 이방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더군."
"오피스텔 주인은 만나봤어?"
"주인 말로는 이곳에 들어온 지 2년이 됐는데 트러블 한번 일으킨 적이 없다더군. 월세 꼬박꼬박 내고 늘 쥐죽은듯이 조용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대. 주인한테 요구사항도 업고"
"흠 잡을 데 없는 세입자였던 셈이군."
"그렇지."
강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자네는 어때?"
주위를 둘러보다 강형사가 내게 물었다.
"이 친구 결혼 날짜까지 잡은 상태였더군."
"그래?"
나는 쇼핑백에서 꺼낸 청첩장을 건넸다. 청첩장을 훑어보는 강형사의 눈이 빛났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나?"
"생각보다 사건이 일찍 마무리될지도 모르겠어. 우편함에 이런 게 잔뜩 쌓여 있더군."
강형사가 내게 내민 것은 우편봉투였다. 대부분 신용카드 회사로부터 날아온 것이었다. 수신인은 죽은 사내였다. 내용물을 보니 신용카드 연체료 독촉장이었다. 연체료가 천 만원에 달했다. 경고가 담겨 있었다. 신용불량자라!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면 사회 생활은 물론 이제 막 시작하려는 결혼생활도 파탄날 것이다. 결혼 자체가 무산될지도 모른다. 대체 어떤 여자가 신용불량자 따위와 평생을 약속하려 하겠는가. 결혼은 자선사업이 아니다.
또 다른 우편물은 이동통신사에서 보낸 것이었다. 역시 독촉장이었다. 체납된 요금이 3백만 원이 넘었다. 독촉장을 보자면 사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과 빚뿐이었다. 결국 금전문제인가?
"괜히 긴장 했나봐. 단순 자살이야. 결혼을 앞둔 젊은 사내가 자신의 침대에서 얌전히 죽었다. 뻔한 거 아냐?"
강형사가 말했다.
"뻔하다니?"
내가 물었다.
"여자 아니면 돈이지. 둘 다이거나."
강형사는 몰라서 묻느냐는 투였다.
".......그런데 마스크는 왜 쓰고 있었던 걸까?"
강형 사는 이미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듯했다. 그러나 나는 강형사의 의견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뭘까 찜찜했다.
"마스크 따위는 잊어버려. 죽기 전에 사람들은 종종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하잖아. 죽으려고 맘먹었는데 무슨 짓인 들 못하겠어? 가끔은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 난 죽은 사내의 가족을 만나볼 테니 자네는 여자들을 만나봐."
"여자들?"
"장사 하루 이틀 하나? 카드 연체료에 통화 요금을 봐! 이미 잡힌 물고기한테 미끼 주는 얼간이가 어딨어?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고 여태 애꿎은 마누라 가슴만 주무르고 있지. 참고인 진술 받고 사우나에서 잠깐 눈 좀 붙이고 갈 테니 보고서는 자네가 올려. 사흘 연속 철야를 했더니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군."
내 어깨를 툭툭 치며 강형사가 말했다. 그는 턱이 빠져라 하품을 했다.
강형사가 철수하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현장에 남아 있었다. 사내는 돈 때문에 자살을 한 것인가? 그러나 석연치 않았다. 마스크도 이상할뿐더러 이동 통신 요금도 지나치게 많았다. 그렇다면 여자 때문인가?
나는 다시 서랍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맨 아래 서랍에서 종이 뭉치가 나왔다. A4용지에 전화번호와 날짜, 시각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핸드폰 통화 기록이었다. 붉은 사인펜으로 사선이 그어진 전화번호도 더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이거다 싶었다. 뭔가 단서를 찾은 것이다. 자신의 통화 기록을 뽑아보는 사람은 흔치 않다. 더구나 통화 기록에 뭔가 표시를 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게다가 그 사람이 죽었다.
나는 단서가 될만한 것들을 모두 챙겼다. 현관문을 나서려다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망설이다 돌아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잡지를 집어들었다. 죽은 사내의 소설이 실린 잡지 말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냥 직감이었다. 적어도 밑질 건 없었다.
일단 서로 전화를 넣었다. 과장은 자리에 있었다. 나는 과장에게 간략히 보고했다.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자살 같지만 유서도 없고 자살동기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 인물들을 만나보고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알았어."라고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과장도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지도 몰랐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18초마다 범죄가 발생한다. 아홉 18분마다 누군가는 죽임을 당하고 한시간 36분마다 누군가는 강도를 당하고 한시간 17분마다 누군가는 강간당한다. 그리고 1분 35초마다 누군가는 얻어터진다. 자신의 방 침대에 홀로 누워 조용히 죽어 가는 것은 어쩌면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 나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현장에서 가져온 사내의 핸드폰 통화 기록을 꺼내 거기에 적힌 전화번호로도 전화를 넣었다. 국과수에서 부검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탐문수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죽은 자의 통화 기록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여보세요?"
젊은 여자였다. 약간 잠긴 목소리. 순간 '여자들'이라는 강형사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실례합니다. 혹시 김주은 씨를 아십니까?"
"누구요?"
여자의 말꼬리가 올라갔다.
"김주은 씨 말입니다."
"그런 사람 몰라요."
여자의 반응은 단호했다. 뜻밖의 반응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김주은 씨를 모르십니까?"
나는 재우쳐 물었다.
"모른다고 말하는 거 안 들려요?"
매몰차게 쏘아붙이더니 여자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다시 그 번호로 전화를 넣었다. 여자는 더욱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전히 그런 사람 모른다고 버텼다. 자꾸 장난질하면 발신자 추적해서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번에도 여자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내를 모른다는, 여자의 말은 거짓 같지가 않아다. 이상한 일이었다. 통화 기록 맨 위에는 분명히 죽은 사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씹고 있던 껌을 뱉었다. 다른 번호로 전화를 넣었다. 이번에는 중년 사내의 굵고 낮은 음성이었다. 똑같은 질문에 역시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 명에게 전화를 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모두 그런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고 잘라 말했다. 전화번호 목록에는 미국과 중국의 전화번호도 있었다. 젊은 여자들이 이른바 서비스를 하는 전화번호도 다수 찍혀 있었다.
나는 멍하니 번호들을 바라보았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욕지기도 나오지 않았다. 보기 좋게 한방 얻어맞은 꼴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주머니를 뒤졌다. 담배는 없었다. 껌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전화 받은 자들이 모두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김주은, 이라는 작자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화질을 해댄 것인가? 나는 통화 기록용지를 자동차 옆 좌석에 던졌다. A4용지가 팔랑거리며 뒤집어졌다. 동시에 붉은 색 사인펜으로 휘갈겨 쓴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전화번호 옆에는 대리점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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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점은 종로에 있었다. 이동통신 대리점이었다. 대리점의 책임자는 가느다란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우람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짧게 친 헤어스타일이 몸집을 더욱 커 보이게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혹시 최형사님?"이라고 알은 체를 했다. 통화만 했을 뿐인데 단박에 나를 알아본 것이다. 형사를 본능적으로 식별해내는 인간들이 더러 있다. 작자는 내 신분을 확인하고 나서 태도가 지나치게 공손해졌다. 날씨가 덥다는 둥, 목이 마르지 않느냐는
둥, 쓸데없는 말을 주워 섬겼다. 뭔가 구린 것이다.
"김주은 씨가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 굳이 외돌 필요가 없다.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잖아도 째진 눈을 더욱 가늘게 치떴다.
"정말로 죽었습니까? 어쩌다가 죽었습니까?"
"그걸 알아보는 중입니다."
"설마, 저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겠죠?"
사내는 손사래를 쳤다.
"살해당했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뭐가 다행이라는 것인지는 나는 알 수 없었다. 사내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대로 더운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와이셔츠의 목 단추를 풀었다.
"김주은 씨와는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미스 윤, 여기 시원히 물 좀 갖다 줘. 얼음도 띄워서......"
잠시 후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냉수가 담긴 컵을 내왔다. 사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컵을 단숨에 비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사나이 말에 의하면 현장에서 발견한 통화 기록은 사실 김주은 것이 아니었다. 김주은의 명의를 도용해서 다른 누군가가 통화한 것이었다. 김주은이 주민등록증을 분실했고 그것을 주은 자가 그이 명의로 그 대리점에서 핸드폰을 신청했던 것이다. 통화 요금 독촉장이 날아온 후에야 자신이 주민등록증을 분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주은이 뒤늦게 명의를 도용한 자를 찾아내기 위해 통화 기록을 뽑았다. 상황은 그렇게 돌아간 것이었다.
"요금은 어떻게 되었죠?"
"신분증을 분실한 당사자가 부담하는 게 원칙입니다."
사내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원칙'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본인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당신들도 책임이 있는 것 같은데?"
사내는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저의 쪽에도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원인제공은 그쪽에서 한 것입니다. 그래도 도의적으로 모른 척 할 수 없어서 성의표시를 하려 했는데....... 사실, 카드대금에 비하면 이건 새 발의 핍니다. 듣자하니 신분증을 습득한 자가 카드를 세 개나 만들어 미친 듯이 긁어댔다더군요 된통 당한 셈이죠"
"본인이 그러던 가요?"
"동정심을 얻으려고 한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라면 참 안됐다 싶더군요 잘 아시겠지만 카드 회사들한테 걸리면 국물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 인정사정 없어요. 그 젊은이가 죽어버렸으니 가족들이 그 등쌀을 견뎌야겠군요. 물론 , 그것이 사실이라면 말이죠"
"카드 건은 사실입니다."
퉁명스러운 내 목소리에 나 스스로도 놀랐다. 암만 생각해보아도 퉁명스럽게 쏘아붙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리점장이라는 작자를 한방 갈겨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역시. 사실이었군요. 거짓말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더군요. 자기가 쓰지도 않는 카드 값을 생짜로 물어내야 했으니 죽을 맛이었겠죠. 제 친구 중에도 그런 봉변 당한 녀석이 있습니다. 누군가 자기 명의로 카드를 발급 받아 흥청망청 써댄 것을 고스란히 다 물어내야 했습니다. 점포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자신이 그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점포의 종업원들이나 업주들은 대부분 잘 모르겠다고 말하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작자들은 손님이 많은 상점들에서만 카드를 사용하지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카드 회사 사람들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안 당해본 사람들은 절대로 몰라요."
"김주은 씨의 죽음이 전적으로 카드대금 때문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사실, 나는 이 작자와 마주 대하고 말을 하고 있다는 데 넌덜머리가 나려던 참이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만....."
놀랍게도 작자는 억울하든 투였다.
"명의도용한 자를 찾았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번호로 통화 정지시키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작자는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그곳에 더 머물 필요는 없었다. 나는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는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삐 옮기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한 자를 추적하기 위해 낯선 번호로 전화를 넣었을 김주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결코 즐거운 상상은 아니었다.
이동전화 대리점에서 나온 나는 독촉장을 보낸 카드회사를 찾아갔다. 세 사람을 거치고 나서야 담당자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감이 자연스럽게 몸에 벤 사내였다. 나는 내 신분을 밝혔다. 사내는 내가 형사라는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사내는 김주은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신분증을 분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임은 원칙적으로 김주은에게 있다는 말만 그는 되풀이했다. 회사로서는 규정대로 처리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김주은이 죽었다고 말하자 담당자라는 자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회사는 그분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저희들은 고객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고객의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내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해서 나는 오히려 어떤 우스꽝스러움 이마저 느꼈다.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다.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사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감정을 굳이 겉으로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런 짓은 아마추어들이나 저지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담당자라는 작자의 상당히 훈련이 잘 된 편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회사의 이익에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그리 되었답디까?"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침대에 들어 누운 채 죽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있더군요."
"마스크라......기이하군요. 말못할 사연이라도 있었나보군요 이를테면....."
"이를테면?"
"치정 같은 거 말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뭐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마스크는 왠지 금적적인 문제와는 어울릴 것 같지가 않군요."
마스크, 여전히 그것이 문제였다. 아니 처음부터 문제는 그것이었다. 죽는 마당에 왜 마스크를 걸치고 있었을까.
5
살아남은 자들은 때로 무의식적인 침묵을 통해, 가까운 자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 여자도 그랬다. 약혼한 남자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여자는 정확히 5분 동안 말이 없었다. 죽은 김주은의 약혼녀, 이상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실룩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여자는 약혼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담담했다. 여자가 대책 없이 허물어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던 터라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쁜 자식!"
여자의 첫 마디는 뜻밖이었다.
"혹시 담배 가진 거 있어요?"
그 여자, 이성민을 만난 곳은 대치동에 있는 보습학원 건물 1층 로비였다. 그녀는 그 보습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담배, 끊고 있는 중입니다. 금연 껌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단발 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중키에 약간 말랐지만 왜소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검정색 원피스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쭈뼛거리다 이사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괜찮으시면 자리를 옮기고 싶은데요....."
여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앞장서서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녀는 보습학원 맞은편 건물 2층 카페로 올라갔다. 창가 쪽 소파가 비어 있음에도 그녀는 굳이 빛이 잘 들지 않는 맨 구석 자리로 걸어갔다. 소파에 앉자마자 여자는 담배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물 컵과 담배를 함께 가져왔다. 여자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일 때까지는 나는 잠자코 있었다. 여자는 담배 연기를 시원스럽게 내뱉었다. 꽤 익숙한 솜씨였다.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죽었답니까?"
여자의 눈빛은 유난히 검었다. 모든 빛을 삼켜버릴 듯, 검었다.
나는 사건의 경위를 소상히 설명했다. 아직 사나이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부검 결과가 나와야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겠지만, 현장감식 결과로는 타살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황 상 자살일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 뚜렷한 자살동기를 찾지 못했다.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동안 여자는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두 사람 사이, 별 문제 없었습니까?"
"문제라뇨?"
여자가 반문했다.
"이를테면, 금전적인 문제 같은 것 말입니다. 조사해보니 김주은 씨는 명의도용으로 적지 않은 금전적 손실을 입었더군요."
"그 사람, 돈 문제 때문에 자살하거나 할 사람은 아닙니다. 그 일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의 돈이라면 원룸 보증금을 빼서 급한 대로 막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어차피 결혼 때문에 나오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말예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 돈 때문에 죽음을 결정 결심할 정도의 현실감각도 없는 인간입니다. 자기애와 자기학대사이에서 위험한 줄다리기를 하는 인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파산 따위를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냉랭하고 단호했다.
"별로 사이가 좋지 못했나 보죠? 냄새 때문에 옆방에서 신고할 정도라면 연락이 끊긴지 수일이 지났을 텐데, 궁금하지도 않았습니까?"
암만 생각해 보아도 이들의 관계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점에 대해 힐난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가 그들의 문제였으니까.
"원고 쓴다고 잠수하면 그쪽에서 먼저 연락할 때까지 속절없이 기다려야 해요. 그럴 때는, 뭐랄까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곤 하죠. 그런 일, 한두 번이 아니어서 이번에도 그런가 보다 했어요.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그런 뜻으로 질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두 사람. 어떻게 만났죠?"
"3년 전에 저 보습학원에서 만났어요."
여자는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같이 근무하셨군요."
'맞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소설 쓰는 데 전념하겠다며 작년에 그만 두었어요. 절박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다고 하면서 말이죠"
"실례되는 질문 같습니다만, 혹시 김주은 씨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습니까?"
"......."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강형사가 했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소설 때문이었다. 현장에서 발견한 잡지에 실린 김주은의 소설. 소설 속의 주인공도 입시학원 근무했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여자를 만났다. 소설 스토리와 현실이 그럴 듯하게 맞아 떨어졌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아귀가 너무 잘 맞았다. 돌발적인 내 질문에 여자는 한동안
침묵했다. 이야기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저울질하는 눈치였다. 역시 여자 문제였나?
"극단적인 자기애와 자기혐오의 소유자들은 끔찍할 정도로 우유부단하죠"
"무슨 말이죠?"
"초면에 이런 얘기까지 해야될지 어떨지 모르겠군요"
"무슨 이야기라도 좋습니다. 어떤 것이 수사에 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사람에겐 다른 여자가 있었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저를 알기 전부터 말입니다.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제대로 알아보시려면 그 여자를 만나보는 게 빠를 겁니다."
그렇게 운을 뗀 뒤, 이성민은 죽은 약혼자의 다른 여자에 대해, 그들의 기이한 관계와 질긴 인연에 대해 토로했다. 그녀는 그간의 마음고생의 흔적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차분하고 요령 있게 이야기했다.
그녀의 진술에 따르면, 죽은 김주은에게는 대할 다니던 시절부터 사귀던 여자가 있었다. 그들은 문학서클에서 만나 가까워졌다. 김주은이 군대 다녀오는 동안 여자는 졸업을 했고 연봉이 후하기로 유명한 회사에 취직했다. 김주은은 여전히 작가 지망생이었고 여자는 직장 동료의 소개로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남자는 돈 많은 집안의 외아들로 논현동에
자신의 빌딩을 갖고 있었다. 여자는 작가 지망생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길 수 없었다. 그래서 돈 많은 그 남자와 결혼했다. 의심했던 대로, 소설 속의 내용은 현실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 신혼여행가서도 주은 씨한테 전화를 하는 거예요. 미안하다.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다. 믿어달라. 빚에 쪼들린 집안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웃기는 일이죠 여자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움켜쥐고 싶었던 거지요. 비록 결혼은 했지만 너를 아직 사랑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난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 결혼한 지 5년이 되도록 여태 아이가 없더군요. 이 모든 것을 몰랐던 건 아니에요. 그 사람, 처음부터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놨어요. 그 여자에게서 도망치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그러니 제발 도와달라. 그렇게 된 거예요. 죽어버렸으니 마침내 그 여자에게서 벗어난 셈이군요."
"끔찍하군요"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일이죠"
여자의 표정은 더없이 음울해 보였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진실로 끔찍하게 여기는 듯한 얼굴이었다.
카페에서 나왔다. 이성민은 강의 준비를 해야 된다며 보습학원 쪽으로 걸어갔다. 오후의 역광 때문에 그녀의 모습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여자의 검정 원피스에 프린트된 이름 모를 꽃 문양이 마치 거미의 실루엣처럼 보였다.
6
이성민이 적어준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했다. 김주은을 버렸던 여자, 그러나 절대로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든 여자. 그녀의 이름은 한영서였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앳되다.
"한영서 씨입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이성민이 메모해준 전화번호는 틀림없었다. 내가 형사라고 하자. 한영서는"어머!"라고 중얼거렸다. 놀라운 눈치였다. 김주은 씨를 아느냐고 묻자 선선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경계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얘기했다. 한영서는 김주은이 죽은 게 정말이냐고 두 번이나 확인하고 나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만나서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여자가 한참 후에 대답했다. 나는 여자의 회사 앞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한영서의 회사는 강남역 근처에 있었다. 약속 장소로 가면서 나는 한영서, 라는 여자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대체 어떤 여자일까. 소설 속에서는 남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마음을 다 내주지 않는 여자로 묘사되어 있었다.
한영서는 약속시간보다 10분 늦게 나타났다. 상상과는 달리 그녀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옷차림도 수수했다. 볼이 통통한 얼굴은 친근감을 주기까지 했다. 자세히 보니 눈두덩이 부어 있었다. 울었던 것이다. 혹시 이 여자 연막을 치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죽었습니까?"
한영서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자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엾은 사람!"
여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당황했다. 정작 약혼자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 여자는 아주 섧게 울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김주은을 사랑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연기에 불과한 거인가. 연기라면 대단한 연기력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가 울 때면 눈물이 마르고 평정을 찾을 때까지 내버려둬야 한다. 주위 사람들이 자꾸 내 쪽을 흘깃거렸다. 한참 후, 여자는 울음을 멈췄다.
"김주은 씨를 사랑하셨나 보군요."
"사랑이라고요?"
한영서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큰일 날 소리하지 마세요. 전 엄연한 남편이 있는 사람이에요."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럼, 왜 우신 겁니까?"
"그 사람 인생이 불쌍해서 울었을 뿐이에요. 다른 뜻은 전혀 없어요.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요. 물론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죠. 그렇지만 모두 어릴 적 얘기일 뿐이에요.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은 있잖아요. 전 결혼생활에 만족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이었어요. 제가 결혼한 후에도 연락을 했어요. 첫사랑 어쩌고 하면서 징징거리며 매달리더군요. 얼굴을 못 보면 죽을 것 같다고 해서 만나줬을 뿐이에요. 마지막이라고 해서 애원해서 만나주고 나면 한동안 잠잠하다가 술에 취해 또 전화하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제가 전화번호를 바꾸기까지 했겠어요. 그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어요. 집착일 뿐이었어요. 그것도 아주 지독한."
아주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섧게 울던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업을 정도였다.
"김주은 씨 결혼 날짜를 잡았던데,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가능하다면 파혼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때마다 제가 달랬어요. 당신도 이제 과거는 잊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라. 나에게 이런 이야기하는 건 약혼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도망치고 싶다고 하더군요 학원에서 만나 어쩌다 술에 취해 하룻밤을 잤는데 그 이후로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면서 괴로워하더군요. 전 우스웠어요. 전 우스웠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이 그런 얘기를 아주 심각하게 하고 있는 상황을 말예요."
"마지막으로 만난 건 언제였습니까?"
"한달 전, 그러니까 황사가 무척 심한 날이었어요. 회사 앞이라고 하더군요. 나갈 수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사무실로 찾아오겠다고 해 어쩔 수 없이 나갔죠. 무척 초조해 보였어요.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결혼날짜가 다가오니 그랬겠죠. 아무리 결혼하기 싫어도 그렇지......"
"결혼하기 싫어서 자살하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뭐,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커피 한 잔 마시고 헤어졌어요. 황사가 호흡기로 들어가면 해롭다면서 약국에 끌고 가 마스크를 하나 사주더군요. 결벽증이라고 핀잔을 해도 막무가내였어요. 모래바람 따위가 뭐 대수냐, 인간이 일생동안 밤중에 실수로 먹게되는 거미의 수가 여덟 마리가 되는데, 라고 했더니 질겁을 하더군요. 그 사람, 하루에도 손을 수십 번 씻어야 겨우 안심하거든요."
명의 도용 당한 휴대폰, 카드 빚, 억지로 매달리는 약혼녀, 배반한 첫사랑도 모자라 이제는 거미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종업원을 불러 담배를 한 갑 주문했다. 한달 동안 이를 악물고 참아왔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말았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 맛은 달았다.
7
사건 발생 일주일 후, 국과수에서 부검 결과가 날아왔다. 타살이 아니라 아사였다. 굶어죽었다는 것이다. 위를 살펴본 결과, 음식섭취 흔적이 전혀 없었고 위의 크기가 정상인의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는 것이다. 타살이 아닌 것이 법으학적으로 확인되어 그 사건은 자살로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자살의 동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주변 인물들의 진술이 엇갈렸고 무엇보다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동안에도 이 거대한 도시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비명횡사한 시체를 찍은 현장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는 오늘밤을 새야 할 것 같다. 내 책상 위에는 여태 그 잡지가 놓여 있다. 김주은의 소설이 실린 잡지 말이다. 머리도 식힐 겸, 나는 잡지를 펼쳐든다. 죽은 김주은의 소설을 벌써 다섯 번째 읽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활자 위로 그의 시체가 또렷이 겹쳐진다.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채 말라비틀어져 누워 있던 시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