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의 표절시비와 관련된 자료들을 올립니다. 정문순의 글과 실제 거의 유사하게 느껴지는 것까지 비교해서 올라놓았으므로 좋은 의견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정문순(문예중앙) 신경숙의 표절시비 도화선
필자 약력
1969년 생. 부산대학교 졸. 여성문화 동인 살류쥬 편집위원
641-100
경남 창원시 대방동 개나리 (아) 303-1508
통념의 내면화, 자기 위안의 글쓰기
-신경숙의『딸기밭』-
정 문 순 (saluju20@hanmail.net)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게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희망에 대한 실패였다는 걸 1963년생들은 순식간에 경박스러워지면서 감지했다...... 해도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희망은 소모전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한번쯤은 가질 수도 있었을 1963년생들의 가치 기준은 여지없이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무주공산을 점령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다. 90년대 문학이 80년대 민족문학 진영을 비판하는 일의 용이함이 그와 같았다. 이미 진영이 해체되는 마당에 80년대 문학계를 낭만적 세계관, 근거 없는 낙관주의, 융통성 없는 교조주의에 함몰되었다고 규정해버려도 그만이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너무 많이 다쳤다, 그러니 '해도해도 안 되는 일'에 문학이 집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극단적 인식이 문학의 이름으로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신세대문학을 위시한 90년대 문학계가 전대 문학의 성과를, '한번쯤은 가질 수도 있었을' 가치관으로 강등시켜 몰락을 판정해 버리는 것은 자신들의 문학적 토양을 몸소 황폐화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들 문학이 새롭게 내세운 '가벼움'과 다양성이 실제로 가벼움과 헐거움으로 떨어진 것도 전 시대를 비판적으로 계승할 평형감각을 잃은 데 대한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날 가수는 말했다. "어떤 사람은 노래는 노래일 뿐이지 듣는 사람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동시대를 살면서 부르는 노래는 그 사회 상황을 담아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어떤 게 옳은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신경숙,「딸기밭」에서
가수가 콘서트에서 80년대에 부른 민중가요를 다시 부르며 소감을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가수는 민중가요의 평가를 유보하고 있지만, 이것은 수사에 불과하다. 작가 신경숙의 관점은 가수의 발언에서 이미 드러나 있다. '억압'이라는 우악스러운 어감의 낱말이 문맥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게 옳은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신경숙은 80년대의 민중가요, 정확하게는 민중문학이 사람을 '억압'했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80년대 문학에 대한 전면적 부정에서 그녀의 소설은 둥지를 틀고 있다. 그에게 문학은 문학일 뿐이지 사람을 억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90년대에 신경숙은 신세대 작가로 촉망받다가 장정일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까지 격상되었다. 따라서 신경숙의 소설은 90년대 문단의 바로미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80년대를 억압의 시대로만 평가절하하는 단선적 세계관의 작가 신경숙이 90년대 문학을 상징하는 이름이라는 기현상을 규명해 볼 필요성이 도출된다. 이 글은 신경숙 문학과 90년대 문단의 관련성을 살핌으로써 신씨 문학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려는 작업의 일환이 될 것이다. 먼저 신경숙 문학의 90년대적 의미를 짚어보고 최근작 『딸기밭』을 통해 그녀의 문학 세계를 고찰할 것이다. 끝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표절 문제도 진단하겠다.
따뜻하되 치열하지 않음, 슬프되 아름답지 않음
신경숙은 90년대 내내 신세대문학의 기수로,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상찬을 받아왔다. 대체로 80년대 거대담론에 억눌려 말해질 수 없었던 삶의 다양성이나 개인의 내면성 등이 그녀의 개성적인 문체에 힘입어 표현된다고 얘기되어 왔다. 삶의 다양성과 세밀함을 포착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을 이야기하는 신경숙 소설은 확실히 80년대 문학 풍토에서는 무시되기 쉬운 것들이기도 했다. 이는 '다양한 사회 관계 전반의 변화'보다는 '정치 권력의 교체와 민주화'를 시대의 과제로 삼은 당시의 사회 운동의 단선적 조류에 기인한 바 컸다. 그러나 그동안의 평가는 신경숙 문학이 다양성이나 내면적 자의식을 말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지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지 따져보는 작업은 드물었다. 필자가 보기에 신경숙이 집착하는 자의식과 내면의 세계는 자신과의 치열한 고투에서 나온 산물은 아니다. 신경숙 문학의 정점이라고 일컬어지는 『외딴방』을 보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끄집어내어 과거의 자신과 화해를 이루는 데 바치고 있지, 내면과 치열한 긴장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성숙해가는 자아를 나타낸다고 보기는 힘들다.
내면성을 추구하는 신경숙 문학의 현실과의 사투 없는 고분고분함과 따뜻함은 90년대를 환멸의 시대라고 서슴없이 부를만큼 맥빠진 문단에게 스스로를 위무하는 공간이 되어 주었다. 초기작「멀리 끝없는 길 위에」에서 '나'의 글쓰기는, 80년대에 '내'가 '해도해도 안되는 소모전'일 뿐인 시위대에 휩쓸려다니는 동안 태고적 낙원을 꿈꾸다 외로움 속에 죽어간 친구를 묻어주는 무덤이자 '나' 자신도 위무하는 행위가 된다. 신경숙 소설의 목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닌, 시대에 대한 희망에서 상처 입은 자신을 글쓰기로서 달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는 소설이다. 이때 개인의 실존적 문제를 사회가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신경숙의 자각은 묘하게도 비관주의로 나아가지 않고 현실을 운명으로 수용함으로써 견디자는 방향을 제시하는데, 90년대 평자들을 사로잡은 비결이 여기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시대와의 치열한 대결 의지가 없는 신경숙에게 사회는 한 인간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폭력의 실체이면서도 탐구해야 할 주제는 아니다. 주인공에게 고문을 가해 반쯤 기억상실에 걸리게 하거나, 어린 소녀를 공장과 산업체 특별학교에 다니게 만든 사회의 본색은 소설의 배후에 널찍이 물러나 있다. 『외딴방』은 다른 작품에 비하면 사회의 정치적 격변이 자세히 묘사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과거를 장식하는 삽화로 제시된 것일 뿐 그녀의 관심은 과거 속의 자신과의 만남과, 상처받은 자신을 어루만지는 것이 본령이다. 또한 한 시대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인간에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본질적인 조건으로 보는 그녀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대단히 단순하다. 글쓰기로써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거나, 잠재된 기억을 되찾기도 하고, 어려웠던 시절의 체험을 풀어냄으로써 과거와 대면하고 그렇다고 마땅한 희망이나 전망도 없으면서 어쨌든 '어깨를 펴'고 '다시 생을 가져야지' 다짐하는 것으로 마무리짓는다.
신경숙 소설에서 수없이 출몰하는 다음과 같은 발언들, '소설을 이루는 문장으로는 아무리 해도 삶에서 발생했다 사라지는 섬광들을 앞설 수가 없다'는 고백이 뜻하는 바, 신경숙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는 겸손한 창작 태도는 80년대를 주도한 낙관적 세계관에 배반당하여 무력감에 젖어들던 문단의 심경과도 일치했다. 자신의 글쓰기가 세상을 앞설 수 없음을 솔직한 듯이 토로한 소설가를, '바닥 모를 허무의 시대', '허황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패배주의에 빠진 평자들은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신경숙 소설에서 세계의 전망을 잃은 데 대한 자신들의 허무감을 위로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김병익은 『딸기밭』의 해설에서 신경숙의 육성(『아름다운 그늘』)을 인용하며 그녀의 소설이 '이 세계의 슬픈 아름다움'을 실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가 살아보려고 했으나 마음 붙이지 못한...과학적인 접근으로는 닿지 못할 논리 밖의 세계들...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내 글쓰기에서 재현하고 싶은 꿈.'
그녀에게 얼마나 살아보려고 몸부림쳤는지, 과학적인 접근으로 닿아보려고 노력이나 해 보고 나서 삶이란 뜻대로 안되는 것이라고 단정짓는지 묻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신경숙은 삶이란 입으로써 합리적으로 말해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글을 통해 재현하고 싶어한다. 그녀의 소설은 무력감에 시달릴 평론계나 일부 독자들에게 소설의 공간에서나마 위로하겠다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않아 보인다. 필자는 90년대 문단에 팽배한 환멸감이 아니고서야 신경숙 소설이 귀빈 대접을 받았을까라는 의문을 금할 수 없다. 거듭되는 말이지만 신경숙 문학에서 보이는 다소곳한 포즈와 따뜻함, 자신을 낮추는 고백의 태도는 다른 신세대 작가에 대한 평단의 대접과도 구별짓는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신경숙을 위시한 90년대 신세대 작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개별자로서의 개인이었다. 그들이 인간에겐 사회적 자아로 통합되지 않는 영역이 있음을 말한 건 주목할 만하나 자신들에게 인간은 개별자 개인으로 축소된 의미를 가지며, 타자와 사회는 개인의 자기 중심주의를 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신세대 믄학은 전시대의 도그마에 대한 극복 의식의 소산임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패배 의식이 배출한 자기방어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에 신경숙들의 작업을 90년대 문학계의 대안으로 평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불온하지 않은 금기 위반의 딸기밭
상식과 통념을 강화하는 위로의 말
90년대 문단을 지배한 바닥 모를 허무감은 세계 앞에서 지레 겁먹은 자들의 패배 선언에 가까웠다. 삶이란 두렵지만 저항할 수 없는 무엇이니 글로써나마 위안으로 삼겠다는 신경숙의 의도는 문단의 추세와도 잘 부합되었으며, 그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출몰한다. 최근작『딸기밭』의 작품들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책 한 권을 시종일관 꿰고 있는 주제는 삶의 불가항력성인데 여기서 인물들의 운명을 휘감고 있는 것은 죽음으로 제시되며, 자신이나 자기 주변에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그는 언제 오는가」에서 '나'는 3년 전에 까닭 모르게 자살해버린 동생의 유해가 뿌려진 남대천을 찾아간다. '나'와 동생은 어렸을 때 양친을 잃었었다. 폐쇄적인 언니에 비해 동생은 씩씩하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느닷없이...삶에 끼어들어...흔들어대는' 운명의 횡포에 불치병을 선고받자 그것에 대한 저항감이 뒤늦게 발견된 일기에 나타나 있다. '누구도 내 목숨을 마음대로 하지 못해. 나는 끌어가는대로 끌려가지 않을 거야. 두고 봐.' 여기서, 자신을 죽게 하려는 '알 수 없는 이 세상'에 죽음으로써 저항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방식이 아니며, 나약하고 미숙한 자아의 돈키호테식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경숙이 보기에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건 그건 독자의 몫이다. '나'는 말한다, '침묵 속으로 사라진 존재가 남긴 풀리지 않는 의문과 그리움만이 흘러다녔다. 어쩌면 이게 인생인지 모른다.'라고. 죽음에 대응하는 동생의 태도로 삶의 불가해함을 제시한 것으로 족할 뿐 신경숙의 진정한 관심은 남아 있는 사람들, 언니인 '나'와 남편에 관해서다. 동생의 일기장을 읽고 나서 '나'는 동생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변모한다. 남에게 상처받을까봐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온 '나'는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살아갈 용기를 얻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남은 사람은 죽은 이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어쩌면 이게 인생인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니 무질서한 세계를 인정하자. 동생을 뺏아간 그(인생)는 언제 또 불청객으로 올지 모르지만 말이다.
신경숙은 애초부터 삶과 죽음의 불가항력을 믿는 일반의 상식과 통념을 거스를 생각이 없는 사람이며, '도처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라는 삶의 폭압성을 글에서 재현하여 독자에게 삶에 순응하도록 달래는 것을 꿈꾸는 사람이다. 결국 이 글을 읽은 독자는, 살아 남은 사람은 주어진 운명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묵은 통념을 확인받고 지은이로부터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화자가 죽은 동생의 남편을 끌어안고 달래는 말은 기실 신경숙이 자신의 글을 읽어줄 독자를 겨냥한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이 장소(남대천)로 돌아와 있을지도. 그러나 ...우린 살아갈 거예요. 그게 우리의 본능일 테니.'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라는 한마디로 정리될 수 있는 신경숙의 메시지는 「작별인사」에서는 죽은 이가 등장하여 전언한다. 기혼남과의 덧없는 애정 행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지리산에 갔다가 홍수를 만나 유명을 달리하고 마는 M. 영문도 모르고 M을 기다리며 점심상을 준비하는 친구집은 활기 가득하다. M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헌신적인 사람들로서, 이들이 M의 유고를 짐작하면서 잔치의 흥이 깨어지기 전까지 집안을 감돌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흡사 축제를 방불케 한다. 그러니 죽더라도 여한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죽음이 불가항력이라면 달게 받아들일 수밖에 도리가 없는 일. 독자여, 그대 주변의 누군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 당신이 그 사람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면 죽은 자는 그리 불행한 것이 아니다. 죽은 자는 당신을 찾아와 작별인사를 하고 고이 돌아갈 것이다…. 대충 이런 얘기를 신경숙은 하고 싶겠지만 이 글을 읽고 남는 것은 죽음도 너그럽게 수용하는 자세의 아량과 온화함이 아니라 죽음을 왜 미화시켰는지 모르는 어리둥절함일 뿐이다.
죽음에 대한 고통스러운 천착 없이는 '죽음은 끝이 아니야' 라는 말씀이 아무리 지당하더라고 그것이 공감을 얻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우리는 왜 뜻하지 않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작가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닐까? 혹여 인물의 죽음에 인위적인 힘, 이를테면 정치적 배후라도 도사리고 있다면 그때에도 신경숙은 죽음을 감내하자는 위로를 할 텐가? 죽고 사는 문제를, 사회 구성원 다수의 운명을 규정하는 정치 사회적 문제에 접근시키면 신경숙의 달래기는 허망하고 무력하기만 하다.
『딸기밭』에 실린 소설들의 인물들은 대개 부모의 어느 한쪽이나 둘 다 없이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모의 부재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데 제약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가 모르는 장소」에서의 어머니와 아들. 상호신뢰와 존중으로 충만한 두 사람은 혈연으로 맺어진 관습적인 모자 관계에서 조금 벗어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어머니를 더없이 사랑하지만 생모가 아닌 데 대한 결핍감을 갖고 자라났기에 장차 이혼할 아내에게 아이를 맡기려는 아들의 모습에서 여성의 본연은 출산과 육아라는 통념이 소설을 떠받치고 있음을 숨기지 못한다.
사실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의붓자식인 아들로 인해 감당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들은 출산을 할 수 없는, 그럼으로써 관습적인 가족 관계를 벗어날 수도 있었던 어머니를 기존의 가족 관계에 붙들어두는 구실을 한 셈이다. 한편 남편의 유해가 있는 곳이자 두 모자의 '생이 배어 있는 곳'이 된 호수라는 장소에 정작 아들의 아내의 자리는 없다. 아들은 아내가 자신에게 편입되지 않는 그녀만의 공간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런만큼 호수라는 공간은 아들과 어머니만 포용하는 아늑하나 폐쇄적인 곳이다. 곧 호수는, 아내의 삶에 무지하여 그녀에게서 배제된 아들과 어머니간의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공간이며 어디까지나 어머니에게는 남편과 아들의 자장 아래 자신이 편안히 안식하는 곳이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호수로 상징되는 죽은 남편이나 아버지를 정점으로 한 가부장제의 구도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것이다.
신경숙 소설에서 소위 결손가정을 이루는 인물들은 부모의 부재를 결핍과 허무라는 상흔을 입혀 내면화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가부장 담론에 기여하고 있는 점은 주의할 만하다.「그가 모르는 장소」의 아들이 가진 결핍은 의붓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으로도 채워지지 않으며 「그는 언제 오는가」에서 어릴 때 부모를 잃은 자매는 마음의 빗장문을 닫아 걸거나 자살로 치닫는다. 이들에 비해 「딸기밭」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아버지 없음에 대해 훨씬 더 큰 몸짓과 과민한 대응을 보이고 있다.
금지된 욕망의 어설픔; 아직 덜 익은 딸기들
「딸기밭」은 신경숙 소설에서 퍽이나 낯익은 화자의 회상 형식이다. 기억을 잊어가는 화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고백투의 진술과 80년대에 대한 옥석을 막론한 거부감, 고질적인 가부장제 담론 등은 그녀의 소설에서 안면을 익혀온 것들이다. 그래서 조용하고 얌전한 신경숙의 다른 인물들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도착적인 욕망에 휘둘리는 화자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딸기밭」의 '나'(〓'처녀')는 어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간 사실이 자신에게 '끝간 데 없는 결핍의 지평선'을 부여했다고 단정하는데, 단순히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딸에게 억압이나 결핍의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설정한 것은 이 소설이 가부장적 인습과 통념을 배반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다. 아버지 없이 성장한 것이 '나'의 자아 형성에 구체적으로 어떤 왜곡을 가져왔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부재는 당연히 자식의 불행을 낳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구도에서 소외된 사람은 어머니로서, 남편의 몫까지 감당하며 아무리 악착같이 살아도 딸에게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어머니와의 사이에 '늘 표현될 수 없는 어떤 단절이 개입되어 있던 '처녀'의 불편한 마음은, 어릴 때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한 남자에게 부성을 느끼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이렇게만 보면 소설은 아버지 없는 여자의 파더콤플렉스를 매우 통속적이고 낯익게 전개한다고 볼 수 있지만, 80년대의 비장한 노래 가사가 흐르고, '처녀'가 아버지의 부재 만큼이나 자신을 억압한다고 느낀 사회 분위기가 언급되면서 소설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아무도 치마 따위는 입지 않는다. 아무도 머리에 롤 같은 건 말지 않는다. 사소한 일상에까지 스며있던 억압. ...마음껏 행복할 수는 없는 감정들이 그때 젊은이들이 공유한 감각이지...유. 너는 다르다. ...어떻게 너는 그때 젊은이들이 마시는 공기 속에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억압을 피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있었나.
'유'라는 여자는 80년대, '데모 대열'과 '최루탄 가스' 로 상징되는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또래 젊은이들이 '우울'과 '좌절'을 겪을 때, 거기서 비껴나 있는 화사하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처녀'(='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처녀'는 자신이 갖지 못한 발랄함을 가진 '유'에게 느끼는 동성애적 욕망과 살의를, 처음엔 '그 남자'에게 투사하다 결국 사회적 금기를 깨버린다. 딸기밭에서 가진 성적 접촉에서 돌연 '유'가 나를 대하는 모습도 거침없다. "누워!" "나를 죽이려 했지!" 억압을 피해 자유로워 보였던 '유'도 똑같이 억눌려 있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나' 또는 '처녀', 실은 신경숙의 목소리인 화자는 자신이 비틀린 욕망에 휘둘리게 된 건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채로 주어진 이 평범한 현실'을 초월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고 진단하는데, 그녀가 초월하고 싶은 현실은 '데모 대열'과 '최루탄 가스'로 뒤덮인 대학가의 분위기와 아버지가 없는 집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재와 80년대 변혁 운동을 위시한 시대적 분위기는 소설에서 배경은커녕 아무런 내적 맥락도 획득하지 못한 채 그저 화자의 일방적인 진술에 의해 소설 속으로 끌려들어와 '처녀'와 '유'를 억압하는 요인으로 성토되고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집을 나가지 않고, 어머니는 '다른 곳의 생을 엿볼 기회가' 없는 관습적인 가족 관계라야 억압에서 해소되는가? 시위대와 최루탄가스가 없는 사회가, 있는 사회보다 덜 억압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주어진 삶의 조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은 섣불리 환경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처녀'와 '유'는 대단히 기질이 허약한 자기 본위의 젊은이들이며, 자신들이 세상의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그들이 겪었던 '좌절'과 '냉소'는, 현실에 참여하여 비판하지 않는 자의 전유물에 가깝다. 그래서 부유하는 이미지만 있을 뿐, 튼실한 맥락에 의해 규정받지 않는 이들의 사유 구조는 공연한 객기나 허위 의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특히 '유'는 아무리 뜯어봐도 유복한 부르주아의 자식에 지나지 않는데 그녀의 섬약하고 천박한 의식은, 전경들을 지나치다 그들이 땀방울을 국 속에 흘리며 식사하는 장면을 목격하고서 구토 증세를 느끼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자신과 같은 젊은이로서 불운한 세대를 포용할 줄 모르는 선병질적인 사람에게서 우울과 좌절을 보는 일은 드물지 않을 것이다. 특히 소설에서 가장 불쌍하게 된 사람은 '그 남자'로서 처음에 '처녀'가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투사했던 그는 '유'가 등장하면서 처녀의 '유'를 향한 욕망의 대리물이 되는 우스운 꼴로 전락한다. 필자로서는 '그 남자'를 '처녀'가 가진 두 개의 서로 이질적인 욕망을 투사한 존재로 만든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개인적 문제인 아버지의 부재와 시대적 억압이란 것이 소설 속에서 전혀 조화되지 않는 「딸기밭」은, 짙붉은 딸기가 눈에 띄지 않는 황량한 곳이다. 진정 으깨진 딸기처럼 뒤범벅된 것은 딸기밭에서 뒤엉킨 가엾은 여자들이 아니라 신경숙의 사유가 아닐지.
필자는 신경숙의 분신으로 보이는 '처녀'의 의식, 곧 정치 권력과 운동 진영의 대립을 자신에게 억압적인 상황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신경숙 글쓰기의 민중문학에 대한 거부감과 연관지어 생각해본다. '처녀'를 신경숙으로 바꿔 읽으면, 소설에서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80년대와 관련된 민중가요는, 자신의 문학이 이들에 대한 안티테제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자신의 문학적 환경이 그만큼 절박했음을 보여주려는 신경숙의 장치로 읽을 수 있다. 신경숙으로서는 가만히 있는 자신에게 세상이 가한다고 느낀 억압적 분위기를 견디려는 행위가 글쓰기로 나타났을 것이다. 게다가 금기를 위반하는 '처녀'의 행동은 신경숙이 자신의 불편한 심사를 소설 공간에서나마 일탈적으로 해소하려는 욕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김병익은 책의 해설에서, '처녀'와 '유' 두 사람의 동성애적 관능이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자폐적 성격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스스로에게 가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불안으로부터의 안도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상찬하고 있으나, 작가가 인물들에게 부여한 억압과 자폐의 근본 원인을 정당하게 인식하는 한에서만 타당한 해석일 뿐이다. 오히려 이 소설이 구체적인 형상화보다 화자의 일방적인 서술에 의존하는 일방통행식 담론에 치중하는 점으로 볼 때 진정 '타인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열린 글쓰기를 할 사람은 작가가 아닐까.
딸기밭에서 나온 후 '나'는 '금지된 것들'에는 가지 않는다. 금지된 욕망을 충족시켰어도 그것이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당연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딸기밭」은 인간이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평범한 현실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을 화자의 입으로 말하고 있다. 덧붙여 신경숙은 기억을 잊어가는 화자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글쓰기를 시킴으로써 '생의 불가능성'에 도전했던 청춘의 '슬픈 아름다움'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유'를 뜻하지 않은 사망으로 처리한 것도 이런 의도가 관철되고 있다. 그러나 욕망과 터부를 좇음으로써 현실에 반발했던 '나'와 '유', '그 남자'는 유치한 탐미주의자의 허세에 빠져 있기에 슬프거나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는 것을 어쩌랴. 일그러진 욕망으로 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이들은 몸으로 겪어 보고 나서야 깨달았을까. 신경숙이 이런 유아적인 인물들을 내세워 진정 의도하는 바는, 삶 자체가 모순투성이이며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과, 독자로 하여금 소설 공간에서나마 금기를 배반하는 짜릿함을 맛보게 함으로서 현실을 추수하며 살게끔 위안으로 작용하고 싶은 것이다.
소설집 딸기밭은 대부분 죽음이라는 극한적 모티브로써 상식과 통념의 스웨터를 짜 나간다. 그렇다고 무조건 운명을 감내하자거나 상식대로 살자는 말은 독자를 억압할 것이므로 신경숙은 금기를 어기거나 주어진대로 살지 않는 인물의 모습을 배치하여 독자의 숨통을 틔우려고도 한다. 그러나 관습을 따르지 않는 인물들은 궁극적으로 삶의 비극성을 증언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에 독자로 하여금 상식 너머의 세계를 꿈꾸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신경숙 글쓰기는 때로는 삶을 뒤틀고 싶은 불온한 욕망을 잠재우고 일상적 삶에 돌아오게 하는 순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신경숙이 입혀주는 스웨터는 따뜻하다. 독자는 춥다고 떨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진정한 작가라면 독자에게 스웨터를 입히지 않고 맨살로 추위에 맞서도록 단련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표절 논쟁은 왜 중단되었는가?
이제 표절 문제를 다룰 차례가 되었다. 필자는 표절 문제에 대해 그것이 작품의 의미구조와는 무관하지만 『딸기밭』에 수록된 소설들이 연루된 것이니까 이 자리에서 할 수 없이 언급한다는 식의 소극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다. 표절 문제는 작품 외부에 존재하지 않고 도리어 작가의 양식은 물론이고 작품 세계, 세계관 등과 떼어놓고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소설들은「딸기밭」과 「작별 인사」이다.
「딸기밭」 말미의 각주에는 본문 중 '유'의 어머니가 '나'에게 보낸 편지의 출처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소설이 처음 발표될 때는 이런 문구조차 없었다. 신경숙이 남의 글에서 멋있는 부분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따온 것이 문제가 생기자 책으로 낼 때야 밝힌 것이다. 사실 '유'의 어머니 편지에서 사회 참여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한 젊은이 '유'는 본래의 성격과 전혀 부합되지 않아 어색하기만 한데 그것이 본디 글주인의 창작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경숙은 비판이 일자 「딸기밭」에 나오는 가수의 노랫말이나 라디오 프로그램 멘트도 '출처 없이' 인용한 것이기에 그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소설에서 맥락이 달라져 원저자에게 누를 끼칠까 두려워서 굳이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또 '필요하다면 창작집을 낼 때 출처를 밝히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가 된 편지글은 노랫말 인용 수준과는 다르다. 노랫말에 빗대자면, 신경숙이 작가가 분명한 노래 가사를 조금 변형시켜 출처를 밝히거나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 글에 실은 것에 비할 수 있다. 이 때도 아무렇지 않은가? 그리고 '굳이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는 발언도, 따온 글의 출처를 밝히는 것이 인용자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의무임을 모르는 소치이다. 게다가 표절로 비판받아도 족한 일을 자신의 불찰 정도로만 인정하고, 창작집을 낼 때 출처만 밝히면 그것으로 문제가 무마되리라고 생각한 것 또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신경숙은 자기 입으로 『외딴방』을 연재할 당시 소설을 읽고 보내온 산업체 특별학교 교사의 편지를 본인의 허락 없이 다른 글에 그대로 가져다 쓴 적이 있다고 한 적이 있고, 『외딴방』에도 그 교사의 편지 한 통이 실려 있다. 비록 출판물이 아닌 사적인 편지라도 신경숙이 남의 글을 허락 없이 옮겨쓰는 것에 경계 의식이 없음은 여기서도 분명해 보인다.
「딸기밭」의 편지는 남의 문장을 무더기로 옮겨놓은 것이기에 신경숙으로서는 부주의만 인정하는 선일지라도 잘못은 부인할 도리가 없었으나, 「작별인사」의 경우에 그의 행보는 또 달랐다. 사실 「작별인사」의 표절 논쟁은 신경숙이 스스로 촉발시킨 거나 다름이 없었다. 박철화는 『작가세계』 99년 가을호에서, 성급한 예단일지 모른다는 점을 전제하고서 조심스럽게 「작별인사」가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표절이라는 말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돌았었다'라고만 언급했는데, 신경숙이 근거를 대라고 강력히 반발하면서 두 사람 간의 공방이 수면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박씨는 「작별인사」가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현대문학, 김춘미 옮김, 1994)을 표절한 근거로서 비슷한 문장, 잠언투의 표제, 서술 단락의 구조, 죽은 자가 화자로 나와 회고하는 구조, 삶과 죽음을 연결짓는 물의 이미지의 유사성을 제시한다. 이에 신경숙은 박씨가 제시한 것들은 마루야마 겐지를 알기 전부터 자신의 '문학 속 깊숙이 천착시켜온 점'이라고 반박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천착해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사실 두 작품의 '물'의 이미지만 비교해보아도, 신경숙 소설에서 독창적인 천착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물의 가족』에서 물은 생명의 잉태와 죽음의 환원 고리이자 금기를 위반한 화자가 죄를 씻는 공간으로서 주제와 맞물려 기능하지만, 「작별인사」에서 죽음을 나타내는 물의 이미지는 소설 구조와 유기적 연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소재의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작별인사」에서 출렁이는 물은 작품 고유의 질서에서 필연적으로 생성된 것으로 보기 힘들다. 죽은 이가 화자로 되어 회고하는 모티브도 그런 비판이 적용될 수 있다. 『물의 가족』에서 죽은 화자의 담담한 진술 태도는 죽음을 통한 화해와 구원을 다루는 작품의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반면 「작별인사」에서 뜻밖의 사고사를 당한 화자가 죽음을 달관하는 태도를 보이는 건 개연성이 크게 떨어진다. 화자는 젊은데다 죽음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인생을 새로 설계하려던 상황에 있었다. 이처럼 소설의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배태되지 않은 모티브는 소설 바깥에서 강제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죽음을 미화하려는 신경숙의 의도가 작용했다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 하필 죽은 사람을 서술자로 삼았으며 과거를 회상하게 하고 죽음에 친연한 태도를 가지도록 만들었느냐는 의문은 『물의 가족』을 연관시키지 않고는 설명하기 곤란한 점들이다. 남의 작품에서 모티브나 이미지를 베낀 경우 자기 글 속의 내적 맥락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경우를 모면할 수 없는데 「작별인사」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또 '물마루 기척이 심상치 않아'(작별 인사)와 '물기척이 심상치 않다'(물의 가족)라는 거의 동일한 문장을 살펴보자. 신경숙은 '기척'이라는 용어는 자기 소설에서 즐겨 쓰는 것이라는 말로써 자신을 방어하지만 우리말에서 '물기척'이니 '물마루 기척'이니 하는 말은 대단히 생소하다. 기척을 생명을 가진 존재에 국한시켜 쓰기 때문에 '인기척', '사람 기척'의 용어가 있는 정도이다.『물의 가족』의 저자는 '물'에게 약동하는 생명성을 부여했기에 '물기척'이란 표현이 자연스러울 수 있으나 「작별 인사」의 '물'은 생물적 의미와는 관련이 없으므로 신경숙이 『물의 가족』을 보지 않고서야 이런 표현을 쓸 리는 없다. 이상에서 신경숙은 자기 소설이 왜 하필 특정 작품과 많은 부분에서 겹치는지, 비슷한 모티브와 이미지가 자기 소설에서 육화되지 못하고 어슬픈 흉내에 그치는지 해명을 하지 못하는 한 어떤 반박도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신경숙 소설 중 표절 혐의의 도마에 오른 건 비단 「딸기밭」과 「작별 인사」 만이 아니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는 박철화에 의해 패트릭 모디아노, 최윤, 윤대녕과의 관련성이 언급된 바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95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에 실린 단편 「전설」은 명백히 일본의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학원사, 김후란 옮김, 1984)의 표절작이다. 일제 파시즘기 때 동료들의 친위쿠데타 모의에 빠진 한 장교가 대의를 위해 자결한다는 「우국」의 내용과, 한국전쟁 때 한 사내가 전쟁터에 자원입대하여 실종되는 「전설」은, 남편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때 남은 아내들의 선택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점에서 주요 모티브부터 유사하다. 「우국」의 아내는 남편 따라 죽는 데 일호의 주저도 없으며,「전설」의 여자는 남편의 실종 통보를 받고도 평생을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보낸다. 또 10여 개의 비슷하거나 거의 동일한 문구는 물론이고 남편의 죽음이나 참전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아내의 태도, 역순적 사건 구성, 서두에 역사적 배경을 언급한 전개 방식 등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나 영향 관계로 해석될 여지를 봉쇄해버린다. 신경숙이 어떤 연유로 군국주의를 한껏 미화한 소설의 인물들을 비판 없이 따왔는지 참으로 괴이쩍은데, 다분히 작가의 몰양식에 원인을 돌리기에는 의심스러운 바가 적지 않다. 어쩌면 이 점이 신경숙의 문학적 감수성과 군국주의자들의 미학과의 연관성을 살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줄지 모른다는 의구심까지 드는 것은, 두 소설의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반쯤 넋이 나간 듯한 인물들의 내면에서 작가 의식의 근친성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한편 표절 못지 않게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것은 신경숙과 문단의 대응 방식이다. 신경숙은 박철화를 겨냥하여 '위험천만한 단세포적 사고', '그리(표절했다고) 보자고 마음 먹은 사람' 운운하며 격한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다가, '거론할 의욕도 없'었지만 '독자에 대한 예의' 때문에 마지못해 응대했다는 말로써 입장 표명을 끝냈다. 신경숙은 자신의 태도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식의 대응으로 비치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아마 신경숙이 기대고 있던 독자는 자신을 키워준 문단과 언론일 것이다. 한 신문 지면에서 표절 공방이 외롭게 벌어지고 있는 동안 다른 신문들과 문단은 건너 마을 불 구경하듯 방관한 건 우리 문학계가 표절 행위에 얼마나 관대한지, 문화상품으로서 경쟁력을 갖춘 작가를 얼마나 배려하려고 애쓰는지 잘 보여준다. 신경숙이 정말 억울하게 되었다면 문단이 그녀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표절 시비를 가리는 데 나서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 '독자'까지 내세운 신경숙의 대응에, 박철화는 재반론을 준비했겠지만 어찌된 일인지 공방은 한 달을 채 끌지 못했다. 덕분에 신경숙은 '치명적인 상처'를 모면하면서 책을 낼 수 있었고, 책이 출간되자 그 신문도 『딸기밭』을 소개해 주는 성의(?)를 베풀었다. 그 기사의 작성자가 처음에 신경숙의 몰양식을 비판했던 기자와 동일한 이름으로 되어 있는 점은, 서로 사이가 나빠 좋을 것 없는 언론과 문인 간의 화해 작업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고 있다.
만약 신경숙이 견고한 작품 세계를 갖춘 작가라도 표절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을까? 또 문단이 실력보다 무늬가 큰 작가를 자기네 취향과 상품성을 고려하여 띄워 준 점이 과연 표절을 낳은 요인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신경숙은 개인의 이름에 그치지 않고 90년대 문단을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 작가가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데서 필자는 한국 문단의 허위성을 보고 있다. 문단이, 실력이 달리는 소설가에게 지나친 기대로 압박을 가하는 일을 멈추지 않거나, 표절 시비에 수수방관하는 직무유기를 보인다면 글도둑들은 계속 양산될 것이다.
'90년대 문학은 표절시비로 시작해서 표절시비로' 끝났다. 당대에 격찬받는 작가도 얼마든지 표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는 위태로운 자리에 서 있음을 보며 그의 문학 세계의 헐거움을 다시 생각해본다.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
신경숙의 글쓰기는 자신의 허약한 내면을 감당하지 못하고 상처를 내면화시킨 자아가 현실을 견디도록 길들이는 방편이다. 신경숙의 자아에 상처를 낸 존재가 80년대 상황이든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이든 상관 없이 그녀에게는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의 교호 작용으로 세계를 전망하지 않고, 주어진 운명을 견디는 개인주의 글쓰기에 자족하는 세계사적 개인이라는 근대적 자의식도 갖추지 못한 섬약한 자아에게 90년대 평단이 80년대 극복과 90년대 대안의 가능성을 기대한 것은 신경숙 개인의 비극으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신경숙이 표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도 허약한 그녀의 내면이 밟아갈 수순이었다. 80년대 문학이 거둔 성과도 계승할 줄 몰랐던 그녀는 전 시대를 극복하는 미학을 정립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80년대의 한계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런 점에서 80년대 문학의 극복 과제는 여전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역사적 전환기에서 세계사적 전망을 상실해 버린 평자들이, 고작 자신을 달래는 자기 만족의 글을 쓰는 작가에게서 얼마나 살아갈 희망을 얻었는지 의문이다. 한 꺼풀만 벗기면 적당히 독자를 달래고 현실을 추수하자는 상업성이 번뜩이는 신경숙을 포용한 문인들도 범상한 독자들과 진배없이 세상을 깊이 고민하려 하지 않고 살가움과 따뜻함을 덥석 받아들이는 범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우리 문학이, 현재 자신의 삶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지도 않는 화석화된 과거를 찾기 위해 '외딴방'에 들어가거나,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부르며 집을 나서는 인물을 좇을 필요가 있었는가? 문단이, 가만히 내버려두었으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자기 독백에 탐닉하고 있을 작가를 중심으로 불러내어 분에 넘치는 영예를 부여할수록 현실은 뒷걸음질쳤다. 신경숙의 포장된 여성성은 여성주의를 왜곡하는 데 거들었으며, 세상에 상처 입은 사람들은 신경숙의 위로에 그칠 뿐인 위로, 세상은 바꿀 수 없으니 감내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통념의 말을 듣는 데 그쳤다. 게다가 최근작에서 신경숙은 한층 더 통속화와 현실 추수의 일관된 방향으로 침윤되어 가고 있다.
...사랑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나 뜻대로 되지 않고, 영원히 사랑하려고 마음먹으나 그 또한 뜻 대로 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을 뿐. '작가의 말'에서
그러나 아무리 자신은 세상 살이에 자신감이 없을지언정 작가라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모습을 독자에게 내면화시키는 것을 임무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최근의 신경숙 소설은, 삶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의 극단인 죽음을 통념적으로 다룸으로써 삶의 치열성에서 더욱더 뒷걸음질쳐가고 있다. 현실과의 긴장 관계를 놓아버린 이완된 글쓰기는 독자로 하여금 세상살이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지도 않으며 배고파 우는 아이 사탕으로 달래는 식의 위로를 줄 수 있을 뿐이다.
지나간 시대의 문학을 극복하는 과제는 모든 문학사가 피해갈 수 없는 짐이다. 옛날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제 90년대도 새로 얹힌 짐이라는 것. 신경숙을 비평한 것은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시도해 본 것이다. 90년대 문학의 과오를 극복하지 않고는 문학은 독자들로부터의 외면을 더욱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경숙들의 가벼운 문학의 청산 문제도 논의되어야 하리라.
관련사이트 :http://www.jabo.co.kr/49th/49-injung.htm
[관련기사]
대자보 46호 [인정사정 볼것없다] 표절이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로다
대한매일 90년대 여성 작가 비판 고조( 9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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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16(15:03) from 210.98.197.138
작성자 : 정민기 조회수 : 43 , 줄수 : 21
신경숙님의 딸기밭의 또다른 표절 의혹증거
신경숙의 "딸기발"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잘 보시길 바랍니다.
@ 신경숙의 "딸기밭" 중 :
"너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사랑한다"고 그 남자는 말한다....(중략)....처녀는 그 남자를 쳐다본다. 자신을 안아보라고 한다. 창고 안으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하는 다정한 말이다. 남자는 떨고 있다. 처녀는 스스로 자신의 원피스를 벗어버린다. 손에 들려진 원피스를 흰 종이가 쌓여 있는 어두운 창고 바닥에 던져버린다. 그 남다의 떨고 잇는 손을 끌어다가 원피스 안에 입고 있던 의 면 속치마 끈에 대준다. 그 남자의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내린다. 그는 울고 있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있다....(중략)....처녀는 자신이 그남자를 갈망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라고.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누구나 하는 일일 뿐이라고. 남자는 눈물을 그치고, "나는 아무래도 못 하겠어." 고개를 떨군다. 처녀는 야전 침대에 무릎을 꿇고 그 남자의 옷을 벗긴다. 셔츠 속에서 드러나는 부드럽고 연한 속살. 그 남자의 얼굴선이 니자치게 접근 금지의 표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반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은 어린아이 같은 속살. 열일곱이란 나이로부터 성장이 멈춰버릴 듯한 야윈 몸이 생존 본능처럼 지닌 부드러움. 처녀는 그만 울어버린다....(중략)....아차하며 그들은 쾌락에 젖어든다. 몸에 돋은 가시는 서로의 몸 속으로 들어가 박힌다. 처녀는 자신이 하혈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제 몸의 가시를 남자의 피부 깊숙이 박고 있다. 피가 묻은 그 남자가 하혈을 닦아주며 처녀를 다시 끌어안는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중 :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차라리 당신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좋겠어요. 비록 당신이 저를 사랑하더라도 당신은 평소에 다른 여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저에게 그렇게 대해 주셨으면 해요. 그는 겁에 징린 사람처럼 그녀를 쳐다보며 묻는다. 당신이 원하는 게 고작 그거요?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는 그 방에서 최초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점에 관해서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결코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가 말하게 내버려둔다. 그녀는 자신도 잘 모르겠노라고 말하고 나서, 잠자코 그의 말을 듣는다.
그는 외롭다고 말한다.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사무치게 외롭다고. 그녀는 자신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라고 그에게 말한다. 당신은 어느 누구에게나 그러듯이 이곳까지 나를 따라왔군요. 그녀는 그건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며, 아직 누구의 방에까지 따라가 본 적은 없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말은 필요없고 그가 평소에 그의 방으로 끌어들인 뭇여자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행위를 해주기를 바란다고 그에게 말한다. 그녀는 제발 다른 사람한테 할 때처럼 해달라고 그에게 애원한다.
그는 원피스를 잡아뜯듯이 거칠게 벗겨내 팽개치고 나서, 흰색 면 속치마를 벗기고....(중략)....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어라는 짓이니까 내버려두라고 그에게 말한다.....(중략).....그의 살결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부드럽다. 몸뚱이. 몸은 말랐고, 근육도 없고, 힘도 없고, 마치 병자이거나 회복기의 환자 같다. 그는 몸에 털도 없고, 남근을 제하고는 남성다운 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몹시 허약해서 어떤 모욕을 당해도 병자처럼 당하고만 있을 것 같다....(중략)....그는 울면서 그 짓을 한다. 처음에는 통증뿐이다. 그리고나서 그 통증은 누그러들면서, 변하여, 천천히 뿌리 뽑히고, 쾌락으로 이어져서 그녀를 감싼다....(중략)...나는 피가 흐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내게 아프냐고 묻는다.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그는 피를 닦고, 나의 것도 닦아준다......
........잘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분위기와 모티프, 캐릭터가 거의(?) 흡사함을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즉, "연인"의 글을 상당부분 앞뒤 순서와 표현을 압축하여 도용한 것을 말입니다.
설마, 타자찍듯이 문장과 단어가 같지 않다고 표절이 아닐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가 있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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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16(11:28) from 152.99.5.9
작성자 : 카이 조회수 : 64 , 줄수 : 24
90년대 문학의 아킬레스건
신경숙이라는 작가는 90년대 한국 문학의 아킬레스건입니다.
출판사, 평론가, 작가가 담합해서 자본주의의 제단에 봉헌하는 동안, '
한국문학은 눅눅한 치즈조각처럼 연성화 되어 버렸습니다.
그 유명한 김병익 선생이 끊임없이, 마지막 순간까지 신경숙이라는 작가를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이 먼저 신경숙을 의심하기 시작했지요.
이제 신경숙이라는 코드는 그녀를 읽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울 정도가 되어 버렸어요.
표절을 얼버무리는 동안, 그녀의 다른 작품 전체가 의심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문단은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공한 쿠테타>도 <쿠테타>임은 분명하고,
<성공한 범죄>도 <범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신경숙씨는 용케 성공한 범죄입니다
그러나 더 어린 독자들의 비정한 스무살 독자들의 비정하고 냉정한 시선을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지금 신경숙씨는 2000년 내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네티즌들의 반응에
냉소를 보내고 있습니다.
작가들조차 <절대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국문학의 연성화>는 분명 가속화 되었고, 누군가 신경숙씨를 밟고
90년대를 지나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더러운 범죄를 공유한 죄의식을 가진 채, 21세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분노>만이 진정한 지성입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경숙씨 표절은 끔찍하게도 문단 내부에서는 알만한 사람은 몇 년 전부터 조심스럽게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 방조했습니다.
출판사., 평론가. 모두들 <상업적으로 실패하지 않는 작가>에 대한 예우를 했습니다. 결국 무지한 독자도 한 몫 한 겁니다.
예술 작품의 표절은 문장이나 기법이 아니라, <모티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경숙씨가 표절 의심을 받는 작품이 물경 여섯 작품이 넘고 있습니다. 문장 자체를 베낀 작품도 있구여.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작가를 옹호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군여.
신경숙씨의 지성은 이미 포기했지만. ...
창작의 표절은 모티프입니다.
신경숙씨가 표절 혐의를 받고 있는 작품을 일단 정리해보죠.
1. 전설 : 우국 <스토리라인 같음. 문장 베낌>
2. 기차는 7시에 떠나네 : 패트릭 모디아노 <모티프베낌 . 문장. 상황베낌 캐릭터 베낌. >
3. 딸기밭 : 남의 편지글 도용
4. 작별인사.: 미루야마겐지 <문장아예 거의 같이 베낌 .물 이미지 도용>
5. 베드민턴 치는 여자 : 프랑스 여자 작가 스토리 라인 베낌 뒷부분
6. 외딴 방 : 남의 편지글 도용
그리고 남의 방송 멘트 듣고 베낌
이런 상황에서 이상문학상을 받았고, 작가 문단 독자 모두 어물쩡 넘어라려고 합니다.
그러나 표절은 범죄 행위이며, 문화에대한 테러입니다.
표절로 더렵혀진 문단은 청년 작가 천명의 순결한 모국어가 있어야 정화됩니다.
신경숙씨의 표절을 지지하시는 분은 인터넷을 뒤져서 그녀의 표절 자료를 일단 확인 하십시요.
신경숙의 "겨울우화"(고려원 간행)란 소설집에 실린 단편 '외딴방'을 읽었습니다.슬픈 내용이더군요.문득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연상되었습니다.모두가 이 땅에서 소외된 삶을 사는 슬프고 처절한 내용들이지요.그런데도 불구하고 뭔가 느낌이 달라요.그 느낌은 그 작품들을 쓴 작가들의 작가의식과 현실인식의 차이만큼이나 다를 겁니다.
외딴방은 현상적 사건을 보여준데 그치고 말았지요.그런 슬픔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과연 작가적 능력으로 볼 수 있을까요.독자에 대한 배려랄까?아니면 작가의 주제의식의 전달방식의 한 방법으로서 현상적 사건의 나열만 보여준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싶지만,그렇지 않고 작가의 현실인식과 주제의식의 얕음으로 야기된 전망의 부재와 문제해결 방법의 미제시라면 이것은 미숙한 작품으로 판정되겠지요.신경숙의 초기작이라서 그녀의 세상읽기의 초보적 모습을 많이 보여주며 또 그렇기에 그만큼 그녀의 순수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작가의 현실과 역사와 민중의식이랄까 하는 주제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아마 이것은 신경숙 그녀의 순한 마음에서 기인될 수도 있겠지만,작가로서는 좀 떨어지는 작가적 자세로 보여집니다.
슬픔이 있다면 그 원인이 있을 것이며,그 원인과 해결방법을 곧이 곧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건으로 엮어 독자로 하여금 그 비극의 원인 제공자와 문제 해결방법에 대한 최소한의 암시라도 제시해주어야 되는데,'외딴방'이란 단편에서는 그것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정해진 메시지의 나열이 소설쓰기의 전형은 아니지만,좋은 작품을 읽고 난 뒤의 독자들의 정신의 고양 내지는 세상인식의 눈높이를 한 차원 높여주는 것이 좋은 작품이 아닐까요?과연 신경숙은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방식으로 세상읽기를 주문하고 있을까요?과연 그런 메시지의 전달이 없이 예술작품으로서 존립할 수 있을까요?
그 이후의 신경숙의 작품들의 경향은 더욱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초기의 문학의 순수성이랄까 하는 것으로 그나마 읽히던 그녀의 작품성은 아마 급격하게 그 순수성을 잃어버리고,상업주의적 감상성에 매몰되는 것은 아닌가?그런 생각이 듭니다.현대문학상 수상작을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그때의 경험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아마도 작가 신경숙의 자전적 삶이 소설의 내용처럼 그렇게 어둠의 터널을 지나왔다면,아마 그녀의 어둠에 대한 컴플렉스가 대단할 것이란 추정을 해봅니다.그 어둠의 컴플렉스는 일종의 가난과 남성과 가부장적 컴플렉스의 복합체로 일종의 피해의식의 기층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또한 이러한 컴플렉스의 반동작용으로 그러한 컴플렉스의 반대편으로의 투항내지는 귀속본능이 싹트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그것은 또한 강렬한 '신데렐라컴플렉스'와도 연결되지 않을까요?
하여튼 나는 신경숙이란 작가가 상업주의적 작가라고 규정내립니다.대중성과 상업성이 절대적으로 잘못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그녀도 이 자본주의 시대를 살며,그 모순을 느끼며 유년기와 청년기의 고뇌의 과정이 있었겠지요.그렇지만 작가로서의 더 큰 고뇌와 그 극복을 위한 자세와 방법을 갖지 못하고,너무 순순하게 자본주의의 공세에 투항한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그런 과정에서 불거진 것이 또한 그녀와 관련된 일련의 표절사건으로 보입니다.더욱 고뇌하는 작가적 자세를 지녔다면 아마 그런 표절사건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작가적 미숙함으로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더군다나 그녀가 데뷔초창기의 신인작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그 많은 대한민국의 유수한 문학상을 휩쓴 그녀가 표절사건에 연루되어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과대포장되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혐의가 아주 짙다는 것입니다.물론 그 과대포장의 상업적 이데올로기성을 생산해낸 사람들은 그녀 주변의 비평객들이었겠지요.
아마 모르긴 하여도 이 게시판의 손님들은 분별자님도 그 비평객들 중의 하나로 혐의를 두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좀더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그녀의 작품을 분석할 수 있었으면,하는 마음이 있지만 요정도만 하렵니다.개인적으로 신경숙이란 작가가 참 안됐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어릴 적의 어두운 체험적 기억은 어두운 의식을 형성하며,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경험으로 알고 있는 나이기에 개인적인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는 싫습니다.그러나 그녀가 이 땅의 소설문학상을 독식하는 이런 처사와 형국은 마땅하지도 않고 또한 마뜩찮습니다.뭐라뭐라 하여도 요 정도가 한국소설문학의 수준이려니 생각하면 아쉽기만 합니다.그렇지만 또 어디선가 신경숙 만큼의 아픔과 어두운 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또한 그가 살고 있는 삶의 환경적 조건이 어둠뿐이라도 그것을 치열하게 극복하며,그 과정을 소설적 경험을 쌓는 젊고 패기있는 문학지망생들도 많으리라 생각하면 그나마 위안이 되겠지요.
이글이 괜히 길어졌습니다.이글을 읽으면서 많이 미숙하고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하십시오.제 소설읽기의 능력이 그만큼밖에 되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신경숙 그녀도 그러고 싶어서 그렇겠습니까?아마 누구보다도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가장 잘 알고 절망하고 있는 이가 그녀가 아니겠는지요?그녀가 좀 더 넓고,깊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극복의 방법을 암시하는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그녀는 배척되고 말까요?그녀의 문학적 재능은 그정도밖에 되지 않을까요?문학적인 모든 성취는 작품을 쓰는 그 사람에게서 절대적으로 좌우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작품을 둘러싼 비평가들의 알랑방귀(오류성발언)는 흘려들어야 되겠지요.물론 제 말도 포함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신경숙의 건강한 작품들을 기대하면서,되지 않는 말 이만 줄입니다.그럼.
2001.3.16 나정욱
p.s:신경숙 소설기법의 장점은 자연스런 언어적 진술로 보입니다.(이문열의 경우는 더욱 심함)그것이 워낙 강력한 장점으로 작용하여 주제의식의 치열성 부족과 캐릭터의 약함과 그리고 주인공들의 패배적 의식 등등을 상쇄하는 듯 보입니다.특히,'희재언니'로 상징되는 민중들의 소극적이며 패배적 삶의 제시가 이 시대의 민중들의 삶의 조건의 극복과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혹 그러한 한(피해의식) 많은 사람들의 현실 극복 방법이란 것이 감정적 차원의 극단적 방법으로 나온다면 그것은 현실 문제해결을 더욱 꼬이게 만들고 말 것입니다.(적들은 항상 그것도 하나의 심리적 전술의 한 방법으로 쓰는 것 같아요.)부디 작가 신경숙이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보다도 더욱 냉정하고 엄혹한 이성적 자세와 의지로써 현실을 직시하며,작가적 역량으로 당신의 어릴 적 어두운 체험과 그로 인한 피해의식을 극복하여 그녀의 작품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그것이 이 땅에서 작가가 존재할 수 있는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위 글에서 작품의 구체적 내용과 장면 하나하나를 제시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얘기한 점 이해바랍니다. 이만.
차 한대 팔아봐야 얼마 남지도 않는대요. 평론가들이 지금 무슨생각을 하는지 알순없지만 신경숙이라는 잘써먹은 상품에 흠집내기는 쉽지 않겠지요. 그러느니 신차가 나올때마다 치장이나하고 거품물고 늘어놓는게 좋겠지요. 세월이 남으니 그때 내가 운전한 그차는 지금 어디있나 누군가는 궁금해하겠지요.
평론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라고 생각해요. 썩은 눈으로 무덤파기.. 흐흐 누가 나설까요.....90년대엔 그에맞는 문학이 있듯 새로운세기엔 거기에 맞는 문학이 있겠지요. 그런데 암만해도 님의 표절의 여왕은 너무한것 같네요. 여왕이 그렇게 못생겼다면 세상이 이지경까지는 되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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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15(13:02) from 211.106.217.151
작성자 : 도우미 조회수 : 110 , 줄수 : 59
저 아래서 퍼왔습니다. 신경숙씨가 표절한 증거
작성자 : 안티표절 조회수 : 286 , 줄수 : 58
신경숙, 그리고 한국문학에서의 표절시비
작가가 앞선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있고 당연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한 작가가 진짜로 작가가 되기 위해서 바로 그 영향을 딛고 독자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신경숙의 변명은, 그녀가 저지르는 명백한 베끼기 행위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건대, 야비한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못합니다.
선배의 영향을 입었으되 거기서 한발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진짜 작가와, 남의 문장을 교묘하게 가져다 적당히 섞어서 쓰는 표절과 어떻게 비교를 합니까?
윤춘택씨, 사건을 뒤섞으셨습니다.
이승하씨가 쓴 글을 읽으셨는지요?
여기 문제의 두 소설이 있습니다. 앞의 것은 일본적가의 소설이고, 뒤의 것은 신경숙의 소설입니다.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워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주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레이코의 몸은 희고 엄숙했으며, 팽팽한 젖무덤은 사뭇 강하게 거부하는 순결함을 보이면서도 일단 받아들인 후에는 그것은 마치 자리 속 같은 따사로움을 담고 있었다.
----[憂國] 부분(김후란 번역)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로,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고,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어 있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으며,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었다. 여자가 노래를 택하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이.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전설] 부분
이승하씨는 슬쩍, 이 정도를 가지고는 표절이라고 할 수 없다고 몸을 뺍니다만, 이미 독자들은 느꼈지요. 아, 이것은 도둑질이라는 것을.
막연히 한국문학은 외국문학의 영향을 받고 시작했으므로 표절 아닌 것이 없다라는 식의 얼렁뚱땅으로 덮어둘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문학하는 사람들, 부끄러움을 아십시오.
윤춘택씨 당신도 신경숙처럼 남의 문장을 가져다가 저런 식으로 적당히 문질러서 소설을 쓰셨습니까? 그래서 신경숙의 말에 동의하는 겁니까?
저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 모티브나 충격을 주는 주제, 사상 들을 영향받았다는 의미일 거라고 믿습니다. 신경숙처럼 남의 문장을 훔쳐다 쓰는 게 문단 관행일리가 없습니다.
분별자 wrote:
> 이미자씨, 신경숙씨의 표절은 입증된 바 없고 다만 혐의만 제기되었을 뿐입니다. 정문순씨가 <<문예중앙>> 2000년 가을호에서 신경숙씨의 표절사실을 밝혔다고 주장하고, 여러 식자들이 나서서 그런 사실이 마치 입증된 것처럼 비난의 글을 써댔지만, 제가 정문순씨의 글을 검토한 바로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정문순씨 글에서 명백히 밝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문순씨가 신경숙씨의 작품을 표절로 낙인찍고 싶어하는 강한 의지와 열망이었어요. 이에 대한 제 의견은 이곳 게시판에 "신경숙씨의 <딸기밭>과 표절시비"(3월 7일자)로 올려놓았으니 참조하세요.
>
> 신경숙씨의 표절을 주장하려면 먼저 꼼꼼한 사실확인과 적절하고 타당한 논거를 제시하십시오. 그리고 창작에서 '표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범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숙고하실 것도 권합니다.
>
>
>
> 이미자 wrote:
> >
> > 표절의 여왕 신경숙이 17일 오후 2시 영풍문고에서 팬사인회를 갖는데요 글쎄...
문학상과 비평가의 효력 - 과연 신경숙의 소설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
포에지님과 분별자님의 글을 읽다보면 그녀의 소설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은근히 나의 의식을 부채질하여 그녀의 소설을 구독하도록 추동한다.
그 보이지 않는 은근한 권유(권위)적 힘을 갖고 있는 것이 문학상 수상작이며,또한 그 작품에 대한 화려한 주목과 그에 대한 비평적 행위일 것이다.(거품만 아니라면 그 긍정적 효과를 높이 살만하다)
과연 그녀의 작품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두 끼니 정도의 밥과 국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인간이 밥만으로 살 수 없다지만,신경숙의 밥을 만들어주는 그 작품은 과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두 끼니 정도의 밥을 굶기를 독자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정당한 내용과 주제와 소설적 구성을 갖고 있는가?과연 그렇긴 한가?
포에지님과 분별자님이 자신있게 자신의 심정을 피력한다면,나는 하루를 굶고서라도 그 책을 사 볼 용의는 있다.그러나 각종의 문학상(특히,민음사의 '오늘의 작가상')에 속아 기왕에 사 본 책들이 쓰레기더미처럼 내 방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면,신경숙의 이상문학상 수상집이 또 그런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면,
신경숙의 소설을 읽고서,
나는 또 우리나라 소설과 소설상과 비평가와 출판사에 절망할 것이다.그것이 두려워 아직도 나는 신경숙의 소설책을 사기를 보류하고 있는 것이다.앞전의 이인화의 '초원의 별'을 보류한 것은 잘한 결정으로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거품같은 비평적 언어 속에서 떠오르는 돌같은 내용과 주제를 과연 신경숙의 작품은 갖추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