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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안씨 여경화 이야기(餘慶花說書竹山安氏宗案後)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지음 19代孫(죽산24세) 안동교(安東敎) 옮김
대개 사람은 감정을 지니지만, 오직 사물은 사심이 없다. 감정을 지니면 사욕에 쉽게 막히고 사심이 없으면 그 천성을 온전히 나타낼 수 있으니, 바로 나무와 풀은 사심이 없는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가끔 기이한 나무와 풀이 하늘의 조화인 듯 신통함을 발하여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데, 나는 만수동(萬壽洞)에 있는 안씨 선조의 묘소에서 그런 특이한 꽃을 발견했다. 그 꽃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안씨의 시조 죽성군(竹城君)의 휘는 원형(元衡)이요, 그의 현손인 직장공(直長公)의 휘는 여주(汝舟)였는데 관산(冠山)에 살던 좌랑(佐郞) 조수(曺璲)의 사위가 되었다가 세상을 떠나자, 금장(金藏)의 동쪽 용두산(龍頭山) 남쪽에 묻혔으니 이곳이 곧 만수동이다. 직장공은 지금의 후손들에게 12대조가 되니, 번성한 자손들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은 장흥, 보성(옛지명은 山陽), 강진(옛지명은 金陵)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보성파는 또 한양에서 나뉘어 살고 있다.
매해 초겨울에 안씨는 종족들을 모아 만수동 묘소에서 세일제(歲一祭:또는 時享)를 지내왔다. 묘소의 섬돌에 옛부터 두견화(杜鵑花:진달래) 두어 떨기가 있었는데 제사드리는 날에 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꽃을 피우면 안씨문중에는 반드시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오고, 만약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반드시 승진하는 사람이 나오니 그 또한 신기롭고 괴이하다.
이 꽃을 보면 돌틈에 박힌 묵은 뿌리에서 나온 쇠잔한 몇 떨기가, 움이 틀 때 더부룩하지 않지만 살펴보면 말라죽지 않고 서리를 맞으면서도 꽃망울을 터뜨리니, 이것이 안씨에게 상서로운 경사를 나타내는 조짐이다. 직장공을 장사지낸 지 어언 300여년에 꽃이 피면 반드시 증험이 나타남이 부절(符節)을 맞춘 듯하다. 또 묘소를 산지기가 이미 가을에 벌초하고 풀베는 아낙네와 나무하는 아이들이 끊임없이 왕래하건만, 한 두 신령스런 꽃망울이 반드시 제사드리는 날에 이르러 안씨자손들의 눈에 이채로운 자태를 드러내니, 이것이 앞에서 말한 하늘의 조화인 듯 신통함을 발하여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사람들은 십세(十世)가 넘은 친족간이면, 상복을 입는 예도 두번이나 다했고, 사는 곳이 또 달라 좋은 일이나 슬픈 일에 서로 관여하지 않음이 또한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처럼 대할 뿐이다. 그러나 이 꽃은 애당초 한 부모의 몸에서 생겨나와 상서로운 징조와 증험을 나타내되 친소(親疎:친근함과 소원함)의 틈을 두지 않으니, 관산에서도 반드시 감응(感應)하고 보성과 한양에서도 반드시 감응하고 강진에서도 반드시 감응하여 10世를 하루처럼 여기고 많은 자손을 한몸처럼 여기니, 이 어찌 사물이 그 천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사물의 무심(無心)은 반드시 감정을 지닌 사람이 감동한 뒤 응하나니, 안씨 가운데 문무(文武)에 현달한 사람은 관산에 몇사람이요 보성과 한양에 몇사람이요 강진에 몇사람이다. 이 꽃이 필 때에는 비록 백리나 천리를 떨어져 있더라도 반드시 증험이 있으니 이것은 안씨가 소원하다고 해서 서로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미약한 후손이라 하더라도 또한 증험을 나타내는 것은 안씨가 강약으로 서로에게 해를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안씨의 화목과 우의가 사욕에 막히지 않고 그 천성을 온전히 나타냄이 사물에 앞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꽃을 보면 곧 안씨를 알 수 있다.
내가 듣건대 안씨가 여러 군에 흩어져 사는 종족을 모아 그 이름을 장부로 만들어 「종안(宗案)」이라 하고, 유사(有司)를 정해 제사에 올릴 희생과 곡식같은 제수(祭需)를 관장케 하며, 제사지내는 날에는 여러 군의 후손이 모두 모여 들어 제사를 드리고 음복을 한 후 반드시 이 꽃이 탈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핀다. 끝으로 진지한 우의를 펴고 돈독한 정화(情話)를 나눔이 잘 어우러졌으니, 장차 이로써 「안씨화수회(安氏花樹會)」라 불러도 또한 좋을 것이다.
무자년(1768년) 동짓달[仲冬]에 안택문(安宅門, 1727~1770)씨가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금년에 꽃이 또 피었다.” 하고, 또 “이 달 보름경에 종족을 모아 「종안」을 다시 수정하려 한다.” 하니,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안씨의 종손이 아닌가? 안씨는 직장공으로부터 그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12대이니, 종손이나 지손에게 모두 경사스런 일이네. 비로소 이 꽃이 세덕(世德)의 영화(英華)요 적선(積善)의 부채(符彩)임을 믿게 되었으니, 감히 이 꽃을 ‘여경화(餘慶花)’라 이름붙이길 청하네.”
그런데 선비 집안에서는 문과, 무과에 급제하는 것을 가문과 종족을 빛내는데(名家偉族) 또한 근본으로 보지 않는다. 이 꽃은 태천공(泰川公, 죽산10세 안언룡)의 큰 도량과 깊은 지식, 동애공(桐厓公, 죽산10세 안중묵)의 힘써 닦은 탁월한 몸가짐, 우산공(牛山公, 죽산11세 안방준)의 독실한 학문과 의병활동에서 더욱 이채로움을 드러냈다. 나는 장로(長老)들이 일찍이 무어라 말했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다시 이채로운 모습을 나타냈다면 안씨의 흥성함은 가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아! 이로부터 세대가 더욱 멀어지되 화목함을 더욱 돈독히 해나간다면, 아마도 ‘선조를 공경하는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이고(桑梓無改), 묘소 주위의 나무가 끼친 음덕(松 遺蔭)’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안씨의 자형화(紫荊花: 옛날 중국의 田 眞 3형제가 재산을 나눌 때 자형화도 삼분하기로 하자 이 꽃이 말라죽었다는 故事, 형제간의 화목을 말함)는 영원히 말라죽지 않으리라.
이어서 이 꽃을 노래한다.
만수동에 두견화 萬壽之花 흐드러지게 피었구나. 鄂不韡韡 후손들의 무궁한 번창은 本支百世 바로 조상 덕의 증험이네. 維德之符
안택문(安宅門, 1727~1770) : 죽산안씨 17세 장흥파 종손 字士由 號竹隱 生英祖丁未三月十六日 築精舍 講學以文行德義爲士友之師表 卒英祖庚寅四月二十日 配海南尹氏 父僉正世岳祖漸曾祖虎翊判書耕后 忌十月十五日 墓夫山面雲峙丙坐合窆 자는 사유(士由), 호는 죽은(竹隱)으로 영조 정미년(1727) 3월 16일에 태어나서, 정사(精舍)를 마련하여 학문을 닦고 연구하니 문행(文行)과 덕의(德義)로써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영조 경인년(1770) 4월 20일에 졸했다. 배위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부는 첨정 윤세악(尹世岳), 조는 윤점(尹漸), 증조는 윤호익(尹虎翊)으로 판서 윤경(尹耕)의 후손으로 기일은 10월 15일이다. 묘소는 장흥 부산면 운치 병좌에 합폄했다.
존재집[存齋集] ; 조선 후기 실학자 위백규(魏伯珪)의 시문집. 1796년(정조 20) 정조의 명으로 내각(內閣)에 올렸던 저자의 자편고 24권이 없어진 뒤, 후손 병석(炳錫)·영복(榮馥) 등이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바탕으로 재편하고 임헌회(任憲晦)의 교정을 받아 1875년(고종 12)에 간행하였다. 위백규(1727∼1798)는 본관이 장흥(長興),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계항(桂巷)이다. 천문(天文)·지리 ·율력(律曆)·복서(卜筮)·산수 등에 통달하였다. 정조 때 옥과현감(玉果縣監)과 경기전령(慶基殿令)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윤봉구(尹鳳九)의 문인이다. 권두에 임헌회의 서문이 있고, 권1에 시 233수, 권2에 《만언봉사(萬言封事)》, 권3에 소(疏), 권4에 장(狀)·서(書), 권 5∼10에 독서차의(讀書箚義), 권 11∼20에 잡저, 권 21에 서(序)·기(記)·발, 권22에 명(銘)·잠(箴)·제문·축문·비명·묘갈·묘표(墓表), 권23에 묘지(墓誌)·행장· 유사(遺事)·전(傳) 등이 전한다. 권24는 부록으로 저자의 연보·행장·묘갈명과 《위유사계목(慰諭使啓目)》《수계별단(繡啓別單)》《이조계(吏曹啓)》 등이 실려 있다. 권23·24는 결본(缺本)이다. 그 가운데 권3의 《대황사간봉사》는 학교·문벌·과거(科擧)·군현(郡縣)·관직·노비·군제·조운·호장(戶帳)·정뢰(情賂)·봉수(烽燧)·성곽·금도(禁盜)·군역(軍役)·공물·도량형 등의 폐단을 지적한 글이고, 권17의 《기해의례변(己亥議禮辨)》과 《절휴변》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옹호한 글이다. 규장각·국립중앙도서관 등지에 소장되어 있다.
임진왜란 전후로 해서 무반으로 유명했던 장흥위씨 집안과 장흥에 살았던 좌랑공 구파(6세 안구) 중에서도 봉사공파(죽산11세 안극인)와 해남파(11세 안극의)는 3대에 걸쳐 양쪽 집안은 약5번의 혼인을 하게 됩니다. 장흥위씨 사위와 죽산안씨 딸들의 결혼만 해서 말입니다. 역으로 장흥위씨 집안 따님들 중에서 죽안안씨 집안으로 약3분 정도가 시집을 오게됩니다.
죽산안씨 따님들이 시집가신 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장흥위씨 유명한 분들을 열거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인연으로 쓰게된 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선 초 한성참군을 지낸 위종복(魏宗復)에게는 위유형(魏由亨) · 위유정(魏由貞) 두 아들이 있었는데, 유형의 자손들은 주로 관산 일대에서 살아 '관산파'라 하고 유정의 자손들은 주로 장흥읍 행원에서 살아 '행원파'라 부르면서 세칭 관산파와 행원파의 두 파로 갈린다.
관산파인 위유형의 증손 위덕원(魏德元.21세.1549∼1616)은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싸워 큰 공을 세웠으며, 위덕의(魏德毅.21세.1540∼1613)와 위덕화(魏德和.1551∼1598)는 한 형제로 피난길에 오른 선종를 호종하며 전란을 치러 공신이 되었으며, 그들의 현손인 정훈(廷勳1578∼1662), 정철(廷喆.1583∼1657), 정오(廷嗚1589∼1640) 등은 선대의 뜻을 받들어 병자호란 때 참전, 공을 세우며 충의 가문의 전통을 잇는다. 조선조에 위씨 집안을 빛낸 가장 큰 인물로 최근 학계로부터 새롭게 평가를 받기 시작한 호남실학의 거목 위백규(魏伯珪.1727∼1798)도 이 집안출신이다..
관산파의 대표적 인물이 존재(存齋)라면, 속칭 '행원파'인 유정의 집안에서는 입향조 유정의 손자인 대용(大用.21세.1530∼1610)과 대기(大器..21세.1559∼?)를 꼽을 수 있다. 명조 10년에 사마시 무과에 합격한 대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김천익(金千益)을 도와 호남모곡도유사로 군량미조달에 큰 공을 세웠고, 대기는 가리포 첨사로 있던 중 임란을 맞아 해남현감으로 충무공 휘하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율포·옥포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그들로부터 홍면비장군(紅面飛將軍)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용장이었다. 위대기는 전쟁이 끝난 후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제수받았다. 이 집안의 대경(大經.1555∼1597)·순정(舜廷)등도 임란 공신들이다.
장흥위씨 21세 판서공(判書公) 위덕화(魏德和)
- 부인 죽산안씨(죽산12세)는 11세 안극인(安克仁)의 1남1녀 중 따님 공의 휘는 덕화(德和; 21世 1551 ~ 1598, 進士 鯤의 子, 參奉 晉賢의 孫子 지장록p924)다. 선조(宣祖) 1583년(乙酉) 무과(武科)에 급제, 원(院)과 부(府)에서 근무했다. 9년 후 임란(壬亂)이 일어나 서울이 왜군(倭軍)에 의해 함락되자 임금을 호종(扈從), 밤에 송도(松都)에 이르렀다. 피난행렬이 민가에 머물었으나 먹을 것이 없자 공이 촌부(村婦)들에게 서숙 밥을 얻어다 임금에게 바치니 선조는 그 밥을 먹으며 팔진미(八珍味)보다 낫다고 하였다. 피난행렬이 송도를 떠나 의주(義州)에 이를 때 장흥에서 3천리를 걸어서 올라온 중형 청계공(聽溪公)과 극적으로 해후(邂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선조와 좌의정(左議政)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우의정(右議政)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 등 조정관리들이 감격하였다. 공은 1593년(癸巳) 참상(參上)으로 승진, 궁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왜군의 괴수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와 가또기 요마사(加藤淸正) 등이 각 포구를 장악, 불안이 그치지 않자 왕에게 나가 싸우기를 자청했다. 왕은 공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언양현감(彦陽縣監)을 제수하니 당일로 부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공이 1596년 내직인 군자훈련정(軍資訓練正)으로 전근할 때 이순신 장군(李舜臣 將軍)의 체포 소식을 듣고 크게 탄식했다. 그 후 1598년(戊戌) 신병 때문에 귀향해 요양하다 생을 마쳤다. 공이 타계한 후 조정에서는 선조호종원종훈(宣祖扈從原從勳)과 아들 정철(廷喆)의 정사진무훈(靖社振武勳)을 감안,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추증(追贈)했다.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됐다. 우리 족보에 슬하에 아들 2명이 올라있는데 1남 위정철(魏廷喆) 2남 위정혁(魏廷赫) 두 아드님이 있습니다.
장흥위씨 22세 방어사공(防御使公) 위정철(魏廷喆)
공의 휘는 정철(廷喆, 22世,判書 德和의 子)이며, 호는 만회재(晩悔齋)다. 21세에 무과(武科)에 합격해서 광해(光海 )1610년(庚戌) 선천(宣薦)으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감찰(監察)로 승진, 함평현감(咸平縣監)을 역임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정사훈(靖社勳)에 록되고, 갑자란(甲子亂)에 다시 진무(振武) 일등훈에 록되었다. 인조(仁祖) 1627년(丁卯) 청(淸)의 침범과 명(明)의 가도(柯島) 응거 등으로 국토의 서변(西邊)이 근심스러운데 영유도(永柔島) 원님까지 공석이었다. 조정에서는 영유도와 가도의 사태 해결에 적당한 인물을 고르던 중 공을 발탁, 원님으로 임명하니 단기(單騎)로 부임했다. 공은 가도로 들어가 명의 관리들을 상대로 설득했다. 그러자 명군(明軍)의 책임자인 모장군(毛將軍)의 이해를 얻어 나라의 근심을 해소하는데 기여했다. 그뿐 아니다. 조선은 사신(使臣)을 청(淸)에 보내 예물(禮物)을 바치며 사이좋게 지내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청은 명나라에 식량을 공급했다는 이유로 예물을 물리치는 한편 통신사 박란영(朴蘭英)을 돌려보내고 수행한 군관(軍官)을 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당황한 조정은 공에게 병조참판(兵曹參判)의 임시 직책을 주어 수도 심양으로 파견했다. 공은 악화일로(惡化一路)의 양국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최후의 카드로 낙점된 인물이다. 청의 우두머리인 한(汗)은 공을 보자 “조선이 명나라에 양식을 지원, 자신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핍박했다. 그럼에도 공은 차분히 그를 설득, 조선의 요구를 관철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외교적 임무를 마친 후 공은 서북 양도순찰사(西北 兩道 巡察使)로 임명됐다. 그는 서영을 개설하고 군무를 경리하며 병제(兵制)를 개혁했다. 그 때 조정은 공을 길주(吉州)책임자로 임명했으나 부임 전에 영흥부사(永興府使) 겸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했다. 그 때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기 전인 1636年(仁祖ㆍ丙子) 봄이었다. 공은 부임하자 흐트러진 군기를 잡아갔다. 청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병졸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수리했다. 그러고 있는데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청의 오랑캐가 일만여명의 기병(騎兵)을 앞세우며 양덕(陽德) 국경선 북로(北路)를 따라 쳐들어 왔다. 상황은 위급했다. 공과 남병사(南兵使) 서우갑(徐佑甲)은 우선 합동으로 군사를 주둔하며 대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전술은 너무 달랐다. 공은 아군의 중과부적(衆寡不敵)을 이유로 산(山)을 배경삼아 진을 치자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서병사는 오랑캐를 업신여기며 평원(平原)에 치자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공의 군대는 산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서병사의 군대는 평원에 진을 쳤다. 마침내 철갑으로 무장한 오랑캐의 기마병들은 평원에 있는 조선 보병(步兵)을 가볍게 박살냈다. 오랑캐의 기마병은 이어 공의 진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산의 지형을 배경 삼아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평원과는 사정이 달랐다. 산 위에서 아래로 돌을 굴리니 오랑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말이 달릴 수 없으니 돌에 치어 태반이 죽는 공방전이 수일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났다. 어느 날 오랑캐 병사가 와서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인조왕이 청의 요구대로 항복한 것이다. 공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분을 못 이겨 통곡하며 군사를 해산하고 영흥으로 귀환했다. 그 때 공은 이미 귀향을 결심하고 있었다. 조정은 호란(胡亂)이 끝난 지 8년 후인 인조(仁祖) 1644년(甲申) 공을 숙산(肅山)ㆍ갑산(甲山)ㆍ만포진(滿浦陳)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양하고 고향 관산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졸 후 죽천사에 배향됐다.
장흥위씨 22세 웅천현감공(熊川縣監公) 위정열(魏廷烈)
- 부인 죽산안씨(죽산13세)는 죽산11세 안극례(安克禮) -> 12세 안호민(安皥民)의 2남2녀 중 큰 따님 공의 휘는 정렬(廷烈, 22世 1580 ~ 1656, 判官 德厚의 子 지장록 p123)이다. 24세에 무과에 급제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27年 정묘란(丁卯亂) 때 백형 정훈(廷勳) 등 형제들과 의병과 군량을 모아 호소사(號召使) 오리(梧里) 이정승(李政丞)의 격문에 응해 체부군관(體府軍官)으로 일하다 난리 후 귀향했다. 조정은 호란(胡亂)으로 북변에 전념하고 있을 때 남해안이 근심스러워 특별히 수령을 고르던 중 공을 발탁, 웅천현감(熊川縣監)으로 임명했다. 얼마 후 호란이 일어나 왕이 피난길에 오르는데 쌍교(雙橋) 나루를 지키던 병사(兵使) 민영일(閔泳一)의 군(軍)이 군률(軍律)을 잃자 이에 격분, 혼자서 칠흑의 어둠을 뚫고 적진을 향해 돌진해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왕의 항복으로 전투가 종식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장흥위씨 22세 위정첨(魏廷瞻) - 부인 죽산안씨(죽산13세)는 11세 안극인(安克仁) -> 12세 안준민(安俊民)의 2남 1녀 중 따님
장흥위씨 22세 청금공(聽禽公) 위정훈(魏廷勳) 공의 위는 정훈(廷勳, 22世 1578 ~ 1652, 判官 德厚의 子 지장록 p121)이다. 광해(光海) 1612년(壬子) 진사에 합격했으나 조정의 혼란(昏亂)을 개탄하며 출사(出仕)를 단념했다. 그는 1624년 갑자란(甲子亂) 때 의사(義士)와 군량미(軍糧米)를 모집해 도왔으며, 1627년 정묘란(丁卯亂) 때도 호소사 김문원(號召使 金文元)의 격문에 응해 중제 정열(廷烈), 계제 정명(廷鳴)과 종형 정망(廷望), 정헌(廷獻) 등과 의병·의곡을 모집, 전쟁터에 나가 도적들을 물리치고 귀향한 바 있다. 호란(胡亂)으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오랑캐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이 때 안방준(安邦俊)의 의병모집 격문을 접하고 의병을 모아 청주까지 올라가다 5일만에 왕이 항복(降伏)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했다. 그는 청금(聽禽)이라 자호(自號)하고 종제 방어사 정철(廷喆)과 학문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조정은 공에게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를 제수하나 취임하지 않았다.
장흥위씨 위천회(魏天會) - 부인 죽산안씨(죽산14세)는 11세 안극인(安克仁) -> 12세 안준민(安俊民) -> 13세 안용흠(安用欽)의 2녀 중 큰 따님
장흥위씨 26세 존재공(存齋公) 위백규(魏伯珪) 휘 백규(伯珪, 26世, 1727∼1798 지장록 p287) 장악원정(掌樂院正) 휘 정열(諱 廷烈)의 현손(玄孫)이며, 춘곡(春谷, 또는 詠而齋公) 휘 문덕(諱 文德)의 장자(長子)로 총명(聰明)함이 절인(絶人)하였다. 처음에는 경학(經學)에 주력하다가 문사(文辭)만 하는 학문은 마음에 들지 않자 천문(天文), 지리(地理), 율역(律曆), 복서(卜筮), 병도(兵韜), 산수(算數)를 비롯해서 백공기예(百工技藝)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습득하여 이에 통달치 않은 것이 없었다. 영조중엽 증광(增廣)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한 후 동양삼국(東洋三國)의 지도(地圖)와 지지(地誌) 역사(歷史) 및 제도(制度) 산업문물(産業文物) 그리고 서양제도(西洋 諸道) 지지(地誌) 기술(記述)한 환영지(환瀛誌) 와 고금서(古琴書)를 저술하고 조선 8도의 산천, 산물, 인구, 농지 등과 정폐(政弊), 민속(民俗) 및 원근(遠近)의 험이(險易)을 다룬 정현신보(政弦新譜)를 저술하였다. 영조 말 다시 생원 복시(覆試)에 합격하신 후 사성록(思成錄) 전후편(前後篇)과 자회가(自悔歌), 농가구장(農家九章), 고금예설(古今禮說), 경서조대독사차록(經書條對讀史箚錄), 시소전기서설(詩疏傳記序說) 및 잡저(雜著) 등을 차례로 저술하여 저서가 무려 90여권을 넘었다. 정조 말 공이 68세 되던 해 호남 위유사(慰諭使)로 내려온 서영보(徐榮輔)의 천거(薦擧)로 사용(司勇)에 제수(除授)된 후 다시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소명(召命)이 거듭됨에 입궐하시어 만원상소(萬言上疏)를 올리고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허락되지 아니한 채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제수받아 500여일간 재임하였다. 그 후 노병(老病)으로 재삼(再三) 사퇴(辭退)할 것을 청했지만 그때마다 장원서별제(掌苑署別堤)와 경기전령(慶基殿令)을 내리었다. 그러나 나아가지 못하고 72세로 졸하니 관산(冠山) 죽천사(竹川祠), 다산사(茶山祠),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書院), 합천(陜川)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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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문을 접하면 옛날 어르신들의 학자적인 행적이 어찌 그리 고매한지! 벼슬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지내시면서도 폭 넓은 혜박한 지식하며 제자들이 스승 섬기는 마음 또한 존경심이 절로 일어납니다. 조선의 선비 정신은 정말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군요. 현세를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좋은 자료입니다.
장흥위씨의 큰 업적의 반은 우리 죽산안씨가 이룬 것이네요!!!
어찌 뿌리 깊은 나무가 강풍에 쉬 넘어지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