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코샤넬은 곧 스타일이다.
식사는 뭘 드세요?
"아침에는 치자꽃을, 저녁에는 장미꽃을 먹죠"
연세는 어떻게 되십니까?
"백살, 아니 그날에 따라 달라요"
소매에 달린 그 단추들은 뭡니까?
"아! 이건 오래전에 스트라빈스키가 준 선물이에요"
무슨 사연이 있는 겁니까?
"그야 물론이죠...내것이니까 당연히! 그런데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거죠?"
겉잡을 수 없는 말투와 재치로 유명한 그녀의 이름은 코코 샤넬
1883년 프랑스 소뮈르에서 태어난 가브리엘 샤넬은 12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
언니와 함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젊은 시절 먹고 살기 위해 밤무대 가수로 활동했던 그녀는
'누가 코코를 보았나요'라는 노래를카페 콩세르에서 부르던 중 기병대 장교인 에티엔 발상의 눈에 띄어
럭셔리한 귀족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사람들은 나의 옷입은 모습을 보고 비웃었지만, 그것이 바로 나의 성공비결이었다. 나는 그 누구와도 같지 않다
돈 많은 여러 연인들의 투자로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전에 파리의 캉봉 거리와 도빌에 '샤넬 모드'라는 모자 부티크를 연 샤넬.
사실 샤넬이 이렇게까지 성공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던 것 중 하나가 전쟁이다
도빌은 그 당시 파리 멋쟁이의 피난처였는데 전쟁이 사람들의 의복을 바꾸는데 중요한 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전쟁의 여파로 인해 상류사회 여성들이 긴 털목도리와 양단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샤넬이 자신이 즐겨 입던 미디 블라우스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스트레이트 스커트로 구성된 실용적인 옷을 내놓으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몸을 꽉 조이던 코르셋에 부한 드레스, 과도한 프릴장식 등 지나치게 장식이 많이 달린 당시 여성복에서 탈피
저지 소재의 짧은 스커트, 남성복에서 영감 받은 스포티한 수트, 어깨에 매는 숄더백, 앙증맞은 검정 드레스 등
걷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던 20세기 초반의 여성들에게 움직임의 자유를 안겨 줬다
보기 좋은 옷에서 입기 좋은 옷으로 의복의 흐름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덜함이 더함이다
드디어 1920년 그 유명한 샤넬룩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사랑을 받고 있는 샤넬 하우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럭셔리 라인인 트위드 재킷과 체인, 퀼팅 행드백과 까멜리아, 투톤 슈즈에
열줄짜리 모조 진주 목걸이, 얼굴을 반쯤 가리는 커다란 모자는
하나하나의 아이템 자체가 바로 군더더기를 없애고 미니멀한 라인을 강조한 샤넬룩의 상징이다
1900년대 초반 파리의 유행을 선도한 샤넬
그가 아끼던 갈색 머리를 자르고 공연을 보러 간 다음 날이면
파리에 갑자기 수백 개의 헤어살롱이 문을 열 정도였고,
1920년대 초반 여행지에서 그을린 피부톤으로 돌아온 다음 시즌
패션쇼에 선탠을 한 구릿빛 모델과 마네킹이 런웨이을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샤넬 NO.5
작은 체구에 검은 눈동자, 갈색 머리카락의 소유자
이토록 매력적인 여인의 행운 넘버는 '5'
매달 5일에 자신의 새 컬렉션 시여회를 열었던 샤넬은
1921년 '샤넬 No 5'를 출시, 100년이 지나도 향기로운 여성 향수의 탄생을 알린다
11살 연하의 연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에게서 소개받은
러시아 출신 화학자의 아들인 마흔살 아르네스토 보로에게 거액을 투자,
메이 로즈와 그라스 지방의 자스민 에센스가 혼합된 이 향수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훗날 마릴린 먼로가 어떤 옷을 입고 자는지 물어보는 기자의 질문에
"샤넬 No 5"라고 말하며
향수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받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30초에 1병씩 팔린다니 유명세는 웬만한 스타 못지 않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뭔가 해서 실패하는 편이 낫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샤넬은 수많은 역사를 만들어 내는데
1913년 벨트에 장식하기 시작한 패브릭 플라워 까멜리아(동백꽃)
1926년 리틀 블랙 드레스
1928년 트위드 수트
1955년 C자가 서로 교차한 모양의 핸드백 잠금쇠와 퀼팅 핸드백
1957년 베이지와 블랙의 투톤슈즈 등을 잉태해냈다
1년에 1억6천만 달러가 넘는 어마어마한 매출을 올리는 샤넬 하우스는
전 서계 주요도시에 130여개의 매장을 보유, 프랑스적인 세련미를 대표한다
럭셔리의 기본, 샤넬은 진정한 명품이다
슬프고 사랑 때문에 아프다면 화장을 하라, 자신을 돌봐라, 립스틱을 바르고 앞으로 나가라.
남자는 우는 여자를 혐오한다
끊임없이 나를 아끼고 자기관리를 할 줄 알았던 샤넬은
1939년 2차 전쟁을 이유로 샵 문을 닫고 잠적한 후
1954년 71세의 나이로 컴백, 끝이라고 생각했던 세간의 이목을 보기 좋게 배신하고
건재함을 과시한다
샤넬 하우스의 최고 아이템이라 할 수 있는 샤넬 수트와 2.55 퀼팅 백 등이 이때 나온 것이다
죽는 날까지 화려한 솔로로 살다 간 코코 샤넬은
누구누구의 부인이 아닌 영원한 마드모아젤로 살기를 원했고
그 결과 전설이 되었다
오래된 옷은 오래된 친구와도 같다
1971년 1월10일, 88세의 나이로 리츠에서 혼자 숨을 거둔 샤넬
하지만 '샤넬'은 죽지 않았다
디오르 회사 뉴욕 지점의 디자이너 가스통 베르틀로가 4시즌 동안 샤넬 회사의 콜렉션을 주도했고
그 후 발렌시아가 회사에서 라몬 에스파르자가
그 다음에는 샤넬과 밀접하게 일을 했던 두명의 재봉 담당자가
예의 스타일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이윽고 1983년 세계적인 아티스트, 칼 라거펠트가 샤넬 룩에 경의를 표하는 컬렉션을 디자인함으로써
샤넬 하우스를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다
자신을 꾸미는 일은 사치가 아니다
샤넬 룩(프랑스 여성 디자이너 샤넬이 발표한 카디건 슈트의상 또는 그것을 본뜬복장 ㅋㅋㅋㅎㅎㅎ)
1. 체인 : 재킷 가장자리를 가느다란 체인으로 장식했던 마드모아젤의 섬세한 아이디어에서 기인
핸드백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고, 두 손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체인을 달아 어깨에 매기도 함
2. 퀼팅 : 에띠엔느 발상과 승마를 즐김, 유명한 (마띨라쎄) 퀼트 패턴 영감 1920, 이 모티브를 깡봉 아파트 쿠션 용용, 후에 2.55백으로 재탄생
3. 진주 : 진짜, 모조, 라운드, 바로크형 진주들을 비잔틴 십자가나 이브닝 슈즈에 장식
4. 트위드 : 샤넬 트위드는 오느날의 패션 세계에 중요하 패브릭 요소
5. 저지 : 19세기 남성 속옷에 사용된 패브릭을 재킷으로 처음사용
6. 디테일 : 재킷 라인이 완벽하게 수직으로 떨어지게 하기 위해 안감 끝에 체인을 달고,
립스틱을 넣기 위해 핸드백 안에 작은 주머니를 달았음
내가 곧 스타일이다
다자인 참고서 중 '붉은 색의 베르사체 회색의 아르마니'라는 책이 있다
그렇다면 샤넬은?
블랙이다
1900년대 초 블랙은 사람이 죽었을 때나 입는 옷이라 여겼던 당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고
블랙 드레스를 선보인 샤넬
혹자는 수녀원의 검은 복장에서 블랙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또 다른 혹자는 지독하게 사랑하던 연인이 잊혀지는 것이 싫어
사람들이 블랙을 입고 돌아다니게 만들겠다는 그녀의 집념이 블랙을 끄집어 냈다고 한다
사정이 어찌됐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은 블랙이 우울함을 깨고
그 어떤 색보다 비밀스럽고 우아한 여성의 이미지를 만드는 일등공신이 됐고
그 중심에는 샤넬이 있다는 것이다
매년 F/W 시즌이 되면 귀신같이 찾아오는 블랙 붐의 효시는 샤넬이다
그리고 샤넬은 전설이 되었다
기본정보 |
본명 | Gabrielle Bonheur Chanel | |
별명 | 코코 | |
특이사항 | 제2차 세계대전 중 암호명 '모델의 모자'로 나치스 첩보원 활동 | |
경력 |
경력기간 | 경력내역 | |||||
1974 | ~ | 파리 부티크 개점 | ||||
1955 | ~ | C자가 서로 교차한 모양 라벨 고안 | ||||
1921 | ~ | 향수 샤넬 넘버 5 출시 | ||||
1915 | ~ | 여성복 디자이너로 패션계 진출 | ||||
1910 | ~ | 파리 여성 모자점 개점 | ||||
지난 20세기 전반에 걸쳐 세계 패션의 흐름을 주도한 신화적인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창조해낸' 샤넬 스타일'. 몸을 꽉 조이던 코르 색과 무거워 보이던 가식적인 헤어스타일 대신, 샤넬의 대표적인 아이템은 핸드백이다. 처음으로 여성을 손으로 드는 불편함에서 해방시킨 샤넬의 숄더 백의 포인트는 바로 어깨끈, 저지 소재의 짧은 스커트, 기존의 남성복에서 영감을 얻은 스포티한 수트 등은 걷는 방식이나 움직이는 방식에 구애를 받던 20세기 초반의 여성들에게 새로운 자유를 부여했다. 그녀가 장식이 많은 옷 자체를 싫어했듯이, 당시 여성들에게 그런 스타일은 일종의 관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녀 고유의 복잡하지 않은 스타일의 져지 드레스, 승마 자켓, 스웨터 그리고 바지는 여성 해방을 위한 일종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
△20세기 여성에게 자유를 선사
전통과 전통에 기초한 창조정신으로 한 세기를 풍미한 샤넬. 20세기 여성에게 자유를 선사한 수많은 아이템은 바로 누구보다도 여성을 이해하고 사랑한 코코 샤넬의 정신의 산물이다. 가브리엘 샤넬의 야망은 자유를 추구하는 여성, 사랑하고 있는 여성, 사업하고 있는 여성, 끊임없이 움직이며, 관습을 타파하고 틀에 박힌 일들을 무시하는 그런 여성들의 옷을 만드는 것이었다.
△적극적이고 화려했던 생활
-엄밀히 따지면 여성복에 활동성을 가미하고 혁신을 회친 디자이너로 샤넬이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녀 이전에도 답답하고 관습적인 옷에 염증을 느끼고 좀더 자유스런 여성복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시도는 많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녀의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 받고 있고, 브랜드 못지 않게 그녀의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 받고 있고, 브랜드 못지 않게 그녀 자신이 유명한 인물이 된 이유는 그녀의 적극적이고 화려했던 일 밖의 사생활과도 무관하지 않다.
△가브리엘 샤넬-코코 샤넬
샤넬의 역사는 '가브리엘 샤넬'로부터 시작된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세기의 연인들에 둘러싸여 독립적이면서 창조적인 삶을 누리며 20세기 여성에게 자유를 선사한 선구자로 평가된다. 12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고아원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후에 그녀의 창작 세계에서 화려한 컬러를 선호하게 된 기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70세가 넘어서도 숍에 나가 피팅까지 관여할 정도로 대단했던 일에 대한 열정, 러시아와 영국, 미국을 넘나들며 활동하던 성공을 향한 의지, 어려움에 강하게 대처하는 용기도 어린 시절에 형성된 것이고...,1971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홀로 세상을 떠날 때가지 그녀의 삶은 영화처럼 드라마틱했다. 낮에는 의상실 견습공으로, 밤에는 클럽에서 가수로 전전하던 스무 살의 카브리엘은 20대 중반 이후 부유하고 매력적인 여러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고 헤어짐을 반복하며, 자라온 환경과는 전혀 다른 상류사회를 체험하게 되었고 당시 여성들은 거추장스런 드레스 안에서 제대로 거동도 못할 때 경마장에서 심플한 트피스나 승마 바지를 입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녀 자신이 '샤넬의 모델' 이었고 '샤넬의 홍보실장' 이었으며 '걸어 다니는 카탈로그' 이었다. 그 시대엔 코코 샤넬처럼 적극적인 디자이너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명성을 날리던 연인들에 둘러싸인 채 화려한 삶을 누리며 그들이 지닌 권력과 부귀를 즐기고 끊임없이 남성의 특권에 도전한 샤넬이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남성을 이해했고 자신만이 가진 여성다운 매력을 한치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심플한 의상에 섬세한 아름다움을 첨가하는 자신의 의상 철학을 실생활에도 똑같이 적용했고 이질적이지 않은 자연스런 샤넬 스타일을 창조했다.
△하나의 스타일로서 전환
-샤넬 룩이 '샤넬 스타일'로 자리잡고 한 세기를 성공적으로 대표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 시대에 사물에 대한 견해를 크게 변화시켰던 혁신적인 모더니스트 이론과 샤넬 스타일 사이의 유사성이다. '덜함이 더함이다. Less is More'라는 이론과 샤넬의 심플한 디자인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고 그녀의 디자인을 보는 사람들의 호응도 높아졌다.
둘째, 그녀의 진보적 태도이다. 샤넬은 디자이너라는 보잘 것 없던 지위에 정면 도전한 선구자적 인물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스스로 모델이 되어 자신의 욕구와 침착한 논리를 믹스한 디자인을 전개하면서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인상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샤넬은 고객과 더불어 그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 정치가, 지식인, 사회적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대를 이끌었다.
|